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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헌법학자 정종섭 의원의 귀거래사

“정치판이 이럴 줄이야, 이 정도로 혼탁할 줄이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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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억울함과 고통에 대한 죄책감을 무겁게 느끼며’(불출마 선언문 中)
⊙ “현실 정치에서 너무 많이 실망하고… 거의 절망적인 수준”
⊙ “정치세력 다 끌어들이는 통합은 통합이 아니냐. ‘당신은 국회서 뭐했냐’고 하면 나도 제대로 한 게 없으니까. 허허허”
⊙ “‘박근혜’ 이름 팔아 배지 단 정치인, 다 불출마해야. 앞으로 탄핵 분석하는 책 쓰겠다”
⊙ 소장파 헌법학자로 이름 날려… 司試 합격 후 학계에 투신. 역대 정권서 입각 제의

鄭宗燮
1957년생. 서울대 법대, 경희대 대학원(석사), 연세대 대학원(박사) 졸업 / 1982년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 14기) /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건국대·서울대 교수, 서울대 법대 학장·법학대학원장, 한국헌법학회장, 행정자치부 장관, 여의도연구원장 역임 / 現 20대 국회의원
  과거 법학계 소장학자군(群)에서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았던 정종섭(鄭宗燮·63) 교수(서울대)가 이른바 ‘진박(眞朴)’ 공천을 받아 20대 국회에 등장할 때가 4년 전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행정자치부 장관을 역임할 만큼 대통령 신뢰가 두터웠다.
 
  그러나 원하든 원치 않든 정치가 비정(非情)한 정글의 세계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경북 경주가 고향이지만 공천 지역은 경북고 동기(57회)인 류성걸 의원이 버티고 있던 대구 동갑(甲)이었고, 탄핵 주역 유승민 의원(동乙)의 바로 옆 동네였다. 유 의원 역시 경북고 동기. 그러고 보니 경북고 57회에는 유독 국회의원이 많다. 권오을·주성영·유승민·류성걸·정종섭 의원 등 5명이나 배출했다.
 
  의원 배지는 5명 중 가장 늦게 달았지만 ‘헌법학자 정종섭’이란 이름은 정치권에서 일찌감치 회자됐다. 연구 주제가 헌법은 물론 국회의원 선거제도, 비례대표, 정치자금, 기업의 정치자금 기부, 한국 법원, 법률가 충원 시스템(로스쿨), 사법 분야의 국민참여 등 모두가 여의도와 서초동에서 논의되는 사항이었으니 말이다. 역대 정부의 여러 위원회에 적극 참여해 국가개혁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학계에서 처음으로 ‘참여민주주의’를 주창했고 특별검사제, 책임총리제(실질총리제), 청와대 국정상황실 설치, 로스쿨 도입 등 국정개혁과 관련한 과제를 제안해 상당수 실현되었다(로스쿨의 경우 YS(김영삼)와 DJ(김대중) 정권 시절에 도입을 주장하다가 여러 한계를 들어 철회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 정권 시절 받아들였다). 주요 저서로 《헌법학원론》 《헌법소송법》 《헌법연구 1~5》 등이 있는데, 법학도라면 반드시 그의 책을 읽었다.
 
  ‘박근혜 키즈’ 정종섭의 4년 전 국회 입성은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4년 후인 지난 1월 19일 대구·경북 국회의원 중에서 가장 먼저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떠났다. 교수직은 장관 시절 그만뒀으니 무적(無籍)으로 돌아간 것이다. 기자는 정 의원의 불출마 선언문을 구해 읽어보았다.
 
  〈… 저는 박근혜 정부에 참여하여 정부개혁과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지 등과 국가 대개조에 노력했지만 충분히 이루지 못했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우리 당의 셀프 탄핵도 막지 못했으며, 박 대통령의 억울함과 고통에 잘 대응하지도 못한 죄책감을 무겁게 느끼며 (중략) 저의 결정을 받아주실 것을 용서와 함께 말씀드린다.…〉
 
  ‘죄책감’과 ‘용서’라는 단어에 눈길이 갔다.
 
