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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시민강좌 | 박정희와 미국·일본 - 애증의 18년

“박정희 외교는 북한 재남침 막는 안보외교, 수출입국 전략 지원하는 경제외교, 국가적 자율성을 확보한 자주외교”

글 : 박희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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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냉전 시대 절대적 영향력 가진 미국에 자주적으로 대응하며 국가 근대화에 성공”(조갑제)
⊙ 조갑제, “국내외 여론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10·26이 일어났다”
⊙ “박정희, 일본이 갖는 전략적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응”(홍형)
⊙ “달라진 미국의 대외정책 기조에 따라 한미동맹도 적잖은 변화 예상돼 … 정밀한 대비책과
    동맹외교 통한 조율 필요”(김태우)
  
  《월간조선》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연중기획으로 공동 주최하는 ‘근대화의 국부 박정희를 다시 본다’의 8회 강좌가 6월 1일 서울시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박정희와 미국·일본 - 애증의 18년’이란 주제로 진행된 이날 강좌는 박정희 정부 당시 대미(對美)·대일(對日) 외교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올바른 외교노선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재임 시기 대한민국은 총체적인 국력 면에서 지금과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약한 소국에 불과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국가 존망이 좌우되는 나라였다. 당시 박정희는 어떤 외교를 펼쳤을까.
 
  이날 강좌의 발제자로 나선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는 “박정희의 18년 외교는 북한의 재남침을 막기 위한 안보외교, 수출입국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외교, 그리고 한국인의 활동 공간을 넓히고 국가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주외교였다”며 “냉전 시대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에 자주적으로 대응하면서 국가 근대화에 성공한 점에서 박정희의 외교는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자주적 친미노선 추구한 박정희
 
  조 대표에 따르면 박정희는 ‘자주적 친미(親美) 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역할을 긍정하고 고마워하면서도 우리 자주성을 지키려는 노력 또한 소중하다고 생각했다. 미국과 처한 조건이 다른데도 맹목적으로 한국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강제하려는 태도, 미국 압박에 호응하는 국내 정치 세력을 경멸했다. 친미 일변도에서 벗어난 박정희의 대미 외교 기조는 5·16 당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5·16 주체세력은 역사 전면에 등장하면서 미국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 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조 대표의 말이다.
 
  “박정희, 김종필(金鍾泌)로 대표되는 5·16 군사혁명 주체세력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미군과 친한 이전의 한국군 지도부와는 다른 성향을 가졌습니다. 그중엔 이집트의 나세르식 혁명을 동경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주도한 군사혁명은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의 진압 기도를 막아내 혁명의 성공을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했습니다. 미국도 박정희 소장에 대한 사상적 의구심에 근거가 없고 쿠데타 세력이 기본적으로 반공 성향임을 확인하고 현실을 인정한 바탕에서 주로 경제원조를 지렛대로 활용한 영향력 유지를 꾀했습니다. 미국의 세계 전략에 박정희 정권이 방해물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5·16으로 야기된 한미 양국 사이의 갈등은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가 방미해 미국 대통령 케네디를 만남으로써 봉합됐다. 당시 케네디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원했고, 박정희는 이에 동의했다.
 
  미국은 남한을 소련과 중공, 북한을 견제하는 전초기지로 여겼다. 일본은 이를 지원하는 병참기지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자신들의 동북아 전략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가 필수적이라고 봤다. 1962년 6월 통화개혁을 통해 국내 산업자본을 동원하려던 박정희는 이에 실패하자 본격적인 대일 협상에 들어갔다. 외채를 도입해 산업화를 꾀하겠다는 산업화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조 대표는 박정희의 이 같은 대일 외교노선이 산업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미국은 소련과 중공 및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동북아에서 한·미·일 동맹관계가 작동해야 하고 그렇게 되려면 한일 관계 정상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압박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대한 미 행정부의 불만은 이승만 정부의 안정을 해치는 것이었다. 미국이 장면(張勉) 부통령을 지원하고 4·19 혁명 때 이승만 정부를 압박한 것도 이런 불만의 한 표현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실력자인 김종필 정보부장은 1962년 11월 오히라 일본 외상을 만나 청구권 등 핵심 쟁점에 합의했지만, 이듬해가 민정 이양기라 타결을 짓지 못했다. 1964년엔 학생과 야당의 반발에 부딪혔다. 정부는 6월 4일 반일(反日) 학생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미국은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한일회담이 시작된 1961년 11월부터 한일 국교 정상화 협정 비준서가 교환된 1965년 12월까지 한국 정부는 국내외의 정세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외교 전략을 구사하여 국익을 도모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와 월남 파병으로 밀월기를 맞았던 1960년 한미 관계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박정희는 냉전 시대 절대적 영향력 가진 미국에 자주적으로 대응하며 국가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평했다.
  조갑제 대표는 1960년대 한미 관계를 원활하게 한 투 트랙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와 함께 월남 파병을 꼽았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 월남전에 최초 전투병력으로 맹호사단을 보낸 것을 포함해 연인원 30만명을 파병했다. 조 대표는 월남 파병으로 인해 공고해진 한미 양국의 혈맹 관계에 따라 한국이 안보·외교·경제적 이득을 얻었다고 평했다.
 
