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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100)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5·10選擧로 制憲國會 구성

글 : 손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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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협상 일정은 1948년 4월 30일로 끝나고 5월 1일에는 평양역 광장에서 메이데이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월 8일에 창건한 북한 인민군의 사열을 겸한 대대적인 행사였다.
 
  5월 2일에는 대동강 하류 쑥섬에서 소수의 남북지도자협의회의 참가자만이 초청받은 야외 회합이 있었다. 뒷날 북한은 이때의 회합을 기념하여 쑥섬을 ‘통일전선 사적지’로 조성했다.
 
  김구는 해주 텃골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하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5월 5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역사적인 5·10선거에는 정원 200명에 948명이 출마하여 4.7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서울은 정원 10명에 83명이 출마하여 경쟁률이 8.3대 1로 가장 높았다.
 
  남로당은 선거저지를 위하여 남한 전역에 걸쳐서 인명손상만 1,218명에 이르는 격렬한 폭력투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남로당의 선거저지운동과 남북협상파의 선거보이콧 속에서도 투표율은 90%가 넘었고, 유효투표율이 96.4%나 되었다.
 
  제주도의 2개 선거구를 제외한 전 선거구의 당선자 198명의 소속 정파는 무소속 85명, 독촉국민회 55명, 한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조선민족청년단 6명 순으로 집계되었으나, 실제로 제헌국회 구성은 이승만 직계 세력과 한민당과 무소속이 정립하는 판세로 출범했다.
 

  1. 金九와 金奎植의 귀환
 
  1948년 4월 30일 밤에 모란봉극장에서 진행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 채택과 서명을 끝으로 남북협상의 일정은 모두 끝나고 5월 1일에는 메이데이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는 여느 때와 같이 노동자들의 축하행사로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2월 8일에 창건한 인민군의 사열을 포함한 대규모의 행사였다.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이 행사에는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남쪽 대표들도 모두 참석하여 연단에서 행사를 지켜보았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행진은 트럭 위에서 저마다의 직업을 나타내는 동작을 하면서 지나갔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검정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트럭은 소련제였고, 남한에서는 별로 보지 못한 피켓이 유난히 많았다.
 
 
  메이데이 行事에서 人民軍의 사열행진
 
   노동자와 농민들의 행렬이 끝난 다음 인민군 부대의 사열행진이 있었다. 인민군 총사령관 최용건(崔庸健)이 맨 앞에서 붉은 말을 타고 선도했고, 참모총장 강건(姜健)이 사열행사를 진행했다. 다발총으로 무장한 보병부대에 뒤이어 혁명자유가족학원 학생대열이 지나가고, 각종 포와 장갑차 등 중장비가 그 뒤를 따랐다. 쭉 뻗은 포신이 달린 각종 포는 소련제 트럭이 끌었고, 육중한 장갑차 수십 대가 두세 줄로 열을 지어 후미를 장식했다. 사열대의 김일성은 이 군부대행렬이 지나갈 때에 앞으로 나가 혼자서 손을 흔들고 박수를 치기도 했다. 김구는 입을 꽉 다문 채 이 위협적인 시위를 지켜보고 있었다.1) 이날의 행사에는 슈티코프(Trentii F. Shtykov) 등 소련군 고위간부들도 참석했는데, 병약한 김규식은 슈티코프와 인사만 나누고 비 때문에 일찍 혼자 숙소로 돌아왔다.2)
 
  남북협상을 취재하러 평양에 갔던 《조선일보(朝鮮日報)》 기자 최성복(崔成福)은 이날의 행사에 대한 인상기를 다음과 같이 썼다.
 
  “이날 행렬은 생전 처음 보는 가관이었다. 인민군의 위세란 당당하였고, 각계각층 하여튼 이곳 사회층으로 빠진 곳이란 없어 보였다. 특히 중국 사람들이 농민은 곡괭이를 메고, 꾸냥(姑娘: 처녀)들은 청복(靑服)을 입고 모택동(毛澤東)씨 초상을 받들고 사열대를 지나가며 ‘김일성 장군 만쩨이 만쩨이’ 하는 모양은 인상적이었다. 양 김씨와 요인들도 전원이 출석하였는데, 내 옆에 서서 이 행렬이 다 지나기까지 네 시간 동안을 비를 맞으며 바라보는 요인 모씨는 ‘이곳 사회는 아예 새 사람 새 세대로 일신했군 그래. 지나가는 얼굴을 보아하니 죄다 20세 전후인 청소년이요 장년층이래야 농민과 노동자, 그 역시 새 정신을 불어넣은 새 사람들이 상하일속(上下一束)으로 그 강력한 조직체를 가지고 절대 옳다는 길로 막 밀고 나가니 좋건 언짢건 어떠한 건설이 하나 될 수밖에. 이런 씩씩한 사회적 힘이란 남조선에서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걸 …’ 하고 입을 쩝쩝 다시었다. …”3)
 
  모택동의 초상화를 들고 행진한 중국 사람들이란 평양지방에 거주하는 화교들이었을 것이다. 화교들까지 메이데이 행사에 동원했던 모양이다. 대회에는 30만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어 4월 25일에 있었던 남북연석회의 경축 평양시민대회 때보다도 규모가 컸다. 행사는 네 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金枓奉은 金九를 자기 옆자리에 앉히라고
 
  그런데 이날의 행사준비 과정에서 김구의 자리배정 문제를 두고 북한당국자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진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4월 26일에 열린 북로당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김두봉(金枓奉)은 인민군 사열 때에 김구를 주석단의 자기 옆자리로 초대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 인민군 열병식에 소련 사람들이 참석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김두봉은 북한 헌법 승인을 위해 개최되는 북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에 소련대표가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도 피력했다. 소련파의 실력자인 북로당 조직부장 허가이(許哥而)로부터 이러한 보고를 받은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는 이를 단호히 배격했다. 레베데프는 그의 《일기》에 이러한 사실을 기술하면서 “김두봉의 노선을 면밀히 검토한다. 또 누가 그런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가?”라고 적어 놓았다. 이날 밤에 슈티코프는 레베데프와의 전화통화에서 북한 인사들이 김구와 김규식 앞에서 굽실거리지 말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있어서 흥미롭다.4)
 
  레베데프는 김두봉이 남쪽 대표들에게 연일 만찬을 베푸는 것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김일성에게 “왜 김두봉이 남쪽 대표들에게 자주 만찬을 베푸는가? 5월 2일, 3일, 4일에 약속이 잡혀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고 《일기》에 적어 놓았다.5) 이러한 기술은 레베데프가 얼마나 사소한 일에까지 주의 깊게 남북협상에 개입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이 무렵 김두봉으로 대표되는 연안파(延安派)의 북한 권력 내부에서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말해 주는 상징적인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김두봉은 결국 1958년 3월에 반김일성 음모사건으로 숙청되었다.
 
 
  수행비서도 모르게 어울린 쑥섬회동
 
쑥섬의 야외 회합을 기념하여 세워진 ‘통일전선탑’의 앞면과 뒷면.
  이튿날은 일요일이었다. 김구는 안신호(安信浩)와 함께 강량욱(康良煜) 목사와 홍기주(洪箕疇) 목사의 안내로 장대재〔章臺峴〕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다. 김규식도 동행했다. 평양 지방 한국교회의 요람인 장대재교회는 상수리 특별호텔에서 1km쯤 떨어진 언덕 위에 있었다. 예배에 나온 사람들은 200명가량 되었다. 북쪽에서는 김규식이 기독교인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김구가 기독교인인 줄은 몰랐다고 했다.6)
 
  그런데 김일성을 비롯한 북로당 지도부는 이날 지도자협의회에 참석했던 남북요인들만의 야외회동을 준비했다. 회동 장소는 대동강 하류에 있는 쑥섬이었다.
 
  이날 회동에는 남쪽에서 간 우익의 김구, 김규식, 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홍명희(洪命憙), 김붕준(金朋濬), 이극로(李克魯), 엄항섭(嚴恒燮)과 좌익의 박헌영(朴憲永), 허헌(許憲), 백남운(白南雲), 북쪽의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주영하(朱寧夏), 그리고 강량욱, 홍기주 두 목사와 북로당의 대남연락부장 임해(任海)와 서울에서 활동하는 정치공작원 성시백(成始伯)이 참석했다. 이 회동에는 남쪽 요인들의 수행비서들도 참석시키지 않았다. 김구와 김규식은 강량욱, 홍기주 두 목사와 함께 대동강변에서 나룻배를 타고 일행보다 30분쯤 늦게 쑥섬에 도착했다.
 
  쑥섬회동은 남북연석회의와 지도자협의회의 성과를 재확인하는 경축연회 겸 친목도모 자리였다. 정오쯤부터 오후 2시 무렵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평양의 역사와 유적에 관한 이야기, 김구 등의 평양 나들이 소감, 남한 형편에 대한 이야기 등이 이어졌다. 4월 30일 밤에 서명한 「공동성명서」의 의의가 거듭 강조되고, 김구와 김규식이 제기한 송전과 송수의 계속, 조만식(曺晩植)의 월남, 안중근 유해 봉환 등의 문제도 다시 거론되었다. 이어 어죽 잔치가 벌어지고, 회식이 끝나자 낚시와 나룻배 타기 등이 오후 4시 넘어까지 계속되었다.
 
