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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증언

맥깨비 연대장, 李範英 대령의 6·25와 베트남전쟁 <上>

“16세의 軍籍 없는 용사로 참전… 휴전 발표 나자 離散과 生存의 기쁨 교차”

정리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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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범영(李範英) 예비역 육군대령(갑종 27기)은 평안남도 양정고급중학교 2학년 재학 중인 1950년 10월, 16세의 나이로 군번도 없이 6·25전쟁에 뛰어들었다. 동부전선과 중부전선 금성 지구 전투에서 중공군과 혈전을 벌였고, 휴전 당일인 1953년 7월 27일 밤 10시까지 한 치의 땅을 더 확보하기 위해 싸웠다.
그는 키가 작아 한국군 입대 신체검사에서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야 할 정도였지만, 배구·야구·테니스·사격 등 운동은 만능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등 육사 11기생들과 경쟁하며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베트남전에서는 15개월 동안 십자성부대와 한국군 최강의 맹호부대 대대장으로 참전했고, 인천상륙작전 참전의 전통을 가진 17연대장을 지냈다.
모두 그의 장군 진급을 ‘떼어놓은 당상’이라고 여겼으나, 그는 1977년 4월 윤성민 당시 인사참모부장에게 전역서를 제출했다. 미국에 이민한 그는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자녀들을 교육했고, 최근에는 미국 사회봉사단체인 ‘소망소사이어티’에 시신기증을 약정했다고 한다.
이범영 대령은 혈혈단신으로 월남해 살아온 내용을 정리해 자식들에게 남겨주려고 3년여에 걸쳐 꼼꼼히 기록했다고 한다. 그는 이봉월 여사와의 사이에 이태일(텍사스주립대 종신교수), 이성희(패션디자이너) 등 1남1녀를 두고 있다. 《월간조선》은 이재(理財)에 밝지 못해 ‘맥깨비(맹꽁이의 북한말)’로 불린 이범영 대령의 우직한 ‘인생 전투보고서’를 저자의 양해를 얻어 두 차례에 나눠 싣는다.

李範英
⊙ 80세. 평남 중화 출생.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 27기, 육군대학 수석졸업.
⊙ 제11사단 9연대 3대대 9중대 1소대장으로 6·25전쟁 중 금성지구 전투 참전.
    십자성부대 1군수지원단 부단장, 맹호부대 26연대 2대대장으로 베트남전 참전.
⊙ 육본 작전참모부 전쟁계획 장교, 3군단 정보·작전참모, 1군사령부 정보처 기획과장,
    2사단 17연대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인력처 과장 역임. 육군 대령 예편.
⊙ 서훈: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베트남 대통령 훈장 등 다수.
주월 맹호부대 26연대 2대대장 시절의 이범영 대령.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나는 전쟁이 시작됐다. 나는 1934년 2월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동곡리에서 아버지 이승록(李承祿) 장로와 어머니 윤복담(尹福談) 사이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정고급중학교(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9월이면 3학년으로 진급을 앞둔 여름방학이었다. 어수선한 전쟁 때라 별로 수업을 하지 못하고 무더운 여름을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교 3학년 학생 전원에 소집 명령이 내려졌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면 모두 인민군에 끌려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가지 않았다. 그날 학교에 간 동창생들은 학교 민청회의에서 인민군 입대 지원서를 쓰고 모두 인민군에 입대했다.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6일 전인 1950년 10월 12일, 나는 집에 난입한 내무서원들에게 “일기 내용이 불온하다”는 구실로 잡혀가 사흘간 영창살이를 하다 평안남도 용강의 인민군 동원부로 후송되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집에 돌아왔다.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분대원들이 건너편 중공군 진지를 관측하고 있다.
  1950년 10월 18일 평양시를 한국군 보병 제1사단과 유엔군이 함락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 4일 유엔군이 후퇴할 때까지 한 달 보름간은 자유를 만끽하며 지냈다. 동네 자위대원들은 인민군에게서 탈취한 아카보 소총으로 무장하고 삼삼오오 몰려다녔다.
 
  유엔군이 후퇴하자 아버지는 광복 직후 정치보위부에 잡혀갔던 경력도 있는 데다, 유엔군 진격 후 면장과 면 자위대장까지 지낸 터라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부득불 장남인 나만을 앞세우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모두 고향에 남겨둔 채 피란길을 떠났다.
 
  잠결에 나는 어머니와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아버지와 정처없는 피란길에 올랐다. 사랑하는 어머니·동생들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리는 북녘땅 12월의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새벽에 집을 떠나 어둠 속에서 명월이고개를 넘었다. 면 소재지인 요포리를 지나 고향에서 30리 거리인 황해도 겸이포시(現 송림시)에 당도했다.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연합군의 후퇴가 시작되자 북한 지역 주민들이 유엔군이 폭파한 평양 대동강철교를 필사적으로 건너 피란을 가고 있다.
  아침 8시쯤 됐는데 겸이포시 자위대가 남쪽으로 가는 피란민들을 제지했다. 그들은 “유엔군의 전황에 아무런 후퇴의 징조도 없는데 왜 피란을 가느냐”고 했다. 피란민들은 모두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이왕 피란 나온 김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겸이포제철소(現 황해제철소)가 있는 겸이포시를 구경하고 싶었다. 그곳에는 육촌형(이덕영)이 살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허락을 얻어 육촌형 집에 남았다.
 
  이튿날인 12월 5일 아침, 유엔군의 후퇴 소식을 알게 된 겸이포시 전체는 피란 물결로 술렁거렸다. 나는 너무 다급한 상황이라 육촌형과 조카 가족을 따라 피란길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됐다. 너무나 처량했다. 우리 일행이 사리원에 도착한 때는 12월 5일 저녁이었다. 무질서한 피란길에 한국군 제1사단 헌병들이 길을 막고 서서 “젊은 사람은 모두 국군에 입대해야 한다”고 했다. 나와 조카(이득도)는 형네 가족과 헤어져 국군으로 현지 입대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한편으로는 눈칫밥을 안 먹어도 되니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헌병들은 피란민 중에서 청년과 학생들을 모아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나는 제일 오른쪽 줄에 섰다. 날이 어두워졌고, 잠시 후 국군 장교가 하사관을 데리고 와서 운동장에 집합해 있는 사람들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특별하게 키가 작거나, 약해 보이는 사람은 제외하려는 것이었다. 내 키는 작은 축에 속했기 때문에 잘못하면 육촌형과도 헤어져 완전 고아 신세가 될 것 같았다.
 
