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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어제오늘내일

《플루타르코스영웅전》 完譯한 元老정치학자 申福龍 교수

“민주주의는 독재자보다 민중에 의해 허물어지는 경우가 더 많아”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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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인들이 민중의 뜻을 좇다가는 그들과 함께 죽고, 그들의 뜻을 거스르다가는 그들의 손에 죽는다’(플루타르코스)
⊙ ‘부정선거를 치르지 못하게 하는 지도자를 민중은 가장 미워한다. 민중은 正義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돈다발을 흔드는 정치인을 따르기 때문이다’(플루타르코스)
⊙ 자료 준비 15년, 번역에 5년 걸려… 1000여 개의 각주 달아
⊙ “플루타르코스, ‘세상에는 악한 놈들도 많으니 지혜롭게 살라’고 경고”
⊙ “세계 경제 10위권에 든 우리 국민은 ‘이제는 예전같이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몽환적인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어”
⊙ “한국의 보수·진보는 정제되지 않는 이념의 野積… 한국의 이념주의자들은 생계형”

申福龍
1942년생.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학사·석사·박사 /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同 대학원장, 석좌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역임 / [저서] 《한국정치사》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전봉준평전》 《한국분단사연구 : 1943~1953》 《한국정치사상사》 《해방정국의 풍경》 《한국사에서의 전쟁과 평화》 등. [역서] 《군주론》 《외교론》 《정치권력론》 《모택동 자전》 《입당구법순례행기》 《한말외국인기록》(전 23권), 《삼국지》(전 5권) 《플루타르코스영웅전》 등. [수상] 한국정치학회 저술상(2001년), 한국정치학회 인재(仁齋)저술상(2011년)
사진=배진영
  《플루타르크영웅전》(그 당시에는 플루타르코스를 ‘플루타르크’라고 표기했다)이라는 책 제목을 처음 접한 것은 어린 시절 위인전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처칠이나 나폴레옹 등이 즐겨 읽었다는 책이었다. 이후 소년용 《플루타르크영웅전》을 읽었다. 10여 년 전 고전(古典)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제대로 된 《플루타르크영웅전》을 읽어보고 싶었지만, 마음에 맞는 판본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지난 9월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을 발견했다. 하드커버에 그리스·로마인들의 흉상(胸像)이 표지 앞뒤에 그려진 다섯 권짜리 책이었다. 책을 낸 곳은 유서 깊은 출판 명가(名家)인 을유문화사였다. 번역자의 이름을 보고 무릎을 쳤다. 신복룡(申福龍·80)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정치사》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한국분단사연구 : 1943~1953》 《한국정치사상사》 등의 역저(力著)와 《군주론》 《모택동 자전》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 그리고 전(全) 23권에 달하는 《한말외국인기록》 등의 번역서를 펴낸 정치학계의 원로(元老)였다. 기자는 1987년에 나온 신 교수의 《한말개화사상연구》를 읽은 적이 있다. 사실 그동안 국내에서 나온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은 대개 일본어 중역본(重譯本)이거나 영문학자나 불문학자 등이 번역한 것이었다. 정치사나 정치사상에 밝은 정치학자가 번역한 책이라면, 뭔가 다른 점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은 한 권이 500~700페이지에 달하고, 등장인물 가운데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 한니발 같은 귀에 익은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생소한 사람들인 점이 다소 걸림돌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번 책을 손에 잡으면 비교적 술술 읽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을 번역했고, 다소는 진보적인 입장에서 구한말(舊韓末) 역사를 연구해온 신 교수로부터 오늘날의 한국이 처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1월 마지막 날 서울 종로3가에서 신복룡 교수를 만났다.
 
 
  《고결한 삶을 살다 간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비교 열전》
 
신복룡 교수가 완역한 《플루타르코스영웅전》(전 5권).
  ―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은 어떻게 해서 번역하게 되었습니까.
 
