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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시민강좌 | ‘대선과 5·16 56주년에 생각하는 국가리더십’

“5·16은 대한민국이 경제 대국으로 나아가도록 한 진군의 나팔”

글 : 최우석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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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석학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터키의 케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와 함께 3대 혁명가로 꼽아
⊙ “5·16혁명으로 우리나라는 절대빈곤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
⊙ “자유민주주의체제와 대한민국을 지켜낸 박정희의 5·16혁명은 정당”(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박정희 지도력의 원리는 인간성의 본질을 간파한 상태서 장기적 전략을 세우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짠 뒤 신속 추진한 것”(조갑제 대표)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육군 소장이 부하들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중앙청 등 주요 기관을 장악했다. 이른바 5·16이다. 5·16에 대해서는 구국의 혁명과 군사 쿠데타로 평가가 극명히 엇갈린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극과 극의 평가를 떠나 5·16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바로 전날인 5월 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월간조선》과 박정희 대통령기념재단이 연중기획으로 진행 중인 제7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가 열렸다. 제7회 강연의 주제는 ‘대선과 5·16 56주년에 생각하는 새로운 국가리더십’이었다. 제45회 어버이날이기도 했던 이날 4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행사장에 모였다.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고 온 사람도 보였다. 행사 2시간 전부터 행사장을 찾은 이도 다수였다. 그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좌승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제가 전 세계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몽펠르랭 소사이어티(MPS)에 참석했는데, 거기 경제학자들이 최단 기간에 최대 발전을 이룬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이해하기 힘들어했다”며 “5·16을 가지고 혁명이냐, 쿠데타냐 논쟁이 많은데 5·16 이후 대한민국이 천지개벽했으면 혁명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쿠데타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천지개벽했는지 판단은 참석하신 여러분께 맡기고 싶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당연히 혁명”이라고 했다.
 
  이날 주제 강연은 《불굴혼 박정희》(전 10권)의 저자인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가 맡았다. 고 대표는 《불굴혼 박정희》를 통해 의식혁명, 경제발전, 조국근대화, 핵개발, 민주주의, 조국통일이라는 우선순위를 정하고 국가중흥 마스터플랜을 실천해 간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를 총정리했다. 본 행사의 전체 동영상은 《월간조선》 홈페이지(monthly.chosun.com)를 통해 볼 수 있다.
 
  고 대표는 강연에서 5·16에 대해 “대한민국이 경제 최빈국에서 경제 대국으로 나아가는 진군의 나팔”이라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구체적인 혁명계획을 세운 것은 1960년 초였습니다. 그 무렵 대한민국은 급격한 사회 변화와 혼란, 민족 비극인 전쟁과 그 상처 치료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지만, 정부와 정치인들은 국민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한 채 이권다툼 감투싸움에만 여념이 없었습니다. 4·19혁명으로 표출된, 국민이 바라는 개혁은 무엇 하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고민하던 군부는 혁명적 분위기로 차츰 무르익어 갈 수밖에 없었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청년 장교들에게 ‘조국’은 정치와 이념을 뛰어넘는 절대가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1961년 5월 15일 한강 다리를 건넌 것입니다. 5·16은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무혈혁명이었습니다.”
 
 
  5·16은 세계 3대 혁명
 
고정일 동서문화사 대표는 제7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 주제강연에서 5·16에 대해 “대한민국이 경제 최빈국에서 경제 대국으로 나아가는 진군의 나팔”이라고 했다.
  고 대표는 “5·16혁명으로 우리 국민의 잠재된 민족역량이 깨어나고 기적을 만들어 나아가겠다는 소명을 갖게 됐다”며 “5·16혁명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절대빈곤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 피터 드러커가 ‘20세기 인류사의 기적’이라 격찬한 한국의 국가개혁과 경제개발은 5·16혁명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 대표는 세계 석학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터키의 케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와 함께 3대 혁명가로 꼽는다는 사실도 전했다.
 