  김일성은 뒷날 통일전선 문제를 언급할 때면 좋은 사례로 쑥섬회동을 들었다고 한다. 북한은 1980년대 후반에 이때의 쑥섬회동을 기념하여 이곳에 ‘통일전선 사적지’를 조성하고 ‘통일전선탑’을 세웠다.7)
 
  그런데 ‘통일전선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참가자들의 명단이다. ‘탑’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지도하신 쑥섬협의회 참가 대표’라고 하여 9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는데, 북쪽 대표로는 북조선로동당의 김책(金策) 한 사람 이름만 맨 앞에 새겨져 있고, 이어 한국독립당의 김구, 조소앙, 엄항섭, 조완구,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과 최동오, 민주독립당의 홍명희, 근로인민당의 백남운 차례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맨 끝에 북조선인민위원회 서기 김종항과 남조선신문기자단 대표 정진석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박헌영 등 다른 참가자들의 이름이 없는 것은 뒷날 북한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숙청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韓獨黨 당원들 석방시킬 것 요구해
 
  남북협상을 위하여 북행했던 인사들은 5월 4일에 평양을 출발하여 귀환길에 올랐는데, 김구와 김규식은 떠나 오기 전날인 5월 3일 오후에 각각 김일성과 회담했다. 북로당 지도부는 처음에는 김일성과 김구가 오전에 만나 회담을 하고 오찬을 함께 한 뒤 오후에 김일성과 김규식이 회담하기로 계획했다가 북쪽의 관심이 김구에게 기운 듯한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오후에 따로따로 회견하는 것으로 조정했다고 한다.8)
 
  김구와 김일성의 회담은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김일성 사무실에서 오후 3시쯤에 시작하여 1시간30분 동안 계속되었다.9) 이때 두 김의 회담 내용에 대해서는 두가지 중요한 기록이 있다. 하나는《레베데프 일기》이고 또 하나는 북로당의 회담 기록을 토대로 한 전 북로당 고위당료 박병엽(朴炳燁)의 증언이다.
 
  요점만 적어 놓은 레베데프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김구는 먼저 감옥에 있는 한국독립당 당원들을 석방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한독당 당원이라서 체포한 것이 아니라 테러분자들이기 때문에 체포했다고 대답했다. 김구는 테러분자들이라면 석방시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김구는 조만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김구는 “… 남조선 사람들에게 면담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나에게 선물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조만식을 자기에게 내어 줄 것을 요망했다. 김구가 중요하게 거론한 것은 송전 계속 문제였다.
 
  레베데프는 김구가 송전문제에 대하여 “흥미로운 사실을 이야기했다”면서 김구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북조선에 전기료를 정확하게 지불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미국인들은 돈을 어디에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당신들은 (남쪽에서) 전기료를 지불하지 않고 있다고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자주 보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남조선에서 소란을 피울 수 있다. …”
 
  《레베데프 일기》로 미루어 보면 김구가 송전 송수의 계속 문제나 조만식의 월남 문제 등을 김일성에게 가장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이날의 회담에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레베데프는 같은 날의 《일기》에 김일성에게 제기할 문제의 하나로 “남조선으로 송전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성명을 발표한다”라고 단정적으로 써 놓았다.10)
 
 
  金九, 金日成에게 南韓 공산주의자 맹비난
 
  김구는 김일성에게 남한 공산주의자들을 맹렬히 비난하는 발언을 했다. 북조선 공산주의자들과는 상의할 수 있으나 남조선 공산주의자들과는 의논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김구는 “나는 늙은이다. 나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도무지 예의가 없다. 그들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논쟁만 한다”라고 질타했다. 김구는 김일성에게 원칙적인 문제를 해결해야지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고 전해 달라고 당부했다. 원칙적인 문제라면 그들과 대화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김구의 요구에 대해 김일성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레베데프 일기》에 씌어 있지 않다.
 
  끝으로, 김구는 자신의 장래 활동과 관련하여 “만일 미국인들이 나를 탄압한다면 북조선에서 나에게 정치적 피난처를 제공해 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다. 김일성은 긍정적으로 대답했다.11)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구와 김일성의 회담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김일성은 먼저 남북연석회의와 지도자협의회를 성공적으로 매듭지을 수 있었던 데에는 김구의 지도적 역할이 컸음을 감사한다고 말하고, “남조선으로 내려가시면 미군정부와 이승만 세력이 탄압하지 않을까 우려된다”면서 “신변의 염려가 있을 때에는 어느 때라도 북으로 오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김구는 “서울에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북에 와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남에서 단독선거를 반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북에서도 단독정부를 세워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김구는 김일성에게 “동족 간에 피를 흘리는 내란이 일어나서는 결코 안 된다. 동족 간에 싸움을 통해 통일을 이루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라고 거듭 강조하고 확약을 받았다고 한다. 김구는 남로당의 미군정부에 대한 투쟁일변도의 행동방침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 밖에 송전과 연백평야에 대한 송수의 계속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과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에도 힘써 줄 것을 거듭 요청하고, 조만식의 서울행 문제도 소련군쪽과 적극적으로 협의하여 원만히 해결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일성이 여러 차례 김구의 신변을 염려하자 김구는 “내가 남쪽으로 돌아가서 정말 활동하기 어려우면 북으로 올 테니까 그때는 과수원이나 하나 가꾸면서 여생을 보내겠다” 하고 농담 비슷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도 했다.12)
 
  김일성은 김구와의 회담에 이어 오후 6시쯤부터 40분가량 김규식을 만났다. 김규식과 김일성의 회담에서는 사적인 대화는 없었다. 김규식은 내란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 이북에서 단독정부가 들어서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 북쪽이 미국을 자극하는 반미행사를 자제하고 남로당도 반미투쟁 일변도에서 벗어나도록 북쪽이 영향력을 행사해 주기 바란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 김규식은 또 김일성에게 자신이 요구한 ‘남북협상 5원칙’을 북쪽이 계속 유념해 줄 것을 강조했다. 김규식은 김구와 마찬가지로 송전과 송수의 계속 문제, 조만식 문제의 해결도 거듭 촉구했다.13)
 
  김일성은 김규식을 만난 뒤 계속하여 조소앙을 만났다.14)
 
 
  아버지 산소에 省墓도 못하고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하여 북행했던 남쪽 대표들은 5월 4일 아침에 평양역에서 출발하는 특별열차를 타고 38선까지 가기로 되었다. 그런데 남쪽 대표들 가운데에서 북한에 남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민주독립당 위원장 홍명희, 건민회 위원장 이극로, 근로인민당 부위원장 백남운 및 이영(李英), 민족자주연맹 상무위원 최동오(崔東旿), 민주한독당 상무위원 김일청(金一靑), 사회민주당 간부 장권(張權), 남조선신문기자단의 정진석 등 잔류 인사는 70여명에 이르렀다.15) 레베데프는 백남운, 이극로, 홍명희 세 사람을 거명하면서 “이들을 모두 대학(김일성종합대학)에서 일하게 하면 어떨까?”라고 《일기》에 적어 놓았다.16)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잔류한 데에는 북한쪽의 권유 공작도 있었다. 효성이 남다른 김구는 1919년에 중국으로 망명한 이래로 성묘 한 번 하지 못한 해주 텃골〔基洞〕의 아버지 묘소를 찾아 불효의 한을 풀고 싶었다. 김두봉을 통하여 김구의 뜻을 전해 들은 김일성은 모든 편의를 제공하겠다면서 은근히 평양에 남기를 권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두봉은 금강산의 요양 시설을 소개하면서 잔류를 권했다. 그러나 조완구, 엄항섭 등 한독당 인사들과 측근들이 한사코 반대하여 김구는 선영 성묘를 단념했다.17)
 
 
  “美國人들은 朝鮮의 內政에 광범위하게 간섭해 …”
 
  김구와 김규식의 귀환계획은 5월 3일 한밤중에 갑자기 변경되었다. 남북연석회의를 방해하기 위하여 남한에서 올라간 반공청년들이 서울로 귀환하는 특별열차를 폭파하려는 계획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북로당은 한밤중에 김구와 김규식의 비서를 불러 김구와 김규식 일행은 비밀히 자동차로 출발하기로 계획이 변경되었음을 통보했다.18)
 
  《레베데프 일기》에 따르면 김구는 출발에 앞서 간단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김구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그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는 ‘남조선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북조선에서는 이미 기초가 많이 건설되었고 또 건설되고 있으나 남조선에서는 아무것도 건설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이 있었다고 적어 놓았다.
 
  질문 : 국가체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변 : 미래의 국가는 민족자주에 기초해야 하고, 국가는 반드시 인민들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국가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질문 : 미국인들은 남조선의 내정에 광범위하게 간섭하는가?
 
  답변 : 미국인들은 남조선에서 조선의 내정에 광범위하게 간섭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이 인민들의 불만을 자아내고 있다.
 