  “제가 《플루타르코스영웅전》 완역본을 처음 접한 때는 대학 초년생이던 1961년이었습니다. 번역자는 불문학자인 박시인(朴時仁) 교수님이었습니다. 당시 완역본은 그것밖에 없었는데 문장이 고아(古雅)해서 좋았지만, 일본의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중역한 것이어서 일본어 투가 섞여 있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나중에 강사 시절에 박 교수님을 뵐 일이 있어서 그런 점을 말씀드렸더니 제가 현대문으로 다듬어서 공저(共著)로 개정판을 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군요. 박 교수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플루타르코스영웅전》에 대해서는 계속 관심을 두고 틈나는 대로 여러 판본의 책을 구해놓았습니다. 정년퇴직 후 무료가 찾아왔을 때 《플루타르코스영웅전》에 다시 손이 갔습니다. 그동안 모아둔 영어 판본이 세 가지,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것이 네 가지, 프랑스어 판본 하나, 그리고 그리스어 판본이 하나였습니다. 이제야말로 이 책을 번역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어 번역에 착수했습니다. 자료를 모으는 등 준비하는 데 15년, 번역하는 데는 정확히 5년이 걸렸습니다.”
 
  ―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은 한마디로 어떤 책입니까.
 
  “흔히 《영웅전》이라고 하지만 원래 이 책의 제목은 〈고결한 삶을 살다 간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비교 열전(Parallel Lives of the Noble Grecians and Romans)〉입니다. 사실 이 제목도 플루타르코스 본인이 붙인 것이 아니라 1519년 이 책의 인쇄본이 처음 나올 때 붙은 제목일 수도 있어요.
 
  하여튼 플루타르코스의 글에는 ‘영웅’이라는 단어는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이 책을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이라고 번역한 것은 플루타르코스의 뜻에서 조금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웅의 삶’ 혹은 ‘고결한 삶’
 
플루타르코스
  ― 《플루타르코스영웅전》에 나타난 ‘영웅’들의 삶, 혹은 플루타르코스가 생각했던 ‘고결한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전공(戰功)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국가에 대한 충용(忠勇), 공의(公義)로움, 신의(信義), 악인에게 무너지지 않는 현철(賢哲), 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 그 가운데에서도 어머니의 힘, 그리고 장엄한 죽음을 두루 갖추었을 때 그를 ‘고결하다’고 말했습니다. 민족아이덴티티가 사라져가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영웅전》 속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조국에 대한 열정이나 신의 같은 미덕들은 요즘 정치인들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플루타르코스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역사에서 명멸(明滅)한 영웅들의 거대한 서사(敍事)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사소하고도 인간적인 애증(愛憎)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들은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도 아니었고 어느 날 문득 땅에서 솟은 사람도 아닌, 우리와 같은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었습니다. 음모와 배신을 일삼는 추악한 무리도 많이 등장합니다.
 
  이를 통해 플루타르코스는 우리에게 ‘세상에는 악한 놈들도 많다. 너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쁜 사람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다’면서 ‘지혜롭게 살라’고 경고합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만, 솔로몬에 대한 기록(지혜, 노래)을 보면 의외로 ‘착하게 살라’는 말은 없어요. 대신 ‘지혜롭게 살아라’라고 얘기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착하고 무능한 사람이에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니 하는 말들은 현실에서는 꼭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영웅전》은 그런 얘기를 정직하게 해줍니다.”
 
 
  아미요
 
아미요 주교
  ― ‘신복룡 판 영웅전’은 특히 이 점이 다르다고 강조할 만한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기존의 《영웅전》에는 모두 50명이 실려 있었습니다만, 제 책에는 52명이 들어 있습니다. 프랑스의 가톨릭 주교 아미요(1513~1593년)가 복원한 〈테미스토클레스와 카밀루스의 비교〉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의 비교〉 〈포키온과 소(少)카토의 비교〉 〈피로스와 마리우스의 비교〉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비교〉 등 5편의 비교 평전과 《영웅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한니발전〉과 〈스키피오전〉을 더했습니다. 이는 프랑스어 판본 말고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아울러 플루타르코스가 인용한 철학자나 극작가들의 발언들의 출전(出典)을 찾아서 1000여 개의 각주(脚註)를 달았습니다. 이런 책들은 각주 없이 원문만 가지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번역자가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아미요 주교가 복원한 내용이 들어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플루타르코스(서기 45년경~120년경)가 《영웅전》을 완성한 것은 서기 100년을 좀 지나서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처음부터 연대기적으로 쓴 것도 아니고, 자기가 높이 평가하는 인물을 골라 두 명씩 대비(對比)하여, 긴 호흡으로 쓴 책입니다. 그가 책을 완성했을 때는 50쌍, 곧 100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조악한 파피루스로 전승(傳承)되어오는 동안에 오탈자(誤脫字)가 생기고, 어떤 사람의 전기는 모두, 또는 부분적으로 망실(亡失)되었습니다. 따라서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발명한 뒤 180년이 지나 베네치아의 마누티우스가 1519년에 최초로 활판(活版)으로 《영웅전》을 만들었을 때는 이미 절반이 망실되어 50명만이 전승되었고, 그나마 어느 인물은 부분적으로 일실(逸失)되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아미요 주교는 망실된 부분을 찾았고, 부족한 부분은 자기가 플루타르코스의 필치(筆致)로 40여 명의 평전을 복원했습니다.”
 
