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껏 잘못 알려진 채만식 가족사, 작가의 두 번째 결혼 생활 이야기
⊙ “병마와 싸우며 밥상 위에서 소설 쓰신 나의 아버지 위해 문학상 되살렸다”
⊙ “이모인 도안 스님을 은사로 9세에 출가. 몰래 《탁류》 읽어”
정현(淨賢) 스님
1944년생. 속명(俗名) 채영실(蔡永實). 채만식 작가의 4남 1녀 중 1녀 / 수덕사에서 출가
⊙ “병마와 싸우며 밥상 위에서 소설 쓰신 나의 아버지 위해 문학상 되살렸다”
⊙ “이모인 도안 스님을 은사로 9세에 출가. 몰래 《탁류》 읽어”
정현(淨賢) 스님
1944년생. 속명(俗名) 채영실(蔡永實). 채만식 작가의 4남 1녀 중 1녀 / 수덕사에서 출가
- 사진=하주희 기자
“아버지 왜 거기 계시우…” 스님이 나지막이 읊조린다. 시선을 따라가니, 환히 웃고 있는 채만식 작가의 얼굴이 보인다. 골목 어귀 담벼락에 그려져 있는 벽화다. 지난 5월 30일 정현 스님(79)과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읍내를 찾은 참이었다.
정현 스님은 채만식(蔡萬植) 작가의 고명딸이다. 군산은 채만식의 고향이자 스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채만식의 생가터와 집필터, 묘소 모두 군산에 있다.
잘못 알려진 채만식 家族史
생가터는 임피 읍내 한중간에 있다. 여기가 ‘채만식 작가의 생가터’라는 안내판이 하나 있을 뿐, 별다른 구조물 없이 공터로 남아 있다. 얼마나 관리를 안 하는지 풀이 무성하다.
“전엔 여기에 양조장이 있었어요. 둘째 큰아버지의 큰딸이 하던 양조장인데, 제가 여덟 살 때였나, 같이 살면서 그 사촌 언니의 아기를 봐줬어요.”
― 애가 애를 돌봤네요.
“어느 날 어머니가 보고 싶어 집에 갔다가 늦게 돌아왔어요. 늦게 왔다고 엄청 맞았어요. 그런 후에 기절을 한 거예요. 아마 열병을 앓은 것 같아. 그 후로 평생 한쪽 귀가 안 들려요.”
― 어머니와 한 동네에 살았다고요? 어머니는 채만식 작가가 돌아가신 후 집을 나간 게 아닌가요?
“가족사가 지금껏 잘못 알려진 겁니다. 참 화가 났어요.”
일단 지금까지 알려진 채만식 작가의 가족사는 이렇다.
〈채만식(1902~1950년)은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보(1918~1922년)에 진학한다.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결혼하러 고향에 내려오라는 통보를 받는다. 부모의 강권으로 고향(전북 군산시 임피면)에서 10여 km 떨어진 마을(전북 익산시 함라면)에 살던 은선흥(殷善興·1901~1993년)과 결혼한다. 부부가 됐다지만 처음부터 떨어져 살았다.
채만식은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한다. 이듬해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조선에 돌아온다. 채만식은 《동아일보》 《개벽사》 《조선일보》를 옮겨 다니며 서울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소설가로 등단한 것도 이 시기다.
은선흥과의 사이에 두 아들 무열(武烈·1926~1945년)과 계열(桂烈·1928~2004년)이 태어난다. 아이가 태어났지만 두 사람은 함께 살지 않았다. 정식 이혼 절차를 밟은 건 아니지만 은선흥은 시집에서 쫓겨나 친정 부근에서 살았다. 채만식은 숙명여고를 나온 신여성 김시영과 동거했다. 채만식이 하숙했던 주인집 딸이었다고 한다. 김시영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다.
1950년 채만식이 폐결핵으로 사망한 후 김시영은 자신이 낳은 2남 1녀를 버리고 가출을 한다. 자식들은 고아원을 전전했고 딸 영실은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장애가 있던 어머니
― 어머니가 숙명여고를 나온 신여성이었던 건 맞나요?
“아니요, 어머니는 보통학교만 나왔어요. 함자도 김씨영(金氏榮)이 맞아요. 다섯 획으로 된 한자로 이름을 짓느라 씨(氏)를 쓴 겁니다. 금강산 온정리 출신이에요. 어머니는 평생 왼팔을 잘 쓰질 못했어요.”
― 장애가 있었나요?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짓궂었나 봐요. 세 살 때 감나무에 올라갔다 떨어졌대요. 팔이 삐어서 퉁퉁 부은 거예요. 금강산 온정리에 병원이 가까이나 있었겠어요? 외할아버지 친구분 중에 침놓는 분이 계셨대요. 그분이 침을 놔준 거예요.”
― 침을 맞고 나았나요?
“근데 그 어르신이 침을 놔주러 오는 길에 뱀에 물려 뱀독에 고생하는 농부를 만난 겁니다. 그 농부한테 침을 놔주고 그 침을 침통에 그냥 들고 온 거예요. 그걸로 제 어머니 침을 놓은 거예요.”
― 그런 일도 있군요.
“뱀독 때문인지 오히려 팔이 더 곯았대요. 병원에 갔더니 절단해야 한다고 하고, 외할아버지가 부득부득 절단하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임금님한테 시집을 가도 하다못해 물그릇이라도 제대로 들려면 양팔이 다 있어야 된다’… 어머니 팔꿈치 쪽에 구멍이 두 개 있었는데 거기서 평생 고름이 나왔어요.”
― 부모님이 하숙집에서 처음 만난 건 사실인가요?
“외갓집이 금강산 온정리에서 살다 서울 청진동으로 옮겨와서 하숙집을 했어요. 청진동 289번지, 하도 들어서 주소를 잊지도 못해. 사랑채에 하숙을 받았는데 가수 고은봉씨가 살았어요. ‘선창’을 부른 원로가수죠. 아버지는 그 근처 다른 하숙집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제 어머니랑 만나게 된 거예요.”
― 아버지는 하숙집을 옮기고 싶었겠군요.
“아버지가 고은봉씨에게 하숙집을 바꾸자고 그랬대요. 그랬더니 그분이 이러더래요. ‘이보게 최형, 열흘 삶은 호박에 바늘 끝도 안 들어갈 소리 하지 마시오.’ 그런데 이분이 만날 하숙비가 밀린 거예요. 제 막내 이모가 그랬대요. ‘고 서방, 하숙비 안 주려면 채씨랑 바꾸세요.’ 그래도 결국 못 바꿨어요.”
김씨영과 두 번째 결혼 생활
― 대신 결혼을 하신 거네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엄청 반대하셨어요. 시골에 처자(妻子)가 있는 걸 알았는지는 모르겠고, 아버지를 못 믿고, 귀한 딸 꼬드겨서 정신대에 넘기는 거 아니냐고 반대하셨대요.”
반대할 만도 한 게, 당시 채만식은 직장을 옮겨 다니며 글을 쓰는 소설가였고, 채만식과 김씨영의 나이 차이는 16세였다. 채만식은 두 번째 부인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스님이 외삼촌에게 들은 말을 들려줬다.
