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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84)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信託統治反對鬪爭을 ‘새로운 獨立運動’으로

글 : 손세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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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3國外務長官會議에서 韓國에 대한 信託統治가 결정되자 신탁통치반대의 회오리바람이 전국을 휩쓸었다. 金九는 ‘새로운 獨立運動’이라면서 反託運動에 앞장섰다.
 
  李承晩은 반탁운동이 美軍政府를 반대하는 운동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臨時政府의 ‘주권행사’에 반대한 宋鎭禹가 30일 새벽에 暗殺되자 李承晩은 방바닥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臨時政府는 內務部長 申翼熙 명의의 「國字」 1, 2호로 정권 접수를 선포했다. 金九는 격노한 하지의 요구로 파업을 중지하고 직장으로 복귀하라고 방송했다.
 
  左翼政派들도 처음에는 信託統治에 반대했으나, 朴憲永이 平壤에 다녀온 뒤에 贊託으로 돌아섰다. 1월 3일에 열린 左翼 주최의 대규모 反託大會는 하룻밤 사이에 贊託大會로 돌변했다.
 
  金九는 非常政治會議를 소집할 것을 제의했다.
 
  各政派들의 행동통일을 위한 4大政黨會議가 열려 공동성명까지 발표했으나 무산되고, 뒤이어 열린 5大政黨會議도 신탁통치문제를 둘러싼 의견대립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國字」布告로 정권접수선언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3국(미국, 소련, 영국) 외무장관회의(3상회의)의 한국문제처리에 관한 결정은 전후 국제정치의 대표적인 스캔들의 하나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남북 분할점령 상태를 타결하기 위한 합의가 아니라 분단을 고착시키는 애매한 합의였기 때문이다. 그 결정문의 원안은 소련안이었다. 그것을 미 국무장관 번즈(James Byrnes)가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문제에 대한 몰로토프(Viacheslav M. Moltov) 소련 외상의 양보를 기대하면서1), 어떤 문제든 합의하기 전에 자기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한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의 지시를 어기고,2) “사소한 수정을 가하여” 받아들인 것이었다. 모스크바주재 미국대사대리로서 3국외무장관회의에 참석했던 케넌(George F. Kennan)은 “번즈 장관은 한국인, 루마니아인, 이란인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었고, 오로지 어떤 조건에서건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했다”고 기술했다. 케넌에 따르면, 3국외상회의의 결정은 번즈가 ‘해방된 유럽’에 대한 얄타선언의 파탄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하여 도출한 “동유럽 여러 나라에 대한 노골적인 스탈린 독재를 가리기 위하여 민주적인 절차를 가장하는 무화과 나뭇잎”에 지나지 않았다.3)
 
  3국외무장관회의가 시작되던 12월 16일에 하지(John R. Hodge) 미군사령관은 도쿄(東京)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한국의 정치정세를 종합적으로 보고하면서,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모든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신탁통치’가 다모클레스(Damocles)의 칼처럼 드리워져 있다. 지금 또는 장차 어느 시기에고 신탁통치가 강제된다면 한국 국민은 실제로 물리적인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라고 보고했고, 하지의 이러한 보고에 대한 미국정부의 고려는 모스크바에 가있는 번즈에게도 통보되었다.4)
 
 
  蘇聯이 1國 信託統治 주장한다고 와전돼
 
韓國처리문제에 대한 소련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번즈 美국무장관.
  3국외무장관회의의 한국문제 토의 내용에 관한 뉴스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합의문이 발표되기 이틀 전인 12월 26일 밤중이었다. 그것은 12월 25일에 워싱턴에서 AP통신이 전한 추측기사였다. 당시 AP통신은 합동통신과, UP통신은 조선통신과 계약하고 있었는데, 이 기사는 AP와 UP가 다 보내왔다.5)
 
  “[워싱턴 25일발 합동(合同) 지급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외상회의를 계기로 조선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을까 하는 관측이 농후하여 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야 즉시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3국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 선언에 의하야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1국신탁통치를 주장하야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그것은 오보였다. 신탁통치는 제2차세계대전 기간에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미국대통령이 식민지제국에 대한 전후처리 방안으로 주장해 온 것이었다.
 
  이 충격적인 뉴스는 12월 27일자 도하신문에 일제히 크게 보도되었다. 『조선일보(朝鮮日報)』는 1면 제호 옆에 “신탁통치설을 배격함”이라는 내리닫이 사설과 함께 4단 머리기사로, 『동아일보(東亞日報)』와 『자유신문(自由新聞)』, 『신조선보(新朝鮮報)』 등은 1면 머리기사로, 『서울신문』과 『중앙신문(中央新聞)』 등은 1면 중간 톱이나 2단박스기사로 다루었다. 부산에서 발행되는 『민주중보(民主衆報)』도 같은 기사를 3단 머리기사로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전국 중요도시의 신문들이 대부분 이 합동통신 기사를 크게 다루었을 것이 틀림없다. 좌익신문들은 좌익정당들의 압력으로 조선통신이 UP통신 기사 배포를 보류했기 때문에 보도하지 않았다.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의 사장 홍증식(洪增植)은 중대한 기사를 임의로 보도했다고 합동통신에 항의하기까지 했다. 좌익정당들이 이 기사를 보도하지 못하게 한 것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것이 국민들의 큰 반발을 살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사의 파장이 얼마나 컸던가는 하지 사령관이 군정청의 보도부장을 합동통신사로 보내어 AP통신 원문을 요구한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6) UP통신 기사는 12월 26일자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The Washington Times Herald)』에도 실렸고, 일본 도쿄에서 발행되던 『스타즈 엔드 스트라이프스(The Stars and Stripes)』 태평양판은 12월 27일자에 AP와 UP의 기사를 종합해서 보도했다.7)
 
 
  “5年은커녕 5個月도 反對”
 
  하지의 예측은 과장이 아니었다.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한국민주당과 국민당 등 우익정파들이었다. 국민당은 12월 27일 오후 1시에 긴급간부회의를 열고 “소련의 신탁통치 주장은 불가해한 일”이며 신탁통치 등의 주장을 하는 나라는 “어떠한 국가임을 묻지 않고 3천만의 총력을 모아 최후까지 반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8) 그러면서도 국민당 당수 안재홍(安在鴻)은 이 보도의 오보일 가능성을 지적하고 “지레부터 경솔한 태도를 가짐은 삼갈 필요가 있다”고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9)
 
  한민당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27일 오후 3시에 당사에서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소련의 한국신탁통치안을 절대로 배격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한민당은 한국신탁통치안이 제의되는 것은 “국제신의를 무시하며, 조선의 생명적 발전을 저해하며, 동아시아인의 평화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부대결의로 (1)위의 결의를 미-소당국에 통보할 것과 (2)신탁통치 반대와 완전독립 촉성을 위하여 각 당파와 제휴하여 국민운동을 제의할 것을 결의했다.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의 오하영(吳夏英)도 당을 대표하여 “신탁통치 운운을 듣고 우리 당은 각당 각파 각단체에 당원을 보내어 같이 협조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는 좌익도 우익도, 단체도 개인도 통틀어서 한 뭉치가 되어 이에 철두철미 반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10)
 
  좌익정당 인사들도 신탁통치는 단연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조선인민당의 총무 이여성(李如星)은 “신탁통치안은 그 어느나라임을 불구하고 조선인으로서는 원치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소련은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의 나라로서 그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에 … 조선땅위에 있는 모든 것은 조선인의 것이다라고 성명해 주어 조선인은 누구나 소련에 대하여 뜨거운 감사의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런 나라로서 돌연히 조선신탁통치를 말한다고 하는 것은 보도의 착오가 아닌가 의심치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11)조선공산당의 대변인 정태식(鄭泰植)도 “우리는 확실한 자료를 가지지 못해서 지금 경솔히 이 문제에 관하야 운운할 수 없으나, 만일에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사실이라고 하면 우리는 절대로 반대한다. 5년은커녕 5개월간의 신탁통치라도 우리는 절대로 반대한다”라고 잘라 말했다.12)
 
  또한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조선의 완전자주독립이라는 것은 우리 인민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이다. … 우리 조선은 어떠한 이유로도 신탁통치를 실시할 근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한 노선에서 더욱 시급히 민족의 총력을 집결하여 진보적 민주주의의 자주국가 달성에 단호 매진할 뿐이다”라고 성명했다.13)
 
