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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한반도

파키스탄 핵폭탄 만든 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육필 회고

핵무장한 숙적(宿敵) 인도에 맞서 만난을 무릅쓰고 핵(核)무장에 나서다

글 : 압둘 카디르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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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5월 인도의 원폭 실험에 위기를 느끼고 부토 총리에게 편지 보내 우라늄 농축 핵개발 건의
⊙ 유럽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접고 1975년 12월 귀국, 이듬해 ‘기술연구실험실’(핵개발 위장 연구소) 설립
⊙ 월급 300달러의 박봉, 파키스탄원자력에너지위원회 소속 과학자들의 음해, 미국의 압력, 서구 국가들의 방해 극복하고 핵개발 성공
⊙ 파키스탄 국가지도부, 쿠데타와 잦은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핵무장 밀어붙여

미안 압둘 와히드
1935~2017년. 파키스탄 펀자브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同 라호르 정부대학 경제학 석사. 미국 터프츠대학교 플레처 국제법·외교대학원 석사 / 외교부 서유럽과장, 주독공사, 주이탈리아대사 겸 주말타·알바니아·식량농업기구(FAO)·세계식량계획(WFP)·국제농업개발기구(IFAD) 대사, 주독대사, 하원의원(3선), 하원 외교위원장 역임

송종환
1944년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학사, 석사. 미국 터프츠대학교 플레처 국제법·외교대학원 석사, 한양대 정치학 박사 / 1970년대 초·중반 남북적십자회담·남북조절위 회담 참가, 주유엔 공사, 주미공사, 국가안전기획부 해외정보실장, 명지대 초빙교수, 주파키스탄대사 역임, 현재 경남대학교 석좌 교수 / 《북한 협상행태의 이해》 《가까이 다가온 자유민주주의 통일과 과제들》 《북한 어디로 가나》(공저) 《남북회담: 7·4에서 6·15까지》(공저) 《통일을 앞당겨 주소서》(공저) 출간

번역·해설 : 송종환 경남대 석좌교수·전 駐 파키스탄대사
  1974년 5월 18일 파키스탄의 잠재적 적국(敵國) 인도가 핵(核)실험을 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는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 후 1998년 5월 28일 핵실험에 성공할 때까지 파키스탄은 쿠데타 등 수차례의 정권교체를 겪었다. 그러나 파키스탄 국가지도부는 국가 발전정책 방향과 지역출신은 달랐어도 핵개발만은 중단하지 않고 전폭 지원했다.
 
  압둘 카디르 칸 박사는 벨기에에서 박사 학위를 한 우라늄 농축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유럽 명문대학의 교수로서의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1975년 12월 스스로 귀국했다. 그는 300달러 정도의 적은 월급을 받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바늘 하나 만들지 못하는 개발도상국에서 1984년 12월, 본격적으로 핵개발에 착수한 지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핵무기를 만들어 내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
 
  역자(譯者)는 2013년 6월부터 3년간 파키스탄 주재 대사로 근무하면서 미국 터프츠대학교 플레처국제법·외교대학원 선배인 미안 압둘 와히드 전 주독(駐獨) 파키스탄대사와 친분을 나누었다. 그는 2013년 펴낸 회고록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핵 국가로서 파키스탄의 출현(Before Memory Fades: Emergence of Pakistan As A Nuclear Power)》에서 자신이 칸 박사의 핵개발을 외교적으로 지원했던 사실을 기술(記述)했다. 역자는 이 내용을 《월간조선》 2013년 12월호에 소개한 바 있다.
 
  2016년 11월 말 와히드 전 대사는 새로 발간할 회고록 《파키스탄 핵폭탄을 만들다(Pakistan Makes the Atom Bomb)》의 초안(草案)을 역자에게 보내면서 서문을 써 달라고 요청했다. 와히드 대사는 이 책에는 역자가 파키스탄 대사 재임 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직접 쓴 부분도 있어서 한국에서도 흥미가 있을 것이라면서 한국에서 이 책을 내 줄 출판사를 물색해 달라고 부탁했다.
 
  역자는 국제정치학자 한스 모겐소가 “다투는 두 나라 중 핵 위협을 받는 나라가 핵 반격 수단이 없으면 1945년 8월 미국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후 일본처럼 완전 파괴되거나 무조건 항복이라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고 경고한 구절을 인용하여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한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평가하는 서문을 보냈다. 하지만 2017년 10월 와히드 전 대사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회고록은 발간되지 못했다.
 
미안 압둘 와히드 전 대사(왼쪽)와 압둘 카디르 칸 박사. 와히드 전 대사는 귀국을 희망하는 칸 박사의 편지를 상부에 전달했고, 외교관으로서 칸 박사의 핵개발 작업을 지원했다.
  와히드 전 대사는 평소 역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리고 새로 쓴 책에서 “미국이 핵개발을 하려는 파키스탄에 강한 위협과 압박을 가했지만, 2001년 아프간 전쟁에서 파키스탄 군부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하게 된 이후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묵인하게 됐다”고 말하곤 했다. 역자는 그가 넌지시 “한국도 북한 핵에 인질이 되지 말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미국의 양해를 구하여 독자적인 핵개발을 해야 한다”는 충고를 한 것으로 이해했다.
 
