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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을 위해 친정집 명당을 훔친 ‘딸도둑’ 전설

글 : 김두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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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형·신효창, 김극뉴·정광좌 등 장인·사위가 나란히 같은 묘역에 묻히는 경우 있어…, 정몽주는 증손녀사위와 같은 묘역에 묻혀
⊙ 장인·사위가 같은 묘역에 묻히는 것은 윤회봉사(輪廻奉祀)와 균분상속(均分相續)의 결과물
⊙ 성리학의 보급으로 종법제 강화되면서 18세기 이후 장인과 사위가 한 묘역에 묻히는 사례 찾아보기 어렵게 돼

김두규
1960년생.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졸업, 독일 뮌스터대 독문학·중국학·사회학 박사 / 전라북도 도시계획심의위원,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역임. 현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우리 풍수 이야기》 《풍수학사전》 《풍수강의》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국운풍수》 등 출간
경기도 양평에 있는 조선 개국공신 김사형의 묘(뒤)와 그의 사위 신효창의 묘(앞). 사진=김두규
  서울에서 출발하여 양평군 양수역을 끼고 좌회전하여 가정천을 거슬러 가다 보면 길가에 ‘이준경선생묘’와 ‘이덕형선생묘’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른바 ‘아홉 명이 정승이 묻혔다’는 ‘구정승(九政丞)골’이다.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다. 여기서 좀 더 올라가면 ‘김사형선생묘’와 ‘신효창선생묘’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면 김사형 사당이 나타난다. 여기에 차를 세우고 100m쯤 가파르게 오르면 위아래로 큰 무덤 둘이 있다. 모두 화강암 장대석으로 3단으로 쌓은 6각형 봉분 양식이다. 아래 무덤은 신효창(1364~1440)의 무덤이다. 무덤 앞 비석에 풍수 및 당시 사회사를 밝혀 줄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공(신효창)이 직접 잡은 자리이다. 공이 풍수술을 좋아하여, 일찍이 동쪽 교외에 나가 양평의 산 기운이 아름답고 빼어남을 보고, 청제봉 아래까지 찾아와서, ‘이곳이다! 오대산 중출맥이 이곳에 숨어 있구나’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먼저 장인인 상락백 김사형의 터를 정하였다. 이어서 그 아래에 축대를 쌓고 말하였다. ‘이곳은 나의 노년을 마칠 장소이다’(是公自占處也. 蓋公喜堪輿家, 嘗出東郊望見楊根山氣佳秀, 尋至靑帝峰下曰, 是也, 五臺山中脈隱於此矣. 遂先占聘君上洛伯基, 因築其下曰, 是我終老之所也).”
 
  신효창의 유언대로 그의 무덤 뒤에 장인 김사형(1341~1407)의 무덤이 있다. 김사형은 조선개국 1등공신으로 수많은 자손들을 배출했는데, 백범 김구 선생도 그 후손이다. 장인 김사형 무덤 아래 신효창이 부인(김사형의 딸)과 함께 묻혔다. 이후 그 후손들이 왕실과 혼인을 맺을 만큼 명문가를 이루었다. 신현확 전 국무총리도 그 후손이다.
 
  여기서 주제가 되는 것은 크게 2가지이다.
 
  첫째, 왜 장인과 사위가 한 묘역에 안장되었는가?
 
  둘째, 이곳은 풍수술[堪輿家]에 능한 신효창이 직접 잡은 자리일 만큼 최고의 길지(吉地)이다. 세종 20년(1438년) 임금이 그를 풍수학제조로 임명한 사실에서도 그의 풍수실력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최근 일부 풍수술사들이 길지가 아니라고 혹평을 한다.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서는 흔히 장인 혹은 사위가 아들이 없고 딸만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거나, 시집간 딸이 시댁의 번창을 위하여 친정집 명당을 기지를 발휘하여 훔쳤다는 ‘딸도둑설’ 설화가 지배적인 답변이다. 그러나 김사형은 2남1녀를, 사위 신효창도 4남3녀를 두었다. 따라서 아들이 없어 사위나 장인에게 의지하였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말명당’과 ‘잉어명당’
 
전북 순창에 있는 ‘말명당’. 같은 묘역에 박예 부부와 그의 사위 김극뉴 부부, 김극뉴의 사위 정광좌 부부의 묘가 있다.
  흔히 ‘조선 8대 명당’이란 말이 회자된다. 조선8도를 염두에 두고 각 도를 대표할 만한 길지 여덟 개를 말하는데, 정확히 그 여덟 개가 어디인가에 정답은 없다. ‘조선 8대 명당’이라는 말은 ‘최고의 길지’라는 뜻이다.
 