  “1965년, 국군 1개 전투사단을 월남전선에 보내는 교섭이 진행 중이던 때 미국을 방문, 대통령 린든 존슨을 만난 박정희는 환대를 받았습니다. 1964년 8월 2일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월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미국은 한국군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 8월 13일 국회가 전투사단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키자 수도권을 지키는 맹호사단을 파병했습니다. 그 뒤 9사단이 백마부대의 이름으로 파병되어 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5만명을 지휘하게 됐습니다. 4000명에 육박하는 전사자(戰死者)가 생겼지만, 이는 한국전 때의 미군 희생에 대한 보답의 성격도 있었습니다. 두 나라의 혈맹(血盟) 관계는 여러모로 한국에 안보적·경제적·외교적 이득을 가져다 줬습니다. 월남에 진출, 건설 및 용역사업에 종사했던 한국 기업들은 여기서 쌓은 경험을 살려 1970년대엔 중동 건설 시장으로 진출했습니다. 그리하여 중동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중동에서 수입하는 기름값을 상쇄할 정도가 돼 석유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1960년대 한미 양국의 밀월 관계는 미국 대통령에 닉슨이 취임한 1969년부터 조정기에 접어들었다. 닉슨은 1969년 7월 월남전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지양하고, 아시아 우방국에 대한 군사적·경제적 지원 축소 등을 골자로 한 ‘닉슨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듬해엔 주한미군 7사단 철수 계획을 통보했다. 월남전에서도 발을 뺐다. 이에 박정희는 산업화와 자주국방력 건설을 재촉하면서 이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단으로서 유신(維新) 체제를 선포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조 대표의 설명이다.
 
  “월남전선에서 미군의 철수가 시작되고 미·중 화해 교섭이 기존의 동서 냉전 구도를 재편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가운데 이를 지켜보던 박정희는 선제 대응을 합니다. 자주국방력 건설(중화학공업 건설), 남북회담, 6·23 선언, 핵개발 추진, 그리고 유신 체제 선포입니다. 1968년부터 본격화한 박정희의 선제 대응이 정당했음을 확인해 준 것은 1973년 10월 중동전쟁 이후의 제1차 석유파동과 이듬해의 월남 패망입니다. 함께 닥친 경제적·안보적 위기를 극복하고 중화학공업 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유신 체제에 의하여 ‘국력의 조직화’와 ‘능률의 극대화’가 가능해진 덕분입니다. 1975년 4월의 월남 패망을 방치한 미국의 대응은 박정희를 긴급조치에 의한 국내 통치 강화로 내몰았습니다. 이는 인권탄압 시비를 불러 미국의 언론과 여론을 반한(反韓)으로 기울게 했습니다.”
 
  미국 내 반한 여론은 1976년 ‘코리아게이트’가 터지면서 고조됐다. 코리아게이트란, 중앙정보부가 미국 내 반박정희 여론을 무마하고 친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미국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는 등의 회유 공작을 했다는 의혹이다. 이 코리아게이트 사건은 박정희 유신 체제의 인권 문제와 더불어 한미 관계를 경색시키는 요인이 됐다. 조갑제 대표는 1970년대 한미 관계와 관련해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워터게이트 사건과 반전(反戰) 운동의 영향으로 폭로적 보도 경쟁을 벌이던 미국의 언론이 박정희와 유신 체제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여기에 김형욱 전 정보부장 같은 ‘배신자들’이 가세해 박정희 정부는 ‘동네북’이 됐다”고 평했다.
 
