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란드, 동맹국인 프랑스 그늘에서 벗어나려 잠재적 敵國인 독일과 불가침조약 체결… 5년 뒤 독일의 침략 받아 패망
⊙ 히틀러-스탈린, 불가침조약 맺고 폴란드 분할… 스탈린은 “전쟁 없다”고 맹신했지만, ‘이데올로기형 독재자’인 히틀러는 전쟁 감행
⊙ 일본, 미국과의 전쟁 앞두고 소련과 중립조약 체결… 敗戰 직전 소련 중재에 의한 終戰 기대했지만 배반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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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소련 수상 스탈린과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지켜보는 가운데 독소불가침조약에 서명했다.
작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에 나오는 귀족 달링턴 경(卿)은 고매한 이상(理想)을 가진 전형적인 영국 신사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등 승전국들이 패전국 독일에 감당할 수 없는 치욕과 배상책임을 지우는 베르사유조약을 강요한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 대독(對獨) 유화정책을 주장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영국·미국·프랑스 등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 비공식 국제회의를 열기도 하고, 제2차 세계대전 전야에는 주영 독일대사와 영국 총리의 비밀회동을 주선하기도 한다.
달링턴 경은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은 ‘쓸모 있는 바보(useful idot)’였다. 히틀러를 상대로 한 달링턴 경의 평화 노력이 헛된 것이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1920~1930년대는 바로 그런 노력들이 이어지던 시대였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각국의 유위(有爲)한 한 세대(世代)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아픔을 공유(共有)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전쟁이 재발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중부유럽의 안전보장과 현존 국경선 준수를 약속한 로카르노조약(1925년), 국제분쟁의 해결 수단으로서의 전쟁 포기를 선언한 켈로그-브리앙조약(不戰조약·1928년)은 그런 정서의 반영이었다.
그런 평화 무드도 잠시, 1930년대가 되면서 국제정세는 다시 험악해졌다. 독일에서는 베르사유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는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하고, 동양에서는 일본이 만주대륙을 침공했다. 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올수록 각국은 필사적으로 전쟁을 모면할 길을 찾았다.
히틀러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해 기회 있을 때마다 유럽 각국에 평화를 제안하고 약속했다. 폴란드·영국·소련이 잇달아 그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러는 한편 히틀러는 라인란트 진주(1936년), 오스트리아 합병(1937년), 수데텐 합병(1938년) 등 침략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히틀러의 평화 사기극의 절정은 1939년 소련과 맺은 독소(獨蘇)불가침(不可侵)협정이었다. 스탈린과 밀약을 맺은 히틀러는 안심하고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의 전단(戰端)을 열었다. 그제서야 영국·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은 미몽(迷夢)에서 깨어났다.
전란(戰亂)의 시대에 ‘조약’을 가지고 평화를 지켜보려 안간힘을 쓴 것은 민주국가들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군국주의 일본도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어 한때의 평화를 샀다. 하지만 그 끝은 좋지 않았다. 이 시대는 어쩌면 ‘쓸모 있는 바보들의 시대’였던 셈이다.
1. 독일―폴란드 不可侵 조약
폴란드, 섣부른 ‘자주외교’ 추구하다 독일의 동맹 와해 책동에 넘어가다
▲ 배경
1795년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3개국에 의해 분할되면서 지구상에서 사라졌던 폴란드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에 독립을 회복했다. 망국(亡國) 123년 만의 일이었다. 영국·프랑스 등은 폴란드가 중부 유럽에서 독일의 팽창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다.
1920년대 후반 이후 독일과 소련이 국력을 회복하면서 폴란드는 안보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독일이나 소련 모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자기들이 잃어버린 땅 위에 수립된 폴란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었다. 1920년대 독일 군부(軍部)의 실력자였던 한스 폰 젝트 장군은 “폴란드는 없어져야 하며, 없어질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했다. 히틀러는 폴란드 해체와 동방으로의 팽창을 공언해 오던 인물이었다. 1933년 11월 12일 히틀러는 그해 10월 있었던 국제연맹 탈퇴에 대해 국민들의 지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와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 압승을 거두었다. 사흘 후 히틀러는 신임 주독 폴란드대사 유제프 리프스키를 초청, 양자회담을 한 후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유럽을 놀라게 했다. 두 나라 정부는 “양국에 관계되는 여러 문제를 직접 교섭으로 처리하며, 유럽 평화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양국 상호간의 관계에 무력(武力)을 적용하는 것을 모두 포기”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듬해인 1934년 1월 26일 독일과 폴란드는 10개년 불가침조약에 조인했다. 두 나라가 이 조약에 합의한 것은 각자 속셈이 있었다. 집권한 지 1년밖에 안 된 히틀러로서는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벌고, 독일을 포위하고 있는 프랑스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중동부유럽 국가들 간의 동맹을 와해시킬 필요도 있었다.
마침 폴란드에서는 가장 큰 동맹국인 프랑스에 대한 회의(懷疑)가 강해지고 있었다.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마지노선(線)을 구축하는 것을 본 폴란드인들은 프랑스가 방어적 국방전략으로 돌아섰으며 유사시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됐다.
1926년 쿠데타로 집권한 유제프 피우수트츠키 정권의 외무장관은 유제프 베크라는 현역 대령이었다. 1920년대에 프랑스 주재 폴란드대사관 무관(武官)으로 근무하다가 추방당한 경험이 있는 그는 1932년 외무장관으로 취임한 후 반(反)프랑스·친독일 노선을 추구했다. 일부 폴란드인들에게는 독립 이래 상전처럼 굴어 온 프랑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주외교’로 보였지만, 건국의 후원자이자 가장 큰 동맹국인 프랑스와 등을 지는 첫걸음이었다.
