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陰地의 戰士들

엄상익 변호사가 경험한 정보기관 〈17〉 내가 본 노태우는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글 :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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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방문하는 대통령 동향 알려달라”
⊙ 노태우 제네바 방문 시, 北 서커스단 묵는 호텔 지배인 매수
⊙ 대통령 부인 옷이 너무 많아 통관 고민
⊙ 경호원, “겨울바람이 눈을 날리는 속에서 우리는 반쯤 죽는 경호” 푸념

嚴相益
1954년생. 경기고, 고려대 법대 졸업 / 사법고시 24회,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국가안전기획부 정책연구관, 법무법인 ‘정현’ 변호사 역임. 現 엄상익법률사무소 변호사
1991년 9월 20일 유엔총회 기조연설과 멕시코 공식방문을 위해 출국하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 부부. 사진=조선DB
  노태우 전 대통령 유럽 순방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국가안전기획부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 노 대통령은 묵직한 바위 같은 인상이었다. 그의 주위에 어떤 영(靈)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아는 고교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선배는 기자를 하다가 군(軍)에 입대해 보안사령부에서 노태우 대위의 부하 병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 선배는 내게 노태우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었다.
 
  “상관인 노태우 대위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한번은 같이 근무하는 병사가 어머니가 위독해서 휴가를 가겠다는 말을 했었지. 그랬더니 노태우 대위가 ‘국가와 민족이 위험한 이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집에 가겠다니 무슨 소리야’라며 혼을 낸 적도 있어. 그런 사람이야.”
 

  개인은 없고 국가만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의 시대가 그랬다. 그 선배는 이런 말도 해주었다.
 
  “한번은 선임하사가 ‘노태우 대위가 이사를 하니까 도와주라’고 내게 말하는 거야. 그래서 노태우 대위가 이사할 집에 가서 기다렸더니 살림을 실은 트럭이 오더라고. 예쁘장한 여자가 트럭에서 내리는데 그가 김옥숙 여사였지. 내가 이삿짐을 옮기고 노태우 대위 부부가 살 방을 치웠어. 나는 군에서 제대하고 나서 기자로 복직하고 세월이 흘러 편집국장이 됐지. 공식적인 모임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어. 나를 몰라보더라고. 나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어.”
 
  선배는 인간 노태우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대통령 동향 보고해줘”
 
  안기부에서 일하면서 내가 받은 특혜 중 하나는 적당한 업무적인 핑계를 만들어 해외 출장을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대통령의 순방 일정을 살펴보았다. 스위스 체류 일정이 있었다. 출장 중 대통령과 그 일행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안기부의 해외 담당 총책임자를 만났다. 나중에 국정원장을 한 이병호씨였다.
 
  “바람을 한번 쐬고 싶은데요. 적당한 명목을 붙여 스위스에 묵는 대통령 주변으로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대통령이 스위스로 가시기 전에 보안요원 몇 명을 파견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슬쩍 끼워 명령을 내면 되겠네요. 독자적으로 잘 구경하고 오세요.”
 
  나는 예산서류를 작성해 예산 책임자의 결재(決裁)를 받았다. 장군 출신의 기조실장은 나와 같은 엄씨였다. 그는 노태우 대통령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김옥숙 여사를 형수라고 부르는 대통령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그는 나의 출장에 과분할 정도의 예산을 책정해주었다.
 
  안기부장 비서실장이 나를 불렀다. 검사 출신인 그는 정치적 실세(實勢)가 된 서동권 안기부장의 심복(心腹)이었다.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유럽 순방 중 스위스에서 골프도 치고 여가(餘暇)를 즐기실 거야. 유일하게 자유롭게 쉬는 기간이지. 그런데 그런 순간이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경호가 철저하지만 스위스는 그렇지 않거든. 자네는 스위스로 미리 가서 기다리다가 대통령이 그곳에 오시거든, 옆에 바짝 붙어 철저히 대통령의 동향(動向)을 지켜보면서 나한테 직접 보고해줘.”
 
  “대통령의 동향을 지켜보다뇨?”
 
  내가 되물었다.
 