  역자는 와히드 전 대사의 회고록, 특히 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회고 부분을 국내에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와히드 전 대사의 아들 자팔 와히드 사장은 칸 박사가 직접 쓴 부분의 출처를 명시하는 조건으로 번역해 한국 매체에 기고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이 책에는 칸 박사가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기를 북한에 제공하고 그 대가로 노동미사일 부품과 기술을 받아서 1998년 4월 6일 ‘가우리’ 미사일 1호 발사 시험에 성공한 일 등 북한과 파키스탄 간 협력에 관한 내용(2009년 12월 28일자 《워싱턴포스트》의 칸 박사 인터뷰 참조)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유고(遺稿)에는 북한 핵위협에 직면한 조국을 걱정하는 역자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중요한 부분이 있었다.
 
  〈모하메드 지아 울 하크 대통령은 1986년 직접 델리의 라지브 간디 총리에게 ‘만일 인도가 어떠한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파키스탄은 그에 보복할 능력이 있다’고 통보했다. 파키스탄이 핵무기와 이를 운반할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두 국가 간의 큰 규모 전쟁은 과거사가 됐다. 이제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핵전쟁의 비용과 피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서 큰 규모를 할 수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됐다.〉
 
 
  북핵 폐기 안 되면, 한국도 핵무장해야
 
파키스탄대사 시절 칸 박사(왼쪽에서 두 번째)와 자리를 같이한 송종환 전 대사(오른쪽 끝).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5월에는 미·북 정상회담도 열릴 것으로 보인다. 이 두 회담에서 북한 핵폐기 문제를 타결하여 평화를 확보하고 공동번영의 길로 나아가길 기원한다. 그러나 북한은 1985년부터 2012년까지 27년 동안 상대를 바꾸어 진행한 핵폐기 협상에서 여덟 차례나 ‘합의·파기’를 한 바 있다. 북한은 그렇게 핵무기 개발의 시간을 벌어서 2006년 10월 9일부터 2017년 9월 3일까지 6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북한은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핵폐기가 아니라 주한미군 철수를 목표로 하는 ‘조선반도 비핵화(非核化)’를 주장하고 있다.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폐기에 대한 획기적 진전이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직접 당사자로서 한국은 1992년 1월 20일 북한과 합의한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을 것을 문서로 약속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해 북한의 핵시설 신고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한 북한 핵시설의 즉각적 사찰과 검증을 요구해야 한다. 회담 성과가 없으면 한국은 북한에 보상과 경제협력을 언급하면서 미련을 갖거나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그때 한국은 모겐소 교수가 경고한 ‘공포의 균형’을 채택해야 한다.
 
  북한 핵 위협에 대하여 일차적으로 자강(自强)과 함께 사드(THADD) 신속 배치, 한반도 전술핵 재배치로 확장억제책을 보다 구체화해야 한다. 1962년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인도가 중국의 1964년 핵실험에 맞서 1974년 핵실험으로 대응하고, 파키스탄이 숙적 인도의 핵무장에 맞서 1998년 핵실험을 한 사례에 따라 한국도 독자적인 핵무장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북한이 ‘조선반도 비핵화’를 내세워 시간을 끄는 상황에서 한국은 미국에 “미국의 양해하에 한국이 핵무장을 추진할 경우 북한의 도발을 억지하여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키는 한편, 남북한 간에 ‘진정으로 대화’를 하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고, 또 북한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견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로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50배 이상 우세한 한국에는 왜 “풀만 먹더라도 독자적으로 핵을 개발하여 북한 핵을 억지하겠다”는 국가지도자가 나오지 않는가? 왜 정부는 지도부가 실패한 유화책(宥和策)으로 다시 국민의 안보의식을 해이하게 하고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는가?
 
  북한의 우라늄 농축 핵개발을 도운 칸 박사는 우리로서는 좋게 보기 어려운 인물이다. 하지만 파키스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유럽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박봉을 감수하면서, 파키스탄 국내의 기득권을 가진 과학자들의 방해와 음모, 미국 등의 압박을 이겨내고 끝내 핵개발에 성공해 안보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해낸 애국적인 과학자일 것이다.
 

  와히드 전 대사의 회고록에 수록된 칸 박사의 회고록
 
압둘 카디르 칸 박사
 
  1936년 인도 보팔 출생. 카라치대학교 이학학사, 네덜란드 델프트 과학기술대학교 이학 석사, 벨기에 루뱅 가톨릭대학교 금속분야 박사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물리동력화연구소(FDO, 우라늄 농축) 연구원, 1975년 파키스탄 귀국, 1976년 기술연구실험실 설립, 1998년 장거리 미사일 ‘가우리’ 1호 시험발사 성공, 1998년 핵실험 성공
 
압둘 카디르 칸 박사를 다룬 2005년 2월 15일자 《타임》지.
  국가가 추진한 중요한 과제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유지하는 것은 관례적이다. 이 기록은 그들의 성과와 공헌을 기술(記述)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 군인들의 용맹한 행위와 파키스탄을 위해 싸우고 자신들을 희생한 영웅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나라의 국방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존립을 유지시킨 영웅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세계 제2차 대전 직전인 1939년 1월 6일 독일의 과학자인 오토 한과 프리츠 스트라스만은 중성자(中性子) 충격을 통한 우라늄 핵분열 실험에 성공했다. 이렇게 핵시대가 시작된 이후 미국과 서방세계의 과학자들은 모두 이 발견으로 가능한 분야를 탐구하는 데 매진했다. 이것은 결국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 그리고 중국에 의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개발로 이어졌다.
 