  “세계는 오늘날 박정희 전 대통령을 탁월했던 세계 3대 지도자라고 설명한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 한국 근대화 연구 분야 석학인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석좌교수, 아시아 경제 대가인 와타나베 도시오 다쿠쇼쿠대학 총장, 중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마홍(2007년 10월 별세) 등 세계 석학들은 박 전 대통령을 ‘부존자원 없는 상태의 국가를 교육 확산, 국력 결집으로 성공적으로 산업사회에 진입시킨 대표적 지도자’로 평가한다. 3대 혁명가에게 쿠데타는 목적이 아닌 하나의 방법이었다.”
 
  터키 케말파샤의 원래 이름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다. 그는 터키의 국부로 위대한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너무나 위대하여 다른 위인들과의 비교 자체가 거부되는 인물이며 터키와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만약 그를 모독하는 자가 있다면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형법상의 처벌을 받는다. 이런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터키 국민은 진심으로 그를 숭앙하고 사랑한다. 아타튀르크는 무스타파 케말 장군의 성인데 국부라는 뜻이 있다(‘아타’는 아버지라는 뜻). 1934년 터키가 새로이 성씨 제도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였을 때 터키 국회가 그의 업적을 기려 국부라는 뜻의 성을 부여한 것이다. 그를 케말파샤라 부르는데, 파샤는 장군이란 뜻이다.
 
  터키의 어떤 도시를 가더라도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서 있으며 아타튀르크라는 명칭의 도로가 존재한다. 공공기관, 학교는 물론이려니와 많은 기업체까지 그의 초상을 사무실에 내걸고 있으며, 큰 도로에 접한 벽에는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활동상을 찍은 사진이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일반인 중에도 지갑에 아타튀르크 사진을 넣어서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의 군인으로서의 무용담은 끝이 없을 정도이며 1차 세계대전과 독립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용맹과 지략은 오늘에도 회자되고 있다. 그는 구국의 영웅이었다. 1919년에는 터키독립전쟁을 벌이며 1923년에는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 1938년 사망까지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 된다. 그는 유럽의 병자였던 터키를 단기간에 광범위한 개혁을 통하여 근대국가로 발전시키는 초석을 놓게 된다.
 
  이집트 나세르는 1952년 파루크 왕정을 무너뜨린 혁명세력 자유장교단의 주역으로, 4년 뒤 모하메드 나기브 초대 대통령의 뒤를 이어 2대 대통령에 올라 범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해 주목을 받았다. 대통령에 오른 직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가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 등을 상대로 수에즈 전쟁을 치러 패했으나 국제사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인정받았으며, 11년 뒤인 1967년 이스라엘과 벌인 6일 전쟁도 졌지만, 오히려 반식민주의 운동의 구심점으로 떠오르면서 국민적 추앙을 받았다. 이집트 국민은 1970년 9월 나세르 전 대통령이 아랍 정상회의 직후 심장발작으로 서거했을 때 열린 장례식에 수백만 명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애도함으로써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보여줬다. 나세르는 숨진 지 40년이 넘었지만, 이집트 국민은 여전히 나세르를 건국 영웅으로 사랑하며 존경하고 있다.
 
 
  국내에서 박정희 저평가되는 것 아쉬워
 
  터키의 케말파샤와 이집트의 나세르는 자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만, 대한민국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한편에서는 ‘한강의 기적’을 진두지휘한 지도자로 칭송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경제개발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한 독재자라고 깎아내린다.
 
  고 대표의 이야기다.
 
  “중국 덩샤오핑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경제모델로 벤치마킹하여 국가 경제를 일으키려 노력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외교・경제 정책을 본받아 실사구시 개방 전략을 펼쳐 미국과 협조 관계를 유지, 중국을 다국적 기업이 가장 선호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하지만 천안문사태 때 탱크 군단을 동원, 민주화를 열망하며 광장에 모인 100만 시민에게 거침없이 발포하여 2000여 명이 죽고, 1만2000명이 다치는 참사를 빚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중국인들은 그를 천하 대란에 빠진 나라를 구한 은인으로 추앙한다. 장제스, 장징궈의 경우는 38년간 계엄령 아래 일당 독재정치를 펼쳐, 경제우선 정책으로 타이완의 발전을 이끌었다. 타이완 국민은 그들을 독재자가 아닌, 나라를 일으킨 지도자로 기억한다. 터키의 케말파샤, 이집트의 나세르도 국부라고 불리는데, 우리만 박 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난한다.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박 전 대통령이 오히려 고국에서 저평가되는 것이 안타깝다.”
 