  이 가운데 하나가 전북 순창 인계면 마흘리에 있는 ‘말명당’이다. 이곳에도 장인과 사위 그리고 사위의 사위가 같은 묘역 안에 자리한다. 박예 부부, 그 아래에는 박예의 사위 김극뉴(1436~1496)와 부인 박씨(박예의 딸), 묘역의 맨 아래에는 김극뉴의 사위 정광좌(1467~1520)와 부인(김극뉴의 딸)의 무덤이 자리한다.
 
  이 ‘말명당’이 유명해진 것은 이 명당발복 덕분으로 김극뉴의 후손 가운데 김장생·김집 부자를 배출한 것으로 소문이 나면서이다. 김장생·김집 부자는 대학자로 ‘동방 18현(賢)’에 꼽힌다.
 
  맨 아래에 묻힌 정광좌 역시 조선전기 명문거족의 후예이다. 아버지 정난종(1433~1489)과 그의 형제들 정광보(1457~1520)·정광필(1462~1538)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도 높은 벼슬을 지냈다. 경기도 군포시 속달동에 이들의 묘가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정광좌만 순창의 장인 묘 아래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
 
박예의 동생 박평이 잡은 ‘잉어명당’.
  사위인 정광좌를 자기 무덤 아래 묻히게 한 것이 김극뉴가 아들이 없어서도 아니다. 또한 정광좌 역시 후손이 없어서도 아니다. 정광좌가 이곳 순창에 안장된 뒤 그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벌족(閥族)을 이루었다. 2007년 제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와 맞붙었던 정동영도 그 후손이다.
 
  맨 처음 이곳을 소점한 이는 박예이다. 정확한 생몰연대는 전해지지 않으나, 박예의 사위인 김극뉴가 1436년생임을 감안하면 15세기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 동생들인 박평과 박정도 풍수에 능하였다. 박평은 임실군 강진면 갈담의 ‘잉어명당’, 박정은 임실 가실 마을 앞 ‘금계포란형’을 잡았다. 특히 박평이 잡은 자리에는 그 아들 박기림이 묻혔는데, 그의 비문에는 ‘잉어명당(鯉魚明堂)’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 그만큼 풍수실력에 자신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순창 ‘말명당’과 임실 ‘잉어명당’은 규모에서 차이만 보여줄 뿐 그 공간 모델과 기세가 흡사하여 같은 풍수 유파가 잡은 자리임이 분명하다. 그 시대의 풍수관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시댁을 위해 친정집 명당을 훔쳤다?
 
  이곳 ‘말명당’이 중요한 것은 앞의 김사형·신효창 무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풍수와 사회사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귀중한 문화사적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곳 역시 왜곡된 전설이 전해진다.
 
  첫 번째 전설은 ‘시댁을 위해 친정집 명당을 훔쳤다’는 ‘딸도둑설’이다. 또 하나는 해방 이후 관인풍수학이 사라지면서 발호하게 된 풍수술사들의 본질 왜곡이다. 소문과 달리 좋은 자리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다음은 인터넷에 떠돌며 많은 풍수술사들이 그럴듯하게 여기는 내용이다.
 
  “김극뉴의 묘가 주산·과협·당판·청룡백호·안산 등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혈을 맺은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족보를 보면 이 묘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손자, 증손 대에서는 여느 양반집 가문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오히려 종갓집의 손이 끊기는 일이 발생하는데, 당시 종손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심각한 우환이 아닐 수 없다. 평상시에는 규봉(窺峰)의 흉함, 청룡·백호의 함몰과 비주(飛走)를 신랄하게 탓하면서 어째서 이곳에서는 그토록 관대한지 모르겠다.”(인터넷 인용)
 
  ‘말명당’이 흉지(凶地)라는 주장이다. 또 다른 주장은 ‘이곳이 길지임은 분명하나 우백호가 더 길게 뻗어 있고, 좌청룡이 중간에 함몰되어 장자(長子)가 절손(絶孫)하며 외손(外孫)이 발복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곳 후손들의 족보까지 가져다 억지로 끼워 맞추려 든다. 과거의 길지가 최근에 흉지로 평해지는 곳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용·혈·사·수
 
경기도 용인에 있는 정몽주의 묘(왼쪽)와 그의 증손녀사위 이석형의 묘.
  순창 ‘말명당’처럼 조선초부터 지금까지 ‘조선 8대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 용인시 모현동에 있는 정몽주 선생(1337~1392)과 이석형 선생(1415~1477)의 무덤이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아 이곳을 찾는 풍수답사객의 숫자는 순창 ‘말명당’보다 훨씬 많다.
 