  지금 나와 나의 많은 전 동료들은 우리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다. 몇몇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나는 파키스탄이 추진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그들의 지대한 공헌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싶다. 이 프로젝트로 파키스탄은 난공불락의 국방을 갖추고 더 이상 협박받거나 위협받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파키스탄 핵개발 프로젝트를 맡기 전에 네덜란드에서의 유망한 직업을 포기하고 파키스탄으로 돌아오게 된 배경에 대해 짧게 설명하고 싶다.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무기 개발할 것”
 
무니르 아메르 칸 파키스탄원자력에너지위원장(왼쪽)과 줄피카르 부토 총리.
  줄피카르 알리 부토(1928~1979년, 1973~1977 총리 역임) 총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방 국가들은 핵무기를 만들려는 인도의 노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반대로 미국·캐나다 그리고 영국은 인도의 핵개발을 돕기까지 했다. 부토 총리가 경고를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였다. 부토 총리는 “만약 인도가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우리가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도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풀을 먹는 건 쉬웠지만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이렇게 기술적으로 불모지에 가까운 파키스탄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1971년 12월 16일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에서 파키스탄군의 부끄러운 패배와 항복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생생하다. 나는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나는 그 당시 벨기에에 있었고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인도군이 1974년 5월 18일 원자폭탄을 폭발시켰을 때, 나는 다수의 유명한 지도자들이 경고해 온 바와 같이 파키스탄이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나는 수년간 우라늄 농축 연구를 해 왔기 때문에 파키스탄을 도와줄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1974년 9월 나는 부토 총리에게 편지를 써서(파키스탄 외교부 서유럽과장으로 있던 미안 압둘 와히드 대사 경유) 파키스탄이 플루토늄 방식이 아닌 우라늄 농축기술을 통해 핵 기술을 가져야 한다고 건의했다.
 
  1956년에 설립된 파키스탄 원자력에너지위원회(PAEC·Pakistan Atomic Energy Commission)는 이 일을 담당할 실력이 없었다. 1972년 1월 부토 총리는 무니르 아메드 칸(이하 무니르)의 사촌 형이며 총리의 동료인 세이크 쿨시드 아메드의 추천으로 무니르를 PAEC 의장으로 임명했다. 무니르는 라호르(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남쪽으로 400 여 km 떨어진 파키스탄 제2대 도시)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이학학사였으며, 미국에서 별로 명망이 없는 북캐롤라이나주립공과대학(North Carolina State Polytechnic)에서 9개월 코스의 전기전력공학(Power Engineering) 과정을 이수했다.
 
  무니르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의 행정직에서 일한 경험만 있어서 엄밀한 의미에서 핵전문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부토 총리에게 1976년 12월까지 핵장치를 폭발시키겠다고 말했다.
 
  나는 부토 총리에게 “무니르 지휘하의 PAEC는 향후 50년간 핵폭탄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부토 총리는 매우 분노하면서 갑자기 내게 “파키스탄에 남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건 다소 충격이었다. 나와 아내는 1975년 12월 말 딸들과 함께 한 달 휴가를 지내기 위해 파키스탄에 왔기 때문에 여벌의 옷을 조금만 챙겨 온 상태였다. 나는 이미 교수직을 제안 받고 밝은 미래가 보장된 직업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아내와 먼저 상의를 해 봐야 한다”고 부토 총리에게 말했다.
 
 
  “조국의 부름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
 
칸 박사의 핵개발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굴람 이샤크 칸 전 재무장관.
  아내는 내가 받았던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내는 즉시 “절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아내에게 “조국의 부름을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당신이 파키스탄에 남는 것이 파키스탄에 어떤 ‘실질적’ 변화를 이룰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분야의 전문성으로 파키스탄의 핵무기 프로젝트를 맡아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내와 딸들은 네덜란드로 돌아갔다가 짐을 싸서 6주 뒤에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온 1976년 3월 9일은 결혼 12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도전, 고된 일, 성취, 배반으로 가득 차 있는 새로운 인생의 한 막이 시작됐다. 내 가족과 나는 우리의 애국적인 결정으로 인해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이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로부터 여러 번 배반을 당하기도 했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을 때, 부토 총리는 티카 칸(1972년 당시 육군참모총장) 장군에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해 주라고 지시했다. 내가 파키스탄에 남아 달라는 부토 총리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유럽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 대가로 나는 한 달에 고작 3000루피(당시 환율로 약 300 달러)의 월급을 받는 파키스탄원자력에너지위원회(PAEC) 고문으로 임명됐다. 내가 1975년 12월~1976년 7월 PAEC에서 일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만약 핵 프로젝트가 PAEC하에 있으면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PAEC의 의장 무니르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독립 조직의 책임자가 되지 않으면 네덜란드로 돌아가겠다”고 위협하면서 내 입장을 고수했다. 부토 총리는 M. 임티아즈 알리 칸(부토 총리의 군사보좌관) 장군을 통해 나에게 PAEC 의장을 맡으라고 제의했다. 나는 “내가 PAEC 의장이 될 경우 유럽에서 꽤 알려진 핵농축 전문가로서의 명성 때문에 당장 여러 가지 제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후 관계관들과 여러 번의 토의를 거친 후 나는 부토 총리의 지시로 기술연구실험실(ERL·Engineering Research Laboratories, 이하 실험실)이라는 이름의 독립 조직에서 우라늄 농축에 의한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책임자로 임명됐다.
 
