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間右派인 金奎植과 中間左派인 呂運亨을 중심으로 1945년 6월 말부터 시작된 左右합작 작업은 미국의 새로운 對韓정책에 따른 것이었으나, 한국인들에게 그것은 해방 이후로 거듭하여 시도되어 온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새로운 시도로 인식되었다. 李承晩과 김구는 이 작업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공산당도 배제되었다.
하지는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李承晩의 문제점은 프란체스카가 野心이 너무 큰 점”이라고 썼다.
한반도 전체를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해지자 소련은 北韓을 ‘민주기지’로 만드는 작업을 서둘렀다.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서 北韓을 시찰한 폴리(Edwin W. Pauley)는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스탈린은 7월 초에 金日成과 朴憲永을 함께 모스크바로 불러 누가 더 한국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적임자인가를 테스트했다. 이 테스트에서 金日成으로 결정되었다.
左右합작 작업은 논란을 거듭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左右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 25일에 덕수궁에서 제1차 정식회담을 열었다. 그러나 이튿날 共産黨의 압력으로 民主主義民族戰線이 右翼이 받아들일 수 없는 ‘합작 5원칙’을 발표함에 따라 합작 작업은 벽에 부딪혔다.
1. 李承晩이 金奎植에게 앞장서라고 권고
1946년 서울의 여름은 좌우익 정파들의 소모적 정치 논쟁으로 더욱 무더웠다. 6월부터 시작된 이른바 좌우합작 작업은 기본적으로는 중간우파인 김규식(金奎植)과 중간좌파인 여운형(呂運亨)의 연합을 통하여 미군정부의 자문기구로 입법기관을 구성한다는 미국정부의 새로운 한국정책에 따른 것이었으나, 한국인들에게 그것은 해방 이후로 줄곧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새로운 시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아널드와 버치가 左右합작 작업 맡아
미군정부에서 좌우합작 정책을 전반적으로 관리한 곳은 아널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을 중심으로 한 미소공위 대표단과 그 휘하의 정치고문관이었고, 하지 장군의 ‘비공식’ 지원에 따라 좌우합작에 대한 공작을 담당한 사람은 하지(John R. Hodge)의 고문인 버치(Leonard M. Berstch) 중위였다.
버치는 오하이오주 애크론(Akron) 지방 출신으로서 성가(聖架)대학(College of the Holy Cross) 철학박사이자 하버드대 출신의 변호사였다. 그는 ‘세계 최우수 중위’임을 자처했다. 버치는 1946년 초 한국에 도착했는데, 오는 도중에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서점에서 구입한 한국에 관한 책들을 통독했다. 그는 처음에 군정청 공보부에서 <정계 동향>(Political Trends) 집필을 맡았다가 하지와 아널드의 정치고문이 되었다.1)
1946년 10월에 한국에 와서 3주일 동안 한국을 취재했던《시카고 선(The Chicago Sun)》지의 게인(Mark Gayn) 기자는 김규식과 버치의 관계에 대해 인상적으로 적어 놓았다.
“점심을 들면서 버치는 흥분하여 김규식에게 닥쳐오고 있는 위대한 운명에 대하여 말했다. 나는 김규식에게는 분명히 결여되어 있는 박력과 정열을 버치가 만들어 내려고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버치는 마치 예언자 김규식의 제자이기나 한 것처럼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버치 속에 있는 책략가가 머리를 쳐들고, 그럴 때면 김규식은 정치적 괴뢰가 되었다. 요컨대 두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상대방을 이용하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김규식은 빈틈없으면서 야심적이다. 그리고 버치가 자신을 한국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을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다. 버치도 신을 가지고 노는 즐거움은 별문제로 하고, 그의 친구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한국 정부의 고문이 되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지 모른다.”2)
金奎植, 呂運亨, 元世勳, 黃鎭南, 버치中尉 집에서 만나
좌우합작의 예비접촉은 5월 25일에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 한국민주당 총무의 한 사람인 원세훈(元世勳),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여운형, 조선인민당의 황진남(黃鎭南) 네 사람이 신당동의 버치 집에서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버치와 아펜젤러(Appenzeller)가 동석했다.3) 개인자격으로 모인 이날 회동은 즉시독립과 신탁통치 문제로 논란을 벌이다가 끝났다.4)
두 번째 회합이 열리기까지는 3주일이나 걸렸다. 두 번째 회합도 6월 14일에 버치의 집에서 열렸다. 중간 우파에서는 전번대로 김규식과 원세훈이, 중간 좌파에서는 여운형과 허헌이 참석했다. 버치와 다른 몇 사람이 옵서버로 동석했다.5)
화기애애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의 회합에서는 세 가지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원세훈이 18일에 개인 자격으로 발표했다. 첫째로 대내외에 관한 기본원칙으로서 대내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채택하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적으로 불편부당한 선진외교정책이라야 하고, 둘째로 좌우를 막론하고 진실한 애국자이며 진정한 혁명가라면 절대로 배격이나 중상을 금하고 이를 절대로 옹호해야 하며, 셋째로 남북합작은 북조선에서는 공산당 1당 독재를 제외하고 언론, 정치, 사상의 자유가 허여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6)
元世勳의 합의사항 발표에 左右翼정파의 반응 달라
이러한 원세훈의 발표에 대해 좌우익 정파들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부분은 “부르주아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대목이었다. 이 말은 1945년 9월 20일의 스탈린의 비밀지령에 언급된 이래 줄곧 논란이 되어 온 용어였다. 민주의원 공보부장 함상훈(咸尙勳)은 6월 20일에 기자들에게 “아직도 원칙문제에 대한 구체적 성안까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고, “전일 본원 의원 원세훈씨로부터 부르주아 민주국가 운운한 것은 공산주의국가가 아닌 것만을 의미한 것이니 하등의 오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7)
같은 날 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李康國)은 원세훈의 발표에 대해 “그것은 원세훈씨의 개인 의견을 진술한 것”이라고 말하고 좌우익이 합의했다는 말을 부인했다. 그는 “남북통일 좌우합작에는 그보다도 선결되어야 할 원칙문제가 있다”면서, 그 원칙이란 “3상회의 결정의 지지”라고 잘라 말했다.8)
이강국의 발표와 관련하여 민주의원의 공보부장이자 한국민주당 선전부장이기도 한 함상훈은 이튿날 다음과 같이 한민당의 입장을 표명했다.
“합작에는 원칙이 필요하다. 좌우합작(원칙)은 즉시 자주독립을 요구할 것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파시스트 독재가 아닌 진정한 민주주의를 신봉할 것과 어떤 한 나라와만 친선하고 그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주종외교(主從外交)를 버릴 것 등이다.”
함상훈은 또 남북통일에도 원칙이 있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북조선에도 남조선에서와 같이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가 인정되고 민족적 애국지도자에 대한 중상, 모욕, 구속 등의 언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9)
이러한 함상훈과 이강국의 상충되는 담화는 좌우합작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6월 22일에 버치 집에서 다시 김규식, 원세훈, 여운형, 허헌 네 사람의 회합이 열렸고, 회합이 끝난 뒤 네 사람은 버치와 함께 미소공위 사무실인 덕수궁으로 가서 아널드 장군과 함께 다시 구수회담(鳩首會談)을 했다. 이에 앞서 아널드는 오전에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김성수(金性洙)를 만나서 장시간 회담했다.10)
李承晩이 金奎植에게 左右합작 적극 권해
6월 26일 오후에는 김규식과 여운형 두 사람이 버치 집에서 따로 합작문제를 협의했다.11) 같은 날 저녁에는 이승만이 김규식의 집을 방문했는데,12) 이는 하지의 요구에 따라 김규식으로 하여금 좌우합작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였다. 이날의 이승만과 김규식의 대화에 대해서는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이 전해진다.
이승만은 김규식을 찾아가서 돈 50만원인가를 내놓으면서 “이 일은 아우님이 해 주어야겠소” 하고 말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형님은 대통령을 하시오. 나는 대통이나 즐기겠소이다” 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담배 대통을 여러 개 놓고 피우는 애연가였다. 김규식은 “나는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고 또 되지 않을 것도 안다”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강권했다.
“이것이 하지 개인의 의견이라면 모르지만 미 국무성의 정책이오. 우리가 이 정책을 실행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절합니까? 아우님이 한번 해 보시오. 독립을 위하여 미국사람들이 한번 해 보라는 것을 어떻든 해 봐야 안된다는 것이 증명될 것 아니오.”
김규식은 나중에야 “좌우합작이 독립을 위한 제1단계요, 이 단계를 밟지 않으면 둘째 단계인 독립을 얻을 수 없다면 내가 희생하겠습니다” 하고 응낙했다는 것이다.13)
김규식은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내가 나무에 오른 다음에는 당신이 나무를 흔들어서 나를 떨어뜨릴 것도 안다. 또 떨어진 다음에는 나를 짓밟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나의 존재와 경력과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 내가 희생한 다음에 그 위의 제2단계에 당신이 올라서시오.”14)
“擬似政府의 首班될 생각 없어”
김규식이 이승만에게 “형님은 대통령을 하시오”라고 했다는 말이 눈길을 끈다. 이승만과 김규식은 좌우합작이 모스크바 협정에 규정된 임시 한국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작업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것은 6월 27일에 굿펠로에게 보낸 이승만의 비밀 편지에 잘 표명되어 있다.
“하지 장군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소련이 동의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만일 김구와 내가 제외된다면 소련이 받아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군은 내가 지지하지 않으면 김규식은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김규식이 연립정부 수립에 성공하고 그 정부가 강대국의 승인을 받은 뒤에는 전국적인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고 김규식을 지지하기로 동의했다. 그때 국민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나를 선택할 것이다.”15)
이승만은 이튿날 서울에 와 있는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올리버는 6월 28일자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이 박사는 나에게 하지 장군이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모종의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자신은 이러한 일시적인 의사(擬似)정부(quasi- government)의 수반이 될 생각은 없다고 확언했다.
한국국민들의 여론으로 보아 그 정부는 불신임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느끼고 있다. 그 정부는 자기가 지지할 동안만 지탱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한다. 따라서 그는 뒷전에 서서 선거를 기다릴 계획인데, 선거를 하면 자기가 압도적으로 당선될 것을 자신한다. 아마 그 말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거는 몇 년이나 연기될지 모른다.”16)
올리버의 이러한 서술로 보아 이승만이나 김규식은 랭던과 데이어가 5월 24일 본국정부에 건의한 과도적 비행정내각(interim non-administrative cabinet) 수립계획을 알고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도 명시하지 않았던 입법기구 설치 계획은 군정장관 러치(Arecher L. Lerch)가 주둔군사령관 하지 장군에게 건의하고 하지가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공표되었다. 러치는 6월 29일에 하지에게 보낸 공개 편지에서 한국민중을 대표하는 입법기관 설치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이 조직체는 “어떤 독립한 정권이 아니라 남한민중을 대표해 상부행정에 참여하여 군정장관이 직권을 이행하는 데 큰 보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17) 그리고 이 기관의 성격을 묻는 기자들에게 러치는 “미국의 국회와 같다. 그러나 최고결재권이 하지 중장에게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18) 하지는 7월 9일에 러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발표하면서 남북한이 한국 임시정부 아래 통일될 때에는 “이 임시 입법기관은 임시정부에 이관되어 그 존속이 정지될 것”이라고 말했다.19)
하지 장군이 공식으로 左右합작 지지 성명
하지는 7월 1일에 “나는 미군사령관으로서 김규식 박사와 여운형씨가 남한에 있는 중요한 정당 간에 배전의 협동과 통일을 위하여 전력하는 것과 그 노력에진전이 있다는 보고를 매우 흥미있게 보고있다”면서 그 노력을 전적으로 시인하고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20)
하지의 공식성명이 있자 좌우익 정파들의 움직임은 부산해졌다. 돈암장에는 7월 1일 이른 아침부터 민주의원 의원들의 출입이 잦으면서 긴장이 감돌았다. 이날 이승만은 기자단에게 “항간에는 췌마억측(揣摩臆測:제멋대로 추측함)이 구구하나 김규식 박사와 김구씨와 나 세 사람은 유기적 관련이 있으며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강조했다.21) 또 이승만은 좌우합작을 지지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금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는 김구씨와 내가 이미 협의하고 김규식 박사와 여운형씨와 교섭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언명하였나니, 여운형씨의 협조를 얻으면 우리 민족통일이 좌익파까지 포함되어 더욱 원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22)
金九는 民主議院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민주의원은 7월 2일 오전 10시부터 이승만과 버치 중위가 참석한 가운데 긴장된 분위기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는 김구와 조소앙(趙素昻) 등 몇몇 한국독립당 의원들 말고는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2시까지 계속되었다. 회의를 끝내고 발표한 함상훈 공보부장의 담화는 민주의원의 미묘한 입장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김규식 박사와 원세훈 양씨가 좌익과 교섭하는 것은 이승만, 김구 양씨의 양해 밑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금일 신문지상에서 보았는데, 비록 개인자격이나마 여운형씨가 현재 좌우교섭 도중에 있어 아무 구체적 진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안이 작성된 것처럼 발표한 것은 유감이다.”23)
그것은 여운형이 7월 1일에 모스크바 협정과 관련된 그동안의 우익정파들의 주장과 이승만의 민족통일총본부 결성 등을 싸잡아 비판하는 긴 담화를 발표한 데 대한 반박이었다.24)
민주의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김구는 같은 시간에 경교장(京橋莊)에서 한독당 사람들과 따로 만나 대책을 숙의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한독당의 선전부장 엄항섭(嚴恒燮)은 같은 날 뼈 있는 담화를 발표했다. “좌우합작이 지금 순조로이 진척되어 가므로 우리는 이 일이 재차 실패없이 꼭 성공되기를 간망(懇望)하고 이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때에 있어 시의(猜疑)로써 유언(流言)을 만들어 내거나 무조건으로 반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통일을 자력에서 구하지 아니하고 외력에서 구하려 하며 심지어 외력에 의하여 우리 동포의 총의를 무시하고 자기의 입장만 유리하게 하려는 일이 있었다 하면 이것은 어느쪽을 물론하고 민족의 치욕을 더할 뿐이다.…”25)
그것은 좌우합작에 대한 김구와 조소앙 등 한독당 간부들의 떨떠름한 입장을 짐작하게 하는 논평이었다.
