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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北정상회담 그 후

終戰선언과 평화협정이 한반도 평화를 보장할까?

평화협정 그 이후…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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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평화협정 체결 2년 후 베트남 赤化

⊙ 닉슨, 북베트남에 평화협상 제안하면서 北爆 병행하는 ‘미친 사람 작전’ 전개… 제재와 대화 병행한 트럼프와 흡사
⊙ 닉슨, 대통령 再選과 중국과의 관계 개선 위해 자유월남 버렸다
⊙ 박정희, “이 案대로 휴전이 이뤄지면 월남은 1년도 지탱하지 못할 것”
‌⊙ 미군 철수, 내정 불간섭, 남북 베트남 간 武力 충돌 회피, 평화적 통일 등 규정… 미군철수만 지켜져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 탱크가 남베트남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에 돌입하면서 베트남전쟁은 막을 내렸다.
  6·12 미북(美北)정상회담을 계기로 종전(終戰)선언과 평화협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停戰)협정을 대신하는 평화협정이 체결되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한반도에는 항구적인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달콤한 주장이 만연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19세기 말 일본에서는 ‘만국공법(萬國公法)이 불여대포일방(不如大砲一放)’이라는 말이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국제조약을 맺어 봤자 침략자들의 무력(武力)행사 앞에서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역사상 무수한 사례들이 이 말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평화협정이 운위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사례가 있다. 베트남전쟁의 종식을 가져온 1973년 1월의 파리평화협정(베트남전쟁 종결 및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이 그것이다.
 
  분단 시기 베트남의 상황은 오늘날 우리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베트남도 이념 때문에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미국 등 외국군까지 가세한 치열한 전쟁을 겪었다. 남북에 들어선 서로 다른 체제가 민족사적 정통성을 놓고 경쟁을 벌였고, 남부 지역에 북측을 추종하는 반체제(反體制) 세력이 강고하게 형성되어 체제를 약화시켰다는 점도 비슷하다.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베트남에는 평화가 오는 듯했다. 하지만 불과 2년 후인 1975년 1월 북베트남은 전면 남침(南侵)을 재개(再開)했다. 결국 그해 4월 30일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패망(敗亡)하고 말았다.
 
 
  평화협상의 시작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월맹)군과 베트콩(남베트남 내 친북조직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군사조직)은 사이공을 비롯한 남베트남 주요 도시들에서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다. 테트(구정)공세였다. 미군은 즉각 반격했다. 고도(古都) 후에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10일 만에 상황이 진정됐다. 웨스트멀랜드 주월미군사령관은 공산군은 3만7000여명, 미군은 2500여명이 전사했다고 발표했다. 군사적으로는 북베트남이 완패(完敗)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미국이 패배했다.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이 함락 직전까지 가는 광경을 목격한 미국 국민들의 충격은 컸다. 반전(反戰)여론이 더욱 거세졌다. 그해 3월 31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TV에 나와 대(對)국민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오늘밤 이 자리에서 자유민주국가들의 우방인 미국이 명예로운 평화를 모색할 준비를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존슨은 이 말 뒤에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데 필요한 어떠한 대가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뚜렷한 명분은 지켜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북베트남에 대해 먼저 평화협상을 제안함으로써 미국은 수세(守勢)에 처해 있음을 자인(自認)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존슨은 이와 함께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북폭·北爆) 중단과 차기 대통령 선거 불출마도 선언했다.
 
  미국은 존슨의 담화가 있기 전에 그 내용을 윌리엄 포터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박 대통령은 포터 대사에게 “미국의 이 같은 일방적인 결정은 월남전 해결에 결코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68년 5월 10일 미국의 W. A. 해리먼과 북베트남의 쑤안 투이 간에 평화협상이 시작됐다.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남베트남(월남공화국)은 ▲남베트남에서 공산군(북베트남군) 철수 ▲장차 있을지도 모르는 공산군의 공격을 예방하기 위한 국제적 통제 및 이에 대한 보장을 강조했다. 반면에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내 친북세력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미군 및 연합군의 무조건 철수 ▲제헌의회 선출 및 연합정부 수립을 위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선거 실시 ▲남베트남 정부는 중립적인 대외(對外)정책을 준수할 것 등을 요구했다.
 