 
  “是日也 또 放聲大哭”
 
  3국외무장관회의의 공동성명은 워싱턴시간으로 27일 오후 10시, 런던시간으로 28일 오전 3시, 모스크바시간으로 28일 오전 6시에 동시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 중요 내용은 공식발표 이전부터 외신으로 국내에도 잇달아 전해졌다. 공동성명의 한국관계 항목은 (1)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하고 장기간에 걸친 일본지배의 결과를 신속히 제거하기 위하여 한국의 산업, 운수, 농업과 한국인의 민족문화를 발전시킬 임시 한국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임시 한국 민주정부의 조직을 돕기 위하여 남한주둔 미군사령부와 북한주둔 소련군사령부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공동위원회는 임시 한국 민주정부와 한국의 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하여 한국의 민족적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실시할 4강국(미국, 소련, 영국, 중국)에 의한 5년동안의 신탁통치계획을 작성한다, (4)남북한의 당면한 긴급문제들과 미-소양군사령부 사이의 행정 및 경제문제에 대한 항구적인 협조를 구축할 방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양군사령부 대표회의를 2주일안에 개최한다는 네 가지였다.14)
 
  이에 비하여 회의 벽두에 번즈가 제시한 미국의 한국문제 처리방안은 남북한에 걸친 통합행정기구를 즉시 수립하여 고등판무관(High Commissioner)과 4강국의 대표로 구성되는 집행위원회가 유엔헌장에 따른 신탁통치를 5년동안 실시하되 5년이 넘지 않는 범위안에서 연장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15) 남북한에 걸친 통합행정부를 즉시 수립하여 독립할 때까지 미국 주도로 국제연합헌장에 따른 4강국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미국정부의 구상이, 두 주둔군 사령관이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5년이내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었다. 어떤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인지는 공동위원회가 결정하기로 했다. 그것은 두 사령관의 합의 없이는, 곧 미소양국의 최종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될 수밖에 없는 조건으로 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렇게 하여 10월 20일의 미극동국장 빈센트(John C. Vincent)의 발언으로 큰 물의를 빚은 신탁통치 문제는 마침내 청천벽력과 같은 현실문제가 되었다.
 
  12월 28일 밤부터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해방 직후처럼 담벼락과 판자마다 포스터며 혈서며 전단 등이 나붙고, 여기저기 사람들이 모여 선 곳에서는 가두 연설이 기세를 올렸다. 신문들은 앞장서서 신탁통치 반대캠페인을 벌였다. 신탁통치 결정이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과 같은 것이라는 뜻으로 장지연(張志淵)의 유명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날에 목놓아 크게 운다)”을 본떠 주먹만한 활자로 “삼천만·시일야 또 방성대곡”이라고 헤드라인을 뽑은 신문도 있었다.16)
 
 
  임시정부가 反託運動 주도해
 
  이틀전에 신탁통치를 강렬하게 반대하는 라디오 방송연설을 했던 이승만은 3국외상회의 결정 뉴스가 전해진 12월 28일 내내 말없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러한 그의 앞에서 임영신(任永信)은 다리를 뻗고 울었다. 이승만은 말없이 저녁을 들고 나서 마당을 산책한 다음 윤석오(尹錫五) 비서에게 간단한 성명문을 구술했다.
 
  “이 신탁통치에 대하여 미국무성 원동사무부장인 빈센트 씨가 누차 사한(私翰)과 공식 선언으로 표시한 바가 있으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과가 될 줄 예측하고 이미 준비한 방책이 있어 그 방침대로 집행할 결심이니, 모든 동포는 5개년 단축시기라는 감언에 넘어가지 말고 일시에 일어나서 예정한 대로 준행하기를 바라며, 따라서 우리 전국이 결심을 표명할 시에는 영, 미, 중 각국은 절대 동정할 줄 믿는다.”17)
 
  이처럼 이승만은 이제 연합국을 언급하면서도 소련은 제외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한 것은 임시정부였다. 임시정부 인사들 가운데서도 김구 자신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28일 오후 4시부터 경교장(京橋莊)에서 열린 긴급 국무위원회에는 국무위원 거의 전원이 참석했다. 열띤 토론 끝에 신탁통치 문제에 대처하는 방침으로 우선 (1)전 국민에게 신탁제 반대와 불합작운동을 전개할 것을 촉구하고, (2)즉시 재경 정치단체 및 종교단체 대표 2명씩을 소집하여 반대운동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신문기자들도 참석하게 하며, (3)신탁제도를 반대하는 전문을 4대연합국에 급전으로 발송하고, (4)미-소군정당국에 질의하고 임시정부의 태도를 표명한다는 4개항을 결의했다.18)
 
  연락을 받은 각 정당 및 종교단체대표들과 신문기자 등 70여명이 경교장으로 달려왔고, 저녁 8시부터 임시정부 인사들과 각계 대표들의 합동회의가 열렸다. 김구의 인사말은 결연했다.
 
  “해외에서 30년동안 싸우다가 고국의 강토를 밟게 되어 3천만 동포를 해후케 될 때에 이 사람은 3천만 동포와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언명한 바 있다. 불행히도 이 사람의 말이 들어맞아서 지금부터 새 출발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19)
 
 
  面단위까지 國民總動員委員會 조직하기로
 
  먼동이 틀 때까지 진행된 회의에서는 “우리는 피로써 건립한 독립국과 정부가 이미 존재하였음을 다시 선언한다”는 선언서 채택과 함께 신탁통치를 반대하기 위한 기구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총동원위원회의 기관은 중앙과 군(郡), 면(面)에 분설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 지도를 받으며, 위원 7명을 선출하여 해외에 대한 지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리고 총동원위원회의 장정위원(章程委員)으로 각파를 대표하여 김구, 조소앙(趙素昻), 김원봉(金元鳳), 조경한(趙擎韓), 유림(柳林), 신익희(申翼熙), 김붕준(金朋濬), 엄항섭(嚴恒燮), 최동오(崔東旿) 9명을 선정했다.20)
 
  철야회의를 마치고 귀가했던 회의참석자들은 29일에도 150여명이 경교장에 모여 오후 2시부터 회의를 속개했다. “평소의 시비곡절을 버리고 일치단결하여 나라를 찾자”는 김구의 인사말에 이어 국무위원회 비서장 조경한으로부터 전날밤 회의의 결의사항과 이날 오전의 국무위원회에서 결의한 「국민총동원위원회 조직조례」의 보고가 있었다. 「조직조례」는 위원회의 조직규모를 중앙위원의 위원 수는 60명내지 90명, 도위원은 35명내지 50명, 군위원은 20명내지 30명, 면위원은 7명내지 15명으로 구성한다고 하여 방대한 조직을 상정했다. 그리고 경비는 지원자의 헌금과 정부의 보조금으로 충당한다고 했다.21) 이러한 「조직조례」의 규정은 김구가 말한 “새로운 독립운동”의 결의와 임시정부의 ‘정부’로서의 의욕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회의는 임시정부의 장정위원 9명으로 하여금 좌우익정당과 각계각층을 망라한 중앙위원 90명을 당장 선정하여 30일에 발표하도록 결의했다. 중앙위원을 선정하기 위하여 오후 5시에 임시정부 인사들이 퇴장한 뒤에 회의는 안재홍이 임시의장이 되어 주재했다. 장시간 열띤 토의를 계속한 끝에 “우리 임시정부에 즉시 주권행사를 간망(懇望)할 것”이라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그것은 38도 이남의 “유일한 정부”인 미군정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결의안이었다. 안재홍은 임시정부가 귀국한 직후에도 김구에게 비슷한 취지의 건의를 했었다. 회의는 또 좌우익 각 정당과 단체 및 시민 각계각층을 망라한 신탁관리 반대의 시민시위대회를 31일 오후 3시에 종로에서 열기로 했다.22)
 
 
  임시정부의 ‘주권행사’문제로 논쟁 벌어져
 
  그런데 임시정부에 즉시 주권행사를 간망하자는 결의안에 대해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 같다. 미군정부가 본국정부로부터 3국외무장관회의 공동성명의 전문을 통보받은 것은 29일이었다. 하지 사령관은 정오에 한민당, 국민당, 인민당, 공산당, 신한민족당 등의 영수들을 군정청으로 초청하여 3국외무장관회의의 공동성명 내용을 설명하고, “번즈 국무장관은 모스크바를 출발하기에 앞서 나에게 내 뜻대로 해줄 것을 약속했다. 결코 조선에 해로운 제도가 아니다”라고 설득했다.23) 하지는 또 아널드(Archibald V. Arnold) 군정장관에게 임시정부선전부장 엄항섭을 불러 자제를 촉구하게 하고, 자신은 가장 신뢰하는 자문위원인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宋鎭禹)를 따로 만나 임시정부를 설득해 줄 것을 당부했다.24)
 
  김준연(金俊淵), 장택상(張澤相)과 함께 29일 회의에 참석한 송진우는 미군정부를 부인하고 정권을 접수하자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미국은 여론의 나라이므로 국민운동으로 의사를 표시하면 신탁통치안이 취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한국독립을 적극 지지하는 중국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고 한다. 미군정부와의 충돌은 미국을 비롯한 민주진영 국가들과의 충돌을 빚을 염려가 있고, 혼란이 야기되면 결국은 공산당만 어부지리를 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하(古下·송진우)는 찬탁이오?”
 
