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유대인 네트워크 활용… 핵 폐기물 처리 회사 통해 농축 우라늄 확보 추정
⊙ 1979년 미국 인공위성, 남아공과 남극 대륙 사이에서 두 차례 폭발 섬광 포착… 이스라엘-남아공 합동 핵실험이었나?
⊙ 남아공, 1980년대까지 총 여섯 발의 10~18kt급 핵무기 만들었지만, 미·소 압박으로 핵무장 포기
⊙ 대만, 1970~1980년대 핵무장 시도했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포기
⊙ 미국, 정권에 따라 친미와 반미 성향이 극단적으로 오간 한국의 핵개발 찬성 어려워
윤상용
1979년생.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강대 국제대학원 석사,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박사, 육군 통역사관 2기 /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군사령관 전속 통역장교, 대위 예편, 現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 / 역서 《이런 전쟁》(공역), 《명장의 코드》(역서), 《아메리칸 스나이퍼》(공역), 《은경이일기》(영문판) 외 다수
⊙ 1979년 미국 인공위성, 남아공과 남극 대륙 사이에서 두 차례 폭발 섬광 포착… 이스라엘-남아공 합동 핵실험이었나?
⊙ 남아공, 1980년대까지 총 여섯 발의 10~18kt급 핵무기 만들었지만, 미·소 압박으로 핵무장 포기
⊙ 대만, 1970~1980년대 핵무장 시도했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포기
⊙ 미국, 정권에 따라 친미와 반미 성향이 극단적으로 오간 한국의 핵개발 찬성 어려워
윤상용
1979년생.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강대 국제대학원 석사,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박사, 육군 통역사관 2기 /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군사령관 전속 통역장교, 대위 예편, 現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 / 역서 《이런 전쟁》(공역), 《명장의 코드》(역서), 《아메리칸 스나이퍼》(공역), 《은경이일기》(영문판) 외 다수
- 이스라엘 디모나에 있는 핵 시설. 이스라엘 핵개발의 산실이다. 사진=AP/뉴시스
2024년 현재, 동아시아 지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대만의 민주진보당(민진당) 대선(大選) 승리로 양안(兩岸)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와 밀착하면서 중국과의 종속적인 관계를 대체하고 있다. 이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올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선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후보 모두 대중(對中) 정책에서는 강경한 입장이지만, 누가 백악관에 재입성하게 되느냐에 따라 미국의 향후 동아시아 정책은 대만 지원 문제나 한미동맹, 한·미·일 삼각 협력 등의 사안에서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갑작스럽게 화두로 떠오른 것은 한국의 핵(核)무기 보유 문제이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미국은 더 이상 ‘두 개의 전쟁’을 감당할 여력이 없음을 인식했으며, 오바마 행정부 이래로 정당과 관계없이 해외 개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 역시 미군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방어 태세의 자립성을 높이기를 바라고 있어 핵무장까지도 허용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반면, 이제는 한국의 경제적·외교적 위상에 있어 잃을 것이 많으므로 핵무기 하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맞선다.
이 논의 과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례가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 과정이다. 핵무기 선두주자들의 보유체제가 정립된 뒤 핵개발에 착수한 후발(後發)주자이고, 국제사회가 수평 핵 확산을 금지하는 분위기 속에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비(非)공산권 국가이므로 한국과 배경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농토 개간’ 명목으로 원자로 도입
이스라엘은 건국 순간부터 중동(中東)에서 ‘가장 불안한’ 국가였다. 현재도 안전한 국가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어 이집트·요르단과 수교하기 전까지는 전후방의 개념이 없고 육로로는 오로지 적국과만 맞닿은 육지 위의 섬이었다. 이스라엘은 1948년 유엔분할계획안을 수용하며 건국한 이후부터 4차 중동전쟁까지 사실상 자신을 둘러싼 중동의 모든 국가를 상대로 싸웠다.
건국 후 첫 전쟁인 이스라엘 독립전쟁(1차 중동전) 때는 약 1년 남짓한 전쟁 기간 동안 민간인 포함 약 6300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아랍 측은 최대 2만 명의 병력 손실을 입고 전쟁이 끝났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1대 3의 교환 비율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전쟁을 통해 주변국 모두가 이스라엘의 멸절(滅絶)을 원하고 있으며, 앞으로 단 한 차례의 패배도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1950년대부터 절대적인 열세를 깨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시작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네게브 사막을 개간해 농토로 활용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1956년 프랑스로부터 24MW급 원자로를 도입했다. 이 원자로를 이용하여 바닷물을 담수화(淡水化)해 농업용수를 공급하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계획이었다. 이 사업을 추진한 ‘건국의 아버지’ 다비드 벤구리온(Ben Gurion·1886~1973년) 총리는 사실 처음부터 핵무기 개발을 염두에 두었지만 이를 은닉할 목적으로 ‘사막 개간’을 내세웠다.
이츠하크 라빈의 반대
그러나 ‘농업용’ 원자로 도입이 추진되자 이스라엘 내에서도 ‘이 사업은 사실 핵무기 개발을 위한 것’이라며 반대가 일었다. 특히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1922~1995년, 전 총리) 장군은 두 차례 중동전을 치르면서 이스라엘에 영국·프랑스 등 열강의 지원이 없다면 아랍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버티기 어렵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불필요한 핵개발로 이러한 국가들과 척을 지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자로 도입 계획에 반대했다.