 
  닉슨의 ‘미친 사람 이론’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부통령 시절이던 1953년 11월 방한(訪韓)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의 전략적 식견에 깊이 감동받았다.
  평화협상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미국에서는 강경 반공주의자로 이름을 떨쳤던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베트남전 종식을 내걸고 대선에서 승리한 닉슨 대통령은 1969년 1월 20일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가 주는 가장 큰 명예는 평화중재자라는 칭호입니다. 이 명예가 미국을 부르고 있습니다.”
 
  취임 한 달 뒤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주둔 미군 2만5000명의 철수를 발표했다. ‘미국은 점진적으로 베트남에서 발을 빼고, 베트남전쟁은 베트남인들에게 맡긴다’는 ‘베트남화(化)’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1969년 5월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평화협상안을 제시했다. ▲12개월에 걸친 상호 병력 철수 ▲포로의 조기(早期) 석방 ▲국제기구 감시하의 종전 ▲1954년 제네바협정을 준수한다는 조건 아래 모든 정파(政派)가 참여하는 새로운 선거의 실시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렇게 올리브 가지를 흔들어대면서도 닉슨 대통령은 뒤로는 대대적인 군사적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닉슨은 대선 기간 중 나중에 백악관 비서실장이 되는 H. R. 할더만에게 이렇게 말했다.
 
  “북베트남 지도자들이 내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결심이 서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 말을 그들에게 꼭 전해야 된다. ‘당신들도 알다시피 닉슨 대통령은 공산주의에 대해 큰 고민을 하고 있다. 만약 그가 분노하면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다. 그는 언제나 핵폭탄의 단추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북베트남 지도자들에게 이 사실을 확실하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
 
  닉슨 대통령은 자신의 이런 전략을 ‘미친 사람 이론(Madman Theory)’라고 칭했다. 이건 사실 그가 부통령 시절이던 1953년 11월 방한(訪韓)했을 때,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준수하겠다는 이승만의 확약을 원했지만, 이승만은 닉슨에게 “미국은 이승만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의혹을 제거해 주어서는 안 된다. 본인이 모종의 행동을 시작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단한 제동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닉슨 대통령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 예측을 불허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통찰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 후 많은 것을 배우면 배울수록 그 노(老)정치가가 참으로 현명했음에 더욱더 감탄하게 되었다.”
 
  닉슨 대통령은 미국이 급작스럽게 베트남에서 철군했다가는 세계에 미국이 약하다는 잘못된 사인을 보내게 될까 봐 걱정했다. 그는 ‘명예로운 철군’을 원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아직 힘이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취임 1개월 후 닉슨 대통령은 캄보디아에 숨어 있는 북베트남군 지휘부를 폭격하는 ‘메뉴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조식(朝食) 작전’ ‘중식(中食)작전’ ‘스낵작전’ 등의 이름으로 전개됐다. 14개월 동안 B-29폭격기가 3600회나 출격,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퍼부은 폭탄의 4배가 넘는 폭탄을 쏟아부었다. 미국은 북베트남군의 비밀기지를 소탕하기 위해 1970년 4월에는 캄보디아(크메르)를, 1971년 1월에는 라오스를 침공했다. 이것도 북베트남에 대한 압박의 일환이었다.
 
  화전(和戰) 양면 전술로 상대를 협상장으로 끌어낸 닉슨 대통령의 수법은 한편으로는 강력한 제재와 말폭탄, 다른 한편으로는 체제보장 및 ‘북한판 마셜플랜’ 약속으로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트럼프 대통령의 경우와 흡사하다.
 