  질문 : 서울의 라디오 방송은 남조선에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자유로운 분위기가 조성된 것처럼 보도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인가?
 
  답변 : 남조선에는 선거를 실시하기 위한 어떠한 자유로운 분위기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 …19)
 
  《레베데프 일기》의 이러한 기술은 주영하의 보고에 따른 것인데, 주영하가 얼마나 정확하게 보고했는지 알 수 없다.
 
 
  洪命憙는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잔류했다고
 
귀로에 황해도 사리원의 정방산성에서 도시락을 먹는 김구와 김규식(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와 두번째).
  김구와 김규식 일행은 오전 10시쯤에 북한쪽이 내어준 자동차로 평양을 출발했다. 김구가 38선까지 타고 갔던 뷰익 38년도형 승용차는 북한땅에서 한 번도 굴려 보지 못한 채 다시 특별열차에 실렸다. 상수리 특별호텔에는 김두봉과 안신호, 그리고 남북협상의 진행을 맡았던 주영하와 임해가 나와 배웅했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김구는 김신(金信)·선우진(鮮宇鎭)과 한 차에 타고, 다른 한 차에는 김규식이 송남헌(宋南憲)·김영휘(金永暉)와 함께 탔다. 경호를 맡은 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성 부국장 이주봉(李柱鳳)과 북조선인민전선 심승섭(沈升燮)이라는 사람이 38선까지 안내했다. 나머지 대표들은 예정대로 특별열차로 출발했다.
 
  한참 가다가 김구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벽초(碧初 : 홍명희의 호)가 며칠 전부터 잠을 통 못 이루고 안색까지 좋지 않아 무슨 근심이 있느냐고 묻기도 했는데, 고심을 하더니만 끝내 안 오는 모양이야.”20)
 
  김구는 믿고 의지했던 홍명희가 평양에 잔류한 것이 못내 섭섭했던 것이다. 홍명희는 1947년에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던 장남인 한글학자 홍기문(洪起文)의 권유로 잔류했고, 넉달 뒤에 수립된 북한정권의 초대내각에서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같이 잔류한 백남운은 교육상, 김원봉은 국가검열상, 이극로는 무임소상, 전평(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위원장 허성택(許成澤)은 노동상에 임명되었다.21)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에 사리원 못미처에 있는 정방산성(正方山城)에 도착하여 지프에 싣고 온 도시락을 풀밭에 펴 놓고 먹었다. 오후 5시쯤에 남천(南川)에 도착한 일행은 그곳에서 특별열차편으로 도착한 한독당쪽 32명, 민족자주연맹쪽 25명과 합류했다. 김구 일행은 평양에 갈 때에 들었던 여관에서 다시 하룻밤 묵은 다음 이튿날 오전 11시쯤에 여현(礪峴)에 도착했다. 38선 팻말 앞에는 30여명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고뇌와 좌절감에 찬 17일 동안의 김구의 북한 여행은 끝났다.
 
 
  金九와 金奎植, “동족상잔 없을 것”이라고 共同聲明
 
  4월 5일 저녁 8시쯤에 일행 60여명과 함께 서울에 도착한 김구와 김규식은 이튿날 공동명의로 남북협상에 다녀온 데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은 평양에서 미리 작성해 가지고 온 것이었다.
 
  공동성명은 양 김의 본심과는 달리 남북협상의 성과에 대하여 자부심에 찬 문투로 되어 있었다. 공동성명은 북한 당국자는 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않겠다고 확언했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두 사람의 성명은 이어 4월 30일에 채택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의 내용을 남북협상의 큰 성과라고 강조했다.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들의 공동성명서는 앞으로 양군 철퇴 후 전국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통일적 임시정부를 소집하고, 전국 총선거를 거쳐 헌법을 제정하고 정식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우리 민족통일의 기초를 전정(奠定)할 수 있게 하였으며,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였으며, 외력의 간섭만 없으면 우리도 평화로운 국가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여하한 험악한 정세에 빠지더라도 공동성명서에 명시된 바와 같이 동족상잔에 빠지지 아니할 것을 확언한다. …”
 
  동족상잔에 빠지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고 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의 규정은 앞에서 보았듯이 슈티코프의 직접 지시에 따른 것이었는데, 김구와 김규식이 그러한 내막을 몰랐던 것은 어쩔 수 없었더라도, 아마 자신들도 확신하지 못했을 「공동성명」의 문면을 자신들의 성명에 그대로 반복한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두 사람의 성명은 방북의 구체적인 성과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우리는 행동으로서만 우리 민족은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사실로도 우리 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증명하였다. 한 예를 들어 말하면 첫째 북조선 당국자가 남조선 미당국자와의 분규로 인하여 남조선에 대하여 송전을 최단기간 내에 정지하겠다고 남조선 신문기자에게 언명한 바 있었고 둘째 연백(延白) 등 수개처의 저수지 개방문제도 원활히 하지 아니한 일이 있었지마는, 이번 우리의 협상을 통하여 그것이 다 잘 해결될 것이다. 앞으로 북조선 당국자는 단전도 하지 아니하며 저수지도 원활히 개방할 것을 쾌락하였다. 그리고 조만식 선생과 동반하여 남행하겠다는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북조선 당국자는 이번에 실행시킬 수는 없으나 미구에 그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22)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이 자랑스럽게 밝힌 북한 당국자의 세 가지 약속이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나기까지는 긴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과도정부정무회의가 南北협상 비판 성명
 
  남조선과도정부 정무회의는 5월 7일에 평양에서 발표된 「남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와 김구와 김규식의 공동성명을 싸잡아 반박하는 긴 성명을 발표했다.
 
  정무회의의 성명은 남북협상에 참가한 남조선의 정객들은 “결국 공산주의적 세계제패 정책을 강행하는 소련의 군문에 항복하였고 그 대변인들인 북조선의 공산도배들과 야합하여 조선민족 완전독립에의 총선거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려는 결론과 행동을 취하였다”고 말하고, “정치적 야망에 불타는 남조선의 불평부득의 정객들”이 “북조선의 공산당이 그 순서 및 계획의 전부를 전제적(專制的)으로 결정한 정치회담에 달려가서 결정한 것”은 다음의 몇 가지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1) 3상결정을 조선 독립의 유일 헌장으로 재확인하였다. 조선 민족의 총의로서 사투하는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폭거에 나갔다. 반탁진영에 종사하던 정객들로서 자가당착의 죄과를 범함에는 그렇게도 양심이 무감인가.
 
  (2) 유럽과 아시아에서 공산독재의 세계정책을 강행하는 소련을 구가하고 세계평화와 인류의 자유를 보호하려는 미국을 저주하였다. … 그러나 민중은 잘 알고 있다. 소련은 조선을 위성국가 내지 연방화하려는 야욕을 미소공동위원회에서의 태도 및 국제연합에서의 행동으로써 증명하였다. …
 
  (3) 단선 단정이란 구실하에 가능 지역의 총선을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5월 10일의 총선거를 단독선거라고 하는 자들은 국제연합 결정서 내용을 고의로 왜곡하거나 망각한 건망증에 걸린 자들의 괴변둔사이다. 이 총선거야말로 전조선을 정통적으로 대표할 주권국가를 구성할 비상적 정치조치이다.
 
  (4) 미소 양 점령군이 철퇴한 뒤 자율적으로 남북을 통일한 정부를 수립함에 합의를 보았다는 것이다. 언정이순(言正理順)한 상식적 형식론이다. … 북조선에는 30만의 무장 공산군을 배경으로 한 공산독재제도가 설정되어 있으므로 양 점령군의 철퇴 직후 24시간 내에 전조선에 적색정권을 수립할 자신이 만만한 까닭이다.
 
  (5) 송전 및 수리(水利) 문제에 관한 원만 해결을 보았다고 그들은 과시한다. 아무리 괴뢰정권의 대표자들이어든 남조선의 개개인들에게 공적 사항에 대해여 언질을 주었을까. 상식을 초월한 선전이거나 공산당원들은 참말과 거짓말을 임기응변하여 섞어 쓰는 기술을 가진 인간들이란 사실을 모르는 수작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 성명이 주로 김구를 겨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군정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성명서는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상기의 남북회담 결정을 종합 비판하건대, 남조선의 정객들은 소련의 모략적 설계를 충실히 집행하는 남북조선의 공산당의 포로됨이 분명하다. … 진정한 지도자란 민족을 생(生)과 광명의 길로 지표(指標)할 수 있는 이론과 실천력을 가진 자를 칭함이다. 과거의 명성과 관록으로만 그 품위를 유지 못하는 것이다.
 