그러나 벤구리온의 강력한 의지로 사업은 강행되었고, 프랑스로부터 도입한 원자로는 네게브 사막의 소도시인 디모나(Dimona)에 건설되어 1963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은 디모나에 원자로를 설치했으나,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원료 물질인 플루토늄 혹은 우라늄이 필요했다. 이스라엘은 핵무기 개발을 정식으로 선언하거나 공개한 적이 없기 때문에 플루토늄 확보 과정은 다소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일부에서는 프랑스가 이 원료까지 제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플루토늄이나 고농축 우라늄은 수평 핵 확산에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기존 핵 보유국들(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이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냉전(冷戰) 기간 중 미국과 소련조차 제3국의 핵개발 시도를 막기 위해 협력했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핵 원료 확보에 대해서는 또 다른 주장이 있다. 바로 전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유대계 조력자들을 통해 원료를 확보했다는 설이다.
핵 폐기물 처리 회사 통해 원료 확보(?)
세계 정보기관의 스파이 활동 분야 전문 작가인 고든 토머스(Gordon Thomas)의 저서 《기드온의 스파이(The Gideon’s Spies)》에 따르면, 이스라엘 해외첩보기관 ‘모사드’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의 아폴로시(市)에 위치한 ‘뉴멕(Nuclear Materials and Equipment Corp.·NUMEC)’이라는 업체를 핵물질 확보 수단으로 삼았다.
이 회사는 유대계 미국인인 잘만 샤피로(Zalman Mordecai Shapiro·1920~2016년) 박사가 운영하고 있었으며, 그는 존스홉킨스대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사에서 근무하면서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USS Nautilus, SSN-571)함의 원자로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정부가 그의 회사를 눈여겨본 이유는 이 회사가 농축 우라늄 원료 제조뿐 아니라 핵 폐기물 관리 및 처리 업무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뉴멕은 미 정부 외에도 국제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AEC)와 계약을 맺고 산업용 원자로용 농축 우라늄을 공급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원자로에서 발생한 핵 폐기물을 관리 및 처리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핵 폐기물 처리 과정이다. 보통 우라늄은 재처리 과정에서 증발하거나 땅에 스며들면서 어느 정도 자연 손실이 발생하는데, 이 양은 일정하지가 않다. 따라서 이를 이용해 미 정부나 핵 관련 감시기구의 눈을 피해 이스라엘에 필요한 양을 은밀히 제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뉴멕이 원료를 공급했다는 의혹은 1960년대 미 정부뿐 아니라 국제 원자력위원회, 미 연방수사국(FBI), 미 중앙정보국(CIA)까지 동원되어 뉴멕사를 조사했을 때 이 회사가 보관 중이던 고농축 우라늄(HEU)의 양이 서류상의 기록과 불일치했기 때문에 제기됐다. 뿐만 아니라 조사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핵개발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스라엘 고위 관리들이 뉴멕사를 방문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그중에는 이스라엘 방위군 장성 출신으로 훗날 이스라엘 핵개발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알려진 라파엘 에이탄(Rafael Eitan)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러 사법기관의 면밀한 중첩 수사에도 불구하고 뉴멕에 대한 혐의는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수사는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IAEA 사찰을 美 정부 사찰로 대신
이스라엘이 정확하게 어떻게 핵물질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단계가 되자 미국도 이스라엘의 핵개발 시도를 눈치채고 견제에 들어갔다. 특히 네게브 사막 한가운데에 건설한 원자로가 단순히 ‘사막 개간용’이 아니라고 판단한 케네디 행정부는 이스라엘이 핵을 보유하게 될 경우 중동 지역의 역학(力學)관계가 심각하게 뒤틀릴 것을 우려했다. 수평 핵 확산에 절대적으로 반대하던 케네디 대통령은 이스라엘 정부에 친서를 보내 디모나 원자로 시설이 IAEA의 정기 사찰을 받아야 한다고 압박했고, 벤구리온 총리에게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이 핵을 보유하면 중동 지역의 균형에 심각한 손상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이스라엘 측은 미국의 유대계 인사들까지 동원한 전 방위 로비를 벌여 미 정부와 절충안을 이끌어내면서 디모나 시설이 IAEA 대신 미 정부의 사찰을 받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 절충안은 유대계 미국인의 자금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미 정치권의 입장 때문에 성사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미 정부 사찰단이 오기 전 디모나 시설에 위장용 통제 시설을 만들어 민간용 농업 원자로 시설로 보이도록 위장했고, 핵심적인 시설은 방사선 때문에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표시하여 사찰단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앞서 언급한 뉴멕으로부터 외교행낭 편으로 컨테이너 몇 개를 받았는데,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는 외교 관례상 아무도 확인할 수 없었다. 같은 기간 뉴멕이 ‘자연 손실’로 기록한 농축 우라늄은 약 45kg이었으나, 미국은 이것이 이스라엘로 넘어갔다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 발발 전까지 약 1~2발의 핵무기를 완성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스라엘은 아랍연맹 4개국 연합국을 상대하면서도 이 전쟁에서 핵을 사용하거나 핵의 존재를 공개하지 않았다. 이 당시 완성된 핵무기를 보유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만약 보유했더라도 충분한 실험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전(實戰)에서 운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핵무기 개발에는 실험 과정이 필수적인데, 이스라엘은 가시적으로 어디에서 핵실험을 한 정황이 없어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측이 존재한다. 