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원문] 처음 공개되는 辛夕汀의 처녀작 〈가을밤비〉와 단편소설 外 : 월간조선

신석정(辛夕汀) 시인의 작품 전집에서 빠진 미발굴 시와 산문, 단편소설을 《월간조선》이 공개한다. 2009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신석정전집》(총 5권)에 포함 안 된 이들 작품은 1921년부터 1939년 사이 《조선일보》에 게재된 것으로 시인의 가족들과 문학평론가조차 지금까지 존재 여부를 몰랐었다.

또 신석정 시인의 처녀작으로 알려진 〈기우는 해〉(《조선일보》 1924년 4월 19일)보다 3년 앞서 발표된 시도 처음 발견됐다. ‘가을비는 오도다’로 시작되는 〈가을밤비〉는 《조선일보》 1921년 9월 26일자 4면에 실렸는데, 〈기우는 해〉가 ‘소적’이란 필명으로 게재됐다면 〈가을밤비〉는 ‘석정’이란 이름을 그대로 썼다.

1921년은 신석정 시인이 15세 되던 해로, 전북 부안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일 때다.

성해 이익상.

시인의 아들이자 유족대표인 신광연(辛光淵)씨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첫 시는 1924년 발표된 〈기우는 해〉이고, 아버지나 문학평론가들 모두 그렇게 알고 있다”며 “〈기우는 해〉에 비해 〈가을밤비〉는 시어와 표현이 껄끄럽고 덜 다듬어졌다는 느낌이 들지만 15세 무렵에 쓴 시가 신문에 실렸다는 점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석정의 시가 어떻게 《조선일보》에 대거 실렸을까. 시인의 문중과 유족에 따르면, 당시 《조선일보》 학예보 기자로 성해(星海) 이익상(李益相·1895~1935)이 재직했는데 석정과 인척관계였다고 한다. 석정의 사촌누나가 성해와 결혼했다는 것이다.

성해는 전주사범을 나와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며, 사회주의 이념을 담은 〈흙의 세례〉〈광란〉 등을 저술, 소설가로 활동했다.

신석정 시인의 후손들은 “시인이 성해 선생에게 부담을 줄까 우려해 1924년 〈기우는 해〉를 투고할 때 본명 대신 ‘소적’이란 이름을 써 자신의 존재를 안 알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1926년 12월 15일자 3면에 석정의 시 〈나의 마음〉 바로 아래 성해의 연재 번안소설 〈열풍〉이 함께 실려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게 한다.

신석정 시인의 미발굴 자료는 ‘공연예술자료 연구가’ 김종욱씨가 제공했으며 모두 31편을 찾았으나 지면을 고려해 일부만 소개한다. 원본 의미를 살리면서 현대어 맞춤법 표기에 따라 수정했음을 밝혀둔다.

가을밤비

-석정 생(石汀生)
(신석정의 본명은 錫正이다. 아호는 夕汀, 石汀, 釋靜, 石志永, 胡星, 蘇笛 등을 썼다.)

1921년 9월 26일 《조선일보》에 실린 신석정의 시 〈가을밤비〉. 시인을 꿈꾸던 습작시절의 시다.

가을비는 오도다
부슬부슬
끊일 새 없이 늘
들릴락말락
소리 없는 느낌을
주도다
밝고 맑은 전등(電燈)불 밑에
하염없이 앉았는
그와 나에게
가을에 비는 오도다
줄곧 꾸준히
우수수 떨어지는 빗방울은
헤 너부러진
넓은 잎을
비단결보다도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윤나게
희미하게 비치는
구석장 이불에
반사(反射)되도다
가을비는 오도다
살랑거려 불매
섞여 내리도다
비야, 바람아
너와 나, 나와 그
오래 장치(裝置)하였던
그 느낌을
힘껏 마음껏
불어라 울어라

1921년 9월 19일 야(夜)

(출처=《조선일보》 1921년 9월 26일)

헤매이는 燈불

-신석정(辛夕汀)

나는 본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뼈만 남은 나뭇가지엔
별들이 은(銀)줄을 매고 있는 것을
그리고 고요한 강(江)가에선
돌 씻는 물소리 들려오나니
적적(寂寂)하고도 캄캄한 이 밤을
홀로 반주(伴奏)하는 뜻일까?
×
나는 본다!
캄캄한 벌판을
꺼질 듯이 꺼질 듯이
혼자서 헤매이는 등불을-
오! 이 어둔 밤을
헤매이는 등불의
주인(主人)은 누구이며
가는 곳은 그 어데런고?
×
나는 이르노라!
세상(世上)이란 달도 없는
그믐밤이런가!
그러면 인간(人間)이란
이 밤을 헤매이는
등불과도 같구려!