“외삼촌이라도 제가 출가하고는 존댓말을 쓰셨어요. 하루는 이러셔요. ‘스님, 어머니는 누구도 받지 못한 사랑을 매형한테 받고 살았을 거예요. 어머니 팔에서 고름이 계속 나오니까 대나무 대롱으로 빨대를 만들어서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주셨을 정도였어요.’ 그걸 누가 하겠어요. 저는 자식이라도 못 해요.”
두 사람은 어느 날 함께 개성으로 가버린다. 개성엔 채만식의 형들이 있었다. 채만식은 5형제 중 막내다.
“둘째, 셋째, 넷째 큰아버지가 개성에서 금광 사업을 하고 계셨어요. 가보니 어머니에게 윗동서가 세 명이나 있잖아요. 친정에선 걸레 하나 안 빨아보고 살았는데 시집살이가 시작된 거예요. 얼마나 그게 호됐는지, 어머니가 서울에 다니러 한 번 왔는데 외할머니가 대성통곡을 하셨대요. ‘세상에 우리 딸 몰골이 이게 뭐냐’ 그러면서 가지 말라고 잡으셨대요. 개성에서 3년 시집살이하는 동안 아이도 안 생겼대요.”
말이 좋아 금광이지 개성 금광은 채만식의 인생에 경제적으로 별 도움이 된 것 같진 않다. 채만식은 인세를 받으면 계속 금광에 투자했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채만식은 가족을 이끌고 군산으로 내려왔다. 부근인 익산시 주현동에 집을 샀다고 알려져 있지만 스님의 기억은 다르다.
“저는 우리 아버지가 평생 당신 이름으로 된 집도 없이 셋집 전전하다 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원고료를 받으면 금광에 투자했거든요. 넷째 큰아버지댁의 사촌 오빠들 학비도 아버지가 댔어요.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지요.”
“딸 덕에 냉잇국 먹겠다”
채만식은 하나뿐인 딸을 무척 아꼈던 것 같다.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이모에게 물어보더래요. ‘처형 뭐 나왔어요?’ 이모가 ‘섭섭하시겠어, 딸이요’라 답했더니 아버지 말씀이 이래요. ‘딸 덕에 냉잇국 먹겠네요.’”
채만식은 딸을 누구도 업지 못하게 했다. 다리가 휜다는 이유에서다.
“이종 사촌 오빠가 놀러 왔다가 저를 업어준 거예요. 아버지가 외출했다 들어오시면서 그걸 보고 ‘영실이 다리 휘게 왜 업어줬냐’며 얼마나 혼을 냈는지, 오빠가 다시는 저희 집 안 온다고 할 정도였어요. 저랑 산책할 때도 일꾼이 진 지게에 저를 태우고 걸으셨어요.”
딸에게 공부도 직접 가르쳤다.
“옛날에는 강의할 때 칠판이 없으니 종이에 적어놓고 한 장씩 넘기면서 설명했잖아요. 그때 당신이 손으로 직접 구구단을 써서 저를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집에서 일 도와주는 언니가 하도 들어서 저보다 먼저 구구단을 배웠어요.”
스님의 기억 속 풍경 중엔 할머니의 장례날도 있다.
“제가 서너 살 때였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100세 다 되어 돌아가셨으니 호상이지요. 아버지가 저 시집갈 때 밑천한다고 사둔 소가 있었는데, 그날 소가 새끼를 낳았어요. 그런데 쌍둥이를 낳은 거예요. 아버지가 좋은 징조라며 좋아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딸을 얼마나 싸고돌았는지 어머니는 어떻게 손도 못 댈 지경이었다고 한다.
“옛날엔 눈다래끼가 많이 났어요. 제 눈에 났는데 어머니가 짜주고 싶어도 아버지가 손도 못 대게 하니까. 아버지가 글 쓰시다 한 번씩 산책을 나가셨어요. 장갑을 끼고 핀셋 들고 밭에 풀을 뽑겠다며 나가세요. 산책 겸 가시는 거죠. 이때다 싶어 어머니가 툇마루에 저를 눕혀놓고 다래끼를 짜줬어요.”
― 어떻게 됐나요?
“제가 얼마나 엉구렁(엄살)을 떨었는지 한달음에 아버지가 달려오신 거예요. 애 죽이는 줄 알고. 저를 끌어안고 얼마나 어머니를 혼내시는지… 그때는 그게 그렇게 고소하데. 고소할 일이 아닌데….”
병마와 싸우며 집필
병마와 싸우며 채만식은 끊임없이 글을 썼다. 그가 남긴 장·단편 소설과 희곡, 평론, 그리고 수필이 총 290여 편에 이른다.
“책상도 없어서 밥상에서 글을 쓰셨어요. 아버지가 글 쓰시는 방에선 항상 담배 냄새가 났어요. 왼손에 불 붙인 담배를 들고 상 위에 팔을 괴고 있는데, 팔꿈치가 배길까 봐 어머니가 쿠션을 팔 밑에 받쳐 주셨어요.”
― 폐가 안 좋은데 담배를 피우신 건가요?
“연기를 맡으려고 들고 있는 거죠. 담배가 다 타서 손이 뜨거워지면 어머니를 불러요. ‘날 봐, 날 봐’ 그러면 어머니가 연초를 말아서 다시 불을 붙여서 손에 쥐어드리죠.”
― 식사는 제대로 하셨나요?
“그때 그런 여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머니가 소고기를 사 와서 다져요. 힘줄이 하나도 없게 다져서 떡갈비처럼 만들어요. 잡수시다 어쩌다 힘줄이 씹힐 때도 있잖아요. 그러면 접시가 날아가는 거예요. 어머니가 많이 우셨어요.”
채만식은 생전에 성격이 워낙 깔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사할 때 수저를 닦고 먹고, 앉아 있다가도 앉은 자리를 털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결벽증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오래 폐결핵을 앓으며 성격이 까다로워진 건 아닐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땐 딸을 무릎에 앉히고 먹여줬다.
“가을 저녁 논두렁에 가면 참게가 와글와글 기어 나와요. 아버지는 참게장을 제일 좋아했어요. 어머니가 참게장을 항상 많이 담가놓으셨어요. 아버지가 무릎에 절 앉히고 게딱지에 밥을 비벼서 제 입에 떠먹여 주곤 하셨어요. 저만 아버지와 겸상을 했어요. 저한테는 정을 많이 주셨죠.”
6·25 2주 전에 별세
― 채만식 작가는 거동을 제대로 하셨나요?
“집 근처에 이리농림학교가 있었어요. 거기에 단장을 짚고 산책을 가는데 처음엔 괜찮았어요. 두세 번째 갔을 땐 힘들어하시는 걸 느꼈어요. 숨을 몰아쉬고요. 그러다 얼마 후에 돌아가셨어요.”
채만식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자신의 죽음 뒤를 준비했다.
“어머니에게 미싱을 두 대 사주셨어요. 당신 가고 나면 바느질 품이라도 팔아서 아이들과 먹고살라고요. 어머니가 손을 잘 못 쓰시니 발로 누르는 미싱이었어요. 한 대를 뜯어서 어떻게 조립하는지 어머니에게 가르쳐주시는 걸 제가 봤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을 위해 서울에서 가죽 가방도 사다 줬다. 시골에선 볼 수 없는 가방이었다. 딸이 학교에 입학하고 세 달 뒤인 6월 11일, 채만식은 눈을 감았다. 6·25 발발 2주 전이었다.