첫 번째 추측은 디모나 핵 시설 인근 네게브 사막 지하에서 미임계 실험(sub-critical test)만 했을 가능성이다. 이는 핵폭발 없이 고폭탄으로 핵물질의 반응만 테스트하는 방법이므로 외부에 포착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두 번째는 백인 정권 시절 이스라엘과 군사 기술 면에서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지원했을 가능성이다. 이 주장은 1979년 9월 22일 미국의 벨라(Vela) 인공위성이 인도양 특정 지점(남아공과 남극 대륙 사이)에서 두 차례 폭발 섬광을 포착한 ‘벨라 사건’으로, 이를 두고 이스라엘과 남아공이 합동 핵실험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남아공 역시 백인 정권 시절 핵무기를 완성한 적이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은 추측이긴 하나 ‘벨라 사건’이 핵실험과 직접 연관됐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이 외에도 핵폭발까지 필요 없는 유체역학 테스트로만 실시했을 것이라는 설, 기존 핵 보유국들로부터 핵실험 데이터를 제공받아 물리적 테스트 단계를 건너뛰었을 것이라는 주장 등도 있지만, 이스라엘 정부가 핵 보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어떤 방식을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원자력 기술자의 폭로
이스라엘 정부가 핵 보유를 철저히 부인하는 상황에서 ‘보유’가 기정사실화된 것은 과학적 근거와 핵개발 참여 과학자의 ‘양심선언’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적지 않은 양의 핵무기 개발 관련 연구 결과와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과학계에서는 이스라엘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또 하나는 1986년 이스라엘 원자력 기술자로 근무했던 모르데하이 바누누(Mordechai Vanunu)에 의한 폭로였다. 그는 1977년부터 1986년까지 이스라엘 핵개발 시설에서 근무했다고 주장했으며, 이스라엘이 100여 발의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간접 증거로 다수의 사진과 서류를 영국 언론사를 통해 공개했다. 그는 이후 이스라엘 정보당국에 의해 체포된 뒤 종신형(終身刑)을 선고받고 구금됐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은 필요한 경우 핵무기 보유 사실을 ‘암시’하지만, 공식적으로 보유 사실을 인정한 적은 없다.
이스라엘이 핵을 보유하게 된 이유는 온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절체절명의 지정학적 상황, 그리고 단 한 번의 패배가 국가 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선택 때문이다. 또한 아직 건국 초였던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잃을 것이 적었고, 무엇보다 주변의 적 모두를 상대로 한 ‘생존’이 지상 과제였다.
핵무기 포기한 舊소련 국가들
이런 맥락하에 이스라엘과 달리 핵을 거의 완성했거나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핵 보유에 대한 교환가치가 너무 커 포기를 한 사례도 있다. 우선 구(舊)소련 연방에서 탈퇴하면서 독립해 갑작스럽게(?) 핵 보유국이 됐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가 있다. 이들 국가는 구소련 시절 소련 정부가 이곳에 핵을 배치하거나 저장했기 때문에 독립하면서 핵 보유국이 됐으나, 갓 건국했을 당시 이들은 핵무기를 유지할 능력도 없었고, 핵보다는 국가의 기틀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따라서 이 세 국가는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가 천연자원 제공과 경제 지원을 약속하고, 분쟁 가능성이 있던 국경을 확정하는 조건으로 핵무기 반환을 요구하자 모두 러시아에 핵무기를 이관했다.
반면 앞서 언급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기존 핵 보유국 및 국제기구의 압박과 정치 환경 변화에 따라 핵무기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핵을 포기한 사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 분리 정책) 철폐로 백인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 아프리카 대륙의 ‘유일한’ 백인 국가였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주변 국가 모두가 잠정적인 적이었으므로 이미 1948년부터 남아공의 원자력에너지주식회사(Atomic Energy Corporation·AEC) 주도로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
美蘇 공조로 남아공 핵무장 저지
하지만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 말로, 미국을 통해 산업 및 연구 목적으로 원자로를 제공받으면서부터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에 돌입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와 일치하는데, 이 때문에 군사적으로 가까웠던 이스라엘과 상부상조하면서 핵무기를 공동 개발했을 가능성도 크다. 특히 남아공에서는 우라늄을 국내에서 확보할 수 있었으므로 이를 활용하여 1980년대까지 총 여섯 발의 10~18kt급 핵무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러 기존 핵 보유국들이 남아공의 핵무기 개발 시도를 눈치챘다. 1977년 8월경 남아공의 핵개발 징후를 읽은 소련 정보기관이 먼저 남아공의 핵실험 징후를 포착했고, 이 사실을 미국과 공유했다. 남아공은 주로 칼라하리 사막과 인도양 망망대해에서 핵실험을 실시했는데, 미국은 우선 의심되던 칼리하리 사막 상공에 정찰기를 띄워 광범위한 수색 끝에 실험 시설을 찾아냈다. 또한 인도양에서는 앞서 언급한 ‘벨라’ 위성이 두 건의 연속적 폭발을 포착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으나 미국은 남아공의 핵실험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의 강력한 압박이 들어오자 남아공 정부는 결국 개발 사실을 인정했으며, 개발 중단의 의미로 핵실험용 갱도(坑道)까지 모두 폐쇄했다. 남아공은 이후에도 1988년까지 계속 핵실험을 진행할 기회를 엿봤지만 이미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 국제기구의 감시가 집중된 뒤라 실행할 수 없었다.
이러다 남아공의 정치 환경이 변했다. 1989년, 데 클레르크(F. W. de Klerk·1936~)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인종 분리 정책을 철폐하기 시작했고, 그간 국제사회에서 고립적이던 위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게다가 냉전까지 종식됐기 때문에 전략적인 핵 억지력의 중요성이 낮아져 절박한 안보 문제가 줄었고, 미국이 남아공이 핵을 포기할 경우 영토 방어에 대한 안보 지원을 약속해 클레르크 정권은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공식 폐기를 선언했다. 남아공은 1991년부터 여섯 기의 핵을 모두 해체했으며, 핵확산금지조약(Non-Proliferation Treaty·NPT)에 재가입하면서 IAEA 등 국제기구가 핵무기 해체를 검증했다.