 
  해외에서 후한 평가받는 5·16과 박정희
 
  실제 박 전 대통령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후한 평가를 받는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민주화는 산업화가 끝난 후에나 가능하다. 이런 인물을 독재자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박정희는 누가 뭐래도 세계가 본받고 싶어 하는 모델”이라고 극찬했다. 《네 마리의 작은 용》의 저자이자 평소 한국 군사정권에 비판적 입장을 취해 온 에즈라 보걸 하버드대 교수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은 없다. 그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고 평했다.
 
  공산권 지도자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박정희 관련 책은 다 가져와라. 그는 나의 모델”이라고 했고, 중국 개방을 이끌었던 덩샤오핑은 평소 “박정희는 나의 멘토”라고 말했다. 미국 랜드(RAND) 연구소는 “덩의 개혁은 박정희 모델을 모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청렴 리더십
 
  고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의 청렴 리더십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참으로 특이한 지도자였습니다. 청와대 본관 1층과 2층 집무실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았습니다. 변기에 벽돌 한 개를 넣어 물을 아끼고 뜨거운 한여름에도 선풍기조차 돌리지 않았습니다. 식사 때는 밥에 꼭 보리를 30% 섞어서 쌀 절약 혼식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점심은 멸칫국물에 만 국수였습니다. 측근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할 때면 점심때 국수를 먹었습니다. 그는 혁명적인 철학과 유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치헌금, 기부금 때문에 기업인들과의 만남도 거부했습니다. 대통령 일가를 빙자한 이권 개입은 절대 허락지 않았으며, 이를 어길 때에는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알리고 강력히 실천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 이후의 지도자들은 어땠습니까. 모두 국정농단 부정부패로 국민에게 실망만을 안겨주었죠.”
 
  고 대표는 민족시인 노산 이은상 선생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박 전 대통령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라 평했다.
 
  “민족시인 이은상은 말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라고요.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를 비롯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나 백성들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순신은 목숨 바쳐 나라를 구했지만, 《손자병법》에 이르길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상은 아니라고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남북한 체제 경쟁에서 김일성과 싸우지 않고도 이겼고, 세종대왕도 못 이루었던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사람입니다’라고요. 맞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박 전 대통령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백척간두 휘몰아치는 광풍을 결연히 이겨내고 산업화에 성공했으며, 이 나라 이 민족의 제단에 망설임 없이 몸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박 전 대통령의 사상과 국가통치 능력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우리 국민의 역사적 과제요, 번영과 생존을 위한 숙제입니다.”
 
 
  5·16은 정당성 없는 쿠데타였다라는 무지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제7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 토론자로 나선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5·16은 정당성 없는 쿠데타였다라는 무지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고 대표의 주제 발표가 끝나고,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대표(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와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가 토론을 이어갔다.
 
  남정욱 대표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얻은 신생국 중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경제 발전에 성공한 나라”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수많은 신생국이 독립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외교적인 독립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쉽지 않았습니다. 거의 비슷한 패턴이었는데 우선 건국 초기, 대부분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명망가가 정권을 잡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과 독립은 전혀 별개의 문제지요. 국민의 요구와 국가의 재정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고 결국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권위주의 통치, 독재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에 반발한 세력이 반정부 혁명(공산 전체주의 세력)이나 쿠데타(군부)를 일으키고 이렇게 들어선 통치자는 이전보다 더 강압적인 통치로 국민을 괴롭힙니다. 그러는 사이 경제 발전은 물 건너가고 이들 독립국은 저개발 빈곤 국가로 전락해 길고 긴 가난한 삶을 국민에게 선물하죠. 이게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의 독립국들이 걸었던 일반적인 경로입니다. 대한민국은 예외죠. 유일한 성공사례입니다.”
 