“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신 게 차라리 나았어요. 살아계셨다면 길에서 돌아가셨을 거예요. 시신도 못 찾았을 겁니다.”
― 왜요?
“6·25가 터지고 인민군이 저희 집에 나타났어요. 동네 사람을 앞세우고 우리 아버지를 내놓으라는 겁니다. 근데 그 동네 사람이 아버지 상여를 들었던 사람이었어요. 어머니가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나중에 그러셨어요. ‘총만 있었으면 다 죽이고 싶더라.’”
― 어떻게 됐나요?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셨어요. ‘당신이 엊그제 내 남편 상여를 들고 화장막까지 가놓고 어디 와서 채만식 내놓으라고 하냐’… 그 사람도 인민군이 등에 총을 들고 시키니, 뻔히 알면서도 시키는 대로 한 거죠.”
― 돌아가셨다고 대답하면 되잖아요?
“안 믿어요. 그때는 소식이 빨리빨리 안 전해졌거든요. 예산에 살고 계셨던 이모도, 아버지 돌아가신 걸 전쟁 터지고 나서야 아셨으니까요.”
북한은 전쟁 기간 많은 문인을 북으로 끌고 갔다. 소설가 이광수, 평론가 박영희, 시인 김동환·김기림·김억 등이 대표적이다.
술찌끼와 신작로
김씨영은 아이들을 소달구지에 태워 피란을 떠났다. 시집 식구들과 함께였다.
“피란을 갔다 돌아와 보니 미싱이 없어요. 셋째 큰아버지가 돈 될 만한 건 다 갖다 팔아버린 거예요. 아버지가 사준 근사한 가방도 없어졌지요.”
살 곳도 없어졌다.
“피란 갔다 왔는데 살 곳이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산지기 집으로 갔어요. 원래 할아버지·할머니 사시던 집을 산지기에게 쓰라고 내준 건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냥 산지기 집이 돼버린 거예요. 주객이 전도돼 주인 행세를 하더라고요. 그 집 뒷방에 저희가 살았어요.”
혼란한 시기에 손도 불편한 여성이 아이 셋을 데리고 살기 쉬웠을 터가 없다.
“술찌끼 먹어봤어요? 양조장에서 술찌끼를 얻어다 끼니를 때웠어요. 어머니는 돈을 벌려고 무지 애를 썼어요. 신작로 공사장에서 돌을 깨는 일도 했어요. 잊고 있다 1993년에 인도 가서 떠올랐어요. 길에서 돌을 깨는 여인들이 있었어요. ‘저런 광경을 내가 어디서 봤는데… 맞다 우리 어머니도 길에서 돌을 깨셨지.’”
― 팔이 불편한데 돌을 어떻게 깨나요.
“한 손으로 망치질을 하고 삼태기에 돌을 담아 한 손으로 질질 끌고 옮기셨지요. 이모가 오셔서 사는 모습을 보니 이게 말이 아니거든요. ‘내 동생이 어릴 땐 이렇게 힘들게 안 살았는데’… 갖고 있던 진주 반지를 준 거예요. ‘이거 팔아서 장사라도 해서 먹고살아라’면서.”
― 팔았나요?
“촌구석에서 어떻게 팔아요. 넷째 큰아버지에게 부탁하셨죠. ‘아주버님 이것 좀 팔아다 주세요’… 큰아버지가 부산으로 갔어요. 그런데 함흥차사인 거예요. 어머니가 답답하니까 병훈(炳焄) 오빠에게 시켰어요. 찾아오라고요. 그런데 오빠가 부산에서 못된 놈들한테 잡힌 거예요.”
― 깡패 집단에 잡혔군요.
“몇 달을 잡혀서 시키는 대로 나쁜 짓도 하다가 겨우 빠져나왔어요.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큰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까만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오시더라고. 당연히 돈 가져온 줄 알고 어머니는 좋아하셨어요. 그런데 큰아버지가 가방 밑창을 보여줘요. 돈 갖고 오다 쓰리꾼(소매치기)에게 당했대요.”
― 어머니는 뭐라 하던가요?
“하늘 같은 아주버님이 쓰리당했다는데 뭐라 하겠어요. 그래도 셋째 큰어머니와 역전으로 장사를 나가셨어요. 떡도 팔고 고구마도 팔고, 간식 장사를 하신 거죠. 그러다 안 되겠으니 아버지 원고를 들고 서울도 가셨어요.”
― 인세 수입을 좀 받았나요?
“전혀요. 아버지 생전 지인이었던 이무영씨에게 원고를 가져다 줬는데 출간이 됐는지 어쨌는지도 몰라요. 어머니가 나중엔 아버지가 생전에 써놓으신 원고 보따리를 은씨 어르신 댁에 갖다 드렸어요.”
‘은씨 어르신’은 채만식의 첫 번째 부인 은선흥씨를 뜻한다. 스님에게는 호적상 어머니이기도 하다. 스님은 은씨를 꼭 ‘은씨 어르신’이라 불렀다. 스님의 어머니 때부터 내려온 습관인 듯했다.
― 그걸 왜 갖다 드렸나요?
“제가 나중에 철이 들어서 어머니에게 여쭤봤어요. 그걸 왜 갖다 드렸냐고요. 어머니 답이 이래요. ‘그거라도 갖다 주면 나중에 너희한테 찬밥 한 숟가락이라도 줄 거라 생각했다.’”
坐脫立亡한 외할아버지
결국 숙명여고를 나오고, 채만식이 죽자 아이들을 버리고 출가한 신여성은 허구의 존재였던 셈이다. 스님 역시 고아원을 떠돌다 절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외갓집 자체가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
“외할아버지 윗대가 역적으로 몰렸어요. 집안 머슴이 아이였던 외할아버지를 업고 금강산 유점사로 간 거예요. 남의 눈을 피해 승려가 된 거죠. 장성한 후에 외할아버지는 환속(還俗)을 했어요. 인연이 뭔지 할아버지와 유점사에 같이 있었던 스님을 나중에 제가 만났어요.”
― 환속한 후엔 뭘 하며 사셨나요?
“석수(石手)를 하셨어요. 강화 보문사에 있는 마애관음보살좌상도 외할아버지 작품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가부좌하고 서쪽을 향해서 앉혀달라 하셨어요. 좌탈입망하신 거죠.”
좌탈입망(坐脫立亡)은 불교의 선승(禪僧)이 앉은 자세나 선 자세로 입적에 들어가는 걸 뜻한다. 외할머니 역시 신심 깊은 불교도였다.
“제가 어릴 때 보면, 외할머니가 늘 수보리가 어떻고 외셨어요. ‘수보리가 뭐 하는 사람인데 자꾸 찾으시나’ 했는데 출가를 하고 보니 그게 〈법화경〉이에요. 수보리는 부처님 제자고요. 외할머니가 눈 감고 앉아서 〈법화경〉을 암송하신 거였어요.”