1950년 10월 19일 대동강 다리에서 미 제1군단장 밀번 소장에게 평양 탈환작전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
  하사관이 내 앞을 지날 때 발뒤꿈치를 높이 쳐들었다. 다행히 통과돼 12월 5일 ‘군번 없는 용사’가 됐다. 잠시 후 맨 오른쪽 줄에 선 사람들을 모두 앞으로 나오게 했다. 나는 맨 오른쪽 줄 넷째 번에 서 있었는데 앞으로 나가 서다 보니 제2소대 1분대의 맨 앞에 서게 되었다.
 
  하사관이 “이제부터 제일 앞에 선 사람은 분대장”이라며 “각 분대장은 자기 분대원의 이름을 적어 내라”고 했다. 줄을 잘 선 덕분에 입대 30분 만에 분대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나의 최초 한국군 소속은 보병 제1사단 15연대 17중대 2소대 1분대다.
 
 
  배추밭에서 제식훈련
 
동해안 지역 소작봉 방어 전투 중 11사단 9연대 3대대 장교 일동.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사리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12월 6일 아침 학교 운동장에 집합했다. 우리는 사리원에서 약 30리 남쪽에 있는 삼강이란 곳까지 구보로 후퇴했다. 중대장은 출발 직전 “한 사람이라도 낙오하면 분대장은 총살”이라며 겁을 주었다. 나는 분대원들과 같이 남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피란 행렬을 뚫고 삼강을 지나 은파(銀波)란 소도시에 도착해 숙영(宿營)했다. 소대장 장모 중사는 우리 1분대와 같은 집에 숙영했다. 그날 저녁 우리에게 처음으로 군복이 지급됐다. 군복 상·하의와 야전 점퍼만을 받았는데 모두 신품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미군이 평양 시내에 쌓아두었던 보급품이었다. 미군이 후퇴할 때 소각하려는 것을 한국군 1사단에서 인수했다고 한다.
 
  소대장은 그중에서 가장 색깔이 좋은 나단(羅緞) 바지를 골랐다. 내게도 주었다. 소대장은 두 벌을 고르더니 입고 있는 옷은 버리고 남은 한 벌은 배낭에 넣었다. 저녁이 되자 중대 인사계 김모 중사가 중대원 전원을 중대본부가 숙소로 정한 집 앞길에 집합시켰다. 일석점호였다. 점호를 취한 후 ‘우리는 선열의 흔적을 따라 죽음으로써 민족과 국가를 지키자’를 시작으로 하는 ‘국군 3대 선서’를 인사계의 선창(先唱)에 따라 복창했다. 일석점호 후 다른 분대장들과 같이 중대장 안철원 중위 방으로 갔다. 안 중위는 “아이젠하워 장군이 곧 미국 대통령이 된다”고 말했다.
 
  은파에서 하룻밤을 자고 12월 7일 아침이 밝았다. 우리 분대가 숙영하는 집 뒤에는 배추를 심었던 넓은 밭이 있었다. 소대장 장 중사는 분대장 세 명을 집합시킨 후 제식훈련을 가르쳤다. 우리 모두는 훈련을 잘 소화했다. 이북에서는 고등학교마다 인민군 현역 배속 장교가 파견 나와 학생들에게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시켰기 때문이다.
 
  구령만 조금 다를 뿐. 예를 들면 북한에서 ‘좌로 돌아’는 남한에선 ‘좌향좌(左向左)’로, ‘우로 돌아’는 ‘우향우(右向右)’ 하는 식이었으나, 동작은 똑같았다. 우리는 별로 틀리지 않고 제식훈련을 마쳤다.
 
  넓은 배추밭에서 분대별로 제식훈련을 오전 내내 시켰다. 점심식사 후 소대장이 제식훈련 중인 나를 불렀다. 소대장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안마당에 놓여 있는 큰 돼지를 잡으라고 지시했다. 나는 평생 돼지를 잡아본 일이 없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가 분대원들에게 돼지를 잡을 것을 부탁했다.
 
  집 안마당에서 돼지의 앞다리와 뒷다리를 새끼줄로 묶었다. 한 사람이 도끼로 돼지 머리를 쳤다. 빗맞았는지 돼지가 놀라 새끼줄을 풀고 내가 서 있는 대문간 쪽으로 돌진해 왔다. 깜짝 놀란 나는 급히 돼지를 피했다. 다른 분대원들이 도망가는 돼지를 겨우 잡아 각을 뜨고 그날 저녁엔 돼지고기로 포식했다.
 
  1950년 12월 8일 저녁, 갑자기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1개 분대당 쌀 반 가마씩을 배정받았다. 우리 중대는 트럭을 타고 남쪽을 향해 야간 차량 행군을 했다. 자정이 지나 38선을 넘어 경기도 파주까지 내려왔다. 많은 피란민이 걸어서 고생하며 넘어온 38선을 군에 입대한 덕분에 차를 타고 쉽게 넘어올 수 있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우리 분대가 먹을 쌀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실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경험 없는 분대장인 나의 실수였다. 경기도 파주에 도착한 후 차에서 쌀가마니를 잘 챙겨 내리도록 지시 감독해야 했는데, 내가 아무런 지시를 안 했기에 생긴 일이었다. 사역병 두 명을 차출해서 동네 집집마다 다니면서 쌀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결코 쉽지 않았다. 그때까지 우리는 군번도 받지 못한 이른바 무적 군인, 즉 군적(軍籍)에 없는 ‘군번 없는 용사’였다. 우리는 군복만 입었을 뿐 구걸해야 먹을 수 있는 ‘거지 부대’나 다름없었다.
 