  ― 그렇다면 아미요 주교가 복원한 부분은 플루타르코스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오히려 아미요 주교가 복원한 부분이 플루타르코스보다 나은 부분도 있습니다. 고증(考證)을 통해 플루타르코스의 오류를 바로잡았고, 문장도 더 유려하거든요. 아미요 주교도 말한 것처럼 《영웅전》에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빠진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요. 제가 번역본에 추가한 것은 아미요가 복원한 것 가운데 이 분야의 역사학자들이 《영웅전》에 포함하여도 손색이 없다고 판단한 것들입니다.”
 
 
  “內亂이 暴政보다 국민을 더 불행하게 한다”
 
少카토
  ― 《영웅전》 속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독자들의 기호(嗜好)는 각기 다르겠지만 저는 소(少)카토와 코리올라누스를 가장 좋아합니다. 소카토는 젊어서부터 학문을 사랑했고, 뛰어난 웅변과 정치적 경륜으로 당대 로마의 역사를 이끌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병권(兵權)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권력의 끝없는 야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카이사르의 독재를 막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카토가 카이사르의 독재를 ‘막지 못했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키케로 등과 힘을 합쳐 적극적으로 카이사르를 막으려 했다면 성공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자기가 시대를 역류(逆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체념했던 것 같아요.”
 
  ― 저도 무너져내리는 로마 공화정(共和政)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쳤던 소카토와 브루투스가 가장 인상적이더군요.
 
  “소카토는 자기가 카이사르에게 저항할 경우의 승산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가 걱정한 것은 자신이 카이사르에게 저항할 경우에 로마가 일찍이 겪어보지 않은 내란(內亂)에 휩싸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내란이 폭정(暴政)보다 국민을 더 불행하게 한다’는 정치적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자살하기 전날 밤, 플라톤의 《영혼에 관하여(Phaedo)》를 읽고, 코를 골면서 잠을 잔 다음 일어나 자살합니다. 그는 죽음을 초월한 인물이었습니다. 네로 사후(死後)에 잠시 황제 가 되었던 오토도 로마가 내전의 위기에 빠지자 ‘동족상잔(同族相殘)은 조국에 대해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다. 나는 그 길을 피하고자 목숨을 끊는다’면서 자결했습니다. 조국을 내란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지금 세계 곳곳에 권력을 잡거나 유지하기 위해 나라를 내란의 위기로 몰고 가는 이기적(利己的)인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점에서 소카토나 오토의 이야기는 그런 사람들이 한 번쯤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플루타르코스의 DNA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가 그린 〈로마성벽 앞의 코리올라누스〉.
  ― 조국 로마에 칼을 겨누었던 코리올라누스를 좋아하는 것은 조금 뜻밖입니다.
 
  “코리올라누스의 본명은 가이우스 마르키우스였으나 볼스키의 코리올리 부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집정관(執政官)이 되어 코리올라누스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았지요. 하지만 정적(政敵)의 모함을 받고 망명(亡命)길에 오른 후, 복수의 화신(化身)이 되어 볼스키의 아우피디우스와 손잡고 조국 로마로 쳐들어오지요. 로마는 그를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가 질풍처럼 로마로 들어섰을 때, 그의 앞에 한 노파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타납니다. 코리올라누스가 보니 자신의 노모와 아내, 자녀들이었습니다. 황급히 말에서 내린 코리올라누스가 어머니를 붙잡고 용서를 빌자 노모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너의 조국을 유린하려거든 이 어미의 시체를 밟고 넘어가라.’
 