1926년 2월 6일

(출처=《조선일보》 1926년 3월 11일)

흙에서 살자

-신석정(辛夕汀)

1926년 5월 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시 〈흙에서 살자〉.

날이 저물도록
나는 앞들에 나아가 땅을 팠노라!
이마에 구슬 같은 땀이 나도록
나는 힘들여 땅을 팠노라!

오늘 하루를 땅을 팠으니
내일엔 그곳에 씨를 뿌리노라!
새파란 엄이 난 뒤
고운 꽃이 진 뒤
아름다운 열매를 얻으려고-

동무여!
내일엔 앞뜰에 나아가지 않으려느냐?
아름다운 열매를 얻기 위하여
씨 뿌리려는 앞뜰에-
그리하여 우리는
길이길이 흙에서 살자!-

1926년 4월 19일

(출처=《조선일보》 1926년 5월 9일)

나의 마음

-신석정(辛夕汀)

1926년 12월 1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시 〈나의 마음〉. 시인의 종매부인 이익상의 번안소설 〈열풍〉이 바로 아래 실렸다.

‘백사장(白沙場)에 흘린 피’ 가운데에서
해묵어 깊은 숲엔
지나가는 바람이 휘파람을 불고
갈매기 노래 구슬픈 바다 위에는
식어진 석양(夕陽)이
금길 냅니다…

이럴 때 내 마음을 그 길에 놓아주면
내 마음은 그 길로 날아가면서
나를 보고 웃으며 이르는 말이
“너도 이 세상 놈이 아니냐?”
고요!

1926년 11월

(출처=《조선일보》 1926년 12월 15일)

沙場의 순간

-석정(夕汀)

습작시절 쓴 신석정의 단편 〈사장의 순간〉. 《조선일보》 1927년 6월 7일자에 실렸다.

×

M읍처럼 좁은 곳이 없건만 그래도 봄이 되면 놀랄 만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M읍일 것이다.

그것은 M읍에서 5리 남짓한 곳에 황해안의 작은 포구인 S포(浦)가 바로 거기에 있는 까닭이다. M읍 서북편에 그 넓은 벌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목장(牧場)이 있는 것도 한 이유일는지 모르지만….

×

며칠을 두고 드세게 불던 남풍 끝에 구슬피 날리던 비도 갠 뒤 S포구의 앞바다엔 파란 물결이 잔잔하고 멀리 백사장이 그린 듯이 똑똑히 보이는 하루였다.

날마다 모여드는 사람이 으레 작은 장을 이루는, S포구에는 며칠을 두고 내린 비가 끝난 뒤라 한꺼번에 모인 사람이 마치 미리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모여서 우글우글하는 것은, 보는 사람으로 퍽이나 흥성스러웠다.

멀리 한 척 또 한 척 나오는 어선은 갠 하늘의 파란빛과 아울러 내리쬐는 햇볕에 유달리도 하얗게 빛나고, 흰 돛이 연방 가까워질수록 뱃노래에 섞인 북소리는 바다 위로 걸어오듯이 고요히 흘러와서는 선창가에 철썩거리는 물소리와 조화되고 마는 것이었다.

아득히 뜬 흰 돛이 연방연방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S포구의 해안에 모여든 생선장수의 떠드는 말소리가 늘어가고 그렇게 모인 사람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듯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는 몰려나오는 사람이 끝없을 것 같다.

그렇게 사람이 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S포구의 가운데 골목에서 거무스름한 사람을 가운데 둘러싸고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벌떼 모양으로 몰려나오기는!

그렇게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나도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었다.