  “찬탁이 아니라 방법을 신중히 하자는 것이오. 반탁으로 국민을 지나치게 흥분시킨다면 뒷수습이 곤란할 것이니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서 시국을 원만히 수습해야 하지 않겠소.”
 
  이러한 논쟁은 곧 송진우는 신탁통치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것처럼 와전되었다.25)
 
 
  임시정부와 韓民黨은 일찍부터 親日派 논쟁
 
해방정국 정치테러의 첫 희생자가 된 송진우.
  임시정부의 정통성 지지를 명분으로 하여 좌익정파와 강력히 대결해 온 한민당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직후부터 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빌미가 된 것은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처리문제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에 앞서 송진우는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금융단과 실업계 인사들로부터 900만원의 후원금을 거두어 임시정부 요인 제2진이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국민대회준비회 대표자격으로 장택상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들을 방문하여 그 자금을 전달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서는 그 자금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돈이 섞여 있으므로 받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무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 이 자금을 돌려주기로 결의했다. 그 자금의 처리문제로 국민대회준비회 사무실에서 조완구, 엄항섭 등 임시정부 인사들과 송진우, 장덕수(張德秀) 등 국민대회준비회 인사들의 회의가 열렸다. 격론 끝에 주먹다짐이 벌어질 것 같은 상황이 되자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송진우가 일어나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정부가 받는 세금에는 양민의 돈도 들어있고 죄인의 돈도 들어있는 것이오. 이런 큰 일에 그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 줄 아오.”
 
  이렇게 하여 자금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해결되었다.26)
 
 
  李承晩은 방바닥 치며 울어
 
  29일의 회의를 마치고 자정이 훨씬 넘어 귀가한 송진우는 30일 아침 6시16분에 원서동의 자택에서 테러리스트 한현우(韓賢宇) 일당 6명의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13발 가운데 6발이 명중했다. 이렇게 하여 송진우는 해방정국에 잇따른 정치테러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쉰여섯살이었다. 송진우는 그가 중심이 되어 추진해 온 국민대회를 1946년 1월 10일에 개최하기로 하고 두차례에 걸쳐 헌법기초위원까지 발표해 놓고 있었다.
 
  송진우의 죽음은 이승만에게 여간 큰 충격이 아니었다. 감기로 몸져 누워있던 그는 손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이성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울었다.27) 이승만은 이 무렵부터 1946년 1월 중순까지 심하게 앓았다. 간병은 임영신이 했다.
 
  이승만은 송진우를 위해 다음과 같은 만시(輓詩)를 지었다.
 
  義人自古席終稀
  一死尋常視若歸.
  擧國悲傷妻子哭
  臘天憂里雪霏霏.
 
  의인은 예부터 명대로 죽기 드물고
  한번 죽음을 심상히 여겨 제집 돌아가듯 한다.
  온 나라가 설워하고 처자는 곡하는데
  섣달 그믐 망우리에 부슬부슬 눈이 내린다.
 
  송진우의 암살은 처음에는 공산당의 소행으로 짐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임시정부 내부에 송진우의 온건한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을 우려한 김구쪽이 배후에서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커졌다.28) 그리하여 송진우의 암살을 계기로 임시정부와 한민당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中央委員 76명에 呂運亨은 제외돼
 
  송진우가 암살된 30일의 오후 12시반쯤에 아널드 군정장관이 돈암장(敦岩莊)을 방문하여 한시간 가량 이승만과 요담을 나누었다.29) 아널드가 돈암장을 방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요담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송진우의 암살사건을 비롯하여 3국외무장관회의 결정 내용 설명과 김구가 주도하는 과격한 반탁운동과 관련하여 이승만의 협력을 당부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28일 저녁부터 시작된 반탁운동은 거족적인 회오리바람이 되고 있었다. 거리는 시위행렬로 메워졌고, 상가는 철시했다. 극장과 댄스홀 등 유흥업소까지 일제히 휴업에 들어갔다. 29일 정오에는 군정청의 한국인 직원 3,000여명도 신탁통치 반대와 총사직을 결의하고 시내를 행진했다. 같은 날 오후 2시에는 전국 검찰과 법원 및 재야법조인들이 긴급회의를 열고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결의하고,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함”이라고 천명했고, 같은 시간에 서울시내 각 경찰서장들도 종로서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신탁통치 배격을 결의했다.30) 그리고 30일에는 서울시청 직원들도 총사직을 결의했다.31) 같은 날 경성(서울)대학의 교직원, 학생대표, 간호원 등 500여명이 백남운(白南雲)의 사회로 반탁대회를 개최하고 총사직을 결의했고, 조선학술원, 조선문학가동맹, 조선과학자동맹, 조소문화협회, 진단학회, 조선어학회 등 학술 및 문화단체 대표들도 반탁성명서를 발표했다.32)
 
  이날 국민총동원위원회 장정위원들은 권동진(權東鎭)을 위원장, 안재홍과 김준연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위원 76명을 선정하여 발표했다. 이 명단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한민당의 김성수(金性洙), 공산당의 박헌영은 물론 북한에 있는 조선민주당의 조만식(曺晩植)과 독립동맹의 김두봉(金枓奉), 김무정(金武亭), 재일무정부주의운동가 박열(朴烈)까지 포함하여 남북한에 걸친 좌우익 정당과 종교계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하면서도 여운형(呂運亨)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임시정부 인사들의 여운형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3)
 
  국민총동원위원회는 또한 (3)탁치순응자는 반역자로 처단하자, (4)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절대 수호하자, (8)외국 군정의 철폐를 주장하자, (9)탁치정권을 불합작으로 격퇴하자는 등 9개항의 「행동강령」을 발표했다.34) 그것은 미군정부의 권위와 권능을 거부할 것을 선동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軍政當局은 絶對獨立을 찬성해”
 
‘信託統治絶對反對’의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1945년 12월 31일의 신탁통치 반대 시위.
  국민총동원위원회 주관으로 오후 2시부터 대대적인 반탁시위행진이 있을 예정인 31일 아침의 정례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시위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먼저 반탁시위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한 다음 “다만 염려되는 것은 격렬분자와 파괴주의자들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난국을 만들어서 전부를 실패케 함이라”고 우려를 표명하면서, “모든 단체나 개인은 자유행동을 취하지 말고 규칙범위내에서 행동하여 법률조리나 안녕질서에 저촉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미군정부에 대하여 오해가 없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우리가 군력(軍力)을 두려워하거나 또 친미주의를 위함이 아니라 다만 미국 군정부가 우리를 해방한 은인이요 군정당국은 절대 독립을 찬성하는 고로 신탁문제 발생 이후 자기 정부에 대하여 반박과 공격의 공문을 보낸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독립의 친우를 모르고 원수로 대우하면 이는 도리어 독립을 저해하는 것이다. …”35)
 
  이러한 이승만의 주장은 반탁운동의 기세를 몰아 정권접수를 하겠다는 김구의 흥분된 행동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31일 오후 2시부터 종로네거리에서 시작된 시위행진은 사흘째 계속된 반탁시위의 클라이맥스였다. 거리를 메운 시위군중은 태극기와 “신탁통치 결사반대”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질서정연하게 행진했다. 통행인들도 모두 시위행렬에 참가한 이날의 행진은 3·1운동때를 연상케 했다. 안국동과 군정청 앞을 돌아 광화문, 서대문, 서울역, 종로를 거쳐 오후 4시반에 눈이 덮인 서울운동장에 집결했다. 행사를 마치는 결의대회에서는 “우리 3천만 전민족은 …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진정한 우리정부로서 절대 지지하는 동시에 그 지도하에 그 국민된 응분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는 등의 선언문과 “미-소양군의 즉시철수 요구를 연합군에 통고한다”는 등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36)
 
  한편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는 이날 자신의 명의로 「국자(國字)」 제1호 및 제2호를 포고했다. 신익희는 귀국 직후부터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정책준비그룹인 행정연구위원회와 지방조직 구축을 위한 정치공작대를 비밀리에 운영하고 있었다.37)
 
  「국자」 제1호
  (1)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및 한인직원은 전부 본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케 함.
  (2)탁치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할 것.
  (3)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지함.
  (4)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 연료, 수도, 전기, 교통, 금융, 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지함.
  (5)불량상인의 폭리, 매점 등은 엄중 취체함.
 