  여러분 동포들! 정치적 탁류와 폭풍우에 헤매이며 시달리면서도 정치적 잡음에 여러분들의 총명과 판단이 흔들리지 말고 오로지 애국심에 발작되어서 5월 10일에 닥쳐 오는 국운을 좌우할 총선거에 총진군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23)
 
 
  2. 死傷者 1,218명 낸 ‘2·7救國鬪爭’
 
  독립정부 수립의 기반이 될 총선거일이 다가오자 일반국민의 관심은 총선거에 집중되었다. 좌익정파들과 남북협상파들의 공식적인 선거보이콧에도 불구하고 4월 16일에 마감한 국회의원 입후보자 등록에는 정원 200명에 무려 948명이 등록하여 4.7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정당공천제는 없고 선거구 유권자 200명의 지지서명서만 받아서 선거구의 국회선거위원회에 제출하면 되었다. 이승만의 의견에 따라 모두 개인자격으로 입후보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235명을 비롯하여 한국민주당 91명, 이청천(李靑天)의 대동청년단 87명, 이범석(李範奭)의 조선민족청년단 20명, 대한노동총연맹 10명 등으로 후보자를 낸 정당과 사회단체는 43개에 이르렀고, 무소속이 417명으로서 절반가량 되었다. 무소속이 이렇게 많은 것은 한독당과 민족자주연맹, 그리고 중도좌파 등 소속정당이나 단체의 공식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입후보한 인사들의 경우가 많았다.
 
 
  女性입후보자는 한사람도 당선되지 못해
 
후보자들이 각자 만들어 세운 5월10일 국회의원 총선거 포스터.
  5·10선거에서 시행된 선거법은 완벽한 평등 보통선거가 제도화된 가장 민주적인 선거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현실은 선거법의 이상과는 간극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그 많은 입후보자 가운데 여성입후보자는 18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24) 여성입후보자와 관련하여 이승만은 4월 22일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완전한 민주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전민족의 반수가 되는 부녀 해방이 또한 필요한 것이다. 이번 총선거에 다수 부녀를 선거해서 남자와 대등을 만든다는 것은 지나친 말이므로 누구나 생각도 말아야 될 것이거니와 상당한 인망을 가지고 입후보한 구역에서는 동등한 대우를 표시해서 부녀의원을 국회에 참가케 하는 것이 건국에 도움이 많이 될 것이요, 또 세인의 이목에 우리가 자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25)
 
  그러나 5·10선거에서 당선된 여성입후보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제헌국회 2년 동안 여성의원은 1949년 1월 13일에 실시된 경북 안동군(을)의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임영신(任永信)뿐이었다.26) 민주의원의 대표로 미국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임영신은 초대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이때의 보궐선거에는 수도관구경찰청장과 초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장택상(張澤相)도 출마했는데, 임영신(7,263표)은 장택상(5,488표)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경쟁률이 가장 높은 지역은 서울이었다. 정원 10명에 내로라하는 인물 83명이 출마하여 8.3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그런가 하면 무투표 당선자도 13명이나 있었다. 서울 동대문(갑)의 이승만을 비롯하여 경기도 광주군의 신익희(申翼熙), 가평군의 홍익표(洪翼杓), 전북 정읍군(갑)의 나용균(羅容均), 전남 광주시의 정광호(鄭光好), 영암군의 김준연(金俊淵), 영광군의 조영규(曺泳珪), 경북 영양군의 조헌영(趙憲泳), 영덕군의 오택렬(吳宅烈), 영천군(갑)의 정도영(鄭島榮), 영천군(을)의 이범교(李範敎), 김천군(을)의 이병관(李炳瓘)이 그들이다.27) 그것은 이 시기의 한국 정치풍토의 특성인 명망가 중심 정치의 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망가 중심 정치의 실상을 보여주는 또하나의 특성은 후보자들의 학력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었다. 문맹률이 70% 이상인 상황28)에서 입후보자 가운데 대학졸업자와 중퇴자, 전문학교 졸업자가 38%나 되었다.29)
 
  문맹의 유권자를 위하여 투표지에는 후보자의 이름 위에 숫자 대신에 막대기 기호가 표기되었다.
 
 
  全美軍에도 특별경계령 내려져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남로당의 ‘구국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연석회의의 결의에 따라 결성된 남조선단선 반대투쟁위원회의 활동이 시작된 데다가 남로당 선전선행대의 무장투쟁이 더욱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로당의 공세에 대비하여 경찰은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조병옥(趙炳玉) 경무부장은 5월 3일에 경무부 안에 비상경비총사령부를 두고 각 관구 경찰청에도 비상사령부를 두어 경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했다.30) 이에 따라 수도관구경찰청도 장택상을 총사령으로 하는 5·10비상경비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특별경비태세에 들어갔다.31) 조병옥은 국민들이 안심하고 투표에 참가할 수 있도록 5월 7일에 다시 투표 당일의 치안 대책을 설명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동리는 향보단의 자위력으로 방위하고, 동리와 투표소 사이의 길 위험 지점에는 경찰과 향보단이 합류하여 경호하고, 투표소 부근에는 경찰과 향보단의 혼성팀이 배치되어 방위하고, 경찰청의 기동경찰대는 소관 경찰 본서를 지키고, 각 경찰서의 신편 기동부대는 관할 지서를 유동 시찰하여 경비한다는 것이었다.32)
 
  또한 하지 장군도 4월 29일에 이어 5월 8일에 또다시 전 주한 미군에 특별경계령을 내려 5월 10일의 선거에 대한 남로당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명령했다. 특별경계령의 내용은 5월 10일에 대부분의 미국인은 무기를 휴대해야 하고, 순찰대는 총기로 무장해야 하며, 그 밖의 군대는 비상사태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 군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420명의 미국 민간인 직원들도 가두를 보행하고 투표장 부근을 순행하는 것이었다.33)
 
  이러한 조치와 아울러 군정장관 딘(William F. Dean)은 4월 28일부의 행정명령 제21호로 선거기간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5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에는 어떠한 정당이나 사회단체 또는 청년단체도 시위 또는 행렬을 할 수 없고, 주류 판매를 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34)
 
 
  南勞黨은 南韓 전역에서 마지막 總攻勢
 
  5·10선거를 파탄내기 위한 남로당의 마지막 공세는 5월 8일을 기하여 남한 전 지역에서 일제히 전개되었다. 부산에서는 5월 8일 저녁에 시내 주위 산봉우리에 봉화가 오르고, 9일 밤에는 초장동 투표소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사건과 영도의 한 투표구 사무소에 괴한 2명이 침입하여 흉기로 선거위원장을 살해하려다가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또 10일 오전 11시에는 중구의 한 투표소에 괴한 6명이 침입하여 위원 3명을 난타하고 선거인명부를 탈취했으나 3명은 체포되었다. 같은 날 영도의 한 투표소에는 권총을 든 청년 2명이 침입하여 선거위원장을 살해하려 했으나 부재중이어서 그냥 도주했다.
 
  대구에서는 관공서를 비롯한 각처에 “단선 단정 반대” 전단이 살포되고, 대구방직공장에 청년 30여명이 곤봉과 일본도를 들고 침입하여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선동하다가 1명이 경찰에 사살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민성일보사(民聲日報社) 공장이 괴한들의 수류탄에 파괴되었다.
 
  전남 광주에서는 5월 8일에 관내 각처의 전주가 절단되어 광주로부터 남원, 순천, 전주 등 몇 곳에만 전화가 통하고 다른 곳은 일절 불통이 되었다. 또 망월(望月)터널 안의 궤도 파괴로 목포발 서울행 열차가 탈선했다.
 
  목포에서는 9일 저녁에 괴한 6명이 부청 문서 창고에 침입하여 권총 2정으로 협박하여 선거관계 서류와 투표용지를 빼앗아 불 질렀다.
 
  무안군 현경면에서는 10일에 괴한들이 근무중인 경찰관의 무기를 탈취한 뒤 함평군으로 도망한 것을 함평, 무안 양 경찰서 서원과 목포기동부대가 포위 사격하여 폭도 4명이 즉사하고 20여명이 체포되었다.
 
  대전에서는 9일 새벽에 대전역 구내에서 기관차와 기관차가 충돌하여 기관차가 전복하고 레일이 파손되었다. 이날 오전에는 대전과 두계 사이의 전선이 절단되고, 밤에는 보문산(寶文山)에 봉화가 올랐다. 10일 새벽에는 파암동 한 선거사무소에 괴한 10여명이 돌멩이를 던지고 사무소 땔나무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여 투표가 1시간이나 늦게 시작되었다. 청양군에서는 9일 새벽에 3개소의 투표구사무소가 문서와 함께 전소했다.
 
  강릉에서는 5월 10일 새벽에 강릉 경찰서 관내 3개 지서가 폭도들에게 습격당했는데, 폭도 1명이 사살되고 피해는 없었다.
 
  인천에서는 9일 오전에 송현동의 한 투표소에 괴한이 수류탄을 던져 선거위원 2명이 부상했고, 10일 오후 6시 반쯤에는 송림동의 한 투표소에 괴한 20여명이 침입하여 투표함에 휘발유를 뿌리며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같은 날 새벽 3시쯤에는 부평에 있는 미군 디젤공장 차고가 전소했다.
 