 
  비밀협상
 
박정희 대통령과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 1973년 11월 키신저가 방한했을 때의 모습이다.
  다른 한편으로 닉슨 정부는 지지부진한 평화협상을 진척시키기 위해 북베트남과의 비밀협상에 나섰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는 “쌍방간에 상호 이해와 신뢰를 불러일으킬 수 있게 하는 길은 오직 쌍방의 개별적인 비밀협상을 통해 설득작업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1969년 8월 4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전 프랑스군 정보장교 장 생트니의 자택에서 북베트남의 쑤안 투이와 첫 번째 비밀접촉을 가졌다.
 
  미국과 북베트남의 비밀접촉을 지켜보면서 응우옌 반 티우 남베트남 대통령은 “키신저가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베트남(남베트남) 사람들의 머리 위에 앉아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미국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남베트남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키신저가 쑤안 투이와 접촉한 지 한 달 뒤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이 사망했다. 평화협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티우 정권은 공개적인 평화협상 참석을 중단했다.
 
  그래도 미국과 북베트남 간 비밀회담은 계속됐다. 회담은 중단·결렬과 재개를 반복하다가 1972년 10월 8일 협상 초안(草案)이 마련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미국은 베트남의 독립, 주권 및 영토의 보존을 존중.
 
  ② 휴전은 협정이 조인 된 후 24시간 뒤에 그 효력이 발생하게 되며, 모든 미군 부대는 60일 이내에 베트남에서 철수.
 
  ③ 모든 전쟁 포로를 60일 이내에 석방.
 
  ④ 총선거에 대비해 세 당사자(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남민족해방전선)에 의해 동일한 비율로 구성되는 행정기구인 국민화합평화회의 조직, 발족.
 
  ⑤ 베트남 재통일은 서서히 평화적 방법으로 수행.
 
  ⑥ 국제통제감시위원회 설치.
 
  ⑦ 평화보장을 위한 국제회의를 향후 30일 이내 개최.
 
  ⑧ 모든 당사자들은 라오스 및 캄보디아의 독립, 주권 및 영토의 안전을 존중할 것을 서약.
 
  ⑨ 미국은 북베트남 및 인도차이나에 대한 전후(戰後) 복구사업에 참여.
 
  여기서 알 수 있듯 협정은 휴전조약과 평화조약의 성격을 함께 갖는 것이었다. ①항은 종전 선언 및 평화협정의 내용으로 거론되는 북한 체제 보장, ⑨항은 북한 경제 재건을 위한 대규모 지원(북한판 마셜플랜) 다짐을, ④항은 일각에서 말하는 연합제 내지 연방제안을 연상케 한다.
 
 
  박정희의 경고
 
닉슨 미국 대통령과 티우 남베트남 대통령은 1969년 6월 8일 미드웨이섬에서 만나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化)에 대해 논의했다. 사진=닉슨대통령도서관
  이와 함께 미국은 남베트남 티우 정권에 대한 설득 작업에 나섰다. 1972년 10월 18일 키신저는 티우 대통령을 비롯한 남베트남 정부·군부 요인들과 만나 영문(英文)으로 된 협정 초안을 제시했다. 키신저는 “미국은 태국에 공군기지를 계속 유지하고 베트남 연안에 제7함대를 계속 배치해 공산주의자들의 어떠한 공격도 사전(事前)에 억제하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남베트남이 100만명이 넘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데다, 남베트남 총인구 1900만명의 85%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합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역설했다. 키신저는 남베트남 측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받아들일 만한 내용은 열심히 강조하면서도, 미해결 상태로 있던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또 이미 협정 공식조인을 위한 일정이 사실상 잡혀 있었음에도 이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미국은 필립 하비브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이 협상 초안에 대해 알려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휴전안에 침략자인 월맹군(북베트남군)의 철수는 규정하지 않고 외국군의 철수만 규정한 것은 불공평하다. 월맹과 베트콩(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월남(남베트남)을 묶는 연립정부안(案)의 성격이 애매하다. 국제감시에 대한 규정도 불안전하다. 따라서 이 안은 공산당의 침략을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되어 월남 정부를 약화시키고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티우 대통령이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에 대해서는 강한 힘만이 그들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게 할 수 있다. 만약 이 안대로 휴전이 이뤄지면 월남은 1년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 날 유양수 주베트남대사를 불러 자신의 걱정을 티우 대통령에게 전하라고 지시했다.
 