5대5 代表로 合作委員會 구성하고
이러한 티격태격 속에서도 좌우합작 작업은 하지의 공식 지지 성명에 힘입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대표들의 회담도 개인차원의 회담이 아니라 점차 좌우익의 대표기관으로부터 승인된 회담으로 발전했다. 토론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합작위원의 수를 늘릴 필요가 있다는 데에도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원세훈은 우익 5명과 좌익 3명으로 합작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주장했으나 버치가 좌우 동수를 주장하여 우익 5명, 좌익 5명으로 결정되었다.26)
우익은 7월 7일에 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의 연석회의를 열어 한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대13으로 합작지지를 결의하고 민주의원의 김규식, 원세훈, 김붕준(金朋濬), 안재홍(安在鴻)과 비상국민회의의 최동오(崔東旿)를 대표로 선정했다.27) 한민당이 좌우합작을 반대한 것은 좌익이 이승만과 김구의 배제를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대표를 선정할 것을 요구했다. 민족전선은 7월 12일에 인민당의 여운형, 중앙인민위원회의 허헌, 민족혁명당의 김원봉(金元鳳), 신민당의 정노식(鄭魯湜), 공산당의 이강국 5명의 ‘비공식 대표’를 ‘공식적으로’ 선정하기로 동의했다.28) 그러나 김원봉은 김규식의 반대로 성주식(成周寔)으로 바뀌었고, 정노식은 백남운(白南雲)의 대리인으로 참가한 것이었다. 이날 버치는 민족전선을 방문하여 여운형, 성주식, 김원봉, 장건상(張建相) 등 민족전선 의장단과 좌우합작과 입법기구 문제를 논의했다.29)
좌우합작위원회의 첫 회담은 7월 12일 오후 6시에 명륜동의 어느 집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우익의 김규식과 원세훈이 참가하지 않아 만찬모임으로 끝났다. 김규식은 지병인 위장병으로 7월 9일에 입원했고,30) 원세훈은 좌우합작을 둘러싼 한민당의 당내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어 7월 16일 오후에 버치의 집에서 합작위원들의 제2차 회합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입원 중인 김규식을 제외한 합작위원회 양쪽 대표 9명 전원이 참석하여 합작에 대한 본격적인 토의를 시작했다.31)
共産黨도 처음에는 반대하지 않아
이 시점까지는 조선공산당도 좌우합작을 반대하지 않고 있었다. 공산당은 6월 20일에 박헌영의 기자회견을 통하여 “좌우통일 지연의 원인은 3상결정에 대한 기본태도가 상반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현재에도 좌익 지도자들은 우익진영 내 옳은 노선을 바라고 나가는 부분과 협력하야 좌우통일을 달성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미소공위 재개가 속히 실현되고 그 성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3상결정 전적 지지로 그 출발점을 삼고 나가야만 될 것이다”32)라고 천명한 이래 자신들이 주장하는 합작 3원칙이 인정된다면 합작에 참여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합작 3원칙이란 (1)3상결정의 총체적 지지, (2)친일파 민족반역자 반소반공적 파쇼 분자의 제외, (3)일체의 테러행동 중지와 테러단체 해산이었다.33) 조선공산당은 온건우파와의 합작에 성공한다면 우익의 분열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또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라는 예상 아래 처음에는 좌우합작을 지지했던 것 같다.34)
좌우합작 위원들은 7월 17일 저녁에도 버치 집에서 모였다. 회의는 저녁 9시 반쯤에 산회했는데, 회의를 끝내고 김규식에게 긴급히 전할 편지를 가지고 버치 집 근처에 있는 김규식의 아들 김진동(金鎭東)의 집으로 가던 여운형이 권총을 휴대한 괴한들에게 심한 테러를 당했다.35)
7월 21일에 김규식이 퇴원함에 따라 좌우합작위원들의 준비모임은 7월 22일 저녁에 버치의 집에서 다시 열렸다. 그것이 제1차 좌우합작 정식 예비회담이었다. 회의에는 김규식, 여운형, 원세훈, 최동오, 안재홍, 김붕준, 정노식, 이강국 8명이 참석했다. 김규식은 “우리를 합작으로 인도한 사람이 외국인이라는 점은 슬픈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동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능동적이어야 한다”라고 좌우합작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강조했다.36) 이날의 회의에서는 (1)회의장소는 미소공위 미국대표단 본부인 덕수궁으로 하고, (2) 회의는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 2회 개회하며, (3) 의장은 김규식, 여운형 두 사람으로 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한 가지 쟁점은 후속회의에 버치를 계속 참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여운형은 버치가 양쪽 진영의 합작 중재자로 활동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참석자들은 위원회가 하지에게 버치를 합작위원회파견 미국연락장교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는 한편 소련에도 옵서버 파견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37) 이 결정은 이튿날 김규식과 여운형 공동명의의 공동성명서로 발표되었다.38)
2. 韓國의 共産主義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조건에서 출발
한반도에 친소적인 통일국가가 수립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소련군사령부는 북한을 이른바 ‘민주기지’로 건설하는 작업에 주력했다. 1946년 3월에 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는 상황에서 벼락치기로 토지개혁을 실시한 데 이어 일련의 경제복구 작업을 추진했다. 소련인 기술자들이 각 공장에 파견되어 공장을 가동했다. 약탈에서 경제복구 지원으로 정책이 바뀐 것이었다.39)
그동안 소련은 북한에 진주한 직후부터 각종 산업시설을 비롯하여 식량과 원자재 등을 반출했다. 1945년에만 수풍(水豊)발전소의 발전기 3대와 원산 조선석유회사의 기계 일체, 함흥 본궁화학(本宮化學)의 6만 kV 변압기, 청진 닛테쓰(日鐵)공장과 미쓰비시(三菱)제련소의 기계 일체 등 주요 설비는 모두 반출해 갔다. 또 진남포 제련소에서는 금 2t과 아연 200t, 구리 300t을 반출해 갔고, 조선은행 원산지점에서는 현금 3,000만엔을 약탈했다. 그리고 심각한 식량 부족에도 불구하고 1945년에 244만섬, 1946년에 290만섬의 곡식을 소련으로 가져갔다.40)
“日本人의 공장과 물자는 蘇聯의 戰利品”
소련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 점령기의 모든 시설과 물자는 소련의 ‘전리품’이므로 소련정부의 재산이었다. 소련군의 북한 광공업 생산품 반출은 1946년에도 계속되었다. 러시아 외무부 공문서관에 소장된 슈티코프(Terenti F. Stykov)의 보고서에 보면 1946년 1월에서 5월 사이에 소련군은 북한에서 ‘전리품’ 6,753t과 신제조품 1,782t을 반출했다. 그 가운데에는 금 1,500㎏과 은 5t을 함유하는 조동(粗銅)과 아연 4,261t을 비롯하여 베리리움정광 20t, 텅스텐 178t, 형석 1,560t, 흑연정광 454t, 전기아연 1,388t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41)
소련의 새로운 대북한정책은 1946년 1월 28일에 작성된 〈북한에 조-소 합작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문제에 대한 소련인민위원회의 정령〉이라는 문서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이 문서는 소련이 전력, 흑색금속, 유색금속, 화학, 기계제작, 민간항공, 석탄, 시멘트, 어업, 철도, 해상운수 등 모든 산업분야에서 북한과 합작회사를 설립한다는 지침을 시달한 것이었다. 그것은 합작회사라는 형식을 통하여 북한의 물자를 반출하겠다는 것이었다. 회사의 업무관리도 소련이 임명한 지배인에게 맡기도록 했다.
이 지침에 따라 설립된 대표적인 합작회사가 조-소해운주식회사(모르트란스)와 조-소석유정련주식회사였다. 소련이 모르트란스를 세운 목적은 청진, 나진, 웅기 세 항구를 30년 동안 북한으로부터 조차하는 데 있었다. 소련과 북한은 1947년 3월 25일에 이 회사설립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합작비율은 5대5였다. 그러나 소련은 자본금을 내지 않는 대신 화물선 3척과 여객선 1척을 제공하고 북한은 세 항구와 그 부대시설을 회사에 30년 동안 임대하는 출자형식을 취했다. 소련은 배 네 척을 내놓고 그토록 바라던 부동항 세 곳을 30년 동안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련이 세 항구를 어떻게 사용했고, 30년 뒤에 조차가 끝났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42)
蘇聯은 폴리 조사단의 활동을 견제해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배상을 결정하기 위하여 대사급의 트루먼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폴리(Edwin W. Pauley)와 조사단 10명이 한반도의 일본 재산을 조사하기 위하여 서울에 온 것은 5월 16일이었다.43) 트루먼의 친구이기도 한 폴리는 미국의 손꼽는 석유기업가였고 민주당의 정치자금 모금에도 크게 공헌했다. 주된 조사대상은 일본군수공업시설이었다. 남한 지역의 조사를 마친 폴리 일행은 5월 29일에 북한을 방문했다. 그들은 일본 정부 및 민간 기업이 소유했던 공장들과 산업설비 가운데 전쟁배상으로 사용 가능한 기계류가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조사하는 한편, 1945년 하반기에 나돌던 소문대로 그 시설들을 소련이 반출해 갔는지도 조사했다.
소련점령군은 폴리 일행의 입북을 허용하기는 했으나 조사에는 협조적이지 않았다. 빠르고 효율적인 조사를 위하여 조사단을 몇몇 반으로 나누고자 했을 때에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비행기 여행과 사진사 대동도 허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폴리 일행이 방문하고자 했던 다섯 군데 가운데에서 평양지역(평양, 겸이포, 진남포, 순천), 수풍지역(신의주, 용암포), 원산지역(원산)만 허용하고, 청진지역과 흥남지역은 허용하지 않았다. 청진과 흥남은 ‘전리품’ 반출이 가장 심했던 곳이었다. 폴리 일행은 북한 체류 엿새만인 6월 4일 서울로 돌아왔다.44)
이처럼 폴리의 북한방문은 단기간이었고 또 방문지도 제한된 것이었으나, 그가 돌아와서 도쿄(東京)에서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 편지는 트루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韓國은 美國의 성패를 가름할 이데올로기의 전쟁터”
폴리는 한국은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전반적인 성패여부를 판가름할지 모를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의 우리 입장이 크게 우려되며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과 고려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믿는다. 한국은 작은 나라이고 또 우리의 전체적인 군사력으로 미루어 볼 때에 책임이 작은 지역이기는 하나,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전반적인 성패여부를 판가름할지 모를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이다. 이곳은 몰락한 봉건주의의 도전에 맞서 민주주의적 경쟁체제가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체제, 곧 공산주의가 더 강해질 것인가의 시험장이다.
소련인들의 행동으로 보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들이 한국으로부터 가까운 시일 안에 철수할 의향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1. 그들은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일이나, 임시정부와 같은 어떤 체제를 수립하는 일이나, 또는 북한에서 그들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데 무슨 방법으로든지 지장이 될지 모를 어떤 행동도 미국과 공동 보조를 취할 것을 명백히 기피하고 있다.
2. 그들은 모스크바에 충성하게 될 공산당과 소비에트형 정강(政綱)이 한국에 충성할 최고의 형태라고 선전하며 고무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들은 그러한 철학에 반대하거나 심지어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정파들까지 탄압한다.”
폴리는 이어 “소련정부는 미국이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독점적인 사용을 허락하지 않을 방침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한국인에 대한 소련선전의 영향을 고려하는 경우 현재의 2,700만 한국인 가운데 거의 70%가 영세 농어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국내 및 국제적인 경제사정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고 감언이설에 동요되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韓國에 대한 蘇聯의 네가지 目標
다음으로 폴리는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을 지적했다.
“3. 한국의 공산주의는 실제로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주요 산업이나 자연자원뿐만 아니라 철도와 동력 및 전등용 전력을 포함한 모든 공익시설을 일본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것들이 갑자기 ‘인민위원회(공산당)’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어떤 종류의 투쟁이나 그것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것들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적(자본주의적) 정부가 확립되기까지는 미국이 한국에 있는 일본의 해외자산에 대한 소유권 또는 청구권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의 하나이다.”
폴리는 또 소련이 북한의 경제복구 작업을 지원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언급했다.
“5. 그들은 북한의 경제활동을 회복시키기 위해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파탄이 난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소련에 대한 새로운 예속으로 대치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면서 폴리는 “소련군은 명백히 장기주둔을 획책하고 있다. 장교들은 벌써 가족들을 데려다 놓고 있다. 군대가 사실상 철도를 운영하고 있다. 고위당국자의 성명에서도 철수에 관한 어떤 계획이나 심지어 철수의 희망마저 찾아볼 수 없다.…”고도 썼다.
폴리는 결론으로, 한국에 대한 소련의 목표는 다음의 네 가지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1)한국을 소련이 동남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경우의 한 심층방어진(defense in depth)이 될 ‘괴뢰국가’로 육성한다.
(2)북중국과 만주에 대한 포위망 또는 협공의 한쪽 축이 되게 육성한다. 협공의 다른 한쪽 축은 외몽고가 된다.
(3)일본이 다른 외국세력이 사용할 반소기지로 건설되는 경우 일본에 대한 협공의 한쪽 축이 되게 육성한다. 협공의 다른 한쪽 축은 연해주, 사할린, 쿠릴열도가 될 것이다.
(4)부동항인 청진, 흥남, 원산에 대하여 여순(旅順)항과 대련(大連)항에서와 같은 조차권을 확보한다.
트루먼은 폴리의 편지를 長官들에게 보내
이러한 결론에 입각하여 폴리는 다음 네 가지를 건의했다.
(1)소련이 한국에 관한 모스크바 선언을 이행하도록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특히 소련은 임시 대의정부를 구성시키는 데 실패하고, 38도선에 의한 분할을 유지하는 데 대해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문제를 국제연합 또는 4대국에 회부시키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다.
