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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일본 일본인 ② 류큐왕국의 역사를 담아 빚는 오키나와 ‘아와모리’

‘흑국(黑麴)’이라는 독특한 누룩 사용

글 : 모종혁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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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을 때 거품 일어 아와모리(泡盛)라는 이름 붙어
⊙ 15세기 초 통일 쇼(尙)씨 왕조 수립… 《조선왕조실록》 전체에 류큐 419건 언급
⊙ ‘구스쿠’라 불리는 성(城) 유적 산재… 조선도 구스쿠 축성술에 관심
⊙ 슈리성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물 사용하는 즈이센주조의 아와모리
⊙ 3년 이상 숙성시킨 40도의 ‘구스(古酒)’는 일반 아와모리보다 몇 배 비싸

牟鍾赫
1971년생. 중국정법대학 경제법학과 / 한국 투자기업 노무관리 컨설턴트, 중국문제 기고가, 방송 VJ·PD, 취재 코디네이터로 활동 / 저서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웹소설 《七天的愛在新疆》(중국어)
웅장한 모습의 가쓰렌구스쿠. 이곳에서는 조선 도자기도 발견됐다. 사진=모종혁
  1456년 정월 25일 제주에서 출항한 뱃사람 양성(梁成) 등이 제주도 앞바다에서 2월 2일 거센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여 류큐국(琉球國)의 한 섬에 이르렀다. 섬 안에는 석성(石城)이 있어 도주(島主)가 혼자 거주했고, 성 밖에는 주민이 사는 촌락이 있었다. 양성 등은 섬에 머문 지 한 달 만에 배를 타고 류큐국왕이 사는 본섬으로 갔다. 류큐국 본섬에 도착한 이들은 왕도(王都)에서 5리 밖 공관에 거주했다. 공관 앞 토성에는 류큐국 백성과 조선, 중국 등에서 온 사람이 모여 100여 가구가 살고있었다.
 
  한 달이 다시 지난 뒤 양성 등은 왕성(王城)으로 갔다. 왕성은 3겹으로 되어있었다. 외성(外城)에는 창고와 마구간이 있었고, 중성(中城)에는 시위군(侍衛軍) 200여 명이 상주했다. 내성(內城)에는 3층과 2층의 전각이 있었다. 내성의 정전(正殿)은 경복궁 근정전과 비슷했다. 류큐국왕은 길일(吉日)을 택해 왕래하며 정전에 거주했다. 정전은 판자로 지붕을 덮었고 판자 위에는 납을 진하게 칠해 놓았다. 3층에는 진귀한 보물을 간수해 놓았고, 1층에는 곡식과 술을 저장했다. 류큐국왕은 2층에 거주했는데 시녀가 100여 명이나 있었다.
 
 
  류큐국왕 쇼 다이큐
 
류큐왕국의 왕성이었던 슈리성 정문. ‘수례지방(守禮之邦·예의를 지키는 나라)’이라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의 《세조실록》 27권에 세조 8년인 1462년 2월 16일 기사로 실렸다. 양성 등이 오늘날 일본 오키나와(沖繩)인 류큐국에서 귀환한 뒤 정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이 밖에도 류큐국왕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있다. 국왕은 나이가 33세였다. 아들이 4명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15살로 보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렸다. 이를 통해 국왕은 나이는 차이가 있지만 1454년에 왕위에 오른 쇼 다이큐(尙泰久·1415~1460년)로 추정된다. 쇼 다이큐는 통일된 류큐국의 쇼(尙)씨 제1 왕조 6대 왕이었다.
 