  「국자」 제2호(요지)
  이 운동은 반드시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앞으로 우리정부 지도하에 제반 산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38)
 
  미군정청 소속의 경찰기구와 한국인 직원을 모두 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하게 하겠다는 「국자」 제1호의 제1항 규정은 정권접수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 「국자」 포고문은 신익희가 독자적으로 작성하여 발표한 것이었으나, 김구와 임시정부는 그대로 묵인했던 것 같다.39) 「국자」 제1호의 포고에 응하여 서울시내 8개구 경찰서장이 총사직의 의사를 표명했고, 군정청은 이들을 즉시 파면했다.40) 서장들은 신익희의 안내로 경교장을 방문하여 김구에게 경찰은 앞으로 임시정부의 지시 아래 치안유지와 질서확보에 나서겠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인쇄된 「국자」 포고문은 정치공작대의 기민한 활동으로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 곳곳에 나붙었다. 포고문을 보고 감격하여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41)
 
 
  하지는 金九를 中國으로 追放하겠다고
 
  하지는 격분했다. 그가 보기에 임시정부의 이러한 행동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할 때에 미군정의 법과 질서유지에 복종하겠다고 한 서약을 위반한 배신적인 쿠데타 기도가 아닐 수 없었다.42) 그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인천에 있는 전 일본포로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하기로 하고 그 사실을 31일 저녁 방송으로 공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놀란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의 만류로 하지는 계획을 중지했다. 이튿날인 1946년 1월 1일 오후에 반도호텔의 자기 집무실로 김구를 호출한 하지는 김구에게 과격행동의 중지를 강력히 요청하면서 “만약 나를 기만하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했고, 이에 김구는 “자살하겠다”고 응수했다고 한다.43)
 
  김구는 한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날 밤 그는 엄항섭이 대신한 중앙방송국의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그 목적이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데 있고 결단코 연합국의 군정을 반대하거나 우리 동포들의 일상생활을 곤란케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늘 워싱턴에서 온 보도에 의하면 미국 국무장관 번즈 씨는 우리나라에 신탁통치를 실행치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나도 그렇게 되기를 믿는다. … 그런 고로 우리 동포는 곧 직장으로 돌아가서 작업을 계속할 것이며, 특별히 군정청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일제히 복업(復業)하고, 또 지방에서도 파업을 중지하고 복업하기를 바란다.”44)
 
  또한 하지는 미군방첩대(Counterintelligence Corps: CIC)에 신익희를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CIC요원들은 정치공작대 중앙본부인 낙산장(駱山莊)을 수색하여 정치공작대 서류일체를 압수했고, 1월 3일에는 신익희를 연행하여 신문했다. 그러나 신익희는 이튿날 오후에 무혐의로 방면되었다.45)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의 정권접수 기도는 어이없이 실패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군정부가 김구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불신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김구의 크나큰 정치적 손실이었다. 이제 그는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저마다의 아집에 들린 임시정부 인사들의 이러저러한 명분주의를 심각하게 재검토해 보아야 했다.
 
  이때의 일을 미육군부의 한 연구보고서는 “이 시도는 임시정부의 목적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으며 정치적 분파주의의 위험성을 증가시켰다. 이러한 상황 전개는 (하지) 사령관으로 하여금 임시정부 그룹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어떤 특별조치가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고 기술했다.46)
 
信託統治反對大會로 준비되었다가 ‘三相決定支持’대회로 돌변한 1946년 1월 3일의 서울운동장 집회.
 
  2. 反託大會에서 贊託大會로
 
  신탁통치 반대 회오리바람 속에서 임시정부가 정국을 주도해 나가자 좌익정파들도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인민공화국은 28일에 긴급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신탁통치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으로는 국무총리 허헌(許憲)을 비롯하여 조동호(趙東祜), 홍진유(洪震裕), 최익한(崔益翰), 이만규(李萬珪), 정백(鄭栢) 등 이름이 알려진 각파 좌익인사들이 망라되었다. 그러나 막상 활동력 있는 박헌영 계열은 포함되지 않았다. 긴급회의는 (1)각 정당과 단체 대표자대회를 개최할 것, (2)전국 각 지방지부를 조직할 것, (3)연합국에 항의문을 발표할 것, (4)전국적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 (5)집집마다 “신탁통치 절대반대” 등의 표어를 내붙일 것을 결의했다.47) 긴급회의는 또한 “신탁통치 문제는 전민족의 운명에 관한 문제이므로 중경임시정부와 공동투쟁을 단행할 것”을 결의하고 그 교섭위원으로 정백과 또 한사람을 선출했다.48)
 
  인민당은 29일에 제2차 긴급집행위원회를 열고 반탁결의문을 의결했다. 이 결의문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도 “신탁반대투쟁을 이용한 자파의 정치세력화 음모”를 반대하며 반탁투쟁을 당파를 초월한 전민족의 총력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9)
 
  같은 날 조선공산당, 인민당, 서울시인민위원회와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 청년총연맹(청총), 과학자동맹 등 40여개 좌파단체 대표들은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결의문에서 “현하 민족적 자주독립을 획득치 못한 것은 각계각층을 총망라하는 통일전선을 결성 못한 데 기인한다”고 말하고, “진보적인 계급층에서 이를 열렬히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책동으로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으므로, 민족통일전선을 방해하는 일체 파쇼세력에 맹렬한 투쟁을 개시하자”고 주장했다.50)
 
 
  朴憲永의 平壤 방문으로 共産黨은 침묵
 
  이처럼 좌우익정파들이 일매지게 신탁통치 반대를 표명하는데도 공산당은 확실한 당론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책임비서 박헌영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3국외무장관회의 결정에 관한 이러저러한 뉴스에 혼란을 느꼈다. 소련영사 폴리얀스키(Aleksandre S. Polianskii)는 모스크바에 가 서울에 없었고, 소련영사관은 본국 훈령이 없다는 말만 했다. 타스통신은 보도도 하지 않았다. 박헌영 자신도 답답한 데다가 당간부들이 그의 평양방문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박헌영은 12월 28일 밤에 38선을 넘었다.51)
 
  박헌영이 평양에 머무는 동안 조선공산당도 신탁통치문제를 놓고 내부적인 논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3국외무장관회의 결정을 지지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공장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인 영등포지구 공산당상무위원회는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중앙에 건의하기까지 했다.52) 12월 30일에 『해방일보(解放日報)』 사장 권오직(權五稷)의 사무실에 모인 조선공산당의 중요 간부들은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토의했으나, 결론은 “민족의 체면상, 또 전국민이 반대하는데 공산당만이 찬성할 수는 없지 않으냐”는 것이었다.53)
 
  국민총동원위원회가 주관하는 대규모 반탁시위가 있던 31일에 조선공산당 서울시위원회는 “신탁통치를 철폐시키고 완전독립을 전취하기 위하여”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즉시 실현시키자는 전단을 발표했는데, 그것은 조선공산당이 처음으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입장을 표명한 셈이었다.54) 그러나 그것도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은 아니었다.
 