  이 말을 들은 코리올라누스는 끝내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볼스키로 돌아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로 죽음을 맞습니다.”
 
  ― 그야말로 비극적 영웅의 전형이죠.
 
  “앵글로-색슨 문화권에서 《영웅전》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인 토머스 노스는 《영웅전》을 번역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헌정(獻呈)하고 경(卿·Sir)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여왕은 특히 〈코리올라누스〉 편에 너무 감동하여 셰익스피어를 불러 이를 극본으로 만들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것이 곧 셰익스피어의 비극 《코리올라누스》입니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오장원(五丈原)에서 세상을 떠나는 모습 못지않게 비감(悲感)합니다.”
 
  ― 베토벤의 〈코리올란서곡〉도 있지요. 처칠이나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도 《영웅전》을 즐겨 읽었다고 하고…. 이런 걸 보면 구미(歐美)문화에서 플루타르코스의 유산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군전쟁 이래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구미 정치인이나 군인들이 보여준 국가에 대한 헌신 의지 같은 것은 아마도 플루타르코스의 DNA일 것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궁극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인데, 죽음의 순간에 그 길을 쉽게 간다는 것은 비범한 일이지요.”
 
 
  동서양 兩大 영웅전 完譯
 
  ― 《영웅전》 속 인물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술라나 마리우스(둘 다 로마공화정 말기의 군인이자 독재자) 같은 무리입니다. 너무 탐욕스러웠고, 공적에 견주어 죽음이 너무 비루(鄙陋)했기 때문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선악(善惡)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고 하면서도 죽음이 비굴했던 술라, 마리우스, 안토니우스 같은 이들에 대해서는 참지를 못합니다.”
 
  ― 금년 2월에는 《삼국지》(전 5권, 집문당 펴냄)도 번역했더군요.
 
  “어린 시절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을지로7가 시구문 밖 구멍가게에서 점원 노릇을 하던 시절에, 저녁이면 《삼국지》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삼국지》를 통해서 우리 선배들은 고난을 어떻게 견디고 이겼는가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삼국지》도 《영웅전》처럼 삶이 늘 공의로운 것도 아니고, 정의가 늘 이기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이 혼탁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착하게만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살라’고 권고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세상에는 천사도 있고 악인도 있는데, 악인에게 지고 서러워하지 말라고 가르치죠.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대략 400종의 《삼국지》가 나왔는데, 원본(原本)에 따라 보태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전문(全文)을 온전히 옮겼고, 고사성어(故事成語)를 포함하여 1000개가 넘는 주석을 달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삼국지》들과 다르다고 자부합니다. 아마 동서양의 양대 영웅전을 각주까지 붙여서 완역한 사람은 제가 유일하지 않을까요?”
 
  ― 《영웅전》은 얼마나 나갔습니까.
 
  “두 달 만에 초판 1500질(帙)이 나갔고, 재판을 찍었습니다.”
 
  ― 대한민국 건국 이후 역대 대통령들을 《영웅전》 속의 인물들과 비교해 본다면 누구와 비견할 수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고…. 저는 영웅사관(英雄史觀)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한 영걸(英傑)이 출현하여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 사례는 허다합니다. 한국의 현대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역사의 평가와 개인적인 호오(好惡)가 다를 수 있고, 그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는 것은 지극히 조심해야 할 일임을 전제로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씀드리자면, 한국 현대사에서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밤잠을 못 이루며 울먹인 대통령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하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경우도 조국을 걱정한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 되겠지요. 그 밖의 지도자들은 일신의 호강과 영달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박정희·이승만 대통령 모두 말년에 허물이 있고, 제가 이 글에서 강조하는 영걸의 조건, 곧 ‘장엄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하자(瑕疵)를 안고 있다는 점은 안타깝습니다.”
 