(2)미국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4대 자유를 보급시키기 위하여 선전과 교육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3)한국은 배상의 일부로서 일본으로부터 특정의 필요한 산업시설을 넘겨받아야 한다.
(4)미국은 한국의 산업경제 재건에 더 많은 기술지원을 해야 한다.45)
트루먼은 폴리의 이러한 보고 편지를 매우 관심있게 받아들였다. 그는 7월 16일에 파리에 가 있는 폴리에게 답장을 보내어 “한국이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전반적인 성패여부를 판가름할지 모를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라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트루먼은 폴리의 건의사항들은 대부분 미국정부의 수정된 대한정책에 반영시키고 있다고 말했다.46) 트루먼은 또 폴리의 보고 편지와 자신의 답장을 동봉한 편지를 8월 초에 전쟁부〔육군부〕 장관 패터슨(Robert P. Patterson)에게 보내어 “이 편지는 우리 정부가 한국에서 당면한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내가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귀하에게 밝혀 두기 위한 것이다. 나는 우리가 자유롭고 독립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돕는다는 우리의 약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긴 기간 동안 한국에 머물러야 할지 모른다고 확신한다”고 썼다. 트루먼은 같은 취지의 편지를 해군장관 포레스털(James Forrestal)에게도 보냈다.47) 국무장관에게는 폴리가 이미 따로 보고 편지를 썼었다.
폴리의 편지에 대한 트루먼의 이러한 반응은 이 시점에서 미국정부가 한국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朴憲永이 平壤에 가서 南韓 상황 설명해
박헌영은 6월 27일께 허성택(許成澤), 박치우(朴致祐), 이호재(李昊滓) 세 사람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했다. 네 번째 북행이었다. 그 이전에 두 차례 평양을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이번 방문은 극비에 부쳐졌으므로 이때의 박헌영의 행적에 대해서는 조선노동당 고위당료였던 박병엽(朴炳燁)의 증언 이외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자료는 없다. 박병엽에 따르면, 박헌영은 6월 29일께 북한공산당 지도자들과 한 차례 협의회를 가졌다. 협의회는 박헌영이 주로 미소공위 결렬 이후의 남한 정세를 설명하는 형식이었다.
가장 심각하게 논의된 것은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이었다. 김책(金策), 허가이(許哥而), 주영하(朱寧河) 등은 미군정청으로 하여금 정판사사건을 조작할 만한 빌미를 제공한 꼴이 아니냐고 지적하여 논란이 빚어졌다. 일제 때에 일본인들이 지금 공산당사가 있는 근택(近澤)빌딩의 인쇄소에서 지폐를 찍어 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는데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화폐 찍는 기계나 원판 같은 것을 치워 버리지 않은 것이 발단이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소련파의 우두머리인 허가이는 박헌영 쪽이 남한의 경제를 혼란시키기 위해 실제로 위조지폐를 찍어 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고, 북한공산당 안에서도 이런 식의 이야기가 있었다. 정판사사건에 대해서는 초보적인 논의만 하고 나중에 다시 대책회의를 갖자는 선에서 넘어갔다.
다음으로 좌우합작 문제가 논의되었다. 좌우합작 문제에 대해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의견이 달랐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을 야심가 여운형이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니까 미국을 등에 업고 새 국면을 주도해 나가려고 하고, 미국의 입장은 정판사사건을 근거로 공산당을 탄압하는 한편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분열시키기 위하여 여운형을 끌어들여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 기초를 마련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여운형의 태도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미국의 책략에 말려들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이 박헌영의 설명이었다고 한다.
呂運亨의 記者會見文 보고 평가 바뀌어
처음에는 북한에서도 좌우합작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좌우합작이 버치 중위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6월 들어 서울에 밀파된 김일성의 심복 성시백(成始柏)이 가져온 여운형의 기자회견문을 보고 여운형에 대한 평가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48)
여운형은 6월 11일의 기자회견에서 좌익과 우익 사이에는 감정과 이해의 대립이 심각한데 이것을 어떻게 통일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좌우익 간에 심각한 대립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내외 정세로 보아 좌익이나 우익이 단독으로 정권을 장악할 수는 없는 것이고, 공산당 하나만 빠져도 안될 것이다. 결국 여기서 좌우익을 망라한 연합정권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익당은 지주, 자본가를 대변하는 당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익진영에서도 급속히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국회를 성립시켜 투표를 통하야 자기의 정책을 수립해야만 될 것이요, 통일정부의 수립이 선결문제일 것이다. 통일정부와 국회의 확립을 원조하는 미소공위를 급속히 재개하는 것이 필요한 유일의 민족대표기관의 설치에 두 진영에서도 찬성하게 될 것이고, 나 개인은 이를 적극적으로 제창하고 노력할 터이다.”
여운형은 그러나 통일기관에 반민주주의자와 파쇼 분자까지 참가시키자는 것은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만 여기에서 부언할 것은 조선을 망국으로 유도한 양반계급이 그 경제적 토대인 봉건적 토지관계를 유지하려는 반민주주의 분자와 파쇼 분자를 제외하고는 애국자로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제창에 찬성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통일기관에 이러한 반민주주의자까지도 참가시키자는 것은 아니고, 그자들과는 앞으로도 싸워 나가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조선은 경제적으로 급속히 향상할 것이요, 독립도 전취될 것이다.”
여운형은 또 통일을 낙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또 하나 통일이 될 구체적 가능성은 정국이 오늘과 같이 혼돈하고 현재와 같은 경제상태가 계속되면 될수록 좌익에게는 유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생활이 핍박하면 하여 갈수록 민중은 좌익화하고 우익의 테러는 오히려 좌익을 견고히 할 것이다. … 이러한 사실로 보아도 우익은 급속히 타협적으로 나오게 될 것이고, 그러니 민족통일기관의 성립은 나 자신으로는 시간문제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49)
이 기사를 본 김일성은 “신문 자체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여운형의 견해가 옳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50) 협의회에서는 좌우합작이 미군정부의 발기와 개입으로 진행되는 것은 분명하나 여운형이 실제로 미군정부에 이용당할지는 더 관찰하고 연구해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졌다.51)
스탈린이 金日成과 朴憲永을 모스크바로 불러
이 무렵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스탈린(Iosif V. Stalin)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함께 모스크바로 부른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때의 박헌영의 방북은 모스크바 방문이 주목적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소련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Alexander M. Vasilevsky) 원수의 부관이었고 뒤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이 된 코바넨코(Ivan I. Kobanenko)의 증언에 따르면, 박헌영이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을 만난 것은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된 뒤에 박헌영이 직접 스탈린에게 김일성과 소련군사령부를 비판하는 장문의 편지를 러시아어로 써서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소련국가공안위원회(KGB)의 극동지부로 보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박헌영은 이 편지에서 김일성의 민족통일노선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해방정국에 적합하지 않고 일본점령기에 지하에서 항일투쟁을 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무시하면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람들만 앞세우는 등 독재가 심하고, 중앙당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남한 실정에 맞지 않는 정책 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배제하고 당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등으로 김일성을 비판했다. 또 소련군 사령부에 대해서도 당의 책임자인 자신을 따돌리고 일방적으로 김일성에게만 적극 협력하고 있어서 당의 권위가 추락하여 혁명사업에 차질이 예상된다는 등 신랄하게 비판했다.
바실레프스키는 심사숙고한 끝에 이 편지를 모스크바의 중앙당으로 보냈고, 중앙당도 고심 끝에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스탈린은 박헌영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근거가 있어 보이므로 시정토록 조치하라고 KGB본부에 지시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스탈린은 자신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직접 만나 보겠다면서 모스크바로 부르도록 지시했다.52)
김일성과 박헌영은 북한주둔 소련군 민정사령관 로마넨코(Andrei A. Romanenko)와 함께 6월 30일 또는 7월 1일에53) 소련극동군 연해주 군관구 사령관 메레치코프(Kirill A. Meretsikov) 원수가 하바로프스크로부터 타고 온 군용기에 편승하여 평양을 출발했다. 김일성은 문일(文日)을, 박헌영은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의 부영사 샤브신(Anatoly I. Shabsin)을 통역으로 대동했다.54)
스탈린은 單一政黨 결성하라고 지시
이들이 떠나기에 앞서 북한주둔 소련군 군사위원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는 스탈린과의 면담에 대비하여 김일성을 꼼꼼히 준비시켰다. 레베데프는 스탈린이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를 예측하고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했다. 그는 김일성에게 북한의 무장문제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55)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면접하는 자리에는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몰로토프(Viacheslav M. Molotorv)와 육군참모총장 안토노프(Aleksey I. Antonov), 평양에서 간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Terenti F. Shtykov)와 로마넨코, 그리고 통역들이 동석했다. 슈티코프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일행보다 먼저 모스크바에 와 있었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한반도 정세와 남한의 정세, 북한의 정세를 자세히 물었다. 김일성의 대답은 대체로 충실했던 것 같다. 스탈린의 통역관에 따르면 그는 아첨하는 어조로 말했으며, 내내 스탈린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고 언제라도 자기 주인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대체로 김일성은 스탈린의 마음에 들었다.56)
김일성의 설명을 듣고 나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북한에 단일정당을 결성하라고 지시했다.57)
“人民들은 땅 가는 사람들 아니오”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견에 대해 레베데프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어린 지도자’는 스탈린의 손에 의해서 그가 차지한 ‘영웅’의 권위가 ‘큰 지도자’의 작은 손짓만으로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분명히 이해했다.”58)
스탈린은 박헌영을 보고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분투하는 당신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59) 스탈린은 박헌영에게 남한의 좌익정당들도 통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박헌영이 “그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인민들과 상의를 해 보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무심코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을 가는 사람들 아니오.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 하고 말했다고 한다.60)
회담을 마치고 스탈린은 보좌관들에게 조선지도자들의 전면적인 정치적 준비와 김일성 개인을 위하여 평양으로 경험 많은 군사고문관들을 파견하라고 지시했다.61) 뒤이어 총참모부에 북한의 군사-기술원조 수행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소련지도부는 북한에 강력하고도 현대적인 군대를 갖기를 희망했다.62)
회담이 있던 날 저녁 스탈린은 근교에 있는 소련공산당 서기장 별장으로 김일성과 박헌영 일행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공산당 간부들에게 박헌영을 모스크바에 며칠 머물게 하여 기업체와 공장 등을 견학시키라고 지시했다.63)
이렇게 하여 김일성에 대한 박헌영의 도전은 좌절되었다.
金日成은 呂運亨의 左右합작활동 지지
박헌영은 이때 모스크바에서 외동딸 비비안나를 만났다. 첫 아내 주세죽(朱世竹)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세 살 때부터 모스크바의 한 보육원에서 자란 비비안나는 18세의 소련민속무용단의 발레리나가 되어 있었다.64)
김일성과 박헌영 일행은 7월 10일께 평양으로 돌아왔고, 박헌영은 하루 반쯤 평양에 머물다가 7월 12일께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스탈린이 지시한 좌익정당 통합작업을 협의하기 위하여 여운형과 신민당(新民黨) 인사들을 만나 본 다음 7월 16일께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65)
앞에서 본 대로, 박헌영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에 북한 공산당의 간부들과 한 차례 협의회를 가졌으나, 그것은 공식회의가 아니었다. 그런데 7월에 서울에 왔다가 다시 방북했을 때에는 북조선 공산당 조직위원회 상무위원회가 두 차례 열렸다. 회의에서는 주로 3당합당, 정판사사건, 단독정부수립, 좌우합작, 그리고 박헌영이 제기한 “정당방위에 의한 신전술”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좌우합작에 대해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의견이 달랐다. 김일성은 모스크바로 가면서 김책에게 지시하여 성시백을 다시 서울로 보냈는데, 성시백은 서울에서 여운형과 비밀리에 만나 좌우합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 여운형의 편지를 가지고 갔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뒤 김일성은 이 편지에 대한 답신을 써서 성시백으로 하여금 여운형에게 전하게 했다. 성시백은 7월 18일 전후에 다시 서울로 왔다.
박헌영은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미국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철저히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조선노동당 상무위원 가운데에도 박헌영과 같은 의견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다. 김일성은 여운형의 편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신문을 보니까 여운형이 미국의 입장을 좇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또 “좌우합작운동이 우리 의도대로 되지 않고 미국의 의도가 관철된다면 그때 가서 깨버려도 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66)
김일성은 박헌영의 “정당방위에 의한 신전술”, 곧 합법투쟁과 비합법투쟁을 배합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았다.67) 그는 “박헌영 동지가 군중의 힘으로 미군정을 제압하는 정면대결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미군정의 탄압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고 결국 3당합당에도 지장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3당합당도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68)
이처럼 박헌영은 북한 공산당 간부들과의 의견차이만 확인한 채 7월 22일에 서울로 돌아왔다.69)
3. “李承晩은 필요한 기간 이상으로 오래 살았다”
좌우합작에 대한 미군정부의 생각은 미소공위 미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와 있던 데이어(Charles W. Thayer)가 미국무부 일본과장 보튼(Hugh Borton)과 나눈 대화록에 잘 드러나 있다.
7월 초에 귀국한70) 데이어는 7월 16일에 국무부로 보튼을 방문했다. 데이어는 군정부가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면서 양 극단, 곧 극우의 이승만파와 소련의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들을 배제시키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그는 인민당 당수 여운형 휘하의 비공산주의 좌익을 좌우합작에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성공적이라는 것이 입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합작에 대한 우익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중심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고려하고 있는 김규식을 지지하도록 김구를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머지않아 설립될 입법기관에는 선출직 의원과 임명직 의원의 수가 같도록 할 것인데, 임명직 의원에는 하지 장군의 말대로 ‘강력한 좌익’이 임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 대화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데이어의 이승만에 대한 당돌한 언급이다. 데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인들이 느끼는 그의 권위의 어느 정도가 군정부의 그에 대한 지지 때문이고 어느 정도가 그의 망명 애국자로서의 명성 때문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점령 초기에 이승만이 귀국한 것이 몇백 개나 되는 한국정당들을 어느 정도 통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승만은 그가 필요한 기간 이상으로 오래 살았고, 한국의 정치무대로부터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데이어는 이어 이승만이 “뒤늦게 자신이 좌우합작에 책임이 있음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71)
“프란체스카가 野心이 너무 많은 것이 李承晩의 문제점”
데이어의 이러한 주장은 이 시점의 하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좌우합작과 이승만에 대한 하지의 생각은 7월 7일에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좌우합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아직도 일찍이 한국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과 같은 만족스럽지 못한 지난날의 기준에서 작업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들 이른바 ‘지도자들’ 가운데 이 쓰레기더미에서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지금 진정한 좌우합작을 시도하고 있다.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이고 있기는 하나 종착점이 보이는 길목에 접어들기까지는 아직 한참 멀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현재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따라올지 모르겠다.”