  류큐국왕은 평소 왕궁 남쪽에 있는 옛 궁궐에 거주했다. 그러다가 길일에 왕성 안 정전에 2~3일 혹은 4~5일씩 머물렀다. 정전에 있을 때는 중국식 왕관을 썼고 평소에는 흑초(黑綃)로 머리를 싸맸다. 5일마다 한 번씩 정전에서 조회(朝會)했는데, 좌우에 큰 깃발을 세웠다. 신하는 정전 앞의 마당에 늘어서서 왕을 향해 합장하여 3번을 절하였다. 또한 백성은 큰 통을 가지고 와서 왕궁에 술과 생모시를 바쳤다. 관료와 백성의 옷은 모두 왜복(倭服)과 비슷했고 바지는 없었다. 옷은 비단이나 모시로 만들었다.
 

  조선시대 바다에서 표류하다 류큐국까지 이른 조선인은 양성 등만이 아니었다. 1462년 정월에 전라도 나주에서 출발한 초득성 등 어민 8명이 표류하다 2월 초 류큐국에 이르렀다. 초득성 등은 4월 말 본도로 건너가 국왕을 알현하고 후한 접대를 받고 7월에 되돌아왔다. 《세조실록》에는 류큐국에 관한 기록이 64건이 있고 《조선왕조실록》 전체에는 419건이 있다. 당시 조선과 류큐의 교류가 빈번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왕조실록》에는 류큐국 왕성인 슈리성(首里城)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
 
 
  영화 〈핵소 고지〉의 현장
 
영화 〈핵소 고지〉의 무대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우라소에구스쿠.
  슈리성은 14세기 후반에 축성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류큐국의 수도는 아니었다. 본래 류큐에는 12세기부터 각 성(城)마다 성주가 군웅할거(群雄割據)를 했다. 이런 ‘구스쿠(城) 시대’가 13세기까지 지속됐다. 그러다가 지역별로 난잔(南山), 주잔(中山), 호쿠잔(北山)의 세 왕국으로 정리됐다. 류큐판 삼국시대인 이 삼산(三山) 시대에 슈리가 있는 주잔의 왕성은 우라소에(浦添)였다. 우라소에구스쿠(浦添城·우라소에조)는 13세기부터 주잔왕이 살며 100여 년 동안 번성했다. 오늘날 우라소에구스쿠에는 역대 주잔 왕들의 무덤이 남아있다. 우리에게는 영화로 친숙하다. 2016년에 멜 깁슨이 연출한 〈핵소 고지(Hacksaw Ridge)〉다. 〈핵소 고지〉는 태평양전쟁 때 의무병으로 입대한 데즈먼드 도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데즈먼드 도스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자였기에 집총을 거부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였다. 하지만 전쟁에 참전해 미국인으로서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그래서 선택한 병과가 의무병이었다. 〈핵소 고지〉는 이런 과정과 함께 1945년 5월 미군과 일본군 사이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 중 우라소에구스쿠에서 일어난 처절한 전투를 생생하게 그렸다.
 
  이렇게 우라소에구스쿠에서 발전했던 주잔은 1406년에 쇼 하시(尙巴志·1372~1439년)에게 멸망당했다. 주잔왕 부네이(武寧)가 실정(失政)을 거듭하자, 신하였던 쇼 하시가 왕위를 찬탈하고 자기 아버지인 쇼 시쇼(尙思紹·1354~1421년)를 옹립한 것이다. 그리고 슈리성으로 천도(遷都)했다. 쇼 하시는 호쿠잔과 난잔을 차례로 병합해서 1429년에 통일을 달성했다. 이때부터가 류큐국의 시작이다. 양성 등이 만난 쇼 다이큐는 2대 왕 쇼 하시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이들 쇼씨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는 다마우돈(玉陵)에 안장되어 있다.
 