  “1983년 버마(현 미얀마)에서 벌어진 북측의 테러나 대통령이 갑자기 암살될 경우를 상정해서 말하는 거야. 대통령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자네가 그 상황을 즉시 내게 알려달라는 거야. 지휘부 나름대로 해외공작국의 정식 보고 외에 다른 정보라인 하나를 비선(秘線)으로 깔아두는 거지. 그래야 바로 국내 정치 상황을 이끌 대책을 세우지 않겠어?”
 
  외부에서 정보기관에 온 (안기부장 비서실장 같은) 사람들은 기존의 정보기관 요원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기존의 정보기관 요원들도 겉으로는 절대복종하지만 잠시 왔다 가는 외부 인사들을 차갑게 대하는 눈치였다.
 
 
  제네바의 안기부 요원들
 
  나는 대통령이 제네바에 도착하기 한 달 전쯤 스위스로 날아갔다. 제네바 시내의 페스탈로치 거리에 있는 한 호텔에 묵으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주(駐)제네바 한국대표부를 찾아갔다. 제네바대표부에는 이상옥 대사가 있었고 그 밑에 고교 동기인 친구가 통상 담당 영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후에 한미 쇠고기 협상 대표와 외교부 차관이 된 친한 친구였다.
 
  제네바대표부에는 안기부에서 파견된 요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대표부는 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분주한 분위기였다. 나는 어두컴컴한 새벽이면 일어나서 혼자 제네바 시내를 거닐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을 오가기도 했다. 거리와 친숙해지기 위해서였다. 오후가 되면 우유와 빵을 사가지고 레만 호숫가 벤치에서 먹었다. 알프스의 투명한 호수 바닥에 있는 돌들이 물결과 햇살에 일렁이는 모습이었다. 제네바 시내의 가게나 직장의 사람들이 평화롭게 호숫가에서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안기부 본부와 프랑스에 파견되어 있던 요원 몇 명이 제네바로 모였다. 환영 행사는 대표부에서, 대통령의 안전은 정보기관 요원들이 담당하는 것 같았다.
 
  그중 한 요원이 눈에 띄었다. 명문대학을 나온 그는 안기부에 들어와 정예요원이 되는 훈련을 받고 해외공작국에 배속됐다. 프랑스 유학을 하고 학위까지 받은 엘리트였다. 그는 완벽한 프랑스어(語)를 구사하고 있었다. 어학뿐 아니라 정보요원으로서 담력도 있고 무서울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그렇지만 뱀같이 차가운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안기부 예산으로 요원마다 그 지역 지리를 잘 아는 프랑스인 기사와 렌트한 벤츠가 주어졌다.
 
 
  호텔 지배인 매수
 
  요원마다 제네바 중심 지역 고급 호텔이 배정됐다. 안기부 요원들이 호텔에 모여 비밀회의를 가졌다. 본부에서 온 팀장인 국장급 요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서는 대통령 수행 장관과 기업인, 그리고 경호원과 현지 외교관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한데 섞일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소리 없이 은밀히 활동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됐습니다. 그림자같이 활동하면서도 우리는 우리 색깔과 특성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외교관과 달리 우리 안전기획부 요원들의 자부심은 단결력입니다. 대통령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고 시샘하는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합쳐 각자 자신의 임무를 일당백으로 수행해나갑시다.”
 
  그들만이 가지는 사명감이라는 마음의 끈으로 단단하게 뭉쳐 있는 것 같았다. 작전회의를 하듯 그들 사이에 업무가 분담됐다. 팀장이 제네바대표부에 상주하는 요원에게 물었다.
 
  “테러가 있다면 북한대표부와 아무래도 연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먼저 북괴 요원들의 동향입니다. 그들의 움직임이 어떻습니까?”
 
  그 말에 제네바대표부에 상주하는 요원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미 북한대표부 주변을 살펴봤습니다. 그 안에 몇 명 없는 것 같습니다. 경비원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고 잔디밭에 도베르만(맹견 중의 하나) 한 마리가 있었어요. 제네바 북한대표부에는 평소 사람이 몇 명 없는데 이따금 본국에서 사람이 올 경우 호텔에 묵지 않고 북한대표부에서 묵다가 갑니다. 지금까지 외부에서 누가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여기 지원을 오신 우리 요원들이 북한대표부 주변을 감시하면서 그곳 사람들이 늘어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한대표부와 달리 지금 평양의 서커스단이 제네바 노가 힐튼 호텔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테러리스트가 단원으로 위장해서 그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서커스 단원들을 직접 체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공연하는 호텔 측 지배인을 매수해 그들의 공연계획이나 묵을 호텔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이미 파악했습니다.”
 