“미래의 우호적 관계 발전을 위해”
독·폴란드 불가침조약은 조문(條文)이 아니라 몇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먼저 이 조약은 “독일정부와 폴란드정부는 양국간의 심층적인 이해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관계의 국면에 접어들 시간이 온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미래의 우호적인 관계의 발전을 위해 본 조약에서 제(諸) 원칙들을 정립하기로 하였다. 두 정부는 양국간의 지속적인 평화의 보증이 유럽 전체의 평화 유지의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에 행동의 기초를 둔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양국은 “만약 분쟁이 발생했을 때, 직접 교섭을 통한 합의를 하지 못하는 특별한 경우에는 상호간의 합의에 기초하여 평화적 방법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한다”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분쟁의 해결수단으로서 무력(武力) 사용을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이어 이 조약은 “양국 정부는 제3국에 부담하는 국제적 약정들이 평화적인 상호관계를 해치지 않고 현 선언과 어긋나지 않으며 본 선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다”고 선언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폴란드가 프랑스와 맺은 동맹조약을 비롯한 기존 국제조약들이 유효하다는 것도 확인한 것이다.
10년간 유효한 이 조약은 협정 만료 6개월 전에 일방이 파기할 수 있지만, 그 6개월 동안은 여전히 효력을 지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폴란드는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에 앞서 1932년 7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바 있다.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은 독일·폴란드불가침조약 이후 갱신(更新)됐다. 이로써 폴란드는 독립 이후 상존해 오던 동서 양대 강국으로부터의 침략 위협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베크 폴란드 외무장관은 이후에도 친독 외교노선을 고수했다. 1938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거주지역인 수데텐 할양을 요구하며 분쟁을 야기했을 때, 폴란드는 독일 편에 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티셴 지역을 병합했다.
뮌헨협정으로 1938년 10월 수데텐을 합병한 독일은 이듬해 3월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 병탄(倂呑)했다. 이어 독일은 리투아니아의 독일인 거주지역인 메멜도 점령했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서쪽은 물론 북쪽, 남쪽에서도 독일에 포위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외교 無경험자의 誤判이 부른 비극
폴란드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독일은 1939년 3월 21일 폴란드에 과거 독일 영토였다가 폴란드 관리하에 놓인 단치히 할양을 요구했다. 폴란드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3월 31일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의회 연설에서 “폴란드가 공격을 받고 저항할 경우 영국과 프랑스는 전력을 다해 모든 지원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4월 28일 폴란드와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조약의 유효기간은 아직 5년이나 남아 있었다.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양국은 이에 수반되는 비밀조약에서 폴란드를 동서에서 침공, 사이좋게 나누어 갖기로 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폴란드에 협상을 촉구했다. 폴란드도 협상에 나설 뜻을 표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을 결심한 히틀러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8월 31일 폴란드 군복을 입은 나치 친위대(SS) 대원들이 독일·폴란드 국경 도시인 그라이비츠의 방송국을 습격했다. 다음 날 히틀러는 ‘폴란드의 침공에 대한 반격’을 명분으로 폴란드에 선전포고를 했다. 단치히를 친선방문 중이던 독일 해군실습선 슐레스비히-홀슈타인호는 갑자기 포구(砲口)를 단치히로 돌려 포격을 개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9월 17일에는 소련군이 폴란드를 침공, 동부지역을 강탈했다.
폴란드는 내내 상황을 오판(誤判)했다. 과거 폴란드를 지배했던 이웃의 두 강대국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의 존재 자체를 얼마나 불쾌하게 여기는지를 간과했다. 외교 경험이 없는 유제프 베크라는 군 출신 외무장관의 섣부른 ‘자주외교’가 화(禍)를 키웠다. 폴란드가 관리하던 자유도시 단치히를 포격한 배가 이곳을 친선방문 중이던 독일 해군실습선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폴란드는 이웃의 두 강대국 독일과 소련 모두와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두 나라에게 조약은 휴짓조각에 불과했다. 폴란드는 독립을 회복한 지 21년 만에 다시 한번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2. 獨蘇 불가침조약
스탈린의 盲信이 전쟁을 부르다
▲ 배경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은 이념적으로는 상극(相剋)이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소련을 정복해 우랄 산맥 이서(以西)의 러시아 땅을 독일의 식민지로 삼겠다는 뜻을 감추지 않았다. 스탈린의 눈에 히틀러의 나치즘은 공산주의혁명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발악적 저항이었다.
히틀러가 수데텐을 합병하고 폴란드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자, 영국 프랑스는 소련에 구애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단치히 할양을 폴란드에 요구한 1939년 3월 21일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은 영국·프랑스·소련·폴란드·루마니아·터키 등이 힘을 합쳐 히틀러의 침략야욕에 대비하자고 제안했다. 19세기 말 이래 러시아와 우호적이었던 프랑스는 소련과의 협상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소련과의 협상 시늉만으로도 히틀러의 침략 야욕을 제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뮌헨협상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결국은 같은 자본주의 국가인 나치 독일과 손잡을 것이라는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의 안전보장을 공약한 것도 소련을 소외시키려는 음모라고 생각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이 가시화되자 다급해진 영국과 프랑스는 1939년 8월 5일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논의하기 위한 군사사절단을 소련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이때 독일은 첩보망을 통해 이를 파악하고, 소련과 통상협정 등을 논의하기 위한 교섭을 시작하고 있었다.
소련은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막기 위해서 유사시 자국 군대가 폴란드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폴란드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랫동안 제정(帝政)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1920년대 초에도 소련과 전쟁을 치렀던 폴란드는 “우리는 소련과 군사협정이 없고, 맺고 싶은 생각도 없다”면서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마치 우리나라 일각에서 초보적인 수준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에 대해서조차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과 흡사한 일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에 양보를 촉구했지만, 폴란드는 요지부동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협상이 표류하는 사이에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는 물밑 접촉이 진행됐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에 앞서 소련을 영국·프랑스 등과 떼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야합
히틀러는 8월 20일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양국간 불가침조약을 제안하면서 외무장관 요하힘 폰 리벤트로프를 모스크바로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다음 날 밤 “불가침조약은 정치적 갈등의 제거와 양국간 평화와 협력을 구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환영하는 답신을 보냈다.