 
  임시정부와 人民共和國의 통합교섭 벌여
 
  인민공화국의 교섭위원 정백, 최익한, 이강국(李康國) 세사람은 29일 오후 2시에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인 조소앙, 김성숙(金星淑), 조완구(趙琬九)를 만나 “신탁통치 반대를 소극적 반대에 그치지 말고” 완전독립을 향하여 “민족통일전선 결성운동을 활발히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저녁 8시에 다시 만났다. 30일 오후1시에는 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들과 몇몇 임시정부 인사들이 다시 회동했다.55) 그리하여 31일 밤에는 임시정부쪽의 최동오, 성주식(成周寔), 장건상(張建相) 세사람과 인민공화국쪽의 홍남표(洪南標), 홍증식, 정백, 이강국 네사람이 대좌했다. 이 회담이 정식 대표회담인 셈이었다. 인민공화국 인사들은 민족통일의 저해요인이 인민공화국과 임시정부의 병립에 있으며 국민은 양자의 통일을 바란다고 주장하면서, 두 정부를 해체하고 통일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이에 대해 최동오 등은 그 내용을 공문으로 작성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56) 그런데 이때에 임시정부쪽에서 나온 세사람은 임시정부의 주류세력인 한국독립당 소속이 아니라 그 반대세력인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귀국해서도 좌익 인사들과 더 친근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최동오 등의 요구에 따라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1946년 1월 1일 오전에 경교장으로 공문을 전달했다. 공문은 “양정부의 통일이 민족통일의 유일 최선의 방법이라고 인정한다”면서, 그 구체적 방법으로 (1)양쪽에서 각각 약간명의 위원을 선출하고 교섭에 관한 일체 전권을 위임하여 통일위원회를 구성하고, (2)그 위원회는 매일 긴밀하게 회합하여 통일정부 수립에 관한 구체안을 토의 결정하며, (3)위의 임무의 달성은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이전에 완수해야 할 시급한 필요에서 1월 5일까지 성안에 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제안에 대해 1월 2일 오전 10시까지 회답해줄 것을 요구했다.57)
 
  그러나 「국자」 제1호, 제2호로 정권접수를 선포하고 “새로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임시정부로서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인민공화국의 ‘공문’을 접수하는 것조차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접수했다는 최동오의 서명까지 받았던 인민공화국의 공문은 1월 1일 오후 6시에 홍남표 개인 앞으로 “서식상 접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송되었다. 공문이 홍남표 앞으로 반송된 것은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의 주소를 홍남표의 주소로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는 2일 오전에 그동안의 경위를 밝히고 김구와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은 임시정부 내무부의 「국자」 포고나 “오직 새로운 독립운동이 있을 뿐”이라는 김구의 발언 등은 “민족분열을 획책하는 음모”라고 규탄하고, “소위 임시정부와의 통일을 위하여 우리는 겸허한 성의와 최대의 양보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은 그들의 완명(頑冥: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움)으로 인하여 수포로 돌아갔다. 이제야 우리는 민족분열을 획책하고 파쇼화하는 임시정부를 배제하고 배전의 결의와 노력으로 민족통일을 민주주의적으로 완성하는 일로로 매진하려 한다”고 선언했다.58)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의 통합교섭은 결렬되고, 좌익진영은 1월 3일에 서울운동장에서 열기로 한 신탁통치반대 시민대회에 주력하기로 했다.
 
  때를 같이하여 인민당이 임시정부에 대하여 “참된 임시정부”를 수립할 ‘건국회의’를 소집할 것을 촉구하는 권고문을 보낸 것은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1월 2일에 보낸 이 권고문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알선이 아니면 우리 민족은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없습니까? 해방도 타력에서 결정되고 정부도 타력에서 수립된다면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탁치를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고, 임시정부는 “인민공화국과 각당 각파를 합쳐서 어서 건국회의를 열고 여기서 참된 임시정부를 수립하도록 권고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미-소회의가 열리기 전에 완수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촉구했다.59)
 
 
  朴憲永은 로마넨코와 金日成 만나고 돌아와
 
  1946년으로 접어들면서 정국은 새로운 국면으로 돌변했다. 조선공산당이 신탁통치를 규정한 3국외무장관회의의 결정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이러한 성명은 박헌영이 평양에 다녀온 직후에 발표된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북한민주청년동맹의 핵심활동가였고 뒷날 조선로동당의 대외정보조사부 부부장 등 중요 기밀직책을 맡아 일했던 박병엽(朴炳燁)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의 박헌영의 평양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공산당 문화부장 김태준(金台俊)과 경성대 교수 박치우(朴致祐) 등 네댓명을 대동하고 28일 밤에 38선을 넘은 박헌영은 29일 오후에 평양에 도착하여 김일성 등 이북지도자들과 만났다. 박헌영과 김일성은 1945년 10월의 북부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앞두고 10월 8일 저녁에 개성 북쪽의 소련군38선경비사령부에서 처음 만나고 나서 두번째 만나는 것이었다(『月刊朝鮮』 2010년 8월호,「平壤市民衆大會에 나타난 ‘金日成장군’」참조). 박헌영은 평양에 머무는 동안 김일성이 기거하는 집에서 묵었고 수행원들은 고려호텔에서 묵었다. 박헌영은 30일에는 연안파 인사들을 만났고, 이날 오후에 공산당 주요 간부들과도 협의회를 가졌다. 31일에 북조선 공산당 집행위원회가 열렸다. 이 회의는 모스크바에 갔다가 30일에 돌아온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Andrei A. Romanenko) 소장과 함께 3국외무장관회의 결정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를 토론하기 위하여 열린 중요한 회의였다. 모스크바에 갔던 서울총영사 폴리얀스키도 로마넨코와 함께 평양에 돌아와 있었다. 3국외무장관회의 결정내용을 보고한 사람은 소련파의 허가이(許哥而)였다. 박헌영은 서울중앙당 내부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반탁주장이 거셌다는 점을 설명했다. 회의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된 것은 조선의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문제였다. 임시정부 수립에서 전체적인 세력관계를 2대1로 한다는 것이 중요한 사안으로 논의되었다. 북한의 통합된 세력 하나와 남한의 좌익세력을 합하여 두 세력을 형성하고 남한의 나머지 세력을 하나로 다룬다는 것이었다. 박헌영은 회의에서 여러 문제를 토의한 뒤에 김일성을 단독으로 만나 협의했다. 그는 1월 1일에 열린 신년회에 참석하고 평양을 떠나 그날 밤으로 38선을 넘었다.60)
 
 
  解放日報가 信託統治支持 號外 뿌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3국외무장관회의 결정에 대한 확실한 태도가 표명된 것은 박헌영이 평양에서 돌아온 이튿날인 1946년 1월 2일이었다. 공산당은 “이번 회담은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또 한걸음 진보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외무장관회의 결정 가운데 한국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규정은 “금일의 조선을 위하는 가장 정당한 것이라고 우리는 인정한다”고 천명했다. 이때까지 절대지지한다고 한 인민공화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문제의 5년 기한은 그 책임이 3국회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인즉 우리 민족 자체의 결점(장구한 일제 지배의 해독과 민족적 분열 등)에 있다고 우리는 반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결정의 책임을 의식적으로 3국에 돌리고 이것을 정면으로 반대 배격함에 열중하고, 3국의 우호적 원조와 협력(신탁)을 흡사히 제국주의적 위임통치제라고 왜곡하고 과거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동일시하여 조선민족을 오도하며 민주주의적 연합국을 적대하는 방향으로 대중을 기만하는 정책을 쓰고 있는 김구일파의 소위 반신탁운동은 조선을 위하야 극히 위험천만한 결과를 나타낼 것은 필연이다. 이에 대하야 우리는 이번 3국회의의 본질적 진보성을 널리 해석 설명하야 조선민족의 나갈 길을 옳게 보여주어야 한다. 세계평화와 민주주의와 국제협동의 정신하에서만 조선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
 
  성명은 결론적으로 민족통일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카이로회담은 조선독립을 적당한 시기에 준다는 것인데, 이 적당한 시기라는 것이 이번 회담에서 5년 이내로 결정된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통일의 실현에 있다. 민족의 통일 ─ 이것이 우리의 가장 급무임을 이해하고 하루속히 민주주의 원칙(친일파, 민족반역자, 국수주의자를 제외한)을 내세우고 이것을 중심하고 조선민족통일전선을 완성함에 전력을 집중하여야 한다.”61)
 
  공산당은 이 성명을 기관지 『해방일보』의 호외로 만들어 시내에 뿌렸다.
 