남아공이 핵을 완성하고도 포기한 것은 남아공이 우선시하는 안보 가치가 변화한 탓이 크다. 초반에는 안팎으로 백인 정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생존’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나중에는 정권 변화와 함께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일원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컸기에 핵 보유 역시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물론 냉전기 ‘초강대국’들에 포착됐기 때문에 더 이상 비밀리에 개발을 진행할 수가 없었던 이유도 있다.
대만, 1988년까지 핵무장 시도
대만도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다 좌절된 국가다. 이는 미국이 1970년대 기밀 해제를 하면서 밝혀진 내용으로, 대만 역시 1960년대부터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 중국이 1964년 10월 신장(新疆)에서 첫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세계에서 다섯 번째 핵 보유국이 되었기 때문에 대만은 이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장징궈(蔣經國·1910~1988년) 총통은 해외에서 핵무기 기술을 도입했고, 자체적으로 농축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미국의 제럴드 포드 행정부가 대만의 핵개발 시도를 포착하면서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대만 정부는 1976년 9월 핵개발을 중단하겠다고 확약했지만, 바로 다음 해 IAEA 사찰단이 조사를 실시하던 중 대만이 연구용 원자로의 사용된 연료를 시설 밖에서 전용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 그다음 해인 1978년에는 미국의 핵 전문가들이 대만에 방문했다가 이들이 무기화(武器化) 용도가 분명한 레이저 우라늄 농축 기술을 연구 중인 것을 포착했고, 이에 새로 들어선 지미 카터 행정부는 대만 원자력발전소를 위한 장비의 수출 허가를 취소하겠다면서 압력을 넣었다.
미 정부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대만의 핵무기 개발 시도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배치해 한국-일본-대만에 ‘핵우산’을 제공했지만, 정작 대만 정부는 1988년까지도 계속 핵무기 개발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미국과 관련 국제기구의 집중적인 감시 속에서 더 이상 핵무기 개발이 어렵다고 판단한 대만 정부는 결국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다.
대만의 사례는 특히 눈여겨볼 사례다. 개발 당시의 환경이 한국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당시 대만은 미국과의 중미상호방위협정(Sino-American Mutual Defense Treaty·SAMDT)이 살아 있던 때였고, 중국이 계속 중국 해안에서 불과 4km 떨어진 진먼다오(金門島)에 지속적으로 포격을 가하며 국지(局地)도발을 자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핵무기 보유가 기정사실화되면서 안보 위협도 심각하던 때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만에는 미-타이완 방어사령부(US-Taiwan Defense Command·USTDC)가 주둔하면서 대만 방어에 헌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현재의 한국과 유사점이 많다. 물론 대만은 미-중 수교로 외교적인 고립이 가속화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나, 미국에 있어 대만은 직접적인 안보 위기에 직면한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수평 핵 확산은 허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사례이기 때문에 연구해볼 만하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가 불붙인 한국의 핵 보유 시도
한편 한국 역시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1970년대 중후반, 미국의 급작스러운 동맹 정책 변화 때문에 핵무기 개발을 고려한 적이 있었다. 단초는 베트남 전쟁 장기화에 따른 미국 여론의 반전(反戰) 움직임이 커지면서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군(撤軍)을 고려하면서부터였다. 이때 닉슨이 제창한 통칭 ‘닉슨 독트린’은 미국의 동맹국들은 스스로 안보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 제7보병사단이 1971년에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목격한 한국은 캐나다나 프랑스로부터 중수형 원자로 도입을 추진했고,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하지만 정보기관을 통해 이 사실을 포착한 미국은 한국이 핵무기를 갖도록 용인하지 않았다. 미국은 경제적 지원과 다양한 안보 패키지를 제시하면서 한국의 핵무기 개발 중단을 요구했고, 반대급부로는 미국의 핵 억지력을 한반도까지 확장하겠다고 제시했다. 사실 당시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미군의 철군에 대비하여 핵무기 개발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국제사회와 척을 질 의향은 없었으므로 이 자체를 동시에 협상 카드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국은 미국과 지속적으로 밀고 당기는 힘 싸움을 하며 미국과 협상했고, 미국은 국제기구를 통해 한국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 결국 주한미군의 철군 중단과 미국의 확장된 안보 패키지 제공을 약속받으면서 IAEA로부터 핵 사찰을 받는 데 동의했다. 한국은 종국적으로 1975년에 NPT를 비준했으며, 이후에는 10·26사건으로 정치 환경이 변화해 핵무기 개발 시도도 완전히 중단됐다.