 
  中共軍의 포위망 속으로
 
돌격 직전 날라리를 불며 진격을 독려하는 중공군. 피리와 나팔은 국군에게 포위됐다는 신호처럼 들려 공포를 주었다.
  1950년 12월 9일 파주에 도착한 후 부대를 재편성했다. 이북에서 피란 나오던 중 현지 입대한 우리는 17중대에서 해체돼 1사단 15연대 보충대대 2중대로 재편성돼 그때부터 정식 훈련을 받았다.
 
  분대장이던 나는 2중대 1소대 1분대 소총병으로 강등됐다. 우리 분대장은 경기도 고랑포(高浪浦) 출신 최대섭 하사(지금의 상등병)가 맡았다. 그때까지 우리는 소총이 없었다. 군복만 입은 군인이었다. 재편성 후부터는 아침에 연대본부에 가서 일조점호를 취하고 M1 소총을 받았다.
 
  소총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대원 중 절반은 소총을 받고, 나머지 절반은 소총 없이 훈련하는 실정이었다. 나이 들고 약삭빠른 분대원들은 무거운 M1 소총을 받는 것을 기피했다. 나이 어리고 순진한 나와 이진호는 매일 아침 소총을 받았다. 우리는 훈련이 끝날 때까지 무거운 소총을 계속 들고 다녀야 했고, 훈련이 끝나면 총을 반납하기 전에 소총을 수입(청소)해야 하는 부담 까지 져야 했다.
 
  하루는 주간 훈련을 마치고 같은 분대의 이진호와 같이 M1 소총을 반납하기 위해 무기 수입을 했다. 그러다 실수로 M1 소총의 가스활대를 돌 위에 떨어뜨렸다. 깜짝 놀라 집어 보니 가스활대가 휘어져 있었다. 가스활대를 돌 위에 놓고 돌로 두들겨서 펴기로 했다. 그러나 강철로 된 가스활대가 펴질 리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M1 소총의 가스활대는 탄알을 재장전하기 위해 휘어진 형태가 정상이었다.
 
  M1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우리 부대는 임진강변에 위치한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방향으로 행군했다. 어둠을 뚫고 전선을 향해 행군하는 도중 도로 오른쪽 과수원 사이에서 아군 포병대의 105mm 야포들이 적 진지를 향해 포사격을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전선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작은 고갯길을 넘어 우마차(牛馬車)가 다닐 만한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그때 전방 전투 지역에서 부상한 병사들이 걸어서 남하하는 것이 보였다. 일부 중상을 당한 병사들은 화물 트럭에 실려 후송되고 있었다. 우리는 생사가 교차하는 전선의 분위기를 실감했다. 병사들은 모두 말없이 전방으로 전방으로 걸어갔다. 언제 적과 조우(遭遇)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므로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 2중대장은 지형 정찰에 나갔는데, 중대장이 채 복귀하기 전에 갑자기 부대가 출동했다. 그래서 전투 경험이 없는 소대장이 대신 중대를 지휘했다. 소대장은 우리가 휴식할 때 경계병을 배치하는 조치조차 취하지 않았다. 소대장마저 사병들과 같이 어울려 쉬고 있는 형편이었다.
 
  약 10분 정도 지났을까, 누군가 갑자기 “포위됐다”고 소리를 질렀다.
 
  휴식하던 우리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도로를 향해 무질서하게 뛰어 내려갔다. 행군해 오던 길을 따라 남쪽으로 후퇴하기 위해서였다. 이 순간에도 소대장은 아무런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지 않아 우리는 통제 없는 오합지졸(烏合之卒) 상태가 됐다.
 
 
  부상당한 분대장 부축해 포위망 탈출
 
1951년 3월 횡성 지구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 병사가 중공군 병사들을 생포하고 있다.
  도로를 향해 먼저 뛰어 내려가던 병사들이 도로 바로 위에서 갑자기 멈췄다. 뒤따르던 나도 그 자리에 급정거했다. 우리가 후퇴하려는 그 도로를 따라 중공군(中共軍) 1개 대대가 행군 대형을 이루고 남하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들킬까 봐 숨도 못 쉬었다. 그런데 병사 하나가 “쿨럭, 쿨럭” 하고 기침을 해댔다. 우리는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중공군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듯 그대로 지나갔다.
 
  우리는 중공군이 다 통과한 후에야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먼저 뛰어 내려간 병사들 중 일부는 중공군 대열 속에 섞이고 말았다. 그들 중에는 중공군과 같이 행군하다 기회를 봐 탈출한 이도 있었다. 계속된 전투 그리고 혹독한 추위와 강행군에 지친 중공군 병사들은 옆에 누가 오거나 말거나 관심없이 졸면서 행군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쟁터에선 정상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그때 우리가 조금 전에 지나온 후방 고지의 여기저기에서 중공군의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그 피리 소리는 우리가 완전히 포위됐음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춥고 고요한 밤중에 산 속에서 들려오는 그 피리 소리가 어찌나 처량하고 슬프게 들렸는지 모른다.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新兵)들인 우리는 그 피리 소리를 듣고 적의 포위망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 심정이 돼 전투 의지와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오직 고향에 계신 어머님과 집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리 소대장 또한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한 채 멍하니 있기만 했다. 그러니 전투 경험이 없는 우리는 더욱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장교가 된 후 중공군의 전술을 알게 되었다. 중공군은 대규모 공격작전을 개시하기 전 소규모 침투 부대를 적군의 후방으로 침투시켜 주력부대의 공격 시기에 맞춰 적군의 후방에서 일제히 피리를 불게 해 적군에 혼란을 줘 주력부대의 공격을 간접 지원한다. 따라서 중공군의 피리 부대는 대규모 병력이 아니다. 분대 단위 이하의 소규모 침투 부대이다. 구슬픈 피리 소리로 중공군에 대항해 싸워야 할 아군의 전의와 사기를 떨어뜨리고 향수에 젖게 해 맥이 빠지게 한다.
 
  피리 소리를 듣고 포위된 것으로 오판한 아군 병사들은 적과 싸우기보다는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생각만을 하게 된다. 이것이 대부대(大部隊)의 공격과 병행하는 중공군의 침투 전술이다.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고도의 심리 전술인 것이다.
 