  그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한 협의회도 구성됐다. 부토 총리의 지시로 굴람 이샤크 칸(1988~1993년 파키스탄 대통령) 재무장관, 아프타브 구람 나비 카지 국립은행 총재, 아가 샤히 외교부 차관 등 3명의 고위 관료들이 이 협의회에 참여했다. 협의회와 함께, 재무부에서 파견되어 우리 실험실의 재무·행정 업무를 맡은 임티아즈 아메드 바티 국장을 비롯한 경험 많은 공무원들이 핵개발 프로그램의 든든한 기초를 제공했다. 그들의 전폭적 지원으로 우리는 바느질하는 바늘 하나 만들지 못하는 개발도상국에서 본격적으로 핵개발에 착수한 지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핵무기를 만들어 내는 기적을 이루어 냈다.
 
 
  카후타에 핵 연구시설 건립
 
  실험실의 책임자가 된 후 즉시 나는 실험실 건물과 설비들을 배치할 적당한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장소는 정부와 군의 원활한 지원을 받기 위해 수도 이슬라마바드로부터 반경 50km 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슬라마바드에서 남쪽으로 25km에 위치한 라왈핀디시에서 동쪽으로 45km 정도 떨어진 카후타를 선택했다. 카후타는 외부에 훤히 트인 곳이 아니어서 공중으로부터의 폭격에 취약하지 않은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카후타는 연방정부, 육군본부(GHQ)와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으로부터 멀지 않고 외국인들의 통행이 적은 곳이어서 매우 적합한 장소였다.
 
  한 주 후쯤 부토 총리는 회의를 요청했고 내게 진행상황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에게 카후타라는 지역을 선택했다고 보고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은 실험실 부지 선정에 대해 총리에게 권고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이때 부토 총리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총리나 재무장관이나 누구도 실험실에서 당장 해야 할 일의 기본도 모르지 않소? 칸 박사가 선택했으면 그 문제는 종료된 것입니다.”
 
  부토 총리가 이렇게 실험실 부지를 결정한 것은 파키스탄 핵 프로그램 성공의 기초가 됐다.
 
  실험실 부지 선정을 마무리한 후 우리는 1976년 10월 부지를 점유, 확보하는 절차를 거쳐서 철조망을 세웠다. 실험실 부지 건설 실무 책임자였던 자히드 준장은 활발하며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즉시 미국 코넬대학교 박사 학위를 가진 라호르의 건축설계사 이크발 와라를 컨설턴트로 고용했다. 내가 우리 건물들에 대해 필요한 조건들을 제공하면 와라는 설계를 했고 자히드 준장은 건설업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1977년 중반까지 주요 구조물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핵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1977년 5월 모하메드 지아 울 하크(1924~1988년, 1978년부터 1988년 8월 암살될 때까지 파키스탄 제6대 대통령으로 재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선포하고 부토 총리를 축출했다. 지아 울 하크 장군은 자히드 준장을 라르카나 시(파키스탄 남부 신드주 서북부에 위치) 계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보냈다.
 
  자히드 준장 자리를 아니스 알리 시에드 준장이 이어받았다. 그는 키가 작지만 목소리가 부드럽고 빈틈없는 신사였다. 그는 자히드 준장만큼 유능했고 신속하게 일했다. 마무드 대령과 아스람 대령, 사자월 대령(훗날 준장이 됨), 자바이드 대령, 사이드 베이그 소령(훗날 준장이 됨) 등은 완벽하고 유능한 팀이었고, 늘 계획한 일을 시간 내에 완수했다. 사자월과 사이드 베이그는 우리의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그들은 준장으로 진급한 후에도 그 일을 이어 나갔다. 자히드 장군에 이어 아니스 장군은 일주일에 두 번씩 직접 지프를 몰고 나를 카후타로 데려가서 진행상황을 보여주었다.
 
 
  무니르 PAEC 의장, “핵무기는 파키스탄에 나쁜 것”
 
압두스 살람 교수.
  우리 프로젝트가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후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부토 총리는 우리에게 아지즈 아메드 외교부 국무장관(장관과 차관 사이)을 만나서 우리가 어떤 일을 준비하고 있는지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그가 고압적인 관료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를 만나서 파키스탄이 핵보유국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유일한 선택인 우라늄 농축 기술의 중요성과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고 내가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나의 학위와 경험에 대해 물었다. 나는 카라치에서의 이학학사 학위를 받았고, 유명한 베를린기술대학교에서 2년간 공부했으며, 네덜란드 델프트과학기술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내 이름으로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 기술 분야에서 수석과학자로 4년간 일한 실무경험이 있는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그것이 전부냐?”고 물었다. 나는 “더 이상은 없다”고 되받아쳤다. 훗날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됐다.
 
  나와 우리 핵 프로그램을 망치려는 많은 음모들은 외국인들보다 파키스탄인들에 의해 더 많이 진행됐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사례 하나만 소개하겠다.
 
  매우 유능한 내 친구가 어떤 국방 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전직 교수였고 압두스 살람(1926~1996년, 파키스탄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주로 거주) 교수의 제자였던 그 기관의 책임자가 국방프로젝트에 실질적으로 아무런 경험이나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좌절하고 있었다. 나는 지아 장군에게서 그 친구를 우리 쪽으로 전출시키는 명령을 얻어 냈다. 그는 매우 귀중하고 유능한 인재였다.
 