 
  하루 만에 다시 信託統治 설명
 
  그러나 이 성명서로는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설명이 모호하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 같다. 더구나 좌익단체들의 조직을 총동원하여 준비한 1월 3일의 신탁통치반대 시민대회를 신탁통치 지지대회로 급히 돌려놓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설득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월 3일에 선전부 명의로 설명서를 다시 발표했다. 설명서는 3국외무장관회의의 한국문제에 대한 결정은 여섯가지 점에서 큰 진전이라고 주장하고 한가지씩 설명했다. 가장 중점적으로 설명한 것은 역시 신탁통치 문제였다.
 
  “이 신탁이 4개국의 신탁하에 두고 또한 이 신탁이 5개년이란 기간내에 어느 때든지 우리 민족의 역량에 의하여 철폐할 것을 결정한 것은, 조선을 4개국 공동신탁하에 두고 어떤 1국의 식민지화를 방지하는 동시에 조선독립이 늦어도 5년까지는 완성될 것을 결정한 까닭에, 실로 경제적 정치적 모든 관계가 자칫하면 타민족의 노예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조선을 이 위험에서 방지하고 우리 민족의 행정적 경제적 준비 여하에 의하여는 단기간에도 이 신탁으로부터 벗어날 조건을 허용한 것이다. 문제는 다만 우리의 실력 여하에 있다. 그러므로 이 신탁은 독립과 대립된 신탁이 아니요 독립을 보장하고 독립을 촉성하는 신탁이다. …”62)
 
 
  反託大會가 贊託大會로
 
  서울시인민위원회,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서울시 정(町·洞)연합회 공동주최의 신탁통치반대 서울시민대회는 예정대로 1월 3일 오후 1시에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주최쪽은 30만명이 모였다고 했다. 그런데 대회는 어처구니없게도 하룻밤 사이에 반탁대회에서 찬탁대회로 바뀌어 거행되었다. 대회이름부터 ‘민족통일 자주독립촉성 시민대회’라고 바뀌었다. “신탁통치 절대반대”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나왔다가 주최쪽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해프닝도 있었다. 애국가 대신에 적기가(赤旗歌) 제창으로 시작된 대회는 인민당 한일(韓鎰)의 경과보고, 서울시인민위원회 나동욱(羅東旭)의 취지 설명, 조선공산당 이승엽(李承燁)의 모스크바 3국외무장관회의 결정에 대한 설명, 인민공화국 안성기(安成基)의 임시정부와의 교섭전말 보고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고, 대회가 끝나자 참가군중은 “외상회의 절대지지”, “인민공화국 사수”, “김구 이승만 타도”, “철시파업 즉시중단”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를 행진했다.63) 그러나 신탁통치 반대대회인 줄 알고 자진해서 참가했던 많은 시민들은 욕설을 하면서 흩어졌다.
 
  공산당과 인민공화국의 이러한 기만적인 행동에 대해 한민당, 국민당, 신한민족당은 “반역적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일반 시민들도 분노했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46년 1월 8일자로 작성된 조선공산당의 한 ‘당외 극비’ 문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월 2일에 이르러서 ‘탁치반대’ 운동의 잘못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 좌익은 3일의 서울시인민위원회 주최의 데모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3상회의 절대지지’를 돌연히 내걸어서 급각도의 전술 전환을 단행하였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좌익은 대중에 대한 무책임한 표변적 배신자로서 자기를 폭로하고 말았던 것이다. ‘탁치반대’의 예비선전을 통하여 소집된 3일 시위의 군중은 의외에도 ‘탁치지지’를 보고서 극단의 불평과 불만을 표시하였으며 시민측 동원은 대부분이 탈락하고 말았다. …”
 
  이 ‘극비문서’는 그러면서 3일의 시위가 조선공산당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낸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3일의 시위가 다음과 같은 경향을 노골적으로 표시하였다는 점이다. 즉 데모나 기타 대중동원에 있어서 우리의 영향하에 광범한 대중을 동원하고 그들을 선전 교육 훈련하는 계기로서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대외적으로 반대당에 자기세력을 과시하는 도구로서만 그것을 이용하려는 나쁜 경향이 이것이다. 이 경향은 모든 파시스트운동의 주요한 특징인데, 우리 진영내에 이 모략 시위의 관념이 잠입되는 최근의 경향은 단연코 숙청되어야 할 것이다.”64)
 
  1월 3일의 이러한 기만적인 찬탁집회를 계기로 좌익 정파들의 지지와 신뢰는 크게 실추되고 좌우익 정파의 대립은 더욱 첨예화했다.
 
  그러나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도 1월 4일에 3국외무장관회의 결의를 지지하는 결정서를 발표했다. 이 결정서는 신탁통치제도의 책임이 우리 민족 자신에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금반 신탁제도는 그 책임이 3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우리 민족 자신 속에 있다는 점에서 불가피적 필연이라고 본다. 우리는 아직도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소탕치 못하여 친일파, 민족반역자가 도량하고 민족은 분열되어 파시스트 데마고그가 민중의 일부를 현혹하고 반역적 자본가의 태업, 모리배의 준동으로 경제부흥은 곤경에 빠져 있다. 이러한 현상이 3국으로 하여금 우리의 갈망하는 완전독립을 천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65)
 
  인민당도 신탁통치 지지를 공식으로 표명했다. 인민당 총무 이여성은 1월 5일에 “우리는 그동안에 이(신탁통치)에 대하여 반대하여 왔다. 그러나 그후 자세한 정보에 의하야 조선독립을 결코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 경제적 건전한 발전을 원호하려는 3상회의의 노파적 정신을 알게 된 우리는 감사히 생각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원호를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바이다. 다만 신탁이란 문귀를 사용하게 된 것을 유감히 생각할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신탁통치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민족적 망동”이라고 비판했다.66)
 
  이렇게 하여 좌익정파들의 신탁통치 찬성방침이 확정되었다. 이때부터 좌익정파들은 “신탁통치 지지”라는 말 대신에 “3상회의결정 지지”라는 말을 사용했고, 신탁통치라는 말도 “후견”이라는 말로 바꾸어 설명했다.
 
 
  金九가 非常政治會議 소집을 提議
 
  파업을 중단하고 직장에 복귀하라는 1월 1일 저녁의 김구의 방송이 하지 사령관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행해진 것이라는 것을 아는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김구는 일반 국민의 임시정부 지지 열기를 의식하면서 1월 4일에 비상정치회의를 즉시 소집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은 귀국에 앞서 1945년 9월 3일에 발표한 「임시정부 당면정책」 제6항을 실행하자는 제의였다.
 
  김구는 “남의 손을 기대할 것 없이 우리의 손으로 신속히 강고한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임시정부 당면정책」 제6항의 규정에 따라 (1)국내외 혁명당파, 종교단체, 지방대표 및 저명한 민주 영수들로 구성되는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2)비상정치회의에 의하여 과도정권이 수립될 때까지는 임시정부를 확대 강화하여 과도정권의 기능을 행사하며, (3)과도정권의 수립과 동시에 임시정부는 해체하고 과도정권으로 하여금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하는 신헌장을 만들어 정식정권을 수립하게 하자고 제의했다.67) 그것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박헌영은 1월 5일의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김구에 대하여 “김구씨의 반탁데모는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신탁통치의 본질적 설명을 하지 않고 고의로 일본제국주의의 위임통치제와 혼동시켜 민족을 의혹케 하고 반연합국적 조직을 양성하여 민중을 나쁜 의미에서 혼란케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68)
 
  이날의 기자회견에서 박헌영이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존스턴(Richard H. Johnston) 특파원의 질문에 답한 내용이 샌프란시스코 방송을 통하여 뒤늦게 국내에 보도됨으로써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존스턴이 질문한 내용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소련의 단독신탁통치 문제였고 또 하나는 한국의 소비에트연방 가입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박헌영은 영어로 대답하면서 전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반대를 표명하지 않았고, 후자에 대해서는 현재는 불가능하나 10~20년 뒤에는 가능할 것이라는 취지로 대답했는데, 그것이 소련단독신탁통치를 희망하며 궁극적으로는 소비에트연방에 가입할 것이라고 명백히 대답한 것으로 전해진 것이었다. ‘매국노징치 전국긴급협의회’가 열리는 등 규탄여론이 비등하자 박헌영은 ‘언어장벽(language difficulties)’ 때문에 와전되었다고 해명했다.69)
 
