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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용학 한민회 이사장

“광복 후 중국 홍커우공원에서 김구 선생님과 울면서 애국가 불러”

글 : 정광성  월간조선 기자  jgws8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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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놈들이 우리 집을 도와주는 척하며 항상 감시하고 있어”
⊙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상해 인성학교’에서 受學
⊙ “아버님은 일본군에 끌려가 고문받고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셔”
⊙ “광복 후 화물선 타고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와”
⊙ “어린 나이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고아로 떠돌아다녀”
⊙ 광복부터 6·25전쟁까지 살아 있는 역사
⊙ “한국 독립투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내 보상받게 하는 게 꿈”

崔勇鶴
1937년생. 한국외국어대 졸업, 마닐라 데라살 아레네타 대학원 박사 / 평택대 교수·교육대학원장 역임 / 저서 《천재 작곡가 이문근 신부와 보리밭 작곡가 윤용하 선생》
  2022년은 윤봉길 의사 상하이(上海) 의거(義擧)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는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이다. 윤봉길 의사는 이 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축하 행사에 참석한 일본군 수뇌부를 향해 수통형 폭탄을 투척했다.
 
  홍커우공원은 최용학 한민회 이사장에게도 특별한 장소다. 최 이사장은 1937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조국으로 돌아왔다. 최 이사장의 부친(최태현)은 김구, 이시영 선생 등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일했지만, 그에 대한 공식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최 이사장을 만난 것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한민회 사무실에서다. 90세를 바라보는 최 이사장은 아직도 상하이에서의 생활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홍커우공원에서 일본군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 상하이에서 사실 때 기억이 납니까.
 
  “네,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일본놈들이 말을 타고 우리 집에 몰려와서는 감시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심 쓰듯 나를 말에 태워주기도 했습니다.”
 
  ― 왜 감시를 했나요.
 
  “아버님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시다 보니 이놈들이 우리 집에 수상한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지 감시한 거였죠.”
 

  ― 아버님이 독립운동을 했나요.
 
  “네, 현재는 아버님이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유공자로 인정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 독립운동을 했는데 왜 기록이 없죠.
 
  “지금 나온 기록이라는 것이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만드신 ‘공평사’에 회비를 당시 돈으로 2000원 정도 냈다는 기록과 윤봉길 의사 의거를 도왔던 분들이 당시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의거를 도왔다는 증언밖에는 없습니다.”
 
  ― 그걸 어떻게 알았나요.
 
  “당시 의거 이후 체포된 사람들이 일본 경찰에 끌려가 진술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당시 신문과 자료들에 나와 있었습니다.”
 
  ― 그래서 일본군이 집을 감시했던 건가요.
 
  “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집을 감시할 이유가 없죠. 그리고 아버님이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일본군이 우리 집을 감시하겠습니까. 아마 제 기억으로는 당시 그 사건 때문에 아버님도 일본군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아버님도 일본군에게 끌려갔었나요.
 
  “네, 가서 갖은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저는 당시 보지 못했습니다만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거의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받다가 풀려났다더군요. 이후 계속 병상에 누워 계시다가 끝내 돌아가셨죠.”
 
  ― 몇 년도에 돌아가셨나요.
 
  “1941년에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있나요.
 
  “없습니다. 4세 때 돌아가시다 보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죠. 집에 걸려 있는 사진을 통해서 아버지 얼굴을 아는 거죠.”
 
  ― 상하이 살던 집이 홍커우공원에서 가까웠다면서요.
 
  “네, 엄청 가까웠어요. 그러다 보니 그분들이 우리 집에서 숙식하면서 거사를 도모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홍커우공원은 저에게 특별한 곳입니다.”
 
  ― 어떻게 특별한 곳인가요.
 
  “앞서 말한 윤봉길 의사가 의거한 곳이기도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 어려서 뛰어놀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일본군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도 했습니다.”
 
  ― 그건 무슨 얘기인가요.
 
  “당시 그곳에서 동네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곤 했어요. 어린 마음에도 일본이 싫어 일본과 싸워 조국의 광복을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날도 전쟁놀이를 하는데 갑자기 일본군 트럭이 나타났어요. 저는 피할 틈도 없이 트럭에 치였죠. 그놈들은 그때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달아났다고 하더군요.”
 