 
  세계유산 슈리성
 
쇼씨 왕조 왕과 왕비의 유골함이 안치되어 있는 다마우돈.
  다마우돈은 1501년에 축조된 이후 역대 류큐국 왕족의 무덤으로 줄곧 사용됐다. 류큐국에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火葬)이 성행했다. 왕과 왕비도 사후에는 화장되어 도자기나 항아리로 만든 유골함에 안치됐다. 다마우돈에는 지금도 약 70여 명의 왕과 왕비, 왕자의 유골함이 남아 있다. 다만, 다마우돈을 건설한 이들은 쇼씨 제2 왕조다. 쇼 다이큐 사후(死後) 왕족 간 왕위 쟁탈전이 격렬해지자 신하인 가나마루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쇼 엔(尙圓)으로 바꾸고 1469년에 쇼씨 제2 왕조를 창건했다.
 
  슈리성 왕궁은 1453년, 1660년, 1709년 화재로 폐허가 됐다가 중건하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은 미군과의 결전을 위해 슈리성 지하에 사령부 벙커를 건설했다. 지하 벙커는 고위 장교를 위한 게이샤(藝者)와 위안부 20여 명까지 수용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의 포격이 심해지자 일본군은 슈리성을 버리고 남부로 퇴각했다. 그 와중에 슈리성과 왕궁은 잿더미가 되었다. 이를 슈리성공원으로 지정하고 1992년부터 복원해 2019년 1월에 마지막으로 정전이 완공됐다.
 
  그러나 2019년 10월에 일어난 화재로 정전은 다시 불타 버렸다. 내가 찾아간 2023년 3월에 정전은 다시 복원공사에 들어간 상태였다. 슈리성과 다마우돈은 다른 유적과 함께 ‘류큐왕국의 구스쿠 유적과 관련 유산’으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130년 역사의 즈이센주조
 
즈이젠주조의 입구. 즈이젠주조는 130년 역사의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술 회사다.
  슈리성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독립 왕국으로 번성했던 류큐국의 전통이 담긴 증류주 ‘아와모리(泡盛)’를 빚는 양조장 즈이센주조(瑞泉酒造)가 있다. 즈이센주조는 1887년에 창업해 벌써 13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오키나와의 대표적인 술 회사다.
 
  즈이센주조가 빚는 아와모리는 슈리성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물을 사용한다. 이 맑은 지하수는 류큐국 시대부터 왕궁에서 사용할 만큼 물맛이 좋았다. 따라서 즈이센주조의 창립자는 슈리성의 중성(中城) 문인 즈이센몬 돌계단 옆에 있는 우물의 이름을 따와서 회사 이름을 지었다. 이렇게 슈리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좋은 물을 사용해서 제조하는 즈이센주조의 아와모리는 오키나와에서 넘버원으로 손꼽힌다. 그동안 일본 유수의 주류 콩쿠르에서 즈이센주조의 술이 받은 상은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을 정도다.
 
  《조선왕조실록》을 좀 더 살펴보면, 조선과 류큐국의 왕성한 교류의 역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류큐국이 명나라, 일본, 여진과 더불어 조선 4대 교역국 중 하나였다. 류큐국이 교류에 훨씬 적극적이어서, 조선에 사절을 50여 회나 파견했다. 하지만 11세기까지 오키나와에서는 문명이 개화하지 못했다. 12세기부터 오키나와 본섬과 주변 섬에 ‘구스쿠’라는 석성이 세워지면서 본격적인 문명 시대가 시작됐다. 구스쿠는 오키나와어로, 본토 일본어와 발음이 다르다. 그러나 오키나와인들은 지금도 슈리성을 제외한 다른 주요 성을 모두 ‘○○구스쿠’라고 부른다.
 
 
  11세기 이후에야 철기 도래
 
  2023년 3월 필자는 오키나와를 방문해 8일 동안 머무는 계획을 미리 짰다. 오키나와 주유 패스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슈리성뿐만 아니라 오키나와 본섬 내 주요 구스쿠들을 찾기로 했다. 오키나와 최대 도시 나하(那覇)에서 거리가 멀고 버스 운행 횟수가 적은 현지 사정으로 인해서 하루에 오직 2개의 구스쿠만 방문할 수 있었다. 바로 우루마(うるま)시의 가쓰렌구스쿠(勝連城)와 나카가미(中頭)군의 자키미구스쿠(座喜味城)이다.
 