이어 하지는 이승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승만은 갈수록 악성 방해요인이 되고 있다. 그는 지난 주에 1905년에서 1919년 사이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봉기를 획책했다. 본인은 부인하나, 확실한 증거가 있다. 이승만의 문제점은 그의 오스트리아 부인이 야심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72)
이승만에 대한 데이어나 하지의 이러한 평가는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고 또 비현실적이었다. 그 보기로 바로 이 시점에 실시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들 수 있다. 7월 초에 새로 설립된 한국여론협회는 7월 17일에 사람이 많이 다니는 서울의 종로, 남대문, 종로4가 세 곳에서 통행인 6,671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제1차 대통령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1,916명(29%)이 이승만을 꼽았다. 김구가 702명(11%)으로 그 다음인 것도 변함이 없었다. 이어 김규식의 지지도도 급증했으나 초대 대통령으로 그를 꼽은 사람은 694명(10%)뿐이었다. 다음으로는 여운형 689명(10%), 박헌영 84명(1%), 기타 110명(2%)의 순이었고, 모르겠다고 대답한 사람이 2,476명(37%)으로 가장 많았다.73)
좌우합작 뉴스가 연일 지면을 메우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과 김구는 배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국민들의 상대적인 지지도에는 변함이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를 비롯한 군정부 관계자들이나 국무부의 한국담당자들이 이승만과 김구를 그토록 폄훼한 것은 이후 미군정부 정책의 혼선을 더욱 증폭시키는 큰 요인이 되었다.
“美國의 장단에 놀아나지 말라”
박헌영은 평양에서 돌아오자마자 민족전선 내 공산당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거듭 강조하면서 좌우합작을 파탄시키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여운형에게 “미국의 장단에 놀아나지 말라”고 경고하고, 합작위원회는 또 하나의 실패작이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또 만일 남한의 좌익이 북한의 좌익으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는다면 한국의 모든 우익 반대파는 단시일 안에 구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헌영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여운형은 자기는 합작 노력을 그만두기에는 이미 너무 깊이 김규식에게 개입되어 있고, 또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는 그것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의 정치고문 랭던(William R. Langdon)은 “이번 싸움으로 여운형의 박헌영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과 필연적인 적개심이 표면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적었다. 여운형은 군정부의 미국인들에게 7월 27일에 열릴 위조지폐사건 공판을 이용하여 징역을 보낸다든가 하여 이번 기회에 박헌영을 단호하게 다루는 것이 미국의 계획을 성공시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넌지시 귀띔하기까지 했다. 미국인들이 여운형에게 공산당이 좌우합작을 방해하려 한다는 사실을 왜 자신이 직접 폭로하지 않느냐고 묻자 여운형은 남한의 많은 노동자, 농민, 청년들이 자기와 박헌영에게 충성을 나누어 보내고 있는데, 만일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분열이 있는 것이 알려지면 그것은 합작작업에 해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여운형은 또 이 시점에서 박헌영이 위세를 잃게 되면 이들 세력의 상당부분을 자신이, 따라서 미국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운형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랭던은 “여운형은 도덕적 용기가 모자라거나 박헌영을 폭로할 수 없을 만큼 공산주의자들과 비밀스럽게 깊이 연계되어 있으면서 우리가 그러한 처지에서 자기를 구출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분석했다.74) 그것은 올빼미 밤눈 같은 통찰력이었다.
德壽宮에서 정식회담 열어
박헌영이 평양으로부터 돌아오고 사흘이 지난 7월 25일 오후 2시에 마침내 덕수궁에서 제2차 정식 예비회담이 열렸다. 이날의 회담에는 허헌을 제외한 위원 9명이 모두 참석했다. 회담에서는 이 회담을 제1차 정식회담으로 격상시켜 14개항의 <의사진행규정>을 채택하고, 좌우익에서 각각 비서국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우익에서는 영문비서로 김규식의 아들 김진동과 국문비서로 송남헌(宋南憲)이, 좌익에서는 영문비서로 황진남과 국문비서로 김세용(金世鎔)이 선임되었다.75) 채택된 <의사진행규정>에는 “5.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 소수의 보고서나 성명서는 위원회를 통하여 동일하게 공개한다”, “6. 위원회의 모든 성원은 본 위원회의 부칙에 명시된 이외의 특정조직을 통하여 개인적, 집단적으로 독자의 보고서, 성명서, 코뮈니케를 발행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한다”, “10. 각 진영에서 최소 3명의 대표가 참석하지 않으면 어떤 회합도 공식회합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각 진영에서 최소 3명의 대표가 찬성하지 않으면 어떤 결정도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는 등의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76)
이어 제2차 정식회담을 7월 27일에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제2차 회담부터는 합작원칙을 중심으로 토론하기로 합의했다. 이날의 회담결과는 이튿날 제1호 성명으로 발표되었다.77)
좌우익의 대표적 정당 및 단체들의 공식적 지지 아래 좌우합작위원회가 정식으로 가동함에 따라 좌우합작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左翼이 기습적으로 ‘합작 5원칙’ 발표
그러나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궤도에 오른 좌우합작 회담은 이튿날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27일의 정례회담에 좌익 대표들이 제출하기로 한 좌익의 ‘합작 5원칙’을 7월 26일에 민족전선이 기습적으로 발표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1)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하는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촉진운동을 전개하여 남북통일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매진하되,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과도 직접 회의하여 전국적 행동통일을 기할 것.
(2)토지개혁(무상몰수, 무상분여), 중요산업 국유화, 민주주의적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제기본과업 수행에 매진할 것.
(3)친일파, 민족반역자, 파쇼 반동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러를 철저히 박멸하며,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 석방을 실현하여 민주주의적 정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
(4) 남조선에서도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치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하도록 기도(企圖)할 것.
(5) 군정고문기관 또는 입법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78)
이처럼 변칙적으로 좌익의 ‘5원칙’이 발표되자 좌우합작위원회의 우익대표인 원세훈은 27일에 좌익이 <의사규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고,79) 이에 대해 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은 “민족전선의 원칙과 합작위원의 원칙이 동일한 경우라도 그 내용이 동일할 뿐 의견발표기관이 동일한 것이 아니므로 민족전선이 합작위원회의 <의사규정>을 위반한 것이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변명했다.80)
그러나 <의사규정> 위반이 문제가 아니었다. 민족전선의 ‘5원칙’은 우익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본대로, 소련이나 북한당국의 방침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박헌영의 위기감에 따른 모험주의의 소산이었다.
7월 27일의 제2차 정례회담도 좌익대표들의 불참으로 말미암아 유회되었다.⊙
1) 정용욱,《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p. 269~270.
2) Mark Gayn, The Jape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Inc. 1948, pp. 357~358. 3) 鄭秉峻, <1946~47년 左右合作運動의 전개과정과 성격변화>,《韓國史論》29, 서울大學校國史學科, 1993, p. 252. 4)《東亞日報》1946년 5월29일자, <民共合作交涉流會>. 5) 《朝鮮日報》1946년 6월16일자, <左右合作具象化?>. 6) 《朝鮮日報》1946년 6월19일자, <三原則에 意見合致>. 7) 《朝鮮日報》1946년 6월21일자, <뿔조아共和國은 共産안이다>. 8) 《朝鮮日報》1946년 6월21일자, <左右合作合意說은 浮說>. 9) 《朝鮮日報》1946년 6월22일자, <一國만에 主從外交 버리라>. 10) 《東亞日報》1946년 6월23일자, <注目되는 政界動靜>.
11) 《朝鮮人民報》1946년 6월28일자, <左右要人會談頻繁>. 12) 《朝鮮人民報》1946년 6월28일자, <李博士, 金奎植宅에 訪問要談>. 13) 宋南憲, 尹錫五 證言, 孫世一, 『李承晩과 金九』, 一潮閣, 1970, p. 445 ; 姜元龍, 金淳愛 證言, 李庭植, 『金奎植의 生涯』, 新丘文化社, 1974, pp. 140~141. 14) 金淳愛 證言, 李庭植, 위의 책, p. 141. 15) Rhee to Goodfellow, Jun. 27, 1946,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 1』, 國史編纂委員會, 1996, p. 99. 16)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A Personal Narrative,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 36.
17) 《서울신문》 1946년 7월2일자, <立法機關設置提案>. 18) 《東亞日報》 1946년 7월10일자, <美國의 國會와 같다>. 19) 《東亞日報》 1946년 7월10일자, <南朝鮮福利爲해서 必要>. 20) 《서울신문》 1946년 7월2일자, <金,呂兩氏努力奏效確信>. 21) 《서울신문》 1946년 7월2일자, <敦岩莊緊張>. 22) 《大東新聞》 1946년 7월2일자, <金博士의 努力을 支持>. 23) 《서울신문》 1946년 7월3일자, <民議, 緊張裡에會議>. 24) 《서울신문》 1946년 7월3일자, <統一의 基本問題>. 25) 《서울신문》 1946년 7월4일자, <成功되길 懇望>. 26) 『駐韓美軍史(2)(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이하 FUSAFIK 2)』, 돌베개影印版, 1988, p. 201. 27) 《서울신문》1946년 7월11일자, <左右兩陣營의 合作交涉委員> ;《獨立新報》1946년 7월17일자, <合作工作本格化>.
28) 『駐韓美軍史(2) (FUSAFIK 2)』, p. 202. 29) 《獨立新報》1946년 7월13일자, <뻐취氏民戰訪問>. 30) 《서울신문》1946년 7월11일자, <金奎植博士入院>. 31) 《獨立新報》1946년 7월17일자, <合作工作本格化>. 32) 《自由新聞》1946년 6월21일자, <當面한 우리 義務> ;《中央新聞》1946년 6월21일자, <共委再開에 總力>. 33) 《朝鮮人民報》1946년 7월14일자, <左右合作에 關하여 朴憲永氏放送>. 34) 鄭秉峻, 앞의 글, p. 265. 35) 《서울신문》1946년 7월19일자, <呂運亨氏殺害計劃> ;《東亞日報》1946년 7월19일자, <呂氏暗殺未遂>. 36) 鄭秉峻, 앞의 글, p. 265. 37) 《東亞日報》1946년 7월24일자, <本格化한 左右合作交涉>. 38) 《서울신문》1946년 7월24일자, <左右合作工作本軌道에>. 39) 김학준,《북한의 역사(2) 미소냉전과 소련군정 아래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건국》,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pp. 333~334.
40) 김영수, <북한지역의 정치적 동태와 소군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한국현대사의 재인식(1) 해방정국과 미소군정》, 오름, 1998, pp. 248~249. 41) 木村光彦 編譯,《旧ソ連の北朝鮮經濟資料集 1946-1965年》, 知泉書館, 2011, pp. 30~31. 42) 김영수, 앞의 글, pp. 247~248. 43)《東亞日報》1946년 5월18일자, <포ㅡ레使節團着京> ;《朝鮮日報》1946년 5월18일자, <포ㅡ레大使의 隨員 十名도 來朝>. 44) 김학준, 앞의 책, pp. 319~320.
45) Pauley to Truman, Jun. 22, 194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6, vol.Ⅷ, pp. 706~709. 46) Truman to Pauley, Jul. 16, 1946, FRUS 1946, vol.Ⅷ, pp. 713~714. 47) Truman to Patterson, FRUS 1946, vol. Ⅷ, p. 721.
48)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출판사, 2010, pp. 65~68. 49) 《朝鮮人民報》1946년 6월12일자, <左右統一한 代表機關으로>. 50)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中央日報社, 1992, p. 234. 51)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p. 68~69.
52)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中央日報社, 1993, pp. 210~211. 53)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 65. 54) 레베데프 證言,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326~327. 55) 레베데프 證言, 코로트코프 지음, 어건주 옮김, 『스탈린과 김일성(Ⅰ)』, 東亞日報社, 1992, p. 244. 56) 위의 책, p. 237. 57) 같은 책, p. 242. 58) 같은 책, p. 245. 59)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329.
60) 임경석,《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 p. 348. 61) 코로트코프 지음, 이건주 옮김, 앞의 책, p. 237. 62) 위의 책, pp. 243~244. 63)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329. 64)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45. 65)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 66, pp. 73~74. 66) 위의 책, pp. 69~77. 67) 같은 책, pp. 81~82. 68) 같은 책, p. 82. 69) Langdon to Byrnes, Aug. 2, 1946, FRUS 1946, vol. Ⅷ, p. 722.
70) 《서울신문》1946년 7월7일자, <本國과 協議次 데이어氏歸美>. 71) “Memorandum of Conversation Held in the Division of Japanese Affairs”, Jul. 16, 1946, FRUS 1946, vol. Ⅷ, pp. 715~716. 72) Hodge to Goodfellow, Jul. 7, 1946,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 1』, p. 120. 73) 《東亞日報》1946년 7월23일자, <初代大統領은 누구?>.
74) Langdon to Byrnes, Aug. 2, 1946, FRUS 1946, vol. Ⅷ, p. 723. 75) 《東亞日報》1946년 7월26일자, <合作에 最終의 準備> ;《獨立新報》1946년 7월26일자, <合作正式會談, 昨日德壽宮서開催>. 76) 鄭秉峻, 앞의 글, p. 266. 77) 《朝鮮人民報》1946년 7월27일자, <左右合作本귀道로>. 78) 《東亞日報》1946년 7월27일자, <民戰의 五原則提示>. 79) 《朝鮮人民報》1946년 7월28일자, <五大原則發表는 遺憾>. 80) 《朝鮮人民報》1946년 7월28일자, <議事規定違反 아니다>.