  ― 큰 사고였네요.
 
  “네, 그 사고로 6개월 정도를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분하던지 빨리 일어나 나를 치고 간 일본군 트럭에 폭탄이라도 던지고 싶었어요.”
 
 
  “이시영 할아버지 중매로 부모님 결혼까지”
 
  ― 이시영 초대 부통령의 중매로 부모님이 만났다고 하던데요.
 
  “네, 맞습니다. 어머니와 이시영 할아버지는 종로 같은 동네에서 사셨다고 했습니다. 이시영 할아버지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의 중매를 섰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최용학 이사장은 이시영 초대 부통령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 혹시 어떻게 중매를 하게 됐는지 들은 바 있나요.
 
  “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고, 아버지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인연으로 두 분의 만남을 주선했다고 하더라고요.”
 
  ― 혹시 이시영 부통령을 만나보셨나요.
 
  “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서울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를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당시 부통령이었고, 관저에서 한 번 만났습니다.”
 
  ― 뭐라고 하던가요.
 
  “나를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너의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했겠느냐.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다. 그걸 꼭 명심해야 한다’고 한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 그런데 부통령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나요.
 
  “제 부모님의 중매도 서주시고, 나중에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수양딸로 삼으셨어요. 그러니 저에겐 외할아버지가 되는 거죠.”
 
  ― 아버님도 이시영 부통령과 함께 일했으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닌가요.
 
  “그러니까요. 여러 가지 정황 증거는 있지만 그런 것들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니 국가에선 인정하지 않는 거죠.”
 
  ― 그럼 아버님은 어떻게 하다 중국으로 가게 된 겁니까.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에서 학위를 받은 하란사 할머니와 함께 파리로 가다 중국 베이징에서 하란사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그곳에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 독립운동가 하란사 선생이 할머니 되나요.
 
  “네, 제 아버지의 숙모가 됩니다.”
 
  하란사 선생은 일찍이 여성의 몸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자비로 유학했다. 하란사 선생은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웨슬리안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유학 이후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하란사 선생은 유관순 열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하란사 선생은 고종의 통역을 맡아 했으며, 의친왕과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終戰)과 함께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로 계획한 하란사는 고종과 상의해 파리 강화회의에 의친왕을 파견하려 했지만 갑작스러운 고종의 승하로 수포가 됐다.
 
  직접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할 방안을 세운 그는 의친왕의 밀칙을 받아 베이징으로 떠났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교포들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했다가 병을 얻은 그는 1919년 4월 10일 베이징 협화의원 병실에서 45세로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베커 선교사는 그의 시체가 검게 변해 있었다고 증언했다.
 
 
  패망한 조선인의 설움 그리고 해방
 
2011년 5월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아파트에서 최용학 한민회 이사장이 중국 인성학교 다니던 시절 은사인 구익균 옹(104세)을 66년 만에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DB
  최용학 이사장은 어린 시절 중국 상하이에서 제6국민학교에 다녔다. 학생들은 대부분 일본인과 중국인이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어려서부터 겪어야 했다.
 
  ― 어쩌다 일본인 학교에 가게 됐나요.
 
  “당시에는 대부분이 일본인 학교였어요. 상하이 제6국민학교가 그중에서도 일본인 학생들이 적은 편이어서 그곳에 가게 됐습니다.”
 
  ― 제일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일본인과 중국인 학생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것이 가장 힘든 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패망한 조선인’이라고 놀리며 때리기까지 했어요. 나는 분하고 서러웠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학교에 조선인 학생은 없었나요.
 
  “있었죠. 그런데 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선생들부터 조선인 학생들을 차별하니까 아이들도 우리를 조선인이라고 놀리고 시비 걸고, 그땐 정말 힘들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다 해방이 되면서 일제가 패망하고 학교가 문을 닫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1학년 중퇴자가 된 거죠.”
 
  ― 이후엔 학교를 안 다녔나요.
 
  “다녔습니다. 해방 이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상하이 인성학교에 입학했죠. 그곳에서는 당연히 차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학교 다닐 맛이 나더군요. 안창호 교장선생님은 ‘지덕체(智德體)’가 아니라 ‘덕지체’를 강조했습니다. 학생은 공부도 잘해야 하지만 먼저 덕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 66년 만에 인성학교 당시 선생님을 만났다고 하던데요.
 