  정몽주와 이석형은 어떤 사연으로 같은 묘역에 안장되었을까? 정몽주의 손자 정보(鄭保)의 딸과 그 남편 이석형이 묻히면서이다. 즉 이석형은 정몽주의 증손녀사위이다. 이곳에 묻히게 된 것은 정보가 딸만 있고 아들이 없어서인가? 그렇지 않다. 정보는 3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럼에도 정보는 딸과 사위를 자기 선영에 묻히게 한다.
 
  정몽주와 이석형의 묘는 묘지 풍수의 모범을 제시한다. 풍수 교과서이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이곳을 대길지(大吉地)라고 하는 것일까?
 
  풍수지리는 땅을 보는 일정한 원칙이나 순서를 전제한다. 그 핵심은 “용(龍)과 혈(穴)을 위주로 하고, 사(砂)와 수(水)를 그 다음으로 하라(龍穴爲主, 砂水次之)”는 문장으로 집약된다. 용은 산줄기(산능선), 혈은 무덤이나 집이 들어설 자리, 사는 주변 산들(청룡·백호), 수는 명당 안을 흐르는 물을 말한다.
 
  이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용(산능선)이다. 그래서 “용·혈·사·수 가운데 용이 으뜸이다(龍穴砂水龍是主)”라는 말이 생겨났다(《지리정종》). 왜냐하면 혈은 용이 맺힌 결과물이며, 사는 용이 갈라져 혈을 감싸는 것이며, 물[水]의 근원은 용이기 때문이다. 용이 없으면 혈·사·수가 생길 수 없다.
 
정몽주와 그의 증손녀사위 이석형 묘의 풍수도. ‘효순귀’가 있는 조선 최고의 명당이다.
  정몽주·이석형 무덤의 경우, 문수산(221m) 산능선[龍]이 내려오다가 90도 각도로 꺾어지면서[橫] 자리[穴]가 맺힌[結] 전형적인 ‘횡룡결혈(橫龍結穴)’의 길지이다. 이렇게 지맥이 90도 각도로 꺾일 때 그 뒤를 받쳐 주는 작대기 역할을 하는 작은 산줄기[鬼]가 필수이다. 그런데 이곳은 그 작대기 역할을 하는 산줄기가 마치 소의 두 뿔처럼 다소곳이 뻗어 있다. 풍수고전 《의룡경》이 말하는 ‘효순귀(孝順鬼)’가 바로 이곳이다. 조선 최고의 길지라고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효순귀’가 있어서이다.
 
  용을 살핀 다음 무덤을 앉힐 자리[穴]가 만들어졌는가를 살펴야 한다. 이곳은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여인의 젖가슴[乳]과 같은 모습의 두 개의 혈[穴], 즉 쌍유혈(雙乳穴)이 맺혔다. 하나의 유혈[單乳]로 혈이 맺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곳은 한 곳에 두 개의 혈[쌍유혈]이 동시에 맺혔기에 아름다운 곳이다. 이 두 개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두 개의 혈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대대적(對待的)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풍수에서 땅을 보는 그다음 순서 사(청룡·백호 )와 수(명당에 흐르는 물)는 부차적이다.
 
 
  정몽주의 후손들
 
  그런데 이곳 역시 앞에서 소개한 다른 길지와 마찬가지로 왜곡된 전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역시 ‘딸도둑설’이다. 시집간 딸이 시댁을 위하여 친정집 명당을 훔쳤다는 전설이다.
 