하지는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李承晩의 문제점은 프란체스카가 野心이 너무 큰 점”이라고 썼다.
한반도 전체를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로 만드는 일이 불가능해지자 소련은 北韓을 ‘민주기지’로 만드는 작업을 서둘렀다.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로서 北韓을 시찰한 폴리(Edwin W. Pauley)는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고 보고했다.
스탈린은 7월 초에 金日成과 朴憲永을 함께 모스크바로 불러 누가 더 한국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적임자인가를 테스트했다. 이 테스트에서 金日成으로 결정되었다.
左右합작 작업은 논란을 거듭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左右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 25일에 덕수궁에서 제1차 정식회담을 열었다. 그러나 이튿날 共産黨의 압력으로 民主主義民族戰線이 右翼이 받아들일 수 없는 ‘합작 5원칙’을 발표함에 따라 합작 작업은 벽에 부딪혔다.
1. 李承晩이 金奎植에게 앞장서라고 권고
1946년 서울의 여름은 좌우익 정파들의 소모적 정치 논쟁으로 더욱 무더웠다. 6월부터 시작된 이른바 좌우합작 작업은 기본적으로는 중간우파인 김규식(金奎植)과 중간좌파인 여운형(呂運亨)의 연합을 통하여 미군정부의 자문기구로 입법기관을 구성한다는 미국정부의 새로운 한국정책에 따른 것이었으나, 한국인들에게 그것은 해방 이후로 줄곧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새로운 시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아널드와 버치가 左右합작 작업 맡아
미군정부에서 좌우합작 정책을 전반적으로 관리한 곳은 아널드(Archibald V. Arnold) 소장을 중심으로 한 미소공위 대표단과 그 휘하의 정치고문관이었고, 하지 장군의 ‘비공식’ 지원에 따라 좌우합작에 대한 공작을 담당한 사람은 하지(John R. Hodge)의 고문인 버치(Leonard M. Berstch) 중위였다. 버치는 오하이오주 애크론(Akron) 지방 출신으로서 성가(聖架)대학(College of the Holy Cross) 철학박사이자 하버드대 출신의 변호사였다. 그는 ‘세계 최우수 중위’임을 자처했다. 버치는 1946년 초 한국에 도착했는데, 오는 도중에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서점에서 구입한 한국에 관한 책들을 통독했다. 그는 처음에 군정청 공보부에서 <정계 동향>(Political Trends) 집필을 맡았다가 하지와 아널드의 정치고문이 되었다.1)
1946년 10월에 한국에 와서 3주일 동안 한국을 취재했던《시카고 선(The Chicago Sun)》지의 게인(Mark Gayn) 기자는 김규식과 버치의 관계에 대해 인상적으로 적어 놓았다.
“점심을 들면서 버치는 흥분하여 김규식에게 닥쳐오고 있는 위대한 운명에 대하여 말했다. 나는 김규식에게는 분명히 결여되어 있는 박력과 정열을 버치가 만들어 내려고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버치는 마치 예언자 김규식의 제자이기나 한 것처럼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버치 속에 있는 책략가가 머리를 쳐들고, 그럴 때면 김규식은 정치적 괴뢰가 되었다. 요컨대 두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상대방을 이용하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김규식은 빈틈없으면서 야심적이다. 그리고 버치가 자신을 한국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을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다. 버치도 신을 가지고 노는 즐거움은 별문제로 하고, 그의 친구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한국 정부의 고문이 되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지 모른다.”2)
金奎植, 呂運亨, 元世勳, 黃鎭南, 버치中尉 집에서 만나
좌우합작의 예비접촉은 5월 25일에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 한국민주당 총무의 한 사람인 원세훈(元世勳),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여운형, 조선인민당의 황진남(黃鎭南) 네 사람이 신당동의 버치 집에서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버치와 아펜젤러(Appenzeller)가 동석했다.3) 개인자격으로 모인 이날 회동은 즉시독립과 신탁통치 문제로 논란을 벌이다가 끝났다.4)
두 번째 회합이 열리기까지는 3주일이나 걸렸다. 두 번째 회합도 6월 14일에 버치의 집에서 열렸다. 중간 우파에서는 전번대로 김규식과 원세훈이, 중간 좌파에서는 여운형과 허헌이 참석했다. 버치와 다른 몇 사람이 옵서버로 동석했다.5)
화기애애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의 회합에서는 세 가지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원세훈이 18일에 개인 자격으로 발표했다. 첫째로 대내외에 관한 기본원칙으로서 대내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채택하고 대외적으로는 국제적으로 불편부당한 선진외교정책이라야 하고, 둘째로 좌우를 막론하고 진실한 애국자이며 진정한 혁명가라면 절대로 배격이나 중상을 금하고 이를 절대로 옹호해야 하며, 셋째로 남북합작은 북조선에서는 공산당 1당 독재를 제외하고 언론, 정치, 사상의 자유가 허여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6)
元世勳의 합의사항 발표에 左右翼정파의 반응 달라
이러한 원세훈의 발표에 대해 좌우익 정파들의 반응은 제각각 달랐다.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부분은 “부르주아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대목이었다. 이 말은 1945년 9월 20일의 스탈린의 비밀지령에 언급된 이래 줄곧 논란이 되어 온 용어였다. 민주의원 공보부장 함상훈(咸尙勳)은 6월 20일에 기자들에게 “아직도 원칙문제에 대한 구체적 성안까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말하고, “전일 본원 의원 원세훈씨로부터 부르주아 민주국가 운운한 것은 공산주의국가가 아닌 것만을 의미한 것이니 하등의 오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7)
같은 날 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李康國)은 원세훈의 발표에 대해 “그것은 원세훈씨의 개인 의견을 진술한 것”이라고 말하고 좌우익이 합의했다는 말을 부인했다. 그는 “남북통일 좌우합작에는 그보다도 선결되어야 할 원칙문제가 있다”면서, 그 원칙이란 “3상회의 결정의 지지”라고 잘라 말했다.8)
이강국의 발표와 관련하여 민주의원의 공보부장이자 한국민주당 선전부장이기도 한 함상훈은 이튿날 다음과 같이 한민당의 입장을 표명했다.
“합작에는 원칙이 필요하다. 좌우합작(원칙)은 즉시 자주독립을 요구할 것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파시스트 독재가 아닌 진정한 민주주의를 신봉할 것과 어떤 한 나라와만 친선하고 그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주종외교(主從外交)를 버릴 것 등이다.”
함상훈은 또 남북통일에도 원칙이 있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북조선에도 남조선에서와 같이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가 인정되고 민족적 애국지도자에 대한 중상, 모욕, 구속 등의 언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9)
이러한 함상훈과 이강국의 상충되는 담화는 좌우합작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6월 22일에 버치 집에서 다시 김규식, 원세훈, 여운형, 허헌 네 사람의 회합이 열렸고, 회합이 끝난 뒤 네 사람은 버치와 함께 미소공위 사무실인 덕수궁으로 가서 아널드 장군과 함께 다시 구수회담(鳩首會談)을 했다. 이에 앞서 아널드는 오전에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김성수(金性洙)를 만나서 장시간 회담했다.10)
李承晩이 金奎植에게 左右합작 적극 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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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左右합작 작업 때의 金奎植과 呂運亨.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규식, 한 사람 건너 그의 부인 金淳愛, 呂運亨, 安在鴻. |
이승만은 김규식을 찾아가서 돈 50만원인가를 내놓으면서 “이 일은 아우님이 해 주어야겠소” 하고 말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형님은 대통령을 하시오. 나는 대통이나 즐기겠소이다” 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담배 대통을 여러 개 놓고 피우는 애연가였다. 김규식은 “나는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고 또 되지 않을 것도 안다”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강권했다.
“이것이 하지 개인의 의견이라면 모르지만 미 국무성의 정책이오. 우리가 이 정책을 실행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절합니까? 아우님이 한번 해 보시오. 독립을 위하여 미국사람들이 한번 해 보라는 것을 어떻든 해 봐야 안된다는 것이 증명될 것 아니오.”
김규식은 나중에야 “좌우합작이 독립을 위한 제1단계요, 이 단계를 밟지 않으면 둘째 단계인 독립을 얻을 수 없다면 내가 희생하겠습니다” 하고 응낙했다는 것이다.13)
김규식은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내가 나무에 오른 다음에는 당신이 나무를 흔들어서 나를 떨어뜨릴 것도 안다. 또 떨어진 다음에는 나를 짓밟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나의 존재와 경력과 모든 것을 희생하겠소. 내가 희생한 다음에 그 위의 제2단계에 당신이 올라서시오.”14)
“擬似政府의 首班될 생각 없어”
김규식이 이승만에게 “형님은 대통령을 하시오”라고 했다는 말이 눈길을 끈다. 이승만과 김규식은 좌우합작이 모스크바 협정에 규정된 임시 한국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작업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것은 6월 27일에 굿펠로에게 보낸 이승만의 비밀 편지에 잘 표명되어 있다.
“하지 장군이 시도하고 있는 것은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소련이 동의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만일 김구와 내가 제외된다면 소련이 받아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군은 내가 지지하지 않으면 김규식은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김규식이 연립정부 수립에 성공하고 그 정부가 강대국의 승인을 받은 뒤에는 전국적인 선거를 실시하기로 하고 김규식을 지지하기로 동의했다. 그때 국민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나를 선택할 것이다.”15)
이승만은 이튿날 서울에 와 있는 올리버(Robert T. Oliver)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올리버는 6월 28일자 비망록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이 박사는 나에게 하지 장군이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모종의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자신은 이러한 일시적인 의사(擬似)정부(quasi- government)의 수반이 될 생각은 없다고 확언했다.
한국국민들의 여론으로 보아 그 정부는 불신임받을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느끼고 있다. 그 정부는 자기가 지지할 동안만 지탱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한다. 따라서 그는 뒷전에 서서 선거를 기다릴 계획인데, 선거를 하면 자기가 압도적으로 당선될 것을 자신한다. 아마 그 말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거는 몇 년이나 연기될지 모른다.”16)
올리버의 이러한 서술로 보아 이승만이나 김규식은 랭던과 데이어가 5월 24일 본국정부에 건의한 과도적 비행정내각(interim non-administrative cabinet) 수립계획을 알고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도 명시하지 않았던 입법기구 설치 계획은 군정장관 러치(Arecher L. Lerch)가 주둔군사령관 하지 장군에게 건의하고 하지가 이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공표되었다. 러치는 6월 29일에 하지에게 보낸 공개 편지에서 한국민중을 대표하는 입법기관 설치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이 조직체는 “어떤 독립한 정권이 아니라 남한민중을 대표해 상부행정에 참여하여 군정장관이 직권을 이행하는 데 큰 보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17) 그리고 이 기관의 성격을 묻는 기자들에게 러치는 “미국의 국회와 같다. 그러나 최고결재권이 하지 중장에게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라고 대답했다.18) 하지는 7월 9일에 러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발표하면서 남북한이 한국 임시정부 아래 통일될 때에는 “이 임시 입법기관은 임시정부에 이관되어 그 존속이 정지될 것”이라고 말했다.19)
하지 장군이 공식으로 左右합작 지지 성명
하지는 7월 1일에 “나는 미군사령관으로서 김규식 박사와 여운형씨가 남한에 있는 중요한 정당 간에 배전의 협동과 통일을 위하여 전력하는 것과 그 노력에진전이 있다는 보고를 매우 흥미있게 보고있다”면서 그 노력을 전적으로 시인하고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20)
하지의 공식성명이 있자 좌우익 정파들의 움직임은 부산해졌다. 돈암장에는 7월 1일 이른 아침부터 민주의원 의원들의 출입이 잦으면서 긴장이 감돌았다. 이날 이승만은 기자단에게 “항간에는 췌마억측(揣摩臆測:제멋대로 추측함)이 구구하나 김규식 박사와 김구씨와 나 세 사람은 유기적 관련이 있으며 일심동체(一心同體)”라고 강조했다.21) 또 이승만은 좌우합작을 지지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금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는 김구씨와 내가 이미 협의하고 김규식 박사와 여운형씨와 교섭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언명하였나니, 여운형씨의 협조를 얻으면 우리 민족통일이 좌익파까지 포함되어 더욱 원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22)
金九는 民主議院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민주의원은 7월 2일 오전 10시부터 이승만과 버치 중위가 참석한 가운데 긴장된 분위기에서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는 김구와 조소앙(趙素昻) 등 몇몇 한국독립당 의원들 말고는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2시까지 계속되었다. 회의를 끝내고 발표한 함상훈 공보부장의 담화는 민주의원의 미묘한 입장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김규식 박사와 원세훈 양씨가 좌익과 교섭하는 것은 이승만, 김구 양씨의 양해 밑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금일 신문지상에서 보았는데, 비록 개인자격이나마 여운형씨가 현재 좌우교섭 도중에 있어 아무 구체적 진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슨 안이 작성된 것처럼 발표한 것은 유감이다.”23)
그것은 여운형이 7월 1일에 모스크바 협정과 관련된 그동안의 우익정파들의 주장과 이승만의 민족통일총본부 결성 등을 싸잡아 비판하는 긴 담화를 발표한 데 대한 반박이었다.24)
민주의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김구는 같은 시간에 경교장(京橋莊)에서 한독당 사람들과 따로 만나 대책을 숙의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한독당의 선전부장 엄항섭(嚴恒燮)은 같은 날 뼈 있는 담화를 발표했다. “좌우합작이 지금 순조로이 진척되어 가므로 우리는 이 일이 재차 실패없이 꼭 성공되기를 간망(懇望)하고 이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때에 있어 시의(猜疑)로써 유언(流言)을 만들어 내거나 무조건으로 반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통일을 자력에서 구하지 아니하고 외력에서 구하려 하며 심지어 외력에 의하여 우리 동포의 총의를 무시하고 자기의 입장만 유리하게 하려는 일이 있었다 하면 이것은 어느쪽을 물론하고 민족의 치욕을 더할 뿐이다.…”25)
그것은 좌우합작에 대한 김구와 조소앙 등 한독당 간부들의 떨떠름한 입장을 짐작하게 하는 논평이었다.