  티우 정부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10월 22일 남베트남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협상 초안을 검토한 후, 미국 측에 이를 수락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남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 내에 있는 북베트남군의 철수에 대한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군사적 균형이 북베트남 측에 유리하게 기울게 된다 ▲국민화합평화회의의 성격이 모호하다는 점 등을 거부 이유로 들었다. 티우 정부는 미군이 철수한 상태에서 국민화합평화회의를 구성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면 결국 적화(赤化)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우려한 것이다.
 
  남베트남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지금까지 우리는 야수를 사냥하기 위해 정글 속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이제부터는 그들을 품에 안고 함께 잠을 자게 되었다”는 농담 아닌 농담이 돌기도 했다. 티우 대통령은 방송 연설에서 “남베트남 정부는 결코 3자 연합정부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크리스마스 대폭격
 
키신저와 파리평화협정을 타결지은 북베트남공산당 정치국원 레 둑 토. 사진=유튜브 캡처
  미국은 티우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강온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 닉슨 대통령은 국민화합평화회의 관련 조항 등 남베트남이 이의(異議)를 제기한 문구들에 대한 재검토를 지시하는 한편, 전투기·수송기·헬리콥터·전차·야포 등 주요 무기와 전쟁물자를 넘겨주면서 남베트남을 달랬다. 동시에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의 보좌관인 알렉산더 헤이그 장군(레이건 정부 시절 국무장관) 편에 친서(親書)를 보냈다. 닉슨 대통령은 이 친서에서 “남베트남이 협정 서명을 계속 거부할 경우, 미국은 단독으로 북베트남과 협정에 서명할 것”이라고 시사(示唆)했다.
 
  닉슨 대통령이 평화협정에 매달린 것은 1972년 대선에서 재선(再選)되기 위해서는 베트남전 종식이라는 이벤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에라도 북한을 폭격할 것처럼 큰소리치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스캔들’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올 가을에 있을 중간선거에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김정은과의 회담에 열심인 것과 흡사하다.
 
  평화협상 과정에서 미국과 자주 충돌했던 티우 대통령은 후일 이렇게 술회했다.
 
  “키신저는 우리도 모르게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했다. 미국은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해 베트남을 버리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현실정치에서 일어나는 실수가 아니라, 미국이 고의적으로 옳지 못한 정책을 선택한 결과였다.”
 
  미국이 파리평화협정을 강요하면서 남베트남을 포기하는 수순을 밟기 시작한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의 세계전략과 관련이 있다. 국제전략문제 전문가인 이춘근 박사의 말이다.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으려 했다. 이를 위해 1971년 8월 키신저가 비밀리에 베이징(北京)을 방문했고, 1972년 2월에는 닉슨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은 중국의 남쪽 국경인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켜 미국이 중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러면 중국은 안심하고 남부에 배치했던 군대를 중소(中蘇) 국경지역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고, 미국은 이를 통해 대소(對蘇) 견제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닉슨과 키신저의 세계전략 속에서 남베트남은 이미 ‘버리는 패’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북베트남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평화협상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기미를 보이자 북베트남은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미국이 타결에 다가섰다고 생각할 때마다 북베트남은 새로운 요구를 들이밀었다. 북베트남은 미국 내에서 베트남전 종식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으며, 닉슨 정부는 이를 외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도 북베트남의 속셈을 모르지 않았다. 미국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윈스턴 로드는 이렇게 회고했다.
 
  “하노이(북베트남)의 주장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너무 많은 요구가 쏟아졌다. 우리의 요구는 북베트남 병력 철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소한 것이었던 반면, 하노이의 요구는 많은 부분이 시간 끌기 작전용인 것 같았다.”
 