  〈정몽주 묘를 영천으로 이장(移葬)할 때 바람에 날린 명정(銘旌)이 떨어진 곳은 지금의 이석형 묏자리였다. 이때 포은의 후손이자 이석형의 부인이 이곳이 명당이란 말을 듣고 시댁 가문을 일으키려고 밤새 이곳에 물을 길어다 부었다. 다음 날 포은을 모시려고 광중을 보니 물이 가득 차 있었다. 할 수 없이 옆 언덕에 묘를 썼고, 뒤에 그 자리에는 남편인 이석형을 안장하게 하였다.〉
 
  똑같은 전설이 순창 ‘말명당’에서도 전해진다. 모두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1445년 정보의 딸이 죽자 이 자리에 안장되었고, 1477년 그 남편 이석형이 죽자 자연스럽게 합장을 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왜곡은 이곳의 사(砂), 즉 청룡·백호 가운데 백호가 더 아름다워 외손들이 크게 되는 땅, 즉 외손발복(外孫發福)의 터라고 말한다. 그래서 포은의 직계보다는 외손인 이석형의 후손이 더 잘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한 땅을 보는 원칙에도 어긋나며, ‘백호가 좋으면 외손이 발복한다’는 주장은 조선조 지리학 고시과목으로 채택된 풍수 고전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란 ‘계급독재’가 강화되면서, 유가적 관념이 풍수에 덧씌워지면서 생겨난 해석이다. 남자는 좌측(혹은 동쪽), 여자는 우측(혹은 서쪽)에 자리한다는 ‘남좌여우(男左女右)’ 관념과 좌청룡·우백호라는 풍수 공간 모델과 겹치면서 생겨난 오해이다. 이를 바탕으로 백호가 좋으면 딸들이 잘된다는 잘못된 해석이 나온 것이다.
 
  세 번째 왜곡은 정몽주 묘보다 이석형 묘가 더 좋아 이석형 후손이 더 번창하였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두 가문이 조선조에 배출한 유명 인사(학자·정치가)를 열거한다. 아예 두 가문의 족보까지 가져다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이른바 ‘족보풍수’들이다. 과거급제자 수치로 보면 이석형 후손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특수한 상황이 있다. 정몽주는 조선을 세우려던 이성계를 부정하였다. 그 당시 이성계를 거부했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개국했던 공신들 가운데 훗날 멸문(滅門)을 당한 집들이 많았다.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문들이 더 많다.
 
  그런데 정몽주 후손은 살아남았다. 뿐만 아니다. 정몽주 손자인 정보 또한 세조 임금 당시 사육신(死六臣)을 두둔한 발언으로 유배를 가 그곳에서 죽는다. 생전에 복권(復權)되지 못하여 가문이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훗날 복권되어 조선 후기 들어 다시 번창을 한다. 양명학의 거두 정제두도 정몽주의 후손이다. 현대 인물로는 정해영(국회부의장, 7선)→ 정재문(국회외교통상위원장, 5선)→ 정연욱(전 경남에너지 대표)으로 이어지는 가문도 정몽주 후손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오금공원의 무덤들
 
경북 의성에 있는 김세정의 묘(왼쪽)와 그의 사위 장숙의 묘.
  우리가 가 보아야 할 또 하나의 현장이 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오금역 2번 출구를 나서면 오금공원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곳 오금공원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무덤들이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신선경(1422~1488)과 류인호(1447~1522) 무덤이다. 장인·사위 관계이다.
 
  신선경은 단종에서 성종 임금 사이에 활동한 고급관리로 그의 딸이 덕종(의경세자로 사후 추존)의 후궁 숙의신씨였다. 그의 또 다른 딸이 류인호에게 시집을 갔고, 사후(死後) 친정아버지 무덤 곁에 남편이랑 함께 묻혔다. 지금은 도심 속의 작은 공원으로 고립되고 말았지만, 옛날에는 멀리서 보아도 대단한 길지로 여겨지기에 충분한 곳이다. 남한산성의 한 축을 이루는 청량산 지맥이 한강 쪽으로 달려가다가 하나의 구릉을 만든 곳에 자리한다. 신씨와 류씨 후손들은 지금까지 명문가를 이루고 있다.
 
  장인과 사위가 한 곳에 묻힌 곳은 이뿐이 아니다.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계중학 앞 나지막한 구릉이 있다. 이곳에는 김세정과 그의 사위 장숙, 장숙의 손녀사위 이효건의 무덤이 함께 자리한다. 생몰 연대가 분명치 않으나 장숙이 1567년에 죽은 것을 감안하면 16세기 인물들이다. 이 묘역에 대해서도 현대의 풍수술사들은 길지가 아니라거나 우백호가 좌청룡보다 크게 뻗어 있어 외손발복의 땅이라고 해석을 하며 사실을 왜곡한다.
 
 
  상속과 묏자리
 
  장인·사위가 같은 묘역에 자리한 것은 윤회봉사(輪廻奉祀)와 균분상속(均分相續)의 결과물이다. 윤회봉사란 고려와 조선 전기에 행해지던 제사 방식으로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 만약 딸이 제사를 모시다가 죽으면 그 자녀, 즉 외손이 제사를 모시는 외손봉사도 흔한 일이었다.
 