스님의 이모 역시 출가했다. 수덕사 견성암의 일엽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도안(到岸) 스님이다. 일엽 스님(1896~1971년)은 속명인 김원주였던 1920년대에 《신여자》를 창간, ‘신정조론’과 ‘자유연애론’으로 대표되는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한 당대의 유명인사다. 1933년 만공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입산(入山)했다.
“이모가 저희 집에 와서 보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입 하나라도 덜자 하고 머무시던 수암산 부근 암자로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그런데 둘째 큰아버지가 오신 거예요. ‘내 동생 만식이 딸을 왜 중을 만드나, 학교에 보내겠다’ 그러시더군요.”
― 다시 돌아오셨군요.
“저를 큰아버지 큰딸네에 데려다 놓으셨어요. 큰딸이 양조장을 하고 있었는데 돌 지난 막내딸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양조장에서 애를 보게 된 거예요. 어머니는 제가 돌아온 줄도 몰랐어요. 읍내에 나왔다가 양조장에 들렀는데 제가 있으니 너무 놀란 거예요. ‘아니 언니가 데려간 애가 왜 여기에 있어?’ 시골이라 편지가 전달이 안 된 거예요.”
9세에 출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가난은 떨쳐지지 않았다. 결국 김씨영은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간다. 외할머니 곁으로 갔다. 거기에서도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모가 다시 저희 집으로 와보니 진짜 형편이 안 좋은 거예요. 다시 저를 데리고 내려가셨어요. ‘이번엔 진짜 안 보낸다’… 그렇게 견성암으로 가게 됐어요. 일엽 노스님이 저를 보시더니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어요. ‘네가 만식이 딸이구나’면서.”
그렇게 아홉 살에 절에 들어갔다.
“저를 맡은 스님을 따라 서산 개심사에 갔어요. 산을 몇 개를 넘어서 갔어요. 어느 날이었어요. 법당 앞에 대야에 물을 떠놓고 제 또래 아이들을 모아놓고 머리를 깎기 시작했어요. 너무너무 눈물이 나는 거야. 울었더니 등짝을 때리시더라고. ‘머리 깎을 때 울면 중노릇 못 한다.’”
어린 나이에 절간 생활이 쉬웠을 리가 없다. 적응을 못 하고 도망치기도 했지만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이모인 도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 운명을 거부하고 싶진 않았나요?
“제가 이모한테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머니가 같이 계셨기 때문이에요. 은사 스님이 암자 주지를 맡자 어머니가 오셔서 함께 사셨거든요. 젊었을 땐 하고 싶은 게 많았어요. 제가 나가면 어머니에게 해가 될까 봐 참고 살았지요.”
승가의 규율은 엄격했다. 아버지의 소설도 마음대로 읽을 수 없었다.
“절에서는 소설도 마음대로 읽지 못하게 했어요. ‘속세 일은 비로 쓸 듯이 싹싹 쓸어 비워야 중노릇을 잘한다’고 했어요. 몰래 〈탁류〉나 〈태평천하〉를 읽었지요. 그 후로도 아버지 소설 전 편을 한갓지게 읽어볼 여유는 없었어요. 이제는 돋보기를 써도 눈이 아파서 못 읽겠어요.”
스님은 그 시절 몰래 해둔 아버지 관련 신문 기사 스크랩을 후일 군산에 있는 채만식문학관에 기증했다.
‘첩의 아들이라는 낙인’
한동안 스님은 은사 스님과 함께 사찰을 옮겨 다녔다. 그러다 이모 스님이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딸이 부처님 모시고 산다고 어머니는 너무 좋아하셨어요. 늘 쓸고 닦으셨죠. 4년간 모셨고 1980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러고 나서 동생이 나타났어요.”
스님에게 오빠 병훈과 동생 영훈(永焄)은 목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동생은 대구에서 제화 기능공을 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왔는데 반송장이에요. 뇌동맥이 터져 쓰러진 거예요. 대구에서 치료가 안 된다고 해서 인천까지 택시를 타고 왔어요. 경희의료원에 입원했어요. 주변에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빌려서 병원비를 댔어요.”
― 큰일이었겠네요.
“퇴원 후엔 통원치료를 다녔어요. 동생을 데리고 병원에 다니느라 지하철 1호선이 있는 경기도에 다시 자리를 잡았어요. 동생이 이혼하고 함께 살던 여인이 있었는데, 병간호하며 동생 아이도 돌봐주다 어느 날 나가버렸어요. 착한 사람이었어요.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갔으면 차비라도 챙겨줬을 텐데.”
몸이 불편한 동생과 엄마 없는 조카들은 오롯이 스님 몫이 됐다. 속세를 떠나려 승려가 됐지만, 끝까지 가족을 돌봐야 했다. 1996년이었던가, 동생도 눈을 감았다.
― 오빠인 채병훈씨는 어떻게 됐나요?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요. 오빠에 대해서 저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아요. 나쁜 짓 하고 다녔고, 감옥도 다녀왔어요. 제가 7세, 오빠가 9세 때였나… 오빠와 아버지가 싸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요.”
― 싸움의 내용이 뭐였나요?
“그때부터 이미 아버지, 어머니 말씀을 잘 안 들었어요. ‘나는 죽을 때까지 첩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살아야 된다’며 아버지한테 달려드는 거예요. 그러니 아버지가 ‘저놈을 죽이고 가야 어미가 편안하게 산다’며 짚고 다니는 단장으로 오빠를 때렸어요.”
― 안타깝군요.
“어머니가 나도 같이 죽이라고 말리는 통에 어머니도 맞았지요. 앞집 할머니가 와서 말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러고 얼마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오빠는 커서 집을 나간 후로 단 한 번도 나와 어머니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채만식문학상 부활

스님은 자신이 채만식의 딸이라는 걸 드러내고 살지 않았다. 2001년 군산에 채만식문학관이 개관했다. “개관식 행사에 초대받아 갔어요. 유족 안내문에 ‘서녀(庶女) 채영실’이라고 쓰여 있는 겁니다.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채만식의 딸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동네 한의원에 갔는데 우연히 아버지의 얘기가 나왔다. ‘스님 속명이 채씨인데, 채만식 작가를 아시나요?’ 한의원 원장이 물어왔다. 스님은 무심히 답했다. ‘제 아버지예요.’
알고 보니 이 한의원의 임은경 원장 장인이 군산에 살며 채만식문학관이 문을 여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단다. 자연스럽게 스님은 마음을 열었다. 자신의 가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사단법인 향림불교의 김정묵 이사장 등 평소 인연을 맺은 인사들과 ‘채만식문학상’ 부활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전라북도 군산시와 채만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2003년 채만식문학상을 제정했다. 하지만 2018년 제15회 상을 수여한 후 잠정 폐지했다.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았다.
상이 없어지고 5년 만에 스님은 문학상을 되살렸다. 사단법인 향림불교에 자신의 전 재산이다시피 한 자산을 기탁했다. 향림불교가 상을 운영한다. 지난 6월 3일 제1회 백능 채만식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1회 수상자는 〈신의 한 수〉를 지은 심아진 작가다.
임피 읍내의 생가터를 떠나 채만식 묘소와 집필터를 찾았다. 도대체 얼마 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건지 방문 자체가 쉽지 않은 상태였다. 군산시는 채만식을 버린 듯했다. 왜 전 재산을 털어 아버지의 상을 되살린 걸까. 사실 스님의 결정이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군산을 방문하고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정현 스님은 채만식(蔡萬植) 작가의 고명딸이다. 군산은 채만식의 고향이자 스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채만식의 생가터와 집필터, 묘소 모두 군산에 있다.