8월 23일 저녁 모스크바에 도착한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은 비야체슬라프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과 함께 크렘린으로 향했다. 스탈린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스탈린은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 댔습니다. 그렇지 않소?”라며 나치 외무장관을 환영했다.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국간 불가침협정에 서명했다. 독일과 소련은 또 폴란드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을 양국이 나누어 갖기로 밀약(密約)했다.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은 서문에서 “독일제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양국간의 평화문제를 정착시키기 위해”라고 선언했다.
제1조는 “양국은 서로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세력과 함께, 모든 폭력행위, 적대행위, 공격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 상호간 불가침을 규정했다.
이어 제2조에서는 “만일 양국 중 일방이 제3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 타방은 어떠한 형태로든 제3국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이 조약은 양국간 ‘중립조약’의 성격도 가진다.
제3조에서는 “양국은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에 대항하는 어떠한 세력 형성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고 규정했다.
양국은 분쟁 발생시에도 무력에 의존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제5조에서 “양국간 어떠한 형태로든 분쟁이 발생했을 때 오로지 평화적인 방법으로 협의를 통해 또는 필요한 경우 중재위원회의 설립을 통해 분쟁을 해결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밀월
견원지간(犬猿之間)이던 히틀러와 스탈린의 야합은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소련과의 동맹을 추진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닭 쫓던 개’ 같은 처지가 되어 버렸다. 폴란드는 외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았다. 9월 17일에는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다음 날 독일군과 소련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만났다. 1918년 볼셰비키 정권이 독일제국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던 장소였다.
히틀러는 독소불가침협정을 통해 소련이 영국·프랑스 등 서방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저지하고, 보다 쉽게 폴란드를 침공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제1차 세계대전과 공산혁명, 1920년대 초 폴란드와의 전쟁 등을 통해 상실했던 영토들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된 이후 1년 10개월 동안 독일과 소련은 밀월(蜜月)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우호관계 유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소련이 독소무역협정을 통해 독일에 판매하기로 약속한 석유·철강·텅스텐 등 전략물자들은 차질 없이 독일에 인도됐다. 반면에 히틀러는 소련에 지불하기로 되어 있는 기계나 장비, 물자의 인도를 게을리했다. 영국·프랑스와의 전쟁 때문이기도 했지만, 소련군의 동유럽 진출에 불안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41년에 접어들면서 스탈린은 동구 점령지를 다시 재편하기를 원했다. 히틀러는 이를 마뜩찮게 여겼다. 그래도 스탈린은 히틀러의 비위를 상하지 않으려 무척 노력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 슬라브족은 위대한 게르만족이 정복해서 노예로 삼아야 할 하등 인종에 불과했다. 1941년 5~6월 전격전(電擊戰)으로 프랑스와 영국을 완전히 제압하기 전부터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몰로토프,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
1941년 봄이 되면서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첩보가 84건이나 들어왔지만 스탈린은 이를 무시했다.
스탈린는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음흉하고 의심 많고 잔인한 독재자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독소불가침조약에 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신뢰를 가졌다. 스탈린에게는 나름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었다.
첫째, 히틀러가 독소불가침조약을 통해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전략물자들을 안정적으로 얻고 있는 상황에서 쉽사리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려면 2배 이상의 압도적 전력(戰力)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셋째, 1941년 6월 말에 소련을 침공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철이 닥치기 때문에, 이미 전쟁을 수행하기에 좋은 계절은 지나갔다.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1941년은 아닐 것이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히틀러의 침공계획을 알려줬지만, 스탈린은 이를 독일과 소련 양국을 이간질하려는 책략으로 간주해 묵살했다.
1941년 6월 21일 한 독일군 병사가 국경을 넘어와 다음 날 독일군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제보했다. 스탈린은 ‘역정보(逆情報)’라면서 그 병사를 총살시키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은 그날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 등 소련군 지도부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전방부대에 경계령을 하달하기는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6월 22일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됐다. 공산당과 군부의 지도자들이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에도 스탈린은 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독일 장군들의 ‘도발’에 불과하다며 거기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수 있으니, 급히 베를린과 접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전포고문을 전달하기 위해 소련 외무부를 찾아온 모스크바 주재 독일대사 프리드리히 폰 데어 슐렌베르크를 접견한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
소련 장군들, 스탈린에게 직언 못해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소련을 정복해 그 땅을 식민지로 삼고, 슬라브족을 게르만족의 노예로 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정치활동 내내 그 뜻을 감추지 않았다. 히틀러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형 독재자였고, 그에게 소련 침공은 필연이었다.
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히틀러가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침략해 올 것이라는 징후는 분명했다. 소련군 지도부도 스탈린에게 대비를 촉구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러한 경고를 외면했다. 그는 자신이 히틀러에게 성의를 다하면, 그리고 여러 가지 환경적 조건들 때문에 히틀러의 침공은 없을 것이라고 맹신(盲信)했다. 1930년대 말 스탈린의 군부 대숙청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소련군 장성들은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서 더 이상 강하게 자기들의 주장을 펴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후일 그랬으면 자기도 NKBD(비밀경찰)의 지하실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결국 독일의 침략을 불러들인 것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의 오판을 맹신한 스탈린 본인의 책임이었다. 4년 후 소련은 독일군을 무찌르고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가 됐다. 하지만 이를 위해 2000만명이 넘는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고, 국토는 폐허가 되어야 했다.
3. 日蘇중립조약
일본, 마지막으로 의지하려던 소련에게 뒤통수를 맞다
▲ 배경
1930년대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민간정부는 군부에 질질 끌려갔다. 1933년 2월 국제연맹이 일본에 만주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당시 국제연맹 주재 일본대사는 후일 일소중립조약을 주도하는 마쓰오카 요스케( 松岡洋右)였다.