  ‘시간 끌기 작전’은 과거 북핵(北核)협상에서 북한도 단골로 써 먹던 수법이다. 참다못한 미국은 결국 1972년 12월 13일 회담을 중단했다. 키신저는 북베트남 대표 레 둑 토에게 “만약 이 협상이 완전히 결렬되면 대규모 무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키신저는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보좌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전쟁을 4년 더 끌고 갈 수는 없다. 어떤 ‘잔혹한 행위’가 있더라도 이제는 이 전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정말 끝내야 돼! 수단과 방법은 문제가 안 돼!”
 
  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미국이 꺼내 든 카드는 ‘북폭(北爆) 재개’였다. 12월 18일부터 11일 동안 미국은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인근 항구도시 하이퐁을 맹폭(猛爆)했다.
 
  ‘크리스마스 대폭격’으로 알려진 이 폭격은 평화협정에 서명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남베트남 티우 정권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윈스턴 로드는 이렇게 말했다.
 
  “닉슨 대통령은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티우 대통령에게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폭격의 진짜 동기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티우의 굴복
 
  ‘크리스마스 대폭격’ 이후 북베트남은 다시 협상장으로 나왔다. 닉슨 대통령이 북폭으로 북베트남을 협상장으로 다시 불러낸 것은 트럼프가 회담 직전 미북 정상회담 중단을 선언해 북한을 압박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이후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73년 1월 8일 키신저와 레 둑 토는 협정안 초안을 축조(逐條) 심의했다. 1월 14일 키신저는 그 내용을 닉슨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해 1월 16일에는 헤이그 장군이 남베트남을 방문, 협정안 초안을 티우 대통령에게 통보했다. 티우 정부는 협정안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거부의사를 밝혔다. 티우 대통령은 미국 측에 이렇게 말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나는 남베트남의 운명은 두 가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했다. 하나는 북베트남 병력이 남베트남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국민화해평화회의로 위장한 연합정부 문제였다.”
 
  하지만 미국은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은 1월 19일 “더 이상 협정 원문에 대한 수정은 없다. 협정은 1월 23일 서명되고, 1월 27일 파리에서 네 당사자(미국, 북베트남, 남베트남,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간에 공식적으로 조인된다”고 협박했다.
 
  닉슨 대통령은 1월 21일 티우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만일 남베트남이 끝내 평화협정 수락을 거부한다면, 미국은 단독으로라도 북베트남과 협정을 조인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중단될 것”이라고 다시 경고했다. 이와 함께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이 이 협정에 조인한다면, ①미국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계속되도록 미국 의회에 강력하게 요구할 것이며, ②미국은 북베트남의 어떠한 중대한 휴전협정 위반 사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결국 티우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정부·군부와 논의하고, 의회 지도자들과 협의한 후, 닉슨 대통령에게 평화협정을 수락한다는 서한을 발송했다.
 
 
  파리평화협정의 주요 내용
 
파리평화협정 타결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1973년 1월 24일자 1면.
  베트남전쟁을 종식시킨 ‘파리평화협정’의 정식 명칭은 ‘베트남 전쟁 종결 및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이다. 9장 23개조로 된 본(本)협정과 4개 부속 의정서(議定書)로 구성돼 있다. 본협정은 미국, 북베트남(월맹·베트남민주공화국), 남베트남(월남공화국), 베트남임시혁명정부(남베트남 내 친북세력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후신. 속칭 베트콩), 부속 의정서는 미국과 북베트남이 서명했다. 본 협정은 ▲적대 행위의 종식 및 철군 ▲포로 송환 ▲남베트남의 국내 정치 문제 ▲베트남 통일과 남북 베트남 관계 ▲휴전 감시 ▲캄보디아(크메르)·라오스 문제 ▲미국과 북베트남 간의 관계 등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휴전협정의 성격과 함께 종전선언, 평화협정으로서의 성격도 함께 갖고 있는 셈이다. 이들 내용 가운데 향후 한반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에서 참고할 만한 내용들을 좀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조] 미국과 모든 다른 나라들은 베트남에 관한 1954년 제네바협정에 의해 인정된 베트남의 독립, 주권, 단일성 및 영토적 보전을 존중한다. ※ 체제보장
 