  기자가 정 의원과 만난 것은 지난 2월 27일이니 불출마 선언 후 한 달이 더 된 시점이었다. 오후 2시30분. 국회 의원회관 1016호 문을 두드렸다.
 
 
  “이론하고 (현실은) 정반대죠, 허허허”
 
2019년 10월 3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탄핵 반대집회에서 정종섭 의원이 대구방송(TBC)과 인터뷰하고 있다.
  “녹음하지 마이소. 메모나 하지.”
 
  ― 네? (필기하는) 손이 늦어서…. 제일 당혹스러운 질문이 경북고 57회 동기들 이야기죠.
 
  “그렇죠. 국회를 무슨 가십처럼 이야기하는데, 동기들이 왜 국회의원을 했는지 내가 모를 뿐만 아니라, 그렇게 비교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유신(維新) 때 학교 다녔으니, 우리 과제는 유신시대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고…, 헌법을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 근대 헌법국가 원리에 맞도록,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을 정상화시키느냐, 그게 평생 화두였기 때문에 국회의원 한번 해보자고 뛰어든 사람하고는 생각이 같을 수 없을 겁니다. 문제의식도 다르고.”
 
  그러더니 낯설고 딱딱한 헌법 이야기를 길게 꺼냈다.
 
  “유신이 끝나고, 전두환·노태우 정권을 거치면서 어떻게 국가를 정상화시킬 것인지가 헌법을 공부하던 제 입장에서 큰 과제였고…, 그다음에 유신체제라는 게 카를 슈미트(C. Schmitt) 이론체계니까, 카를 슈미트 이론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그야말로 권위주의 통치를 끝내고 민주화 이후 정상국가로 올라가는 것인데, 그렇게 하려면 강력한 이론을 공부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현실(현장)에 나가 이런저런 활동하는 사람이야 많겠지만 연구하고 이론(을 공부)한다는 것은 어려운 길이니까, 결국엔 제가 볼 때도 (학창시절) 공부를 좀 하고 그러니까, 그쪽으로 공부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현대 민주주의와 독재체제는 입헌주의라는 모태에서 탄생한 이란성 쌍생아에 비유할 수 있다. 20세기 초반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에 대한 카를 슈미트의 이론은 1970년대 한국 유신헌법의 정치원리에 동원되었다.
 
  “스승이신 허영 교수님이 독일에서 공부하다 막 돌아오셨는데, 그때 독일도 카를 슈미트 이론을 두고 치열하게 싸울 때니까… 그분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어요. 스승과 함께 카를 슈미트 이론을 완벽하게 극복하는 작업을 내가 했다고 봐야겠지요. 그 틀 속에서 헌법을 설계한 것이고, 카를 슈미트 이론을 극복하는 데 최대 공헌자는 우리 선생님이고, 나는 그분 틀 속에서 그림을 잡아가는 것이었고….
 
  그다음에, 우리나라가 국가 정상화되는 과정이 정치의 정상화, 국회의 정상화니까, 과거 권위주의 통치에서 문민정부로 전환했을 때, 내 박사논문이 ‘대의제 정치, 대의제 민주주의 연구’입니다. 대의제의 약점을 보완하고 극복하는 것이 참여민주주의죠.
 
  내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참여민주주의를 체계화시켰어요. 참여민주주의 용어 자체는 1970년대 중반 미국에서 논의가 있었는데, 그때 ‘참여’는 보팅(voting·투표)을 얘기하는 거예요. 국민이 주권자로서 어떻게 투표권을 제대로 행사해 그야말로 주권자의 자기 역할을 확보하느냐 문제인데….”
 
  자신의 박사논문 ‘강의’가 이어졌다. (나중 녹음을 풀 때 시간을 계산하니 8분17초 동안 이어졌다.)
 
  “참여민주주의는 노무현 정부가 내 주장을 가져가서 자기 브랜드화한 거죠. 그래서 참여라는 것이, 좌파 개념으로 인식되어버렸어요, 국민이 가져야 할 참여의 문제는 보수정권 동안 완전히 무시되고 제대로 인식조차 못 하게 되었던 거죠.”
 