  “네, 지인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외교부에 있는 지인이었는데 식사를 하다 내가 인성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하니 그곳에서 교사로 일하던 분이 있다고 얘기해주더라고요. 그래서 찾아뵙게 됐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선생님과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 기억하던가요.
 
  “그때 선생님이 연세가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은 기억 못 하시는데 제 아버지 이름을 대니 금방 알더군요. 거기서 선생님하고 애국가와 인성학교 교가를 부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106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최용학 이사장이 66년 만에 만난 인성학교 은사(恩師)는 독립운동가 구익균 선생이다. 구익균 선생은 1929년 3월 신의주 학생 의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다. 이후 도산 안창호 선생의 비서실장을 역임하면서 인성학교에서 교사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동포들이여!!! 김구 선생님이 오십니다. 홍커우공원으로 갑시다”
 
  ― 해방되던 날을 기억하나요.
 
  “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정말 많은 조선인이 밖으로 뛰어나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으니까요.”
 
  ― 그때 뭐 하고 있었나요.
 
  “저는 홍커우공원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조선 독립 만세’ 하면서 막 공원으로 모여들더라고요. 저는 처음에 어안이 벙벙했어요.”
 
  ― 그때 몇 살이었나요.
 
  “8세였어요. 그런데 그 어린 마음에도 독립됐으니, 이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그동안 일본놈들과 중국놈들에게 받은 수모를 다시는 겪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나도 눈물이 났어요.”
 

  ― 상하이에서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인데 그런 느낌이 들던가요.
 
  “가보지는 못했지만 어린 시절 어머니와 외할머니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가보지 않아도 다 아는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거기에 일본놈들의 패악이 싫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 그날 상하이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뭐 말해서 뭐 합니까. 잔칫날이었죠. 조선인 어른이라면 누구나 싱글벙글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밤새 잠을 자지 않고 술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어머님과 할머님은 너무 기쁜 나머지 펑펑 우셨어요. 이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서요.”
 
  ― 해방 이후 김구 선생을 뵌 적도 있다면서요.
 
  “네, 아마 그때가 1945년 가을이었을 겁니다. 해방이 되고, 어느 날 누군가 ‘조선 교포들이여!!! 김구 선생님이 오십니다. 홍커우공원으로 갑시다’ 하고 소리치더군요. 저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공원으로 달려갔죠. 벌써 많은 사람이 몰려 있더군요.”
 
  ― 김구 선생은 어떤 연설을 하던가요.
 
  “어렸을 때라 연설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조국 사랑에 관한 거였던 것 같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김구 선생님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모인 조선인들이 다 같이 합창을 했어요. 그런데 조금 지나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울고 있더라고요. 김구 선생님도 울면서 노래를 하고 있었어요. 어른들이 울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그날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 그 이후에 김구 선생을 뵌 적이 있나요.
 
  “이후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 뵌 선생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어린 나에게도 그게 전해지더라고요.”
 
 
  해방된 조국에서의 삶은 고난의 시작
 
  ― 해방되고 나서 언제 귀국했나요.
 
  “우리 가족은 해방 후 1년 뒤인 1946년에 화물선을 타고 귀국했습니다. 상하이에서 부산까지 3개월이나 걸렸습니다.”
 
  ― 당시 기분이 어떠했나요.
 
  “화물선이다 보니 힘든 점이 많았지만 저는 대단히 신이 났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국에 간다는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일이지 모를 겁니다.”
 
  ― 부산에 내려서 어디로 갔나요.
 
  “부산에서 며칠 머물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죠. 국가에서 적산가옥을 한 채 내주면서 그곳에서 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서 얼마간 살았죠. 그러다 다시 나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쫓겨났어요. 다행히 서울에 사촌 형이 살고 있었어요. 사촌 형의 도움으로 공덕동에 자그마한 셋방 집을 하나 구했죠.”
 
  ― 그럼 공덕동에서 정착해 사신 건가요.
 
  “아니요. 그곳에서도 얼마 살지 못하고 쫓겨났어요.”
 
  ― 왜 쫓겨난 거죠.
 