  •[제4조] 미국은 군사적 개입을 계속하지 않으며 남베트남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 내정 불간섭, 대북(對北)적대시 정책의 포기, 체제보장
 
  •[제5조] 본 협정 조인 후 60일 안으로 미군과 제3조 (1)에 규정된 외국은 남베트남에서 군대, 군사고문단, 평정계획과 관련된 기술 및 군사요원, 군 장비, 탄약 및 군수물자를 모두 철수한다. 상기(上記) 외국으로부터 모든 유사(類似) 군사단체와 경찰에 파견된 고문들도 같은 기간 내에 철수한다. ※ 주한미군 철수
 
  •[제9조] 미국정부와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정부는 베트남(남베트남) 인민이 자결권(自決權)을 행사하도록 제(諸) 원칙을 존중하기로 약속한다. ※ 남북간 상호 내정 불간섭 및 체제존중
 
  ① 남베트남 인민의 자결권은 신성불가침한 것이며, 모든 국가에 의해서 존중되어야 한다.
 
  ② 남베트남 인민은 국제감시하에 진정으로 자유민주 총선거를 통해서 베트남의 정치적 장래를 스스로 결정한다.
 
  ③ 외국은 남베트남 국민에게 여하한 정치노선이나 인물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제11조] 두 남베트남(남베트남 정부와 베트남임시혁명정부) 당사자는 남베트남에서 휴전을 준수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모든 논란 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하고 무력 충돌을 회피하기로 약속한다. ※ 불가침
 
  •[제15조] 베트남의 통일은 남북 베트남 간에 이루어질 협정이나 토의에 입각한 평화적 수단을 통해 단계적으로 실현하며 어느 일방에 의한 강제나 합병, 또한 외국의 간섭이 없어야 한다. 통일의 시기는 남북 베트남간에 합의한다. ※ 남북한간 상호 체제 존중, 내정 불간섭, 불가침
 
  통일이 성취되기까지 ① 북위 17도선상에 설치된 두 구역간에 군사분계선은 1954년 제네바회의의 최종 선언 제6항에 규정된 바와 같이 단지 잠정적인 것이며, 정치적 또는 영토상의 경계선은 아니다. ※ 남북한은 국가와 국가 관계가 아니라 특수관계
 
  ② 남북 베트남은 잠정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한 비무장지대의 존재를 존중한다. ※ 상호 불가침
 
  ③ 남북 베트남은 제반 분야에서 정상 관계를 재수립하기 위해 빠른 시일 안에 협상을 개시한다. 협상에서 토의될 사항 중에 잠정 군사분계선을 통한 민간의 이동 방식 문제를 포함한다. ※ 남북간 통행협정, 민간교류협력
 
  ④ 남북 베트남은 1954년의 제네바협정에 따라 여하한 쌍무 또는 집단군사동맹에 가입하지 않으며, 외국이 각자의 영토 내에 군사기지, 군부대, 군사고문단, 군사요원들을 두지 못하도록 한다. ※ 주한미군 철수, 한미상호방위조약 폐기
 
  •[제21조] 미국은 본 협정의 체결로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또는 인도차이나 국민들과 화해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기대한다. 미국은 그 전통적인 정책에 따라 베트남민주공화국과 전 인도차이나의 복구와 전후 재건에 기여한다. ※ 미북 수교, 대북제재 해제, 대북 경제지원
 
  •[제22조] 전쟁의 종식, 베트남에서의 평화회복 및 본 협정의 엄수는 미국과 베트남민주공화국 간에 상호 독립, 주권의 존중 및 내정 불간섭 원칙에 입각한 새롭고 평등하며 호혜적인 관계 수립을 위한 여건을 조성할 것이다. 동시에 이 협정은 베트남의 안정된 평화를 성취하고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에 항구적인 평화를 보존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 미북수교, 종전 선언, 평화협정 체결
 
  •[제23조] 본 협정은 파리베트남회담 참가 당사자들의 전권 대표의 서명을 거쳐 발효한다. 모든 관계 당사자들은 본 협정 및 부속의정서를 엄중 이행한다.
 
