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태환 “어느 순간 내가 家長이 되어 있더라”, 박태환 곁에는 어른이 없었다
⊙ ‘남성호르몬’ 투여 경위 관련, 검찰 발표와 상반된 주장 고수, 형사재판에서 진실 밝혀질까
⊙ ‘남성호르몬’ 투여 경위 관련, 검찰 발표와 상반된 주장 고수, 형사재판에서 진실 밝혀질까
- 지난 3월 27일 박태환은 도핑 파문과 국제수영연맹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것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
“박태환이 도핑에 걸린 것 같다”는 귀띔을 받은 건 지난 1월 25일(일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제보를 받고 “알아보겠다”고는 했지만, 속으로는 ‘설마’ 싶었다. 박태환(26)은 작년 9월 말에 열렸던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수영 종목에 출전해 은메달 1개와 동메달 5개(계영 3종목 포함)를 땄다. 2006 도하,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연속으로 3관왕에 올랐던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성적이었다.
기대했던 금메달은 못 땄지만 박태환은 도핑 테스트만큼은 아무 문제 없이 통과했다. 그가 금지약물을 복용했다면 그 시점부터가 의문이었다. 곰곰이 따져 봤지만 ‘박태환 도핑설’은 개연성이 적다는 결론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날 밤 대한수영연맹 고위 관계자 두 명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진위를 물었다. 모두 “전혀 모르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대한수영연맹은 국제수영연맹(FINA)으로부터 ‘박태환이 도핑 양성반응을 보인 사실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돌이켜보면 취재 방식이 잘못됐던 것 같다. 처음부터 ‘박태환이 도핑이라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는 식으로 접근했더라면 조금 다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박태환 도핑’ 제보를 받고 난 다음 날인 1월 26일 오전, 취재 과정에서 다른 경로로 이런 소문이 돌고 있음을 알게 됐다.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 측에 박태환이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도핑과 관련해 조만간 발표할 사안이 있는가’라고 문의해 보니 “우리가 실시한 도핑 테스트로 문제가 생긴 선수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FINA가 전문 시료 채취 기관을 통해 박태환에 대한 도핑 테스트를 주관하고,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검사 결과를 선수와 FINA, 대한수영연맹에 알렸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박태환 父, “후원기업 없어 서글퍼”
26일 낮에 박태환의 아버지인 박인호씨와 통화를 했다. 박씨는 박태환을 관리하는 소속사 팀지엠피(GMP)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들에게 금지 약물을 주사한 의사를 고소하고, 이로 인해 아들이 검찰 조사까지 받은 상황에서도 태연함을 유지했다.
오히려 박씨는 “작년 아시안게임 땐 태환이가 연습 기록만 내면 금메달 딴다고 보고 걱정 하나도 안 했는데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태환이가 내년 리우 올림픽까지 뛰겠다고 하는데, 후원하겠다는 기업이 없어 서글프다”는 말을 했다. 이미 올림픽 금메달까지 일궜던 아들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 올림픽에 도전하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안쓰럽다는 부정(父情)을 드러냈다.
이런 박씨에게 박태환의 도핑에 대한 실상을 물어보기가 꺼려졌다. “박태환은 한국 스포츠의 보물이며, 은퇴하지 않고 선수생활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한국 수영을 위해선 감사한 일”이라는 말로 통화를 마쳤다. 그게 실제 마음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팀지엠피 측에서 느닷없이 보도자료를 냈다. 자초지종 설명은 없이 금지약물 주사를 놔 준 의사에게 모든 민·형사상 법적 책임이 있다는 일방적인 주장이 담겨 있었다. 국내 대부분의 매체는 이 보도자료를 그대로 기사화했다.
하지만 이후 취재와 검찰 조사 결과, 박태환 측이 보도자료를 통해 주장한 내용은 사실과 차이가 크고, 이번 사태와 관련해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도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는 박태환의 부탁을 받고 그를 T병원에 소개해 준 미용 컨설턴트 A씨와 T병원 김모 원장이 검찰에 진술한 내용을 가장 먼저 보도했고, 곧이어 A씨와 김씨를 단독 인터뷰해 기사화했다. 박태환이 먼저 미용 컨설턴트 A씨를 통해 병원을 섭외했고, 3000만원이 넘는 치료(비타민 처방과 노화방지 프로그램)의 무료 협찬을 받았으며, 도핑에 걸리고 난 다음엔 의사를 만나 남성 호르몬 치료에 대한 내용을 몰래 녹취해 검찰에 제출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을 취재하는 와중에 박태환의 아버지 박인호씨와 다시 통화를 했다. 공식적인 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박씨는 격앙된 어조로 “태환이는 이미 나쁜 선수가 되어 버렸다. 태환이가 꼬맹이였을 때부터 가장 오래 봐 온 기자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원망했다.
박태환의 말 뒤집기
한국의 올림픽메달리스트로는 사상 처음으로 도핑에 적발되고, 중징계를 받는 오점을 남긴 박태환은 3월 27일 국내에서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박태환은 사과문을 읽었다.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로 인사를 드리게 돼 말로 다할 수 없이 죄송하고 무거운 마음입니다. 고의성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대표선수로서 이런 결과가 발생한 걸 반성합니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실망을 안긴 점 거듭 사죄드립니다. 어떤 비난도 질책도 달게 받겠습니다. 깊이 자숙하며 반성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가까운 분들은 지난 10년간의 모든 영광이 물거품이 되고 모든 노력이 약쟁이… 로 치부되는 것에 대해 억울하지 않으냐고 얘기한다”는 대목부터는 눈물을 비치고, 코를 자주 훔쳤다.
그런데 박태환은 호르몬 도핑과 관련한 의혹은 여전히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특히 남성호르몬제 네비도 주사를 맞았던 작년 7월 29일 상황에 대해선 검찰 발표와도 상반된 주장을 해 취재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호르몬 수치가 낮다는 부분은 작년 9월에 도핑 검사 결과가 나온 이후에 병원을 통해 알았다”면서 “호르몬 수치가 낮아서 (주사를) 놨다는 것도 도핑 테스트 이후 의사 얘기를 듣고 알았다”고 말했다.
혼란에 혼란을 더하는 발언이다. 검찰은 2월 6일 박태환이 고소한 T병원 김모 원장을 기소하면서 “의사가 건강검진을 하고 박태환에게 ‘남성호르몬을 보완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해서 박태환이 네비도를 맞은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또 “의사는 박태환에게 ‘테스토스테론이 체내에서 만들어지는 호르몬이라 보완해도 문제 없다’고 설명했다”, “박태환은 테스토스테론이나 네비도가 문제가 된다는 구체적인 지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 걸까. 또 검찰의 말처럼 박태환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호르몬(테스토스테론)=스테로이드’라는 기초 상식을 정말 몰랐다면 씁쓸한 일이다.