5대5 代表로 合作委員會 구성하고
이러한 티격태격 속에서도 좌우합작 작업은 하지의 공식 지지 성명에 힘입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대표들의 회담도 개인차원의 회담이 아니라 점차 좌우익의 대표기관으로부터 승인된 회담으로 발전했다. 토론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합작위원의 수를 늘릴 필요가 있다는 데에도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원세훈은 우익 5명과 좌익 3명으로 합작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주장했으나 버치가 좌우 동수를 주장하여 우익 5명, 좌익 5명으로 결정되었다.26)
우익은 7월 7일에 민주의원과 비상국민회의의 연석회의를 열어 한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대13으로 합작지지를 결의하고 민주의원의 김규식, 원세훈, 김붕준(金朋濬), 안재홍(安在鴻)과 비상국민회의의 최동오(崔東旿)를 대표로 선정했다.27) 한민당이 좌우합작을 반대한 것은 좌익이 이승만과 김구의 배제를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이 대표를 선정할 것을 요구했다. 민족전선은 7월 12일에 인민당의 여운형, 중앙인민위원회의 허헌, 민족혁명당의 김원봉(金元鳳), 신민당의 정노식(鄭魯湜), 공산당의 이강국 5명의 ‘비공식 대표’를 ‘공식적으로’ 선정하기로 동의했다.28) 그러나 김원봉은 김규식의 반대로 성주식(成周寔)으로 바뀌었고, 정노식은 백남운(白南雲)의 대리인으로 참가한 것이었다. 이날 버치는 민족전선을 방문하여 여운형, 성주식, 김원봉, 장건상(張建相) 등 민족전선 의장단과 좌우합작과 입법기구 문제를 논의했다.29)
좌우합작위원회의 첫 회담은 7월 12일 오후 6시에 명륜동의 어느 집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우익의 김규식과 원세훈이 참가하지 않아 만찬모임으로 끝났다. 김규식은 지병인 위장병으로 7월 9일에 입원했고,30) 원세훈은 좌우합작을 둘러싼 한민당의 당내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어 7월 16일 오후에 버치의 집에서 합작위원들의 제2차 회합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입원 중인 김규식을 제외한 합작위원회 양쪽 대표 9명 전원이 참석하여 합작에 대한 본격적인 토의를 시작했다.31)
共産黨도 처음에는 반대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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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안을 협의하는 呂運亨(오른쪽)과 朴憲永. |
좌우합작 위원들은 7월 17일 저녁에도 버치 집에서 모였다. 회의는 저녁 9시 반쯤에 산회했는데, 회의를 끝내고 김규식에게 긴급히 전할 편지를 가지고 버치 집 근처에 있는 김규식의 아들 김진동(金鎭東)의 집으로 가던 여운형이 권총을 휴대한 괴한들에게 심한 테러를 당했다.35)
7월 21일에 김규식이 퇴원함에 따라 좌우합작위원들의 준비모임은 7월 22일 저녁에 버치의 집에서 다시 열렸다. 그것이 제1차 좌우합작 정식 예비회담이었다. 회의에는 김규식, 여운형, 원세훈, 최동오, 안재홍, 김붕준, 정노식, 이강국 8명이 참석했다. 김규식은 “우리를 합작으로 인도한 사람이 외국인이라는 점은 슬픈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수동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능동적이어야 한다”라고 좌우합작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강조했다.36) 이날의 회의에서는 (1)회의장소는 미소공위 미국대표단 본부인 덕수궁으로 하고, (2) 회의는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 2회 개회하며, (3) 의장은 김규식, 여운형 두 사람으로 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한 가지 쟁점은 후속회의에 버치를 계속 참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여운형은 버치가 양쪽 진영의 합작 중재자로 활동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참석자들은 위원회가 하지에게 버치를 합작위원회파견 미국연락장교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는 한편 소련에도 옵서버 파견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37) 이 결정은 이튿날 김규식과 여운형 공동명의의 공동성명서로 발표되었다.38)
2. 韓國의 共産主義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조건에서 출발
한반도에 친소적인 통일국가가 수립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소련군사령부는 북한을 이른바 ‘민주기지’로 건설하는 작업에 주력했다. 1946년 3월에 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는 상황에서 벼락치기로 토지개혁을 실시한 데 이어 일련의 경제복구 작업을 추진했다. 소련인 기술자들이 각 공장에 파견되어 공장을 가동했다. 약탈에서 경제복구 지원으로 정책이 바뀐 것이었다.39)
그동안 소련은 북한에 진주한 직후부터 각종 산업시설을 비롯하여 식량과 원자재 등을 반출했다. 1945년에만 수풍(水豊)발전소의 발전기 3대와 원산 조선석유회사의 기계 일체, 함흥 본궁화학(本宮化學)의 6만 kV 변압기, 청진 닛테쓰(日鐵)공장과 미쓰비시(三菱)제련소의 기계 일체 등 주요 설비는 모두 반출해 갔다. 또 진남포 제련소에서는 금 2t과 아연 200t, 구리 300t을 반출해 갔고, 조선은행 원산지점에서는 현금 3,000만엔을 약탈했다. 그리고 심각한 식량 부족에도 불구하고 1945년에 244만섬, 1946년에 290만섬의 곡식을 소련으로 가져갔다.40)
“日本人의 공장과 물자는 蘇聯의 戰利品”
소련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 점령기의 모든 시설과 물자는 소련의 ‘전리품’이므로 소련정부의 재산이었다. 소련군의 북한 광공업 생산품 반출은 1946년에도 계속되었다. 러시아 외무부 공문서관에 소장된 슈티코프(Terenti F. Stykov)의 보고서에 보면 1946년 1월에서 5월 사이에 소련군은 북한에서 ‘전리품’ 6,753t과 신제조품 1,782t을 반출했다. 그 가운데에는 금 1,500㎏과 은 5t을 함유하는 조동(粗銅)과 아연 4,261t을 비롯하여 베리리움정광 20t, 텅스텐 178t, 형석 1,560t, 흑연정광 454t, 전기아연 1,388t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41)
소련의 새로운 대북한정책은 1946년 1월 28일에 작성된 〈북한에 조-소 합작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문제에 대한 소련인민위원회의 정령〉이라는 문서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이 문서는 소련이 전력, 흑색금속, 유색금속, 화학, 기계제작, 민간항공, 석탄, 시멘트, 어업, 철도, 해상운수 등 모든 산업분야에서 북한과 합작회사를 설립한다는 지침을 시달한 것이었다. 그것은 합작회사라는 형식을 통하여 북한의 물자를 반출하겠다는 것이었다. 회사의 업무관리도 소련이 임명한 지배인에게 맡기도록 했다.
이 지침에 따라 설립된 대표적인 합작회사가 조-소해운주식회사(모르트란스)와 조-소석유정련주식회사였다. 소련이 모르트란스를 세운 목적은 청진, 나진, 웅기 세 항구를 30년 동안 북한으로부터 조차하는 데 있었다. 소련과 북한은 1947년 3월 25일에 이 회사설립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합작비율은 5대5였다. 그러나 소련은 자본금을 내지 않는 대신 화물선 3척과 여객선 1척을 제공하고 북한은 세 항구와 그 부대시설을 회사에 30년 동안 임대하는 출자형식을 취했다. 소련은 배 네 척을 내놓고 그토록 바라던 부동항 세 곳을 30년 동안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련이 세 항구를 어떻게 사용했고, 30년 뒤에 조차가 끝났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42)
蘇聯은 폴리 조사단의 활동을 견제해
연합국에 대한 일본의 배상을 결정하기 위하여 대사급의 트루먼 대통령 특사로 임명된 폴리(Edwin W. Pauley)와 조사단 10명이 한반도의 일본 재산을 조사하기 위하여 서울에 온 것은 5월 16일이었다.43) 트루먼의 친구이기도 한 폴리는 미국의 손꼽는 석유기업가였고 민주당의 정치자금 모금에도 크게 공헌했다. 주된 조사대상은 일본군수공업시설이었다. 남한 지역의 조사를 마친 폴리 일행은 5월 29일에 북한을 방문했다. 그들은 일본 정부 및 민간 기업이 소유했던 공장들과 산업설비 가운데 전쟁배상으로 사용 가능한 기계류가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조사하는 한편, 1945년 하반기에 나돌던 소문대로 그 시설들을 소련이 반출해 갔는지도 조사했다.
소련점령군은 폴리 일행의 입북을 허용하기는 했으나 조사에는 협조적이지 않았다. 빠르고 효율적인 조사를 위하여 조사단을 몇몇 반으로 나누고자 했을 때에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비행기 여행과 사진사 대동도 허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폴리 일행이 방문하고자 했던 다섯 군데 가운데에서 평양지역(평양, 겸이포, 진남포, 순천), 수풍지역(신의주, 용암포), 원산지역(원산)만 허용하고, 청진지역과 흥남지역은 허용하지 않았다. 청진과 흥남은 ‘전리품’ 반출이 가장 심했던 곳이었다. 폴리 일행은 북한 체류 엿새만인 6월 4일 서울로 돌아왔다.44)
이처럼 폴리의 북한방문은 단기간이었고 또 방문지도 제한된 것이었으나, 그가 돌아와서 도쿄(東京)에서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 편지는 트루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韓國은 美國의 성패를 가름할 이데올로기의 전쟁터”
폴리는 한국은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전반적인 성패여부를 판가름할지 모를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의 우리 입장이 크게 우려되며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과 고려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믿는다. 한국은 작은 나라이고 또 우리의 전체적인 군사력으로 미루어 볼 때에 책임이 작은 지역이기는 하나,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전반적인 성패여부를 판가름할지 모를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이다. 이곳은 몰락한 봉건주의의 도전에 맞서 민주주의적 경쟁체제가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체제, 곧 공산주의가 더 강해질 것인가의 시험장이다.
소련인들의 행동으로 보아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들이 한국으로부터 가까운 시일 안에 철수할 의향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1. 그들은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일이나, 임시정부와 같은 어떤 체제를 수립하는 일이나, 또는 북한에서 그들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데 무슨 방법으로든지 지장이 될지 모를 어떤 행동도 미국과 공동 보조를 취할 것을 명백히 기피하고 있다.
2. 그들은 모스크바에 충성하게 될 공산당과 소비에트형 정강(政綱)이 한국에 충성할 최고의 형태라고 선전하며 고무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들은 그러한 철학에 반대하거나 심지어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정파들까지 탄압한다.”
폴리는 이어 “소련정부는 미국이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독점적인 사용을 허락하지 않을 방침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한국인에 대한 소련선전의 영향을 고려하는 경우 현재의 2,700만 한국인 가운데 거의 70%가 영세 농어민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국내 및 국제적인 경제사정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고 감언이설에 동요되기 쉽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韓國에 대한 蘇聯의 네가지 目標
다음으로 폴리는 매우 주목할 만한 점을 지적했다.
“3. 한국의 공산주의는 실제로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주요 산업이나 자연자원뿐만 아니라 철도와 동력 및 전등용 전력을 포함한 모든 공익시설을 일본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것들이 갑자기 ‘인민위원회(공산당)’의 소유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어떤 종류의 투쟁이나 그것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것들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적(자본주의적) 정부가 확립되기까지는 미국이 한국에 있는 일본의 해외자산에 대한 소유권 또는 청구권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의 하나이다.”
폴리는 또 소련이 북한의 경제복구 작업을 지원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언급했다.
“5. 그들은 북한의 경제활동을 회복시키기 위해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파탄이 난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소련에 대한 새로운 예속으로 대치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면서 폴리는 “소련군은 명백히 장기주둔을 획책하고 있다. 장교들은 벌써 가족들을 데려다 놓고 있다. 군대가 사실상 철도를 운영하고 있다. 고위당국자의 성명에서도 철수에 관한 어떤 계획이나 심지어 철수의 희망마저 찾아볼 수 없다.…”고도 썼다.
폴리는 결론으로, 한국에 대한 소련의 목표는 다음의 네 가지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1)한국을 소련이 동남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경우의 한 심층방어진(defense in depth)이 될 ‘괴뢰국가’로 육성한다.
(2)북중국과 만주에 대한 포위망 또는 협공의 한쪽 축이 되게 육성한다. 협공의 다른 한쪽 축은 외몽고가 된다.
(3)일본이 다른 외국세력이 사용할 반소기지로 건설되는 경우 일본에 대한 협공의 한쪽 축이 되게 육성한다. 협공의 다른 한쪽 축은 연해주, 사할린, 쿠릴열도가 될 것이다.
(4)부동항인 청진, 흥남, 원산에 대하여 여순(旅順)항과 대련(大連)항에서와 같은 조차권을 확보한다.
트루먼은 폴리의 편지를 長官들에게 보내
이러한 결론에 입각하여 폴리는 다음 네 가지를 건의했다.
(1)소련이 한국에 관한 모스크바 선언을 이행하도록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특히 소련은 임시 대의정부를 구성시키는 데 실패하고, 38도선에 의한 분할을 유지하는 데 대해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문제를 국제연합 또는 4대국에 회부시키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다.
(2)미국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4대 자유를 보급시키기 위하여 선전과 교육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3)한국은 배상의 일부로서 일본으로부터 특정의 필요한 산업시설을 넘겨받아야 한다.
(4)미국은 한국의 산업경제 재건에 더 많은 기술지원을 해야 한다.45)
트루먼은 폴리의 이러한 보고 편지를 매우 관심있게 받아들였다. 그는 7월 16일에 파리에 가 있는 폴리에게 답장을 보내어 “한국이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전반적인 성패여부를 판가름할지 모를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라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트루먼은 폴리의 건의사항들은 대부분 미국정부의 수정된 대한정책에 반영시키고 있다고 말했다.46) 트루먼은 또 폴리의 보고 편지와 자신의 답장을 동봉한 편지를 8월 초에 전쟁부〔육군부〕 장관 패터슨(Robert P. Patterson)에게 보내어 “이 편지는 우리 정부가 한국에서 당면한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내가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귀하에게 밝혀 두기 위한 것이다. 나는 우리가 자유롭고 독립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돕는다는 우리의 약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긴 기간 동안 한국에 머물러야 할지 모른다고 확신한다”고 썼다. 트루먼은 같은 취지의 편지를 해군장관 포레스털(James Forrestal)에게도 보냈다.47) 국무장관에게는 폴리가 이미 따로 보고 편지를 썼었다.
