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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베테랑 조종사 출신 나채성 홍신학원 이사장

‌“큰딸 나경원, 정치인보다 장애인 엄마로 활동해온 것 더 훌륭하게 생각”

글 : 오동룡  조선뉴스프레스 취재기획위원·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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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86 세이버와 F-5 전투기 2900시간 조종한 베테랑 파일럿
⊙ 1973년 김포지구 1만3000평 매입… 공군 동기생들, 학교 항공사진 찍어줘
⊙ 졸업생 6만여 명 각계 진출… 연예계에선 김건모와 자이언티, 박해일 등 활동
⊙ “조종사 디브리핑 방식으로 학생들 맞춤 지도하니 성적 쑥쑥 올랐죠”
사진=조준우
  “하늘을 자유롭게 날던 파일럿이 조종복과 지슈트(G-suit)를 벗고, ‘교육입국’이란 사명감 하나로 수명산 기슭에 홍신학원(弘新學園)을 설립한 지 벌써 반세기(47년)가 흘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겁도 없었던 시절이었죠.”
 
  나채성(羅采成·84) 이사장은 “당시 김포지구(현재 강서구 내발산동)는 황량한 들판이었고, 모두가 달라붙어 손이 부르터가며 삽과 곡괭이로 운동장 터를 닦았다”며 “하기식(下旗式) 때 석양 아래 들판에서 일하던 주민들이 태극기를 바라보며 함께 애국가를 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나 이사장은 1970년대 F-86F 세이버 전투기와 F-5 A/B 프리덤파이터를 2900시간 탄 베테랑 파일럿이다. 그래서인지 온화한 미소를 띤 이 84세 노(老)신사는 목표물을 찾는 조종사의 날카로운 눈매만은 숨길 수 없었다. 이사장실엔 조종사 시절 찍은 그의 사진들이 곳곳에 숨은 그림처럼 박혀 있었다.
 
  — F-5 전투기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영원한 빨간 마후라’인 것 같습니다.
 
  “전투기 조종사로 하늘을 맘껏 날아다녔던 그 시절은 제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시기이면서 가장 그리운 추억이기도 합니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두려움 없이 앞만 보고 달렸으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꿈을 품은 때이기도 하죠.”
 
  나 이사장은 “아내가 소중히 보관해온 조종사 헬멧, 윙마크, 부대마크, 비행정보간행물(FLIP) 같은 것을 홍신학원 박물관 격인 ‘연혁실’에 전시해놓았다”며 “울적할 때 조종 헬멧을 보면 힘이 솟는다”고 했다.
 
 
  “선진국의 강한 국력 밑바탕엔 훌륭한 교육 있어”
 
1973년 9월 16일 김포지구 312구획에 위치한 화곡중학교 신축교사 기공식. 맨 앞이 정희영 이사장, 왼쪽이 나채성 교장, 오른쪽이 정효자 여사. 중앙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소녀가 나경원 전 의원이다.
  — 앞길 창창한 파일럿이 왜 학교 세울 생각을 했나요.
 
  “1968년 광주에서 대위로 근무할 때, 미국 유학 기회를 잡았어요. 노스웨스트를 타고 도쿄~하와이~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미국공군대학에 도착했습니다. 롱레인지 내비게이션으로 고작해야 오키나와 나하 기지까지 간 경험밖에 없었어요. 월(月) 185달러의 퍼디엄(perdiem)을 받는 가난한 나라의 공군 소령은 그곳에서 강한 국력의 밑바탕에 세계를 지향하는 체계적인 교육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8개월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공군대학에서 교관 생활을 하면서 결국 새로운 인생을 개척할 곳은 ‘인재를 키워내는 학교’라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 잘나가는 파일럿이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니 공군 지휘부에서 놀랐겠네요.
 