  먼저 찾은 가쓰렌구스쿠는 과거에는 14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까지 발굴이 지속되면서 문명 시대 이전부터 살던 사람들의 석기(石器) 유물이 발견됐다. 오키나와에는 11세기 이후에야 철기(鐵器)가 전래돼 보급됐다. 이런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지금은 13세기 전후에 구스쿠가 축조됐다고 보고있다. 버스를 내려서 올려다본 가쓰렌구스쿠는 슈리성에 비견될 만큼 거대하고 웅장했다. 해발 약 60~98m에 층층이 지어졌고, 총면적은 1만1897㎡에 달했다. 성벽은 산호질 석회암을 견고하게 쌓아 축조했다.
 
  가쓰렌구스쿠는 외성, 중성, 내성으로 구분된 슈리성과 전혀 달리, 꼭대기부터 가장 밑까지 제1 구루와(曲輪)부터 제4 구루와까지 축조했다. 구루와는 성곽을 일정하게 나눈 구역이다. 산을 기댄 입지조건과 견고한 구루와 덕분에 가쓰렌구스쿠는 류큐국에게 최후까지 저항했다. 마지막 성주인 아마 와리(阿麻和利·?~1458년)는 중국, 일본, 조선 등과 직접 무역하면서 힘을 키워서 류큐국에 대항했다. 이를 보여주듯 가쓰렌구스쿠에서는 중국의 도자기가 대량으로 발견됐고 조선의 도자기, 일본의 기와 등도 발굴됐다. 그러나 아마 와리의 야심은 류큐국왕인 쇼 다이큐에게 꺾이고 말았고 구스쿠는 1458년에 멸망했다.
 
  필자는 입구부터 천천히 걸어서 올라갔다. 비록 가쓰렌구스쿠가 멸망한 뒤 버려졌지만, 워낙 견고하게 지어 구루와는 우아한 곡선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제3 구루와부터는 돌과 나무로 만든 계단이 있어 손쉽게 오를 수 있었다. 제3 및 제2 구루와에는 우물이 4개나 있어 식수 걱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제2 구루와에는 상당히 큰 건물도 지어졌다. 가장 높은 제1 구루와까지 오르니 눈앞에 태평양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조선도 구스쿠 축조 기술 수입하려 해
 
  가쓰렌구스쿠를 떠나 1시간 30분 동안 버스를 한 차례 갈아타고 다시 20여 분을 걸어 도착한 자키미구스쿠는 성격이 전혀 다른 성이었다. 해발 120m의 구릉에 자리 잡았고 규모는 작다. 하지만 성문과 성벽에 쌓은 돌담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은 오키나와 구스쿠 중 으뜸으로 손꼽힌다. 실제로 두 겹으로 된 성벽 가운데에 아치형 성문이 만들어져 곡선미를 한층 돋보이게 한다. 그 이유는 류큐국이 삼산 시대를 종식하며 통일하는 과정인 1420년에 축조되어 기존의 구스쿠 축조 기술이 집약됐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구스쿠의 명성은 15세기에 조선에도 전해졌다. 그래서 조선왕조는 한때 구스쿠의 축조 기술과 경험을 수입하려고 했다. 남으로는 왜구, 북으로는 여진족의 침입을 방비하는 성을 쌓기 위해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다만, 구스쿠의 기술과 경험을 실제 도입해서 성을 축조했다는 문헌 기록은 없기에, 단순히 참고만 한 듯싶다.
 
