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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출신 《월간조선》 정광성 기자의 체험기1

자유를 찾아가는 죽음의 길 ‘탈출’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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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출신으로 기자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를 연재한다는 게 조금 건방져 보일 수 있다. 언젠가 내 얘기를 써 보고는 싶었지만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막상 내 얘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하니 기대도 되지만 걱정도 된다.

⊙ 자유의 소중한 가치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하다
⊙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건넌 두만강
⊙ 식량 구하기 위한 탈북이 반역이 되는 사회
1999년 11월 22일 연변조선족 자치주 화룡현의 두만강을 조선족의 도움을 받아 건너는 북한 노인(왼쪽)의 모습.
  선배와 점심을 먹게 됐다. 선배가 물었다. “자유와 평등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할래?”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유’를 선택했다. ‘자유’, 참으로 친근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 10여년 전까지 ‘자유’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나다. 그러던 내가 자유를 처음 맛본 것은 탈북과정에서다.
 
  2006년 3월이었다. 중국 기차 내부는 쓰레기장을 방불케 했다. 각종 음식물 쓰레기들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몸이지만 차마 쓰레기 더미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는 나의 귀에 “꼴에 자존심은 있나 보네”라는 말이 날아와 꽂혔다. 브로커의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린 마음에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북송되면 18살 어린 내가 겪게 될 온갖 수모와 창피를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순간 어떠한 장면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탈북과정에서 처음 맛본 ‘자유’의 달콤함
 
  중학교 3학년(15세) 때로 기억한다. 2교시가 끝나고 전체 집합 종이 울렸다. 반 친구들과 나는 조금 놀랐다.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쉬는 시간에 학교 전체가 모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전체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왔고, 뒤에 한 학년 선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뒤를 따랐다. 교장은 연단에 올라서서 화난 목소리로 연설을 했다. 정확한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이랬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만들어 준 좋은 나라에서 학생에게 맡겨진 공부는 하지 않고 자본주의 썩어빠진 사상에 물들어 자신의 부모와 학교 친구들을 버리고 중국으로 도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자리에 모인 교사들과 학생들은 모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한 학년 선배가 몰래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잡혀 북송돼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고 나와 학교로 돌아온 것이었다. 북한은 살인죄와 체제 비판죄가 아니면 미성년자들은 감옥에 보내지 않는다. 그 선배도 미성년자여서 풀려났지만 감옥보다 큰 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장은 연단 밑에 있는 선배를 위로 불러 세웠다. 그 뒤로 교장은 해당 선배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교장은 교육자로서의 체통을 버리고 이성을 잃은 듯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교장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북한에서 교장이라는 직책의 권위는 높았다. 그런데 학생 한 명으로 인해 시내 중심가 학교 교장에서 시골 학교 교장으로 좌천되게 생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교장은 그 사건으로 인해 600여 명이 재학하던 학교에서 100명도 안 되는 시골 학교 교장으로 내려갔다.
 
 
  호상비판
 
탈북자를 막기 위한 북한측의 경계가 삼엄해지고 있는 가운데 신의주 근교의 압록강 둑을 걸으며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북한 병사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
  교장의 비판이 끝나자 선배는 전교생 앞에서 자기비판을 시작했다. 그 선배는 고개를 숙인 채 울면서 1시간 남짓 자신의 잘못에 대해 자기비판을 했다. 이어 학급별로 한 명씩 연단에 나와 그 선배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먼저 같은 반 친구가 나왔다.
 
  “먼저 같은 반으로서 동무가 이렇게 되기까지 잘 이끌지 못했던 저와 담임선생님 이하 반 친구들은 깊이 반성 중에 있습니다. 평소에 동무의 잘못을 보고도 눈감아 줬던 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충호 동무를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렸습니다. 깊이 반성합니다. 호상(互相)비판을 하겠습니다. 충호 동무는 당과 수령님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나라와 가족을 배반하고 중국으로 도강을 했습니다. 이것은 반역행위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학교 청년동맹(15세부터 가입할 수 있는 북한의 조직) 차원에서 큰 벌을 내릴 것을 제기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식량을 구하러 갔던 발걸음이 반역으로까지 번졌다.
 
