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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노충량(盧忠良) 코오롱인더스트리 디렉터

“패션은 역사와 환경의 총합”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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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共 실세, ‘노량진 시장의 지분 49%를 넘기고, 육사 17기를 대표로 앉혀라’ 제안
⊙ “노태우 찾아가 ‘강탈 막아달라’ 부탁했지만 역부족”… 1988년, 노량진시장 강탈 폭로했지만
⊙ 장기적인 지원으로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 만들어낸 일본, 해외에 의류 브랜드 제대로 진출못한 한국
⊙ “서민이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한 이미지 볼 수 있어야 패션의 기초 체력 올라가”

盧忠良
1960년생. 니혼(日本)대 상학부 상학과 졸업. 서울수산청과시장㈜(現 노량진수산물청과물도매시장) 부사장, 신화월드엔터프라이즈㈜ 대표 역임 / 제일모직 세나토레, 갤럭시, 랑방, 로가디스 모델(1986), 쥬리아화장품 타겟로얄 모델, 논노 마르시아노 전속모델(1987) / 대한민국 최우수 모델상 수상(1988·1989) / 現 코오롱인더스트리 FnC 부문 디렉터
사진=조준우
  타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지하철 열차 안에 앉아 있을 때다. 지난 9월 29일,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탔다. 맞은편에 앉은 이들의 얼굴에서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어떤 표정들이 보였다. 긴 연휴를 앞둔 설렘, 방역의 시대 탓에 반쪽짜리 휴가를 맞는 시무룩함 같은 것. 이런 순간을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이렇게 표현했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 저마다 저만 안 죽는다는/ 얼굴들이네.’
 
  어쩌면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그런 얼굴을 하고 이리저리 열심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을지 모르겠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목적지 강남역에 닿았다. 강남역 부근의 캠브리지빌딩으로 향했다. 노충량씨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는 코오롱인더스트리에서 디렉터를 맡고 있다.
 
 
  정권에 강탈당한 노량진수산시장
 
노량진 수산시장(구시장)에서 경매가 진행되던 모습. 2007년 사진이다.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논노 마르시아노’ ‘장프랑코 페레’ ‘카페 앙주’, 그리고 ‘노량진수산시장’. 그의 과거를 설명하는 키워드 몇 가지다.
 
  원래는 주로 패션과 도시에 관한 그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자란 후, 서울에서 청년 시절을 보내고 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서 15년 넘게 머문 그였다. 5년 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도시의 본질은 이방인의 눈에 더 잘 보이기도 한다. 슈트를 멋지게 빼입은 그는 마주 앉자마자 말했다.
 
  “노량진수산시장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그걸 지나치면 그가 살아온 삶이 잘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22세에 노량진수산시장의 실질적인 사장이 됐고, 24세에 그 시장을 전두환(全斗煥) 정권에 빼앗겼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야기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본 악센트가 남아 있는 유창한 한국어였다.
 
  “제 할아버지가 1960년대에 수산시장을 인수했습니다. 윤치영(尹致暎) 서울시장 시절이었어요. 그때는 수산시장이 중구 의주로에 있었어요. 그러다 1971년에 노량진으로 옮겨왔어요.”
 

  그의 조부 노영한씨는 재일교포 기업가였다. 일본에서는 밀가루 회사를 경영했다고 한다. 재일거류민단에선 부단장으로 활동했다. 그의 설명이다.
 
  “상당히 활동적인 분이었어요. 당시 재일교포 중 4명이 일본 대장성(재무성)에서 일종의 사업 특혜를 받았습니다. 할아버지의 밀가루 회사, 신격호(辛格浩) 롯데 회장의 과자 회사, 오사카에 있는 방직 회사 2곳이었어요.”
 
  노량진수산시장을 인수했다고 하지만 정확히는 운영권을 인수한 셈이었다. 당시 노량진수산시장은 서울에서 단 하나뿐인 도매시장이었다. 전국에서 수산물이 올라와 경매를 거쳐 팔려나갔다. 영등포나 남대문은 경매를 하지 않고 판매만 하는 유사시장이었다. 노량진수산시장은 나라 땅에서 운영하는 대신 매출의 1.5%를 한국냉장에 임대료 격으로 냈다.
 