1937년 중일(中日)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에 침략 중단을 요구하며 경제제재를 가했다. 일본과 영국 사이도 소원해졌다. 영국과의 동맹, 미국의 보이지 않는 후원에 힘입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 열강(列强)으로 발돋움했던 일본은 한 세대 후 영·미와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이런 상황을 독일·이탈리아 등 파시스트 국가들과의 동맹을 통해 타개하려 했다. 1936년 10월 일본은 나치 독일과 방공협정(防共協定·반코민테른협정)을 맺었다. 양국은 소련이 정당한 이유 없이 독일 혹은 일본을 공격할 경우 자신들의 공동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이고, 어떤 경우든 소련에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양국은 또 소련과 어떠한 정치조약도 체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독일과 일본 모두 나중에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도 이듬해 이 조약에 가입했다.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에 일본을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일본이 만주와 시베리아 방면에서 소련의 배후를 위협해 주기를 원해서였다. 하지만 장고봉사건(1938년) 노몬한전투(1939년) 등을 겪은 일본은 자신들의 전력(戰力)이 소련군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경제제재로 석유·고무 등 전략물자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일본은 동남아 침략을 고려하고 있었다. 특히 해군이 남방진출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0년 9월,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 세 나라를 추축국(樞軸國)이라고 한다.
“일방이 제3국과 전쟁시 중립 준수”
히로히토 천황은 삼국동맹조약 체결 후 고노에(近衛) 총리에게 “이 조약 때문에 미국은 일본에 대해서 지금 당장이라도 석유나 철의 수출을 중지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어찌 될 것인가?”라고 힐문했다
1941년 3~4월 마쓰오카 요스케 일본 외무장관은 삼국동맹을 축하하는 유럽 순방을 했다. 히틀러는 마쓰오카에게 싱가포르의 영국군을 공격하라고 촉구했다. 귀국길에 마쓰오카는 모스크바에 들러 스탈린과 회담을 가졌다. 이미 1940년부터 일본은 독소불가침조약과 같은 불가침조약을 제안해 놓고 있었다. 소련은 중립조약을 역제안했다. 스탈린-마쓰오카 회담에서 두 사람의 논의는 급진전돼 4월 13일 일소중립조약이 체결됐다. 소련은 독일과,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던 상황에서 상대방이 적국의 편에 가담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약의 제1조는 “양 체약(締約) 당사자는 그들 사이에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타방 체약 당사자의 영토 보전 및 불가침을 상호 존중할 것을 약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어 제2조는 “체약 당사국 중 일방이 제3국과 적대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중립을 준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약명칭은 중립조약이지만, 사실상 불가침조약인 셈이다.
이 조약은 5년간 유효하며, 기간 만료 1년 전에 폐기하지 않으면 5년간 자동 연장된 것으로 간주된다고 했다(제3조).
이와 함께 두 나라는 자기들의 위성국인 몽골인민공화국과 만주국을 위한 불가침선언도 채택했다. 이 선언에서 두 나라는 “소련 정부와 일본 정부는 양국간의 평화적·우호적 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소련은 만주국, 일본은 몽골인민공화국의 영토보전과 불가침을 존중하겠다고 서약했다.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마쓰오카 일본 외무장관은 바로 모스크바를 떠났다. 스탈린은 역까지 배웅을 나갔다. 그는 마쓰오카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우리는 아시아인이지 않나?”라고 말했다.
소련의 배신
1945년이 될 때까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일본과 소련 모두 이 중립조약을 나름 충실하게 지켰다. 히틀러는 일본에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소련을 공격해 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소전쟁 개전(開戰) 초기 소련군은 서부전선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극동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25만명의 정예부대들을 빼내 대독(對獨)전선에 투입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에 들어간 후에도 미국이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소련에 전쟁물자를 보내는 것을 막지 않았다. 히틀러가 여러 차례 항의했지만 일본은 이를 외면했다. 만일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거나 소련으로 들어가는 미국의 원조를 차단했다면,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도 이익을 얻었다. 일본은 소련의 침공 위험에서 벗어나 미국과의 전쟁과 동남아 침략에 주력할 수 있었다. 또 일본은 소련으로부터 석유·석탄·철·목재·어류 등을 수입, 부족한 전략물자를 보충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과 영국은 소련을 대일전(對日戰)에 끌어들이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온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후, 대일전 참전을 약속했다.
반면에 일본은 이탈리아·독일 등 동맹국들이 차례로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 일소중립조약 연장을 간절히 희망했다. 일본의 희망과는 달리 소련은 1945년 4월 5일 중립조약을 갱신하지 않고 이듬해 4월 기간이 만료된다고 통보했다.
그래도 일소중립조약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일본은 1945년 8월에 접어들면서 소련의 중재에 의한 연합국과의 강화(講和)를 모색했다. 일본은 지난 4년간 자신들이 일소중립조약을 성실하게 준수했던 것을 소련이 평가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소련은 이미 포츠담선언 등을 통해 자신들의 이권(利權)을 확보한 후였다. 일본은 소련에 줄 것이 없었다.
1945년 8월 8일 밤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은 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대사를 외무부로 불러 선전포고문을 전달했다. “얄타회담에서의 약속에 따라 세계평화를 위해”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파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4월 일소중립조약 갱신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조약 자체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임에도, 소련은 이를 무시한 것이다. 다음 날인 8월 9일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던 일본에 가해진 마지막 치명타였다.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다.
일본은 변화한 상황도, 소련의 검은 속셈도 헤아리지 못했다. 1930년대 말에는 동맹을 잘못 선택했고, 1945년에는 믿을 수 없는 나라에 의지하려 했다. 그 결과는 패망이었다.
“萬國公法이 不如大砲一放이라”
1932년에 소련과 핀란드도 10년 기한으로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소련은 1939년 11월 카렐리야 등 영토 할양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핀란드를 침공했다, 약소국 핀란드는 영웅적으로 항전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핀란드는 영토의 11%, 인구의 12%, 산업능력의 30%를 상실해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27일 김정은과의 〈판문점선언〉에서 “남과 북은 그 어떤 형태의 무력도 서로 사용하지 않을 때 대한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하고 엄격히 준수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선언했다. 두 사람은 9월 19일 〈평양공동선언〉에서도 “남과 북은 이번 평양정상회담을 계기로 체결한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를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로 채택하고 이를 철저히 준수하고 성실히 이행하며, 한반도를 항구적인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실천적 조치들을 적극 취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했다.