  우리 중대는 전열을 가다듬고 방금 중공군이 지나간 반대 방향 전선의 서남방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1951년 1월 1일의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큰길에 도착해 그곳에서 밤새도록 포위망을 뚫고 나오느라 지친 몸을 쉬었다.
 
  그때 1km쯤 떨어진 남쪽 방향 고개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곁에 있는 이진호도 말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소대장에게 보고했으나 소대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국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류탄을 고지 아래로 던지고 있는 중공군 병사.
  잠시 후 남쪽을 향해 중공군의 포위망을 탈출하기 위한 행군을 다시 시작했다. 한참 가다 조금 전에 우리가 사람 소리를 들었던 그곳, 큰 나무가 있는 낮은 언덕의 성황당 고갯마루에 다다랐다. 성황당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100m쯤 내려갔을 때 뒤따르던 본대에서 “10분간 휴식”이란 전달이 왔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도로변에 앉아 쉬었다. 본대는 성황당 고갯마루에서 쉬었다. 바로 그때 성황당 고개와 연결되는 능선 위에서 중공군의 따발총 집중사격이 시작됐다. 조금 전 우리가 들었던 소리는 중공군의 경계초소에 배치돼 있던 중공군 보초들의 말소리였던 것이다.
 
  성황당 고갯길에 배치된 중공군의 보초가 후퇴하는 우리 부대를 보고 소대본부에 연락해서 우리 부대가 지나갈 때를 기다려 집중사격을 가한 것이다. 중공군의 사격은 성황당 고개에 집결해 휴식 중이던 우리 부대의 본대에 집중되었다.
 
  우리 분대는 다행히 본대보다 앞에 있어 비교적 안전하게 중공군의 포위망을 탈출할 수 있었다. 탈출 중 중공군의 사격에 전사하거나 부상한 병사들이 속출했다.
 
  우리가 200m 정도 숨가쁘게 달려갔을 때였다. 우리 분대장 최대섭 하사가 적의 총탄을 맞고 오른쪽 장딴지에 관통상을 입었다. 피가 군복 밖으로 2~3cm 정도 쭉쭉 뿜어 나왔다. 분대장은 전투 경험이 많은 고참병이었다.
 
  분대장은 총탄이 빗발치는 와중에서도 즉시 M1 탄띠로 넓적다리를 동여맸다. 나와 이진호는 응급처치법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총탄 세례가 퍼붓는 와중에 분대장의 응급조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분대장 최대섭 하사는 임시로 지혈한 다음, 적의 사거리에서 벗어나려고 뛰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그마한 언덕을 돌아 따발총의 사각지대에 도착했다. 분대장은 더 이상 걸어갈 수 없어 눈밭에 누워버렸다. 다른 분대원들은 분대장을 못 본 체 비켜서 도망갔다. 가장 어리고 순진한 나와 키 크고 잘생겨 분대장에게 ‘처남’ 소리를 들었던 이진호는 분대장을 적진 속에 버리고 갈 수 없었다.
 
  둘이서 분대장을 부축하고 뛰었다. 부상병을 부축하고 도망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걸음은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다. 중공군이 곧 따라와 우리의 뒷덜미를 잡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떨리는 발걸음으로 정신없이 뛰어 겨우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 우리 중대는 대대본부가 있는 곳까지 후퇴했다. 그곳에서 분대장 최대섭 하사는 환자 후송 차량에 실려 후방 야전병원으로 후송돼 갔다.
 
  적성 지역에서 철수한 후 우리 부대는 서울 영등포 일대에 재배치됐다. 한강을 끼고 적의 전진을 막기 위한 한강 방어 전투에 투입된 것이다. 우리 부대는 상부의 후퇴 명령에 따라 다시 경기도 안성으로 퇴각했다.
 
 
 
동부전선 간성 지구 전투

 
  1951년 3월 초순 무렵 우리 11사단은 지리산 토벌 작전 임무를 8사단에 인계하고 동부전선에 투입되기 위해 열차를 타고 남원에서 대구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완전군장을 재보급 받았다. 우리는 대구에서 포항으로 다시 이동했다.
 
  우리 전차공격대대는 미 해군 병력 수송선(LST)에 실려 포항을 떠나 강원도 동해안의 주문진(注文津)에 도착했다. 우리 부대는 양양과 속초를 지나 천진리(天津里)란 작은 마을에 도착해 숙영했다. 이곳이 아군의 동해안 최전방 전초기지였다.
 
  전차공격대대란 6·25전쟁 이후 각 사단마다 새로 편성된 사단 직할 부대다. 6·25전쟁 초기 인민군 전차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전방 각 사단 내에 1개 대대씩 적의 전차를 공격하는 임무를 띠고 창설한 부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름만 전차공격대대였지 조직이나 장비는 일반 보병대대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 부대는 적 전차의 출현 징후가 없어서 전차 공격 임무에서 수색 정찰 임무로 전환됐다.
 
  1951년 3월 15일, 사리원에서 현지 입대한 지 3개월 10일, 즉 100일이 지난 때였다. 우리는 그때야 군번 없는 무명용사의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정식 군번 ‘0720105’를 받았다. 이제야 비로소 명실공히 대한민국 국군의 정규 이등병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등병이 된 지 보름 만인 그해 4월 1일 일등병으로 진급했다.
 
  일등병이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일등병 계급장을 가슴에 달고 싶었으나 전방이라 계급장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양담배 속에 있는 은박지를 꺼내 일등병 계급장(갈매기 하나)을 만들어 붙이고 자랑스럽게 다녔다. 군대 생활 중 대령까지 진급했지만, 일등병으로 진급했을 때가 가장 기뻤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전차공격대대는 계속 북진해 나갔다. 우리는 간성(지금의 고성) 지역에 이르러 적 진지를 발견했다. 우리 부대가 간성 남쪽 지역에 도착한 때는 저녁이었다. 비가 오고 있어 낮은 능선에 기대 판초 우의로 개인 천막을 쳤다. 땅을 파고 바닥에 풀을 베다 깔고 그 위에 다시 판초 우의를 깔았다. 비에 젖은 몸을 담요로 싸고 하룻밤을 지새운 후 아침에 적 진지를 공격했다.
 