 
  민중과 지도자
 
  ― 중국의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의 열전(列傳)과 《플루타르코스영웅전》을 비교해 보면, 중국 열전 속에는 민중(民衆)이 없습니다. 등장하기는 해도 고작해야 교화(敎化)나 목민(牧民)의 대상일 뿐입니다. 반면에 《영웅전》에서는 영웅(엘리트·통치자·리더)과 민중(피치자·우민)의 상호작용이 보입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고대(古代) 로마·그리스의 왕정(王政)과 공화정의 길항(拮抗) 과정에서 민중과 지배 계급의 갈등은 늘 제기되는 숙제였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타협도 있었고, 많은 유혈(流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갈등을 잘 극복했습니다. 그 갈등의 극복 과정은 역시 영걸의 판단과 설득, 그리고 대의(大義)를 위한 자기희생이 전제(前提)되어 있었어요.
 
  민중이 지도자 또는 지배 계급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상조(相助)·공존(共存)하느냐 하는 것은 늘 숙제였지만, 로마·그리스의 역사를 보면 그래도 ‘우정 어린 공생 관계(friendly partner-client relationship)’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요구의 한계와 용납의 인계선(引繫線)에 대한 암묵적 합의가 이뤄져 있었고, 이 선(線)을 넘을 때는 유혈이 발생했습니다. ‘정치인들이 민중의 뜻을 좇다가는 그들과 함께 죽고, 그들의 뜻을 거스르다가는 그들의 손에 죽는다’는 플루타르코스의 말은 지배자와 민중의 타협의 선을 말하는 것이었지요. 이 경구(警句)는 지금 한국의 현실에서도 유효합니다.”
 
 
  “‘牧民’은 매(牧)로 백성을 친다는 뜻”
 
  ― 우리 역사에서의 민중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한국사에서의 민중의 역할은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조선조 후기에 민란(民亂)이 있었고 그 앞자리에 동학(東學)농민혁명이라는 민중항쟁이 존재했지만, 그들에게는 주권재민(主權在民)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고,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의 ‘칸막이(compartment)’를 제거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가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시대의 민중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는 없으며, 우리의 역사에서 민중이 등장하기까지는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설립되기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 칸막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신분의 문제입니다. 예컨대 실학(實學)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정약용의 언행(言行)을 보면 결코 민중적이지 않았어요. 예컨대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가려면 원님 허가를 받아야 하고, 팔뚝에 상놈은 상놈이라고 먹물로 쓰고 다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약용이 다산(茶山)에 살 때 소실(小室)과의 사이에 딸을 두었는데, 나중에 그 딸이 찾아오자 ‘내가 왜 그 천한 것을 만나느냐’면서 만나지 않았습니다. 실학자들은 당대의 토지 모순에 대해서는 고민했지만, 신분 해방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쓴 정약용이 그랬다니 뜻밖이네요.
 
  “서구(西歐)에서는 지배자가 민중을 파트너로 인식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우민관(愚民觀)에 입각하여 마치 개나 돼지를 몰 듯 백성은 매질하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목민(牧民)’이라는 말 자체가 매(牧)로 백성을 친다는 뜻이에요. 따라서 《목민심서》 등 실학에서 보이는 ‘목민’을 ‘애민(愛民)’으로 확대 해석하는 데에는 상당한 논리적 괴리가 있습니다.
 
  칸막이 문화는 한국인의 DNA입니다. 오늘날 회사 사무실에서 옆 사람하고 칸막이 치고 사무 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나는 너와 다르다’는 것이지요. 대학에서도 교수 연구실에 들어가면 조교 자리와 교수 사이에 칸막이가 있어요. 나는 교수 생활 하면서 평생에 칸막이를 친 적이 없어요. 왜 교수와 조교 사이에 칸막이를 둬야 합니까? 하지만 한국인은 칸막이를 철폐할 생각이 없습니다.”
 
 
  ‘民衆의 左傾化’
 
  ― 1987년에 쓴 《한말개화사상연구》를 보면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등의 표현이 보이더군요. 여기서 민중은 어떤 의미입니까.
 