  “당시 옥만호(玉滿鎬) 공군참모총장에게 보고를 했는데, 당연히 펄쩍 뛰셨죠. 미국공군대학 유학도 다녀오고 기종(機種) 전환 조종사로 선발되는 등 경력을 착착 쌓아가고 있던 차에 그만둔다고 하니 기가 막히겠지. 주영복(周永福) 장군이 제11전투비행단장이었고, 제86비행대대장은 마종인 대령(공사 1기), 제89비행대대장은 박선국 대령이었어요. 처음엔 대한항공 민항기 조종사로 가는 줄 알았다가, 학교를 세운다고 하니 주변에서 이해해주셨어요.”
 
  — 화곡동에 터를 잡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1959년 소위로 임관해 제11전투비행단 111대대(김포비행단)에 근무하면서 보니, 토요일 오후 외출할 때 발산동에서 화곡동으로 이어지는 김포평야가 무척 아름다웠어요. 홍신학원 자리는 당시 행정구역상 영등포구 양천출장소 관할이었어요. 1973년 교사(校舍) 신축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낮은 들판과 구릉지들이 산재(散在)해 있어서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이곳은 공항중학교와 화곡여중밖에 없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영등포로 통학해야 했습니다. 기존 학교를 인수할 수도 있었지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더 값진 것이라 생각해 부지 1만3000평(약 4만3000m2)을 매입했습니다.”
 
  나채성 이사장은 1973년 홍신학원을 설립하고, 1974년 화곡중학교를 세웠다. 4년 후인 1978년 강서고등학교란 이름으로 고등교육기관을 설립, 같은 해에 화곡고등학교로 교명(校名)을 변경했다. 초대(初代) 이사장은 나 이사장의 장인인 정희영(鄭熙榮) 선생이 맡았다. 정희영 선생은 철도청 공무원으로 봉직했고, 이후 사위인 나 이사장을 도와 1973년부터 1984년 별세하기 전까지 홍신학원 이사장직을 맡았다.
 
  — 화곡동 들판을 직접 일구면서 학교 부지를 정비하는 사진들이 매우 인상적입니다만, 초창기라 어려움이 많았겠군요.
 
  “처음엔 학교 설립하는 데 구체적인 준비가 아무것도 없었어요. 학교 초창기의 건물 전경은 공군 동기생들이 항공사진을 찍어주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학교 설립과 관련해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신 주영복 전 국방장관 등 공군 선후배들과 서울시와 교육부 관계자들의 도움은 잊을 수 없습니다.”
 
  나 이사장은 “내가 공군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나는 없을 것”이라며 “공군 덕분에 비행기도 탔고, 미 공군대학도 다녀왔고, 공군대학 교관을 했고, 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라고 했다.
 
 
  화곡高, ‘애국조회’ ‘교련조회’로 유명
 
화곡고등학교 교련조회 모습. 화곡고는 1980년대 ‘애국조회’와 ‘교련조회’로 유명했다.
  화곡고는 1980년대 ‘애국조회’와 ‘교련조회’로 유명했다. 나채성 교장이 교련복 입은 학생들을 사열하는 장면은 화곡고 졸업생들에게 추억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화곡고 졸업생들은 “나채성 교장선생님이 공군장교 출신이셔서 교련조회 때 경례를 받는 모습이 절도가 있었다”고 했다.
 
  —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과목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나요.
 
  “직접 교과목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나 개교부터 주도해온 ‘3바로 운동(바로 보고, 바로 들고, 바로 걷자)’은 지역사회에서 귀감이 됐습니다. 올바른 국가관 확립을 위해 실시했던 ‘국기 게양과 하강 시의 예절 교육’ 등은 서울시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요. 학생들에게 절도 있는 생활태도를 가르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그 일환으로 애국조회와 교련조회를 번갈아 했습니다.”
 
  — 홍신학원은 40차례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강서 지역의 일류 고등학교로 자리매김한 홍신학원을 빛낸 졸업생으로는 누가 있습니까.
 