  후배들은 더 심했다. 1학년 학생이 연단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동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선배가 미국과 남조선 놈들의 책동에 놀아나 나라와 가족을 배신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선배로 보지 않고 반역자로 보겠다. 이렇게 머릿속이 썩어빠진 사람은 우리 학교에 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 당장 학교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학년생뿐만 아니라 다른 후배들도 선배를 비판하기에 열을 올렸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가능하다. 학교 선배가 아니라 자신의 부모까지도 대중 앞에서 비판할 수밖에 없는 곳이 북한이다. 성(姓)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름은 ‘충호’였다. 외모가 출중해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선배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선망의 대상에서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 선배의 얼굴이 생각나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브로커의 지시에 따라 의자 밑으로 들어갔다. 의자 밑은 생각보다 더 한심했다. 쓰레기와 먼지에 고약한 냄새까지 났다. 참아야 했다. 선양(瀋陽)을 출발해 4~5시간 정도를 그 상태로 이동했다. 브로커는 우리가 화장실을 자주 간다는 이유로 물도 주지 않았다. 쓰레기 더미 위에 누워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실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마치 사람이 아닌 동물이 된 것 같았다. 고향에 있을 때 부모들을 잘 만난 덕에 힘든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잘살지는 않았지만 하루 세끼 밥은 굶지 않고 조금이었지만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러다 어느새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끝내는 탈북길에 올랐다. 아니, 정확히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왔다.
 
 
  아빠 찾아 삼만리
 
  북에서 운전기사로 일하시던 아버지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일을 그만두고 장사의 길에 오르셨다. 오직 북한 정권을 위해 일하시던 아버지가 장사를 시작한 것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2004년 돌연 장사를 하기 위해 어딘가로 떠난다는 말씀을 하시고 집을 나선 이후 한동안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야 아버지 소식을 알게 됐다.
 
  중국에 계신다고 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년 전 다른 지역으로 장사를 떠나신 아버지가 중국에 있다니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이후 아버지가 보낸 브로커를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 이것이 탈북의 이유였다.
 
  순간 중국 공안의 발소리가 났다. 신분증 검사를 위해 우리 일행들 쪽으로 다가왔다. 신분증 검사는 선별적으로 이뤄졌다. 나는 긴장되어 몸을 더욱 움츠렸다. 그곳에서 발각되면 100% 북송된다. 돌아가면 감옥에는 가지 않겠지만 한 학년 위였던 충호 선배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죽기보다 더 싫었다. 다행히 공안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칸으로 이동했다. 안도의 한숨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더욱 서러운 것은 배고픔이었다. 점심이라곤 빵 두 개로 해결하고 기차에 올랐다. 저녁 때가 되자 기차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그러나 우리를 인솔하는 브로커는 잠을 잤다. 자는 척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다음 목적지까지 우리를 무사히 안내하는 책임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돈을 최대한 아껴 자신들의 마진을 남기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우리 일행 중에는 아기 어머니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이 어머니에게까지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일행 중 한 분이 참다못해 밥을 먹자고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기차에선 위험하니 베이징에 도착해서 먹자고 했다.
 
  그렇게 밥도 먹지 못한 채 4시간을 의자 밑에서 버텼다. 몸이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화장실이 급해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브로커에게 화장실이 급하다고 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조금만 참으라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참아 보기로 했지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무작정 기어가 의자 밑을 탈출했다. 그곳을 나오는 순간 나는 다른 세계를 보았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를 뻔했다. 같은 기차 안이지만 음식물 쓰레기 썩는 냄새와 먼지투성이로부터의 탈출은 환희 그 자체였다. 특히 좁은 의자 밑에서는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곳을 나온 순간 나의 몸은 자유를 찾은 것이다. 그때 그 감정과 느낌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

 
2007년 11월 17일 중국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하던 성룡이가 힘에 겨워 울고 있다. 8살 성룡이에게는 장장 18시간의 산행길이 힘겹기만 하다. 사진=한용호 AD
  화장실에 다녀온 후 브로커는 다시 들어가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북한에서 억압받고 살아온 한 소년이 중국으로 탈출해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은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됐다. 나의 투쟁으로 인해 다른 일행들도 의자에 앉아 편히 갈 수 있었다. 의자 밑과 위는 천국과 지옥 그 자체였다. 2시간 정도 의자에 앉아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원해서 한반도 북쪽에 태어난 것은 아니다. 태어나 보니 김일성·김정일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이었다.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속담이 있다. 당시 내 처지가 그랬다. 전쟁으로 인해 나라를 빼앗기거나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켜 줄 나라가 없었다.
 