폴리의 편지에 대한 트루먼의 이러한 반응은 이 시점에서 미국정부가 한국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朴憲永이 平壤에 가서 南韓 상황 설명해
박헌영은 6월 27일께 허성택(許成澤), 박치우(朴致祐), 이호재(李昊滓) 세 사람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했다. 네 번째 북행이었다. 그 이전에 두 차례 평양을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이번 방문은 극비에 부쳐졌으므로 이때의 박헌영의 행적에 대해서는 조선노동당 고위당료였던 박병엽(朴炳燁)의 증언 이외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자료는 없다. 박병엽에 따르면, 박헌영은 6월 29일께 북한공산당 지도자들과 한 차례 협의회를 가졌다. 협의회는 박헌영이 주로 미소공위 결렬 이후의 남한 정세를 설명하는 형식이었다.
가장 심각하게 논의된 것은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이었다. 김책(金策), 허가이(許哥而), 주영하(朱寧河) 등은 미군정청으로 하여금 정판사사건을 조작할 만한 빌미를 제공한 꼴이 아니냐고 지적하여 논란이 빚어졌다. 일제 때에 일본인들이 지금 공산당사가 있는 근택(近澤)빌딩의 인쇄소에서 지폐를 찍어 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는데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화폐 찍는 기계나 원판 같은 것을 치워 버리지 않은 것이 발단이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소련파의 우두머리인 허가이는 박헌영 쪽이 남한의 경제를 혼란시키기 위해 실제로 위조지폐를 찍어 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고, 북한공산당 안에서도 이런 식의 이야기가 있었다. 정판사사건에 대해서는 초보적인 논의만 하고 나중에 다시 대책회의를 갖자는 선에서 넘어갔다.
다음으로 좌우합작 문제가 논의되었다. 좌우합작 문제에 대해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의견이 달랐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을 야심가 여운형이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니까 미국을 등에 업고 새 국면을 주도해 나가려고 하고, 미국의 입장은 정판사사건을 근거로 공산당을 탄압하는 한편 민주주의민족전선을 분열시키기 위하여 여운형을 끌어들여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 기초를 마련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여운형의 태도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미국의 책략에 말려들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이 박헌영의 설명이었다고 한다.
呂運亨의 記者會見文 보고 평가 바뀌어
처음에는 북한에서도 좌우합작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좌우합작이 버치 중위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6월 들어 서울에 밀파된 김일성의 심복 성시백(成始柏)이 가져온 여운형의 기자회견문을 보고 여운형에 대한 평가가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48)
여운형은 6월 11일의 기자회견에서 좌익과 우익 사이에는 감정과 이해의 대립이 심각한데 이것을 어떻게 통일하겠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좌우익 간에 심각한 대립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내외 정세로 보아 좌익이나 우익이 단독으로 정권을 장악할 수는 없는 것이고, 공산당 하나만 빠져도 안될 것이다. 결국 여기서 좌우익을 망라한 연합정권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익당은 지주, 자본가를 대변하는 당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익진영에서도 급속히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국회를 성립시켜 투표를 통하야 자기의 정책을 수립해야만 될 것이요, 통일정부의 수립이 선결문제일 것이다. 통일정부와 국회의 확립을 원조하는 미소공위를 급속히 재개하는 것이 필요한 유일의 민족대표기관의 설치에 두 진영에서도 찬성하게 될 것이고, 나 개인은 이를 적극적으로 제창하고 노력할 터이다.”
여운형은 그러나 통일기관에 반민주주의자와 파쇼 분자까지 참가시키자는 것은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만 여기에서 부언할 것은 조선을 망국으로 유도한 양반계급이 그 경제적 토대인 봉건적 토지관계를 유지하려는 반민주주의 분자와 파쇼 분자를 제외하고는 애국자로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제창에 찬성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통일기관에 이러한 반민주주의자까지도 참가시키자는 것은 아니고, 그자들과는 앞으로도 싸워 나가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조선은 경제적으로 급속히 향상할 것이요, 독립도 전취될 것이다.”
여운형은 또 통일을 낙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또 하나 통일이 될 구체적 가능성은 정국이 오늘과 같이 혼돈하고 현재와 같은 경제상태가 계속되면 될수록 좌익에게는 유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생활이 핍박하면 하여 갈수록 민중은 좌익화하고 우익의 테러는 오히려 좌익을 견고히 할 것이다. … 이러한 사실로 보아도 우익은 급속히 타협적으로 나오게 될 것이고, 그러니 민족통일기관의 성립은 나 자신으로는 시간문제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49)
이 기사를 본 김일성은 “신문 자체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여운형의 견해가 옳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50) 협의회에서는 좌우합작이 미군정부의 발기와 개입으로 진행되는 것은 분명하나 여운형이 실제로 미군정부에 이용당할지는 더 관찰하고 연구해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졌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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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呂運亨의 記者會見을 보도한 《朝鮮人民報》 기사. |
스탈린이 金日成과 朴憲永을 모스크바로 불러
이 무렵에 가장 주목되는 것은 스탈린(Iosif V. Stalin)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함께 모스크바로 부른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때의 박헌영의 방북은 모스크바 방문이 주목적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소련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Alexander M. Vasilevsky) 원수의 부관이었고 뒤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 부부장이 된 코바넨코(Ivan I. Kobanenko)의 증언에 따르면, 박헌영이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로 가서 스탈린을 만난 것은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된 뒤에 박헌영이 직접 스탈린에게 김일성과 소련군사령부를 비판하는 장문의 편지를 러시아어로 써서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소련국가공안위원회(KGB)의 극동지부로 보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박헌영은 이 편지에서 김일성의 민족통일노선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해방정국에 적합하지 않고 일본점령기에 지하에서 항일투쟁을 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무시하면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람들만 앞세우는 등 독재가 심하고, 중앙당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남한 실정에 맞지 않는 정책 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배제하고 당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등으로 김일성을 비판했다. 또 소련군 사령부에 대해서도 당의 책임자인 자신을 따돌리고 일방적으로 김일성에게만 적극 협력하고 있어서 당의 권위가 추락하여 혁명사업에 차질이 예상된다는 등 신랄하게 비판했다.
바실레프스키는 심사숙고한 끝에 이 편지를 모스크바의 중앙당으로 보냈고, 중앙당도 고심 끝에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스탈린은 박헌영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근거가 있어 보이므로 시정토록 조치하라고 KGB본부에 지시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스탈린은 자신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직접 만나 보겠다면서 모스크바로 부르도록 지시했다.52)
김일성과 박헌영은 북한주둔 소련군 민정사령관 로마넨코(Andrei A. Romanenko)와 함께 6월 30일 또는 7월 1일에53) 소련극동군 연해주 군관구 사령관 메레치코프(Kirill A. Meretsikov) 원수가 하바로프스크로부터 타고 온 군용기에 편승하여 평양을 출발했다. 김일성은 문일(文日)을, 박헌영은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의 부영사 샤브신(Anatoly I. Shabsin)을 통역으로 대동했다.54)
스탈린은 單一政黨 결성하라고 지시
이들이 떠나기에 앞서 북한주둔 소련군 군사위원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는 스탈린과의 면담에 대비하여 김일성을 꼼꼼히 준비시켰다. 레베데프는 스탈린이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를 예측하고 예상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했다. 그는 김일성에게 북한의 무장문제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55)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면접하는 자리에는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몰로토프(Viacheslav M. Molotorv)와 육군참모총장 안토노프(Aleksey I. Antonov), 평양에서 간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Terenti F. Shtykov)와 로마넨코, 그리고 통역들이 동석했다. 슈티코프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일행보다 먼저 모스크바에 와 있었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한반도 정세와 남한의 정세, 북한의 정세를 자세히 물었다. 김일성의 대답은 대체로 충실했던 것 같다. 스탈린의 통역관에 따르면 그는 아첨하는 어조로 말했으며, 내내 스탈린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긴장하고 있었고 언제라도 자기 주인의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대체로 김일성은 스탈린의 마음에 들었다.56)
김일성의 설명을 듣고 나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북한에 단일정당을 결성하라고 지시했다.57)
“人民들은 땅 가는 사람들 아니오”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견에 대해 레베데프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다.… ‘어린 지도자’는 스탈린의 손에 의해서 그가 차지한 ‘영웅’의 권위가 ‘큰 지도자’의 작은 손짓만으로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분명히 이해했다.”58)
스탈린은 박헌영을 보고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분투하는 당신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59) 스탈린은 박헌영에게 남한의 좌익정당들도 통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박헌영이 “그것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인민들과 상의를 해 보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무심코 “인민이라니? 인민이야 땅을 가는 사람들 아니오. 결정은 우리가 해야지” 하고 말했다고 한다.60)
회담을 마치고 스탈린은 보좌관들에게 조선지도자들의 전면적인 정치적 준비와 김일성 개인을 위하여 평양으로 경험 많은 군사고문관들을 파견하라고 지시했다.61) 뒤이어 총참모부에 북한의 군사-기술원조 수행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소련지도부는 북한에 강력하고도 현대적인 군대를 갖기를 희망했다.62)
회담이 있던 날 저녁 스탈린은 근교에 있는 소련공산당 서기장 별장으로 김일성과 박헌영 일행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공산당 간부들에게 박헌영을 모스크바에 며칠 머물게 하여 기업체와 공장 등을 견학시키라고 지시했다.63)
이렇게 하여 김일성에 대한 박헌영의 도전은 좌절되었다.
金日成은 呂運亨의 左右합작활동 지지
박헌영은 이때 모스크바에서 외동딸 비비안나를 만났다. 첫 아내 주세죽(朱世竹)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세 살 때부터 모스크바의 한 보육원에서 자란 비비안나는 18세의 소련민속무용단의 발레리나가 되어 있었다.64)
김일성과 박헌영 일행은 7월 10일께 평양으로 돌아왔고, 박헌영은 하루 반쯤 평양에 머물다가 7월 12일께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스탈린이 지시한 좌익정당 통합작업을 협의하기 위하여 여운형과 신민당(新民黨) 인사들을 만나 본 다음 7월 16일께 다시 평양을 방문했다.65)
앞에서 본 대로, 박헌영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에 북한 공산당의 간부들과 한 차례 협의회를 가졌으나, 그것은 공식회의가 아니었다. 그런데 7월에 서울에 왔다가 다시 방북했을 때에는 북조선 공산당 조직위원회 상무위원회가 두 차례 열렸다. 회의에서는 주로 3당합당, 정판사사건, 단독정부수립, 좌우합작, 그리고 박헌영이 제기한 “정당방위에 의한 신전술”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좌우합작에 대해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의견이 달랐다. 김일성은 모스크바로 가면서 김책에게 지시하여 성시백을 다시 서울로 보냈는데, 성시백은 서울에서 여운형과 비밀리에 만나 좌우합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 여운형의 편지를 가지고 갔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뒤 김일성은 이 편지에 대한 답신을 써서 성시백으로 하여금 여운형에게 전하게 했다. 성시백은 7월 18일 전후에 다시 서울로 왔다.
박헌영은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미국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철저히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조선노동당 상무위원 가운데에도 박헌영과 같은 의견을 보인 사람들이 있었다. 김일성은 여운형의 편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은 채 신문을 보니까 여운형이 미국의 입장을 좇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또 “좌우합작운동이 우리 의도대로 되지 않고 미국의 의도가 관철된다면 그때 가서 깨버려도 되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66)
김일성은 박헌영의 “정당방위에 의한 신전술”, 곧 합법투쟁과 비합법투쟁을 배합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았다.67) 그는 “박헌영 동지가 군중의 힘으로 미군정을 제압하는 정면대결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미군정의 탄압을 부채질할 가능성이 크고 결국 3당합당에도 지장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3당합당도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68)
이처럼 박헌영은 북한 공산당 간부들과의 의견차이만 확인한 채 7월 22일에 서울로 돌아왔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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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憲永의 딸 비비안나와 그녀에게 보낸 朴憲永의 러시아어 편지. |
3. “李承晩은 필요한 기간 이상으로 오래 살았다”
좌우합작에 대한 미군정부의 생각은 미소공위 미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와 있던 데이어(Charles W. Thayer)가 미국무부 일본과장 보튼(Hugh Borton)과 나눈 대화록에 잘 드러나 있다.
7월 초에 귀국한70) 데이어는 7월 16일에 국무부로 보튼을 방문했다. 데이어는 군정부가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하면서 양 극단, 곧 극우의 이승만파와 소련의 사주를 받는 공산주의자들을 배제시키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그는 인민당 당수 여운형 휘하의 비공산주의 좌익을 좌우합작에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성공적이라는 것이 입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합작에 대한 우익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중심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고려하고 있는 김규식을 지지하도록 김구를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머지않아 설립될 입법기관에는 선출직 의원과 임명직 의원의 수가 같도록 할 것인데, 임명직 의원에는 하지 장군의 말대로 ‘강력한 좌익’이 임명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 대화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데이어의 이승만에 대한 당돌한 언급이다. 데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인들이 느끼는 그의 권위의 어느 정도가 군정부의 그에 대한 지지 때문이고 어느 정도가 그의 망명 애국자로서의 명성 때문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점령 초기에 이승만이 귀국한 것이 몇백 개나 되는 한국정당들을 어느 정도 통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승만은 그가 필요한 기간 이상으로 오래 살았고, 한국의 정치무대로부터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데이어는 이어 이승만이 “뒤늦게 자신이 좌우합작에 책임이 있음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71)
“프란체스카가 野心이 너무 많은 것이 李承晩의 문제점”
데이어의 이러한 주장은 이 시점의 하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좌우합작과 이승만에 대한 하지의 생각은 7월 7일에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좌우합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아직도 일찍이 한국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과 같은 만족스럽지 못한 지난날의 기준에서 작업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들 이른바 ‘지도자들’ 가운데 이 쓰레기더미에서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지금 진정한 좌우합작을 시도하고 있다.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이고 있기는 하나 종착점이 보이는 길목에 접어들기까지는 아직 한참 멀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현재 어느 정도 합의에 도달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따라올지 모르겠다.”