  “화곡고는 이전까지 서울대를 매년 20여 명씩 진학시켰고, 1993년 서울대 33명을 비롯해 소위 명문대학이라는 곳에 100명 이상을 진학시켰습니다. 6만여 명의 졸업생들은 지금 법조계, 행정, 언론, 의학, 군 등 사회 곳곳의 영역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모교에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박도춘 교장(화곡보건경영고)은 “창립 20주년 기념식(1993년) 때 김건모씨(6회 졸업)가 공연을 오는 바람에 학교 일대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며 “SBS 방문신 논설위원(2회 졸업), MBC 박상권 앵커(12회 졸업), ‘양화대교’를 부른 자이언티(김해솔·28회 졸업), 〈최종병기 활〉의 배우 박해일씨(15회 졸업) 등이 잘 알려진 졸업생”이라고 했다.
 
 
  유성공군휴양소에서 만난 빨간 마후라
 
  나 이사장은 1956년 11월 대전 항공병학교에 입교해 L-19, T-6, T-33 훈련기종으로 조종술을 익혀 조종간부 5기(공사 7기와 8기 사이)로 1959년 9월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때 우리나라는 수원 제10전투비행단에 3개 비행대대, 김포 제11전투비행단에 2개 비행대대 등 총 5개 비행대대만 보유한 시절이었다. 나 소위는 김포에 있는 제11전투비행단 제111대대에 배속됐다. 나 이사장은 “그때 우리 공군 장비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우리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며 “공군 비행단장(고참 대령)이 미국 고문관에게 종이 한 장 불출까지 도장을 받아야 하는 시절이었다”고 했다.
 
  — 공군에 입대하게 된 계기는요.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6·25 때 공군의 활약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대전에서 고등학교(대전공고 광산과)를 다니면서 유성에 위치한 공군휴양소에서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른 조종사의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학교 성적은 상위권이었지만 대학 진학엔 경제적 어려움이 많아 고민하던 차에 공군 조종간부후보생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습니다.”
 
  — ‘씨름선수’로 기억하는 분들도 있던데요.
 
  “평소 정(情)이 많고 유순한 성격이었지만 남달리 큰 체구와 힘, 운동신경이 있었어요. 승부를 가려야 하는 달리기나 씨름 등을 하게 되면 한 치의 양보 없이 승부를 겨뤘지요. 조종사 시절 각종 운동 시합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배구나 씨름 등 운동도 잘해 선수로 불려 다녔습니다. 특히 1957년 김해에서 정비교육받을 당시 부산에서 열린 3군씨름대회에 공군 대표로 나가 우승을 차지한 적도 있습니다.”
 
  나 이사장은 “현역 때는 큰 키에 체중이 90kg이나 나가는 바람에 비좁기로 유명한 F-86 세이버 조종석에서 옴짝달싹 못 했다”며 “그러나 조종사는 체격의 문제보다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을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했다.
 
  — 처음 F-86을 조종했을 때의 순간을 기억하나요.
 
  “어려운 과정을 밟고 F-86F 조종사가 되어 처음 조종간을 잡았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죠. ‘진정한 빨간 마후라가 되었다’는 벅찬 감동과 함께 내 손의 익숙한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조종간과 각종 계기판 등을 바라보며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2900시간 無사고 비행
 
  나채성 이사장은 “함께 입대한 63명 중 소위로 임관한 동기생은 29명에 불과했다”며 “그중 전투조종사로 배속받은 동기생 20여 명 가운데 배봉호, 신대성, 박양규, 오태명, 이수욱 등 5명의 동기생이 사고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고 했다. 특히 나 이사장은 “소위로 임관해 전투비행대대의 CRT(Combat Readiness Training) 전투훈련을 이수하던 동기생 이수욱 소위가 마지막 비행에서 논바닥에 추락해 순직했다”며 “미숙한데다 용감하니까 조종사 소모율(Pilot Attrition Rate)이 높아지는 것인데, 생활이 어려운 홀어머니께 동기생들이 유골함을 들고 갔을 때가 가장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나 이사장은 “조종사 희생을 줄이는 것은 오직 반복훈련뿐”이라면서 “조종사들이 브리핑, 디브리핑, 비행연구 등의 과정을 갖는데, 이것을 학교운영에 적용해 교사들을 독려했다”고 했다. 이어 “직원조회 때 목표를 체크해가며 상호간 경쟁을 시켰더니, 학교성적이 쑥쑥 올라갔다”며 “30대 젊은 교장이 와서 그렇게 열심히 하니 주변 공립학교 교장선생들이 아마 힘들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 14년간 총 2900시간을 비행했다면 비행시간으로 보면 상당한 기록 아닌가요.
 