 
 
전두환의 제네바 방문

 
1989년 11월 18일 유럽 순방 길에 오른 노태우 당시 대통령 부부는 중간 기착한 알래스카의 설원에서 휴식을 취했다. 사진=노태우 제공
  팀장이 프랑스에서 건너온 프랑스어에 능통한 요원에게 “그다음은 대통령이 안전하게 묵을 숙소인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요원이 대통령 숙소를 담당하는 것 같았다. 요원이 말했다.
 
  “전에 전두환 대통령이 스위스에 오셨을 때 호텔에 묵기 싫다고 하면서 주택 같은 곳에 있기를 원하셨어요. 그래서 레만 호수 부근에 있는 개인 주택을 빌렸죠.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 내외(內外)가 창문도 방탄유리로 갈라는 거예요. 그래서 부랴부랴 창문을 갈았죠. 그때 경호는 대단했어요. 레만 호수에 경비정이 뜨고 부근에 장갑차를 대기시켰어요.
 
  대통령이 가시고 그 주택 주인에게 집세를 치르러 갔더니 화를 내더라고요. 자기 집 창문을 왜 허락도 없이 방탄유리로 바꾸었느냐는 거예요. 그러면서 한국 대통령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스위스는 대통령 부부가 저녁이면 일반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나가기도 하고 산책도 간답니다. 그런데 한국 대통령은 왜 그러냐는 거죠. ‘민주국가의 대통령은 그런 두려움이 없다’면서 은근히 가시가 있는 얘기를 했어요.”
 
  프랑스에서 지원 나온 요원은 노 대통령 부부가 묵을 숙소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말했다.
 
  “유서 깊은 로잔의 브로바쥬호텔을 대통령 숙소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호텔 엘리베이터가 중앙 로비 쪽에서 오르내리는데 대통령 내외가 거기 타고 방으로 올라갈 때 저격을 당할 수 있어요. 로비의 저격 지점으로 예상되는 곳과 경호의 사각(死角)지대를 우리가 움직이면서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호텔 외곽은 스위스 경찰 병력이 맡도록 이미 요청했습니다.”
 
  팀장이 제네바에 상주하는 요원에게 “대통령 경호원들의 총기 반입은 문제가 없나요?”라고 묻자 요원은 이런 요지로 말했다.
 
  “전두환 대통령 방문 시 경호 요원들이 그대로 총을 차고 입국하다가 총기를 모두 빼앗긴 경우가 있습니다. 스위스 당국은 한국 대통령 경호원들이 오는 건 상관없지만 무기를 반입하는 건 허락하지 못하겠다고 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경호 요원들의 권총을 전부 미리 받아 그걸 가지고 공항을 통과한 후 경호원들에게 나누어줄 예정입니다. 스위스 경찰과 그렇게 합의했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경호원들은 안기부 요원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셈이기도 했다.
 
 
  “영부인 옷이 너무 많아 통관이 안 될 것 같아요”
 
  “대통령의 사적 물품 통관(通關)엔 문제가 없습니까?”
 
  팀장이 제네바에 근무하는 요원에게 물었다.
 
  “영부인 옷이 너무 많아 통관이 안 될 것 같아요. 공항 당국에서 뭐라고 합니다. 그것도 뒤로 교섭을 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 스위스는 각국의 지도자들이 많이 드나들기 때문에 별로 예외를 두지 않고 규칙대로 하고 있습니다. 영부인의 많은 옷을 통과시키려면 우리 요원들이 따로 로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부인의 성향을 대강 알 것 같았다.
 
  “대통령을 수행하는 경호원들의 신분을 체크해봤습니까?”
 
  팀장이 물었다. 경호원들도 하나하나 체크하는 것 같았다.
 