  아침 8시 적 진지를 향해 공격을 개시한 우리 중대는 오전 10시 무렵 두 시간의 격전 끝에 큰 희생 없이 인민군이 점령한 간성 북방의 고지들을 탈환했다. 이로써 간성 북방의 고지들은 뒤따라오는 사단 주력부대가 전진하는 엄호 기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이때 우리 중대장은 남원 출신 생도 1기생(육사 10기생) 양창식(梁昶植) 중위(육군 준장 예편, 민자당 의원 역임)였다. 우리는 간성 지구 전투의 승리를 통해 인민군 최전방 전초진지를 격파하고 인민군 부대를 간성 북방으로 몰아냈다. 수색 정찰만 하던 우리가 처음으로 적 진지를 공격하는 정식 공격 전투를 경험했다. 이북 출신 중대원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오직 하루속히 이북으로 진격해 고향에 가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월비산 전투에서 패배를 맛보다
 
휴전 직후 금성 지구 전투를 끝내고 받은 금성화랑무공훈장증(위). 중대장 이춘식 대위가 이범영 대령의 훈격이 낮다고 상신해 1953년 8월 27일 9연대장 김영하 대령이 수여한 전투공로표창증(아래).
  간성 지구 전투를 끝낸 우리는 계속 북방으로 전진했다. 거진을 지나 고성 앞을 흐르는 남강 남쪽의 요충지인 월비산(月飛山·459m)에 도착했다. 그 사이 중대장이 교체돼 소대장이던 김모 중위가 지휘하게 된 우리 중대(실제는 40명의 소대 규모)는 월비산에 배치된 수도사단 병력과 부대 교대를 했다.
 
  우리는 약 40명의 소수 병력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월비산 방어 작전에 배치됐다. 며칠간은 적의 공격 징후가 없었다. 남강 너머 인민군의 진지만 바라보며 평온하게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러던 중 아침, 인민군 대대 규모 병력이 고성 앞 남강을 건너 월비산을 향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우리 진지를 향해 오던 인민군 대대는 일렬종대로 올라오다 대형을 바꾸어 횡대 전투 대형으로 전개하면서 계속 월비산을 향해 전진해 왔다. 그제야 귀순이 아니라 적의 공격인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전투 준비 명령이 내려졌다. 중대원 모두 교통호에 들어가 중대장의 사격 개시 명령만 기다렸다. 적과 교전이 벌어지기 직전의 불안하고 숨막히는 긴장된 순간이 흘렀다. 전투 중 가장 두렵고 떨리는 순간이 바로 그때다. 우리에겐 M1소총 외엔 다른 아무런 방어 수단도 없었다. 적 대대 병력이 우리가 있는 진지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긴장은 더해 갔다.
 
  적은 약 200m 지점까지 올라왔다. 드디어 사격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일제히 적을 향해 M1 소총을 발사했다. 신기하게도 두려움에 떨던 공포심은 M1 소총 한 발의 발사 순간에 모두 날아가 버렸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전투를 치렀다. 군인에게 선제 사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적은 계속 압박해 왔다. 전투가 벌어진 후 얼마 동안은 적의 공격을 잘 저지할 수 있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실탄과 수류탄이 모자라 더 이상 적의 압도적인 공격을 방어할 수 없었다. 수적인 열세에다 아무런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우리는 월비산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실탄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는 전투였다.
 
  월비산을 방어하지 못한 까닭은 지형지물의 중요성에 비해 병력을 비효율적으로 배치했기 때문이다. 또 공격해 오는 인민군을 발견했을 때 신속한 아군의 포사격 지원과 항공 지원 등을 요청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나는 오늘까지도 월비산을 휴전 이후 아군의 진지로 남겨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분하기 짝이 없다. 처음으로 패배의 쓴맛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성 시내와 남강 그리고 남강을 따라 연결되는 도로를 감시할 수 있는 군사 요충지인 월비산은 결국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消耗品 소위

 
1951년 12월 14일 강원 금성 지구에 모인 미군들이 새해 인사가 적힌 글자판을 들고 있다.
  1952년 2월에 대대본부에서 우리 중대로 갑종간부후보생을 모집하는 공문이 왔다. 나는 장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지원했다. 소대장과 중대본부에 보고하고 대대본부 인사과로 갔다. 대대 서무계는 내 이력서를 검토하더니 내 동의없이 내 생년을 1934년에서 1932년으로 수정했다.
 
  만 20세가 되어야 장교로 임관할 자격 요건이 되기 때문이었다. 내 나이를 두 살 늘려야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입교할 수 있다고 했다. 장교가 되기 위해 한번 바뀐 내 생일은 이남에서의 내 호적과 이민 서류 등 모든 기록에서 내 평생의 생일로 확정되고 말았다.
 
  1952년 2월 20일, 나와 3중대의 차재성 일병은 갑종간부후보생 시험을 치르기 위해 대구로 내려갔다. 응시자는 전원 대구로 와야 했다. 대구에 있는 육군 장교보충대에서 시험을 치렀다.
 
  1952년 3월 31일에 육군보병학교 갑종간부 제27기생으로 입교했다. 이때부터 24주간 장교 훈련을 받았다. 10주간의 교육 기간 중 보병 병과 후보생 중에서는 1등의 성적을 기록했다. 우리는 보병학교에서 나머지 14주의 훈련을 더 받았다. 고된 24주간의 간부후보생 교육이 끝날 무렵, 마지막 주에 1주간의 종합 야영 훈련을 받았다. 그 훈련을 끝으로 모든 교육과정은 끝났다. 그리고 토요일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됐다.
 
  임관 후에는 전원 전방의 소대장으로 보직 받는다. 임관 후 전방에 배속되기 전 1주간의 휴가를 주는데 신임 소위들은 모두 전투가 치열한 죽음의 전선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전선으로 나가기 전에 가족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전방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계급은 소대장으로서 제일 전방에서 싸워야 하는 육군 소위다. 그래서 소위는 소모 소위란 말이 나오기도 했다. 적의 총알은 ‘쏘위, 쏘위’ 소리를 내면서 소위만을 향해 날아온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그만큼 육군의 보병 소위는 희생자가 많았다.
 