‘어쩐 일일까?’ 하는 호기심은 나를 적이 그곳으로 끌고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일시에 해안에 섰던 사람들의 시선은 그곳으로 몰리고 쫓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

“야! 한 잔 먹자. 심심한데.”

“어디로 데리고 갈거나.”

그렇게 벌떼처럼 몰려오는 그들을 쫓아가서 마주 오는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서로 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눈이 멀었을 수가 있나.”

또 한 사람이 인제야 무엇을 알아낸 듯이 이렇게 중얼대자 “그러니까 더 맛이 있지” 하고 기다리는 한 사람의 말이 끝나자, 그들의 가운데에 파묻혀오던 거무스름한 사람을 나는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등에는 해적(海笛)을 메고 왼손으로는 지팡이의 한편 끝을 단단히 잡고 오는 눈먼 판수였다.

옷은 땅에나 입었는지 다 헤어져서 제법 흰 살덩이가 여기저기 내다보이고 앞가슴에는 작지 않은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그는 그의 작은 ‘안내자(案內者), 그가 데리고 다니는’, 이를 따라서 마치 죄나 진 사람처럼 아무 말 없이 선창 저편 흰 모래 깔린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때 수많은 사람 가운데 있던 내가 나도 모를 만큼 거의 본능적으로 따라가게 된 것을 나는 알았다.

열서너덧 살쯤 되어 보이는 그의 작은 안내자는 자리를 둥글게 잡고 그 주위에는 모인 사람이 작은 성을 쌓고 있었다.

“배가 곧 들어오겠지요?”

“아직, 멀었으니 어서 하시오.”

판수의 묻는 말에 대답을 하는 어린 안내자의 눈에는 몹시도 바쁜 빛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어서 했으면! 하고 퍽 기다렸다.

등에 멘 해적을 끌어 앉은 판수의 주름 잡힌 얼굴은 묻지 않아도 그의 과거를 역력히 말하는 것 같았다.

해적의 가는 줄에 활이 걸려서 오가는 동안 떠들던 사람들은 갑자기 조용해지고 그의 입에서는 작은 혀가 합주(合奏)를 하는 것이었다. 그 고운 멜로디가 연방 깊어가면 깊어갈수록 그 소리를 따라서 나의 앞에는 그 어느 딴 세상이 전개(展開)되는 것만 같았다. 마치 이른 아침에 넓은 벌판을 감돌던 안개가 차츰차츰 사라지는 것과 같이….

그리고 나의 마음은 전개되는 그 나라를 끝없이 내달리고 그곳에서 헤매는 나를 나는 발견하였다.

판수도 이제 제 흥에 겨웠다는 듯이 고개를 기웃거리고 흥! 하는 그의 콧소리와 아울러 궁상맞게 그의 감긴 눈이 깜빡거리자 이 구석 저 구석에서는 웃음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린 안내자가 “돈이야! 돈” 하고 부르짖자 한편에서부터 돈을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모래에 떨어지는 돈 소리가 사뿐사뿐 하고, 어떤 놈은 바윗돌에 맞아 땡그랑 할 때마다 해적을 켜는 판수의 입 가장자리엔 적이 가는 웃음살이가 춤추고 있었다.

×

해적은 계속된다.

사람들은 조용하게 그의 손을 쳐다볼 뿐이다. 어떤 때는 가늘고 또 길고 턱없이 올라가다가는 넌지시 내려오는 그 고운 곡조가 그의 손재주 부르는 대로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죽은 듯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판수는 어느 동화(童話)를 빌려 말하자면, 마치 어느 무인절도(無人絶島)에서 방금 이 바다를 건너온 것 같고, 저 해적은 그 섬에서 물새와 동무삼아 하던 것이거니 하는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번개같이 지나간 뒤 그 소리는 더 말할 수없이 귀엽고 그리운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지나간 뒤 그 판수를 쳐다볼 때 아무리 보아도 그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고 세상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싫었다.