 
  전두환 정권의 제안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했다. 같은 해 조부 노영한씨가 별세했다. 부친 노상필씨가 대를 이어 노량진수산시장(서울수산청과도매시장 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년 뒤인 1981년 노상필씨도 세상을 떠났다. 폐암이었다. 1년 사이에 조부와 부친이 모두 돌아가셨다.
 
  대학 3학년생이었던 노씨는 혼자 서울로 왔다. 일본인인 어머니와 여동생은 일본에 남았다. 그리고 노량진수산시장 부사장에 취임한다. 사장 자리는 재일거류민단 단장이었던 박병헌씨에게 맡겼다. 노씨가 실질적인 사장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문제가 터진다. 시장 영업권 갱신(更新) 시점이 돌아왔다. 그는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1979년도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서거하고 정권이 바뀌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 같은 집안엔 문제가 생깁니다. 새로운 정권 부근에 있는 분들이 각종 이권(利權)을 갖고 가는 거지요. 우리도 영업권 갱신을 못 하고 쫓겨났습니다. ‘3대째 물려받게 할 수 없다’ 이게 이유였어요.”
 
  ― 새 정권과 중재해줄 만한 인사가 주변에 없었나요.
 
  “회사에 임원이 서른 분 정도 계셨는데 전부 자유당·공화당 때 분들이었어요. 마지막에 사장 자리를 부탁드려 맡았던 분은 노명우 전 충남도지사였어요. 그분도 공화당 시절 지사를 하신 분이었어요.”
 
  ― 공화당 때 인사들로는 역부족이었던 거군요.
 
  “청와대와 파이프라인 역할을 하던 분은 몇 분 계셨어요. 박병헌 재일거류민단 단장 같은 분들이 해주셨어요. 박 단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노량진시장 사장을 부탁드린 분이었어요. 청와대와 접촉할 수 있는 정치력을 갖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을 통해 청와대에 있던 실세(實勢) 쪽에서 제안이 들어왔어요.”
 
 
  ‘자칫하면 서빙고 간다’
 
  ― 어떤 제안이었나요.
 
  “두 가지였어요.
 
  첫째, 회사 주식을 내놓아라. 우리가 51%, 저쪽이 49%를 갖겠다는 겁니다. 권력자의 49%는 100%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냥 내놓으라는 얘기였지요.
 
  둘째, 육사 17기 출신 모(某)씨를 두 달 뒤에 회사 대표이사에 취임시켜라. 너는 회장이든 부사장이든 계속해라.”
 
  ― 거절하신 건가요.
 
  “처음엔 수락했어요. 그랬더니 집안 친척들이 난리가 났어요. ‘허수아비 되고 싶냐? 거절하라’고. 결국 수락하고 두 달 만에 번복했어요. 청와대에선 화가 머리끝까지 난 거예요. 세무조사가 들어오고, 운영권 포기각서에 도장 찍으라고 압박이 들어왔어요.”
 
  ― 더 이상 협상이 불가능했나 보군요.
 
  “자문 역할을 해주시는 분들이 주변에 몇 분 계시긴 했습니다. 육사 11기나 민정당 주변의 인사들이었어요. 노태우(盧泰愚) 장군, 권익현(權翊鉉) 의원한텐 직접 부탁을 하러 찾아갔어요. 아는 분들이었으니까요.”
 
  ― 그분들도 안 도와줬나요.
 
  “‘충량아, 도저히 안 되겠다. 시기를 좀 기다리자’ 이런 반응이었어요. 전두환 대통령과 같은 육사 11기라도 어떻게 막아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전기환(全基煥)씨가 배후였는지 몰랐어요. 이규승(李圭承)씨가 벌이는 일인 줄 알았어요.”
 

  전기환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형이다. 이규승씨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순자(李順子)씨의 작은아버지다.
 
  ― 결국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으셨나요.
 
  “처음엔 버텼어요. 무서운 걸 몰랐으니까요. 다른 임원들은 두려워하더라고요. ‘자칫하면 서빙고 간다’면서 바로 찍더군요. 마지막에 할 수 없이 도장을 찍었어요.”
 
  ‘서빙고’는 전두환 정권 시절 악명 높았던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 서빙고 수사분실’을 뜻한다.
 
  ― 37년 전 일인데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시나 봐요.
 
