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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 피해자

피로 물든 1950년 추석… 민족 大처형극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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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군·빨치산에 의한 무고한 희생자 보상 없어
⊙ “보상을 하려면 공정하게 이뤄져야”
⊙ 전쟁 이후 北 간첩선 피해자 보상도 없어
1951년 6월 9일 촬영된 이 사진은 고양시 인근 행주에 정체된 M-26 탱크를 지나 아이를 업고 걸어가는 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사진=연합뉴스
  오는 6월 25일은 6·25전쟁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쟁 중 군인들의 희생도 있었지만 무고한 민간인들의 피해도 있었다. 특히 한국전쟁은 군인보다 민간인 희생자가 더 많았다.
 
  전국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가장 많은 지역은 전남, 전북, 충북, 충남, 강원 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도 전라도 지역과 충청도 지역의 경우 전체의 70~80%를 차지할 정도다. 이들 중에는 우익 단체나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도 있지만, 인민군과 좌익 세력에 의해 학살된 이들의 수가 더 많다.
 
  6·25전쟁 중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던 시기는 1950년 9월 말에서 10월 초였다. 당시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처형 형식의 대량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인민군은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북한노동당은 9월 중순경 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후퇴 명령을 내리는 한편, 각 지방당에 다음과 같이 지시를 내렸다.
 
  1) 전세가 불리하여 후퇴한다. 2) 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할 것. 3) 유엔군 상륙 때 지주(支柱)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 4) 군사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파괴할 것. 5) 산간지대 마을을 접수하여 식량을 비축할 것. 6) 입산 경험자와 입산 활동이 가능한 자는 입산시키고 기타 간부들은 남강원도까지 후퇴케 할 것.
 
  해당 지시로 인해 일부 인민군 잔존 세력과 좌익 세력들이 규합해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산에 숨어 살면서 마을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군경과 잦은 전투를 벌이게 됐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北군·좌익 세력 체계적인 인민유격대 활동
 
북한 인민군은 퇴각하면서 함흥 반룡산 동굴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주민들을 학살했다. 사진=인터넷 캡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전황이 악화하자 인민군 주력부대는 대부분 소백산과 태백산맥을 통해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중간 허리가 잘리는 바람에 인민군 1만여 명이 퇴각하지 못한 채 호남 지역과 충청 산악 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유격전을 전개했다.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은 9월 28일 화순군 북면 용곡리 백아산 기슭에 도당 본부를, 10월 5일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사령관 김선우)와 각 지구유격대를 설치하였다. 전북과 충청 지역의 도당들도 조직을 개편하여 유격대 활동을 시작했다.
 
  반면 전쟁 이전인 1949년 하반기에 지리산 지구에서 인민유격대로 활동을 전개해오던 이현상 부대도 있었다. 이들은 광복 후 북한의 지령을 받고 일찍이 산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6·25전쟁 발발과 함께 인민군에 호응하여 광범위한 지역에서 ‘협동작전’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총반격에 이현상은 고립된 부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후퇴해 1950년 11월 중순경 강원도 평강군 세포면 후평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승엽, 여운철 등과 남한 지역의 당사업과 유격투쟁에 관한 문제를 토의한 뒤 여운철에게 6개 도당(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에 대한 지도권한을, 이현상에게 유격대의 통일적 지도의 책임을 맡겼다.
 
  이에 이현상은 후평리에 집결한 유격대와 퇴각한 인민군과 민간인들로 구성된 ‘남반부 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다시 지리산을 향해 남하했다. 이현상의 남반부 인민유격대는 승리사단 400명, 혁명지대 60명, 인민여단 150명, 사령부와 기타 직속부대 150명 등 800여 명으로 편성되었다.
 
  이현상 부대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철수할 무렵인 19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남으로 내려왔다. 12월 말 충북 단양지구에 집결하여 문경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유격전을 벌였다. 유엔군의 공격에 유격대는 제천지구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의 조직을 개편했다. 1951년 2월 초 남부군단은 속리산으로 남하했으나 토벌작전이 심해지자 이현상이 부대를 직접 이끌고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1951년 7월 중순, 남부군단 총사령관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덕유산에서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의 ‘6개 도당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였다.
 
  ▲당 과업 수행에서 군사에 관한 제반 문제는 군사부장이 운영하며, 당은 정치사업에 치중하여 지방당 재건에 힘쓸 것 ▲군사부는 각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제로 개편하고 군사행동으로 남반부를 장악할 것 ▲비합법 투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배반자가 속출하고 있으므로 사상교양에 힘쓸 것 ▲6개 도당은 군사적 유일체제를 보장하기 위해 지리산에 총 거점을 설치할 것 ▲군사 경험이 있는 비무장원을 모두 무장시키고, 소요되는 무기는 승리사단이 제공할 것 ▲가급적 약탈과 방화를 중지하고 민심 수습에 노력할 것.
 