박태환은 FINA 청문회 때 한국 검찰의 수사 결과를 제출했다. 본인의 과실이 없음을 입증하려는 소명 자료였다. 그런데 박태환은 사과 기자회견에서 이 검찰 수사 결과까지 부인했다. 박태환에게 호의를 가지고 수사를 했던 검찰도 당혹스러워할 법한 ‘말 뒤집기’였다.
박태환이 남성호르몬을 맞은 횟수도 명확하지 않다. 박태환은 “2013년 12월에 호르몬 주사를 맞은 적이 없다”면서 “병원에는 피부관리 때문에 갔고, 작년 7월 29일 비타민 처방을 얘기할 때도 의사는 호르몬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태환의 주장대로라면 그는 혈액 검사 결과가 나온 다음에도 남성호르몬 수치가 낮다는 사실을 몰랐고, 검사 후 9개월쯤 뒤에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네비도 주사를 맞았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그랬다면 검찰은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김 원장을 불구속 기소가 아니라 구속 기소했을 것이다. 박태환의 말과 검찰 수사 결과가 다른 점에 대해 기자회견에 동석한 변호사는 “병원과의 형사재판 결과가 나오면 더 자세한 말씀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실패와 시련을 이기며 성장
박태환 아버지가 느낀 원망의 감정만큼 기자의 실망도 컸다. 한국 스포츠사를 통틀어 최고의 업적을 남겼다고 믿었던 박태환이 하루아침에 ‘약쟁이’라는 오명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박태환은 올림픽 통산 금메달 1개와 은메달 3개를 땄다. 세계선수권에선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걸었다. 수영은 육상과 함께 스포츠의 근간을 이루는 기록 종목이다. 가장 원초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인간 한계에 도전한다. 더구나 박태환은 수영의 여러 영법 중에서도 가장 속도가 빠른 자유형으로 세계 정상에 올랐다.
박태환이 실패와 시련을 이겨 내면서 위대한 선수로 성장했다는 점도 드라마틱했다. 출발은 허무했다. 그는 중학교 3학년이었던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최연소 수영 대표로 출전했다. 자유형 400m 예선에서 먼저 물에 뛰어들었다가 부정 출발로 실격했다. 야외에서 훈련하느라 까맣게 그은 피부에 까까머리를 한 박태환은 혼자 쓸쓸히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 속상하고 창피해서 한 시간쯤 라커룸 화장실에 몸을 숨겼다. 제자를 대표팀에 추천했던 노민상 감독 역시 박태환의 아버지와 서울의 한 포장마차에서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며 슬퍼했다.
박태환은 나중에 “수영복만 물에 빨고 나왔다”고 농담을 했다. 하지만 그때의 아픔은 잊지 않았다. 정확하면서도 빠른 스타트를 할 수 있도록 훈련에 힘을 쏟았다. 아테네 올림픽 이후 단 한 번도 부정 출발을 하지 않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출발 반응 속도를 유지했다. 박태환은 2012 런던올림픽 때 어처구니없는 심판의 실수로 실격(부정 출발) 처분을 받았다가 취소되는 소동을 겪었다.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금메달 대신 은메달을 걸었다. 되풀이된 악연이 얄궂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올림픽 데뷔 무대를 망쳤던 박태환은 1년여 만에 국제 무대에서 이름을 드러냈다. 경기고 1학년이던 2005년, 동아시안게임 자유형 1500m에서 15분00초32로 2위를 하며 수영계를 열광시켰다. 한국 선수가 15분 벽 돌파를 눈앞에 둔 것이다.
수영장에서 열리는 최장거리 종목인 자유형 1500m의 기록 진화는 더뎠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블라디미르 살니코프(구 소련)가 처음 14분대로 우승(14분58초27)한 이후 35년 동안 27초쯤이 줄었을 뿐이다. 호주의 수영 영웅 그랜트 해킷이 2001년 일본 후쿠오카 세계선수권에서 세웠던 세계기록(14분34초56)은 10년 동안 꿈쩍 않다가 2011 상하이 세계선수권에서 중국의 쑨양(14분34초14)에 의해 깨졌다. 쑨양은 이듬해 런던 올림픽에서 다시 세계기록을 경신(14분31초02)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열일곱에 세계 정상, ‘수영 천재’
‘16세 박태환’의 15분00초는 지금 회상해도 대단했다. 2005년 말 처음 그를 인터뷰하면서 한국의 사상 첫 올림픽 수영 메달도 가능하겠다는 상상을 했다.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박태환은 2006년 여름 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열렸던 팬 퍼시픽(Pan Pacific) 선수권대회가 무대였다. 박태환은 자유형 200m에서 아시아 신기록으로 은메달을 따더니, 자유형 400m는 아시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걸었다. 자유형 1500m까지 우승하며 2관왕에 올랐다. 팬 퍼시픽은 환태평양 연안 국가인 미국, 호주, 일본 등 수영 강국의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의 대회다.
박태환의 역영은 경이로웠다. 2001년 후쿠오카 세계선수권대회 때 16세였던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가 200m 접영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며 맛봤던 흥분 이상이었다.
정작 빅토리아에서 만난 박태환은 “예상보다 기록이 잘 나왔다”, “내 스피드가 느껴지긴 하는데 (레이스에) 도움을 줄 선수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싱거운 말을 했다.
그의 침착함은 어쩌면 아테네 올림픽에서 실격의 아픔을 겪으며 성숙해진 덕분이 아닐까 한다. 박태환의 스승이기도 한 노민상 대표팀 감독이 잔뜩 쉰 목소리로 “제가 태환이를 10년간 키웠습니다”라며 감격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박태환에 10년 공들인 노민상 감독
노 감독은 이른바 비주류다. 자신을 ‘잡초’라고 부른다. 수영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려서부터 물을 좋아했다. 한남초등학교 시절 헤엄쳐서 한강을 건넜다고 한다. “어(魚·물고기) 자에 왈(曰·말하다) 자를 더하면 내 성(姓)인 노(魯)자가 아니냐”고 농담한 적이 있다. 오산중 시절엔 태릉선수촌 수영장에 갔다가 당시 대선수였던 조오련(작고)의 수영복을 ‘부적’으로 삼으려고 슬쩍 가져갔다가 돌려준 일화가 있다. 오산고를 졸업하고 군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했던 그는 전역 후 초등학교와 체육센터에서 지도자로 경력을 쌓았다. 친지나 학부모 등에게 부탁해 구한 수영 관련 외국 전문 서적을 읽고 실력을 쌓았다. 순전히 독학이었다. 영어 문장을 해석하기가 어려우면 사전을 펼쳐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책에 적고 나서 전체적인 의미를 가늠해 나갔다.