  “마지막 순간엔 매일 뭔가 제가 결정해야 했어요.
 
  ‘허○○한테 이런 안이 왔는데 어떻게 할래’ ‘이○○한테 이런 제안이 왔는데 어떻게 할까’.
 
  제가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겠습니까.”
 
 
  ‘다시 돌아오겠다’
 
노량진수산시장 운영권 강제양도 사건으로 구속기소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형 전기환 피고인이 1989년 징역4년을 선고받고 법정을 나서고 있다.
  ― 청와대 제안을 거절한 걸 후회하지 않았나요.
 
  “많이 후회했지요. 그런데 사실 그때는 빨리 그만두고 싶었어요. 할아버지, 아버지한텐 죄송하지만 저는 의류 사업 같은 저에게 맞는 사업을 하고 싶었어요. 아버지도 항상 말씀하셨어요.
 
  ‘할아버지는 하셨지만 우린 못 한다. 나도 못 하고 너도 못 할 거다. 언제까지 청와대 눈치 보면서 살까. 그냥 일반 기업을 하자.’”
 
  ― 부친께서 군사정권을 버거워하셨나 봅니다.
 
  “할아버지는 정치 쪽에 계셨던 분이라 정권을 상대하는 걸 잘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아니었어요. 저도 벗어나고 싶었어요. 생각해보세요 스물두 살짜리가 매일 새벽 2시에 출근해 할아버지 뻘 되는 임원들과 회의했어요. 게다가 언어도 안 통했어요. 회사 회의는 일본어로 했어요. 임원분들이 다 일제(日帝)시대를 살았던 분들이니 일본어에 능했으니까요.”
 
  ― 스물두 살에겐 힘든 노릇이었겠네요.
 
  “너무 싫었어요. 날씨는 춥고, 음식은 맵고, 친구는 없고. 1983년 5월 30일에 회사 직원 200명, 상인 1600명 앞에서 마지막 조회를 했어요. 이렇게 말했어요.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지키고 계셔주십시오.’
 
  속으로는 ‘아이고, 이제 끝났다’ 이게 솔직한 마음이었어요.”
 
  ― 할아버지,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수산시장까지 빼앗겼는데 왜 일본으로 돌아가시지 않았나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잖아요. 아버지의 유업이라고 할까, 아버지의 흔적이 세상에 너무 없었어요. 심지어 사람들이 제가 할아버지의 아들인 줄 알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할아버지의 ‘숨겨둔 아들’이라는 기사가 잡지에 실리기도 했어요. 어떻게든 아버지의 레거시(legacy)를 한국에 만들어드리고 싶었어요. 노량진 청과물시장은 아직 저희 소유이기도 했고요.”
 
  얼마쯤은 진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 자리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노량진시장 직원들에게 했던 인사말 말이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88년까지 기다린 겁니다. 언론에 폭로를 했어요. ‘사실은 노량진시장을 뺏긴 겁니다!’ 난리가 났어요. 남부지청 특수부에 부임한 지 4개월 된 홍준표(洪準杓) 검사가 전기환씨 등 관련 인사들을 줄줄이 잡아들였어요.”
 
  ― 속이 시원했겠어요.
 
  “그땐 몰랐던 거예요. 노태우 정권이 전두환 정권의 연장이라는 걸요. 노태우 대통령은 힘이 없었어요. 전 대통령의 형을 잡아들였잖아요. 보복이 들어왔어요.”
 
 
  88년에 폭로 기자회견
 
남성복 논노 마르시아노 전속 모델 시절의 노충량씨.
  전기환씨가 2년 형을 선고받은 이듬해 그도 구속이 된다. 마약 복용 혐의였다.
 
  “차도 한잔 함께 마신 적 없는 여성이 저를 지목하며 마약을 함께 복용했다고 진술하더군요. 세무조사도 받아서 회사도 힘들었어요.”
 
  이후 그는 노량진수산시장 부당탈취를 두고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부당행위가 일어나고 한참 뒤에 소를 제기해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다. 재심 청구를 할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홍준표 당시 검사는 전기환을 구속하며 ‘5공 비리를 수사한 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모래시계 검사’의 탄생이었다.
 