  이현상과 여운철이 주도하는 6개 도당 회의가 열리기 전까지는 각 도당이 독자적인 당 사업과 유격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충남도당의 경우 도당위원회, 도 인민위원회, 도당 유격대 등은 대둔산으로 이동시켜 도당위원장 남충렬의 지도로 충남유격대를 조직했다. 사령부 직속으로 공병부대, 통신중대, 정찰중대 등을 편성하고, 그 아래에 320명의 백두산부대, 130명의 대덕부대, 100명의 압록강부대, 100명의 청천강부대 등을 편제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1990년에 개봉한 영화 <남부군>의 빨치산 관련 한 장면. 사진=영화 화면 캡처
  낙동강 전선 반격작전 이후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군경이 각 지역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산으로 들어간 인민군 패잔병들과 좌익 세력들이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던 시기 전라도 지역에서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낮에는 한국 군인과 경찰이 마을로 들어오고 밤에는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와 활개를 치면서 특히 빨치산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군경과 빨치산 양쪽에 의해 민간인들이 대거 희생됐다.
 
  토벌작전을 벌인 군경은 미수복 지역의 주민을 ‘빨치산’ 혹은 ‘비무장 빨치산’ ‘빨치산 동조자’로 여겨 토벌 대상으로 삼았고, 식량을 제공하거나 짐을 져다 나르는 등의 노역 행위를 이유로 주민들을 학살했다.
 
  반면, 빨치산들은 아직 치안이 회복되지 않은 지역을 습격하거나 밤에 마을에 나타나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품을 빼앗아갔다. 또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을 괴롭혔다. 빨치산 활동 근거지 인근 주민들은 군경에 협조한다는 등의 이유로 ‘반동’으로 몰려 살해되거나 곤욕을 치렀다. 이 같은 군경과 빨치산의 등쌀을 피해 주민들은 피신 생활을 해야 했고 피신 중에 군경에 걸려 희생당하기도 했다.
 
  빨치산이 출몰하는 상황에서 지역 경찰서는 치안 공백 상태를 메우기 위해 방위대와 치안대, 경비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맡겼고, 민간 차원에서도 자율적으로 치안위원회와 자치위원회, 각종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치안 활동을 폈다. 이들 조직이 경찰을 대신하여 야간경계(야경)를 서다가 빨치산의 습격으로 희생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빨치산의 보급투쟁 때 짐꾼으로 끌려가 행방불명이 되거나 희생당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인민군 퇴각 후 국군의 점령지 수복 이후에 빨치산 등 좌익 세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주로 군인, 경찰, 공무원, 마을 이장,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 인사와 그 가족들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이와는 관련이 없는 무고한 지역 주민들도 많이 희생되었으며, 영유아와 부녀자, 노인들까지 포함된 가족 전체나 마을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학살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인민군·적대 세력, 영광에서만 민간인 3만 명 학살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가장 많은 사람이 희생된 곳은 전남 지역이었다. 전남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이 가장 활발했기 때문이다. 전남 지역의 경우 1950년 10월부터 수복작전이 펼쳐졌으나 늦은 지역은 1951년 3, 4월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군경이 주요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처럼 군경의 수복작전이 늦어지고 치안 확보가 안 되면서 곳곳에서 좌익에 의해 우익 인사들과 주민들이 살해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전남 지역에서 특히 피해가 컸던 곳은 영광군이다. 영광 지역에서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에 의한 피해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컸다고 알려졌는데, 그 규모는 자료에 따라 3000~2만1225명으로 큰 편차를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 공보처 통계국이 펴낸 《6·25전쟁 피살자명부》에 따르면 2만1225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의하더라도 영광군에서 최소 3000여 명 이상이 좌익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됐다. 좌우익에 의해 학살된 영광군의 민간인은 3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광의 경우 군경의 수복이 늦어지자 1950년 10월 초순 좌익이 다시 들어와 ‘반동 숙청’ 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희생이 많이 늘어났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조사된 전체 피해자의 약 88%가 이 시기에 살해됐다.
 
  6·25전쟁 당시 수많은 민간인이 좌우익에 의해 학살됐다. 3만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진 영광 지역은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모든 지역에서도 대량 민간인의 희생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밖에도 신안군에서도 민간인 희생 사건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신안군의 경우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군경에게 희생된 민간인도 있지만, 인민군과 좌익 세력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은 “6·25전쟁에서 희생된 민간인의 40%가 전라도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영광, 장흥, 신안 지역 등이 민간인 희생자가 가장 많다”면서 “이 지역의 경우 전쟁 이후에도 활발히 활동을 했기 때문에 희생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동생이 국군이란 이유로 무고한 형 처형
 
1950년 7월 2일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상태에서 벌어진 인민재판 광경. 양복 입은 이가 김팔봉씨다. 그는 이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몽둥이로 맞고 기절한 채 끌려다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사진=인터넷 화면 캡처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 사례로 일컬어지는 전북 옥구군 미면의 경우 1950년 9월 27~29일 사이에 ‘반동분자와 그 가족’ 574명이 학살됐다. 이 사건에서 27일과 28일 이틀간 미면 신풍리에서 학살된 66명 중에는 24명의 여자와 4세의 어린아이도 포함됐다.
 
  여수에서는 1950년 9월 27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던 인민군과 내무서원(지방좌익 포함)이 내무서 수감자를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노동당원, 내무서원과 인민위원장 등은 내무서장실에서 ‘전원 총살하기로 결의’했다.
 