  우리 갑종간부 27기는 총 259명이 보병, 공병, 병참 병과 소위로 임관했다. 그중 보병 장교는 1952년 9월 13일에 162명이 소위로 임관했다. 그때 내 나이는 만 18세 8개월이 지난 어린 나이였다. 나는 보병 장교 162명 중 전체 석차 10위로 졸업했다.
 
  전방에는 10개 보병 사단이 있었다. 그래서 1등부터 10등을 한 장교들은 각 사단에 배속되는 장교들을 인솔하도록 돼 있었다. 나는 11사단으로 배속되는 동기생들의 인솔 장교로 임명됐다. 강원도 동해안 간성에 주둔해 있는 11사단 사령부까지 13명의 장교를 인솔해 가야 했다.
 
  1952년 9월 13일 토요일 아침 9시에 보병학교 강당에서 졸업식이 있었다. 강당 밖으로 나와 계단에서 162명 전원이 졸업 기념사진을 찍었다. 졸업식이 끝난 후 우리는 전원 송정리역으로 향했다. 송정리역 구내로 들어가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도착한 열차는 객차가 아니라 화물열차였다.
 
  우리 중에는 며칠 후 혹은 일주일이나 한 달 이내에 전사자가 되어 꽃다운 청춘을 제대로 피워 보지도 못하고 전선의 어느 산마루나 골짜기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 장교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선에 투입되기 전 마지막으로 고향에 가서 부모, 형제, 가족을 만나보고 출전하도록 일주일간의 휴가를 준 것이다. 그런데 좌석도 없는 화물차에 우리는 짐짝처럼 던져졌다. 그것이 그 당시 한국군의 실정이었다.
 
  나는 서울을 향해 북상하는 화물열차에 몸을 실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때늦은 초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북한 땅 고향 어머니와 동생들을 생각하면서 쓰린 눈물을 흘렸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대구역에서 만난 중고등학교 동창생 이동선 상병을 통해 아버지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만나기 위해 광주보병학교에 면회 갔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1950년 12월 4일 피란 나오다 나와 헤어진 이후 내가 장교로 임관할 때까지 근 2년 동안 나를 찾아 헤매셨다고 한다.
 
  1952년 9월 15일 인천에 도착해 아버지를 만났다. 피란길에서 헤어진 지 근 2년 만이다. 그때의 기쁨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아버지와 함께 지낸 일주일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 아버지는 다 해진 내 군화를 보고 새것을 사 신기셨다. 또 장교들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자쓰노(雜囊)’라 부르는 가죽 가방도 사주셨다.
 
 
  철의 삼각지대, 金城 지구 전투
 
1953년 5월 금성 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응사자세를 취하고 있는 미 해병대원.
  11사단으로 보직 받은 동기생들은 모두 동해안 간성에 있는 11사단사령부로 갔다. 우리 대대는 얼마 후 동해안의 향로봉(香爐峰)을 지나 건봉산(乾鳳山), 소작봉 지역의 주저항선 방어 부대에 배치됐다. 주저항선 앞 전초진지에는 3대대 9중대가 배치됐다. 그런데 9중대 1소대장인 박희모(朴喜模) 소위(중장 예편, 6·25전쟁참전유공자회장)가 매복 작전 중 부상당했다. 나는 12중대에서 9중대 1소대장으로 전보됐다. 최전방 전초 중대의 제1소대장으로 본격적인 전투를 치르게 됐다.
 
  우리 11사단은 동부전선에서 중부전선으로 이동해 철의 삼각지대 중 하나인 금성(金城) 지구 방어 전투에 참전했다. 1953년 7월 13일 휴전을 앞둔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인해 우리 부대의 인접 왼편에 배치됐던 수도사단이 돌파당하면서 중공군의 공격 부대가 우리 대대와 연대의 후방까지 진격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최전방에서 전투 중인 2대대와 우리 3대대는 부득이 현 방어진지에서 후방의 제2 방어진지로 철수 명령을 받고 후퇴 작전을 실시했다.
 
  1953년 7월 13일 밤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15일간에 걸친 이른바 ‘7·13 전투’의 시작이었다. 7·13 전투는 곧 휴전협정이 체결되리라는 판단에 따른 중공군의 최후 공세 작전이었다.
 
  우리 대대의 전방에는 중공군 제67군 예하 199사단, 200사단, 204사단 등 6개 사단이 배치돼 있었다. 중공군은 아군의 금성 지구 돌출부의 좌우 양견부를 돌파해 공격해 왔다. 우리 11사단 9연대는 백인엽(白仁燁) 소장(6군단장 역임)이 지휘하는 6사단의 광정면의 일부를 담당하기 위해 6사단에 배속됐다. 우리 대대는 6사단 제7연대로부터 7월 13일 밤 방어진지를 완전히 인수했다.
 
  아침이 되자 중공군은 6시부터 9시 사이에 주저항선 3km 후방에 배치된 제3방어선의 1대대 진지에도 출현했다. 9시경엔 우리 3대대 진지 400m 후방에 있는 하고개까지 진출했다. 우리 3대대의 전방 보급소와 81mm 박격포 진지 및 대대 후방 CP가 중대 규모가 넘는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다.
 
  대대 후방 CP 요원들은 전방인 대대 OP로 역철수했다. 거기서 대대 주력부대와 합류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한 시간 후에는 연대 지역의 가장 후방인 죽대리에 있는 9연대 CP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았다. 연대의 지휘부가 포병 27연대 CP로 대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오전 10시 무렵, 중대장은 “중대본부가 있는 고지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철수 명령을 받은 3대대장 최규헌 중령은 선임 중대인 9중대장 이춘식 대위에게 적의 포위망 돌파를 명했다. 9중대장은 선임 1소대장인 내게 “대대가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대대의 최전방에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해 퇴로를 개척하라”고 했다.
 
  나는 1분대를 ‘척후 분대’로 하고 소대의 맨 앞에서 소대 병력을 지휘했다. 우리 소대는 대대의 맨 앞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철수했다. 철수 작전 중 우리 3대대장 최규헌 중령은 중공군의 사격에 부상당했다. 3대대장은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부대를 지휘하지도 못하고 야전병원으로 후송되고 말았다.
 