  “통상 조종사들에게 요구되는 전투비행 시간을 연간 100시간이라고 하면, 동료들보다 곱절은 더 탄 것 같아요. 당일 비행이 불가능한 조종사들이 발생하면 제가 대신 비행해주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비행계획장교가 저를 무척 좋아했어요(웃음). 게다가 F-86 조종사들이 T-33 훈련기(복좌)로 계기비행(Auto Direction Finding)을 할 때 평가비행을 자주 나갔지요. 잠깐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조종사의 길에서 ‘정확을 겸비한 완전함’을 신조로 생활해왔기에 사고 없이 2900시간 비행했다고 생각합니다.”
 
  나 이사장은 “조종사들이 제일 듣고 싶은 말이 무언지 아느냐”고 기자에게 묻더니, “‘내일 비행 없다’는 말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조종사들은 ‘술 한 잔 하자’로 바로 알아듣는다”며 웃었다.
 
 
  九死一生
 
나채성 대위가 출격을 위해 F-86 전투기에 탑승하는 모습.
  — 정용후(鄭用厚) 전 공군참모총장(당시 중위)과 편조를 이뤄 F-86 전투기를 몰고 야간비행 나갔다 기상악화로 위기일발인 상황이 있었다죠.
 
  “1960년 초 김포비행단에서 겨울 야간비행 때 포항과 대구를 거쳐 귀환하려다 기상악화로 하마터면 저세상으로 갈 뻔했죠. 선두 분대장(정용후 중위) 비행기에 이상이 생겨 윙맨으로 비행하던 제가 리드하게 됐어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느 순간 분대장기가 사라지고 나도 지점을 상실했죠. 고도를 높이고 주파수를 돌려가며 콜(call)을 시도했지만 교신이 되지 않았습니다. 연료 부족 경고등까지 켜지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어요. ADF(자동방향탐지기)와 TACAN(항법시스템·Tactical Air Navigation)으로 김포비행장을 맞추고 민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기수(機首)를 도심으로부터 돌리고 죽음을 맞이하려던 순간 ‘파이어 버드(Fire Bird)’라는 콜사인이 들려왔습니다. 비상착륙으로 목숨을 건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죠. 당시 주영복 제11비행단장은 정용후 중위가 월북(越北)한 줄 알고 ‘정용후 어디 갔느냐’고 소리치던 게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 한주석(韓周奭) 대위(공군참모총장 역임), 조근해(趙根海) 대위(공군참모총장 역임)와 함께 F-86에서 F-5로 기종 전환을 하기 위한 전환조종사로 선발되셨지요.
 
  “1965년 수원기지로 이동해 최초로 F-5 전투비행대대 105대대 창설 요원이 됐습니다. 조근해 공군참모총장(공사 9기)은 1993년 공사 졸업식 행사를 점검하다가 블랙호크 추락사고로 순직했습니다. 조종사 후배지만, 과묵하고 예의도 바른데다 겸손한 분이었어요. 사고 소식을 듣고 한때 동고동락(同苦同樂)하던 동료로서 너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 F-5A와 F-86F, 두 기종을 타보니 어느 기종이 더 나은가요.
 
  “조종사 개인적으론 F-86을 선호하죠. F-86은 고도 3만 피트로 대전 상공에서 글라이딩(호라공)으로 김포까지 내릴 수 있어요. 6·25전쟁 때 미군 조종사들이 연료를 아끼기 위해 한반도 출격 후 귀환할 때 대한해협에서 시동을 끄고 글라이딩으로 후쿠오카의 이타즈케 공군기지에 내렸다고 해요.
 