노 감독은 재야(在野) 지도자로 조금씩 인정을 받아 가던 나이 마흔에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박태환을 만났다. 가르친 지 2년쯤 지나면서 가능성을 보고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시켰다. 박태환이 자유형 중·장거리뿐 아니라 단거리 종목까지 두각을 나타냈던 이유는 어려서 적금 붓듯 쌓았던 지구력 훈련 덕분이다.
박태환은 2006년 겨울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 나가 금메달 3개 등 7개의 메달을 걸었다. 자유형 1500m에선 아시아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15분 벽을 깨며 14분55초03으로 우승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이상하리만치 언론 접촉을 피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0년 스승이었던 노 감독을 떠나 별도의 전담팀을 꾸리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성격이 여린 편인 박태환은 방송사 등에서 취재진이 집으로 찾아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늦게 귀가하곤 했다.
도하 아시안게임 MVP
박태환은 얼마 후 도하 아시안게임 최우수선수(MVP) 후보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2006년 12월 14일 밤 비행기로 노 감독과 다시 도하로 떠나기로 했다. 그날은 기자의 생일이기도 했다. 점심 무렵 대한수영연맹 사무실에서 노 감독을 만나 박태환을 인터뷰할 수 있을지 부탁해 봤다. 노 감독은 “태환이네가 날 데리러 와서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면서 “공항 가는 차 안에서 얘기를 나누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일단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 있는 노 감독의 집으로 갔다. 노 감독의 부인이 데워 준 곰국에 김치를 곁들여 늦은 점심밥을 먹었다.
짧은 겨울 해가 질 무렵, 박태환 가족이 노 감독 집 앞으로 왔다. 박태환 아버지가 운전하는 구형 카니발 승용차에 무작정 올라탔다. 박태환의 부모와는 그때 처음 인사를 했다. 차 맨 뒷자리에 아이팟을 낀 채 가로로 누워 있던 박태환은 ‘불청객’을 슬쩍 쳐다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공항 라운지에서 어렵사리 인터뷰를 했다.
다음 날 신문을 제작하는 사이, 박태환이 중국에서 갈아타기로 한 카타르 항공사의 비행기에 문제가 생겼다. 박태환이 공항에서 12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도하에선 박태환이 MVP로 뽑혔다는 발표가 났다. 도하 공항에서 박태환을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은 허탕을 쳤다. 《조선일보》에 나간 박태환 인터뷰는 MVP 수상 후 최초이자 단독 기사가 되어 버렸다.
박태환은 2007년 1월에 전담팀을 만들어 독자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첫 시험 무대는 2007년 3월 호주 멜버른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대회였다. 보통 세계선수권은 여름인 7~8월에 열린다. 남반구인 호주는 3월이 여름이었다. 멜버른 세계선수권은 도하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석 달 만에 열리는 대회였다.
박태환의 첫 종목인 남자 자유형 400m는 경영(競泳) 종목 첫날 치러졌다. 노민상 감독은 자신의 품을 떠난 제자의 예선 레이스(전체 2위)를 지켜보고 나서 “태환이가 금메달 딸 것 같다. 몸 상태가 아주 좋다”고 말했다. 노 감독의 말대로였다. 박태환은 예선을 마치고 저녁에 열린 결선에서 호주의 수영영웅 그랜트 해킷을 1초 이상 앞서며 우승했다. 특유의 폭발적인 스퍼트가 압권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한국 수영 사상 첫 세계선수권 금메달. 박태환이 왜 수영을 잘하는지 분석하려고 체형, 영법, 리듬감 등 모든 근거를 동원했다.
박태환에게 수영은 ‘운명’
박태환에겐 수영이라는 스포츠가 운명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키(182cm)는 서구의 강자들에 비해 평균 한 뼘 이상 작다. 근력도 유도나 레슬링, 역도 같은 종목 선수의 절반 수준 정도다. 하지만 그는 수영에 적합한 몸을 타고났다. 경주용 보트의 선체처럼 길고 좁으면서 납작하다. 박태환은 가슴 두께가 얇고, 엉덩이가 작다. 물에 잘 뜨면서 저항을 덜 받는 유선형의 몸이 작은 키와 부족한 힘을 보완한다.
박태환의 영법은 세계적인 장거리 선수와 마찬가지로 ‘전사분면(front quadrant)’ 형태이다. 물속을 가르고 있는 팔이 몸과 직각을 이루기 전에 다른 팔을 물에 넣는다. 몸의 중심축을 안정시키면서 몸을 ‘긴 배’의 자세로 만들 수 있다.
흔히 팔을 젓는 스트로크를 최적화하는 3대 요소로 ‘3R’을 든다. 레인지(range·거리), 리듬(rhythm), 릴렉세이션(relaxation·긴장 이완)이다. 박태환은 리듬감 있게 물을 타는 능력이 뛰어나다. 작은 물고기가 빠르게 헤엄치는 원리와 비슷하다. 일반적인 성인의 두 배 가까운 폐활량(7000CC)도 강점이다.
박태환은 멜버른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 1개(자유형 400m)와 동메달 1개(자유형 200m)를 땄다.
박태환 1기 전담팀은 2007년 말 해체됐다. 전담팀 지도자들이 처우 문제로 박태환 측과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박태환은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또 다른 지도자를 선임했지만, 2008 베이징 올림픽까지 경기력을 끌어올릴 만한 훈련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태릉선수촌으로 들어와 다시 노민상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올림픽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도 집중적인 훈련으로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올림픽 전 국내대회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쏟아내며 기대를 모았던 박태환은 결국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자유형 400m)과 은메달(자유형 200m)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로마 쇼크
영광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베이징 올림픽 이듬해인 2009년 로마 세계선수권에서 ‘노메달’이라는 수모를 맛본 것이다. 결선에 오른 종목조차 없었다. 박태환에 거는 기대치가 높았던 언론은 ‘로마 쇼크’라는 자극적인 말을 썼다.
당시 개인적으로는 박태환이 그렇게 욕을 먹을 만큼 부진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박태환이 못했다기보다 외국 선수들이 예상 이상으로 잘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올림픽에 모든 것을 걸었던 박태환에겐 사실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박태환이 로마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기자는 서울에서 ‘대표팀보다 이틀 먼저 로마에 간 박태환, 광고성 화보 촬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박태환이 모 외국계 의류업체 및 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로마에서 따로 화보를 찍었다는 제보를 받고 이를 확인해 기사화했다.