잘못 알려진 채만식 家族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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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시 임피면에 있는 채만식 생가터를 둘러보고 있는 정현 스님. 사진=하주희 기자 |
“전엔 여기에 양조장이 있었어요. 둘째 큰아버지의 큰딸이 하던 양조장인데, 제가 여덟 살 때였나, 같이 살면서 그 사촌 언니의 아기를 봐줬어요.”
― 애가 애를 돌봤네요.
“어느 날 어머니가 보고 싶어 집에 갔다가 늦게 돌아왔어요. 늦게 왔다고 엄청 맞았어요. 그런 후에 기절을 한 거예요. 아마 열병을 앓은 것 같아. 그 후로 평생 한쪽 귀가 안 들려요.”
― 어머니와 한 동네에 살았다고요? 어머니는 채만식 작가가 돌아가신 후 집을 나간 게 아닌가요?
“가족사가 지금껏 잘못 알려진 겁니다. 참 화가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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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와세다 시절의 채만식.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사진=정현 스님 |
〈채만식(1902~1950년)은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보(1918~1922년)에 진학한다.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결혼하러 고향에 내려오라는 통보를 받는다. 부모의 강권으로 고향(전북 군산시 임피면)에서 10여 km 떨어진 마을(전북 익산시 함라면)에 살던 은선흥(殷善興·1901~1993년)과 결혼한다. 부부가 됐다지만 처음부터 떨어져 살았다.
채만식은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한다. 이듬해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조선에 돌아온다. 채만식은 《동아일보》 《개벽사》 《조선일보》를 옮겨 다니며 서울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소설가로 등단한 것도 이 시기다.
은선흥과의 사이에 두 아들 무열(武烈·1926~1945년)과 계열(桂烈·1928~2004년)이 태어난다. 아이가 태어났지만 두 사람은 함께 살지 않았다. 정식 이혼 절차를 밟은 건 아니지만 은선흥은 시집에서 쫓겨나 친정 부근에서 살았다. 채만식은 숙명여고를 나온 신여성 김시영과 동거했다. 채만식이 하숙했던 주인집 딸이었다고 한다. 김시영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다.
1950년 채만식이 폐결핵으로 사망한 후 김시영은 자신이 낳은 2남 1녀를 버리고 가출을 한다. 자식들은 고아원을 전전했고 딸 영실은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장애가 있던 어머니
― 어머니가 숙명여고를 나온 신여성이었던 건 맞나요?
“아니요, 어머니는 보통학교만 나왔어요. 함자도 김씨영(金氏榮)이 맞아요. 다섯 획으로 된 한자로 이름을 짓느라 씨(氏)를 쓴 겁니다. 금강산 온정리 출신이에요. 어머니는 평생 왼팔을 잘 쓰질 못했어요.”
― 장애가 있었나요?
“어머니가 어릴 때부터 짓궂었나 봐요. 세 살 때 감나무에 올라갔다 떨어졌대요. 팔이 삐어서 퉁퉁 부은 거예요. 금강산 온정리에 병원이 가까이나 있었겠어요? 외할아버지 친구분 중에 침놓는 분이 계셨대요. 그분이 침을 놔준 거예요.”
― 침을 맞고 나았나요?
“근데 그 어르신이 침을 놔주러 오는 길에 뱀에 물려 뱀독에 고생하는 농부를 만난 겁니다. 그 농부한테 침을 놔주고 그 침을 침통에 그냥 들고 온 거예요. 그걸로 제 어머니 침을 놓은 거예요.”
― 그런 일도 있군요.
“뱀독 때문인지 오히려 팔이 더 곯았대요. 병원에 갔더니 절단해야 한다고 하고, 외할아버지가 부득부득 절단하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임금님한테 시집을 가도 하다못해 물그릇이라도 제대로 들려면 양팔이 다 있어야 된다’… 어머니 팔꿈치 쪽에 구멍이 두 개 있었는데 거기서 평생 고름이 나왔어요.”
― 부모님이 하숙집에서 처음 만난 건 사실인가요?
“외갓집이 금강산 온정리에서 살다 서울 청진동으로 옮겨와서 하숙집을 했어요. 청진동 289번지, 하도 들어서 주소를 잊지도 못해. 사랑채에 하숙을 받았는데 가수 고은봉씨가 살았어요. ‘선창’을 부른 원로가수죠. 아버지는 그 근처 다른 하숙집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제 어머니랑 만나게 된 거예요.”
― 아버지는 하숙집을 옮기고 싶었겠군요.
“아버지가 고은봉씨에게 하숙집을 바꾸자고 그랬대요. 그랬더니 그분이 이러더래요. ‘이보게 최형, 열흘 삶은 호박에 바늘 끝도 안 들어갈 소리 하지 마시오.’ 그런데 이분이 만날 하숙비가 밀린 거예요. 제 막내 이모가 그랬대요. ‘고 서방, 하숙비 안 주려면 채씨랑 바꾸세요.’ 그래도 결국 못 바꿨어요.”
김씨영과 두 번째 결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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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과 김씨영. 친지 결혼 사진에서 부모님 얼굴을 확대해 합성한 사진이다. 사진=정현 스님 |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엄청 반대하셨어요. 시골에 처자(妻子)가 있는 걸 알았는지는 모르겠고, 아버지를 못 믿고, 귀한 딸 꼬드겨서 정신대에 넘기는 거 아니냐고 반대하셨대요.”
반대할 만도 한 게, 당시 채만식은 직장을 옮겨 다니며 글을 쓰는 소설가였고, 채만식과 김씨영의 나이 차이는 16세였다. 채만식은 두 번째 부인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스님이 외삼촌에게 들은 말을 들려줬다.
“외삼촌이라도 제가 출가하고는 존댓말을 쓰셨어요. 하루는 이러셔요. ‘스님, 어머니는 누구도 받지 못한 사랑을 매형한테 받고 살았을 거예요. 어머니 팔에서 고름이 계속 나오니까 대나무 대롱으로 빨대를 만들어서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주셨을 정도였어요.’ 그걸 누가 하겠어요. 저는 자식이라도 못 해요.”
두 사람은 어느 날 함께 개성으로 가버린다. 개성엔 채만식의 형들이 있었다. 채만식은 5형제 중 막내다.
“둘째, 셋째, 넷째 큰아버지가 개성에서 금광 사업을 하고 계셨어요. 가보니 어머니에게 윗동서가 세 명이나 있잖아요. 친정에선 걸레 하나 안 빨아보고 살았는데 시집살이가 시작된 거예요. 얼마나 그게 호됐는지, 어머니가 서울에 다니러 한 번 왔는데 외할머니가 대성통곡을 하셨대요. ‘세상에 우리 딸 몰골이 이게 뭐냐’ 그러면서 가지 말라고 잡으셨대요. 개성에서 3년 시집살이하는 동안 아이도 안 생겼대요.”