  “중세(中世) 이후 유럽 사회에서의 민중이라 함은 진신(縉紳·gentry)과 농노(農奴)를 제외한 초기 산업노동자 사이에 존재하는 중산층(中産層)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민중이라 함은, 빚이 없는 경제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수입, 문자 해득, 최소한의 주거,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헌신 의지를 필요조건으로 했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의 민중이라면 시민(市民·bourgeois)이라는 의미 같네요.
 
  “그렇지요. 시민이라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시민 개념이 등장했을 때 유럽에서는 시민과 민중의 개념이 정확하게 분화되지 않았거든요. 즉 민중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재산의 소유와 결정적인 함수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었어요.”
 
  ―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민중이라고 하면 프롤레타리아(Proletarier), 무산(無産)계급과 비슷한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지요.
 
  “한국 사회에서 민중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을 거치고, 초기 산업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동의 문제가 화두(話頭)로 등장한 이후였습니다. 엘리트든 노동자든 오랜 우익(右翼) 사회에서 신음하던 피압박(被壓迫) 계층에 대한 연민(憐愍)과 내가 저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소명감, 그리고 내가 저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휴머니즘에 그들이 기초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적 배경을 안고 등장한 민중의 개념은 태생적으로 개념의 오해를 야기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민중은 지배자에 대한 대칭 개념이었는데, 발전 주도형의 초기 산업 사회에서는 민중이 ‘무산자’와 개념의 혼동을 일으켰고, 이때로부터 민중의 좌경화(左傾化) 또는 적색(赤色) 노조와의 연계 현상이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의 NGO는 생계형 準권력집단”
 

  ― 그렇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민중이라 함은 ‘위장된’ 무산자(無産者)와 반(反)사회적 저항 세력(counter-elite), 그리고 어떤 계기로 사회 적응에 실패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 주변인(周邊人·marginal-man)이라는 변이된 집단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생계를 요구하는 인간의 기본권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민중운동 자체가 삶인 ‘생계형 꾼들’의 집단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거에서의 표를 무기로 정권을 압박했으며, 그때로부터 건강한 무리로서의 서구적 민중과 서서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지배자와 민중의 등식이 아니라 지배 계급에 기생(寄生)하는 ‘준권력체(準權力體)’로 비대(肥大)하게 성장하여 활약하고 있는데, 이는 건강한 사회 구조라고 할 수 없습니다.”
 
  ― 이른바 시민단체들 얘기입니까.
 
  “네, 맞습니다. 사실 요즘 한국은 NGO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한국의 NGO는 생계형입니다.”
 
  ― 역사의 주역은 영웅일까요, 민중일까요.
 
  “결국 역사는 선장(지도자)이 방향타를 잡고 민중(엔진)이 추진(推進)하면서 직조(織造)한 발자취입니다. 선장이 배를 추진할 수도 없고, 엔진이 그 배의 방향을 이러니저러니 타박할 수도 없습니다. 각기 그 자리에 주어진 역할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 《영웅전》을 보면 그 시절에도 포퓰리즘이 만만치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 ‘국민의 수준은 높아졌는데, 정치는 삼류(三流)’라고 합니다. 이는 참으로 근거 없는 미망(迷妄)이며 몽환적(夢幻的) ‘탓의 정치’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민중은 늘 자기의 분수와 처지에 정확히 부합(符合)하는 정치인을 뽑았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부정선거를 치르지 못하게 하는 지도자를 민중은 가장 미워한다. 민중은 정의(正義)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돈다발을 흔드는 정치인을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 ‘돈 봉투 받고 바로 찍으면 된다’는 사람도 있지요.
 
  “역사에서는 아직 그런 사례가 보고된 바가 없습니다. 흑인참정권이 시작되던 초기인 1865년에 백인 후보자는 화려한 곡마단을 운영하면서 흑인에게는 극장표 대신에 투표권 용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서커스 한 번 본 대가로 4년의 주권(主權)을 포기했습니다. 지금 한국의 현실이 그보다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민중이 우수한데 지도자가 그보다 열등했다면 민중은 반드시 그를 방벌(放伐)했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순리입니다.”
 