  그 친구는 무니르 PAEC 의장이 부토 총리를 속이려고 했던 음모를 내게 알려주었다. 부토 총리가 무니르 PAEC 의장에게 핵폭발 장치 실험을 약속대로 1976년 12월까지 하라고 압박하자 무니르 의장은 이 문제를 살람 교수와 내 친구의 상사(上司)와 논의했었다고 한다. 그들은 약 2000톤의 폭발물과 X-선 기계에서 확보한 방사성 코발트를 작은 터널에서 폭파하기로 했다. 그런 뒤에 그들은 부토 총리에게 3~4개월 뒤에 폭발 실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운 좋게도 부토 총리는 선거를 공표해서 매우 바쁘게 됐다. 만일 그들의 음모가 성공했다면, 부토 총리는 우라늄 농축을 위한 원심분리 방법을 쓸모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파키스탄은 치명적 위협 속에 처하게 됐을 것이다.
 
  1977년 계엄령이 선포된 뒤, 지아 장군은 그의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사이에드 자민 낙비 장군을 핵 안보 분야 자문관으로 임명했다. 인도 알라하바드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를 한 낙비 장군은 밝은 머리색의 초록색 눈을 가진 유럽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의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의 사무실은 PAEC 본부에 있었다. 그는 몇 주 만에 무니르 의장이 핵폭탄을 만드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무니르 의장이 핵무기는 파키스탄에 나쁜 것이라고 나를 여러 번 설득하려고 했다”고 말해 주었다.
 
 
  핵개발 정보, CIA로 누출
 
지아 울 하크 전 파키스탄 대통령.
  지아 울 하크 장군은 “무니르 의장이 CIA 요원으로 의심되니 경계하라”고 나에게 말해 주었다. 나는 무니르 의장과 중요하거나 기밀인 문제들은 상의하지 않았다. 무니르 의장은 살람 교수의 친구였고, 많은 PAEC 과학자들은 무니르 의장의 추종자들이었고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이었다. 살람 교수는 파키스탄에 올 때마다 무니르 의장의 공식 손님이었고 큰 모임들이 열리는 PAEC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렀다. 아래 소개하는 사건은 사히브자다 야쿠브 외교부 장관과 니아즈 나이크 외교부 차관이 자히드 마리크에게 해 준 이야기로, 마리크의 저서 《압둘 카디르 칸과 이슬람 폭탄(1992)》에 실린 이야기다.
 
  〈사히브자다 야쿠브 외교장관의 말을 주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과 워싱턴 D.C에서 상호 국익에 도움이 되는 문제들을 논의하고 있었다. 슐츠 장관은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 핵 프로그램에 관한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만약 파키스탄이 핵 프로그램을 중지하지 않으면 파키스탄으로 가는 모든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협박했다. 나는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고 ‘우리의 프로그램은 평화적 목적’이라고 말했다. 그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CIA 고위관리는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 상세를 파악하고 있다’면서 ‘CIA의 정보 능력을 모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파키스탄 핵장치의 실물모형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나에게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담당자는 테이블을 덮고 있던 천을 치우고, 내게 플랜트의 디자인을 보여줬다. 그는 그것이 카후타 플랜트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 테이블로 가서 공처럼 생긴 것을 감싸고 있던 것을 벗겨내고 ‘이것이 파키스탄 핵무기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나는 모르는 척했다. 나는 그들에게 ‘나는 기술자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니어서 이것에 대해 말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슐츠 국무장관은 자기를 속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방을 나와서 슐츠 장관의 사무실로 걸어갈 때, 우리가 막 나온 방으로 들어가는 무니르 PAEC 의장의 친구 살람 교수를 보았다. 나는 즉시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했다. 살람 교수는 무니르 의장에게서 모든 정보를 얻어 왔고 이것을 미국인들에게 넘겨줬다.”〉
 
 
  ‘스파이 바위’
 
  중요한 두 번째 사건은 카후타에서 시간이 좀 흐른 뒤에 일어났다. 우리는 기술연구실험실 주위에 대한 보안 조치를 했다. 하루는 양치기가 일상적인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작은 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그 바위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작은 도끼로 바위를 깨 보았다. 그 바위는 쉽게 깨졌다. 그 아래로 구리가 보였다. 그는 즉시 이 일을 실험실의 중대장에게 신고했다. 실험실 보안 담당 대령에게 보고가 올라갔다. 그 바위는 실험실로 옮겨졌고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다. 연락을 받고 나는 그들에게 다음 날 아침에 가서 검사할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그 바위에 폭발물이 들어 있지 않다고 말한 뒤에 해체하기 시작했다. 4인치 두께의 겉판은 나사로 고정되어 있었다. 나사를 제거하자 장시간 지속되는 배터리, 안테나, 중성자 계수기, 대기분석기, 송수신기 세트가 있었다. 이런 복잡한 장치는 대기 샘플을 분석해서 농축된 또는 자연 상태의 우라늄과 중성자(고/저온 실험을 통해) 정보를 저장하여 단일 펄스 형태로 전송할 수 있었다. 이것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만든 것이 틀림없었다. 외국 정보기관이 고용한 파키스탄 요원이 밤에 카후타 마을에 설치해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이 ‘발견’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지아 장군과 핵 프로그램 지원 책임자인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바위’ 실물을 보고 보안 책임자인 라만 대령과 그의 부하들을 높이 칭찬했다.
 