말이 좋아 금광이지 개성 금광은 채만식의 인생에 경제적으로 별 도움이 된 것 같진 않다. 채만식은 인세를 받으면 계속 금광에 투자했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채만식은 가족을 이끌고 군산으로 내려왔다. 부근인 익산시 주현동에 집을 샀다고 알려져 있지만 스님의 기억은 다르다.
“저는 우리 아버지가 평생 당신 이름으로 된 집도 없이 셋집 전전하다 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원고료를 받으면 금광에 투자했거든요. 넷째 큰아버지댁의 사촌 오빠들 학비도 아버지가 댔어요.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지요.”
채만식은 하나뿐인 딸을 무척 아꼈던 것 같다.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이모에게 물어보더래요. ‘처형 뭐 나왔어요?’ 이모가 ‘섭섭하시겠어, 딸이요’라 답했더니 아버지 말씀이 이래요. ‘딸 덕에 냉잇국 먹겠네요.’”
채만식은 딸을 누구도 업지 못하게 했다. 다리가 휜다는 이유에서다.
“이종 사촌 오빠가 놀러 왔다가 저를 업어준 거예요. 아버지가 외출했다 들어오시면서 그걸 보고 ‘영실이 다리 휘게 왜 업어줬냐’며 얼마나 혼을 냈는지, 오빠가 다시는 저희 집 안 온다고 할 정도였어요. 저랑 산책할 때도 일꾼이 진 지게에 저를 태우고 걸으셨어요.”
딸에게 공부도 직접 가르쳤다.
“옛날에는 강의할 때 칠판이 없으니 종이에 적어놓고 한 장씩 넘기면서 설명했잖아요. 그때 당신이 손으로 직접 구구단을 써서 저를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집에서 일 도와주는 언니가 하도 들어서 저보다 먼저 구구단을 배웠어요.”
스님의 기억 속 풍경 중엔 할머니의 장례날도 있다.
“제가 서너 살 때였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100세 다 되어 돌아가셨으니 호상이지요. 아버지가 저 시집갈 때 밑천한다고 사둔 소가 있었는데, 그날 소가 새끼를 낳았어요. 그런데 쌍둥이를 낳은 거예요. 아버지가 좋은 징조라며 좋아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딸을 얼마나 싸고돌았는지 어머니는 어떻게 손도 못 댈 지경이었다고 한다.
“옛날엔 눈다래끼가 많이 났어요. 제 눈에 났는데 어머니가 짜주고 싶어도 아버지가 손도 못 대게 하니까. 아버지가 글 쓰시다 한 번씩 산책을 나가셨어요. 장갑을 끼고 핀셋 들고 밭에 풀을 뽑겠다며 나가세요. 산책 겸 가시는 거죠. 이때다 싶어 어머니가 툇마루에 저를 눕혀놓고 다래끼를 짜줬어요.”
― 어떻게 됐나요?
“제가 얼마나 엉구렁(엄살)을 떨었는지 한달음에 아버지가 달려오신 거예요. 애 죽이는 줄 알고. 저를 끌어안고 얼마나 어머니를 혼내시는지… 그때는 그게 그렇게 고소하데. 고소할 일이 아닌데….”
병마와 싸우며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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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김씨영(아랫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오빠 김일영(아랫줄 왼쪽에서 네 번째)의 결혼식에 참석한 채만식(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아랫줄 맨 왼쪽이 김씨영의 부친 김창웅씨다. 아랫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 여성이 도안 스님, 윗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여성이 외할머니 곽윤섭씨다. 사진=정현 스님 |
“책상도 없어서 밥상에서 글을 쓰셨어요. 아버지가 글 쓰시는 방에선 항상 담배 냄새가 났어요. 왼손에 불 붙인 담배를 들고 상 위에 팔을 괴고 있는데, 팔꿈치가 배길까 봐 어머니가 쿠션을 팔 밑에 받쳐 주셨어요.”
― 폐가 안 좋은데 담배를 피우신 건가요?
“연기를 맡으려고 들고 있는 거죠. 담배가 다 타서 손이 뜨거워지면 어머니를 불러요. ‘날 봐, 날 봐’ 그러면 어머니가 연초를 말아서 다시 불을 붙여서 손에 쥐어드리죠.”
― 식사는 제대로 하셨나요?
“그때 그런 여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머니가 소고기를 사 와서 다져요. 힘줄이 하나도 없게 다져서 떡갈비처럼 만들어요. 잡수시다 어쩌다 힘줄이 씹힐 때도 있잖아요. 그러면 접시가 날아가는 거예요. 어머니가 많이 우셨어요.”
채만식은 생전에 성격이 워낙 깔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식사할 때 수저를 닦고 먹고, 앉아 있다가도 앉은 자리를 털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결벽증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오래 폐결핵을 앓으며 성격이 까다로워진 건 아닐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땐 딸을 무릎에 앉히고 먹여줬다.
“가을 저녁 논두렁에 가면 참게가 와글와글 기어 나와요. 아버지는 참게장을 제일 좋아했어요. 어머니가 참게장을 항상 많이 담가놓으셨어요. 아버지가 무릎에 절 앉히고 게딱지에 밥을 비벼서 제 입에 떠먹여 주곤 하셨어요. 저만 아버지와 겸상을 했어요. 저한테는 정을 많이 주셨죠.”
― 채만식 작가는 거동을 제대로 하셨나요?
“집 근처에 이리농림학교가 있었어요. 거기에 단장을 짚고 산책을 가는데 처음엔 괜찮았어요. 두세 번째 갔을 땐 힘들어하시는 걸 느꼈어요. 숨을 몰아쉬고요. 그러다 얼마 후에 돌아가셨어요.”
채만식은 죽음을 예감했는지 자신의 죽음 뒤를 준비했다.
“어머니에게 미싱을 두 대 사주셨어요. 당신 가고 나면 바느질 품이라도 팔아서 아이들과 먹고살라고요. 어머니가 손을 잘 못 쓰시니 발로 누르는 미싱이었어요. 한 대를 뜯어서 어떻게 조립하는지 어머니에게 가르쳐주시는 걸 제가 봤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을 위해 서울에서 가죽 가방도 사다 줬다. 시골에선 볼 수 없는 가방이었다. 딸이 학교에 입학하고 세 달 뒤인 6월 11일, 채만식은 눈을 감았다. 6·25 발발 2주 전이었다.
“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신 게 차라리 나았어요. 살아계셨다면 길에서 돌아가셨을 거예요. 시신도 못 찾았을 겁니다.”
― 왜요?
“6·25가 터지고 인민군이 저희 집에 나타났어요. 동네 사람을 앞세우고 우리 아버지를 내놓으라는 겁니다. 근데 그 동네 사람이 아버지 상여를 들었던 사람이었어요. 어머니가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나중에 그러셨어요. ‘총만 있었으면 다 죽이고 싶더라.’”
― 어떻게 됐나요?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셨어요. ‘당신이 엊그제 내 남편 상여를 들고 화장막까지 가놓고 어디 와서 채만식 내놓으라고 하냐’… 그 사람도 인민군이 등에 총을 들고 시키니, 뻔히 알면서도 시키는 대로 한 거죠.”
― 돌아가셨다고 대답하면 되잖아요?
“안 믿어요. 그때는 소식이 빨리빨리 안 전해졌거든요. 예산에 살고 계셨던 이모도, 아버지 돌아가신 걸 전쟁 터지고 나서야 아셨으니까요.”