  우리는 늦은 밤이 돼서야 베이징에 도착했다. 도시는 불빛들로 화려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일행은 역사 근처에 방을 잡고 식사를 했다. 꿀맛이었다. 그날 밤 나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기차에서 겪은 일부터 태어나 북한에서 받은 교육들, 내가 본 중국의 모습 등 많은 생각을 했다. 내 머릿속을 가장 지배했던 것은 북한 체제에 대한 반감이었다. 태어나서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우상화 교육, 즉 세뇌교육을 통해 당에 충성하는 소년으로 자라 왔다. 하지만 내가 수년을 배워 온 것이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되자 더욱 화가 났던 것 같다. 뒤에 자세히 얘기를 하겠지만, 북한을 탈출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국이나 제3국에서 북한의 진실을 마주하면 내가 느꼈던 감정을 한 번씩은 느껴 봤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2006년 3월 북한을 출발해 같은 해 8월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중국과 제3국에서 보냈던 5개월은 50년보다 더 길었던 것 같다. 그동안 목숨을 잃을 아찔한 순간도 많았지만 또 행복한 날도 있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일 것이다.
 
  처음 아버지가 보낸 브로커와 두만강을 건너면서 중국에 계시는 아버지를 만나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북한 정권이 가장 싫어하는 탈북을 했다. 중국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창밖을 보게 됐다. 별천지였다. 북한에서 갓 넘어온 촌놈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브로커를 따라 개인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곳에서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아버지는 한국에 계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중국 어느 지역에 있으니 그 아저씨(브로커)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다음 날 나는 다른 브로커에게 넘겨졌다. 누군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를 따라가야 했다. 그 사람의 집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나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북한 출신들이 있었다. 신변상 그들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 그들도 나와 함께 무사히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5개월간의 탈북
 
2009년 12월 9일 오후 제61차 세계인권선언일을 맞이하여 북한인권단체연합회 회원들이 서울 시청광장에서 한국정부와 UN의 북한 인권개선을 위한 적극 노력을 촉구하며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서 공안들에 잡혀 강제 소환되는 모습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검은 두건을 쓰고 밧줄에 묶여 공안과 북한 인민군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재현한 사람들은 실제 북한에서 탈북한 여성들이다.
  7일 뒤 나는 그들과 탈북 길에 올랐다. 우리는 브로커와 함께 옌지(延吉)의 한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선양까지 이동해야 했다. 3월 중순이지만 옌지 쪽에는 눈이 내리며 추웠다. 특히 우리는 다른 사람들 눈에 들지 않는 게 좋다. 특이한 행동을 해서도 안 되며 말을 많이 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거의 벙어리 수준이었다.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동하는 중간중간엔 중국 공안들의 초소가 있다. 이곳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신분증이 없으면 잡히는 것이다. 나는 출발하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만약 공안에게 잡히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도 도망칠 것이다. 그러다 총에 맞아도 좋다. 북송은 절대 당할 수 없다는 각오인 것이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지만 어떤 분들은 몸에 독약을 품고 떠난다고 했다. 만약 공안에 잡히면 약을 먹고 죽겠다는 각오인 것이다. 북송에 대한 탈북민들의 생각은 한결같다.
 