그의 성적이 좋았더라면 별문제 없이 넘어가도 그만인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가자 로마에 가 있던 국내 언론 매체들은 박태환의 ‘해이한 정신상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로마에서 참패를 맛보고 돌아온 박태환을 2009년 추석 직전에 태릉선수촌에서 다시 만났다. 미안한 마음으로 “화보 소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제가 기자였어도 알고서 (기사를) 안 쓸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국민이 등을 돌릴까 봐 무서워 한동안 인터넷도 하지 않았다”는 속내도 내보였다. “기름만 넣으면 차가 잘 달리는 건 아니지 않으냐. 엔진 오일도 갈아 줘야 하지 않느냐”는 말에선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었다.
박태환은 2010년부터 호주의 유명 지도자인 마이클 볼 코치와 손을 잡고 수영에 대한 의욕을 되살렸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선 3관왕에 오르며 잃어버렸던 명예를 되찾았다. 2011년 상하이 세계선수권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따며 다시 ‘월드 클래스’의 반열에 올라섰다. 2012 런던 올림픽 땐 부정 출발에 의한 실격 판정을 받았다가 번복되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은메달 2개라는 성과를 거뒀다.
가족회사 팀지엠피의 한계
박태환이 런던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에게 버팀목이 되어 줄 어른이 곁에 있었더라면 이번 약물 파동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박태환이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호주 브리즈번에서 볼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훈련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SK텔레콤이 박태환 전담팀을 운영하고 있었다. SK는 박태환에게 최정상급 프로야구 선수 연봉 수준의 금전적인 지원을 했고, 전지훈련비와 트레이너 등 전담팀 멤버들의 급여, 박태환 소속사 사무실 운영비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연간 18억~20억원의 비용을 썼다고 알려졌다.
박태환은 전담팀 멤버들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 “어느 순간 내가 가장(家長)이 되어 있더라”라는 혼잣말을 했다고 전해졌다. 실제로 그가 학생 때부터 모교 동문회 등에서 받았던 후원금은 집안 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현 박태환의 소속사인 팀지엠피는 그의 아버지, 누나, 매형 등이 운영하는 가족회사다. 사실상 최고 의사결정자는 박태환이다. 따라서 소속사가 선수의 사생활 등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다.
팀지엠피는 이번 도핑 파동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박태환은 가족에게 금지약물 투여와 관련해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을 남김없이 얘기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FINA 청문회도 거치기 전에 먼저 약물 양성 반응 사실을 보도자료를 통해 알리는 실수도 소속사가 갈팡질팡한 탓이다.
테스토스테론 수치 낮다고 도핑 못 피해
박태환과 그 소속사가 ‘20대 남성이 왜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했을까’라는 핵심 쟁점조차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일반적으로 갱년기에 접어든 남성은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 수치가 정상치보다 낮다. 이 경우 병원에선 약효가 오래가지 않는 호르몬제부터 투여해 경과를 지켜본다.
박원하 대한스포츠의학회장(삼성서울병원)은 “네비도가 나오기 이전의 호르몬제는 약효가 2~4주 정도였는데, 네비도는 1년에 4번만 맞아도 될 만큼 체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고 말했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낮은 선수가 체내 지속시간이 짧은 호르몬제를 맞으면 테스토스테론의 총량만을 따지는 1차 도핑 테스트는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다. 그래서 최근의 도핑 검사는 선수의 평소 호르몬 수치를 꾸준히 추적해 그 추이를 살펴보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수치가 정상범위에 있더라도 평소에 비해 뚜렷한 변화가 보이면 테스토스테론의 분자구성 비율까지 살피는 2차 검차를 한다. 체내에서 만들어진 테스토스테론과 체외에서 만들어진 테스토스테론은 탄소 동위원소의 구성비율이 다르다. ‘난 남성호르몬 수치가 낮으니 조금만 맞으면 도핑 테스트를 피할 수 있다’라고 믿고 부정행위를 저지르다간 언젠가 꼬리가 밟힌다는 얘기다.
박태환이 낮은 테스토스테론 수치 때문에 ‘신체 이상’을 느꼈다면 호르몬 보충이라는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박태환은 “수영을 하기 때문에 피부가 건조해 많이 붉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병원에서 비타민 처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피부 트러블 외의 다른 불편함을 의사에게 상담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박태환이 T병원에서 받은 치료의 종류를 취재했다. T병원 김 원장은 박태환이 20회 이상 치료를 받았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우선 도핑과 관련이 없는 건강관리 처방이 있다. 비타민, 미네랄, 글루타티온(항산화물질)은 정맥 주사로 투여한다.
남성호르몬제인 네비도는 엉덩이 근육에 주사한다. 네비도는 테스토스테론에 기름을 섞은 형태이다. 지용성이기 때문에 몸 안에 서서히 녹아들어 체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장점이 있지만, 주사를 맞을 때 아프다는 부작용이 있다. 이틀에서 사흘까지 통증이 지속된다. 그래서 T병원은 노화방지 프로그램을 받는 회원들에게 “네비도 주사는 남성호르몬제이며, 맞으면 아프다”는 주의사항을 항상 알려준다고 한다.
네비도 外 다른 ‘진료’ 있었나
이 병원의 노화방지 프로그램엔 또다른 주사 치료가 있다. 이 주사는 배에 맞는다. 박태환이 이 주사를 맞았는지는 다루기 민감한 사안이다.
검찰은 박태환이 고소한 ‘2014년 7월 29일 네비도 투여’만을 수사 대상으로 삼았다. 검찰은 “일부 박태환 선수의 다른 진료 내용 등은 함부로 언급하거나 공개할 경우 위법 소지가 있어 수사 과정에서도 확인해 줄 수 없다”, “개인정보보호법을 보면 개인의 건강 등에 대한 정보는 정보 주체의 동의나 법령이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상황에서만 공개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네비도와 비타민 처방 외에 뭔가 다른 ‘진료’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태환은 T병원 김 원장과 형사소송에 들어갔다. 법정 공방을 하다 보면 그동안 가려졌던 의혹이 하나씩 풀려 갈 가능성이 있다. 선수 이미지에 더 악영향을 끼칠 악재가 터질 수도 있다.