 
  한국군과 미군의 혈맹 의식이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계획 저지
 
  박정희 정부 당시 한미 간 외교 채널은 한국 외무부와 미국 국무부 외에 양국 군부 사이의 채널이 또 있었다. 양국 군부는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같이 피를 흘리며 쌓은 동지적 관계란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인권을 강조하며 1976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카터가 취임 이후 추진한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 미군에 의해 저지됐을 뿐 아니라 한미연합사령부 창설을 통해 지금까지 북한의 남침 야욕을 제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게 조갑제 대표의 분석이다.
 
  “카터가 대통령이 된 뒤 추진하던 주한미군 철수는 코리아게이트를 폭로한 언론의 영향으로 미국 여론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1978년 2월 11일 AP통신과 NBC가 공동조사한 여론에 따르면 61%가 철군에 찬성했지만, 이를 좌절시킨 건 미국 군부였습니다. 유엔군 사령관 베시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 정부가 미국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대규모 철군 보완을 요구하도록 공작하는가 하면 싱글러브 참모장은 공개적으로 카터 대통령에게 항명했습니다. 한미 양국 간의 외교는 국무부와 외무부 채널 외에 두 나라 군부 사이의 또 다른 채널을 두고 있었습니다.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피를 나눈 동지적 관계라는 역사적 사실이 지금까지 두 나라 외교의 기조를 이룹니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미연합사령부의 설립 필요성이 대두됐습니다. 이 사령부의 발족엔 당시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 유병현을 중심으로 한 한·미군 수뇌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면서 핵무장한 북한 정권의 남침 야욕을 제어하는 한미연합사가 한미 관계가 가장 나빠졌을 때 만들어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는 두 나라 군인들이 한국전과 월남전에서 같이 흘린 ‘피의 대가’인지도 모릅니다.”
 
  한편 조 대표는 강연 말미에 박정희 정부가 국내외 여론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게 결국 10·26으로 이어졌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 원인도 함께 지적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는 외교에 큰 영향을 끼치는 국내외의 언론과 여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박정희 시해 사건의 한 원인이 됐습니다. 여론이 정권을 결정하는 민주정치 제도에서뿐 아니라 권위주의적 정부에서도 선전 기능을 장악하지 못하는 정부는 위기 대처 능력이 약합니다. 박정희는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처럼 영어를 구사할 줄도, 서양식으로 그들을 설득할 줄도 몰랐습니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한국에 강요하는 미국 언론과 정치인들을 반박할 사람도, 논리도 부족했습니다. 자주적 노선에 대한 확신만으로는 미국을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박정희 시해 사건의 근인(近因)은 부마사태인데 이는 김영삼(金泳三) 국회의원 제명이 촉발한 겁니다. 김영삼 제명의 직접적인 계기는 1979년 9월 15일 자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인터뷰 기사였습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스토크스 기자에게 미국의 내정간섭을 요청하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사대주의적 발언으로 몰아붙였지만, 국내외 언론과 여론은 민주인사 탄압으로 봤습니다. 결국 박정희 피살은 우방국인 미국과 일본의 언론 보도가 다른 우방국 정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최근의 박근혜 탄핵 사태를 지켜보던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선전부를 장악하지 못해 정권을 잃었다’는 논평을 했다고 합니다. 국내 언론을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적대적으로 방치한 것을 이른 말입니다. 박정희 부녀의 종말을 통해 정치와 외교에서도 언론과 여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박정희, 재일 북한 노동당 전위대 ‘조총련’ 파괴하고 일본과의 관계개선 위해 진력”
 
홍형 전 주일 공사는 “일본이 갖는 전략적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응했던 박정희와 달리 6공화국 대통령들은 국민 감정에 치중해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다”고 했다.
  ‘박정희 시대의 한일 관계와 21세기 한일 관계’란 주제로 강좌 2부 토론에 참여한 홍형(洪熒) 전 주일본 공사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을 떠나 생각할 수 없지만, 일본도 한국의 생존에 결정적인 존재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정의하고 “박정희는 남·북한 사이의 총체적 투쟁과 냉전의 본질, 특히 우리에게 일본이 갖는 전략적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응했다”고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김일성(金日成)은 휴전 상태에서 정치 전쟁을 위해 자유 진영의 후방 기지인 일본에 북한 노동당의 재일당(在日黨)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구축했다. 조총련은 재일동포를 북한 노동당 주위로 결집해 통일을 달성한다는 목표 아래 일본 내 조직 건설·강화 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들의 활약상은 애초 김일성이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1960년대, 재일동포 절반이 조총련에 가입했다. 조총련은 거의 모든 일본의 도(都)·도(道)·부(府)·현(縣)에 지부와 사업체를 건설했다. 유치원과 대학 등 150개에 이르는 소위 ‘민족학교’를 세웠다. 조총련은 북한 당국의 지원과 폭발적인 조직 성장세를 발판으로 삼아 일본 안에서 친북 여론을 확산시켰다.
 