  하지만 전투기는 조종사의 선호와 관계없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한국 공군의 초음속 시대를 연 F-5A는 F-86 대비 상승력이 월등해 3분 만에 2만 피트 상공에 진입해요. 가속 능력이 우수하기 때문에 기존 전투기보다 긴급발진 능력이 우수하고, 무기체계도 기총에서 미사일을 장착한 전투기입니다.”
 
 
  “학교 운영은 자율에 맡겨야”
 
서울시 강서구 내발산동에 자리한 홍신학원 전경.
  홍신학원은 화곡중, 화곡고, 화곡보건경영고, 홍신유치원으로 구성돼 있다. 1977년 화곡중학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할 때, 강서구 관내엔 고등학교가 부족해 중·고 전체 재학생이 7000명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지금은 전교생이 1200명가량이라고 했다.
 
  — 화곡고는 과학영재 학급과 수학영재 학급을 운영하는 등 수월성(秀越性) 교육에도 앞장서고 있더군요. 최근 특목고(特目高)나 자사고(自私高) 폐지 움직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교육은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21세기는 획일화된 교육시스템보다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키워주는 교육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학교는 자유경쟁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해야 하며, 사립학교로서의 특징이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학교 운영은 정부가 간섭하지 말고 철저하게 자율에 맡기면 됩니다. 이미 시작된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19라는 예상치 못한 상황은 학교 교육 방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기적인 계획에 의한 변화보다는 백년대계의 시야를 갖고 교육정책을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
 
  나 이사장은 국사교육에 대해 “올바른 역사교육은 힘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올바른 역사교육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국가-학교-가정’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정교과서를 통해서 일관성이 있고 통일되고 주체성이 있는 역사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이사장님의 교육관이 궁금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지식을 얻고 진리를 깨닫는 일입니다. 다음은 즐겁게 깨달은 것을 학생들에게 전하는 겁니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학생들을 불러 머리를 쓰다듬는 일에서 진정한 교육은 싹트는 것입니다. 어떤 선입견 없이 학생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줄 때 교육의 힘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인성교육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경원이는 결심하면 밀고 나가는 고집 있어”
 

  나 이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 이사장의 모습에서 나경원(羅卿瑗) 의원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기자가 ‘따님들이 다 미인인 것 같다’고 하자, “애들이 ‘엄마 닮았으면 더 예뻤을 텐데’ 한다”며 웃었다. 나 이사장은 고 정효자(鄭孝子) 여사와의 사이에 딸 넷을 뒀다. 큰딸이 나경원(58)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다. 둘째 딸 나경민(56) 홍신유치원 원장은 서울대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시카고 아메리카 컨저버토리 뮤직에서 연주학 박사를 받았다. 셋째 나현선(51)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하프를 전공하고 KBS교향악단에서 활동했다. 막내딸 나현신(50)씨는 서울여대를 졸업한 후, 서울여대에서 의상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여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2011년 나경원 전 대표가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나 이사장님이 파일럿 출신이란 것이 처음 알려졌는데요.
 
  “그전에도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어요. 여러 사람의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아무래도 공군 조종사 출신이 학교를 설립했다는 것이 일반인들에게 특별하게 다가왔을 겁니다.”
 
  — 당시 일부 언론이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에 대해 ‘화곡동 사학재벌의 딸’이라고 했는데,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화곡동 사학재벌의 딸’이란 표현은 일부 언론에서 서울시장 후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한 겁니다.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립학교가 국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고, 그에 따라 여러 가지 규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사학설립자의 운신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재벌’이란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 나경원 전 대표가 2002년 판사 생활을 접고 정계에 입문했을 때 반대하지는 않았나요.
 