  흔히 외손봉사를 아들이 없고 딸만 있을 경우라고 현대인들은 이해하고 있으나 오해이다. 제사를 모시는 것과 재산상속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윤회봉사가 가능하려면 재산 또한 균등하게 분배가 되어야 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아들·딸 차별 없이 출생한 순서대로 골고루 나누어 준다[平分]’고 규정한다. 균분상속은 재산의 양뿐만 아니라 재산의 질까지 고려하였다. 또 시집간 여자가 친정에서 가져온 재산의 처분권도 전적으로 여자에게 있었다.
 
  장인 김사형 묘 아래 신효창이 묻힐 수 있었던 것도, 박예의 사위 김극뉴, 김극뉴의 사위 정광좌가 같은 묘역에 안장된 것도 모두 딸들을 매개로 한 것이었다. 고려는 물론 조선 중기까지도 처가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장가간다’는 말 속의 ‘장가(丈家)’는 장인·장모 집, 즉 처가를 의미한다. ‘장가간다’ 함은 처가에 가서 사는 것을 말한다. 정몽주가 고향인 영천이나 활동무대였던 개경 부근이 아닌 용인으로 이장된 것(1406년)도 균분상속과 관련이 있다. 정몽주 아들인 정종성의 처가 죽산박씨였고, 이곳 용인 일대가 근거지였다. 정종성이 장가든 곳이 이곳이었고, 처가로부터 상속받은 땅을 자신의 선영(先塋)으로 삼은 것이다.
 
  고려 말 유입된 성리학과 이를 근거로 하는 종법사상은 조선 전기까지는 보편화되지 않았다.
 
  〈또한 성리학자들 중에서도 조선 전기 훈구파들은 성리학 말고도 다른 학문이나 문화에도 비교적 관대하였다. 학문의 자유가 있었다. 훈구파들은 부국강병과 유연한 외교 등을 주장하며 학문에 경직성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사림파가 들어서면서 성리학 이외에 모든 사상과 문화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게 되면서 종법(宗法) 또한 강하게 조선을 억압한다.〉 (김기현, 전북대 명예교수, 퇴계학).
 
  그 결과 17세기 중엽부터 윤회봉사와 균분상속은 빠른 속도로 감소하기 시작한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장남(長男)봉사가 보편적으로 뿌리를 내린다. 재산상속 역시 장남 위주로 이루어지며 딸은 재산상속에서 제외된다. 그 대표 사례를 1669년 김명열이 남긴 분재기(分財記·재산상속에 관한 유언)에서 엿볼 수 있다.
 
 
  분재기에 나타난 아들·딸에 대한 인식
 
  〈우리나라 종가(宗家)는 법이 해이해진 지 이미 오래되어 제사를 여러 자녀가 돌아가면서 모심은 사대부 집안의 모두의 굳어진 규례가 되어 있다. 이것은 바꿀 수 없으나, 딸의 경우 출가하면 다른 가문 사람이 되어 남편을 따르는 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성인의 예제에도 출가한 딸의 등급을 낮추어 정의(情意)가 모두 가벼운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도 세간에서는 사대부가의 제사를 사위에게까지 돌아가면서 모시게 하는 것이 흔한데, 다른 집 사위나 외손 등을 보면 서로 미루다가 제사를 빠뜨리는 경우가 많다. 비록 지낸다 하더라도 제물이 정결하지 않고 정성과 공경이 없다. 차라리 지내지 않음만 못할 정도이다. …
 
  부자간의 정리(情理)로 보면 아들과 딸의 차이가 없으나 딸은 살아서는 봉양할 이치가 없고, 죽어서는 제사 지내는 예가 없다. 그러므로 어찌 재산에 있어서만 아들과 똑같이 나눌 수 있겠는가?〉(《조선시대 재산상속문서 분재기》,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그러한 이유로 18세기 이후 장인과 사위가 한 묘역에 묻히는 사례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윤회봉사와 균분상속의 사회사를 모르는 현대 풍수술사들에 의해 귀중한 문화사적 현장이 심각하게 왜곡된다. 현대 술사들은 두 곳(장인 자리와 사위 자리) 모두 길지가 아니라거나, 그 가운데 하나는 좋고 하나는 나쁘다는 등 우열 가리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 결과 장인과 사위의 현존 후손들 사이에서 미묘한 경쟁과 갈등이 야기된다. 그러한 갈등으로 인해 최근 대법원까지 가게 된 묘역도 있다(해당 문중들의 명예가 걸린 부분이라 밝히지 않는다).
 