  류큐국이 자키미구스쿠를 건설한 목적은 1416년 호쿠잔을 멸망시킨 후에도 오키나와 서부 해안가로 도망가서 국왕에게 대항하는 잔당(殘黨) 세력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서 류큐국은 중국, 일본, 조선 등과 교역하며 축적한 재화를 성을 쌓는 데 쏟아부었다. 당시 자키미구스쿠 앞 해안은 류큐국의 무역항인 요미탄산(讀谷山)으로, 외국에서 온 무역선 100여 척이 몰려들 정도로 번성했기에 가능했다. 요미탄산은 오늘날 요미탄의 옛 이름이다. 류큐국왕은 축성으로 명성이 높았던 요미탄의 호족 안지 고사마루(按司護佐)에게 성을 쌓도록 했다. 안지 고사마루는 성벽 전체를 부드러운 곡선이 계속 맞물리는 구조로 축조했다. 성벽이 맞물리는 지점 위에는 초소를 설치했다.
 
 
  깔끔하면서 강렬한 맛
 
즈이젠주조의 ‘오모로’(왼쪽)와 히카주조의 ‘잔파’.
  이렇게 잘 지은 성이었기에 자키미구스쿠는 20세기에도 사용됐다. 1945년 태평양전쟁 시기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사포 진지로 이용했다. 미군이 점령한 뒤에는 레이더 기지가 설치됐다. 1972년에야 국가 지정 사적으로 지정해서 보존했다. 2000년에는 슈리성, 가쓰렌구스쿠와 함께 ‘류큐왕국의 구스쿠 유적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런데 자키미구스쿠는 다른 성과 달리 관광객이 성벽 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필자도 성벽 위에 한참 머물렀는데, 눈앞에 펼쳐진 요미탄과 해안가가 멋졌다.
 
  자키미구스쿠에서 나와 걸어서 버스 정류장에 갔다. 버스를 기다리던 중 정류장 옆 술 판매장에서 요미탄에 소재한 히카주조(比嘉酒造)에서 제조한 파란색 병의 아와모리 한 병을 샀다. 저녁에 호텔로 돌아와 아와모리를 처음 마셨다. 전날 즈이센주조에서 산 ‘오모로(おもろ) 15년’ 2병은 귀국 후에 마시려고 모셔두기만 했다. 히카주조의 ‘잔파(殘波) 프리미엄’은 30도의 높은 도수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깔끔하면서도 강렬한 맛이었다. 아주 개성이 있어 히카주조 홈페이지에 들어가 정보를 살펴봤다.
 
  아와모리는 류큐국 통치기부터 빚기 시작했고, 증류한 술을 부을 때 거품이 솟아올라 그런 이름을 짓게 됐다고 한다. 일본 본토의 전통주인 니혼슈(日本酒)와 다른 점은, ‘흑국(黑麴)’이라는 독특한 누룩을 사용하는 것이다. 검은 흑국균은 미생물의 성장을 억제하나 세균의 오염은 막을 수 있다. 이는 덥고 습한 오키나와의 기후 환경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증류한 술을 큰 항아리에 담아 오랫동안 숙성시켜야 미생물이 성장한다. 오키나와에서는 3년 이상 숙성시키고 도수가 40도인 아와모리를 ‘구스(古酒)’라고 부른다. 필자가 즈이센주조에서 구입한 술은 오모로라는 브랜드에 15년을 숙성시킨 구스라는 뜻이 된다.
 
  구스의 가격은 다른 아와모리보다 훨씬 비싸다. 오모로의 경우 10년이 3060엔, 15년은 6400엔, 18년이 1만1000엔, 21년은 1만4850엔으로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뛰어오른다. 왜냐하면 오래 숙성시킬수록 맛과 향이 깊어지고 풍부하기 때문이다. 또한 숙성 과정에서 증발하는 양만큼 다른 술을 더하는 블렌딩도 2~4회 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과 많은 공을 들이면서 보관과 관리를 하기에 비쌀 수밖에 없다.
 