미국, 혈맹에도 핵무기 이전 안 해
‘궁극의 비대칭(非對稱) 무기’인 핵무기는 역사상 단 두 차례만 사용된 후 더 이상 사용된 예가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다.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이유는 ‘국가의 생존성’ 문제와 직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기존 핵 보유국과 적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려는 목적이거나, 안보가 심각하게 불안해 국가 존폐의 위기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핵무기는 그 어디에서도 ‘방어용’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한 번 투발(投發) 시 전투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대량살상무기’의 잔혹성, 사용 후 오랜 시간 동안 영향력이 잔류하는 환경적·생물학적 문제 등으로 비도덕적인 무기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뿐만 아니라 핵무기의 위력은 다른 핵무기로 견제되는 순간 효과가 반감하므로, 기존 핵 보유국은 타국(他國)의 핵무기 개발 및 보유에 절대 반대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실질적 ‘혈맹(血盟)’으로 간주되는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국가들도 자체 핵을 개발한 영국 정도만 핵을 보유하고 있을 뿐,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도 핵무기나 기술을 이전하지 않는다. 특정 국가에 핵무기를 이전하거나 핵무장을 허용할 경우, 훗날 해당 국가와 이해관계가 갈리거나 적대관계가 될 경우 그 핵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와 관련은 없지만, 미국은 중동 지역의 동맹국이던 이란이 이슬람 혁명으로 단 한순간에 최악의 적대국으로 돌아서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우군’에게 믿음 심어주는 게 우선
또 하나의 문제는 한국이 이제는 ‘잃을 것이 많아진’ 나라라는 점이다. GDP는 1조6000억 달러에 달해 세계 10위권 경제국가가 됐고, ‘K-팝’과 첨단 스마트폰과 반도체로 한국을 수출 대국으로 올려놓았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이제는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상에 올라 있다. 여기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핵무기’ 하나만 바라보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핵개발과 동시에 시작될 국제사회의 외교적 고립과 경제제재는 실질적으로 잃을 것이 없고 국민의 삶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북한에서나 가능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한국은 지난 50년간 정권의 변화에 따라 친미(親美)와 반미(反美) 성향이 극단적으로 오간 전례(前例)가 있다는 점도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찬성하기 어렵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섣부른 핵무장 시도는 손해 볼 것은 잃을 대로 잃고, 핵무기는 핵무기대로 완성하지 못한 채 저지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야기할 수도 있다.
한국의 핵 보유 논의는 최근 안보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미국의 해외 개입 축소, 북한-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맞물리면서 증폭됐다. 하지만 핵무기 개발이 야기할 국제적 고립과 경제 제재를 감당하기에 한국은 이제 너무나도 잃을 것이 많은 국가가 됐다.
이런 맥락에서는 오히려 한미동맹을 주축으로 한 우방국과의 동맹체제 확장이나 국제사회와의 협력이 핵 보유보다 더 효과적인 안보 보장을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한국에 있어 핵무장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우군(友軍)’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심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갑작스럽게 화두로 떠오른 것은 한국의 핵(核)무기 보유 문제이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 미국은 더 이상 ‘두 개의 전쟁’을 감당할 여력이 없음을 인식했으며, 오바마 행정부 이래로 정당과 관계없이 해외 개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 역시 미군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방어 태세의 자립성을 높이기를 바라고 있어 핵무장까지도 허용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반면, 이제는 한국의 경제적·외교적 위상에 있어 잃을 것이 많으므로 핵무기 하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맞선다.
이 논의 과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례가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 과정이다. 핵무기 선두주자들의 보유체제가 정립된 뒤 핵개발에 착수한 후발(後發)주자이고, 국제사회가 수평 핵 확산을 금지하는 분위기 속에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비(非)공산권 국가이므로 한국과 배경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농토 개간’ 명목으로 원자로 도입
이스라엘은 건국 순간부터 중동(中東)에서 ‘가장 불안한’ 국가였다. 현재도 안전한 국가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어 이집트·요르단과 수교하기 전까지는 전후방의 개념이 없고 육로로는 오로지 적국과만 맞닿은 육지 위의 섬이었다. 이스라엘은 1948년 유엔분할계획안을 수용하며 건국한 이후부터 4차 중동전쟁까지 사실상 자신을 둘러싼 중동의 모든 국가를 상대로 싸웠다.
건국 후 첫 전쟁인 이스라엘 독립전쟁(1차 중동전) 때는 약 1년 남짓한 전쟁 기간 동안 민간인 포함 약 6300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아랍 측은 최대 2만 명의 병력 손실을 입고 전쟁이 끝났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1대 3의 교환 비율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 전쟁을 통해 주변국 모두가 이스라엘의 멸절(滅絶)을 원하고 있으며, 앞으로 단 한 차례의 패배도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1950년대부터 절대적인 열세를 깨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비밀리에 시작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네게브 사막을 개간해 농토로 활용하겠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1956년 프랑스로부터 24MW급 원자로를 도입했다. 이 원자로를 이용하여 바닷물을 담수화(淡水化)해 농업용수를 공급하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계획이었다. 이 사업을 추진한 ‘건국의 아버지’ 다비드 벤구리온(Ben Gurion·1886~1973년) 총리는 사실 처음부터 핵무기 개발을 염두에 두었지만 이를 은닉할 목적으로 ‘사막 개간’을 내세웠다.
이츠하크 라빈의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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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 |
그러나 벤구리온의 강력한 의지로 사업은 강행되었고, 프랑스로부터 도입한 원자로는 네게브 사막의 소도시인 디모나(Dimona)에 건설되어 1963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은 디모나에 원자로를 설치했으나,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원료 물질인 플루토늄 혹은 우라늄이 필요했다. 이스라엘은 핵무기 개발을 정식으로 선언하거나 공개한 적이 없기 때문에 플루토늄 확보 과정은 다소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일부에서는 프랑스가 이 원료까지 제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나, 플루토늄이나 고농축 우라늄은 수평 핵 확산에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기존 핵 보유국들(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이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냉전(冷戰) 기간 중 미국과 소련조차 제3국의 핵개발 시도를 막기 위해 협력했던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핵 원료 확보에 대해서는 또 다른 주장이 있다. 바로 전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유대계 조력자들을 통해 원료를 확보했다는 설이다.
핵 폐기물 처리 회사 통해 원료 확보(?)
세계 정보기관의 스파이 활동 분야 전문 작가인 고든 토머스(Gordon Thomas)의 저서 《기드온의 스파이(The Gideon’s Spies)》에 따르면, 이스라엘 해외첩보기관 ‘모사드’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의 아폴로시(市)에 위치한 ‘뉴멕(Nuclear Materials and Equipment Corp.·NUMEC)’이라는 업체를 핵물질 확보 수단으로 삼았다.