  윤회봉사와 균분상속의 결과로 장인·사위가 한 묘역에 묻히는 것은 서로 다른 성씨가 결혼을 매개로 한자리에 공존하는 대동(大同)세계의 현장이기에 아름답다. 민족의 자랑거리로 내세우기에 충분하다. 또한 미래 우리의 재산상속 및 장례문화에 참고할 만한 귀중한 자산이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이 당대 최고의 풍수 고수들에 의해 소점된 묘역들이 현대 풍수술사들에 의해 왜곡되는 걸까?
 
  1895년 관상감(觀象監)이 폐지된다. 관상감에서 풍수교육과 행위(궁궐·왕릉 등의 입지 선정과 조성)들이 이루어졌다. 풍수는 조선 초기(1406년) 국가의 십학(十學) 가운데 하나로 채택되면서 이후 500년 동안 조선의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문화센터 풍수’
 
  그 풍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한 사람은 일본인 학자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1891~1968)이다. 1931년 그가 펴낸 《조선의 풍수》를 통해서였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는 “풍수가 조선사회의 특질(特質)로서 멀리 삼국시대부터 신라·고려·조선이라고 하는 유구한 세월을 거쳐 왔으며 그 영향력은 미래에도 깊게 줄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조선 문화의 근저적(根底的) 형상의 하나가 풍수”라고 단언하였는데, 지금도 전적으로 타당한 언술이다.
 
  풍수가 우리 민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파악한 또 한 명의 학자가 이병도 박사(1896~1989)이다. 그의 《고려시대의 연구》(1947)는 고려왕조에서 풍수가 어떻게 국가 대사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논한 통사이다. 그는 사료만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직접 개성·평양·천안 등 역사 현장을 직접 답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풍수설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서술한다. 풍수지리에 정통하지 않고는 서술할 수 없는 글이다(이병도 박사가 이렇게 풍수에 능했던 것은 아마도 집안의 풍수내력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의 아버지 이봉구가 충남수군절도사로 재직할 때 명성황후 친정아버지 묘를 충남 보령 관산으로 이장하게 할 정도로 풍수에 능했다).
 
  《조선의 풍수》와 《고려시대의 연구》는 우리 풍수에 대한 ‘교과서’이다. 무라야마 지쥰과 이병도 박사를 끝으로 해방 이후 풍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논의는 끝이 난다. 이처럼 잊혀 가던 풍수가 1970~1990년대 여러 신문사 문화센터 풍수 강의를 통해 술사들이 배출된다.
 
  문화센터 풍수는 조선의 관상감에서 교육되던 풍수 내용이나 무라야마 지쥰·이병도가 택했던 풍수이론과 전혀 다른 풍수술이다. 조선조나 고려왕조에서 텍스트로 쓰였던 풍수 고전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현대 풍수술사들의 본질적 문제점이다. 단편적인 술수를 가지고 조선왕조에 이루어진 수많은 풍수 행위를 해석하려다 보니 억지 주장과 왜곡이 생긴다. 앞에서 소개한 여러 문중 묘역에 대한 왜곡도 이와 같은 연유에서이다. 인문학으로서 풍수가 진정 ‘한국학’에 편입되려면 조선조 지리학 고시과목들에 대한 고증·번역·해제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풍수 말고도 역시 술수나 미신으로 비난 받는 사주·궁합·관상 등도 같은 방법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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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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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정심    (2018-06-19)     수정   삭제 찬성 : 4   반대 : 2
예전 말명당 기사와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역시 묘자리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정재호    (2018-06-18)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장인과 사위과 한 묘역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흥미롭습니다.
  장혜린    (2018-06-18)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평소에 접해보지 못한 주제이기도 하고 관심이 없으면 쉽게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 교수님의 글을 통해 새로운 내용을 접할 수 있어 인상 깊었습니다.
  박지수    (2018-06-14)     수정   삭제 찬성 : 2   반대 : 2
풍수지리라는 과목을 수강을 하였기 때문에 이런 내용들을 읽는데 어려움이 크게 없었습니다. 몰맀던 내용을 알게 되어서 좋습니다.
  조민아    (2018-05-15)     수정   삭제 찬성 : 8   반대 : 4
평소 접해보지 못했던 정보들을 접하게 되어 새로웠습니다.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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