 
  당시 그는 여러 활동을 하고 있었다. 패션 모델로 일하며 카페와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논노 마르시아노, 갤럭시 등의 모델로 활동하며 2년 연속 최우수 모델상을 받았다. 일본식 카페 레스토랑 ‘앙주’를 차려 서울에만 15개 지점을 냈다. 해외 의류 브랜드 수입도 시작한 참이었다.
 
 
  駐韓 대사 대동해 계약 따내
 
  ― 외국 의류 브랜드도 들여왔지요.
 
  “‘지안 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e)’라는 브랜드를 88년에 들여왔어요. 이탈리아 명품(名品) 브랜드였어요. 당시 이 브랜드를 한국에 들여오고 싶어하는 기업이 많았어요. 롯데나 해태도 이탈리아 본사(本社)와 접촉하고 있었어요. 결승전에 5개 기업이 남더군요.”
 
  ― 어떻게 낙점(落點)을 받았나요.
 
  “이탈리아에서 본사와 미팅을 하는데 주한(駐韓) 이탈리아 대사를 모시고 갔어요. 그러니 당연히 우리 회사가 딴 거죠. 무슨 드라마 얘기 같지요?”
 
  ― 어떻게 주한 이탈리아 대사를 대동하고 가셨어요.
 
  “카페에 매일 젊은 이탈리아 청년이 오는 거예요. 얘기를 해보니 서울대에 국비(國費) 유학 온 학생이에요. 친구하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주한 이탈리아 대사와 친하다고 집에 놀러 가자는 겁니다. ‘이 친구 사기꾼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진짜 대사관저에 데려가는 거예요. 그렇게 교류가 시작돼 대사와 가까워졌어요.”
 
  ― 1990년대에 명품 옷이 잘 팔렸나요.
 
  “그땐 대한민국에 ‘명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판매원 교육부터 해야 했어요. 명품이 뭔지, 손님 응대는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줘야 했어요. 그때까지 한국에는 의류 매장에서 손님에게 커피나 차를 대접하는 문화가 없었어요. 88올림픽 전까진 한국엔 친절 응대랄까,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엉망이었어요. 올림픽 이후부터 많이 나아졌어요.”
 
  ― 왜 의류사업을 접었나요.
 
  “IMF 구제금융 시기를 맞았잖아요. 100원에 수입해서 350원, 380원에 판매했는데, 갑자기 수입원가가 300원, 350원이 된 거예요. 수입업체는 두 손 두 발 다 드는 거죠. 게다가 은행들이 쓰러졌잖아요. 수입한 상품이 세관에 들어왔는데 통과가 안 되는 거예요. 신용장을 내준 은행이 연락이 안 되니까요.”
 
  ― 수입업체들이 망하지 않으면 용한 상황이었네요.
 
  “살아남은 은행들도 대출금 10억원을 갚아라, 20억원을 갚아라 계속 독촉을 하지요. 큰 기업들도 이때 힘들었어요.”
 
  이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카페와 레스토랑을 여러 개 경영했다. 현지인들이 줄서서 들어가는 맛집으로 꽤 유명해지기도 했다.
 
  2015년 그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지금은 코오롱에서 패션 부문 디렉터를 맡고 있다. 일종의 자문역이다.
 
 
  옷 잘 입는 한국 여성들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 1세대인 진태옥 디자이너. 사진=조선DB
  ― 한국의 패션 수준은 어떤가요.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다릅니다. 거리에 옷 잘 입는 분들 많아요. 특히 여성들 경우엔, 어떤 면에선 일본 여성들보다 옷을 잘 입는다고 생각해요. 일본 여성들은 옷을 잘 입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형편없이 못 입는 사람도많아요. 한국은 중간층이 두꺼워요. 많은 여성이 옷을 평균 이상으로 잘 입는단 뜻이에요.”
 
  ― 남성들은 어떤가요.
 
  “예전보다는 좋아지긴 했어요. 30배쯤. 전엔 한국 남성의 0.0001%가 패션에 신경 썼다면 지금은 0.003%가 신경쓰는 정도라고 할까요. 단순히 넥타이를 안 매거나, 재킷을 갖춰 입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본인에게 어떤 스타일이 어울리고 어떻게 하면 핏을 살려서 입을 수 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얘기예요.”
 
  ― 다른 관점에서 보는 패션 수준은 뭔가요.
 