이 회사는 유대계 미국인인 잘만 샤피로(Zalman Mordecai Shapiro·1920~2016년) 박사가 운영하고 있었으며, 그는 존스홉킨스대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사에서 근무하면서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USS Nautilus, SSN-571)함의 원자로 개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 정부가 그의 회사를 눈여겨본 이유는 이 회사가 농축 우라늄 원료 제조뿐 아니라 핵 폐기물 관리 및 처리 업무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뉴멕은 미 정부 외에도 국제 원자력위원회(Atomic Energy Commission·AEC)와 계약을 맺고 산업용 원자로용 농축 우라늄을 공급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원자로에서 발생한 핵 폐기물을 관리 및 처리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핵 폐기물 처리 과정이다. 보통 우라늄은 재처리 과정에서 증발하거나 땅에 스며들면서 어느 정도 자연 손실이 발생하는데, 이 양은 일정하지가 않다. 따라서 이를 이용해 미 정부나 핵 관련 감시기구의 눈을 피해 이스라엘에 필요한 양을 은밀히 제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뉴멕이 원료를 공급했다는 의혹은 1960년대 미 정부뿐 아니라 국제 원자력위원회, 미 연방수사국(FBI), 미 중앙정보국(CIA)까지 동원되어 뉴멕사를 조사했을 때 이 회사가 보관 중이던 고농축 우라늄(HEU)의 양이 서류상의 기록과 불일치했기 때문에 제기됐다. 뿐만 아니라 조사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핵개발에 참여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스라엘 고위 관리들이 뉴멕사를 방문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그중에는 이스라엘 방위군 장성 출신으로 훗날 이스라엘 핵개발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알려진 라파엘 에이탄(Rafael Eitan)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러 사법기관의 면밀한 중첩 수사에도 불구하고 뉴멕에 대한 혐의는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수사는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IAEA 사찰을 美 정부 사찰로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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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구리온 전 이스라엘 총리. |
이에 이스라엘 측은 미국의 유대계 인사들까지 동원한 전 방위 로비를 벌여 미 정부와 절충안을 이끌어내면서 디모나 시설이 IAEA 대신 미 정부의 사찰을 받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 절충안은 유대계 미국인의 자금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미 정치권의 입장 때문에 성사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미 정부 사찰단이 오기 전 디모나 시설에 위장용 통제 시설을 만들어 민간용 농업 원자로 시설로 보이도록 위장했고, 핵심적인 시설은 방사선 때문에 출입할 수 없는 곳으로 표시하여 사찰단의 접근을 차단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앞서 언급한 뉴멕으로부터 외교행낭 편으로 컨테이너 몇 개를 받았는데,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는 외교 관례상 아무도 확인할 수 없었다. 같은 기간 뉴멕이 ‘자연 손실’로 기록한 농축 우라늄은 약 45kg이었으나, 미국은 이것이 이스라엘로 넘어갔다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 발발 전까지 약 1~2발의 핵무기를 완성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이스라엘은 아랍연맹 4개국 연합국을 상대하면서도 이 전쟁에서 핵을 사용하거나 핵의 존재를 공개하지 않았다. 이 당시 완성된 핵무기를 보유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만약 보유했더라도 충분한 실험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전(實戰)에서 운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핵무기 개발에는 실험 과정이 필수적인데, 이스라엘은 가시적으로 어디에서 핵실험을 한 정황이 없어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측이 존재한다. 첫 번째 추측은 디모나 핵 시설 인근 네게브 사막 지하에서 미임계 실험(sub-critical test)만 했을 가능성이다. 이는 핵폭발 없이 고폭탄으로 핵물질의 반응만 테스트하는 방법이므로 외부에 포착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두 번째는 백인 정권 시절 이스라엘과 군사 기술 면에서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지원했을 가능성이다. 이 주장은 1979년 9월 22일 미국의 벨라(Vela) 인공위성이 인도양 특정 지점(남아공과 남극 대륙 사이)에서 두 차례 폭발 섬광을 포착한 ‘벨라 사건’으로, 이를 두고 이스라엘과 남아공이 합동 핵실험을 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남아공 역시 백인 정권 시절 핵무기를 완성한 적이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은 추측이긴 하나 ‘벨라 사건’이 핵실험과 직접 연관됐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이 외에도 핵폭발까지 필요 없는 유체역학 테스트로만 실시했을 것이라는 설, 기존 핵 보유국들로부터 핵실험 데이터를 제공받아 물리적 테스트 단계를 건너뛰었을 것이라는 주장 등도 있지만, 이스라엘 정부가 핵 보유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어떤 방식을 썼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원자력 기술자의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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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데하이 바누누 |
또 하나는 1986년 이스라엘 원자력 기술자로 근무했던 모르데하이 바누누(Mordechai Vanunu)에 의한 폭로였다. 그는 1977년부터 1986년까지 이스라엘 핵개발 시설에서 근무했다고 주장했으며, 이스라엘이 100여 발의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간접 증거로 다수의 사진과 서류를 영국 언론사를 통해 공개했다. 그는 이후 이스라엘 정보당국에 의해 체포된 뒤 종신형(終身刑)을 선고받고 구금됐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은 필요한 경우 핵무기 보유 사실을 ‘암시’하지만, 공식적으로 보유 사실을 인정한 적은 없다.