××

“돈이야! 돈” 하고 부르짖는 작은 안내자의 말소리가 나자 “물이야! 물! 물!” 하고 떠드는 사람이 있었고 물은 얼마 아니하여 판수의 자리 잡은 사장(沙場)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우-하니 일어서서 수군수군 하다가는 돛대가 빽빽이 들어선 선창가로 슬슬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놈 먹어싸데.”

“아니 죽었어도 귀신이 다 됐던 걸.”

헤어지는 그들 사이에는 이런 말소리가 들릴 뿐이요, 누구 한 사람 돈 한 푼 던지고 가는 이는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갑자기 헤어지는 틈에 곱게 전개되던 예의 딴 세상도 헤어지는 그들과 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사장(沙場)의 순간! 그야말로 영영 오지 않을 순간이었다.

선창가에는 둥둥치는 북소리 사공이 외치는 소리, 빽빽이 들어선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 철석쿵 철석쿵 하는 물소리, 이런 교향악이 한창 길어졌었다.

모래를 부스스 떨고 일어나서 이제 할 수 없다는 듯이 선창으로 향하게 된 판수의 얼굴은 산사(山寺)에서 들리는 저녁 종(鐘)소리 그것보다도 더 구슬픈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마치 얼빠진 세상 놈들을 비웃는 것도 같고 안타까운 제 신세를 한탄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얼음장같이 서늘한 그 웃음의 뜻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 뜻을 알려는 사람도 없었다.(끝)

1927년 6월

(출처=《조선일보》 1927년 6월 7일)

작은 誘惑

-신석정(辛夕汀)

鄕土柳信이란 코너에 쓴 수필 〈작은 誘惑〉. 1939년 《조선일보》 5월 23일과 25일 양일간 게재됐다.

백목련(白木蓮) 꽃이 뚝뚝 지고 송홧(松花)가루 펄펄 날리는 5월이 되어도 ‘안기’(누구를 지칭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글의 청자(聽者)인 김아(金鴉)가 아닐까.-편집자주)야.

너는 끝내 나를 부르지 않는구나….

김아(金鴉-석정의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의 서문을 쓴 이-편집자주) 형(兄).

봄이 제아무리 드세게 고집 센 겨울을 몰아내고 그 봄은 겨울을 향하고 간곡히 애걸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넓은 천지(天地)를 차지했다기로서니 진한 초록빛 잉크를 여기저기 함부로 내뿌리는 5월이 저 황해안을 거쳐서 다시 상소산(上蘇山·시인의 고향인 전북 부안의 인근 산-편집자주)을 더듬어 내려와 황개(黃蓋)메 기슭에 들러 ○○(판독불가-편집자주) 묵은 산장(山莊) 밤나무 숲에 자리를 잡을 때에는 봄도 서늘한 가슴을 쥐어 뜯으며 터를 아니 아시지 못했을 겁니다. 이리하여 산장 일대에는 뭇새들이 음악회가 열리기 비롯했습니다.

눈부시게 햇볕 빛나는 숲에서는 꾀꼬리, 방울새들의 주고받는 노래가 황홀하고 촐촐한 5월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린 소리가 또 한아(閑雅)히 들려올 것입니다. 시방도 은은한 방울새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금세 꾀꼬리 소리가 굴러오고 하여 내 몸뚱이는 어딘 듯 초록빛이 배어 드는 듯합니다, 그려!

김아 형.

○○재(○○齋·판독불가-편집자주) 건축공사도 이제 끝이 났겠습니다, 그려! 구십춘광(九十春光)이 다가도록 벼르기만 하면 변산순례(邊山巡禮)는 언제 떠나려오? 올 봄사 말고 청변산(靑邊山) 이름 높은 진달래는 못 보았거니, 어서 ‘룩색’을 걸머지고 ‘텐트’도 개어 넣고 신록의 변산으로, ○○(판독불가-편집자주)의 변산으로 떠나시지 않으렵니까?

요래구곡(遙○九曲・판독불가) 긴긴 끝을 더듬어 올라가면서 새 잎새가 풍기는 초록빛 향기를 호흡해도 좋겠고 능가봉(楞伽峰) 넘어가는 흰 구름을 발아래 디디며 청제비도 못 올라채는 낙조대(落照臺)에 올라앉아 수평선을 걸어오는 황혼과 더불어 줄등을 켠 듯한 칠산바다(전남 영광군과 부안군 일대의 바다 위에 섬 7개가 모여 있어 붙여진 이름-편집자주)의 어화(漁火)도 좋겠습니다.