독일-폴란드, 독일-소련, 일본-소련, 소련-핀란드, 소련-폴란드도 비슷한 문구가 들어간 불가침조약이나 중립조약을 통해 서로간의 불가침을 다짐했었다. 하지만 침략야욕으로 가득한 독재자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세기 말 일본의 대표적 지성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이렇게 말했다.
“만국공법(萬國公法)이 불여대포일방(不如大砲一放)이라.”⊙
달링턴 경은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은 ‘쓸모 있는 바보(useful idot)’였다. 히틀러를 상대로 한 달링턴 경의 평화 노력이 헛된 것이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1920~1930년대는 바로 그런 노력들이 이어지던 시대였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각국의 유위(有爲)한 한 세대(世代)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아픔을 공유(共有)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전쟁이 재발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중부유럽의 안전보장과 현존 국경선 준수를 약속한 로카르노조약(1925년), 국제분쟁의 해결 수단으로서의 전쟁 포기를 선언한 켈로그-브리앙조약(不戰조약·1928년)은 그런 정서의 반영이었다.
그런 평화 무드도 잠시, 1930년대가 되면서 국제정세는 다시 험악해졌다. 독일에서는 베르사유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는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하고, 동양에서는 일본이 만주대륙을 침공했다. 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올수록 각국은 필사적으로 전쟁을 모면할 길을 찾았다.
히틀러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해 기회 있을 때마다 유럽 각국에 평화를 제안하고 약속했다. 폴란드·영국·소련이 잇달아 그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러는 한편 히틀러는 라인란트 진주(1936년), 오스트리아 합병(1937년), 수데텐 합병(1938년) 등 침략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히틀러의 평화 사기극의 절정은 1939년 소련과 맺은 독소(獨蘇)불가침(不可侵)협정이었다. 스탈린과 밀약을 맺은 히틀러는 안심하고 폴란드를 침공, 제2차 세계대전의 전단(戰端)을 열었다. 그제서야 영국·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은 미몽(迷夢)에서 깨어났다.
전란(戰亂)의 시대에 ‘조약’을 가지고 평화를 지켜보려 안간힘을 쓴 것은 민주국가들만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군국주의 일본도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어 한때의 평화를 샀다. 하지만 그 끝은 좋지 않았다. 이 시대는 어쩌면 ‘쓸모 있는 바보들의 시대’였던 셈이다.
1. 독일―폴란드 不可侵 조약
폴란드, 섣부른 ‘자주외교’ 추구하다 독일의 동맹 와해 책동에 넘어가다
▲ 배경
1795년 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3개국에 의해 분할되면서 지구상에서 사라졌던 폴란드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에 독립을 회복했다. 망국(亡國) 123년 만의 일이었다. 영국·프랑스 등은 폴란드가 중부 유럽에서 독일의 팽창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다.
1920년대 후반 이후 독일과 소련이 국력을 회복하면서 폴란드는 안보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독일이나 소련 모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자기들이 잃어버린 땅 위에 수립된 폴란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있었다. 1920년대 독일 군부(軍部)의 실력자였던 한스 폰 젝트 장군은 “폴란드는 없어져야 하며, 없어질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했다. 히틀러는 폴란드 해체와 동방으로의 팽창을 공언해 오던 인물이었다. 1933년 11월 12일 히틀러는 그해 10월 있었던 국제연맹 탈퇴에 대해 국민들의 지지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와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 압승을 거두었다. 사흘 후 히틀러는 신임 주독 폴란드대사 유제프 리프스키를 초청, 양자회담을 한 후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유럽을 놀라게 했다. 두 나라 정부는 “양국에 관계되는 여러 문제를 직접 교섭으로 처리하며, 유럽 평화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양국 상호간의 관계에 무력(武力)을 적용하는 것을 모두 포기”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듬해인 1934년 1월 26일 독일과 폴란드는 10개년 불가침조약에 조인했다. 두 나라가 이 조약에 합의한 것은 각자 속셈이 있었다. 집권한 지 1년밖에 안 된 히틀러로서는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벌고, 독일을 포위하고 있는 프랑스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중동부유럽 국가들 간의 동맹을 와해시킬 필요도 있었다.
마침 폴란드에서는 가장 큰 동맹국인 프랑스에 대한 회의(懷疑)가 강해지고 있었다.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마지노선(線)을 구축하는 것을 본 폴란드인들은 프랑스가 방어적 국방전략으로 돌아섰으며 유사시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됐다.
1926년 쿠데타로 집권한 유제프 피우수트츠키 정권의 외무장관은 유제프 베크라는 현역 대령이었다. 1920년대에 프랑스 주재 폴란드대사관 무관(武官)으로 근무하다가 추방당한 경험이 있는 그는 1932년 외무장관으로 취임한 후 반(反)프랑스·친독일 노선을 추구했다. 일부 폴란드인들에게는 독립 이래 상전처럼 굴어 온 프랑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주외교’로 보였지만, 건국의 후원자이자 가장 큰 동맹국인 프랑스와 등을 지는 첫걸음이었다.
“미래의 우호적 관계 발전을 위해”
독·폴란드 불가침조약은 조문(條文)이 아니라 몇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먼저 이 조약은 “독일정부와 폴란드정부는 양국간의 심층적인 이해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관계의 국면에 접어들 시간이 온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미래의 우호적인 관계의 발전을 위해 본 조약에서 제(諸) 원칙들을 정립하기로 하였다. 두 정부는 양국간의 지속적인 평화의 보증이 유럽 전체의 평화 유지의 전제조건이라는 사실에 행동의 기초를 둔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양국은 “만약 분쟁이 발생했을 때, 직접 교섭을 통한 합의를 하지 못하는 특별한 경우에는 상호간의 합의에 기초하여 평화적 방법을 통한 해결책을 모색한다”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분쟁의 해결수단으로서 무력(武力) 사용을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이어 이 조약은 “양국 정부는 제3국에 부담하는 국제적 약정들이 평화적인 상호관계를 해치지 않고 현 선언과 어긋나지 않으며 본 선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다”고 선언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폴란드가 프랑스와 맺은 동맹조약을 비롯한 기존 국제조약들이 유효하다는 것도 확인한 것이다.