  며칠 뒤에 딘 힌턴 파키스탄 주재 미국대사가 지아 장군을 만나러 와서 우리의 핵 프로그램에 대해서 말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우리의 작업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중에 지아 장군은 “만약 미국인들이 정보 수집을 그 스파이 바위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젠 해체되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아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사는 충격을 받고 곧 돌아갔다.
 
  바로 몇 주 전 미국대사관 국방무관이 카후타에 있는 건물들의 항공사진을 찍었다. 미국 대사는 지아 장군을 방문해 그곳에 어떤 종류의 시설이 있느냐고 물었다. 지아 장군은 미국 대사가 가져온 사진들을 보지도 않았다. 지아 장군은 “미국이 외교적 프로토콜을 위반했고 만일 앞으로 어떤 항공기라도 카후타 지역을 다시 비행한다면 격추해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지아 장군은 나중에 방공포와 지대공 미사일이 있는 카후타의 공군기지에 그런 명령을 하달했다.
 
  핵무기를 얻으려는 우리의 노력에 대한 뉴스가 서방 세계에 서서히 알려졌다. 그들은 모두 우리의 노력을 파악하기 위한 첩보 활동에 착수했다. 영국은 우르두어(語·파키스탄의 공용어)를 할 수 있는 2명의 기자, 마크 툴리와 크리스 셔웰을 보냈다. 셔웰은 나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오토바이로 맴돌곤 했다. 어느 날 저녁 보안요원들이 염탐하는 그를 붙잡은 후 여성추행 혐의로 신고했다. 며칠 후 두 기자 모두 추방됐다.
 
 
  프랑스 대사의 봉변
 
  잦은 정전(停電) 때문에, 파키스탄은 인버터(정전대비용 보조전원인 대형 UPS(uninterrupted power supply)가 필요했다. 이 인버터들은 정전으로 인해 원심분리기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30개의 인버터를 영국 에머슨전자회사(Emerson Electrics)에서 직물산업용으로 위장해 구매했다. 100개의 인버터를 사는 두 번째 주문은 독일 공급업자에게서 사는 것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에 런던에 있는 파키스탄 사람을 통해 구입했다. 당시는 인버터 수출에 대한 어떠한 규제도 없었다.
 
  몇몇 부품들(bellows·풀무)은 프랑스 회사가 만들었다. 인버터는 풀무를 만들기 위해 프랑스 회사로 보냈다. 프랑스 정부는 이 부품 공급을 금지했고 그것들을 압수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프랑스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되찾아오는 데 성공했다. 독일 본에 있는 우리 사무소는 강철 튜브를 다프 홀랜드(DAF Holland)사로부터 구입했다. 몇몇 기계들을 독일에서 구입했다.
 
  1979년 우리는 에머슨전자회사에서 30개의 고주파 인버터들을 구매했다. 인버터를 받은 후 부분적 변경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수정 사항이 포함된 100기를 더 주문했다. 이렇게 큰 주문이 들어오자 그 회사 근로자들은 경영진이 거부했던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그 문제가 우연히 영국 원자력 당국과 관련 있는 프랑크 알라운 의원에게 알려졌다. 인버터가 핵기술에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는 토니 벤 무역장관에게 편지를 썼다. 인버터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가 내려졌다.
 
  인버터 문제는 이슬라마바드에 있는 외교가의 관심을 끌었다. 각국 정보당국이 염탐하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폴 러 구리에렉 파키스탄 주재 프랑스 대사와 장 폴로 일등서기관은 이 문제에 대해 지나친 열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이슬라마바드 번호판을 단 개인차량을 가지고 카후타로 갔다. 카후타 직전에 있는 관광지 팔라왈라 퀴라(15세기 건설) 요새로 좌회전하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요새로 가지 않고 카후타로 향하다가 몇 백 야드를 더 간 뒤 보안 요원들에게 제지당했다. 보안요원들은 그들을 구타했다. 며칠 후 프랑스 측은 대통령에게 항의하러 갔다. 그들은 실제로 요새를 방문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그들에게 “왜 (대사관의 외교관 차량이 아니라) 민간차량을 타고 갔느냐?”고 물었다. 그 이후 어떤 외국인도 그곳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1979년 11월~1981년 1월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기습, 점거했다. 그들은 파쇄된 서류더미에서 장 폴로 일등서기관이 미국 CIA 협조자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그가 보낸 한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거대한 프로젝트가 카후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기밀사항이다. 파키스탄이 전통적으로 느릿느릿하게 작업을 진행하는 것과는 달리 그 속도가 빠르고 매일 매일 성과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마 카후타 주위의 산에서 쌍안경으로 카후타를 염탐했을 것이다.
 
 
  PAEC의 음모
 
원자력의 원리에 대해 강연하는 칸 박사. 그는 우라늄 농축 전문가였다.
  우리 실험실에서 나와 일하는 두 명의 PAEC 파견 선임 과학자들이 나를 제거하기 위하여 진행한 음모를 밝히고자 한다.
 
  1978년 4월 4일 우리가 우라늄을 적정한 농도로 농축하는 데 성공했을 때 나는 즉시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에게 “이것이 작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는 중요한 단계”라고 하면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문서로 보고했다.
 