  “했습니다. 군대 하사관 출신들이 많고 학력이나 경력이 아주 낮아요. 30대 중반이면 대통령 경호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돈이 없고 앞날이 보장이 안 되는 게 경호 요원들의 취약점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 그들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직장을 보장한다면 다른 마음이 들 위험성도 있어 보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해외에 나오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기도 합니다.”
 

  내가 모르던 세계의 일이었다.
 
  “제네바대표부에서는 어떤 일을 나누어 맡습니까?”
 
  팀장이 제네바대표부에 상주하는 요원에게 물었다.
 
  “외교관 가족들이 태극기를 만들어 환영단을 만들고 경호원들이나 수행원들을 위해 한식(韓食)을 마련하고 김밥을 준비합니다. 대표부에서는 그것만 해도 벅찹니다. 공관의 외교관들은 대통령과 수행원들이 사용할 차를 렌트하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준비를 합니다. 대통령의 안전까지는 손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요원 몇 명이 해내야 합니다.”
 
  그 말에 팀장이 결론을 맺었다.
 
  “자, 그러면 각자 부족한 대로 최선을 다해 뜁시다. 우리 요원들의 수는 몇 명 안 되지만 우선 북한대표부를 선제적으로 감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교대로 아예 제네바의 북한대표부 철문 앞 벤치에 죽치고 앉아 저들을 공개적으로 겁을 줍시다. 그러면 다른 짓을 못 할 테니까요.”
 
 
  북한인처럼 제네바 이곳저곳을
 
  회의가 끝나고 나는 팀장과 함께 제네바 거리를 걷고 있었다. 팀장이 싱긋 웃으면서 나를 보고 말했다.
 
  “대통령이 갑자기 올림픽조직위원회를 갈 수도 있어요. 우리가 올림픽조직위원회를 한번 테스트해봅시다.”
 
  “어떻게요?”
 
  내가 되물었다.
 
  “조직위원회로 들어가 북한 사람들처럼 어수룩하게 한번 행동을 해보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팀장인 그는 나와 함께 잠시 후 올림픽조직위원회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내 데스크에서 잠시 말을 하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잠시 후 수상한 동양인 두 명이 나타났다가 건물 내에서 없어졌다는 방송이 나왔다. 팀장이 그 반응을 보고 만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북한대표부 쪽으로 가보자고 했다.
 
  우리는 제네바 시내에 있는 북한대표부로 가서 그 주변을 살펴보았다. 적막한 기운이 주위에 흐르고 있는 건물이었다. 밖에는 철창이 둘러쳐 있었고 그 틈으로 잔디밭이 보였다. 잔디밭에는 도베르만 한 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안기부 요원이 북한대표부의 철문 앞 벤치에 보라는 듯이 앉아 있었다. CCTV가 있다면 안에서 바로 볼 수 있을 자리인 것 같았다. 그 앞을 지키던 안기부 요원이 이런 말을 했다.
 
  “북한대표부 정문 앞에 차를 대고 감시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벤츠가 한 대 나오는 거예요.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궁금해서 얼른 세워둔 내 차를 몰고 그 차를 따라가기 시작했어요. 내가 따라가는 걸 알아챘는지 앞서가던 벤츠가 갑자기 속도를 높여 막 도망가는 거예요. 나도 액셀러레이터를 확 밟고 따라갔어요. 액션 영화에서 나오는 추격전 장면이었죠. 그 차에 타고 있던 북측은 우리 요원들이 고성능의 이스라엘제(製) 기관단총이라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겁을 먹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조그마한 주머니칼 하나밖에 없었어요. 오히려 예기치 않은 다른 사태가 벌어질까 봐 은근히 걱정이 됐어요.”
 
  뱃심이 대단한 요원이었다. 그는 그렇게 혼자 활동했다. 작달막한 덩치의 어디에서 그런 배짱과 담력이 나왔는지 놀라웠다. 용기도 전염되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으니까 다른 몇 명의 요원도 바로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겁을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나를 미끼로 쓴 안기부 요원

 
  그들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저는 뭘 도와드릴까요?”
 
  한명이라도 손이 필요한 때였다. 그중 한 요원이 말했다.
 