박태환은 내년 봄에 징계가 풀리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명예 회복을 원하는 그에겐 지금 변호사보다 지혜로운 조언을 해 줄 ‘어른’이 필요해 보인다.⊙
기대했던 금메달은 못 땄지만 박태환은 도핑 테스트만큼은 아무 문제 없이 통과했다. 그가 금지약물을 복용했다면 그 시점부터가 의문이었다. 곰곰이 따져 봤지만 ‘박태환 도핑설’은 개연성이 적다는 결론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날 밤 대한수영연맹 고위 관계자 두 명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진위를 물었다. 모두 “전혀 모르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대한수영연맹은 국제수영연맹(FINA)으로부터 ‘박태환이 도핑 양성반응을 보인 사실에 대해 비밀을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돌이켜보면 취재 방식이 잘못됐던 것 같다. 처음부터 ‘박태환이 도핑이라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는 식으로 접근했더라면 조금 다른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박태환 도핑’ 제보를 받고 난 다음 날인 1월 26일 오전, 취재 과정에서 다른 경로로 이런 소문이 돌고 있음을 알게 됐다. 한국도핑방지위원회(KADA) 측에 박태환이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도핑과 관련해 조만간 발표할 사안이 있는가’라고 문의해 보니 “우리가 실시한 도핑 테스트로 문제가 생긴 선수는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FINA가 전문 시료 채취 기관을 통해 박태환에 대한 도핑 테스트를 주관하고,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검사 결과를 선수와 FINA, 대한수영연맹에 알렸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박태환 父, “후원기업 없어 서글퍼”
26일 낮에 박태환의 아버지인 박인호씨와 통화를 했다. 박씨는 박태환을 관리하는 소속사 팀지엠피(GMP)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들에게 금지 약물을 주사한 의사를 고소하고, 이로 인해 아들이 검찰 조사까지 받은 상황에서도 태연함을 유지했다.
오히려 박씨는 “작년 아시안게임 땐 태환이가 연습 기록만 내면 금메달 딴다고 보고 걱정 하나도 안 했는데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태환이가 내년 리우 올림픽까지 뛰겠다고 하는데, 후원하겠다는 기업이 없어 서글프다”는 말을 했다. 이미 올림픽 금메달까지 일궜던 아들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 올림픽에 도전하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안쓰럽다는 부정(父情)을 드러냈다.
이런 박씨에게 박태환의 도핑에 대한 실상을 물어보기가 꺼려졌다. “박태환은 한국 스포츠의 보물이며, 은퇴하지 않고 선수생활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한국 수영을 위해선 감사한 일”이라는 말로 통화를 마쳤다. 그게 실제 마음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팀지엠피 측에서 느닷없이 보도자료를 냈다. 자초지종 설명은 없이 금지약물 주사를 놔 준 의사에게 모든 민·형사상 법적 책임이 있다는 일방적인 주장이 담겨 있었다. 국내 대부분의 매체는 이 보도자료를 그대로 기사화했다.
하지만 이후 취재와 검찰 조사 결과, 박태환 측이 보도자료를 통해 주장한 내용은 사실과 차이가 크고, 이번 사태와 관련해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도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는 박태환의 부탁을 받고 그를 T병원에 소개해 준 미용 컨설턴트 A씨와 T병원 김모 원장이 검찰에 진술한 내용을 가장 먼저 보도했고, 곧이어 A씨와 김씨를 단독 인터뷰해 기사화했다. 박태환이 먼저 미용 컨설턴트 A씨를 통해 병원을 섭외했고, 3000만원이 넘는 치료(비타민 처방과 노화방지 프로그램)의 무료 협찬을 받았으며, 도핑에 걸리고 난 다음엔 의사를 만나 남성 호르몬 치료에 대한 내용을 몰래 녹취해 검찰에 제출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혹을 취재하는 와중에 박태환의 아버지 박인호씨와 다시 통화를 했다. 공식적인 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박씨는 격앙된 어조로 “태환이는 이미 나쁜 선수가 되어 버렸다. 태환이가 꼬맹이였을 때부터 가장 오래 봐 온 기자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원망했다.
《조선일보》의 취재와 검찰 조사로 밝혀진 박태환 도핑 파문의 개요는 이렇다. 박태환은 2013년 10월 말 미용 컨설턴트 A씨의 소개로 서울 중구의 한 호텔 안에 있는 노화방지 전문 클리닉 T병원에 갔다. 박태환은 지인 A씨가 회원제로 운영되는 이 병원에서 비타민 처방을 받아 효과를 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본인도 그곳을 소개받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A씨는 고민에 빠졌다. “박태환이 협찬을 받지, 돈을 내는 친구가 아니다. 그런데 T병원은 모든 고객이 돈을 지불하는 곳이라 내가 원장에게 부탁하기가 부담스러웠다”는 것이다. A씨는 T병원 김모 원장에게 “박태환이 후원사도 없고 너무 힘들어하고 있는데 건강관리도 못 받는 것 같다. 국위선양한다고 생각하고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을 해서 수락을 받았다. 김 원장은 박태환이 처음 병원에 왔을 때 혈액검사를 했다. 그 결과 남성호르몬 수치가 낮았다고 한다. 김 원장은 “부족한 호르몬을 보충하기 위해 2013년 12월에 처음 박태환에게 남성호르몬제를 투여했다”고 말했다. 당시 박태환을 관리하는 소속사 팀지엠피(GMP)에서 일했던 C씨도 “2013년 12월에 박태환이 무슨 주사를 맞겠다고 해서 난 반대했다. 실제로 주사를 맞았는지는 모른다”라고 말했다. 박태환은 2013년 12월엔 남성호르몬을 맞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태환은 2014년 7월 29일 T병원에서 남성호르몬제인 ‘네비도’ 주사를 맞았다. 그는 2014년 9월 3일 인천에서 국제수영연맹(FINA)이 주관하는 도핑 테스트를 받았다. 같은 달 열리는 인천 아시아경기대회를 대비해 호주 전지훈련을 마치고 귀국해 막바지 담금질을 하던 시기였다. 그는 2014년 10월 30일 세계반도핑기구(WADA)로부터 금지약물 양성반응 통보(A 샘플)를 받았다. 금지약물 성분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로 통칭하는 내인성 동화작용 남성호르몬 스테로이드였다. 단백질의 체내 흡수(동화)를 촉진해 근육을 빠르게 만들고 근력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WADA가 지정한 제1종 금지약물에 속한다. 박태환은 2014년 12월 8일 WADA 측에 B 샘플로 재검사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그러자 박태환 측은 2015년 1월 20일 검찰에 T병원 원장을 상해치상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1월 23일 T병원 검진기록 등 자료를 압수수색했다. 박태환은 25일, T병원 김 원장은 26일 검찰 조사를 받았다. 박태환 측은 1월 26일 ‘금지약물에 양성반응을 보였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검찰은 29일 미용상담 전문가 A씨와 박태환의 전 매니저 C씨를 조사했다. 검찰은 2월 6일 ‘박태환과 의사 모두 네비도가 금지약물인 줄 몰랐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다만 검찰은 박태환보다는 의료인인 피의자(김 원장)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보고, 법원에서 법리적인 판단을 받아 보자는 의미에서 의사를 불구속 기소했다. 박태환은 3월 23일 FINA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서 반도핑 청문회에 출석했고, 18개월 선수자격 정지 처분(2014년 9월 3일~2016년 3월 2일)을 받았다. 도핑 테스트 이후에 땄던 아시안게임 메달과 기록은 모두 박탈당했다. |
박태환의 말 뒤집기
한국의 올림픽메달리스트로는 사상 처음으로 도핑에 적발되고, 중징계를 받는 오점을 남긴 박태환은 3월 27일 국내에서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박태환은 사과문을 읽었다.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로 인사를 드리게 돼 말로 다할 수 없이 죄송하고 무거운 마음입니다. 고의성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대표선수로서 이런 결과가 발생한 걸 반성합니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실망을 안긴 점 거듭 사죄드립니다. 어떤 비난도 질책도 달게 받겠습니다. 깊이 자숙하며 반성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가까운 분들은 지난 10년간의 모든 영광이 물거품이 되고 모든 노력이 약쟁이… 로 치부되는 것에 대해 억울하지 않으냐고 얘기한다”는 대목부터는 눈물을 비치고, 코를 자주 훔쳤다.