  남 대표는 그 이유에 대해 “박정희라는 아주 특별한 인물과 당시 한국 사회와 비대칭의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 군대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100여 개의 신생국 대부분 군이 중요한 위치를 점했습니다. 군부가 권력을 잡은 나라도 여럿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자기 나라를 근대화시키는 데 실패하고 독재라는 어두운 그림자만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 이유는 군대의 수준 차이였습니다. 다른 신생국들과 달리 한국군은 6·25전쟁을 통해 양적으로 급속히 성장했으며,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질적인 발전을 이뤘습니다. 일부 아시아, 아프리카 등이 무식하고 힘만 센 ‘군바리’들의 나라였다면 우린 군이 최고의 엘리트였던 나라였던 것이죠.”
 
  실제 주한 미국군사고문단은 소수 정예의 엘리트 양산을 위해 육군사관학교(1950년 6월 1일)를, 한국군 고급 장교 양성을 위해 육군대학(1951년 12월)과 국방대학원(1956년 10월)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교육받은 군인들은 최고 엘리트로 성장했다.
 
  남 대표는 박 전 대통령과 5·16 주역들이 이승만 정권이나 장면 정권의 멤버들과 달리 가난한 시골 출신이 많았다는 점도 주목했다. 가난에 증오를 가진 박 전 대통령이 5·16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행운이었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과 장면 정권의 구성원들은 가난을 ‘겪지 않고 지켜보면서’ 산 사람들이다. 그래서 절실하지 않았다. 농촌에서 사람이 굶어 죽어도 그게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난은 나의 스승’이라고 했던 박 전 대통령과 그를 따르던 5·16 주역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가난과 빈곤의 퇴치는 국가적 목표인 동시에 개인적으로 극복해야 할 삶의 굴레였다.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정말 가난을 내쫓고 싶어 했다. 이런 열망을 가지고 박 전 대통령은 과업을 실현해 나갔고, 그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남 대표는 마지막으로 “‘5·16은 정당성 없는 군사 쿠데타였다’라는 무지의 논리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5·16은 국회 인사청문회의 단골 메뉴다. 대부분 말을 흐리거나 쿠데타라고 대답한다. 쿠데타, 맞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유광호 박사는 이를 재미있게 설명한다. 합법성과 정당성이다. 어느 것이 위일까. 일단 하나의 나라가 건국의 이념(대한민국의 경우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한미동맹)을 가지고 건설되면 그때부터는 정당성이 합법성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히틀러의 집권은 합법적이었지만 정당성은 없었다. 자유민주주의체제의 바이마르 공화국을 전복,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정희의 5·16혁명은 정당하다. 자유민주주의체제와 대한민국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정당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계상황에서 어떻게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할 것인가의 문제다.”
 
  프랑스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정당성은 합법성에 종속되지 않으며, 합법성은 반드시 정당성의 근거는 못 된다.”
 
 
  박정희 리더십 12계명
 
제7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 토론자로 나선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지도력의 원리는 역사의 원리와 인간성의 본질을 간파한 바탕에서 장기적 전략을 세우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짠 뒤 세심한 확인으로 신속하게 사업을 추진한 것”이라고 했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단 기간에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문명 건설을 이룬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12가지로 설명했다. 다음은 조 대표가 꼽은 박정희 리더십 12계명이다.
 
  〈(1) 화합형 정책 결정: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듣는 사람이었다. 엉터리 보고라도 끝까지 들어주었다. 좀처럼 즉석에서 반대하지 않았다. 일단 본인의 의견을 제시한 뒤 주무(主務)장관이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할 기회를 주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아니라 주무장관이 발안(發案)한 정책이 채택되는 방식을 취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야 정책에 대한 주인의식이 생기고 일을 할 때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남을 통해서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2) 민주적 정책 결정: 박 전 대통령은 어떤 회의에서도 먼저 발언하지 않았다. 토론을 시켜 문제가 제기되고 찬반(贊反)의견의 방향이 잡혀가면 그때 결론을 도출하고 필요한 보충지시를 내렸다. 당시의 정치체제와는 다르게 경제정책의 결정 과정은 민주적이었다.
 