  그러고 수감자 197명 중 일부를 석방하고 150여 명은 순천으로 호송하여 ‘재심석방’한다는 구실로 포박한 다음 도보로 미평(美評)에 이르렀을 때 과수원과 그 일대의 둔덕재 아래 벽돌공장 주변에서 총살했다. 순천에서도 역시 9월 27일 순천 내무서에 수용되어 있던 사람들이 내무서 뒤뜰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충청도 지역에서도 1950년 9월 27~29일까지 민간인 학살 사건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기 충청남도 홍성군에서만 여러 사건이 발생했다. 대표적으로 홍성 내무서 희생 사건, 결성면 결성초등학교 희생 사건, 광천읍 가정리 박준회 사건, 홍성읍 옥암리 박창준 희생 사건이다.
 
  미국 전쟁범죄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홍성 내무서 희생 사건의 경우 9월 27~28일까지 인민군과 좌익 세력들이 80여 명의 수감자를 24명씩 한 조로 나누어 홍성내무서에서 각각 2km, 1.5km 떨어진 백월산과 소향리 뒷산, 그리고 용봉산으로 끌고 가 처형했다. 광천읍 가정리 박준회 사건 같은 경우 인민군과 좌익 세력들이 1950년 9월 29일 군인이었던 박준회 동생 박준문을 잡기 위해 박준회의 집으로 왔다. 당시 동생 박준문은 6·25전쟁 발발 후 집에 돌아왔다가 인민군 점령 시기에 마을 산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인민군과 좌익들은 박준문을 잡으려 했지만, 그가 없자 대신 박준회와 박준회의 여동생을 연행했다. 여동생은 곧바로 풀려났으나, 박준회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인민군과 좌익 세력들은 박준회씨를 체포한 날 바로 사형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김광동 진화위 상임위원은 “가장 많은 희생은 9월 25일 이후에 생겨났다. 당시 인민군과 적대 세력의 명령은 ‘앞으로 적대 세력이 될 요소들은 다 제거하라’였다”면서 “9월 26일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을 전후로 해서 무자비한 처형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김 상임위원은 “정말 1950년 추석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대량 학살당한 피의 추석이었다”며 “그 기간에 희생된 민간인만 3만~4만은 될 것이다”고 덧붙였다.
 
 
  공정하지 못한 보상제도… “이런 나라 어디에도 없어”
 
  기자는 2022년 3월호에도 이와 비슷한 기사를 쓴 바 있다. ‘인민군 등 좌익 희생자에 대한 국가 보상 한 건도 없다’ 지난 3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기사다. 해당 기사가 나가고 회사로 기자를 찾는 전화가 한 통 왔다.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연세가 좀 있으신 할아버지였다. 편의상 A씨로 칭한다.
 
  A씨는 기자의 기사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족도 6·25전쟁 당시 좌익 세력에 의해 희생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자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인민군이나 빨갱이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에게는 보상을 해주지 않고, 인민군 편에 서서 우리와 맞서 싸우다 죽은 사람들에게만 보상을 해주느냐”는 것이었다.
 
  기자는 통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A씨의 가족은 과거 한 마을에서 친하게 지내던 이웃에게 희생당했다는 것이다. 6·25전쟁 이전까지 가까운 이웃주민이었던 사람들이 인민군이 들어오자 그 밑에 들어가 빨간 완장을 차고 다니며 주인 행세를 하며 마을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고 했다.
 

  그러다 이들은 군경에 의해 마을이 수복된 이후 인민군에 동조한 죄로 희생됐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인민군 밑에서 노역을 하다 희생된 이들의 후손들은 군경에게 희생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가에서 보상금을 주고, 인민군과 적대 세력에 희생된 이들의 후손들은 보상을 받지 못하는 상태다.
 
  이와 관련해 국회와 사회단체들은 인민군과 적대 세력에 의해 희생된 분들의 후손에게 보상하는 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판 국민의힘 의원은 2022년 1월, 6·25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등 적대 세력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유족에 대해 배상과 보상이 이뤄지도록 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해당 개정안은 북한 인민군, 적대 세력과 그의 동조자 등에 희생된 대한민국 국민을 ‘전쟁 희생자’라는 개념으로 정의·명시하고 이들에 대한 배·보상 근거와 절차를 마련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하지만 해당 개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김광동 상임위원은 “정말 이는 잘못된 것이다. 제대로 된 국가라면 적군과 그 동조자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보상하는 것이 당연하다”면서 “보상을 하려면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하다. 보상 제도를 하루빨리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김 상임위원의 말이다.
 
  “6·25전쟁은 그렇다 치고 1969년 6월 8일 강원도 동해에서 북한 무장간첩선이 발사한 포탄에 의해 당시 삼척군 북평읍에서 일가족 5명이 희생당한 사건에 대해서도 보상을 안 해주고 있다. 이는 명백히 대한민국이 이들을 제대로 보호를 해주지 못해 생긴 희생인데 이것도 북한 탓으로 돌리면서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 국가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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