그런데 박태환은 호르몬 도핑과 관련한 의혹은 여전히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특히 남성호르몬제 네비도 주사를 맞았던 작년 7월 29일 상황에 대해선 검찰 발표와도 상반된 주장을 해 취재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호르몬 수치가 낮다는 부분은 작년 9월에 도핑 검사 결과가 나온 이후에 병원을 통해 알았다”면서 “호르몬 수치가 낮아서 (주사를) 놨다는 것도 도핑 테스트 이후 의사 얘기를 듣고 알았다”고 말했다.
혼란에 혼란을 더하는 발언이다. 검찰은 2월 6일 박태환이 고소한 T병원 김모 원장을 기소하면서 “의사가 건강검진을 하고 박태환에게 ‘남성호르몬을 보완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얘기해서 박태환이 네비도를 맞은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또 “의사는 박태환에게 ‘테스토스테론이 체내에서 만들어지는 호르몬이라 보완해도 문제 없다’고 설명했다”, “박태환은 테스토스테론이나 네비도가 문제가 된다는 구체적인 지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누구를 믿어야 하는 걸까. 또 검찰의 말처럼 박태환 같은 세계적인 선수가 ‘호르몬(테스토스테론)=스테로이드’라는 기초 상식을 정말 몰랐다면 씁쓸한 일이다.
박태환은 FINA 청문회 때 한국 검찰의 수사 결과를 제출했다. 본인의 과실이 없음을 입증하려는 소명 자료였다. 그런데 박태환은 사과 기자회견에서 이 검찰 수사 결과까지 부인했다. 박태환에게 호의를 가지고 수사를 했던 검찰도 당혹스러워할 법한 ‘말 뒤집기’였다.
박태환이 남성호르몬을 맞은 횟수도 명확하지 않다. 박태환은 “2013년 12월에 호르몬 주사를 맞은 적이 없다”면서 “병원에는 피부관리 때문에 갔고, 작년 7월 29일 비타민 처방을 얘기할 때도 의사는 호르몬이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태환의 주장대로라면 그는 혈액 검사 결과가 나온 다음에도 남성호르몬 수치가 낮다는 사실을 몰랐고, 검사 후 9개월쯤 뒤에 본인도 모르는 상태에서 네비도 주사를 맞았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그랬다면 검찰은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김 원장을 불구속 기소가 아니라 구속 기소했을 것이다. 박태환의 말과 검찰 수사 결과가 다른 점에 대해 기자회견에 동석한 변호사는 “병원과의 형사재판 결과가 나오면 더 자세한 말씀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실패와 시련을 이기며 성장
 |
| 박태환은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400m 자유형에서 한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 |
박태환은 올림픽 통산 금메달 1개와 은메달 3개를 땄다. 세계선수권에선 금메달 2개와 동메달 1개를 걸었다. 수영은 육상과 함께 스포츠의 근간을 이루는 기록 종목이다. 가장 원초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인간 한계에 도전한다. 더구나 박태환은 수영의 여러 영법 중에서도 가장 속도가 빠른 자유형으로 세계 정상에 올랐다.
박태환이 실패와 시련을 이겨 내면서 위대한 선수로 성장했다는 점도 드라마틱했다. 출발은 허무했다. 그는 중학교 3학년이었던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최연소 수영 대표로 출전했다. 자유형 400m 예선에서 먼저 물에 뛰어들었다가 부정 출발로 실격했다. 야외에서 훈련하느라 까맣게 그은 피부에 까까머리를 한 박태환은 혼자 쓸쓸히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 속상하고 창피해서 한 시간쯤 라커룸 화장실에 몸을 숨겼다. 제자를 대표팀에 추천했던 노민상 감독 역시 박태환의 아버지와 서울의 한 포장마차에서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며 슬퍼했다.
박태환은 나중에 “수영복만 물에 빨고 나왔다”고 농담을 했다. 하지만 그때의 아픔은 잊지 않았다. 정확하면서도 빠른 스타트를 할 수 있도록 훈련에 힘을 쏟았다. 아테네 올림픽 이후 단 한 번도 부정 출발을 하지 않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출발 반응 속도를 유지했다. 박태환은 2012 런던올림픽 때 어처구니없는 심판의 실수로 실격(부정 출발) 처분을 받았다가 취소되는 소동을 겪었다.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금메달 대신 은메달을 걸었다. 되풀이된 악연이 얄궂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올림픽 데뷔 무대를 망쳤던 박태환은 1년여 만에 국제 무대에서 이름을 드러냈다. 경기고 1학년이던 2005년, 동아시안게임 자유형 1500m에서 15분00초32로 2위를 하며 수영계를 열광시켰다. 한국 선수가 15분 벽 돌파를 눈앞에 둔 것이다.
수영장에서 열리는 최장거리 종목인 자유형 1500m의 기록 진화는 더뎠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블라디미르 살니코프(구 소련)가 처음 14분대로 우승(14분58초27)한 이후 35년 동안 27초쯤이 줄었을 뿐이다. 호주의 수영 영웅 그랜트 해킷이 2001년 일본 후쿠오카 세계선수권에서 세웠던 세계기록(14분34초56)은 10년 동안 꿈쩍 않다가 2011 상하이 세계선수권에서 중국의 쑨양(14분34초14)에 의해 깨졌다. 쑨양은 이듬해 런던 올림픽에서 다시 세계기록을 경신(14분31초02)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열일곱에 세계 정상, ‘수영 천재’
‘16세 박태환’의 15분00초는 지금 회상해도 대단했다. 2005년 말 처음 그를 인터뷰하면서 한국의 사상 첫 올림픽 수영 메달도 가능하겠다는 상상을 했다.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박태환은 2006년 여름 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열렸던 팬 퍼시픽(Pan Pacific) 선수권대회가 무대였다. 박태환은 자유형 200m에서 아시아 신기록으로 은메달을 따더니, 자유형 400m는 아시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걸었다. 자유형 1500m까지 우승하며 2관왕에 올랐다. 팬 퍼시픽은 환태평양 연안 국가인 미국, 호주, 일본 등 수영 강국의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세계적으로도 수준급의 대회다.