  PAEC 관계자들은 이 사실을 무니르 PAEC 의장에게 알렸다. 그들은 나를 제거하고 그 프로젝트를 가로채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동료의 도움으로 페샤와르에 있던 살림 초드리 공군 준장에게 접근했다. 그는 지아 장군 부인의 자매와 결혼했다. 초드리 장군은 나에 대한 그들의 비판을 경청한 후 “파키스탄 정보부의 확인을 받아서 적절한 행동을 취하겠다”고 말했다.
 
  며칠 후 초드리 장군이 낙비 장군과 함께 나를 방문했다. 우리는 정기적 방문이라고 생각했다. 인사말 이후에 그는 내 동료들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고 각자의 업무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물었다.
 
  “칸 박사, 당신은 당신의 동료들을 얼마나 잘 아십니까? 그리고 그들이 신뢰할 만한가요?”
 
  나는 즉시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내가 인도 보팔 출신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나는 파키스탄에 15년 만에 돌아왔어요. 나는 개인적인 친구이자 유능한 엔지니어인 바드룰 이스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사람도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합니다. 나는 모든 내 동료들을 믿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칸 박사, 당신은 단순하군요. 두 명의 당신 선임 과학자들이 며칠 전에 나를 찾아와서 당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갔어요. 당신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 당신은 파키스탄에 이해관계가 없다, 외국인 부인을 두었고, 많은 외국인 친구들을 가지고 있으며, 훗날 갑자기 사라져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것이다 등등의 말을 했습니다.”
 
  나는 즉시 그들이 무니르 PAEC 의장과 매우 가까운 친구들로 그와 자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한 지아 장군은 “저놈들이 이스라엘과 인도 놈들이 해내지 못한 짓을 하려 하고 있다”면서 “정보부장에게 말해서 저 음모자들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감옥에 가두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지아 장군에게 “그들의 음모는 이미 탄로났고, 나의 다른 동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 같으니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들이 PAEC에 속해 있으므로 PAEC로 돌려보내자고 말했다. 지아 장군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나는 내 수석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어떤 대령은 “실제 그들에게 가담했으나 나중에 그만두었다”면서 잘못을 시인하는 글을 써서 사과했다. 나는 아니스 준장에게 그를 은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그들이 나를 음해하는 일에 성공했었다면, 파키스탄은 핵보유국이 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 지식과 실질적 경험과 유럽 주요 기업가들과의 접촉이 우리 성공의 열쇠였다.
 
 
  7년 만에 핵폭탄 개발
 
  전체 플랜트가 효과적으로 운영되면서 비로소 지아 장군과 핵 프로그램 지원 책임자인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의 얼굴에 미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우리의 진행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미팅을 가졌다. 내 동료들이 일하면서 보여준 정신력과 투지는 파키스탄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투지와 같은 것이었다.
 
  1981년에 우리는 수년간 평균 6만5000rpm으로 작동하던 많은 기계들이 피해를 받는 심각한 지진을 겪었다. 지아 장군과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과 내 동료들은 많이 동요했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이 기계들을 제작했기 때문에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아타 박사와 나는 설계를 변경해 더 안정적으로 가동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었다. 몇 달 뒤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속력으로 기계들을 가동할 수 있게 됐다.
 
  지아 장군은 11년간 통치를 하는 동안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을 위해 활발하고 강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4년 12월 10일 나는 지아 장군에게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가지게 됐고, 명령을 내리면 10일 이내에 핵 폭발실험을 실시할 수 있다”고 문서로 보고했다.
 
  핵무기 개발은 인도가 파키스탄을 앞섰지만 이동식 발사대에서 핵무기를 운반하는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능력은 파키스탄이 인도를 앞질렀다. 지아 장군은 1986년 직접 델리의 라지브 간디 총리에게 “만일 인도가 어떠한 실수라도 하면 파키스탄은 그에 대해 보복할 능력이 있다”고 통보했다. 파키스탄이 핵무기와 이를 운반할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두 국가 간의 대규모 전쟁은 과거사가 됐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모두 핵전쟁의 비용과 피해를 감당할 수 없게 됐음을 깨달았다.
 
  1998년 4월 우리는 가우리 미사일 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후타에서 남동쪽으로 105km 떨어진 젤름 대신에 서쪽으로 25km 떨어진 틸라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라고 지시가 변경됐다. 장소를 바꿀 시간은 이틀밖에 없었다. 거대한 미사일, 연료, 그밖의 필요한 장비들을 젤름에서 틸라로 옮겨야 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고, 급회전이 많았으며, 낮은 전신주 배선 등도 장애가 됐다. 그래도 사자월 준장 덕분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마지막 순간에 미사일 발사 장소를 변경하라는 결정이 내려진 것은 미사일이 육군본부가 있는 라왈핀디를 지나 날아가다가 만약 작은 사고라도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육군본부에서 연락관으로 파견 나온 장군은 대부분의 미사일 발사 실패가 발사 직후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미사일은 발사 후 수 초 안에 360km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탄두를 분리시킨 후에 동체는 몇 백km 되는 곳에 떨어진다. 특정한 목표물로 사전에 프로그래밍 된 탄두는 매우 빠른 속도로 탄도비행을 한다.
 