  개성에서는 9일 밤에 진봉산(進鳳山)에 봉화가 오르고, 10일 정오에는 10여명의 괴한들이 두세 사람씩 분산하여 투표소와 파출소 등에 수류탄을 던져 순경 1명이 즉사하고 1명이 부상했다. 범인 1명도 사살되었다. 체포된 폭도 가운데에는 전직 경찰관도 섞여 있었다.35)
 
 
  死亡者 452명, 負傷者 766명 …
 
  그리하여 ‘2·7구국투쟁’이 시작된 2월 7일부터 5월 14일까지의 선거방해를 위한 남로당의 폭력행동은 아래 표와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치열한 폭력행사에도 불구하고 남로당의 5·10선거 저지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5·10선거로 이승만이 집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5·10선거는 미군정부와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에 대한 신임투표에 가까운 것이었다.36) 그러므로 유엔위원단이나 하지 장군뿐만 아니라 각 정파들의 관심사도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투표에 참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마찬가지였다. 투표율은 자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90%가 넘었다. 유엔위원단의 보고서는 등록 유권자 783만 7,504명의 95.2%에 해당하는 703만 6,750명이 투표에 참가했는데, 이는 유권자 총수의 75%에 이른다고 기술했다.37) 그것은 등록 유권자 784만 871명의 95.5%에 해당하는 748만 7,649명이 투표했다고 하는 국회선거위원회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38) 기권자는 5%도 되지 않았던 셈이다. 이러한 높은 투표율은 지역에 따라 행정기관과 경찰 등에 의한 위압적인 권유가 없지 않았으나, 그보다는 미군정부의 귀속농지 불하조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활동에 의한 일반국민들의 독립정부 수립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이었다. 또한 처음 실시되는 보통선거임에도 불구하고 유효투표율이 96.4%에 이르렀다는 것은 국민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李承晩과 하지는 높은 投票率에 만족
 
서울 종로(을)구 제1투표소에서 첫번째로 투표하는 이승만.
  이승만은 높은 투표율에 만족했다. 그는 총선거 결과에 대해 5월 12일에 “이번 총선거에 90% 이상의 호성적을 얻은 것은 우리 민족의 애국심을 세계에 한번 다시 표명한 것이다. 외국 신문기자들이 말하기를 한국 부인들의 투표가 50% 이상이나 된다 하니 한국의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한다. 모든 동포가 건국정신으로 이와 같이 열정을 나타낸 것은 깊이 감사하여 마지않는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이 담화를 통하여 낙선자와 당선자와 일반국민들이 각각 명심할 책무를 어린아이 타이르듯이 강조했다.39)
 
  하지 장군도 “애국적 자유애호 시민에 의한 압도적 투표”는 “만고 미증유의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높은 투표율을 찬양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는 “이러한 선량한 국민의 깊은 진실성과 이해성을 보고, 또 조선 국가의 장래와 조선 국민의 통일에 대한 그들의 희망과 신념을 알고 감격했다”라고 말하고, “또 모든 남녀가 공산분자의 반동적 흉한 및 무뢰한의 무서운 협박과 폭행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용감하게 투표장으로 가는 것을 보고 감격했다”라고 덧붙였다.40)
 
  마셜(George C. Marshall) 미 국무장관도 5월 12일의 정오 기자회견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소수자들에 의한 불법적인 선거 저지와 방해 활동에도 불구하고 90%가 넘는 등록 유권자들이 투표했다는 것은 한국인들이 민주적 방법으로 그들 스스로의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의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41)
 
 
  無所屬 당선자가 가장 많았던 까닭은
 
  폭동사태로 선거가 연기된 북제주군(갑)(을) 두 선거구를 제외한 전 선거구의 당선자 198명이 확정되었다. 국회선거위원회의 집계에 따르면 정당 및 사회단체별 당선자는 무소속이 85명으로서 가장 많고, 다음으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55명, 한국민주당이 29명, 대동청년단이 12명, 조선민족청년단이 6명, 대한독립촉성 농민총연맹이 2명의 순이었고, 그 밖에 대한노동총연맹 등 11개 단체가 각각 1명씩이었다. 후보자를 추천한 정당 단체 가운데에서 한 사람도 당선되지 못한 정당 단체도 31개나 있었다.
 
  당선자 가운데에서 최다득표자는 서울 성동구에서 당선된 대동청년단 단장 이청천(4만 532표)이었고, 최소득표자는 경기도 장단군의 무소속 후보 조중현(趙重顯)(2,791표)이었다.
 
  당선자 가운데 최고령자는 74세인 이승만이었고 최연소자는 27세인 경북 봉화군의 대동청년단 후보 배중혁(裵重赫)이었다. 연령층으로 보면 20대 3명, 30대 41명, 40대 78명, 50대 58명, 60대 16명, 70대 4명으로서 40대가 가장 많았다.42)
 
  무소속 당선자가 많았던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근대적 민주국가 운영의 기본원리인 정당정치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인식이 박약한 데다가 해방 이후의 폭발적인 정당난립 현상에 대한 혐오감이 총선거에서도 정당을 기피하는 경향으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명망가 중심주의 정치풍토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韓民黨 正黨員이 84명이라는 분석도
 
  한국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한 91명 가운데에서 29명밖에 당선되지 못한 것은 큰 실패로 받아들여졌다. 전남 광산군에서 출마한 홍성하(洪性夏), 고흥군(을)에서 출마한 서민호(徐珉濠),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한 백남훈(白南薰), 경기도 연백군(갑)에서 출마한 함상훈(咸尙薰), 충남 아산군에서 출마한 윤보선(尹潽善) 등 한민당의 중요 간부 여러 사람이 낙선함으로써 그러한 인상을 더 짙게 했다.
 
  그러나 한민당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한민당 당원으로서 공천에서 탈락되거나 한민당이 인기가 없으므로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 아래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사람도 있었다. 또 한 선거구에서 한민당 당원끼리 겨룬 경우도 있었다.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선거분석은 그러한 사정을 짐작하게 한다.
 
  “무소속이 최대 다수로 발표되었으나 순수한 무소속은 10명 내외에 불과하고 한독당과 중간 진영이 근 30명, 그 밖에는 한민당원 내지 한민당과 노선을 같이하는 의원들이다. 그리고 한민당은 공식 발표로는 불과 30명밖에 안되나 무소속으로 당선된 당원을 비롯하여 독촉국민회,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과 이중으로 소속된 당원을 전부 합하면 한민당 정당원은 현재 84명에 달한다고 하며, 한민계열에 포섭될 인사 및 노선을 같이할 인사까지 계산한다면 100명 이상으로서 한민계 세력은 국회의 절대다수를 점령할 것이라 한다.”
 
  이러한 설명은 한민당의 자체분석 근거로 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 기사는 또 독촉국민회의 내부사정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독촉국민회는 발표를 기준으로 하면 제1당이 되었으나 한민당과 이중의 적을 가진 수가 10명 이상에 달하고 나머지 부분도 순수한 독촉국민회와 한독당파로 분립되어 있다. 그리고 한독당은 선거전에는 반선거의 기치를 걸고 남북협상을 추진시켜 왔으나 이면에 있어서는 무소속을 표방하고, 또는 독촉국민회, 대동청년단에 침투하여 선거에 출마함으로써 남북협상과 선거참가의 양면작전을 하여 왔는데, 남북협상이 완전히 좌절되고 김구씨가 정양차 마곡사(麻谷寺)로 떠나게 된 이때에 한독당계 의원이 끝까지 상부의 지시대로 행동할는지는 의문시되고, 한민당과 대립된 의미에서 독촉국민회 일부와 합류할 가능성이 많으며, 대동청년단도 이번 선거에 호성적을 거두어 앞으로 신정당으로 출발할 가운이 농후하다고 한다. …”43)
 
  마곡사에 가서 한동안 정양하기로 했던 김구가 마곡행을 중지한 것은 이러한 당내 사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한 미군정부의 정보보고서는 국회선거위원회의 평가를 근거로 하여, 공식적인 집계와는 별도로 한민당의 의석수를 76석으로 추산했다. 이 보고서는 독촉국민회는 61석으로서 한민당보다 적었고, 한독당이 17석, 대동청년단이 16석, 민족청년단이 10석으로 추산했다.44)
 
  한독당 관계자 가운데에서 총선거 거부라는 당론에도 불구하고 출마하여 당선된 것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옹진군당 위원장과 감찰위원장을 역임한 경기도 옹진군(갑)의 오택관(吳澤寬) 목사를 비롯하여 안성군의 김영기(金英基), 경북 영일군(을)의 김익노(金益魯), 충남 홍성군의 손재학(孫在學), 전북 전주시의 신성균(申性均), 충북 괴산군의 연병호(延秉昊) 등 10명에 이른다. 오택관은 한독당 당적을 공식적으로 내걸고 입후보하여 당선되었고, 독촉국민회로 3명, 대동청년단으로 1명, 그리고 나머지 5명은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한독당은 5월 19일에 경교장에서 상임위원회를 열고 “선거에 당원으로서 개인 자격으로 입후보하거나 선출된 자는 제명 처분하기로” 결의했다.
 