  “결국 세계시장에서 패션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일본이에요.”
 
  ― 일본이 거기에 끼나요.
 
  “낍니다. 일본에서 탄생한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들이 있잖아요.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 ‘꼼데가르송(Comme des Garcons)’. 섬유 수준으로 봐도 세계 정상급입니다. 결국 패션은 원단 싸움이거든요.”
 
  ― 그러고 보니 해외에서 한국 디자이너의 의류 매장을 본 적이 없어요. 일본 브랜드는 있지만요. 전자제품이나 자동차로는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섰는데 유독 패션 부문이 지체되어 있는 것 같네요. 이유가 뭘까요.
 
  “섬유회사나 종합상사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뒷받침을 해줘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어요. 디자이너 개인의 힘으로는 해외 진출이 거의 불가능해요.”
 
  ― 일본도 그런 식으로 국제적인 패션 브랜드를 만든 건가요.
 
  “섬유회사와 종합상사가 역할을 했어요. 돈과 원단(原緞)을 디자이너한테 지원했어요. 옷이 팔리면 원단도 팔리니까요. 상사도 매출을 올릴 수 있고요.”
 
  ― 가끔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디자이너들이 파리 컬렉션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요.
 
  “한번 쇼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바이어한테 주문받고 옷을 팔아야지요. 현지에 매장을 내고 유지할 수 있어야지요. 한마디로 장사가 되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성공한 거죠. 여러 디자이너가 시도했는데 대부분 실패했어요.”
 
  ― 진태옥 디자이너는 파리에서 꽤 주목을 받지 않았나요.
 
  “일본 정도의 뒷받침이 있었으면 충분히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던 분이에요. 파리에 사무실도 한때 내셨지요. 연세가 많으시지만 여전히 좋은 원단을 쓰세요. 제가 감히 얘기하자면 정말 아까운 분이에요. 나라가 반성해야 합니다. 좀 더 아랫세대 디자이너 중엔 박윤수 선생님을 꼽을 수 있어요. 충분히 해외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예요.”
 
 
  12色 크레파스와 100色 크레파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좀 다른 얘기를 꺼냈다.
 
  “결국 패션도 역사의 산물이에요. 우리가 한국의 패션 1세대라면, 일본은 3세대, 4세대가 활동 중이에요. 거기는 할아버지 때부터 옷을 잘 입은 집안들이 있는 겁니다. 한국은 6·25전쟁을 겪었잖아요. 전후(戰後)엔 경제적으로 바닥에서부터 올라가야 했고요. 그런 환경에서 할아버지 세대 분들이 어떻게 옷을 골라 입겠어요?”
 
  그의 말이 이어졌다.
 
  “2세대인 부모님들도 역시 모든 부가적인 걸 자식 세대에게 미뤄주셨어요. ‘우리는 이렇게 살지만 내 자식들은 부자가 돼서 잘살아주겠지.’ 패션은 결국 역사와 환경의 총합이거든요. 어떤 환경에서 뭘 보고 사는지가 패션에 영향을 미칩니다.”
 
  ― 환경이요?
 
  “1987년에 이탈리아 밀라노에 갔는데 거리가 정말 예쁜 거예요. 길바닥의 타일도 예뻐요. 우리나라는 꽃시장에 가도 꽃 종류가 많지 않아요. 외국은 꽃이 많아요. 자연에서 보이는 게 다르니까 색채 감각도 다른 거예요. 정서가 다른 거죠. 어릴 때 몇 색깔 크레파스를 쓰셨어요? 저는 12색이었어요. 금색과 은색 크레파스는 부잣집 아이들만 갖고 있을 정도였어요. 유럽이나 미국에선 1달러 가게에 가도 100색 크레파스를 살 수 있어요.”
 
  ―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외국의 싸구려 잡화점에서 100가지, 200가지 색상 물감이 든 미술 도구를 보고 놀란 적이 있어요.
 
  “서민들이 저렴한 비용으로도 많은 색상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그게 그 나라 패션의 기본 체력이 되는 겁니다. 그런 환경이 쌓여서 16세가 되면 차이가 드러나는 거예요. 패션을 전공해볼까, 하는데 이미 그 나라 아이의 머릿속엔 많은 데이터가 쌓여 있잖아요.”
 