 
  “민주화, 100년은 더 걸릴 것”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을 세운 지 74년이 지났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민을 길러내고,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이룩하는 데는 실패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의 공화정은 아무리 좋게 봐도 60점 이상을 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것은 민주화라는 말과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는, 달리 말하면, 연륜(年輪)입니다. 정치에도 연륜, 곧 숙성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지방의회 선거를 30회 정도 더 거친 이후로 길게 보아야 하겠지요. 한국이 민주화를 이루려면 긴 호흡이 필요합니다.”
 
  ― 지방선거를 30회 정도 더 거친다면, 120년인데요.
 
  “네. 100년은 넘게 걸릴 거로 봅니다. 영국의 민주주의는 350년의 피어린 투쟁과 타협 끝에 이뤄졌잖아요.”
 
  ― 특별히 지방선거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작은 정치를 익힌 사람이 큰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위안부의 핏값으로 포도주나 홀짝거리며 그럭저럭 의원의 임기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이를 암묵적(暗默的)으로 방관하는 여당과 야당의 공생(共生) 현실에서 무슨 민주화를 기대하겠습니까? 지방의회 의원의 전과율(前科率)이 40%에 육박하고 있고, 지역사회의 공익(公益)에 헌신하고 봉사한다던 본래의 취지는 사라지고 이제는 생업화(生業化)되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 정치의 미래를 막는 암운(暗雲)입니다.”
 
  ― 민주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시킬리아(시칠리아)의 참주(僭主·독재자)들과 싸웠던 디온이나 티몰레온, 혹은 아테네의 여러 정치인의 사례를 보면 민주주의는 이룩하는 것도 어렵지만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주주의라는 게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 지탱력이 약해요. 당시 민주주의가 허물어지는 것은 독재자에 의한 경우보다는 민중에 의한 경우가 더 많았어요. 지금 이 시대를 연상하게 되지요. 결국 민주주의는 ‘어떻게 민중을 다루는가’의 문제인 것 같아요.”
 
 
  “亡國은 우리 자신의 책임”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신복룡 교수는 구한말 개화사상이나 국제관계에 대한 논문을 다수 썼고, 구한말 조선을 찾아왔던 외국인들이 쓴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 흔히 지금의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한국이 놓인 입장을 두고 구한말에 비유하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마도 맞는 말일 것입니다. 역사에서 100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세계 경제 10위권에 든 우리 국민은 지금 자아도취(自我陶醉)에 빠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예전같이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몽환적인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보다 더 강성하고 유구한 문화 전통을 가진 나라도 수없이 명멸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를 거쳐 그리스·로마와 오스만튀르크와 몽골의 멸망을 보세요. 중국도 일본도 패망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지하철을 타던 아르헨티나도 지금은 석양(夕陽)입니다.”
 
  ― 구한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조선이 결국 망국(亡國)에 이르게 된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망국을 얘기할 때에 외세(外勢)가 쳐들어왔으니, 침략주의의 비도덕성(非道德性)을 비판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늘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절대왕정 시대에 망국의 책임은 1차적으로 군주(君主)에게 있습니다. 을사(乙巳) 5적(賊)이니, 정미(丁未) 7적이니 하지만, 혼군(昏君)은 십상시(十常侍)보다 더 망국적입니다.”
 
 
  일본 지도를 삶은 조선
 
조지 케넌
  ― 공감합니다.
 
  “러일전쟁의 기운이 감돌던 무렵에 미국의 조지 케넌(George Kennan·냉전의 전략가 조지 케넌의 종조부)이 한국을 찾아와서 전황을 살폈습니다. 고종도 만났지요. 케넌이 조선(대한제국)의 고위 관리들에게 ‘지금 한국의 사정이 위태로운데 무슨 대비를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일본 지도를 물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 삶았기 때문에 걱정 없다’라고….”
 
  ― 어이가 없군요.
 