박태환의 역영은 경이로웠다. 2001년 후쿠오카 세계선수권대회 때 16세였던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가 200m 접영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며 맛봤던 흥분 이상이었다.
정작 빅토리아에서 만난 박태환은 “예상보다 기록이 잘 나왔다”, “내 스피드가 느껴지긴 하는데 (레이스에) 도움을 줄 선수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싱거운 말을 했다.
그의 침착함은 어쩌면 아테네 올림픽에서 실격의 아픔을 겪으며 성숙해진 덕분이 아닐까 한다. 박태환의 스승이기도 한 노민상 대표팀 감독이 잔뜩 쉰 목소리로 “제가 태환이를 10년간 키웠습니다”라며 감격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박태환에 10년 공들인 노민상 감독
 |
| 노민상 감독과 박태환. 막 국제적인 수영 스타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2006년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
노 감독은 재야(在野) 지도자로 조금씩 인정을 받아 가던 나이 마흔에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박태환을 만났다. 가르친 지 2년쯤 지나면서 가능성을 보고 유산소 운동을 꾸준히 시켰다. 박태환이 자유형 중·장거리뿐 아니라 단거리 종목까지 두각을 나타냈던 이유는 어려서 적금 붓듯 쌓았던 지구력 훈련 덕분이다.
박태환은 2006년 겨울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 나가 금메달 3개 등 7개의 메달을 걸었다. 자유형 1500m에선 아시아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15분 벽을 깨며 14분55초03으로 우승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이상하리만치 언론 접촉을 피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0년 스승이었던 노 감독을 떠나 별도의 전담팀을 꾸리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성격이 여린 편인 박태환은 방송사 등에서 취재진이 집으로 찾아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늦게 귀가하곤 했다.
도하 아시안게임 MVP
박태환은 얼마 후 도하 아시안게임 최우수선수(MVP) 후보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2006년 12월 14일 밤 비행기로 노 감독과 다시 도하로 떠나기로 했다. 그날은 기자의 생일이기도 했다. 점심 무렵 대한수영연맹 사무실에서 노 감독을 만나 박태환을 인터뷰할 수 있을지 부탁해 봤다. 노 감독은 “태환이네가 날 데리러 와서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면서 “공항 가는 차 안에서 얘기를 나누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일단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 있는 노 감독의 집으로 갔다. 노 감독의 부인이 데워 준 곰국에 김치를 곁들여 늦은 점심밥을 먹었다.
짧은 겨울 해가 질 무렵, 박태환 가족이 노 감독 집 앞으로 왔다. 박태환 아버지가 운전하는 구형 카니발 승용차에 무작정 올라탔다. 박태환의 부모와는 그때 처음 인사를 했다. 차 맨 뒷자리에 아이팟을 낀 채 가로로 누워 있던 박태환은 ‘불청객’을 슬쩍 쳐다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공항 라운지에서 어렵사리 인터뷰를 했다.
다음 날 신문을 제작하는 사이, 박태환이 중국에서 갈아타기로 한 카타르 항공사의 비행기에 문제가 생겼다. 박태환이 공항에서 12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도하에선 박태환이 MVP로 뽑혔다는 발표가 났다. 도하 공항에서 박태환을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은 허탕을 쳤다. 《조선일보》에 나간 박태환 인터뷰는 MVP 수상 후 최초이자 단독 기사가 되어 버렸다.
박태환은 2007년 1월에 전담팀을 만들어 독자적인 훈련을 시작했다. 첫 시험 무대는 2007년 3월 호주 멜버른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대회였다. 보통 세계선수권은 여름인 7~8월에 열린다. 남반구인 호주는 3월이 여름이었다. 멜버른 세계선수권은 도하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석 달 만에 열리는 대회였다.
박태환의 첫 종목인 남자 자유형 400m는 경영(競泳) 종목 첫날 치러졌다. 노민상 감독은 자신의 품을 떠난 제자의 예선 레이스(전체 2위)를 지켜보고 나서 “태환이가 금메달 딸 것 같다. 몸 상태가 아주 좋다”고 말했다. 노 감독의 말대로였다. 박태환은 예선을 마치고 저녁에 열린 결선에서 호주의 수영영웅 그랜트 해킷을 1초 이상 앞서며 우승했다. 특유의 폭발적인 스퍼트가 압권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한국 수영 사상 첫 세계선수권 금메달. 박태환이 왜 수영을 잘하는지 분석하려고 체형, 영법, 리듬감 등 모든 근거를 동원했다.
박태환에게 수영은 ‘운명’
 |
| 2014년 9월에 열린 인천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자유형 200m에서 박태환은 동메달을 땄다. |
박태환의 영법은 세계적인 장거리 선수와 마찬가지로 ‘전사분면(front quadrant)’ 형태이다. 물속을 가르고 있는 팔이 몸과 직각을 이루기 전에 다른 팔을 물에 넣는다. 몸의 중심축을 안정시키면서 몸을 ‘긴 배’의 자세로 만들 수 있다.
흔히 팔을 젓는 스트로크를 최적화하는 3대 요소로 ‘3R’을 든다. 레인지(range·거리), 리듬(rhythm), 릴렉세이션(relaxation·긴장 이완)이다. 박태환은 리듬감 있게 물을 타는 능력이 뛰어나다. 작은 물고기가 빠르게 헤엄치는 원리와 비슷하다. 일반적인 성인의 두 배 가까운 폐활량(7000CC)도 강점이다.
박태환은 멜버른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 1개(자유형 400m)와 동메달 1개(자유형 200m)를 땄다.
박태환 1기 전담팀은 2007년 말 해체됐다. 전담팀 지도자들이 처우 문제로 박태환 측과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박태환은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또 다른 지도자를 선임했지만, 2008 베이징 올림픽까지 경기력을 끌어올릴 만한 훈련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결국 태릉선수촌으로 들어와 다시 노민상 감독의 지도를 받았다. 올림픽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도 집중적인 훈련으로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올림픽 전 국내대회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쏟아내며 기대를 모았던 박태환은 결국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자유형 400m)과 은메달(자유형 200m)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로마 쇼크
 |
| 지난 2011년 후원 협약식에 참석한 박태환과 그의 아버지 박인호씨. |
당시 개인적으로는 박태환이 그렇게 욕을 먹을 만큼 부진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박태환이 못했다기보다 외국 선수들이 예상 이상으로 잘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올림픽에 모든 것을 걸었던 박태환에겐 사실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박태환이 로마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기자는 서울에서 ‘대표팀보다 이틀 먼저 로마에 간 박태환, 광고성 화보 촬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박태환이 모 외국계 의류업체 및 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로마에서 따로 화보를 찍었다는 제보를 받고 이를 확인해 기사화했다.