  이렇게 하여 순수한 무소속 당선자는 50여명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45) 그리하여 제헌국회의 세력 판도는 이승만 지지 세력과 한민당계와 무소속 그룹이 정립하는 형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은 8.3대 1의 격전장
 
  정원 10명에 83명이 입후보한 서울의 선거는 전국 선거의 표본이었다. 박순천(朴順天), 김활란(金活蘭), 황현숙(黃賢淑), 황애덕(黃愛德) 등 저명한 여성들도 7명이나 입후보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13명이 출마한 중구에서는 이승만의 비서장 윤치영(尹致暎: 2만 8,496표)이 한민당으로 출마하여 차점자 박정근(朴定根: 8,594표)보다 3배가 넘는 득표로 압승했다. 널리 알려진 의사 백인제(白麟濟: 5,688표)는 3위에 머물렀다.
 
  8명이 출마한 종로(갑)구에서는 김성수(金性洙)에게서 선거구를 양보 받은 이윤영(李允榮: 2만 497표)이 박순천(5,518표)을 크게 누르고 당선했다.
 
  9명이 출마한 종로(을)구에서는 장면(張勉: 2만 3,188표)이 차점자 최규설(崔圭卨: 5,499표)의 4배가 넘는 득표로 압승했다.
 
  9명이 출마한 동대문(을)구에서는 한민당 소속의 의사 이영준(李榮俊: 1만 4,695표)이 민주의원 장연송(張連松: 1만 1,006표)을 근소한 표차로 이겼다.
 
  3명이 겨룬 성동구에서는 이청천(4만 1,532표)이 한민당의 중진 백남훈(1만 1,108표)과의 맞대결 끝에 큰 표차로 전국 최다득표를 기록했다.
 
  6명이 출마한 서대문구에서는 한민당의 김도연(金度演: 3만 1,181표)과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8,340표)이 함께 ‘박사’임을 내세워 대결했으나 김도연이 대승했다.
 
  13명이 경쟁을 벌인 마포에서는 한민당 발기인이었다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상돈(金相敦: 2만 56표)이 독촉국민회의 행동대장 유진산(柳珍山: 1만 497표)을 꺾었다.
 
  12명이 출마한 용산구에서는 평양 출신의 한민당 중진 김동원(金東元: 1만 9,183표)이 남송학(南松鶴: 1만 3,466표)과 격전을 벌인 끝에 승리했다.
 
  7명이 겨룬 영등포에서는 대동청년단 영등포단장인 의사 윤재욱(尹在旭: 1만4,296표)이 차점자 조광섭(趙光燮: 1만 1,887표)을 근소한 차로 눌렀다.
 
  제헌국회 임기동안 국회의원의 도지사, 주미대사, 장차관 임명과 선거무효에 따라 여덟 번의 보궐선거와 한 번의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장면의 주미대사 임명으로 실시된 서울 종로(을)구 보선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대검찰청장 이인(李仁),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에 따른 서울 동대문(갑)구 보선에서는 전남 광산군에서 낙선한 한민당의 홍성하, 이병국(李炳國)의 사망에 따른 충남 천안군 보선에서는 무소속의 김용화(金鏞化), 김용화의 선거 무효에 따른 재선거에서는 민주국민당의 이상돈(李相敦), 신현돈(申鉉燉)의 전북 도지사 임명에 따른 무주군 보선에서는 대동청년단의 김교중(金敎中), 이남규(李南圭)의 전남 도지사 임명에 따른 목포시 보선에서는 무소속의 강선명(姜善明), 정현모(鄭顯模)의 경북 도지사 임명에 따른 보선에서는 앞에서 본 대로 임영신, 문시환(文時煥)의 경남 도지사 임명에 따른 부산시(갑)구의 보선에서는 무소속의 허영호(許永鎬), 김효석(金孝錫)의 내무차관 임명에 따른 경남 합천군(을)의 보선에서는 무소속의 최창섭(崔昌燮)이 각각 당선되었다.46)
 
 
  新黨조직은 國權회복 뒤에나
 
  총선거가 끝나자마자 독촉국민회가 이승만을 최고책임자로 하는 정당으로 재조직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한 움직임은 독촉국민회 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인사들과 독촉국민회 안에 당적이 없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촉국민회는 5월 13일에 이러한 소문을 부인하는 담화를 발표하는 동시에 발표를 보류했던 독촉국민회의 부서를 공표했는데, 이승만과 김구가 여전히 총재와 부총재로 발표된 것이 이채로웠다. 위원장에는 오세창(吳世昌), 부위원장에는 신익희, 명제세(明濟世), 이윤영, 이청천, 박순천 다섯 사람이 선임되었다. 총무부장 이관운(李觀運), 재무부장 남송학, 선전부장 양우정(梁又正), 조직부장 진헌식(陳憲植) 등 13부 부장들도 같이 선임되었다.47)
 
  5월 17일에 부위원장 명제세가 다시 “신당조직에 국민회의 일부 간부가 가담했을는지는 모르나 국민회를 중심으로는 신당을 조직할 수 없다”라고 부인했는데도, 신당 조직설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5월 22일에 열린 독촉국민회 도지부장회에서는 국민회의 성격에 대해서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여 논의한 다음 6월 하순쯤에 전국대표자대회를 열어 결정하기로 했다.
 
  6월 15일에 기자들에게 정당을 조직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48) 신당설이 계속 나돌자 이승만은 5월 22일에 신당조직은 국권회복 뒤에나 가능할 것이라면서 신당조직설을 단호히 부인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해방 뒤에 외국 신문지상에 한국에서는 400여 정당이 분쟁한다는 수치스러운 보도가 있었는데 그것을 분개하게 여길 줄 모르고 분쟁만 일삼다가 통일에 방해가 되었음을 상기시키고,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일반 애국남녀는 다시 경성〔警醒: 타일러 깨닫게 함〕해서 정당이나 파벌이나 지방열 등의 사상을 일체 포기하고 국회를 지지하는 유일한 정신으로 대동단결해서 국권회복과 정부수립에 공헌하여 주기 바란다. 정부수립 후에는 국법으로나 민론(民論)으로나 두세 정당을 세워서 국권과 민권을 동일히 보호해야 할 것이나, 오늘 형편으로는 정당주의를 반대할지언정 새 정당을 더 만든다는 것은 결국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증언한다.”49)
 
  이승만의 이러한 단호한 반대로 신당조직 움직임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시급한 것은 정부수립이었다.
 
 
  3. 유엔委員團의 選擧평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5월 12일에 총선거의 임시 결과를 「공보」 59호로 발표했다. 그런데 그 내용은 5·10선거의 결과에 큰 의의를 느끼고 있는 한국인들이 보기에 여간 못마땅한 것이 아니었다.
 
  “유엔위원단의 전 위원은 조선문제에 관한 관심에 있어서 언제나 만장일치였지만 이번 선거를 찬양하는 데에는 위원들 사이에 어떠한 의견의 상이가 있다. 위원들 가운데에는 이번 선거의 결과가 조선문제의 해결에 공헌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대표도 있으며, 그들이 설사 이러한 의심을 포회치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남조선의 선거를 전국적인 선거로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다.”
 
  「공보」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위원들은 이번 선거를 “결정적으로 우익적인 선거”라고 부르고자 한다고 말하고, 그러나 유엔위원단의 다른 위원들은 위원단의 성과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으나 이번 선거는 조선의 통일과 주권을 향한 일보 전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썼다.
 
  「공보」는 이번 선거 진행 중에 몇몇 위원은 선거법 위반과 위원단의 건의사항 위반 등을 지적했다면서 그 사례로 향보단과 청년단원이 투표소 안과 주변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위원단 가운데 어떤 사람은 몇 개 투표소에서 비밀투표가 이행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했다고도 했다. 「공보」는 결론으로 이렇게 기술했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 이번 선거는 원활히, 그리고 조직적으로, 또한 능률적으로 수행되었다. 투표 숫자가 두세 시간 안에 고율에 이르렀다는 사실 자체가 이번 선거의 능률성을 증시(證示)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능률성을 찬양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신중한 유보가 필요함을 나는 명기하는 바이다. 여하튼 이번 감시결과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은 후일에 내릴 터이며, 총회에 대한 보고서에 포함시킬 것이다. …”50)
 
  이 「공보」는 임시의장을 맡고 있는 시리아 대표 무길(Yushin Mughir)이 각 지방에 파견되었던 위원들이 서울에 돌아오기도 전에 개인적으로 작성하여 발표한 것이었다. 한민당은 5월 14일에 무길의 주장에 유감을 표명하고, 빨리 국회가 소집되어 정식 중앙정부가 조직될 것을 고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51)
 
  이보다 앞서 전남지방의 투표상황을 감시하기 위하여 파견되어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잭슨(Jackson)은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진행 중이던 4월 24일에 광주에서 “정부를 수립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국회의원이 정부를 수립하느냐 남북협상을 추진시켜서 수립하느냐의 두 가지 방법이다. 유엔은 남북협상의 좋은 소식을 하루속히 듣고자 한다”고 말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었다.52) 지방으로 파견되었던 유엔위원단 위원들은 5월 12일 저녁 무렵까지 모두 귀경했다.
 