10년간 유효한 이 조약은 협정 만료 6개월 전에 일방이 파기할 수 있지만, 그 6개월 동안은 여전히 효력을 지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폴란드는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에 앞서 1932년 7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바 있다.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은 독일·폴란드불가침조약 이후 갱신(更新)됐다. 이로써 폴란드는 독립 이후 상존해 오던 동서 양대 강국으로부터의 침략 위협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베크 폴란드 외무장관은 이후에도 친독 외교노선을 고수했다. 1938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거주지역인 수데텐 할양을 요구하며 분쟁을 야기했을 때, 폴란드는 독일 편에 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티셴 지역을 병합했다.
뮌헨협정으로 1938년 10월 수데텐을 합병한 독일은 이듬해 3월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 병탄(倂呑)했다. 이어 독일은 리투아니아의 독일인 거주지역인 메멜도 점령했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서쪽은 물론 북쪽, 남쪽에서도 독일에 포위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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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프랑스·친독정책을 편 폴란드 외무장관 유제프 베크. |
하지만 히틀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4월 28일 폴란드와의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조약의 유효기간은 아직 5년이나 남아 있었다.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양국은 이에 수반되는 비밀조약에서 폴란드를 동서에서 침공, 사이좋게 나누어 갖기로 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폴란드에 협상을 촉구했다. 폴란드도 협상에 나설 뜻을 표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을 결심한 히틀러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8월 31일 폴란드 군복을 입은 나치 친위대(SS) 대원들이 독일·폴란드 국경 도시인 그라이비츠의 방송국을 습격했다. 다음 날 히틀러는 ‘폴란드의 침공에 대한 반격’을 명분으로 폴란드에 선전포고를 했다. 단치히를 친선방문 중이던 독일 해군실습선 슐레스비히-홀슈타인호는 갑자기 포구(砲口)를 단치히로 돌려 포격을 개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9월 17일에는 소련군이 폴란드를 침공, 동부지역을 강탈했다.
폴란드는 내내 상황을 오판(誤判)했다. 과거 폴란드를 지배했던 이웃의 두 강대국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의 존재 자체를 얼마나 불쾌하게 여기는지를 간과했다. 외교 경험이 없는 유제프 베크라는 군 출신 외무장관의 섣부른 ‘자주외교’가 화(禍)를 키웠다. 폴란드가 관리하던 자유도시 단치히를 포격한 배가 이곳을 친선방문 중이던 독일 해군실습선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폴란드는 이웃의 두 강대국 독일과 소련 모두와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두 나라에게 조약은 휴짓조각에 불과했다. 폴란드는 독립을 회복한 지 21년 만에 다시 한번 지도상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2. 獨蘇 불가침조약
▲ 배경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은 이념적으로는 상극(相剋)이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소련을 정복해 우랄 산맥 이서(以西)의 러시아 땅을 독일의 식민지로 삼겠다는 뜻을 감추지 않았다. 스탈린의 눈에 히틀러의 나치즘은 공산주의혁명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발악적 저항이었다.
히틀러가 수데텐을 합병하고 폴란드에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자, 영국 프랑스는 소련에 구애하기 시작했다. 독일이 단치히 할양을 폴란드에 요구한 1939년 3월 21일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은 영국·프랑스·소련·폴란드·루마니아·터키 등이 힘을 합쳐 히틀러의 침략야욕에 대비하자고 제안했다. 19세기 말 이래 러시아와 우호적이었던 프랑스는 소련과의 협상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소련과의 협상 시늉만으로도 히틀러의 침략 야욕을 제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뮌헨협상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결국은 같은 자본주의 국가인 나치 독일과 손잡을 것이라는 의심을 버리지 않았다.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의 안전보장을 공약한 것도 소련을 소외시키려는 음모라고 생각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이 가시화되자 다급해진 영국과 프랑스는 1939년 8월 5일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논의하기 위한 군사사절단을 소련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이때 독일은 첩보망을 통해 이를 파악하고, 소련과 통상협정 등을 논의하기 위한 교섭을 시작하고 있었다.
소련은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막기 위해서 유사시 자국 군대가 폴란드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폴란드 영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랫동안 제정(帝政)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1920년대 초에도 소련과 전쟁을 치렀던 폴란드는 “우리는 소련과 군사협정이 없고, 맺고 싶은 생각도 없다”면서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마치 우리나라 일각에서 초보적인 수준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에 대해서조차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과 흡사한 일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에 양보를 촉구했지만, 폴란드는 요지부동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협상이 표류하는 사이에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는 물밑 접촉이 진행됐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에 앞서 소련을 영국·프랑스 등과 떼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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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불가침조약.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의 서명이 보인다. |
8월 23일 저녁 모스크바에 도착한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은 비야체슬라프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과 함께 크렘린으로 향했다. 스탈린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스탈린은 “우리는 서로 욕을 잘도 해 댔습니다. 그렇지 않소?”라며 나치 외무장관을 환영했다.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국간 불가침협정에 서명했다. 독일과 소련은 또 폴란드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을 양국이 나누어 갖기로 밀약(密約)했다.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은 서문에서 “독일제국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양국간의 평화문제를 정착시키기 위해”라고 선언했다.
제1조는 “양국은 서로 독자적으로 또는 다른 세력과 함께, 모든 폭력행위, 적대행위, 공격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 상호간 불가침을 규정했다.