  홍 전 공사는 조총련이 유엔군사령부 후방 사령부가 있는 일본에서 눈부신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건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고조된 일본의 전후 풍토 속에서 일본 좌익의 전면적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이 아직 미군의 점령하에 있었던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선언’(평화선)을 공포하면서 독도를 평화선 안에 편입시켰습니다. 일본은 거국적으로 반발했습니다. 일본 사회의 ‘이승만라인’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은 지금도 한일 관계 발전에 결정적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자유 진영의 대표 지도자이자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을 일본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우호 관계가 성립되겠습니까? 이와 달리 우리 국민들이 일본을 불신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재일동포 북송 사업’입니다. 재일동포 북송은 한일 국교 정상화(1965년) 6년 전에 시작돼 국교 정상화 후에도 19년이나 지속됐습니다. 인류 역사상 자유세계에서 전체주의 사회로 민간인 10만여 명을 대거 송환한 ‘반문명적 폭거’는 일본의 ‘재일동포 북송’이 유일합니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인 대한민국의 국민을 일본은 북한으로 보냅니다. 양국 국민감정이 악화한 틈을 비집고 김일성이 일본을 대남공작 기지로 이용하는 걸 막기 위해 박정희는 전략·전술적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조총련을 파괴하고, 일본이 한국의 전략적 후방 역할을 하도록 다양한 조치들을 마련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 내 조총련의 위세는 급격히 약화했고, 북한 국적자 수도 급감했다. 현재 재일동포 60만명 중 북한 국적자는 3만1000여 명에 불과하다. 홍 전 공사에 따르면 일본 내 남북한 국적자 수는 박정희 집권기인 1970년 초반에 이미 역전했지만, 북한에 경도됐던 일본 당국에 의해 공개되지 않다가 지난해 3월에 와서야 이 같은 상황이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로 발표됐다.
 
  박정희의 한일 국교 정상화 등의 노력에도 김대중(金大中) 납치 사건(1973년)과 조총련 소속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 미수 및 육영수 살해 사건(1974년) 탓에 한일 양국의 협력 관계는 중단됐다. 홍 전 공사는 “냉전이 가장 치열하던 시대에 한국과 일본이 김일성의 이간책에 놀아나 정보 협력을 중단한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6공화국 대통령들은 국가안보보다 국민감정 관리에 치중해”
 
  홍형 전 공사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국내외의 정세 변화에 신속히 대응해 국가 위기관리 차원에서 선제 조치들을 취했다”고 했다. 박정희 사후 신속하게 한일 관계를 복원하려 한 전두환 정부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6공화국 대통령들의 대일 노선에 대해선 “서울올림픽 이후 정부와 국민들은 국가안보에 대한 위기감과 절박감을 잊었다”면서 이렇게 비판했다.
 
  “북방외교를 내세운 노태우(盧泰愚) 정부는 전통적 우방과의 관계를 경시했습니다. 노태우는 주사파 세력(NLPDR)을 민주화 운동 세력이라고 공인하고, 북한을 동반자라고 불렀습니다. 방한했던 일본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宮沢喜一)에게 방송 카메라 앞에서 (한일 과거사와 관련해) 사과하도록 요구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자유민주당 내 보수파들은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를 마지막까지 반대했습니다.
 