북한은 전쟁 기간 많은 문인을 북으로 끌고 갔다. 소설가 이광수, 평론가 박영희, 시인 김동환·김기림·김억 등이 대표적이다.
술찌끼와 신작로
김씨영은 아이들을 소달구지에 태워 피란을 떠났다. 시집 식구들과 함께였다.
“피란을 갔다 돌아와 보니 미싱이 없어요. 셋째 큰아버지가 돈 될 만한 건 다 갖다 팔아버린 거예요. 아버지가 사준 근사한 가방도 없어졌지요.”
살 곳도 없어졌다.
“피란 갔다 왔는데 살 곳이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산지기 집으로 갔어요. 원래 할아버지·할머니 사시던 집을 산지기에게 쓰라고 내준 건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냥 산지기 집이 돼버린 거예요. 주객이 전도돼 주인 행세를 하더라고요. 그 집 뒷방에 저희가 살았어요.”
혼란한 시기에 손도 불편한 여성이 아이 셋을 데리고 살기 쉬웠을 터가 없다.
“술찌끼 먹어봤어요? 양조장에서 술찌끼를 얻어다 끼니를 때웠어요. 어머니는 돈을 벌려고 무지 애를 썼어요. 신작로 공사장에서 돌을 깨는 일도 했어요. 잊고 있다 1993년에 인도 가서 떠올랐어요. 길에서 돌을 깨는 여인들이 있었어요. ‘저런 광경을 내가 어디서 봤는데… 맞다 우리 어머니도 길에서 돌을 깨셨지.’”
― 팔이 불편한데 돌을 어떻게 깨나요.
“한 손으로 망치질을 하고 삼태기에 돌을 담아 한 손으로 질질 끌고 옮기셨지요. 이모가 오셔서 사는 모습을 보니 이게 말이 아니거든요. ‘내 동생이 어릴 땐 이렇게 힘들게 안 살았는데’… 갖고 있던 진주 반지를 준 거예요. ‘이거 팔아서 장사라도 해서 먹고살아라’면서.”
― 팔았나요?
“촌구석에서 어떻게 팔아요. 넷째 큰아버지에게 부탁하셨죠. ‘아주버님 이것 좀 팔아다 주세요’… 큰아버지가 부산으로 갔어요. 그런데 함흥차사인 거예요. 어머니가 답답하니까 병훈(炳焄) 오빠에게 시켰어요. 찾아오라고요. 그런데 오빠가 부산에서 못된 놈들한테 잡힌 거예요.”
― 깡패 집단에 잡혔군요.
“몇 달을 잡혀서 시키는 대로 나쁜 짓도 하다가 겨우 빠져나왔어요.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큰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까만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오시더라고. 당연히 돈 가져온 줄 알고 어머니는 좋아하셨어요. 그런데 큰아버지가 가방 밑창을 보여줘요. 돈 갖고 오다 쓰리꾼(소매치기)에게 당했대요.”
― 어머니는 뭐라 하던가요?
“하늘 같은 아주버님이 쓰리당했다는데 뭐라 하겠어요. 그래도 셋째 큰어머니와 역전으로 장사를 나가셨어요. 떡도 팔고 고구마도 팔고, 간식 장사를 하신 거죠. 그러다 안 되겠으니 아버지 원고를 들고 서울도 가셨어요.”
― 인세 수입을 좀 받았나요?
“전혀요. 아버지 생전 지인이었던 이무영씨에게 원고를 가져다 줬는데 출간이 됐는지 어쨌는지도 몰라요. 어머니가 나중엔 아버지가 생전에 써놓으신 원고 보따리를 은씨 어르신 댁에 갖다 드렸어요.”
‘은씨 어르신’은 채만식의 첫 번째 부인 은선흥씨를 뜻한다. 스님에게는 호적상 어머니이기도 하다. 스님은 은씨를 꼭 ‘은씨 어르신’이라 불렀다. 스님의 어머니 때부터 내려온 습관인 듯했다.
― 그걸 왜 갖다 드렸나요?
“제가 나중에 철이 들어서 어머니에게 여쭤봤어요. 그걸 왜 갖다 드렸냐고요. 어머니 답이 이래요. ‘그거라도 갖다 주면 나중에 너희한테 찬밥 한 숟가락이라도 줄 거라 생각했다.’”
坐脫立亡한 외할아버지
결국 숙명여고를 나오고, 채만식이 죽자 아이들을 버리고 출가한 신여성은 허구의 존재였던 셈이다. 스님 역시 고아원을 떠돌다 절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외갓집 자체가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
“외할아버지 윗대가 역적으로 몰렸어요. 집안 머슴이 아이였던 외할아버지를 업고 금강산 유점사로 간 거예요. 남의 눈을 피해 승려가 된 거죠. 장성한 후에 외할아버지는 환속(還俗)을 했어요. 인연이 뭔지 할아버지와 유점사에 같이 있었던 스님을 나중에 제가 만났어요.”
― 환속한 후엔 뭘 하며 사셨나요?
“석수(石手)를 하셨어요. 강화 보문사에 있는 마애관음보살좌상도 외할아버지 작품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가부좌하고 서쪽을 향해서 앉혀달라 하셨어요. 좌탈입망하신 거죠.”
좌탈입망(坐脫立亡)은 불교의 선승(禪僧)이 앉은 자세나 선 자세로 입적에 들어가는 걸 뜻한다. 외할머니 역시 신심 깊은 불교도였다.
“제가 어릴 때 보면, 외할머니가 늘 수보리가 어떻고 외셨어요. ‘수보리가 뭐 하는 사람인데 자꾸 찾으시나’ 했는데 출가를 하고 보니 그게 〈법화경〉이에요. 수보리는 부처님 제자고요. 외할머니가 눈 감고 앉아서 〈법화경〉을 암송하신 거였어요.”
스님의 이모 역시 출가했다. 수덕사 견성암의 일엽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도안(到岸) 스님이다. 일엽 스님(1896~1971년)은 속명인 김원주였던 1920년대에 《신여자》를 창간, ‘신정조론’과 ‘자유연애론’으로 대표되는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한 당대의 유명인사다. 1933년 만공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입산(入山)했다.
“이모가 저희 집에 와서 보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입 하나라도 덜자 하고 머무시던 수암산 부근 암자로 저를 데리고 가셨어요. 그런데 둘째 큰아버지가 오신 거예요. ‘내 동생 만식이 딸을 왜 중을 만드나, 학교에 보내겠다’ 그러시더군요.”
― 다시 돌아오셨군요.
“저를 큰아버지 큰딸네에 데려다 놓으셨어요. 큰딸이 양조장을 하고 있었는데 돌 지난 막내딸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양조장에서 애를 보게 된 거예요. 어머니는 제가 돌아온 줄도 몰랐어요. 읍내에 나왔다가 양조장에 들렀는데 제가 있으니 너무 놀란 거예요. ‘아니 언니가 데려간 애가 왜 여기에 있어?’ 시골이라 편지가 전달이 안 된 거예요.”