 
  朴正熙 대통령과 앙드레 김
 
한국 패션디자인의 거장 앙드레 김의 패션쇼가 제주에서 열렸다. 2008년 10월 19일 오후 제주시 애월읍 새별오름 일대에서 벌어진 억새꽃축제 행사장에서 우천 중임에도 불구, 패션쇼가 진행됐다. 쇼가 끝이 난 뒤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패션의 ‘꿈과 환상’을 강조했던 그는 여성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독창적인 패션 세계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사진은 2008년 제주도에서 패션쇼를 마친 앙드레 김이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이다. 사진=조선DB
  ― 기초 체력이 부족한 상태에선 아무래도 기업이나 나라가 뒤에서 지원을 해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드는 수밖에 없겠네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그런 면에선 잘 하셨어요. 앙드레 김이라는 디자이너를 탄생시켰잖아요.”
 
  ― 앙드레 김이 박 대통령 덕을 봤나요.
 
  “럼요. 한국 안에서 주한 외국 대사들을 만났잖아요. 이분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에 계속 앙드레 김을 초대한 거예요. ‘패션 대사’ 역할을 하게 한 거죠. 그래서 대사 부인들, 딸들이 앙드레 김의 고객이 됐어요. 청와대에서 밀어줘서 할 수 있었어요. 지금도 그런 정도의 뒷받침이 아니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긴 힘든 거 같아요. 결국 스타 디자이너를 만들어야 해요.”
 
  ― 그래도 많이 좋아지지 않았나요. 동대문이 패션 메카도 됐고요.
 
  “우리나라는 습득이 빠르잖아요. 몇 년 만에 1.5세대가 여기까지 왔어요. 2세대, 3세대는 더 잘할 거예요. 전 이런 생각도 해요. 사실 우리가 패션에서 유럽을 이기기 힘든 게… 한국인이 몸뻬, 치마저고리, 바지저고리를 벗고 양복을 입은 지 얼마나 됐습니까. 그이들은 700년, 800년 그런 옷을 입어왔어요.”
 
 
  韓服은 역사이자 유산
 
  ―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일본은 기모노를 자주 입어요. 특히 여름에 축제할 때는 젊은 사람들도 유카타를 입어요. 저렴하게 사입을 수 있어요. 유니클로에서도 유카타를 팔거든요. 왜 우리는 한복을 안 입어요? 평소에 많이 입어야 해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건 어쩌면 따로 있을지 몰라요. 유니클로는 유카타를 파는데, 에잇세컨즈는 왜 생활한복을 안 파나요? 대중과 가까이 있어야 해요. 은색·금색 크레파스도, 한복도요.”
 
  유카타(浴衣)는 기모노(着物)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전통 의상이다. ‘목욕 가운’이란 뜻에서 알 수 있듯 대중 목욕탕에 가는 길에 입는 용도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의상이다. 실크 같은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만드는 기모노와 달리 면이나 폴리에스터로 만든다.
 
 
  ― 궁궐이나 전주 한옥마을에 가면 젊은이들이 한복을 빌려 입잖아요.
 
  “그런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도, 생활 속에서 입으면 좋겠어요. 생일 파티에도 한복을 입고 갈 수 있으면 좋잖아요. 젊은 친구들이 친구 결혼식에 한복 입고 가면 이상하게 보잖아요? 이대로 가면 한복은 평소엔 전혀 안 입는 옷이 돼버려요. 후손들에게 뭘 남겨줄 거예요? 외국에선 민족 의상이라는 걸 사랑해요. 그게 역사고 유산이니까요. 한복을 입는 건 결국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긍정하는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자 귀에 익은 선율이 들려왔다. 스팅(Sting)의 노래 ‘뉴욕의 영국인(Englishman in New York)’. ‘누가 뭐래도 자기 자신이 돼라(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는 후렴구로 유명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라고 했다.
 
  평생 길 위에서 산 마쓰오 바쇼도 이런 글을 남겼다.
 
  ‘자신의 길에서 죽는 것은 사는 것이고, 타인의 길에서 사는 것은 죽는 것이다.’
 
  도쿄에서 노량진, 다시 미국, 길 위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그이기에 진짜 아끼고 사랑해야 할 게 뭔지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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