  버스가 한참을 달리다 갑자기 멈췄다. 당황했다. 혹시 벌써 신분증 검사를 하나 싶어서 긴장감이 돌았다. 손에 땀이 나면서 입술이 말라 가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긴장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공안은 오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밖의 상황을 살펴보니 빙판길에 버스가 뒤집어져 있었다. 이로 인해 뒤의 차들이 발이 묶인 것이다. 상황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일행들에게 알려줬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공안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30분 지나서야 사고 차량을 치우고 다른 차들도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더 큰 산이 있었다. 3시간가량 달렸을까. 버스가 갑자기 또 멈췄다. 순간 ‘사고 때문인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늘이 나의 기대를 질투라도 하듯 창밖으로 공안 초소가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까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꼼짝없이 잡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안은 버스에 올라탔고 앞쪽에서부터 신분증 검사를 시작했다. 어쩔줄 몰라 브로커 쪽을 보니 자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는 것처럼 보였지만 긴장한 모습이 보였다. 공안은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왔다. ‘만약 잡히면 뛸 수 있는 데까지 달아나 보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심판의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공안이 내 두 번째 앞쪽을 검사하던 중 버스 기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뭐라고 했다. 물론 중국어로 말했고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던 공안이 우리 쪽까지 오지 않고 버스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공안이 내리고 버스가 출발하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나중에 브로커에게 버스기사와 공안이 나눈 대화를 물어봤다. 이랬다.
 
  버스 기사: “아까 오다가 버스가 사고 나서 1시간 지체됐다. 빨리 가야 하니까 대충 하고 보내 달라.”
 
  공안: “대충하면 어떻게 하나. 제대로 해야 한다.”
 
  버스 기사: “도착 시간 늦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
 
  공안: “알았다 내릴 거다.”
 
  대충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다.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이후 무사히 선양에 도착했고, 선양에서 기차로 베이징, 베이징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했다. 옌지를 떠난 지 꼬박 3일 만에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밍시(昆明市)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른 브로커에게 인계됐다. 참으로 거래 물건 같았다. 둘이 전화로 만나 우리를 인계하는 순간 받는 사람은 위안화를 상대에게 건넨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광경이 펼쳐진다. 참담하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우리는 또 다른 브로커에게 이끌려 그의 집(아지트)으로 갔다. 우리는 그곳에 15일 정도 묵은 뒤 제3국으로 가기 위해 중국 국경마을로 이동했고, 태국으로 입국했다.
 
  북한을 떠나 대한민국까지 오는 과정은 다양하다. 내가 왔던 경로인 중국-태국-대한민국으로 오는 경우와 몽골을 거쳐 오는 과정, 캄보디아로 오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이 중에 어느 것 하나 쉬운 경로가 없다. 모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지금은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벅차고 힘든 길이었다. 우리는 무사히 중국 국경을 빠져나와 태국으로 탈출했다. 태국에서 본격적인 대한민국 입국 절차가 시작됐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여권을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불법 입국했다는 의심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태국의 수도 방콕 난민수용소에서 3개월간 수용소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 방콕 난민수용소에 도착하면 유엔(UN)에서 나와 북한사람인지를 확인한다. 간혹 중국 조선족 사람들이 북한인으로 가장해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다음 절차는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들이 나와 추가 신원조회를 하면 절차는 끝이 난다. 모든 인터뷰가 끝나면 여권이 만들어지고, 여권이 발급되면 대한민국으로 입국하게 된다.
 
  한국에 와서 12번째로 맞는 여름 서울 상암동 사무실에서 글을 쓰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잠시 잊고 산다. 나도 마찬가지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소중하게 얻은 자유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다. 내게 항상 있으니까. 언제라도 누릴 수 있으니, 나도 언젠가부터 자유가 당연한 것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자유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각종 음식물 쓰레기와 먼지투성이 속에서 얻은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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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atcha    (2018-08-28) 찬성 : 32   반대 : 27
이 x같은 신문은 툭하면 댓글 달 수 없다고 쥐랄이네.
  체리    (2018-08-27) 찬성 : 13   반대 : 2
잘읽었습니다..올 추석엔 두만강을 자유롭게 건너서 고향에 가길 바라며 응원할께요!!
  조선팔도체고미녀    (2018-08-27) 찬성 : 39   반대 : 7
잘 읽었습니다. 민주와 인권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어찌 이런 전세계 유례없는 인권실태에는 입을 다물고 있을까요. 또 그런 위선적인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젊은이들 역시 어찌 이런 사실을 망각하고 있을까요. 얼른 다음 편 내주세요
  응원합니다    (2018-08-27) 찬성 : 25   반대 : 2
좋은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 빨리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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