9세에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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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개관한 채만식문학관 개관 기념식.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정현 스님이다. 사진=정현 스님 |
“이모가 다시 저희 집으로 와보니 진짜 형편이 안 좋은 거예요. 다시 저를 데리고 내려가셨어요. ‘이번엔 진짜 안 보낸다’… 그렇게 견성암으로 가게 됐어요. 일엽 노스님이 저를 보시더니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어요. ‘네가 만식이 딸이구나’면서.”
그렇게 아홉 살에 절에 들어갔다.
“저를 맡은 스님을 따라 서산 개심사에 갔어요. 산을 몇 개를 넘어서 갔어요. 어느 날이었어요. 법당 앞에 대야에 물을 떠놓고 제 또래 아이들을 모아놓고 머리를 깎기 시작했어요. 너무너무 눈물이 나는 거야. 울었더니 등짝을 때리시더라고. ‘머리 깎을 때 울면 중노릇 못 한다.’”
어린 나이에 절간 생활이 쉬웠을 리가 없다. 적응을 못 하고 도망치기도 했지만 결국은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이모인 도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 운명을 거부하고 싶진 않았나요?
“제가 이모한테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머니가 같이 계셨기 때문이에요. 은사 스님이 암자 주지를 맡자 어머니가 오셔서 함께 사셨거든요. 젊었을 땐 하고 싶은 게 많았어요. 제가 나가면 어머니에게 해가 될까 봐 참고 살았지요.”
승가의 규율은 엄격했다. 아버지의 소설도 마음대로 읽을 수 없었다.
“절에서는 소설도 마음대로 읽지 못하게 했어요. ‘속세 일은 비로 쓸 듯이 싹싹 쓸어 비워야 중노릇을 잘한다’고 했어요. 몰래 〈탁류〉나 〈태평천하〉를 읽었지요. 그 후로도 아버지 소설 전 편을 한갓지게 읽어볼 여유는 없었어요. 이제는 돋보기를 써도 눈이 아파서 못 읽겠어요.”
스님은 그 시절 몰래 해둔 아버지 관련 신문 기사 스크랩을 후일 군산에 있는 채만식문학관에 기증했다.
‘첩의 아들이라는 낙인’
한동안 스님은 은사 스님과 함께 사찰을 옮겨 다녔다. 그러다 이모 스님이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딸이 부처님 모시고 산다고 어머니는 너무 좋아하셨어요. 늘 쓸고 닦으셨죠. 4년간 모셨고 1980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러고 나서 동생이 나타났어요.”
스님에게 오빠 병훈과 동생 영훈(永焄)은 목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동생은 대구에서 제화 기능공을 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왔는데 반송장이에요. 뇌동맥이 터져 쓰러진 거예요. 대구에서 치료가 안 된다고 해서 인천까지 택시를 타고 왔어요. 경희의료원에 입원했어요. 주변에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빌려서 병원비를 댔어요.”
― 큰일이었겠네요.
“퇴원 후엔 통원치료를 다녔어요. 동생을 데리고 병원에 다니느라 지하철 1호선이 있는 경기도에 다시 자리를 잡았어요. 동생이 이혼하고 함께 살던 여인이 있었는데, 병간호하며 동생 아이도 돌봐주다 어느 날 나가버렸어요. 착한 사람이었어요.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갔으면 차비라도 챙겨줬을 텐데.”
몸이 불편한 동생과 엄마 없는 조카들은 오롯이 스님 몫이 됐다. 속세를 떠나려 승려가 됐지만, 끝까지 가족을 돌봐야 했다. 1996년이었던가, 동생도 눈을 감았다.
― 오빠인 채병훈씨는 어떻게 됐나요?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요. 오빠에 대해서 저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아요. 나쁜 짓 하고 다녔고, 감옥도 다녀왔어요. 제가 7세, 오빠가 9세 때였나… 오빠와 아버지가 싸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요.”
― 싸움의 내용이 뭐였나요?
“그때부터 이미 아버지, 어머니 말씀을 잘 안 들었어요. ‘나는 죽을 때까지 첩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살아야 된다’며 아버지한테 달려드는 거예요. 그러니 아버지가 ‘저놈을 죽이고 가야 어미가 편안하게 산다’며 짚고 다니는 단장으로 오빠를 때렸어요.”
― 안타깝군요.
“어머니가 나도 같이 죽이라고 말리는 통에 어머니도 맞았지요. 앞집 할머니가 와서 말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러고 얼마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오빠는 커서 집을 나간 후로 단 한 번도 나와 어머니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채만식문학상 부활

스님은 자신이 채만식의 딸이라는 걸 드러내고 살지 않았다. 2001년 군산에 채만식문학관이 개관했다. “개관식 행사에 초대받아 갔어요. 유족 안내문에 ‘서녀(庶女) 채영실’이라고 쓰여 있는 겁니다.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채만식의 딸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동네 한의원에 갔는데 우연히 아버지의 얘기가 나왔다. ‘스님 속명이 채씨인데, 채만식 작가를 아시나요?’ 한의원 원장이 물어왔다. 스님은 무심히 답했다. ‘제 아버지예요.’
알고 보니 이 한의원의 임은경 원장 장인이 군산에 살며 채만식문학관이 문을 여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단다. 자연스럽게 스님은 마음을 열었다. 자신의 가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사단법인 향림불교의 김정묵 이사장 등 평소 인연을 맺은 인사들과 ‘채만식문학상’ 부활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전라북도 군산시와 채만식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2003년 채만식문학상을 제정했다. 하지만 2018년 제15회 상을 수여한 후 잠정 폐지했다. ‘친일 행적’을 문제 삼았다.
상이 없어지고 5년 만에 스님은 문학상을 되살렸다. 사단법인 향림불교에 자신의 전 재산이다시피 한 자산을 기탁했다. 향림불교가 상을 운영한다. 지난 6월 3일 제1회 백능 채만식문학상 시상식이 열렸다. 1회 수상자는 〈신의 한 수〉를 지은 심아진 작가다.
임피 읍내의 생가터를 떠나 채만식 묘소와 집필터를 찾았다. 도대체 얼마 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건지 방문 자체가 쉽지 않은 상태였다. 군산시는 채만식을 버린 듯했다. 왜 전 재산을 털어 아버지의 상을 되살린 걸까. 사실 스님의 결정이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군산을 방문하고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방민호 교수가 보는 채만식과 채만식문학상
“세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채만식 작가는 현실 비판 의식이 강했어요. 식민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갖고, 빈부 격차, 여성의 운명을 근대적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안타깝게도 후에 몇 년간 대일 협력을 했지만, 그걸 성찰하고 반성도 아주 깊이 있게 했어요. 채만식 덕분에 대일 협력에 대한 성찰의 문학이라는 범주가 성립된 겁니다. 둘째, 채만식의 언어는 아주 뛰어났어요. 언어를 조탁하는 작가예요. 작품을 수없이 고쳐 썼습니다. 그러니 구성과 문장이 기법적으로 아주 빼어나요. 한국어의 표현력을 높인 작가지요. 그런 면에서 당시 작가 중에 채만식을 넘어설 만한 작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가난과 역경 속에 빛을 못 보는데도 의지를 가지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어요. 채만식의 이런 세 가지 특징에 걸맞은 작가로 1회 수상자 심아진 작가를 선정했어요. 앞으로도 이런 기준으로 선발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