  (3) 생산적 회의: 박 전 대통령은 월간경제동향보고, 수출진흥확대회의(무역진흥회의), 청와대 국무회의, 국가 기본운영계획 심사분석회의, 방위산업진흥확대회의를 정례화하였다. 이들 회의는 대통령이 국정(國政)을 종합적으로 규칙적으로 파악 점검하고 살아 있는 정보를 얻는 기회였다.
 
  (4) 철저한 확인과 일관된 실천: 박 전 대통령은 계획수립에 20%, 실천 과정의 확인에 80%의 시간을 썼다고 한다. 중앙부처 및 지방 순시 등 현장 시찰을 자주 한 것도 집행의 확인과 사기(士氣) 진작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계획의 수정이 필요할 때는 토론절차를 거쳐 신속하게 했다.
 
  (5) 국민의 각성과 참여: 박 전 대통령은 국민이 자조(自助) 정신을 발휘하여 자발적으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는 인간과 조직의 정신력에 주목한 사람이다. 그는 한국인의 패배의식과 싸워 이긴 사람이다. 그는 경부 고속도로 건설 같은 눈에 뜨이는 구체적 업적을 통해서 국민의 체념과 자학(自虐)을 자신감으로 교체해 갔다.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도 작사, 작곡했다.
 
  (6) 정부는 맏형, 기업은 전사(戰士): 박 전 대통령은 경제관료와 기업인이 이견(異見)을 보이면 많은 경우 기업인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정부 주도형 경제개발 정책을 채택했으나 기업이 엔진이고, 경제전선의 전사는 기업인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은 기업 엘리트를 존중해 주었고, 기업인들은 대통령을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다.
 
  (7) 내각에 권한과 책임 위임: 청와대 비서실이 장관 위에 군림하는 것을 금지했고 장관의 인사권을 존중했다.
 
  (8) 관료 엘리트 중시, 학자들은 자문역: 실천력을 중시하던 박 전 대통령은 집행기관장으로서는 학자를 거의 쓰지 않았다. 학자들은 자문역으로만 부렸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서강대학교 교수 출신인 남덕우 부총리였다. 남 부총리도 실무 능력의 검증을 거친 다음에 중용(重用)되었다.
 
  (9) 정치와 군대의 압력 차단: 그는 관료들이 국익(國益)과 효율성의 원칙에 따라 소신대로 일할 수 있도록 군인들과 정치인들의 경제에 대한 개입을 차단하고 견제했다. 군대의 힘으로써 집권한 사람이 군대의 영향력을 약화시킨 예는 매우 드물 것이다.
 
  (10) 경제발전 우선주의: 박 전 대통령은 경제발전이 결국은 안보와 민주주의 발전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 경제발전, 후 민주화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에 따른 비난에 대해서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대응했다.
 
  (11) 시장(市場)의 한 멤버로서의 정부: 박 전 대통령은 정부가 시장의 규제자가 아니라 한 참여자라고 생각했다. 박 전 대통령 시절의 정부는 시장 지배자라기보다는 시장의 일원으로서 시장 기능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정부는 기업가, 은행가, 개혁가로서의 역할도 했다. 전력, 철강 등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은 정부가 공기업을 만들어서 맡아서 하되 경영은 민간기업 방식으로 운영되도록 했다. ‘관치(官治)경제가 아니라 대통령이 CEO로 뛴 주식회사 대한민국이었다(김용환).’
 
  (12) 선택과 집중과 고집: 박 전 대통령이 채택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 중점 투자전략, 선 성장-후 분배 전략, 과감한 외자 유치 전략은 모두 성공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정책과 전술은 수시로 변경했지만, 철학과 전략은 18년 동안 그대로 밀고 나갔다.
 
  조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지도력의 원리는 역사의 원리와 인간성의 본질을 간파한 바탕에서 장기적 전략을 세우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짠 뒤 세심한 확인으로 신속하게 사업을 추진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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