  “당시 우리 가족은 몸이 불편한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 2명에 저까지 5명이었어요. 주인은 우리 식구가 많다고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곳에 집을 잡고 살았죠.”
 
  ― 당시 생활 형편은요.
 
  “어려웠죠. 거기에 어머니까지 병으로 몸져눕다 보니 누나들이 공장에 나가 일해서 겨우 먹고사는 수준이었어요.”
 
  ― 어머니가 이시영 부통령의 수양딸이라고 하셨는데 부통령께 도움을 받지 않으셨나요.
 
  “어머니 성품이 하도 바르고 고지식하셔서 다른 사람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죠. 누나들이 벌어 하루하루 살아갔죠. 그러던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 어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신 건가요.
 
  “뭐 병환이 깊어진데다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하다 보니 끝내 숨을 거두신 거죠.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 어떤 기억인가요.
 
  “누나들은 일하러 가고 나와 어머니가 집에 있었어요. 어머니는 항상 누워계셨어요. 그런데 그날따라 어머니의 신음이 안 들리고 조용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어머니를 깨웠더니 이미 세상을 떠나신 뒤였어요. 어린 마음에 슬프기보다 무서웠어요. 사촌 형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렀어요.”
 
  ― 그 이후엔 어떻게 됐나요.
 
  “그러던 중에 전쟁이 터졌죠. 폭격으로 집까지 불타고 한순간에 밖에 나앉게 됐어요. 그때 사촌 형수가 누나들에게 동생을 살리기 위해선 시집을 가라고 하셨는데 그때 누나들 나이가 10대 중반이었어요.”
 
  ― 시집을 갔나요.
 
  “뭐 어쩔 수 없이 거의 강제 결혼을 한 거죠. 저는 큰누나가 보살피기로 했고요.”
 
 
  6·25전쟁 그리고 누나와 생이별
 
  ― 그때부터 큰누님 집에서 살았나요
 
  “그곳에서도 얼마 살지 못했어요. 저 때문에 강제로 한 결혼이라 누나도 힘들었나 봐요. 하루는 누나가 사돈 어르신에게 몸이 좋지 않아 서울에 가서 침을 맞고 오겠다고 하고 저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어요. 당시 누나의 시댁은 경기도 양주였어요.”
 
  ― 누나와 서울에 올라와서 어디로 갔나요.
 
  “지금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 자리에서 헤어졌어요. 누나는 친구 집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저더러 하란사 할머니 집으로 가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싫다고 했는데 나중엔 그러겠다고 했죠. 헤어지면서 다음 날 아침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어요.”
 
  ― 다음 날 누나를 만났나요.
 
  “아니요. 그날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지금까지 누나를 만나지 못했어요. 당시 누나 친구 집이 서대문 근처였는데, 그날 저녁 서대문 일대가 폭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아마 누나도 그때 잘못되지 않았나 싶어요.”
 
  ― 누나를 만나지 못했으니 다시 양주로 갈 수도 없었겠네요.
 
  “혼자 다시 양주로 갔죠. 그런데 누나 없이 돌아온 저를 사돈 댁에선 반겨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둘째 누나 집으로 갔죠.”
 
  ― 뭐라고 하던가요.
 
  “그동안의 얘기를 했죠. 그곳에서 누나가 해준 밥을 먹고 얼마 동안 있었어요. 그런데 눈치도 보이고 누나네도 형편이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몰래 나왔죠.”
 
  ― 나와서는요.
 
  “위로 가면 북한군이 있고, 밑으로 내려가면 유엔군과 미군이 있는 것을 알고 무작정 밑으로 내려갔죠. 그러다 미군 부대를 만났어요. 그곳에 한국인 군인 아저씨의 도움으로 저는 그곳에서 미군 하우스 보이로 일하면서 생활했죠.”
 
  ―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도 나오게 됐다면서요.
 
  “네, 한 6개월 정도 미군부대에서 생활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15세 미만 하우스 보이들을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그래서 나도 고아원으로 가게 됐죠.”
 
  ― 어느 고아원으로 갔나요.
 