  유럽 중심의 동서 냉전 종식을 보고 아시아의 냉전 역시 끝난 것으로 착각하고 좌경화한 한국은 미·일 동맹을 강화하면서 우경화하고 있던 일본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6공화국은 역내 안보 문제와 관련한 일본 측의 의견 교류 제안을 무시하고, 교과서 문제 등 역사 인식 차이를 놓고 그간 착실하게 발전시켰던 한일 관계를 긴장·갈등 국면으로 몰아갔습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운 김영삼 정부, 대북 유화책을 썼던 김대중 정부, 반미·친북 정서가 강했던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기를 거치며 한일 관계는 더 악화됐습니다. 이명박(李明博) 정부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천황 관련 발언을 계기로 일본 내 반한 감정은 폭발했습니다. 박정희가 국가와 정부의 역할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한일 관계를 관리했던 반면 6공화국의 대통령 중엔 국가안보보다 국민감정 관리나 자신에 대한 여론의 지지율 관리를 우선시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일 관계는 악화됐고, 현재 일본에선 되도록 한국과 연관되기 싫다는 정서가 퍼지고 있습니다.”
 
 
  “미국, ‘중·러·북’ 견제하는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 원해”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 원장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달라진 미국의 대외 정책 기조에 따라 한미동맹도 변화를 겪을 것”이라면서 문재인 정부에 3대 외교 기조와 8대 현안 추진 방향을 제언했다.
  또 다른 2부 토론자인 김태우(金泰宇)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전 통일연구원 원장)는 ‘트럼프 시대 한국의 동맹외교 과제’를 주제로 발언했다. 그는 미국의 과거 정부들과 궤를 달리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고 한국에서 5월 9일 ‘장미 대선’을 통해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념적 유사성을 가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한미 조야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달빛 정책(moonshine policy)’과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가 상충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시각이 부상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 북핵 대응, 사드(THAAD), 대북 제재 국제 공조, 한일 안보협력 등 주요 안보 이슈들을 둘러싸고 한미 정부 간 이념 갈등과 이견이 드러날 경우 한미동맹은 ‘제2의 도전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어 “북한의 비대칭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맹 활용이 불가피한 한국은 트럼프의 대외정책 기조를 정확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트럼프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미국우선주의, 경제민족주의, 동맹국들의 안보 무임승차론 등을 강조했습니다. 취임 후엔 ‘미국 우선 외교정책’과 ‘강력한 군사력 재건’을 최우선 국정 기조로 발표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패권 유지를 최고 목표로 하면서도 미국의 비용과 희생을 수반하는 세계경찰 역할을 축소하는 대신 동맹국들의 안보 부담 증가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동북아 역내에서 미국과 중국이 대립하는 신냉전 구도하에서 미국의 최대 목표는 중국 견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트럼프 취임 초기 대(對)러 화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군사력 재건, 우크라이나·시리아 개입 등으로 미·러 간 신냉전도 지속되고 있고, 중·러의 전략적 제휴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중·러·북 북방 삼각 체제’를 견제하는 ‘한·미·일 남방 삼각 체제’ 구축을 위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안보협력을 희망합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미국의 대외 기조 변화는 한미동맹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면서 동맹외교 현안 8개를 추렸다. 한미 간 조율이 시급한 4대 현안은 종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대북 제재 국제 공조, 방위비 분담금, 한일 안보협력이다. 이 밖에 북핵 상황 악화에 대한 미국의 선택에 따라서 전술핵 재반입, 대북 선제 공격, 미·북 간 빅딜(Big Deal), 전시작전통제권 이양도 한미동맹의 긴급 현안으로 추가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에 제언하는 3대 외교 기조와 8대 현안 추진 방향
 
  김태우 교수는 “8대 현안은 앞으로 상황 전개 양상에 따라 한미동맹의 미래를 좌우하는 폭발력을 가지기 때문에 정밀한 사전 대비책을 수립하고 동맹외교를 통해 조율해 나가야 한다”면서 문재인 정부에 다음과 같은 ‘3대 외교 기조’를 주문했다.
 
  “국내외의 안보·외교 여건들을 종합할 때 문재인 정부에는 다음과 같은 3대 외교 기조가 필요합니다. 첫째, 남북 관계보다 국제공조를 우선해야 합니다. 둘째, 미·중을 상대할 때 등거리 외교나 일방적 편승은 위험합니다. 이보다는 동맹외교를 중심에 둔 상태에서 한중 관계를 비적대적 우호 관계로 유지·발전시키는 쌍무외교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셋째, 한국 외교는 ‘안보 최우선’ 원칙에 따라 ‘안보 정론’에 부합해야 합니다. 한국은 이 3대 외교 기조를 바탕으로 8대 현안을 처결하는 동맹외교를 펼쳐야 합니다.”
 
  김 교수는 이어서 앞서 언급한 사안별 동맹외교 추진 방향에 대해 이렇게 조언했다.
 