 
  해양박람회기념공원
 
오키나와의 해양박람회기념공원은 돌고래 쇼로 유명하다.
  오키나와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찾는 관광지가 있으니, 해양박람회기념공원(海洋博公園)이다. 해양박람회기념공원은 1975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오키나와 국제해양박람회의 부지를 기념해 조성했다. 국제해양박람회는 오키나와가 태평양전쟁 이후 미군의 통치 아래 있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된 것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추진되어 개최됐다. 당시 일본 정부는 특별법까지 제정해 바다를 주제로 한 엑스포를 계획했다. 그 결과 국제해양박람회는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폐막 후에는 지금의 공원으로 유지됐다.
 
  일본에 반환되긴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오키나와에서는 류큐국처럼 독립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이 오키나와 주민을 방패로 삼아 미군을 상대로 소모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오키나와 전투에서 민간인 12만 명이 희생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부흥한 일본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기점으로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따라서 미군정 통치 아래 미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무국적자이었던 오키나와 주민은 본토 복귀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국제해양박람회는 이런 과정을 거쳐 일본으로 반환된 오키나와를 위해서 일본 정부가 공들여 마련했다. 해양박람회기념공원에는 일본 최대 규모의 주라우미(美ら海) 수족관을 비롯해 돌고래극장, 트로피컬 드림센터, 오키나와 향토마을, 에메랄드 비치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다. 해양박람회의 해양생물관을 리모델링해 재개장한 주라우미 수족관은 몸길이 6m가 넘는 고래상어가 있을 정도다. 고래상어가 노니는 대형 수조는 원형극장처럼 여러 각도의 관람 공간에서 감상할 수 있다.
 
  돌고래극장에서는 날마다 여러 차례 쇼가 열린다. 최근 돌고래 쇼를 줄이거나 금지하는 전 세계적인 흐름과 달리 일본은 여전히 돌고래를 포획하고 학살하는 나라다. 트로피컬 드림센터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애니메이션 영화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の城ラピュタ)〉(1986) 속 라퓨타를 현실화한 곳이다. 물론 지적재산권 문제로 트로피컬 드림센터는 이를 부정한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利器)를 버리고 오직 꽃과 나무, 숲의 정원이 된 라퓨타와 너무나 흡사하다. 경내의 탑 정상에서는 주변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
 
 
  나키진구스쿠
 
  외국 관광객은 이런 코스로 해양박람회기념공원을 반나절 동안 구경한 뒤 떠나지만, 주변에는 오키나와 주민이 반드시 찾는 곳이 또 있다.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나키진구스쿠(今歸仁城)다. 나키진구스쿠가 ‘류큐왕국의 구스쿠 유적지’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지만, 류큐국 이전 삼산 시대에 호쿠잔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키나와를 방문하기 전에 이미 이곳을 마지막 구스쿠 방문지로 선택했다. 가족, 연인, 단체로 온 다른 관광객들과 헤어져 버스를 타고 이동해 정류장에서 걸어갔다.
 

  나키진구스쿠는 13세기부터 해발 100m에 쌓은 성이다. 그러다가 14세기 초 호쿠잔이 오키나와 북부를 지배하면서 도성(都城)으로 발돋움했다. 중국 사서에 따르면, 14세기 호쿠잔은 하니지(怕尼芝), 민(珉), 한안치(攀安知) 3왕이 통치하며 중국과 교역으로 번성했다. 당시 호쿠잔의 통치 영역은 난잔과 주잔보다 더 커서 오키나와에서 가장 넓었다. 주잔왕에게서 정권을 탈취한 쇼 하시가 대외무역으로 힘을 기른 뒤 1416년 호쿠잔을 쳐들어갔다. 호쿠잔은 저항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완패하여 멸망했다.
 
  주목할 점은 다른 도성과 달리 류큐국이 나키진구스쿠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이다. 오키나와 북부를 관리하기 위해서 간슈(堅守)를 두고 다스렸기 때문이다. 또한 혹시나 모를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는 측면이 강했다.
 