  “그때 고아원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가는 길에 도망을 쳤어요. 고아원에 가면 힘들게 생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차에서 몰래 뛰어내렸어요. 그래서 그 길로 한강을 건너 다시 내가 있던 미군부대를 찾아서 갔죠. 정말 전쟁 통에 쉽지 않았어요. 주변 도움을 받아 내가 있던 부대로 다시 찾아가니 나를 아껴주었던 한국인 아저씨들과 미군들도 모두 반가워하더라고요.”
 
  ― 그곳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겨울이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려면 모닥불을 피워야 돼요. 그런데 나무가 다 젖어 불이 잘 붙지를 않았어요. 그때 누군가 휘발유를 부었는데 갑자기 불길이 거세지면서 제 다리로 옮아붙은 거죠. 그때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어요.”
 
  최용학 이사장은 전쟁 당시 입은 화상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최 이사장은 이를 훈장처럼 말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끝낸 최 이사장은 그곳의 도움을 받아 고아원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 고아원에서 왜 금방 나온 거예요.
 
  “내가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고아원 창고가 털렸어요. 나는 누구의 소행인지 알고 있었죠. 원장이 나보고 범인을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도둑으로 몰리면서 쫓겨난 거죠.”
 
  최용학 이사장은 나중에 도둑에 대한 오해는 풀렸다고 했다. 당시 해당 고아원 원장은 벨기에 사람이었다. 최 이사장은 후에 고아원 원장을 대부로 모셨다고 했다. 최 이사장은 고아원에서 쫓겨나 전라남도 목포에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는 고모에게로 갔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고모는 최 이사장을 머슴 대하듯 일을 시켰다고 했다.
 
  “조카라 해도 원생으로 대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고모는 그러지 않았어요. 온갖 잡일은 내가 다 해야 했고, 정말 힘들게 생활했어요. 머슴 같았어요.”
 
  최 이사장의 말이다.
 
  이후 최 이사장은 그곳을 나와 막내 삼촌의 집으로 들어갔다. 최 이사장은 그곳에 정착해 고등학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석사를 거쳐 필리핀 마닐라 데라살 아레네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 이사장은 평택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다 정년퇴임했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독립유공자들을 위해 현재도 일하고 있다.
 
 
  “‘한민회’를 통해 독립유공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낼 것”
 
한민회 최용학 이사장(오른쪽)과 이선우 이사의 모습이다.
  ― ‘한민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한민회는 국내외 독립운동 가족을 중심으로 애국선열의 유지를 계승하고 한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긍심을 갖도록 함과 더불어 조국의 발전과 민족정기 선양을 위한 뿌리 의식을 함양하여 민족문화 계승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단체입니다.”
 
  ― 한민회는 언제 만들어졌나요.
 
  “한민회는 2000년 3월에 처음 만들어졌어요. 그 전에 한민회라는 이름의 조직이 있었지만 그 단체와는 다릅니다. 물론 독립운동과 관련 있는 것은 맞지만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 한민회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한민회 주요 활동은 독립유공자들을 찾아 그에 대한 보상을 하는 일도 하지만, 《한민》이라는 잡지를 통해 국민에게 항일투쟁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한민》이라는 잡지는 과거 백범 김구 선생이 결성한 한국국민당의 기관지로 알고 있는데요.
 
  “네, 그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관련한 내용을 잡지로 발행하고 있습니다.”
 
  ― 한민회에서 여러 활동을 한다면서요.
 
  “현재는 코로나19 때문에 활동이 중단됐습니다. 그 이전엔 중국에 항일 유적지들과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알리고 그에 대한 보존 사업을 해왔습니다.”
 
  ― 상하이 홍커우공원도 방문했다면서요.
 
  “네, 홍커우공원에 있는 윤봉길 박물관에서 토론회도 했습니다.”
 
  ― 나중에 홍커우공원을 갔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제가 처음 갔을 때는 한민회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였어요. 근데 몇십 년 만에 방문한 건데 생생하더라고요. 어린 시절 뛰어놀던 그 모습이랑 새로 생긴 윤봉길 의사의 역사 유적과 박물관을 보면서 신기했어요.”
 
  ― 한민회의 향후 활동 계획은요.
 
  “지금과 비슷한 활동을 계속해서 해나갈 계획입니다. 정말 독립유공자들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내 그에 맞는 보상을 받게 하는 것이 제가 해야 될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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