그보다 더 ○○ 500미터 위에 앉아서 당신이 그리고 내가 못내 가고 싶어하는 지리산(智異山) 높은 봉우리가 노령산맥(蘆嶺山脉) 너머로 뚜렷이 바라볼 제, 우리는 얼마나 한없는 여행을 자아내며 즐기겠습니까.

자, 인제는 의상(義湘·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위치한 높이 508m의 봉우리-편집자주)에서 내려서서 ‘불사의 방장’(不思義方丈·신라 때 진표(眞表)가 창건한 토굴. 고승들이 벼랑수행을 하던 곳으로 전해진다.-편집자주) -내가 무서워서 돛 같은- 을 기어코 구경하고 채석강(彩石江)을 들러서 뱃길도 곰소(전북 부안, 고창과 맞닿은 만(灣)-편집자주)로 돌아와도 좋으려니와 그대로 산길을 타고 내려와 가마소(釜沼)로 빠져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쉽사리 끝나는 변산순례를 글쎄 언제나 떠나야 한단 말이오?

김아 형.

세월처럼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게 또 어디 있을까요? 변산이 아니면 근교(近郊)라도 좋지 않겠습니까. 가람(嘉藍·李秉岐 선생을 지칭-편집자주)님과 조운(曹雲·시조시인-편집자주)님이 다녀가신 뒤부터 바짝 관심을 가지게 된 시어산(侍御山) 아래 매창(梅窓·조선시대 시조와 한시로 유명한 기생. 석정은 1958년 번역시집 《매창시집》을 펴내기도 했다.-편집자주)의 무덤을 찾아서 멀리 석불산(石佛山) 벌린 날개를 바라봐도 좋겠습니다. 그때는 우리 꽃 싸움의 친구 해원이와 탄이를 데리고 ‘룩색’ 속에는 《매창시집》을 넣어 가지고 가는 것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단 하루라도 좋고 단 몇 시간이라도 좋으니 어서 이 시끄러운 지상을 멀리 떠나서 초록빛 5월을 자리 잡고 호흡한다는 것은 우리 생활에서 어찌 못할 주요한 과목이 아닐까요.

언제나 자유롭고 언제나 평정(平靜)한 우주(宇宙)를 순례(巡禮)할 수 있는 날개를 심장에 간직한 것은 우리의 죄가 아닐 것입니다. 도시생활은 즐거워야 할 것이거늘 즐겁지 못할 바에는 좀 더 슬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즐거운 데서는 우리는 무한한 미(美)를 참을 수 있으려니와 슬픈 데서는 우리는 성(聖)스런 미를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무척 즐겨 하는 포(미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Edgar Allan Poe-편집자주)는 침울한 겨울에 읽고, 어서 뛰어 나오십시오. 5월의 변산이 아니거든 5월의 청구원(靑丘園)이라도….

저 산장 뒤 밤나무 숲에서는 은방울 굴리는 듯 옥(玉)을 굴리는 듯 방울새 소리가 시방도 은은히 들려오지 않습니까? 그도 싫으면 밤 들어 심장이 터져라 울어 예는 서도정(西桃亭) 소쩍새를 들으며 우리는 슬픈 5월이라도 가져봅시다.

김아 형.

이 글로써 당신을 유혹하지 못할진대 이윽고 흰나리 꽃이 필 무렵 -혹은 질 무렵- 나는 다시 편지를 쓰되 초록빛 잉크로써 당신을 한사하고 유혹할까 합니다.

그러나 백목련 꽃이 필 무렵을 말하던 ‘안기’가 송홧가루가 날릴 때까지 말이 없듯이 나도 당신을 잊어버리고 살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설마한들 흰나리 꽃이 지고 5월이 다가도록 내가 당신을 잊어버리고 살아야겠습니까.

×

너는 끝내 나를 부르지 않는구나… 하도록….

5월 9일 밤.

(출처=《조선일보》 1939년 5월 23,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