  “조지 케넌은 이 이야기를 《아웃룩(Outlook)》(1904년 10월 22일 자)에 썼습니다. 그걸 읽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그러고도 나라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조선의 망국은 1차적으로는 지배 계급이 시국(時局)을 읽는 눈이 없었고, 게다가 너무 부패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 고종을 비롯한 당시 위정자(爲政者)들의 부패는 악명이 높지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조선을 합병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3000만 엔 정도로 계산했습니다. 나중에 송병준은 1억 엔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1907년까지 이토 히로부미가 쓴 돈도 3000만 엔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토는 고종에게 30만 엔을 준 것도 기록해놓았어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을 두고 계몽전제군주라느니,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 후 이토 히로부미가 귀국 인사차 고종을 찾아왔을 때, 고종은 ‘고생하셨는데 좀 쉬시다 가지 않고 가느냐. 꼭 이토 후작이 통감으로 와달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이 무슨 계몽전제군주입니까?”
 
 
  ‘백내장 같은 중화주의’
 
  ― 당시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 반면, 한국은 실패한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한국이 3면이 바다인 해양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백내장(白內障)과 같은 중화주의(中華主義)에 휩쓸려 바다를 버린 것도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표류해온 하멜이 가져온 병기(兵器)를 녹여서 호미로 만들었고, 하멜 일행을 노예처럼 부렸지만, 일본은 표류해온 서양인들을 기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난학(蘭學)을 받아들여 소화하고 응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다에 대한 인식과 도전 정신 때문이었고, 오스만튀르크가 멸망한 것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터키 앞바다에 있는 그리스 영토인 사모스(Samos)가 터키 육지에서 1.6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현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그것입니다. 동작대교가 1.6km입니다.”
 
  ― ‘백내장 같은 중화주의’라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가 중국을 바라보는 눈길은 조선 시대의 노론(老論)의 시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중국은 거대한 시장이며 통일의 지렛대’라는 허구(虛構)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 미중(美中) 신(新)냉전시대에 어쩌면 구한말이나 미소(美蘇) 냉전보다 더 큰 격변이 올지도 모르는데, 이를 극복할 만한 리더십은 보이지 않습니다. 《영웅전》에서 이런 상황에 교훈이 될 만한 인물이 있다면 누구일까요.
 
  “아테네의 지도자 포키온(Phokion·? ~기원전 318년경)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84세의 장수를 누리면서 국가의 각종 지도자의 직책을 45회 맡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엄정(嚴正)했고, 검소했으며, 정직했습니다.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말년에 만나 유럽 역사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는가를 담론할 때, 한니발이 알렉산드로스 다음으로 꼽은 인물이 포키온이었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의 저택을 짓느라고 수선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리스를 반석 위에 올려놓게 했을까요? 그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정치인이 부패하지 않고, 부자가 조국을 위해 돈 쓰는 일을 아까워하지 않고, 젊은이가 조국을 지킬 결의를 굳게 가지고 있는 나라가 멸망한 사례는 역사에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의 진보, 왜 그렇게 富者인가?”
 
  ― 진보 내지 중도 좌파적 시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교수님이 생각하는 ‘보수(保守)’와 ‘진보(進步)’는 어떤 것입니까.
 
  “패러다임으로 볼 때 보수는 재산에, 진보는 휴머니티에 악센트를 둡니다. 그러다 보니 보수는 자유를, 진보는 평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 스펙트럼이 정교하게 적용되지 않아요. 전 세계적으로 보면 보수는 대체로 국가주의자인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외치는 진보주의자들은 세계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진보가 더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잖아요? 한국의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은 정제되지 않은 이념의 야적(野積)이에요.”
 
  ―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어떻게 봅니까.
 
  “해방정국으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언필칭(言必稱)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지겠다고 많은 정치인이 호언했지만, 그들의 정치 이념이나 의지는 혈육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혈육의 정(情)은 돈을 뛰어넘지 못했고, 돈은 공천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한국사에서의 이념주의자들(ideologues)은 ‘생계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자식을 위해 돈의 추문(醜聞)을 남기지 않은 사람은 박정희와 이승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진보는 왜 그렇게 부자(富者)입니까? 그만큼 한국에서의 보수니 진보니 하는 무리는 허울뿐이었고, 이념은 정제되지 않았습니다. 보수는 부패했고, 진보는 무례(無禮)했습니다.”
 
  ― 이번 대선 후보들을 《영웅전》 속의 인물들과 비견해 볼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는 할 말을 못 하고, 안 할 말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거법도 두렵고…. 하하하. 그러나 정권은 바뀌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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