이스라엘이 핵을 보유하게 된 이유는 온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절체절명의 지정학적 상황, 그리고 단 한 번의 패배가 국가 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선택 때문이다. 또한 아직 건국 초였던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잃을 것이 적었고, 무엇보다 주변의 적 모두를 상대로 한 ‘생존’이 지상 과제였다.
핵무기 포기한 舊소련 국가들
이런 맥락하에 이스라엘과 달리 핵을 거의 완성했거나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핵 보유에 대한 교환가치가 너무 커 포기를 한 사례도 있다. 우선 구(舊)소련 연방에서 탈퇴하면서 독립해 갑작스럽게(?) 핵 보유국이 됐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가 있다. 이들 국가는 구소련 시절 소련 정부가 이곳에 핵을 배치하거나 저장했기 때문에 독립하면서 핵 보유국이 됐으나, 갓 건국했을 당시 이들은 핵무기를 유지할 능력도 없었고, 핵보다는 국가의 기틀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따라서 이 세 국가는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가 천연자원 제공과 경제 지원을 약속하고, 분쟁 가능성이 있던 국경을 확정하는 조건으로 핵무기 반환을 요구하자 모두 러시아에 핵무기를 이관했다.
반면 앞서 언급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기존 핵 보유국 및 국제기구의 압박과 정치 환경 변화에 따라 핵무기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핵을 포기한 사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 분리 정책) 철폐로 백인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 아프리카 대륙의 ‘유일한’ 백인 국가였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주변 국가 모두가 잠정적인 적이었으므로 이미 1948년부터 남아공의 원자력에너지주식회사(Atomic Energy Corporation·AEC) 주도로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
美蘇 공조로 남아공 핵무장 저지
하지만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 말로, 미국을 통해 산업 및 연구 목적으로 원자로를 제공받으면서부터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에 돌입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와 일치하는데, 이 때문에 군사적으로 가까웠던 이스라엘과 상부상조하면서 핵무기를 공동 개발했을 가능성도 크다. 특히 남아공에서는 우라늄을 국내에서 확보할 수 있었으므로 이를 활용하여 1980년대까지 총 여섯 발의 10~18kt급 핵무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러 기존 핵 보유국들이 남아공의 핵무기 개발 시도를 눈치챘다. 1977년 8월경 남아공의 핵개발 징후를 읽은 소련 정보기관이 먼저 남아공의 핵실험 징후를 포착했고, 이 사실을 미국과 공유했다. 남아공은 주로 칼라하리 사막과 인도양 망망대해에서 핵실험을 실시했는데, 미국은 우선 의심되던 칼리하리 사막 상공에 정찰기를 띄워 광범위한 수색 끝에 실험 시설을 찾아냈다. 또한 인도양에서는 앞서 언급한 ‘벨라’ 위성이 두 건의 연속적 폭발을 포착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으나 미국은 남아공의 핵실험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의 강력한 압박이 들어오자 남아공 정부는 결국 개발 사실을 인정했으며, 개발 중단의 의미로 핵실험용 갱도(坑道)까지 모두 폐쇄했다. 남아공은 이후에도 1988년까지 계속 핵실험을 진행할 기회를 엿봤지만 이미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 국제기구의 감시가 집중된 뒤라 실행할 수 없었다.
이러다 남아공의 정치 환경이 변했다. 1989년, 데 클레르크(F. W. de Klerk·1936~)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인종 분리 정책을 철폐하기 시작했고, 그간 국제사회에서 고립적이던 위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게다가 냉전까지 종식됐기 때문에 전략적인 핵 억지력의 중요성이 낮아져 절박한 안보 문제가 줄었고, 미국이 남아공이 핵을 포기할 경우 영토 방어에 대한 안보 지원을 약속해 클레르크 정권은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공식 폐기를 선언했다. 남아공은 1991년부터 여섯 기의 핵을 모두 해체했으며, 핵확산금지조약(Non-Proliferation Treaty·NPT)에 재가입하면서 IAEA 등 국제기구가 핵무기 해체를 검증했다.
남아공이 핵을 완성하고도 포기한 것은 남아공이 우선시하는 안보 가치가 변화한 탓이 크다. 초반에는 안팎으로 백인 정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생존’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나중에는 정권 변화와 함께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일원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컸기에 핵 보유 역시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물론 냉전기 ‘초강대국’들에 포착됐기 때문에 더 이상 비밀리에 개발을 진행할 수가 없었던 이유도 있다.
대만, 1988년까지 핵무장 시도
대만도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다 좌절된 국가다. 이는 미국이 1970년대 기밀 해제를 하면서 밝혀진 내용으로, 대만 역시 1960년대부터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 중국이 1964년 10월 신장(新疆)에서 첫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세계에서 다섯 번째 핵 보유국이 되었기 때문에 대만은 이를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장징궈(蔣經國·1910~1988년) 총통은 해외에서 핵무기 기술을 도입했고, 자체적으로 농축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미국의 제럴드 포드 행정부가 대만의 핵개발 시도를 포착하면서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대만 정부는 1976년 9월 핵개발을 중단하겠다고 확약했지만, 바로 다음 해 IAEA 사찰단이 조사를 실시하던 중 대만이 연구용 원자로의 사용된 연료를 시설 밖에서 전용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 그다음 해인 1978년에는 미국의 핵 전문가들이 대만에 방문했다가 이들이 무기화(武器化) 용도가 분명한 레이저 우라늄 농축 기술을 연구 중인 것을 포착했고, 이에 새로 들어선 지미 카터 행정부는 대만 원자력발전소를 위한 장비의 수출 허가를 취소하겠다면서 압력을 넣었다.