  “안정된 판사 생활을 접고 정계에 입문하는 것이 우리나라 정치 현실을 생각할 때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어요. 최종 결정은 남편(김재호 서울고법 부장판사)과 잘 상의해서 하도록 조언했습니다. 경원이는 어렸을 때부터 한번 결심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고집이 있기에 지혜롭게 잘해 나가리라 생각했어요.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국민을 잘 이끌어 나가는 훌륭한 리더가 되라는 의미에서 가족 모두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었죠.”
 
  — 이번 총선에 출마해 패했는데, 심정이 어떻든가요. (나경원 전 의원은 4·15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수진 전 판사에게 패했다.)
 
  “나 의원의 진심을 지역구에서 잘 알아주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죠. 하지만 인생에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다 공존하듯, 정치인도 어려운 시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과 같은 정치현실 속에서는 몸과 마음을 잠시 비우고 그동안 정신없이 달려온 본인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힐링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정치인 나경원’보다 ‘장애인 엄마’ 역할 더 기대
 
2013년 9월 15일 홍신학원 창립 40주년에 참석한 나경원 전 의원. 그 옆에 나채성 이사장과 정효자 여사가 자리하고 있다.
  — 아버지가 보는 ‘딸 나경원’은 어떤 사람인가요.
 
  “어렸을 때부터 착하고 매사에 성실한 모범생이었어요. 밑으로 여동생 셋이 있는데, 동생들을 이기려고 하지 않았어요. 동생들 공부 지도도 해주었고, 동생들이 잘 따랐어요. 자그만 체구에 연약해 보여도 끈질기고 자신의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의정활동 속에서 바쁜데도 불구하고 장녀로서 집안일에도 많은 신경을 쓰는 탓에 부모로서 미안함도 느낍니다.”
 
  나경원 전 대표는 얼마 전 기자와의 통화에서 아버지 나채성 이사장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내 말에 귀 기울여주시고, 나를 믿어주셨다”며 “매일 안부를 묻는 전화를 드리면, 큰일을 하려면 먼저 건강을 잘 챙겨야 한다고 늘 말씀하신다”고 했다.
 
  나 이사장은 “경원이가 국회의원보다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장애인 관련 일을 열심히 해왔다는 것”이라고 했다.
 
  “2013년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2018 평창동계패럴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을 지냈지만, 딸이 장애인인 것을 숨기지 않고 행사에 늘 함께 다녀요. 화곡고 학부형 한 분이 오셔서 ‘나경원 의원이 (장애인) 딸을 적극적으로 키우는 것을 보고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하더군요. ‘정치인 나경원’보다 ‘장애인 엄마’로서 더 큰일을 하고 있다고 격려해줍니다. 저도 그런 딸이 자랑스럽습니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우리 경원이를 보고 용기를 얻어 당당하게 자녀들을 키우게 된다면 그것이 정치보다 큰일 아닐까요?”
 
 
  부인은 등단 시인
 
  나 이사장은 부인 정효자 여사를 1962년 무렵 제11전투비행단에 근무할 때 만났다. 조종사 동기생들이 숙명여대 가정과 4학년 졸업반 학생들과 김포비행장 인근 카페에서 미팅할 때였다. 나 이사장은 1963년 2월 정 여사와 결혼했다. 나 이사장은 “조종사의 아내로 늘 마음을 졸이면서 살다가 학교를 설립할 때 학교 운영자금을 마련하느라 무진 고생을 했다”며 “연세대교육대학원에 진학해 교사자격증을 따 화곡중학교 학생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손수 가르쳤고, 중앙대교육대학원을 마치고 1985년 홍신유치원을 설립해 운영하는 등 평생을 남편을 내조하는 데 헌신했다”고 했다.
 
  정효자 여사는 월간 《문학공간》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시집 《해가 지면 갈 곳을 찾아》 《25시의 여자》를 펴냈다.
 
  나 이사장은 “2011년 경원이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낙마한 이후, 병마가 찾아와 6년 넘도록 투병하다 2018년 저세상으로 갔다”며 “아내가 그리울 때면 학교 본관 앞 시비(‘목련꽃 피던 날’)를 어루만지며 그 사람을 추억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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