 
  “모든 문제의 결정은 全國政治會議에서”
 
  총선거 감시를 끝내고 상경한 유엔위원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남북협상에 참석했던 김구와 김규식과 여운홍(呂運弘)을 초청한 것이었다. 세 사람은 5월 13일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늦게까지 김구, 김규식, 여운홍의 차례로 따로따로 덕수궁의 유엔위원단 회의실로 가서 유엔위원단과 회담했다.
 
  유엔위원단은 「공보」 60호로 한 시간 반에 걸친 김구와 위원단 사이의 대화를 극히 형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문 : “조만식씨가 협상에 불참가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 “그분은 대표로 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협상에 참석하지 않았다.”
 
  문 : “왜 조만식씨와 함께 오지 않았는가?”
 
  답 : “조만식씨에 관한 문제는 추후로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문 : “남북협상의 내용은 어떠한가?”
 
  답 : “공동성명서에 발표한 것과 같다.”
 
  문 : “공동성명서의 내용과 같이 실행될 수 있는가?”
 
  답 : “남북 정당사회단체의 각 대표들이 서명 날인하고 꼭 실행할 것을 약속하였으니 틀림없을 것이다.”
 
  문 : “미소 양군이 철퇴한다면 진공기간의 치안유지 방법은 무엇인가?”
 
  답 : “공동성명에 표시한 바와 같이 남북 양쪽이 서로 침범하지 않고 각기 현상을 유지하며 전국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일체 문제를 토의 해결할 것이다.”
 
  문 : “북조선에서 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이 통과하였다는데 …”
 
  답 :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장래에 국회에서 헌법을 토의할 때에 제안하기 위한 초안이다. 북조선에서 즉시 실행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문 : “이번에 남조선 선거에서 선출된 대표들도 전국정치회의에 참가하게 될 것인가?”
 
  답 : “여하간 모든 문제의 최후 결정은 전국정치회의에서 할 것이다.”53)
 
  그것은 너무나 모호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김구로서는 그 이상 책임있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金日成 장군이 제안했으므로 北韓軍의 南侵은 없을 것”
 
  김규식과 유엔위원단의 면담에서는 더 구체적인 대화가 오갔다. 면담시간도 두 시간이나 걸렸다. 김규식은 유엔위원단과의 회담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이튿날 발표했다.
 
  김규식과 유엔위원단의 면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군 철퇴 후에 북조선군이 남조선에 쳐오지 않을 것을 당신은 믿는가?”라는 중국 대표 유어만(劉馭萬)의 질문에 김규식이 다음과 같이 대답한 대목이다.
 
  “사람의 일인 만큼 무엇이나 꼭 어떻다고 담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전이 발생되지 않는다는 언약이 김일성 장군으로부터 제안되었으며 우리가 정중히 서명했는 만큼 나는 불신임하지 않는다. 물론 세상에는 믿지 못할 일이 많다. 많은 국제조약이 파괴되지 않았는가. 우선 통일조선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전국총선거를 감시하는 것이 당신네 유엔위원단의 사명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당신들은 자신이 유엔결의안을 준수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54)
 
  김일성이 제안하고 자신을 포함한 남쪽 참가자들이 “정중히 서명했는 만큼” 북한군이 남침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한 것은 지식인 정치가 김규식의 속내를 의심스럽게 하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南北會談은 政府대표들이 만나는 회담이라야
 
  유엔위원단은 이튿날 오후 이승만과 김성수를 초청하여 의견을 청취했다.
 
  이승만은 이날 오후 3시부터 한 시간 반 동안 유엔위원단을 만났다. 이날의 회담에 대하여 이승만은 찾아온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승만의 주장은 명료했다.
 
  “남북요인회담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묻고자 하므로 나는 기왕에 누차 말한 바와 같이 변동이 없다고 말했다. 남북통일을 해야 할 것이니 요인회담이 중요하지 않느냐 하기에 나는 중한 것은 누가 모르리요마는 가능 여부가 문제이다. 묘두현령〔猫頭縣鈴 :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이 옳은 계획이지마는 실행 못할 때에는 시간낭비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통일은 남한 지도자들이 불긍〔不肯 : 승낙하지 않음〕해서 못하는 것도 아니요, 북한 지도자들이 반대하는 것도 아니요, 미국이나 유엔이 다 요구하는 것이지마는 세력으로 막는 것이 있어서 다 막히고 마는 것이라고 하였다. 남북요인회담이 북한을 개방해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투표할 가능성이 있다면 혹 달리 생각할 여지도 있을지 모르나 아직 그렇게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으므로 기정 순서대로 중앙정부를 수립하고 그 뒤에 정부대표자들이 북한대표자들과 회담하면 그것은 남북회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5)
 
  올리버(Robert T. Oliver)는 이날의 유엔위원단과의 회담에서 이승만이 남북회담에 나가는 남한 대표는 신정부를 대변하는 사람이라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해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에서 열린 정치회담이 이미 국가통일의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앞으로 더 이상의 회담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썼다.56)
 
  이승만과 유엔위원단이 회담한 바로 그날인 5월 14일에 북한 당국은 대남 송전을 중단하여 남한 전역이 한때 암흑천지가 되었다.
 
  선거참여 정파와 남북협상파 지도자들의 의견을 청취한 유엔위원단은 유엔총회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5월 16일부터 세 차례에 나누어 상해로 출발했다. 위원단은 처음에는 일본 도쿄에 가서 작업을 하고 오려고 맥아더 사령부에 교섭했으나, 맥아더는 그 요청을 거절했다.
 
 
  美國 上下院 의원들도 祝電 보내
 
70%가 넘는 문맹률로 말미암아 막대기 기호를 표기해야 하는 투표였음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은 90%가 넘었다.
  이승만의 집권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다. 이화장은 찾아오는 내외국 인사들로 인성만성했다. 답지하는 축전 가운데에는 미국 상하원 의원들이 보낸 것도 있었다.57)
 
  이승만은 정부수립 준비를 서둘렀다. 그는 먼저 정당사회단체대표자회의를 열어 중앙정부수립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추진위원회는 5월 20일에 독촉국민회 회의실에서 중앙선거위원회를 열고 중앙정부 조직에 관하여 국회 안에서 행동통일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부서를 결정했다. 위원장에는 오세창, 부위원장에는 명제세와 백남훈, 그리고 총무부에 고휘동(高羲東) 외 5명, 기획부에 이종현(李宗鉉) 외 5명, 선전부에 양우정 외 5명, 외교부에 이활(李活) 외 5명, 조사부에 유진산 외 5명이 선정되었다.58)
 
  이승만은 또 각 정당 사회단체로부터 다음과 같은 서약서를 받는 운동을 벌였다.
 
  “이번 국회는 민족 총역량을 집결하여 국가주권의 즉시 회복, 독립정부의 조속 조직, 민생경제의 긴급 시책 등에 그 사명이 있음에 비추어 본 위원회 구성원인 각 정당 각 단체 소속 의원은 국회에 있어서 이승만 박사 통제하에 행동을 통일할 것을 결의함.”59)
 
  이러한 서약서 운동은 미국에서와 같은 서약의 격식을 중요시하는 이승만의 아이디어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이어 5월 22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 독촉국민회의 각 도지부장 회의에서는 미루어 왔던 중앙상무위원과 감찰위원을 결정했다. 중앙위원으로는 오세창, 명제세, 신익희, 이윤영, 장면, 김법린(金法麟), 이청천, 유진산, 남송학, 전진한(錢鎭漢), 백남훈, 이범석 등 70여명이 선정되었고, 감찰위원으로는 강인택(姜仁澤), 김달호(金達鎬) 등 10여명이 선정되었다.60)
 
 
  金九는 마곡사 요양계획 취소
 
  한편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이제 영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탄이 났다. 김구는 열성적으로 주동했던 남북협상의 결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김구의 정계 은퇴설이 보도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휴양이 필요하다고 권했다. 마침 김구와 인연이 깊은 공주의 마곡사로부터 불탑의 증수가 끝났다면서 여러 차례 초청했다. 그리하여 김구는 마곡사에 가서 한동안 휴양하기로 결심했다. 마곡사행을 밝히면서 김구는 다음과 같이 심경을 토로했다.
 
  “오늘 마곡사에 갔다가 내일이라도 서울에 일이 있으면 곧 돌아올 것이다. … 시국이 복잡다단한 이때인 만큼 구구한 억측을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나 이것은 한갓 신경과민 혹은 아전인수격인 억측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전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조국의 독립주권을 전취해야 할 혁명 시기에 있는 것이요 정권쟁취가 목표가 아니다. … 내가 정계에서 은퇴 운운이라는 말은 나에게 부당한 용어이다. …”61)
 
  그러나 김구의 마곡사행은 5월 20일에 갑자기 중지되었다. 신문에는 평양회담에 참석했던 중간파 인사들의 권고로 마곡사행을 중지하였다고 보도되었다.62)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뒤로 선거정국을 관망하면서 침묵하던 김구와 김규식이 새로운 접촉을 시작한 것이다.
 