 
  사쓰마번의 침략
 
나키진구스쿠는 사쓰마번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런 우려는 현실이 됐다. 1608년에 사쓰마번(薩摩藩)이 류큐국에 사신을 보내 에도막부(江戶幕府)에 조공할 것을 요구했다. 류큐국이 이를 거절하자, 이듬해 3000여 명의 병사를 보내서 류큐국을 공격했다. 3월 말 오키나와 본섬에 도착한 사쓰마 군대는 3일 만에 나키진구스쿠를 공략해 단숨에 함락했다.
 
  나키진구스쿠는 산세를 타고 성벽을 층층이 쌓았다. 사람이 오가는 앞쪽은 가이카쿠(外郭)와 우시미(大隅)라는 두 겹의 성벽을 견고히 쌓았다. 그 밖의 성벽은 험준한 절벽이거나 깊은 계곡인 가자후(カーザフ)를 기대어 쌓았다. 하지만 오랜 전국(戰國)시대와 7년 임진왜란으로 단련되고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사쓰마번 군대를 막아낼 수 없었다. 사쓰마번 군대는 류큐국에 충격을 주기 위해 나키진구스쿠를 방화하고 파괴했다. 그런 뒤 밀고 내려가 우라소에구스쿠를 함락시키고 슈리성으로 쳐들어갔다.
 
  사쓰마번 군대의 침략 이후 나키진구스쿠는 재건되지 못했다. 간슈도 다시 거주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는 총연장 1500m에 달하는 성벽을 제외하고 호쿠잔 시기에 지어진 건물은 전혀 없다. 그러나 슈카쿠(主郭)가 있던 자리에는 불의 신(神)을 모시는 사당이 세워져, 지금까지 오키나와 주민이 찾아와 참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1월 중순부터 2월 초까지는 간히자쿠라(寒緋櫻)가 나키진구스쿠 곳곳에 활짝 피어 관광객이 몰려온다. 칸히자쿠라는 붉은 꽃의 벚나무다. 따라서 오키나와 주민에게 의미가 크다.
 
 
  원료는 인디카종인 태국 쌀 사용
 
  오늘날 해양박람회기념공원과 나키진구스쿠는 행정구역 상으로는 구니가미군(國頭郡)에 속해 있다. 하지만 군 소재지가 상당히 멀고, 중간에 나고(名護)시가 끼어 있다. 나고는 오키나와의 2대 도시로 인구가 6만여 명에 달한다. 본래 나고는 구니가미군에 속해 있었다가, 인구가 늘어나 시로 승격했다. 그렇기에 해양박람회기념공원과 나키진구스쿠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나고에 거주하고 있다. 나고 시내에서 버스로 50분이면 두 곳을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고에 쓰카야마주조(津嘉山酒造)가 있다.
 
  쓰카야마주조는 1925년에 양조장을 창업하여 1931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당시만 해도 목조 건물로는 나고에서 가장 컸다.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나고의 대부분 건물은 파괴됐지만, 양조장은 건재했다. 전후에는 한동안 미군에 징발되어 빵공장으로 사용됐다. 이런 역사를 가진 덕분에 오키나와현 정부로부터 유형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필자가 쓰카야마주조를 찾아갔을 때 정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장 아버지가 있었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분이어서 모바일 번역기로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그는 외국인이 처음 방문했다며 기뻐했다. 그리고 필자를 안내하면서 아와모리 제조 과정을 소개했다.
 
  아와모리는 길쭉한 인디카종인 태국 쌀을 원료로 쓴다. 쌀을 물에 담가 수분을 함유케 하고 40~50분을 쪄서 40℃가 됐을 때 흑국균을 더해서 누룩을 육성시킨다. 이를 물이 있는 탱크에 넣고 효모를 더해서 2주 동안 발효시킨다. 이렇게 숙성된 것을 증류기에 넣어 2~3시간 동안 가열해서 아와모리를 뽑아낸다. 그리고 3년 이상 숙성시켜야 깊은 맛과 부드러운 풍미를 지닌 ‘구스’가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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