 
  키신저, 노벨평화상 수상
 
  파리평화협정을 성사시킨 공로로 미국의 키신저와 북베트남의 레 둑 토는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남북정상회담, 미북정상회담, 더 나아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공로(?)로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 김정은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는 것도 이런 전례(前例)가 있기 때문이다.
 
  키신저는 날름 그 상을 받았지만, 레 둑 토는 “베트남에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절했다. 이후의 상황 전개를 보면 레 둑 토 쪽이 더 정직했던 것 같다.
 
  평화협정이 맺어진 후 미군을 비롯한 외국군은 철수했다. 하지만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에 상당수 잔류했고, 베트콩의 공세도 계속됐다. 여기서부터 이미 평화협정은 사문화(死文化)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남베트남 국민들은 평화가 온 것으로 착각했다.
 
  그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1974년 12월 중순,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통일전쟁을 결의했다. 이들은 평화협정 체결 후 남베트남 국민들은 평화의 도래를 맹신하고 있고 군대의 사기는 저하되어 있으며, 미국은 워터게이트 사건 후유증 때문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북베트남의 전설적인 명장인 보 구엔 지압 장군(국방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인민들은 ‘티우 정권이 존재할 수 있는 기간은 단지 탄약 재고량에 비례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그들 마음속에는 ‘베트남은 반드시 재통일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정보망도 북베트남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티우 정권은 태평했다. 티우 대통령은 1975년 연두기자회견에서 “북베트남 군대는 하루 두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으며 소금국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고 비웃었다.
 
 
  사이공 함락
 
  1974년 12월 말부터 북베트남군은 본격적인 무력 공세를 시작했다. 남베트남과 미국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것이다. 남베트남군은 변변히 저항하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1975년 1월 7일에는 푹롱성(省)의 성도(省都)인 푹빈시(市)가 점령됐다. 미국은 침묵했다. 북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레 두 안은 공산당 수뇌부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오지 않는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계획대로 밀고 나간다.”
 
  북베트남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왔다. 이미 망가지고 있던 파리평화협정은 이제 휴짓조각이나 다름없었다. 파리평화협정이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선언한 남베트남 인민들의 자결권은 포연(砲煙)과 함께 사라졌다.
 
  3월 초 티우 대통령은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7개 성을 포기하고 병력을 후퇴시켰다. 보다 유리한 지역에서 방어선을 재구축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군대와 국민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4월 말에 접어들자 44개 성 가운데 23개 성이 함락됐다. 티우 대통령은 미국에 “닉슨이 했던 약속을 지키라”고 절망적으로 호소했지만, 닉슨은 이미 미국 대통령이 아니었다. 티우 대통령은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원했지만, 북베트남은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결국 티우 대통령은 4월 21일 사임, 망명길에 올랐다. 북베트남과의 협상을 주장해 오던 온건파 장군 출신 두옹 반 민이 대통령이 됐지만, 북베트남은 협상을 거부하고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이 사이공(현 호찌민)을 함락시켰다. 민 대통령은 항복했다. 북베트남군의 탱크가 철문을 짓부수며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에 돌입했다.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은 그렇게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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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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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quoia    (2018-06-25)     수정   삭제 찬성 : 18   반대 : 20
이런얘기 아무리해도 아무리많은 주장을 신문에 실어도 문제인은 보지않ㄱ 듣지않는다. 망해봐야 그때 아는 허수아비 정치가요 형광등정치가요 ㅁ미래를 볼줄아는 안복이 없는 정치가라는것이 나의 주장이다.
  두리봉    (2018-06-25)     수정   삭제 찬성 : 1   반대 : 0
월남이 패망한 후 월남은 어45935게 되었는가 자제히 써 주시오.(인적청산,사유 재산청산,토지등)등?
  고뽀리    (2018-06-25)     수정   삭제 찬성 : 37   반대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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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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