이어 제2조에서는 “만일 양국 중 일방이 제3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 타방은 어떠한 형태로든 제3국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이 조약은 양국간 ‘중립조약’의 성격도 가진다.
제3조에서는 “양국은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에 대항하는 어떠한 세력 형성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고 규정했다.
양국은 분쟁 발생시에도 무력에 의존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제5조에서 “양국간 어떠한 형태로든 분쟁이 발생했을 때 오로지 평화적인 방법으로 협의를 통해 또는 필요한 경우 중재위원회의 설립을 통해 분쟁을 해결한다”고 규정한 것이다.
밀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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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불가침조약을 풍자한 만평. 히틀러와 스탈린의 야합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
히틀러는 독소불가침협정을 통해 소련이 영국·프랑스 등 서방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저지하고, 보다 쉽게 폴란드를 침공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제1차 세계대전과 공산혁명, 1920년대 초 폴란드와의 전쟁 등을 통해 상실했던 영토들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된 이후 1년 10개월 동안 독일과 소련은 밀월(蜜月)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우호관계 유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소련이 독소무역협정을 통해 독일에 판매하기로 약속한 석유·철강·텅스텐 등 전략물자들은 차질 없이 독일에 인도됐다. 반면에 히틀러는 소련에 지불하기로 되어 있는 기계나 장비, 물자의 인도를 게을리했다. 영국·프랑스와의 전쟁 때문이기도 했지만, 소련군의 동유럽 진출에 불안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41년에 접어들면서 스탈린은 동구 점령지를 다시 재편하기를 원했다. 히틀러는 이를 마뜩찮게 여겼다. 그래도 스탈린은 히틀러의 비위를 상하지 않으려 무척 노력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 슬라브족은 위대한 게르만족이 정복해서 노예로 삼아야 할 하등 인종에 불과했다. 1941년 5~6월 전격전(電擊戰)으로 프랑스와 영국을 완전히 제압하기 전부터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몰로토프,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
1941년 봄이 되면서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첩보가 84건이나 들어왔지만 스탈린은 이를 무시했다.
스탈린는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음흉하고 의심 많고 잔인한 독재자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독소불가침조약에 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신뢰를 가졌다. 스탈린에게는 나름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었다.
첫째, 히틀러가 독소불가침조약을 통해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전략물자들을 안정적으로 얻고 있는 상황에서 쉽사리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려면 2배 이상의 압도적 전력(戰力)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셋째, 1941년 6월 말에 소련을 침공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철이 닥치기 때문에, 이미 전쟁을 수행하기에 좋은 계절은 지나갔다.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1941년은 아닐 것이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히틀러의 침공계획을 알려줬지만, 스탈린은 이를 독일과 소련 양국을 이간질하려는 책략으로 간주해 묵살했다.
1941년 6월 21일 한 독일군 병사가 국경을 넘어와 다음 날 독일군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제보했다. 스탈린은 ‘역정보(逆情報)’라면서 그 병사를 총살시키라고 지시했다. 스탈린은 그날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 등 소련군 지도부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전방부대에 경계령을 하달하기는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6월 22일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됐다. 공산당과 군부의 지도자들이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달려왔을 때에도 스탈린은 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독일 장군들의 ‘도발’에 불과하다며 거기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수 있으니, 급히 베를린과 접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전포고문을 전달하기 위해 소련 외무부를 찾아온 모스크바 주재 독일대사 프리드리히 폰 데어 슐렌베르크를 접견한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
소련 장군들, 스탈린에게 직언 못해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소련을 정복해 그 땅을 식민지로 삼고, 슬라브족을 게르만족의 노예로 삼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정치활동 내내 그 뜻을 감추지 않았다. 히틀러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형 독재자였고, 그에게 소련 침공은 필연이었다.
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히틀러가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침략해 올 것이라는 징후는 분명했다. 소련군 지도부도 스탈린에게 대비를 촉구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러한 경고를 외면했다. 그는 자신이 히틀러에게 성의를 다하면, 그리고 여러 가지 환경적 조건들 때문에 히틀러의 침공은 없을 것이라고 맹신(盲信)했다. 1930년대 말 스탈린의 군부 대숙청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소련군 장성들은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를까 두려워서 더 이상 강하게 자기들의 주장을 펴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후일 그랬으면 자기도 NKBD(비밀경찰)의 지하실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결국 독일의 침략을 불러들인 것은 거의 전적으로 자신의 오판을 맹신한 스탈린 본인의 책임이었다. 4년 후 소련은 독일군을 무찌르고 제2차 세계대전의 승자가 됐다. 하지만 이를 위해 2000만명이 넘는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고, 국토는 폐허가 되어야 했다.
3. 日蘇중립조약
일본, 마지막으로 의지하려던 소련에게 뒤통수를 맞다
▲ 배경
1930년대 일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민간정부는 군부에 질질 끌려갔다. 1933년 2월 국제연맹이 일본에 만주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당시 국제연맹 주재 일본대사는 후일 일소중립조약을 주도하는 마쓰오카 요스케( 松岡洋右)였다.
1937년 중일(中日)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에 침략 중단을 요구하며 경제제재를 가했다. 일본과 영국 사이도 소원해졌다. 영국과의 동맹, 미국의 보이지 않는 후원에 힘입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 열강(列强)으로 발돋움했던 일본은 한 세대 후 영·미와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이런 상황을 독일·이탈리아 등 파시스트 국가들과의 동맹을 통해 타개하려 했다. 1936년 10월 일본은 나치 독일과 방공협정(防共協定·반코민테른협정)을 맺었다. 양국은 소련이 정당한 이유 없이 독일 혹은 일본을 공격할 경우 자신들의 공동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이고, 어떤 경우든 소련에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양국은 또 소련과 어떠한 정치조약도 체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독일과 일본 모두 나중에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도 이듬해 이 조약에 가입했다.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에 일본을 끌어들이려 노력했다. 일본이 만주와 시베리아 방면에서 소련의 배후를 위협해 주기를 원해서였다. 하지만 장고봉사건(1938년) 노몬한전투(1939년) 등을 겪은 일본은 자신들의 전력(戰力)이 소련군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경제제재로 석유·고무 등 전략물자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일본은 동남아 침략을 고려하고 있었다. 특히 해군이 남방진출에 적극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0년 9월,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 세 나라를 추축국(樞軸國)이라고 한다.