미 정부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대만의 핵무기 개발 시도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배치해 한국-일본-대만에 ‘핵우산’을 제공했지만, 정작 대만 정부는 1988년까지도 계속 핵무기 개발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미국과 관련 국제기구의 집중적인 감시 속에서 더 이상 핵무기 개발이 어렵다고 판단한 대만 정부는 결국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다.
대만의 사례는 특히 눈여겨볼 사례다. 개발 당시의 환경이 한국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당시 대만은 미국과의 중미상호방위협정(Sino-American Mutual Defense Treaty·SAMDT)이 살아 있던 때였고, 중국이 계속 중국 해안에서 불과 4km 떨어진 진먼다오(金門島)에 지속적으로 포격을 가하며 국지(局地)도발을 자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핵무기 보유가 기정사실화되면서 안보 위협도 심각하던 때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만에는 미-타이완 방어사령부(US-Taiwan Defense Command·USTDC)가 주둔하면서 대만 방어에 헌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현재의 한국과 유사점이 많다. 물론 대만은 미-중 수교로 외교적인 고립이 가속화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나, 미국에 있어 대만은 직접적인 안보 위기에 직면한 동맹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수평 핵 확산은 허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사례이기 때문에 연구해볼 만하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가 불붙인 한국의 핵 보유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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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 정권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에 따라 1978년 12월 13일 미 2사단의 일부 병력이 한국을 떠났다. 사진=조선DB |
실제로 미 제7보병사단이 1971년에 한국에서 철수하는 것을 목격한 한국은 캐나다나 프랑스로부터 중수형 원자로 도입을 추진했고,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하지만 정보기관을 통해 이 사실을 포착한 미국은 한국이 핵무기를 갖도록 용인하지 않았다. 미국은 경제적 지원과 다양한 안보 패키지를 제시하면서 한국의 핵무기 개발 중단을 요구했고, 반대급부로는 미국의 핵 억지력을 한반도까지 확장하겠다고 제시했다. 사실 당시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미군의 철군에 대비하여 핵무기 개발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국제사회와 척을 질 의향은 없었으므로 이 자체를 동시에 협상 카드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국은 미국과 지속적으로 밀고 당기는 힘 싸움을 하며 미국과 협상했고, 미국은 국제기구를 통해 한국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 결국 주한미군의 철군 중단과 미국의 확장된 안보 패키지 제공을 약속받으면서 IAEA로부터 핵 사찰을 받는 데 동의했다. 한국은 종국적으로 1975년에 NPT를 비준했으며, 이후에는 10·26사건으로 정치 환경이 변화해 핵무기 개발 시도도 완전히 중단됐다.
미국, 혈맹에도 핵무기 이전 안 해
‘궁극의 비대칭(非對稱) 무기’인 핵무기는 역사상 단 두 차례만 사용된 후 더 이상 사용된 예가 없을 정도로 치명적이다.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이유는 ‘국가의 생존성’ 문제와 직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기존 핵 보유국과 적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려는 목적이거나, 안보가 심각하게 불안해 국가 존폐의 위기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핵무기는 그 어디에서도 ‘방어용’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한 번 투발(投發) 시 전투원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대량살상무기’의 잔혹성, 사용 후 오랜 시간 동안 영향력이 잔류하는 환경적·생물학적 문제 등으로 비도덕적인 무기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뿐만 아니라 핵무기의 위력은 다른 핵무기로 견제되는 순간 효과가 반감하므로, 기존 핵 보유국은 타국(他國)의 핵무기 개발 및 보유에 절대 반대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실질적 ‘혈맹(血盟)’으로 간주되는 ‘파이브 아이즈(Five Eyes)’ 국가들도 자체 핵을 개발한 영국 정도만 핵을 보유하고 있을 뿐,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도 핵무기나 기술을 이전하지 않는다. 특정 국가에 핵무기를 이전하거나 핵무장을 허용할 경우, 훗날 해당 국가와 이해관계가 갈리거나 적대관계가 될 경우 그 핵이 자신을 향해 날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와 관련은 없지만, 미국은 중동 지역의 동맹국이던 이란이 이슬람 혁명으로 단 한순간에 최악의 적대국으로 돌아서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우군’에게 믿음 심어주는 게 우선
또 하나의 문제는 한국이 이제는 ‘잃을 것이 많아진’ 나라라는 점이다. GDP는 1조6000억 달러에 달해 세계 10위권 경제국가가 됐고, ‘K-팝’과 첨단 스마트폰과 반도체로 한국을 수출 대국으로 올려놓았다. 또한 외교적으로도 이제는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상에 올라 있다. 여기서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핵무기’ 하나만 바라보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는 어렵다. 핵개발과 동시에 시작될 국제사회의 외교적 고립과 경제제재는 실질적으로 잃을 것이 없고 국민의 삶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북한에서나 가능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사례처럼, 한국은 지난 50년간 정권의 변화에 따라 친미(親美)와 반미(反美) 성향이 극단적으로 오간 전례(前例)가 있다는 점도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찬성하기 어렵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섣부른 핵무장 시도는 손해 볼 것은 잃을 대로 잃고, 핵무기는 핵무기대로 완성하지 못한 채 저지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야기할 수도 있다.
한국의 핵 보유 논의는 최근 안보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미국의 해외 개입 축소, 북한-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맞물리면서 증폭됐다. 하지만 핵무기 개발이 야기할 국제적 고립과 경제 제재를 감당하기에 한국은 이제 너무나도 잃을 것이 많은 국가가 됐다.
이런 맥락에서는 오히려 한미동맹을 주축으로 한 우방국과의 동맹체제 확장이나 국제사회와의 협력이 핵 보유보다 더 효과적인 안보 보장을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한국에 있어 핵무장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우군(友軍)’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심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