  ① 사드 문제는 한미 간에 기합의된 배치는 이행하되 방어 체계의 추가 도입 시 한국산 또는 유럽제나 이스라엘제를 검토하는 방향으로 중국과의 외교적 타결이 필요하다. 사드 배치를 철회하는 경우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반발이 한미동맹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 한미동맹이 안보와 경제 양면에서 사활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한국 때리기’에 대해서는 한국의 안보 주권과 한미동맹 운용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미국도 중국을 자제시키는 데 합류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② 안보리 대북 제재, 미국의 독자 제재, EU・일본 등 주요국들의 제재 등으로 구성된 현 북핵 제재 국제 공조는 지속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시도하는 경우 정부 정책의 연속성이 훼손되고, 대북 제재에 참여하는 국제사회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최대 압박’ 기조와도 상충할 가능성이 있다.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발전시키는 차원에서 개성공단·금강산 재개를 추진하는 경우 국제사회와의 충분한 사전 조율을 거쳐 갈등을 미리 방지해야 한다.
 
  ③ 미국이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할 경우 한국은 동맹외교를 통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지원하는 주한미군 주둔비 분담금 비중(0.068%)이 독일(0.016%)과 일본(0.064%)보다 높은 수준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또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 미국이 수행하는 대부분의 전쟁에 우리가 참전해 왔고, 평화유지군 파견 등 국제 협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는 점을 설명해야 한다. 단, 현 국방 예산 수준(GDP 대비 2.4%)이 다른 안보 위험국과 비교해 지나치게 낮기 때문에 GDP의 3% 수준으로 증액해 독자 안보 역량을 기르고, 미국의 ‘안보 무임승차론’에 대처해야 한다.
 
  ④ 한일 안보협력을 위해서는 일본과 다툴 사안들과 협력해야 할 사안들을 구분하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역사, 독도 등과 관련한 일본의 공세에는 적극적으로 대처하되, 군사비밀보호협정 이행 등을 통해 북핵 대비 한일 공조는 긍정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위안부합의 재검토를 시도한다면 먼저 국제사회와 일본이 재검토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여건 조성이 중요하다. 일본의 재무장,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한 ‘2015 미·일 방위협력지침’ 등에 대한 입장도 같은 맥락에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한일 안보협력 부재는 궁극적으로 한미동맹이 미·일 동맹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⑤ 북핵 문제가 더욱 악화되고 미·중 간 이견이 심화하는 경우 미국이 ‘대중 견제 및 북핵 위협 상쇄’를 명분으로 전술핵 재반입을 타진하거나 대북 군사행동을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 전술핵 재반입은 중국의 반발과 국내 논쟁을 촉발할 수 있으나, 북핵 위협의 정도에 따라 재반입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⑥ 미국의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반대해야 하며 공개 찬성은 불가하다. 미국을 만류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선도하기 위한 동맹외교가 필요하다.
 
  ⑦ 미국의 북핵 피로증이 누적되거나 트럼프가 정치적 입지 개선을 원한다면, 앞으로 북한 핵 동결과 미·북 평화협정을 교환하는 ‘빅딜’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핵 동결 빅딜을 만류하는 것이 동맹외교의 올바른 방향이다. 빅딜은 북한의 핵실험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라는 미국의 골칫거리는 해소해 주지만, 이로 인해 우리는 일방적으로 취약해진다는 문제를 떠안게 된다. 베르사유 조약(1919년), 일(日)·소(蘇) 불가침조약(1941년), 뮌헨조약(1938년), 독(獨)·소 불가침조약(1939년), 베트남평화협정(1973년) 등에서 보듯 현상 타파를 원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한 평화조약은 다른 일방의 위험성을 가중시키는 장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북한의 대남 공세적 군사 전략, 남조선 혁명 전략, 적화통일 목표 등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조약을 수용하는 건 불가하다.
 
  ⑧ 한미 사이에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경우 이에 대한 대응 또는 한국의 안보 비용 증가를 위한 협상용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전작권 분리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안보 정론에 입각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즉, 북한 입장에서 볼 때 유사시 한국군과 미군이 단일 지휘 체제하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현 한미연합사 체제와 분리된 지휘 체제 중 어느 쪽이 미국의 군사 개입을 더 확실하게 보장하는지 또는 어느 쪽이 전쟁 승리에 유리한가를 중심에 놓고 판단해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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