그의 성적이 좋았더라면 별문제 없이 넘어가도 그만인 일이었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가자 로마에 가 있던 국내 언론 매체들은 박태환의 ‘해이한 정신상태’를 강하게 비판했다.
로마에서 참패를 맛보고 돌아온 박태환을 2009년 추석 직전에 태릉선수촌에서 다시 만났다. 미안한 마음으로 “화보 소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제가 기자였어도 알고서 (기사를) 안 쓸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국민이 등을 돌릴까 봐 무서워 한동안 인터넷도 하지 않았다”는 속내도 내보였다. “기름만 넣으면 차가 잘 달리는 건 아니지 않으냐. 엔진 오일도 갈아 줘야 하지 않느냐”는 말에선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었다.
박태환은 2010년부터 호주의 유명 지도자인 마이클 볼 코치와 손을 잡고 수영에 대한 의욕을 되살렸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선 3관왕에 오르며 잃어버렸던 명예를 되찾았다. 2011년 상하이 세계선수권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따며 다시 ‘월드 클래스’의 반열에 올라섰다. 2012 런던 올림픽 땐 부정 출발에 의한 실격 판정을 받았다가 번복되는 불운을 겪으면서도 은메달 2개라는 성과를 거뒀다.
가족회사 팀지엠피의 한계
박태환이 런던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에게 버팀목이 되어 줄 어른이 곁에 있었더라면 이번 약물 파동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박태환이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호주 브리즈번에서 볼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훈련하던 때의 일이다. 당시 SK텔레콤이 박태환 전담팀을 운영하고 있었다. SK는 박태환에게 최정상급 프로야구 선수 연봉 수준의 금전적인 지원을 했고, 전지훈련비와 트레이너 등 전담팀 멤버들의 급여, 박태환 소속사 사무실 운영비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연간 18억~20억원의 비용을 썼다고 알려졌다.
박태환은 전담팀 멤버들과 밥을 먹는 자리에서 “어느 순간 내가 가장(家長)이 되어 있더라”라는 혼잣말을 했다고 전해졌다. 실제로 그가 학생 때부터 모교 동문회 등에서 받았던 후원금은 집안 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현 박태환의 소속사인 팀지엠피는 그의 아버지, 누나, 매형 등이 운영하는 가족회사다. 사실상 최고 의사결정자는 박태환이다. 따라서 소속사가 선수의 사생활 등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다.
팀지엠피는 이번 도핑 파동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박태환은 가족에게 금지약물 투여와 관련해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을 남김없이 얘기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FINA 청문회도 거치기 전에 먼저 약물 양성 반응 사실을 보도자료를 통해 알리는 실수도 소속사가 갈팡질팡한 탓이다.
테스토스테론 수치 낮다고 도핑 못 피해
박태환과 그 소속사가 ‘20대 남성이 왜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했을까’라는 핵심 쟁점조차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안타깝다. 일반적으로 갱년기에 접어든 남성은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 수치가 정상치보다 낮다. 이 경우 병원에선 약효가 오래가지 않는 호르몬제부터 투여해 경과를 지켜본다.
박원하 대한스포츠의학회장(삼성서울병원)은 “네비도가 나오기 이전의 호르몬제는 약효가 2~4주 정도였는데, 네비도는 1년에 4번만 맞아도 될 만큼 체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고 말했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낮은 선수가 체내 지속시간이 짧은 호르몬제를 맞으면 테스토스테론의 총량만을 따지는 1차 도핑 테스트는 어렵지 않게 넘길 수 있다. 그래서 최근의 도핑 검사는 선수의 평소 호르몬 수치를 꾸준히 추적해 그 추이를 살펴보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수치가 정상범위에 있더라도 평소에 비해 뚜렷한 변화가 보이면 테스토스테론의 분자구성 비율까지 살피는 2차 검차를 한다. 체내에서 만들어진 테스토스테론과 체외에서 만들어진 테스토스테론은 탄소 동위원소의 구성비율이 다르다. ‘난 남성호르몬 수치가 낮으니 조금만 맞으면 도핑 테스트를 피할 수 있다’라고 믿고 부정행위를 저지르다간 언젠가 꼬리가 밟힌다는 얘기다.
박태환이 낮은 테스토스테론 수치 때문에 ‘신체 이상’을 느꼈다면 호르몬 보충이라는 의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해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박태환은 “수영을 하기 때문에 피부가 건조해 많이 붉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병원에서 비타민 처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피부 트러블 외의 다른 불편함을 의사에게 상담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박태환이 T병원에서 받은 치료의 종류를 취재했다. T병원 김 원장은 박태환이 20회 이상 치료를 받았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우선 도핑과 관련이 없는 건강관리 처방이 있다. 비타민, 미네랄, 글루타티온(항산화물질)은 정맥 주사로 투여한다.
남성호르몬제인 네비도는 엉덩이 근육에 주사한다. 네비도는 테스토스테론에 기름을 섞은 형태이다. 지용성이기 때문에 몸 안에 서서히 녹아들어 체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장점이 있지만, 주사를 맞을 때 아프다는 부작용이 있다. 이틀에서 사흘까지 통증이 지속된다. 그래서 T병원은 노화방지 프로그램을 받는 회원들에게 “네비도 주사는 남성호르몬제이며, 맞으면 아프다”는 주의사항을 항상 알려준다고 한다.
네비도 外 다른 ‘진료’ 있었나
이 병원의 노화방지 프로그램엔 또다른 주사 치료가 있다. 이 주사는 배에 맞는다. 박태환이 이 주사를 맞았는지는 다루기 민감한 사안이다.
검찰은 박태환이 고소한 ‘2014년 7월 29일 네비도 투여’만을 수사 대상으로 삼았다. 검찰은 “일부 박태환 선수의 다른 진료 내용 등은 함부로 언급하거나 공개할 경우 위법 소지가 있어 수사 과정에서도 확인해 줄 수 없다”, “개인정보보호법을 보면 개인의 건강 등에 대한 정보는 정보 주체의 동의나 법령이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상황에서만 공개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네비도와 비타민 처방 외에 뭔가 다른 ‘진료’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태환은 T병원 김 원장과 형사소송에 들어갔다. 법정 공방을 하다 보면 그동안 가려졌던 의혹이 하나씩 풀려 갈 가능성이 있다. 선수 이미지에 더 악영향을 끼칠 악재가 터질 수도 있다.
박태환은 내년 봄에 징계가 풀리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명예 회복을 원하는 그에겐 지금 변호사보다 지혜로운 조언을 해 줄 ‘어른’이 필요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