  “저랑 같이 가서 사진을 좀 찍어주면 좋겠는데요. 북한의 서커스단이 하필이면 우리 대통령이 묵으실 때 계속 노가 힐튼호텔에서 공연을 합니다. 그 서커스 단원 중에 우리 대통령을 저격할 인물이 섞여 들어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견제하면서 감시해야 합니다.”
 
  그 다음 날 그는 나를 제네바 중심지에 있는 노가 힐튼호텔 로비로 데리고 갔다. 황금빛의 외관을 가진 최고급 호텔이었다. 로비에서 요원이 내게 말했다.
 
  “북한 서커스 단원들의 대기실로 같이 가죠. 거기서 서커스단 요원들을 보고 사진도 찍어두면 될 것 같아요.”
 
  나는 그를 따라갔다. 그는 호텔의 내부구조를 미리 파악해두었는지 호텔 공연장 뒤쪽의 미로 같은 복도를 익숙한 걸음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이윽고 조명이 흐린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 요원이 내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북한 사람들이 나타나면 사진기로 사진을 찍으세요. 저는 적당한 어두운 지점을 찾아 그곳에 숨어 있을 겁니다.”
 
  그의 행동을 볼 때마다 속으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보통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능숙하게 말하면서 경찰이든 호텔 종업원이든 즉석에서 포섭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정보기관 요원의 전형적인 모델처럼 보인다고 할까 그런 존재였다. 잠시 후 한 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 그 작은 공간을 채웠다. 나는 얼떨결에 그들 사이에 섞여버린 셈이 되었다. 그들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낡고 실밥이 터진 게 보이는 푸른색 트레이닝복 차림들이었다. 우리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달동네 사람들이 평소 입고 있는 그런 차림이었다. 임무를 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에 든 사진기로 그들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거 뭐이가?”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북한 서커스단 남자 한명이 뒤에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느라고 뒤에도 그들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아, 미안합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물러섰다. 그들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현지 교포쯤으로 짐작하는 것 같았다. 그때 저쪽에서 숨어 있던 안기부 요원이 셔터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북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미끼가 된 셈이었다. 안기부 엘리트 요원의 뱀같이 차가운 이면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필요하면 동료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었다.
 
 
  외국 元首 방문에도 무관심한 시민들
 
  대통령이 제네바로 오는 날이었다. 나는 대통령이 통과하기로 예정된 거리의 한 카페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거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차량을 통제하지도 않고 시민들도 평화롭게 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외국 원수가 지나가도 그들은 아무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이윽고 한국 대통령을 태운 차량의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대통령을 태운 차가 네거리를 지날 때 특별히 신호등을 조작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대통령을 태운 차와 경호차가 확연히 구별됐다. 앞뒤의 경호차 중간에 대통령이 있을 게 분명했다. 네거리 길목의 적당한 사각 지점 옥상에서 저격수가 대기하고 있다가 대통령이 탄 차의 뒤 창문 쪽으로 사격을 가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내외는 로잔의 브로바쥬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유럽 순방에서 잠시 휴식을 위해 온 대통령 일행은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수행원들은 공식 일정에서 풀려나 제네바 시내에서 쇼핑을 즐기고 술집에서 긴장을 풀려고 했다. 대통령 내외도 마찬가지 심정인 것 같았다.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만찬할 연회장이 준비되고 있었다.
 
  대통령 의전비서관이 무전기를 손에 들고 미리 만찬장을 바쁘게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만찬이 끝나고 수행원들이 제네바 시내로 나갔다. 어둠이 내리고 이윽고 조용한 밤이 되었다.
 
  새벽 1시경 나는 그 호텔로 갔다. 털모자에 두툼한 검은색 점퍼를 입고 기관단총을 든 백인 경찰관이 경비견과 함께 호텔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신분을 확인시키고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호텔 로비는 적막했다. 대통령 경호원이 로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대통령 내외가 묵는 방 앞 복도가 올려다보였다. 경호원들이 문 앞을 오가고 있었다. 호텔 로비 구석에서 이상한 게 보였다. 기둥 뒤 소파에서 한 백인 남자가 자고 있었다. 삐죽이 나온 그의 맨발이 보였다.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 같았다. 수많은 외국의 원수들이 평범한 투숙객처럼 지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경호원의 애환
 
  대통령을 수행해서 온 경호 책임자가 로비 구석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대통령 내외는 오늘 저녁 만찬이 끝난 후 어떠셨습니까?”
 