 
  李承晩은 信託統治의 危險性 설명
 
  한편 와병중인 이승만은 1월 7일에 윤치영(尹致暎)을 통하여 신탁통치를 왜 반대해야 하는가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익의 이론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승만은 먼저 12월 31일에 거행된 반탁시위가 “조리있고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평가하고, 공산당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물론 우리는 국제관계에 있어서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 선진국과 친목하고 협력하며 또 집중적으로 그 물질적 원조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우리가 우리의 자유적 입장에서 진선진미한 성의와 외교로써 용이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신탁반대는 결코 국제적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의 역량을 십분 발휘하여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최선 유일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책동분자는 우리의 신성한 신탁반대운동을 연합국반대로 허위 선전하고 군정부와 한인 사이에 오해를 일으키기 위하여 미국 여론을 움직여 오해를 일으키고 모든 반역의 행동을 취하려 하다가 이제는 또 다른 음모로 3국회의 지지, 신탁찬성의 기치를 걸고 나섰으니, 명철한 동포는 미리 각오하고 그 음모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
 
  그는 신탁통치의 문제점을 국제권력정치의 본질과 관련하여 설명했다.
 
  “탁치가 강요된다면 열국의 종속민족으로 우리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타인에게 맡겨 놓은 격이 될 것이니, 어찌 우리의 발전과 행복한 장래를 기필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연합4국의 이해와 주장은 결코 완전 일치된 것이 아니며 또 장래에 여하한 파탄이 발생치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니, 그 주장이 배치되며 그 파탄이 증장할 때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든지, 어디서 발생하든지 어느덧 우리나라에 반향하여 전쟁을 강화하고 혼란을 작성하며 우리 반도는 열국상쟁의 수라장으로 화할 염려가 있다. …
 
  물론 현하 논의되는 신탁통치는 국치인 을사조약과 성질은 상이하나, 우리의 일을 자력으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은 역시 일종의 치욕이요, 그 결과에 있어서도 … 일대비운을 초래할 것이다.”70)
 
 
  韓民黨과 共産黨도 合意한 四黨 共同聲明
 
  그러나 박두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정파간의 행동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국민여망은 좌우익 어느쪽에서나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1월 6일에 인민당의 주선으로 한국민주당, 국민당, 인민당, 공산당의 대표들이 비공식으로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인민당으로 하여금 정식 회의를 주선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1월 7일에는 한민당의 원세훈(元世勳), 김병로(金炳魯), 국민당의 안재홍, 백홍균(白弘均), 이승복(李昇馥), 인민당의 이여성, 김세용(金世鎔), 김오성(金午星), 공산당의 이주하(李舟河), 홍남표가 회동하여 간담회를 열었다.71) 회의 결과 다음과 같은 2개항의 4당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1)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조선문제에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 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신탁”(국제헌장에 의하야 의구되는 신탁제도)은 불원 수립되는 임시정부가 자주독립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를 해결함.
 
  (2)테러행동에 대하여.
  정쟁의 수단으로 암살과 테러행동을 감행함은 민족 단결을 파손하며 국가 독립을 방해하는 자멸행동이다. … 모든 비밀적 테러단체와 결사의 반성을 바라며 그들이 자발적으로 해산하고 각자 진정한 애국운동에 성심으로 참가하기를 바란다.72)
 
  이 4당공동성명은 해방정국에서 한민당과 공산당을 포함한 중요정당들이 정부수립 문제와 관련하여 합의한 유일한 문서였다.73)
 
  그러나 이튿날 한민당이 긴급간부회의를 열고 4당공동성명이 “신탁통치 반대의 정신을 몰각한” 것이므로 승인하지 않기로 했다고 성명함으로써 4당공동성명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74)
 
  한편 임시정부는 뜬금없이 1941년에 중경에서 제정하여 공포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1월 8일 자로 새로 공포하여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권위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五黨會議도 무산돼
 
  1월 9일에는 위의 4당에 신한민족당을 포함한 5당회의가 열렸다. 그것은 김구가 성명한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위한 예비회의로 열린 것이었다. 임시정부에서 조소앙, 조완구, 장건상, 김성숙 4명이 참석했고 한민당에서 장덕수, 서상일(徐相日), 국민당에서 안재홍, 명제세(明濟世), 인민당에서 김오성, 이여성, 김재영(金在榮), 공산당에서 박헌영, 홍남표, 이주하, 조두원(趙斗元), 신한민족당에서 이규갑(李奎甲), 그리고 인민공화국에서 발언권 없이 이강국과 정진태(鄭鎭泰)가 참석했다. 그러나 5당회의는 회의 성격에 대해 공산당과 인민당이 7일에 열렸던 4당회의의 연장으로 해야 한다고 고집함으로써 합의를 보지 못하고 유회되었다. 1월 11일에 임시정부를 제외한 5당회의가 재개되었으나, 신탁통치에 관한 4당공동성명의 자구수정 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어 다시 산회하고 말았다.75)
 
  인민당이 1월 13일에 인민공화국과 임시정부는 정부로서 참가하여 간섭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한 뒤에 국민당 안재홍의 주선으로 1월 14일에 5당회의가 다시 열렸고, 미-소주둔군사령부대표회의가 열린 1월 16일에도 속개되었다. 인민당에서는 “3상회의에서 조선의 자유 독립국가 건설을 원조하는 것은 지지하나, 신탁통치는 반대한다”라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76) 공산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5당회의도 무산되고 말았다.
 
  3국외무장관회의의 애매한 합의문에서 연유한 신탁통치 논쟁은 마침내 한국의 모든 정치집단뿐만 아니라 일반국민까지 찬탁이냐 반탁이냐로 갈라놓았다.
 
  송진우의 뒤를 이어 1월 7일에 한민당의 수석총무가 된 김성수는 1월 14일에 처음으로 기자들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당내에서 신중한 논의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통일의) 방법에는 여러가지 의견이 많겠으나 임시정부에서 제시한 바의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여 통일을 단행하는 것이 좋을 줄 안다. 즉 비상정치회의가 소집되면 여기에서 우리의 자력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 장군도 임시정부 수립은 조선인의 의사로 하겠다고 언명한 바 있었으며, 우리는 마땅히 우리 의사와 우리 힘으로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해서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에 노력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물론 비상정치회의보다 더 나은 기관을 세운다면 언제든지 그 기관에 참가할 터이다. 그러나 독립의 피안에 건너가는 다리로서 27년간의 역사를 가진 임시정부의 법통 이외에 무슨 신통한 다리가 있겠는가.”77)
 
  그것은 뒤이어 전개되는 정국의 추이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었다. 이승만은 김구가 자기와는 상의도 없이 과격한 반탁운동을 벌이다가 미군정부와 충돌까지 빚자 몹시 못마땅해했었는데, 김성수의 이러한 담화가 보도되자 크게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윤치영에게 독촉중협의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를 바로 이튿날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1) State Department,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ol. Ⅱ,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67, pp. 716~717, p. 728. 2) Harry S. Truman, Memoirs, vol. Ⅰ, Year of Decisions, Time, Inc., 1955, p. 548, 번역문은 해리 S. 트루만 著, 孫世一 譯,『트루만回顧錄(上) 決斷의 해』, 知文閣, 1968, p. 537. 3) George F. Kennan, Memoirs 1925-50, Little, Brown & Company, 1967, pp. 287~288, p.284.
 
  4) MacArthur to Joint Chiefs of Staff, 16 Dec. 1945, FRUS 1945, vol. Ⅵ, pp. 1146~1148. 5) 『合同通信三十年』, 合同通信社, 1975, pp. 11~13. 6) 위의 책, p. 12. 7) 『東友』(동아일보 사보), 2005, 2. 3,「‘음해’ 바로잡을 史實 드러나」. 8) 『朝鮮日報』1945년 12월28일자,「韓民, 國民兩黨서 排擊決議」. 9) 『新朝鮮報』1945년 12월27일자,「自主獨立要請의 根本精神에 背馳」.
 