“일방이 제3국과 전쟁시 중립 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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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장관 마쓰오카 요스케는 1941년 4월 13일 일소중립조약에 서명했다. |
1941년 3~4월 마쓰오카 요스케 일본 외무장관은 삼국동맹을 축하하는 유럽 순방을 했다. 히틀러는 마쓰오카에게 싱가포르의 영국군을 공격하라고 촉구했다. 귀국길에 마쓰오카는 모스크바에 들러 스탈린과 회담을 가졌다. 이미 1940년부터 일본은 독소불가침조약과 같은 불가침조약을 제안해 놓고 있었다. 소련은 중립조약을 역제안했다. 스탈린-마쓰오카 회담에서 두 사람의 논의는 급진전돼 4월 13일 일소중립조약이 체결됐다. 소련은 독일과,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던 상황에서 상대방이 적국의 편에 가담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약의 제1조는 “양 체약(締約) 당사자는 그들 사이에 평화롭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타방 체약 당사자의 영토 보전 및 불가침을 상호 존중할 것을 약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어 제2조는 “체약 당사국 중 일방이 제3국과 적대행위를 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중립을 준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약명칭은 중립조약이지만, 사실상 불가침조약인 셈이다.
이 조약은 5년간 유효하며, 기간 만료 1년 전에 폐기하지 않으면 5년간 자동 연장된 것으로 간주된다고 했다(제3조).
이와 함께 두 나라는 자기들의 위성국인 몽골인민공화국과 만주국을 위한 불가침선언도 채택했다. 이 선언에서 두 나라는 “소련 정부와 일본 정부는 양국간의 평화적·우호적 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소련은 만주국, 일본은 몽골인민공화국의 영토보전과 불가침을 존중하겠다고 서약했다.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하고 나서 마쓰오카 일본 외무장관은 바로 모스크바를 떠났다. 스탈린은 역까지 배웅을 나갔다. 그는 마쓰오카의 어깨를 감싸안으면서 “우리는 아시아인이지 않나?”라고 말했다.
소련의 배신
1945년이 될 때까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일본과 소련 모두 이 중립조약을 나름 충실하게 지켰다. 히틀러는 일본에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소련을 공격해 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소전쟁 개전(開戰) 초기 소련군은 서부전선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극동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25만명의 정예부대들을 빼내 대독(對獨)전선에 투입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에 들어간 후에도 미국이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소련에 전쟁물자를 보내는 것을 막지 않았다. 히틀러가 여러 차례 항의했지만 일본은 이를 외면했다. 만일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거나 소련으로 들어가는 미국의 원조를 차단했다면,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도 이익을 얻었다. 일본은 소련의 침공 위험에서 벗어나 미국과의 전쟁과 동남아 침략에 주력할 수 있었다. 또 일본은 소련으로부터 석유·석탄·철·목재·어류 등을 수입, 부족한 전략물자를 보충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과 영국은 소련을 대일전(對日戰)에 끌어들이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온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난 후, 대일전 참전을 약속했다.
반면에 일본은 이탈리아·독일 등 동맹국들이 차례로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 일소중립조약 연장을 간절히 희망했다. 일본의 희망과는 달리 소련은 1945년 4월 5일 중립조약을 갱신하지 않고 이듬해 4월 기간이 만료된다고 통보했다.
그래도 일소중립조약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일본은 1945년 8월에 접어들면서 소련의 중재에 의한 연합국과의 강화(講和)를 모색했다. 일본은 지난 4년간 자신들이 일소중립조약을 성실하게 준수했던 것을 소련이 평가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소련은 이미 포츠담선언 등을 통해 자신들의 이권(利權)을 확보한 후였다. 일본은 소련에 줄 것이 없었다.
1945년 8월 8일 밤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은 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대사를 외무부로 불러 선전포고문을 전달했다. “얄타회담에서의 약속에 따라 세계평화를 위해”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파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4월 일소중립조약 갱신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조약 자체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임에도, 소련은 이를 무시한 것이다. 다음 날인 8월 9일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던 일본에 가해진 마지막 치명타였다.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다.
일본은 변화한 상황도, 소련의 검은 속셈도 헤아리지 못했다. 1930년대 말에는 동맹을 잘못 선택했고, 1945년에는 믿을 수 없는 나라에 의지하려 했다. 그 결과는 패망이었다.
“萬國公法이 不如大砲一放이라”
1932년에 소련과 핀란드도 10년 기한으로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소련은 1939년 11월 카렐리야 등 영토 할양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핀란드를 침공했다, 약소국 핀란드는 영웅적으로 항전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핀란드는 영토의 11%, 인구의 12%, 산업능력의 30%를 상실해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27일 김정은과의 〈판문점선언〉에서 “남과 북은 그 어떤 형태의 무력도 서로 사용하지 않을 때 대한 불가침 합의를 재확인하고 엄격히 준수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선언했다. 두 사람은 9월 19일 〈평양공동선언〉에서도 “남과 북은 이번 평양정상회담을 계기로 체결한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를 평양공동선언의 부속합의서로 채택하고 이를 철저히 준수하고 성실히 이행하며, 한반도를 항구적인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실천적 조치들을 적극 취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했다.
독일-폴란드, 독일-소련, 일본-소련, 소련-핀란드, 소련-폴란드도 비슷한 문구가 들어간 불가침조약이나 중립조약을 통해 서로간의 불가침을 다짐했었다. 하지만 침략야욕으로 가득한 독재자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9세기 말 일본의 대표적 지성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이렇게 말했다.
“만국공법(萬國公法)이 불여대포일방(不如大砲一放)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