  내가 물었다. 내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는 나름대로 내 존재를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식 행사가 끝나고 대통령 내외가 밖에 나가서 구경하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이럴 때 우리 경호팀은 죽을 맛입니다. 대통령이 호텔에 계시면 경호원들이 교대로 잠시 밖으로 나가 집에 가지고 갈 선물 하나라도 사는 게 해외 순방의 맛인데 대통령 내외가 사적으로 외출하면 경호원들은 힘들어지는 거죠. 그래서 대통령 내외에게 경호상의 문제가 있어서 두 분이 개인적으로 나가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제 말 때문에 대통령 내외가 저녁 9시부터 방 안에 갇혀 계신 셈입니다. 미안하죠. 하지만 진짜로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때부터 대통령을 수행하고 온 장관이나 기자들은 살판났어요. 모두 제네바 시내 카페나 술집으로 나갔어요.”
 
  “여기서 경호하는 데 어떤 애로사항이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외국하고 달라서 우리나라 대통령 경호는 의전(儀典) 경호인 면이 많아요. 대통령이 가는 길목마다 경호원들이 눈에 띄어야 해요. 그래야 대통령이 심정적인 안정감을 얻습니다. 한국에서는 경찰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곳곳에서 경호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죠. 그런데 여기 겨울은 경호하는 데 힘들게 하네요. 칼날 같은 매서운 바람이 부는데 정해진 길목마다 경호원이 먼저 가서 서서 대통령 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면서 서 있어야 하는 거예요. 경호원들은 온몸이 얼어붙어요. 내일은 대통령이 골프를 치시는데 더 힘이 들 거예요.”
 
  “더 힘이 들다니요?”
 
  “대통령이 골프를 치시면 우리 경호원들은 눈에 띄지 않게 골프장의 나무 사이사이에 서 있어야 하고 필드에선 대통령의 움직임에 따라 그 주변 그늘에서 경호관들이 손에 손잡고 띠를 이루어 대통령을 경호해야 하는 시스템이거든요. 겨울바람이 눈을 날리는 속에서 우리는 반쯤 죽는 경호예요.”
 
 
  대통령의 실크 재킷
 
  경호 책임자로 온 그는 40대 중반쯤인 것 같았다. 세월에 지친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앞으로의 꿈이 뭡니까?”
 
  그들이 처한 상황을 알고 싶었다.
 
  “우리는 승진을 해도 경호실장이 될 수는 없죠. 대통령의 심복이 그 자리에 오는 거니까요. 경호원 직업이 정년(停年)도 빨라요. 한창 몸이 왕성한 때가 지나면 경호하기 어려워지죠. 그럼 실직자 신세로 전락하는 겁니다. 제 경우 경호실을 그만두면 안기부 직원으로 가는 게 희망입니다. 거기는 안정된 직장이니까요.”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어느덧 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 나는 대통령이 골프를 치는 골프장으로 갔다. 대통령의 이면을 살펴보고 싶었다. 나는 대통령이 옷을 벗어놓은 라커룸 안으로 들어갔다. 독립된 작은 방이었다. 서 있는 옷걸이에 알맹이가 빠진 대통령의 바지와 재킷이 걸려 있었다. 그 아래 바닥에는 대통령이 벗어놓은 구두가 놓여 있었다. 영국제 구두였다. 고급 재킷엔 은은한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대통령이 실크로 만든 재킷을 입는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대통령 부부는 패션에 일가견이 있는, 스타일리스트라는 평가가 있었다.
 
  라커룸을 나왔다. 대통령이 골프를 치고 있었다. 특이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땅에 떨어진 골프공을 대통령이 직접 줍지 않고 30대 초쯤의 한국 여성이 주워 대통령의 손에 건네주는 모습이었다.
 
  내가 본 대통령은 왕(王)이었다. 그는 ‘보통사람’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내가 본 그는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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