  우리 대대는 철수 작전 중 졸지에 지휘관이 없는 부대가 되어 선임자인 9중대장 이춘식 대위가 임시로 대대를 지휘했다. 우리 3대대는 9중대장의 지휘하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무사히 돌파했다. 후방으로 후퇴한 우리 대대는 사단의 병력 통제선이 설치된 말고개 북쪽에 도달했다.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개인 천막도 설치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판초 우의를 걸치고 비를 맞으며 앉은 채 하룻밤을 지냈다.
 
  1953년 7월 15일 아침이 됐다. 우리 중대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633고지로 올라갔다. 정상에 도달하자마자 부대를 배치할 시간도 없이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633고지의 임시 방어진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한 방어 작전에 돌입했다. 중공군은 최전방에 적기(赤旗)를 든 돌격병이 돌진, 돌격병이 적기를 꽂으면 그곳까지 인해전술로 전진하는 파상 공격을 퍼부었다.
 
  정오가 될 무렵, 후송 간 대대장의 후임이 633고지에 도착했다. 연대 작전주임으로 있던 이헌수 소령이 후임 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그 사이에 3대대의 다른 중대들도 모두 633고지에 집결했다. 중공군은 적기를 앞세우고 계속 인해전술로 공격해 왔다. 우리 대대는 총력을 다해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고지를 향해서 올라오는 중공군을 고지 위에서 저지하기는 쉬웠다. 만일 아침에 중공군보다 먼저 633고지를 선점하지 못했다면, 633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소대 연락병 배 일병의 죽음
 
  1953년 7월 15일 아침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공격을 오후까지 계속 방어했다. 오후 늦게 연대에서 좌우의 방어선을 연결하기 위한 공격 명령이 하달됐다. 우리의 좌측에 배치된 수도사단과 연결하는 633고지의 좌측 능선과 우리의 우측에서 전투 중인 11사단 13연대와 연결하는 우측 능선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좌측 능선은 11중대의 신안달 소위(중위 전역, 경북 고령에서 목회 중)가 공격하고 우측 능선은 내가 지휘하는 9중대 1소대가 공격했다.
 
  9중대장 이춘식 대위는 나에게 “우측 능선으로 공격해 올라오는 중공군을 역으로 공격해 격퇴하고 무명고지를 탈취하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1개 소대만으로 공격하기엔 중공군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중대의 2소대와 3소대를 우리 1소대에 배속시켜 달라고 건의했다. 3개 소대로 공격하는 것이 더욱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2, 3소대의 배속 건의를 받은 중대장 이춘식 대위는 우리 소대가 공격해 나갈 능선은 협소해 중대 병력이 전개할 공간이 없다고 했다. 먼저 내가 지휘하는 제1소대만으로 공격해 무명고지의 중공군을 물리치고 무명고지를 탈취하라고 했다. 우리 1소대가 무명고지를 점령하면 중대장이 남은 2, 3소대를 즉시 인솔해 우리와 합류할 것이라 했다. 나는 2, 3소대의 배속 지원을 포기하고 우리 1소대만으로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분대장들을 우리가 공격할 무명고지가 잘 보이는 교통호로 소집했다. 오후 7시를 기해 우측 능선의 무명고지를 공격한다는 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한국군의 공격작전은 아침에 개시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래야 아군의 항공 지원과 포병의 지원사격을 받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낮에 목표를 탈취해야만 밤이 되기 전에 방어진지를 구축할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고, 적의 역습에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공격 시각은 곧 밤이 찾아올 시각인 저녁이었다. 그런 늦은 저녁 시각에 공격하려면 진지를 한 시간 내에 점령해야만 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목표 점령 후 야간 방어 태세를 갖추기 전 적의 역습을 받을 가능성도 컸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왕 공격하려면 몇 분이라도 빨리 공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체하지 않고 분대장들에게 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1953년 7월 15일 저녁 7시가 되자 소대장의 공격 개시 신호에 따라 우리 소대는 일제히 공격 개시선인 교통호와 개인호에서 튀어나왔다. 우리 소대원은 전원 공격 목표인 무명고지를 향해 뛰었다. 적으로서는 방어 중이던 아군이 저녁 늦게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중공군은 우리 소대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지원사격도 적을 향해 쏟아졌다. 피아의 총탄이 난무하는 사이를 뚫고 우리 소대원은 용감하게 적 진지를 향해 돌진했다.
 
  소대원은 전원 목표를 향해 경사면을 내리뛰었다. 내 바로 앞에서 교통호를 따라 적을 소탕하며 전진하던 병사 두 명이 갑작스런 적의 수류탄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내 앞에서 전사했다. 적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우리의 기습 공격으로 갈팡질팡했다.
 
  무명고지를 탈취한 우리 소대는 먼저 임시 방어 배치를 했다. 적의 역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중대장에게 목표 점령 보고를 하고 2, 3소대의 신속한 증원을 요청하는 한편, 소대원에게는 각자 개인호를 파고 방어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소대 연락병 배 일병이 SCR 536 무전기로 목표 점령 보고를 위해 중대와 교신을 시도했으나 중대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교통호 안에서 교신하던 연락병은 좀 더 높은 곳에서 교신하기 위해 교통호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중대와의 교신을 시도하던 중 배 일병이 중공군의 저격을 받았다. 적의 실탄에 복부를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배 일병은 “소대장님” 하고 부르는 구원의 외마디를 남긴 채 그 자리에 쓰러져 곧 전사하고 말았다. 중대와 무전 교신이 제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배 일병이 전사한 후 겨우 중대와 무전 교신 연락이 됐다. 중대장 이춘식 대위에게서 중대의 2, 3소대를 나에게 배속시킨다는 무전 연락을 받았다. 죽음의 치열한 전투 상황 속에서도 전과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하루종일 대대 전체가 방어하는 동안 공격해 오던 중공군에게도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중공군 전사자의 무기와 버려진 무기들이 우리가 공격 전진하는 목표 고지 일대에 무수히 널려 있었다. 목표를 점령하면 이 모든 전리품이 우리 소대의 전과가 된다. 나는 2, 3소대가 오기 전에 적의 무기를 수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목표를 점령한 우리 소대원들에게 전과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소 충성은 저 멀리 있는 대통령이나 참모총장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지금 바로 내 직속상관에게 충성하는 것, 직속상관의 명령에 따르는 것, 이것이 충성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적 진지를 공격하고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발 아래 널려 있는 적의 무기를 볼 때 순간 굶은 사자처럼 훈장 욕심을 낸 것이다. 이처럼 위급한 전투 상황에서도 인간의 욕심과 공명심(功名心)은 순간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인 듯했다.
 