  4월 6일, 나는 20명의 동료들과 함께 틸라로 갔다. 우리 미사일의 발사시각은 오전 7시 30분이었다. 7시 22분, 나는 육군 장교로부터 사마르 부바라크만드 박사의 지휘 아래 신드주 카라치 인근 손 미아니에서 발사한 미사일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말을 들었다. 미사일은 그냥 굴러 떨어져서 화염에 휩싸였다. 사상자가 있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몹시 화가 났다. 발사 타이밍으로 볼 때 부바라크만드 박사 측은 우리 실험실이 펀자브주 바하왈풀 인근 칸풀시에서 개발했던 M-11의 모형을 먼저 발사하여 우리의 성취를 가로채려고 한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군에 그 공장을 인도한 뒤에 부바라크만드 박사에게로 그 미사일의 설계도가 넘어갔다.
 
 
  장거리 미사일 발사 성공
 
파키스탄이 1998년 5월 핵실험을 한 발루치스탄주 차기의 라스코산은 이후 파키스탄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왼쪽에서 5번째가 칸 박사.
  나는 즉각 우리 미사일을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미사일은 7시 23분에 발사됐다. 약 9분 뒤 탄두가 1300km 떨어진 발루치스탄주 사막에 있는 표적에 명중했다. 육군 조사관은 명중사실을 확인하고 보고서를 건네주었다. 헬리콥터 한 대가 그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 현장에 있었다. 이 미사일 발사 성공을 기록한 사진들이 많이 있다.
 
  당시 틸라는 페르베즈 무샤라프(1943~ , 1999년 10월 쿠데타 이후 2001~2008년 대통령 재임) 장군이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나는 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는 파키스탄의 첫 번째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역사적 현장에 그를 초대했다. 그는 “제한기르 카라마트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미사일 발사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육군참모총장에게는 내가 말하겠다”고 했다. 무샤라프 장군은 미사일 발사 한 시간 전에 헬리콥터로 도착했다. 우리는 발사장에서 300m 떨어진 건물의 발코니에 앉았다. 무샤라프 장군은 나와 우리 프로그램의 의료서비스 책임자인 리아즈 초환 장군(전 육군의무감) 사이에 앉았다.
 
  미사일 발사 성공 직후, 나는 즉시 미안 나와즈 샤리프(1949년~ , 1990~1993, 1997~1999, 2013~2017년 3차에 걸쳐 총리 역임. 대법원의 부패 선고로 파면) 총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샤리프 총리는 매우 기뻐하며 “10시쯤 비디오 필름을 가지고 총리 관저로 오라”고 했다. 나는 서둘러 이슬라마바드로 돌아와서 총리와 함께 비디오를 보고 난 뒤, 오후 1시 뉴스에 이에 대한 단신(短信)을 내보내기로 했다.
 
  오전 11시, 샤리프 총리는 국립국방대학(지금은 종합대학이 됨)에서 공무원들과 참석자들에게 연설하는 가운데 이 소식을 전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1986년 지아 장군의 성명으로 인도인들은 파키스탄이 핵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이동식 발사대에서 핵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파키스탄은 인도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게 됐다.
 
  부토 총리의 선견지명과 핵개발 착수 지시, 서구의 압력에 대한 지아 장군의 끈기 있는 저항, 굴람 이샤크 칸 재무장관의 끝없는 애국심과 17년간의 프로젝트 지원, 그리고 유능한 동료들과 그들을 지지해 준 가족들로 구성된 우리 팀이 파키스탄이 핵능력을 보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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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석원    (2018-07-06)     수정   삭제 찬성 : 9   반대 : 7
칸 박사의 네트워크는 전 파키스탄 대사가 파키스탄의 핵개발 역사를 쓴 것 외에도 좋지못한 커넥션으로 엮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북한에 러시아, 파키스탄 핵 물리과학자들이 들어가서 북한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미 90년대 후반에 다 알려진 사실이고 미국이 이에 대해 계속적으로 추적해 왔습니다. 칸 박사와 핵심기술을 갖고 있는 그외의 4명의 과학자들은 지구상에서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가지고 있는 조건들을 실제로 행하였던 점에서 IAEA에서도 지목한 인물들이고 특히 미국 본토의 핵공격 테러를 실행하기 위해서 칸박사와 그 동료들이 알 카에다를 만났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파키스탄은 미국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다른 방법으로 미국을 도왔지만 실상 이슬람교 체제내애서 서로간의 금이가지 않는 선에서 도운 것이지 이들의 속내는 사실 믿을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북한의 핵 실험을 도와주고 그 댓가로 중거리 미사일인 가우리 미사일은 북한의 미사일 체계를 들여다 놓은 서로간의 상생관계이기 때문입니다.
  zxc5505    (2018-07-06)     수정   삭제 찬성 : 6   반대 : 2
한국도 미국의 양해를 구해서 독자적으로 핵개발해야한다고? 모르시는 말씀!주사파정권은 북핵이 우리거라 여기는데 뭔,양해! 통일된 조선의 초대대통령은 김정은일수도 있다는 불안한 현실! 이런 시나리오가 없다면 임기 몇개월 남은 박대통령은 탄핵도 안됐다고본다. 또한 파키스탄과는 상황이 다르다고본다.
  hoon5102    (2018-07-06)     수정   삭제 찬성 : 34   반대 : 0
위 글을 두 눈으로 똑바로 읽어 봐. 이제 대한민국이 영원하려면 핵폭탄을 만들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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