  10) 『서울신문』1945년 12월29일자,「完全獨立念願」. 11) 『新朝鮮報』 1945년 12월27일자,「어느나라를 不拘하고 우리는 願치 않는다」. 12) 『朝鮮人民報』 1945년 12월29일자,「自主獨立을 爲하야 絶對反對」. 13) 『서울신문』 1945년 12월29일자,「實施根據豪無」. 14) FRUS 1945, vol. Ⅵ, pp. 1150~1151. 15) FRUS 1945, vol. Ⅱ, p. 815. 16) 『自由新聞』 1945년 12월30일자,「三千萬·是日也 또 放聲大哭」.
 
  17) 尹錫五 證言; 『東亞日報』 1945년 12월29일자,「李承晩博士決意」. 18) 『東亞日報』 1945년 12월30일자,「國際正義와 民族保存爲해 不合作運動展開」. 19) 『東亞日報』1945년 12월30일자,「獨立運動 새로 出發」. 20) 『朝鮮日報』1945년 12월30일자,「臨時政府國務會議結果」. 21) 『서울신문』 1945년 12월30일자,「國民總動員委員會設置」. 22) 『東亞日報』 1945년 12월31일자,「今日全市示威行列」. 23) 『東亞日報』1945년 12월30일자,「委員會의 存廢는 朝鮮決意如何로 左右」. 24) “Hodges Discussion with Wedemeyer” 1947. 8. 27, 鄭容郁-李吉相 編,『解放前後美國의 對韓政策史資料集(10)』, 다락방, 1995, p. 17.
 
  25) 古下宋鎭禹先生傳記編纂委員會 編, 『古下宋鎭禹先生傳』, 東亞日報出版局, 1965, pp. 337~338. 26) 『古下宋鎭禹先生傳』, p. 331. 27) 尹致暎, 尹錫五 證言. 28) 『駐韓美軍政史(2)』(History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in Korea), (이하 HUSAFIK 2), 돌베게影印版, 1988, p. 150.
 
  29) 『朝鮮日報』 1946년 1월1일자,「아놀드長官李博士訪問要談」. 30) 『朝鮮日報』 1945년 12월30일자,「軍政府職員一同 總辭職을 決議」. 31) 『自由新聞』 1945년 12월31일자,「市廳職員도 總辭職決定」. 32) 『서울신문』 1945년 12월31일자,「京城大學敎職員憤激總辭職」. 33) 『서울신문』1946년 1월1일자,「總動員委員會委員選定」. 34) 『東亞日報』 1945년 12월30일자,「全國民의 行動綱領」. 35) 『東亞日報』 1946년 1월2일자,「‘反託’示威는 當然」. 36) 『中央新聞』 1946년 1월1일자,「들려라 世界에, 보아라 聯合國」. 37) 박진희,「해방직후 정치공작대의 조직과 활동」, 『역사와 현실』 21호, 역사비평사, 1996, pp. 170~180.
 
  38) 『新朝鮮報』 1945년 12월31일자,「臨政託治不合作方針」; 『東亞日報』 1946년 1월2일자,「臨政의 布告로 不合作을 指令」. 39) 曺圭河(外), 『南北의 對話』, 고려원, 1987, pp. 222~224 ; 박진희, 앞의 글, p.190. 40) 趙炳玉, 『나의 回顧錄』, 民敎社, 1959, p. 165. 41) 柳致松, 『海公申翼熙一代記』, 海公申翼熙先生紀念會, 1984, p. 455. 42) C. L. Hoag,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 War Policy and the First Year of Occupation 1941~1946, Department of the Army, 1970, p. 343, 번역문은 C. L. 호그 지음, 신복룡-김원덕 옮김, 『한국분단보고서(상)』, 풀빛, 1992, p. 261. 43) 趙炳玉, 앞의 책, pp. 165~167 ; 『駐韓美軍政史(2)』(HUSAFIK 2), pp. 59~60 ; ⅩⅩⅣ Corps Historical Journal, 2 Jan. 1946, 鄭容郁 編, 『解放直後政治社會史資料集(1)』, 다락방, 1994, p. 174.
 
  44) 『東亞日報』 1946년 1월3일자,「職場에 復業하라」. 45) 柳致松, 앞의 책, pp. 457~458. 46) C. L. Hoag, op. cit., pp. 291~292, 번역문은 C. L. 호그 지음, 신복룡-김원덕 옮김, 앞의 책, p. 226. 47) 『中央新聞』 1945년 12월30일자,「中央人民委員會 託治反對委員會設置」. 48) 『朝鮮人民報』 1945년 12월30일자,「託治反對爲하야 臨政과 共同鬪爭」. 49) 『朝鮮人民報』 1946년 1월1일자,「人民黨의 鬪爭宣言」. 50) 『朝鮮人民報』1945년 12월30일자,「各團體網羅, 委員會를 組織」. 51)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p. 27. 52) 朝鮮共産黨서울市永登浦臨時地區常務委員會,「全鮮黨員同志에게 訴함」, 『朝鮮共産黨文件資料集(1945~46)』,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93, p. 143. 53) 박갑동, 『朴憲永』, 人間社, 1983, p. 134.
 
  54) 李剛秀,「三相會議決定案에 대한 左派三黨의 대응」,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집, 한울, 1995, p. 305. 55) 『朝鮮人民報』 1946년 1월1일자,「積極的反託展開」. 56) 『서울신문』 1946년 1월2일자,「臨政에 時間附重大提議」; 『中央新聞』 1946년 1월3일자,「人共의 共同解除案再提議로 愼重論議」. 57) 『朝鮮日報』 1946년 1월2일자,「戰線統一策을 熟議」. 58) 『서울신문』 1946년 1월2일자,「臨政人共同時解體 統一政府樹立하자」; 『朝鮮人民報』 1946년 1월3일자, 「‘人共’ ‘臨政’ 交涉決裂」. 59) 「臨政에 보낸 勸告文」, 『人民黨의 路線 ─ 人民黨文獻』, 新文化硏究所出版部, 1946, p. 62.
 
  60)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 앞의 책, pp. 27~34 ; 박갑동, 앞의 책, p. 136. 61) 『서울신문』 1946년 1월3일자,「正當한 民主的決定」;『解放日報』 1946년 1월6일자,「모스크바三相會議進步的, 朝鮮共産黨支持表明」.
 
  62) 『서울신문』 1946년 1월8일자,「朝共, 信託에 대한 說明書」. 63) 『朝鮮日報』 1946년 1월4일자,「獨立戰取는 統一로」;『朝鮮人民報』 1946년 1월4일자,「民族統一促成市民大會盛況」. 64) 「‘託治’問題와 左翼의 自己批判」,『朝鮮共産黨文件資料集(1945~46)』, pp. 78~79. 65) 『朝鮮日報』1946년 1월5일자,「幕府決定을 支持」. 66) 『朝鮮人民報』1946년 1월6일자,「信託이란 文字를 誤解마라」.
 
  67) 『朝鮮日報』1946년 1월5일자,「臨時政府, 戰線統一案을 闡明」. 68) 『서울신문』1946년 1월6일자,「統一엔 共同原則이 必要」. 69) 方善柱,「美國第24軍G-2軍史室資料解題」,『아시아文化』3호, 翰林大學校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pp. 185~186 및 정용욱,『해방전후 미국의 대한정책』,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pp. 171~176 참조. 70) 『朝鮮日報』1946년 1월8일자,「信託統治는 恥辱」;『東亞日報』1946년 1월8일자,「信託支持는 亡國陰謀」.
 
  71) 李如星,「統一工作과 人民黨」, 『人民黨의 路線 ─ 人民黨文獻』, 新文化硏究所出版部, 1946, p. 64. 72) 李如星, 위의 글, p64; 『朝鮮日報』1946년 1월9일자,「自主獨立을 目標로 四黨意見一致, 共同聲明」. 73)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사연구』, 역사비평사, 1997, p. 339. 74) 『東亞日報』1946년 1월9일자,「託治反對로 一貫」. 75) 李如星, 앞의 글, pp. 65~66. 76) 『朝鮮日報』1946년 1월18일자,「五黨代表會談決裂」. 77) 『東亞日報』1946년 1월15일자,「臨政의 非常政治會議로 統一된 新政權樹立」;『朝鮮日報』1946년 1월15일자,「獨自目標로 邁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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