이어 하지는 이승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승만은 갈수록 악성 방해요인이 되고 있다. 그는 지난 주에 1905년에서 1919년 사이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봉기를 획책했다. 본인은 부인하나, 확실한 증거가 있다. 이승만의 문제점은 그의 오스트리아 부인이 야심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72)
이승만에 대한 데이어나 하지의 이러한 평가는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고 또 비현실적이었다. 그 보기로 바로 이 시점에 실시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들 수 있다. 7월 초에 새로 설립된 한국여론협회는 7월 17일에 사람이 많이 다니는 서울의 종로, 남대문, 종로4가 세 곳에서 통행인 6,671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제1차 대통령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1,916명(29%)이 이승만을 꼽았다. 김구가 702명(11%)으로 그 다음인 것도 변함이 없었다. 이어 김규식의 지지도도 급증했으나 초대 대통령으로 그를 꼽은 사람은 694명(10%)뿐이었다. 다음으로는 여운형 689명(10%), 박헌영 84명(1%), 기타 110명(2%)의 순이었고, 모르겠다고 대답한 사람이 2,476명(37%)으로 가장 많았다.73)
좌우합작 뉴스가 연일 지면을 메우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과 김구는 배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국민들의 상대적인 지지도에는 변함이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를 비롯한 군정부 관계자들이나 국무부의 한국담당자들이 이승만과 김구를 그토록 폄훼한 것은 이후 미군정부 정책의 혼선을 더욱 증폭시키는 큰 요인이 되었다.
“美國의 장단에 놀아나지 말라”
박헌영은 평양에서 돌아오자마자 민족전선 내 공산당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거듭 강조하면서 좌우합작을 파탄시키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여운형에게 “미국의 장단에 놀아나지 말라”고 경고하고, 합작위원회는 또 하나의 실패작이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또 만일 남한의 좌익이 북한의 좌익으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는다면 한국의 모든 우익 반대파는 단시일 안에 구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헌영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여운형은 자기는 합작 노력을 그만두기에는 이미 너무 깊이 김규식에게 개입되어 있고, 또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는 그것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의 정치고문 랭던(William R. Langdon)은 “이번 싸움으로 여운형의 박헌영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과 필연적인 적개심이 표면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적었다. 여운형은 군정부의 미국인들에게 7월 27일에 열릴 위조지폐사건 공판을 이용하여 징역을 보낸다든가 하여 이번 기회에 박헌영을 단호하게 다루는 것이 미국의 계획을 성공시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넌지시 귀띔하기까지 했다. 미국인들이 여운형에게 공산당이 좌우합작을 방해하려 한다는 사실을 왜 자신이 직접 폭로하지 않느냐고 묻자 여운형은 남한의 많은 노동자, 농민, 청년들이 자기와 박헌영에게 충성을 나누어 보내고 있는데, 만일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분열이 있는 것이 알려지면 그것은 합작작업에 해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여운형은 또 이 시점에서 박헌영이 위세를 잃게 되면 이들 세력의 상당부분을 자신이, 따라서 미국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운형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랭던은 “여운형은 도덕적 용기가 모자라거나 박헌영을 폭로할 수 없을 만큼 공산주의자들과 비밀스럽게 깊이 연계되어 있으면서 우리가 그러한 처지에서 자기를 구출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라고 분석했다.74) 그것은 올빼미 밤눈 같은 통찰력이었다.
德壽宮에서 정식회담 열어
박헌영이 평양으로부터 돌아오고 사흘이 지난 7월 25일 오후 2시에 마침내 덕수궁에서 제2차 정식 예비회담이 열렸다. 이날의 회담에는 허헌을 제외한 위원 9명이 모두 참석했다. 회담에서는 이 회담을 제1차 정식회담으로 격상시켜 14개항의 <의사진행규정>을 채택하고, 좌우익에서 각각 비서국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우익에서는 영문비서로 김규식의 아들 김진동과 국문비서로 송남헌(宋南憲)이, 좌익에서는 영문비서로 황진남과 국문비서로 김세용(金世鎔)이 선임되었다.75) 채택된 <의사진행규정>에는 “5.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 소수의 보고서나 성명서는 위원회를 통하여 동일하게 공개한다”, “6. 위원회의 모든 성원은 본 위원회의 부칙에 명시된 이외의 특정조직을 통하여 개인적, 집단적으로 독자의 보고서, 성명서, 코뮈니케를 발행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한다”, “10. 각 진영에서 최소 3명의 대표가 참석하지 않으면 어떤 회합도 공식회합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각 진영에서 최소 3명의 대표가 찬성하지 않으면 어떤 결정도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는 등의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76)
이어 제2차 정식회담을 7월 27일에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제2차 회담부터는 합작원칙을 중심으로 토론하기로 합의했다. 이날의 회담결과는 이튿날 제1호 성명으로 발표되었다.77)
좌우익의 대표적 정당 및 단체들의 공식적 지지 아래 좌우합작위원회가 정식으로 가동함에 따라 좌우합작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左翼이 기습적으로 ‘합작 5원칙’ 발표
그러나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궤도에 오른 좌우합작 회담은 이튿날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27일의 정례회담에 좌익 대표들이 제출하기로 한 좌익의 ‘합작 5원칙’을 7월 26일에 민족전선이 기습적으로 발표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1)조선의 민주독립을 보장하는 3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의 속개촉진운동을 전개하여 남북통일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매진하되,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과도 직접 회의하여 전국적 행동통일을 기할 것.
(2)토지개혁(무상몰수, 무상분여), 중요산업 국유화, 민주주의적 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제기본과업 수행에 매진할 것.
(3)친일파, 민족반역자, 파쇼 반동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러를 철저히 박멸하며,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 석방을 실현하여 민주주의적 정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
(4) 남조선에서도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치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하도록 기도(企圖)할 것.
(5) 군정고문기관 또는 입법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78)
이처럼 변칙적으로 좌익의 ‘5원칙’이 발표되자 좌우합작위원회의 우익대표인 원세훈은 27일에 좌익이 <의사규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고,79) 이에 대해 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은 “민족전선의 원칙과 합작위원의 원칙이 동일한 경우라도 그 내용이 동일할 뿐 의견발표기관이 동일한 것이 아니므로 민족전선이 합작위원회의 <의사규정>을 위반한 것이 아니다”라는 궤변으로 변명했다.80)
그러나 <의사규정> 위반이 문제가 아니었다. 민족전선의 ‘5원칙’은 우익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본대로, 소련이나 북한당국의 방침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박헌영의 위기감에 따른 모험주의의 소산이었다.
7월 27일의 제2차 정례회담도 좌익대표들의 불참으로 말미암아 유회되었다.⊙
1) 정용욱,《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p. 269~270.
2) Mark Gayn, The Japen Diary, William Sloane Associates, Inc. 1948, pp. 357~358. 3) 鄭秉峻, <1946~47년 左右合作運動의 전개과정과 성격변화>,《韓國史論》29, 서울大學校國史學科, 1993, p. 252. 4)《東亞日報》1946년 5월29일자, <民共合作交涉流會>. 5) 《朝鮮日報》1946년 6월16일자, <左右合作具象化?>. 6) 《朝鮮日報》1946년 6월19일자, <三原則에 意見合致>. 7) 《朝鮮日報》1946년 6월21일자, <뿔조아共和國은 共産안이다>. 8) 《朝鮮日報》1946년 6월21일자, <左右合作合意說은 浮說>. 9) 《朝鮮日報》1946년 6월22일자, <一國만에 主從外交 버리라>. 10) 《東亞日報》1946년 6월23일자, <注目되는 政界動靜>.
11) 《朝鮮人民報》1946년 6월28일자, <左右要人會談頻繁>. 12) 《朝鮮人民報》1946년 6월28일자, <李博士, 金奎植宅에 訪問要談>. 13) 宋南憲, 尹錫五 證言, 孫世一, 『李承晩과 金九』, 一潮閣, 1970, p. 445 ; 姜元龍, 金淳愛 證言, 李庭植, 『金奎植의 生涯』, 新丘文化社, 1974, pp. 140~141. 14) 金淳愛 證言, 李庭植, 위의 책, p. 141. 15) Rhee to Goodfellow, Jun. 27, 1946,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 1』, 國史編纂委員會, 1996, p. 99. 16) Robert T. Oliver,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A Personal Narrative,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p. 36.
17) 《서울신문》 1946년 7월2일자, <立法機關設置提案>. 18) 《東亞日報》 1946년 7월10일자, <美國의 國會와 같다>. 19) 《東亞日報》 1946년 7월10일자, <南朝鮮福利爲해서 必要>. 20) 《서울신문》 1946년 7월2일자, <金,呂兩氏努力奏效確信>. 21) 《서울신문》 1946년 7월2일자, <敦岩莊緊張>. 22) 《大東新聞》 1946년 7월2일자, <金博士의 努力을 支持>. 23) 《서울신문》 1946년 7월3일자, <民議, 緊張裡에會議>. 24) 《서울신문》 1946년 7월3일자, <統一의 基本問題>. 25) 《서울신문》 1946년 7월4일자, <成功되길 懇望>. 26) 『駐韓美軍史(2)(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이하 FUSAFIK 2)』, 돌베개影印版, 1988, p. 201. 27) 《서울신문》1946년 7월11일자, <左右兩陣營의 合作交涉委員> ;《獨立新報》1946년 7월17일자, <合作工作本格化>.
28) 『駐韓美軍史(2) (FUSAFIK 2)』, p. 202. 29) 《獨立新報》1946년 7월13일자, <뻐취氏民戰訪問>. 30) 《서울신문》1946년 7월11일자, <金奎植博士入院>. 31) 《獨立新報》1946년 7월17일자, <合作工作本格化>. 32) 《自由新聞》1946년 6월21일자, <當面한 우리 義務> ;《中央新聞》1946년 6월21일자, <共委再開에 總力>. 33) 《朝鮮人民報》1946년 7월14일자, <左右合作에 關하여 朴憲永氏放送>. 34) 鄭秉峻, 앞의 글, p. 265. 35) 《서울신문》1946년 7월19일자, <呂運亨氏殺害計劃> ;《東亞日報》1946년 7월19일자, <呂氏暗殺未遂>. 36) 鄭秉峻, 앞의 글, p. 265. 37) 《東亞日報》1946년 7월24일자, <本格化한 左右合作交涉>. 38) 《서울신문》1946년 7월24일자, <左右合作工作本軌道에>. 39) 김학준,《북한의 역사(2) 미소냉전과 소련군정 아래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건국》,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8, pp. 333~334.
40) 김영수, <북한지역의 정치적 동태와 소군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한국현대사의 재인식(1) 해방정국과 미소군정》, 오름, 1998, pp. 248~249. 41) 木村光彦 編譯,《旧ソ連の北朝鮮經濟資料集 1946-1965年》, 知泉書館, 2011, pp. 30~31. 42) 김영수, 앞의 글, pp. 247~248. 43)《東亞日報》1946년 5월18일자, <포ㅡ레使節團着京> ;《朝鮮日報》1946년 5월18일자, <포ㅡ레大使의 隨員 十名도 來朝>. 44) 김학준, 앞의 책, pp. 319~320.
45) Pauley to Truman, Jun. 22, 1946,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6, vol.Ⅷ, pp. 706~709. 46) Truman to Pauley, Jul. 16, 1946, FRUS 1946, vol.Ⅷ, pp. 713~714. 47) Truman to Patterson, FRUS 1946, vol. Ⅷ, p. 721.
48)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출판사, 2010, pp. 65~68. 49) 《朝鮮人民報》1946년 6월12일자, <左右統一한 代表機關으로>. 50)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中央日報社, 1992, p. 234. 51)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p. 68~69.
52)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하)》, 中央日報社, 1993, pp. 210~211. 53)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 65. 54) 레베데프 證言,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p. 326~327. 55) 레베데프 證言, 코로트코프 지음, 어건주 옮김, 『스탈린과 김일성(Ⅰ)』, 東亞日報社, 1992, p. 244. 56) 위의 책, p. 237. 57) 같은 책, p. 242. 58) 같은 책, p. 245. 59)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329.
60) 임경석,《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 p. 348. 61) 코로트코프 지음, 이건주 옮김, 앞의 책, p. 237. 62) 위의 책, pp. 243~244. 63)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329. 64) 중앙일보특별취재반,《秘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 45. 65)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 66, pp. 73~74. 66) 위의 책, pp. 69~77. 67) 같은 책, pp. 81~82. 68) 같은 책, p. 82. 69) Langdon to Byrnes, Aug. 2, 1946, FRUS 1946, vol. Ⅷ, p. 722.
70) 《서울신문》1946년 7월7일자, <本國과 協議次 데이어氏歸美>. 71) “Memorandum of Conversation Held in the Division of Japanese Affairs”, Jul. 16, 1946, FRUS 1946, vol. Ⅷ, pp. 715~716. 72) Hodge to Goodfellow, Jul. 7, 1946, 『大韓民國史資料集(28), 李承晩關係書翰資料集 1』, p. 120. 73) 《東亞日報》1946년 7월23일자, <初代大統領은 누구?>.
74) Langdon to Byrnes, Aug. 2, 1946, FRUS 1946, vol. Ⅷ, p. 723. 75) 《東亞日報》1946년 7월26일자, <合作에 最終의 準備> ;《獨立新報》1946년 7월26일자, <合作正式會談, 昨日德壽宮서開催>. 76) 鄭秉峻, 앞의 글, p. 266. 77) 《朝鮮人民報》1946년 7월27일자, <左右合作本귀道로>. 78) 《東亞日報》1946년 7월27일자, <民戰의 五原則提示>. 79) 《朝鮮人民報》1946년 7월28일자, <五大原則發表는 遺憾>. 80) 《朝鮮人民報》1946년 7월28일자, <議事規定違反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