  동부전선에 배치됐을 때에는 적의 무기 1정만 탈취해도 큰 전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발밑에 수십 정의 무기가 널려 있으니 소대장으로서 전과에 대한 욕심이 없을 수 없었다. 나는 중대장에게 목표 점령 보고를 하는 한편, 전 소대원에게 무명고지 일대에 널려 있는 적의 무기를 수거하게 했다. 순식간에 40여 정이 넘는 중공군의 소총과 기관총 등을 수거했다.
 
  대대에 배속된 노무자들이 식사를 판초 우의에 싸서 가져왔다. 우리는 중공군의 시체가 널려 있는 사이에 앉아 아침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자는 말없이 누워 있고 산 자는 그 옆에서 다음 전투를 위해 육신(肉身)의 욕구를 채울 수밖에 없는 것이 최전방 전쟁터의 무정한 상황이다.
 
 
  휴전 당일 밤 10시까지 교전
 
미군 병사가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군사분계선(MDL)에서 북측을 경계하고 있다.
  1953년 7월 20일 오후, 552고지에서 철수한 우리 소대는 633고지로 집결했다. 이틀 후 논산훈련소에서 신병을 항공 수송으로 긴급 보충받았다. 그들은 정해진 훈련 기간도 마치지 못한 신병들이었다. 나는 보충받은 신병들로 소대를 재편성했다. 고참병은 조대율 일병과 또 한 명의 사병뿐이었다.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들을 이끌고 앞으로 전투를 수행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우리 소대는 633고지의 방어 임무를 받고 방어진지에 배치됐다. 633고지에는 이미 교통호와 개인호가 구축돼 있었다.
 
  소대를 방어진지에 배치한 나는 계속되는 적의 야간공격을 방어하기에 지친 상태였다. 그러나 633고지에서는 실탄 공급을 충분하게 받았다. 한심스럽게도 충원받은 신병 중에는 M1 소총의 실탄 클립을 장전하지 못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래서 소총에 장전한 8발의 사격이 끝나면 장전할 줄 아는 병사가 8발 클립을 다시 장전해 줘야 하는 한심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현상은 중부전선의 전황이 급박해지고 병력의 긴급 충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633고지에서 방어하던 중 드디어 오래 끌어오던 유엔군과 중공군 간의 휴전 협상이 결말을 맺었다. 1953년 7월 27일 밤 10시를 기하여 휴전이 성립된 것이다. 3년 1개월간의 피비린내나는 동족상잔의 전쟁이었다.
 
  우리가 휴전 소식을 접한 때는 7월 27일 저녁 7시경이었다. 그날 밤 10시 이후부터는 일체의 전투 행위를 금한다는 휴전협정 내용이 하달됐다. 이북의 고향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남겨두고 월남한 나에게는 기가 막힌 일이었다. 이제 휴전이 되면 언제 고향에 가서 그리운 가족을 만날 것인가 하는 한탄스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죽음의 전투에서 해방돼 살아남았다는 다행함과 안도감이 드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싸운 나였다. 그러나 휴전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남은 세 시간만 무사히 보내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개인호 안에서 밖으로 나오기가 정말 싫었다. 그저 시간만 빨리 갔으면 하는 생각만 가졌다.
 
  드디어 최후의 세 시간 동안 피아간 남은 실탄을 다 쏟아붓는 치열한 사격전은 끝났다. 1953년 7월 27일 밤 10시가 됐다. 전선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밤 10시 마지막 총성을 끝으로 모든 전선에서 사격이 멈추었다. 이제 포화가 작렬하는 열전의 전쟁은 끝나고 총성 없는 냉전(冷戰)으로 진입하는 순간이 된 것이다.
 
  휴전이 성립된 후 1개월이 지난 1953년 8월 26일 나는 6·25전쟁 기간의 전투 공로를 인정받아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훈장 수여식이 있던 날 우리 9중대장 이춘식 대위는 엄청나게 화를 내고 있었다. 훈장 수여가 너무도 불공정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 대대에서 내가 지휘하는 1소대만이 단독으로 633고지의 무명고지를 탈환했고, 많은 중공군을 사살하고 중화기와 소화기도 다량 노획했다.
 
  또 552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수행했다. 그러나 전투 공로에 비해 훈격(勳格)이 현저하게 낮은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기 때문이었다. 전투를 한 번도 하지 않고 중공군을 향해 소총 한 방도 쏘지 않고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화기 소대장에게는 화랑무공훈장보다 훈격이 높은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됐다.
 
  중대장 이춘식 대위는 1소대장인 나에게는 최소한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공격 명령을 직접 하달하고 적 진지를 공격하도록 명령한 중대장으로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중대장의 항의가 다른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훈장 수여식이 끝난 이튿날인 1953년 8월 27일 9연대장의 전투공로표창을 추가로 받았다.
 
  최일선에서 죽음을 넘나들며 언제 전사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야로 전투만 했던 나로서는 훈장의 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 후방의 한가한 사람들의 욕심이었다. 나는 전투를 끝내고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위로했다.
 
  휴전이 된 후 전투 기간 중 중단됐던 휴가가 시작됐다. 내 차례를 기다리던 중 나는 한 통의 전보를 받았다. 열흘이나 늦게 배달된 전보였다. 인천에 계신 아버지가 차량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전보였다. 남한 땅에 단 하나뿐인 핏줄이었다. 이제부터 아무도 의지할 데 없는 남한 땅에서 고아 신세가 된 것이다. 인천의 아버지 묘소 앞에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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