 
  “釜山가는 사람과 仁川가는 사람이 같은 길 갈 수는 없어”
 
  국회 개원일은 5월 31일로 결정되었다. 이승만은 역사적인 국회 개원을 앞두고 5월 26일에 이화장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수립과 관련한 중요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밝혔는데, 기자들의 마지막 질문은 김구 및 김규식과 합작할 용의는 없느냐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단호한 어조로 그의 지론을 되풀이했다.
 
  “그것은 답변하기 어려운 것이 그 두 분과 같은 길로 나가려고 많은 힘을 써 왔으나(되지 않았다). 나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으나 그분들이 응하지 않은 것이며 반대한 것인데, 그분들과 합작하려면 그분들이 그 정책을 버리든지 내가 주장하는 정부수립을 그만두든지 해야 할 것이다. 쓰러진 부분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먼저 세워 놓고 다음에 쓰러진 다른 부분도 살려야 된다는 것이 본래부터의 나의 주장이며 세계가 다 옳다고 인정하는 바인데,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과 어떻게 합작이 가능할 것인가. 지금이라도 양씨가 뜻을 고친다면 서로 협력할 수 있다. 한 사람은 부산으로 가고 한 사람은 인천으로 가는데 서로 악수하면서 갈 수는 없는 것이니 그러자면 한군데로 방향을 고쳐야만 되는 것이다.”63)
 
  김규식은 말할 나위도 없고 김구도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은 언제나 짓궂게 마련이다. 사흘 뒤인 5월 29일에 열린 김구의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은 “세간에서는 3영수의 합작을 희망하는 모양인데 이 문제에 관하여 이승만 박사가 기자단에게 답변한 내용에 대한 소감이 어떠냐”고 김구에게 물었다. 이에 대해 김구는 “그분의 대답과 같이 누구든지 피차에 나가는 방향을 고치기 전에는 당분간 합작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고 대답했다.64)
 
  김구는 또 전날에는 북한의 단전과 관련하여 “이번에 단전의 원인은 북조선 당국이 지시한 대로 남조선에서 대표를 보내지 아니한 데 있으니 북조선에서 단전하지 아니하겠다는 약속을 위반한 것은 없다”라고 말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다.65)
 
  국회 개원을 앞두고 남조선 과도정부의 입법기관이었던 과도입법의원과 명의만 남아 있던 민주의원도 폐원되었다. 입법의원은 5월 20일 오후에 입법의원 회의실에서 하지 장군과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폐원식을 거행했고,66) 민주의원은 5월 29일 오전에 창덕궁 비원에서 해산식을 거행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의장이었던 민주의원의 해산식에 참석하여 훈화를 했다.67)⊙
 

  1)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백범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푸른역사, 2008, pp.165~166 ;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선인, 2010, pp.324~325. 2) 《서울신문》1948년 5월8일자, <南朝鮮은 腐敗, 撤兵해도 內亂 업다>. 3) 崔成福, <平壤南北協商의 印象>,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編,《白凡金九全集 (8)》, 대한매일신보사, 1999, p.909. 4) 전현수 편역,《레베제프 일기》(1948.4.26), 나모커뮤니케이션, 2007, p.181. 5) 위의 책, (1948.5.3), p.186. 6)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앞의 책, pp.167~168 ;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326.
 
  7)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p.326~327. 8) 위의 책, p.328. 9) 전현수 편역,《레베제프 일기》(1948.5.3), p.186 ; 박병엽은 거의 2시간쯤 진행되었다고 증언했다. 위의 책, p.328.
 
  10) 위의 책, (1948.5.3), p.186. 11) 같은 책, (1948.5.3), pp.186~187. 12)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p.328~330. 13) 위의 책, p.330. 14) 전현수 편역,《레베제프 일기》(1948.5.3), p.187. 15)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332 ; 김광운,《북한 정치사 연구(Ⅰ)》, 선인, 2003, p.612. 16) 전현수 편역,《레베제프 일기》(1948.5.5), p.188. 17)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앞의 책, pp.170~171
 
  18) 宋南憲, <金九·金奎植은 왜 38線을 넘었나>,《新東亞》1983년 9월호, pp.223~224. 19) 전현수 편역,《레베제프 일기》(1948.5.4), p.187. 20) 선우진 지음, 최기영 엮음, 앞의 책, p.173 21) 김광운, 앞의 책, p.671 ;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385.
 
  22) 《朝鮮日報》1948년 5월7일자, <統一基礎는 奠定> ;《京鄕新聞》1948년 5월7일자, <斷電않기로 相約>.
 
  23) 《朝鮮日報》1945년 5월8일자, <選擧推進할 ?> ;《東亞日報》1945년 5월8일자, <協商은 蘇軍間에 降服, 選擧만이 獨立의 길>. 24) 《大韓民國選擧史 第一輯》, 中央選擧管理委員會, 1973, p.615. 25) 《東亞日報》1948년 4월24일자, <婦女出馬도 無妨>. 26) 《歷代國會議員選擧狀況》, 中央選擧管理委員會, 1971, p.65. 27) 《歷代國會議員選擧狀況》, pp.17~23. 28) 해방 당시의 남한의 문맹률은 77.4%였다(문교부,《문교행정개황》, 문교부 조사계획과, 1947, p.45.).
 
  29) 《大韓民國選擧史 第一輯》, p.615. 30) 《朝鮮日報》1948년 5월4일자, <非常事態에 萬全對備, 警備總司令部를 設置>. 31) 《東亞日報》1948년 5월8일자, <首都廳에 非常警備司令部도 設置>. 32) 《東亞日報》1948년 5월8일자, <安心하고 投票하라, 警察이 身邊保障>. 33) 《朝鮮日報》1948년 5월9일자, <美軍特別警戒令>. 34) 《東亞日報》1948년 5월3일자, <選擧期間中의 示威及酒類販賣規定>.
 
  35) 國史編纂委員會,《資料·大韓國史(7)》,1974, pp.83~84. 36) 전상인, <이승만과 5·10총선거>,《고개숙인 수정주의》, 전통과 현대, 2001, p.144. 37) 國際新聞社出版部 譯,《UN朝鮮委員團報告書》, 國際新聞社出版部, 1949, p.174. 38) 《大韓民國選擧史 第一輯》, pp.615~616. 39) 《朝鮮日報》1948년 5월13일자, <總選擧結果에 李博士談>. 40) 《東亞日報》1948년 5월13일자, <朝鮮의 自由選擧, 民主主義의 勝利>.
 
  41) Marshall to Jacobs, May 12, 1948,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8, vol.Ⅵ, United Stated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74, p.1195. 42) 《大韓民國選擧史 第一輯》, pp.618~619. 43) 《東亞日報》1948년 5월20일자, <領導權掌握에 包攝工作活潑>.
 
  44) G2 Weekly Summary, no.141(1948.5.28), 45) 金得中, <制憲國會의 構成過程과 性格>, 1993, 成均館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93, pp.84~85. 46) 《歷代國會議員選擧狀況》, pp.64~65.
 
  47) 《東亞日報》1948년 5월14일자, <獨促國民會, 新部署發表>. 48) 《朝鮮日報》1948년 5월16일 , <政府樹立後南北協商>. 49) 《東亞日報》1948년 5월23일자, <政黨組織은 政府樹立後>. 50) 《東亞日報》1948년 5월14일자, <選擧는 好成績>. 51) 《東亞日報》1948년 5월15일자, <國會召集이 時急>. 52) 《朝鮮日報》1948년 4월28일자, <“選擧와 協商”>.
 
  53) 《朝鮮日報》1948년 5월15일자, <全國政治會議를 召集>. 54) 《朝鮮日報》1948년 5월15일자, <兩金씨 朝委會談>. 55) 《朝鮮日報》1948년 5월16일자, <政府樹立後南北協商> ;《東亞日報》1948년 5월16일자, <協商은 政府樹立後>. 56)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p.169~170.
 
  57) 《東亞日報》1948년 5월15일자, <祝電李博士에 遝至>. 58) 《朝鮮日報》1948년 5월22일자, <政府樹立委部署>. 59) 《朝鮮日報》1948년 5월25일자, <李博士統制下行動統一>. 60) 《京鄕新聞》1948년 5월26일자, <中委와 監察委員等任命>. 61) 《朝鮮日報》1948년 5월20일자, <隱退說은 憶測에 不過>. 62) 《朝鮮日報》1948년 5월22일자, <金九氏入山中止> ;《東亞日報》1948년 5월23일자, <金九氏麻谷寺行中止>.
 
  63) 《朝鮮日報》1948년 5월27일자, <政府樹立後의 統一方略, 世界情勢에 順應> ;《京鄕新聞》1948년 5월27일자, <兩金氏와의 合作意思는 當分間抛棄>. 64) 《朝鮮日報》1948년 5월30일자, <是正없는 合作, 當分間은 不可能視>. 65) 《朝鮮日報》1948년 5월29일자, <塗炭에 빠진 民生爲해 于先送電하라>. 66) 《朝鮮日報》1948년 5월21일자, <立議昨日解散式>. 67) 《東亞日報》1948년 5월30일자, <民主議院解散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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