  ― 그래, 이론을 공부하다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니 어떻습니까.
 
  “이론하고 정반대죠, 허허허.”
 
  ― 그 얘기를 듣고 싶네요.
 
  “허허허.”
 
 
  국회 배지를 단 이유는…
 
2016년 7월 6일 국회에서 열린 ‘국가혁신을 위한 연구모임’에 참석한 정종섭 의원이 축사를 하고 있다.
  ― 이론과 현실 간 괴리를 풀어 설명해주세요. 딱딱한 이야기는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허허허. 아니, 뭐 4년 동안 대통령 탄핵이라는 전대미문의 일을 겪고 나니까 그게 가장 충격적인 것이죠.”
 
  ― 국회의원 배지 달고 얼마 안 지난 시점에서….
 
  “네. 제가 국회에 들어온 목적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내가 연구했던 정상적인 대의정치가 작동하게 해서 국회의 정상화, 대의정치의 개혁을 실행해보자는 것이었어요.
 
  그다음에 큰 덩어리가 권력구조 개헌입니다. 대통령제가 우리나라 사회에서 기능이 끝났다는 관점이니까. 물론 여기에 대해 이론(異論)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제는 이미 장점보다 약점, 부작용이 더 크다고 봤어요.
 
  대통령제는 건국 당시 이승만 정부 때 있던 대통령제가, 뭐라케야 될까… 플러스와 마이너스 중에서 플러스가 많았고, 그다음에 고도 성장기에 인권침해가 상당 부분 있었으나, 가난 탈출에 국력을 집중시키기 위해선 대통령제가 플러스적인 기능이 더 많았다고 평가하는 것이고….
 
  민주화 이후엔 대통령제가 별 기능을 못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겪어봤듯이 YS와 DJ 정부 때 실패를 했잖아요. 국민 기대가 엄청났음에도 국정운영 방식은 역시 권위주의 정치 패턴을 벗어나지 못했죠. 소수의 이너서클이 전횡을 하며 대통령 1인이 (권력을)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내각의 무력화와 청와대의 비대화 등 정치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자원 배분의 왜곡이 여전히 심하게 반복되는…, DJ의 호남정부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YS 정부 때 그렇게 실패하더니…. 저는 (대통령제) 실패라고 봅니다. 민주화 이후 기대를 많이 걸었지만, 전혀 엉뚱한 방식으로 국가가 운영되었고, 외형적으로 전두환·노태우 정부와 좀 달랐을지 몰라도 YS·DJ 정부 때도 실질적으로 국가 작동 방식은 똑같았어요.
 
  YS와 DJ 정부의 실패에 대한 손가락질을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끝낼 일이냐? 아니라는 것이죠. 학자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YS와 DJ를 비난한대서 문제가 해결되면 모를까, 여전히 해결이 어렵기에 근본적으로 대통령제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 연구 작업을 고(故) 박세일 교수와 같이 했습니다.”
 
 
  역대 정권이 망해가는 판박이 과정
 
2016년 7월 4일 정종섭 의원이 대정부질문을 하고 있다. “영남권 신공항 연구용역 결과 발표 이후 대구·경북 민심에 대해 보고받은 바가 있는지”를 따졌다.
  박세일·정종섭 교수 등 동아시아연구원 대통령개혁연구팀이 만든 연구서 《대통령의 성공조건》(2002)은 한국 대통령제의 모든 구조를 파헤친 역작이었다. 과거 정부에 참여했던 이홍구·박철언·이종찬·노재봉·강경식·강봉균·김정렴·사공일·김충남 등의 인터뷰를 거쳐서 완성됐다.
 
  “당선된 대통령에게 ‘당신은 성공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방법은 주관적 접근법이죠. 그야말로 허허허… 무망(無望)한 것이고, 객관적 접근법으로 누가 대통령을 하더라도 성공하는 시스템으로 가야 하잖아요.
 
  개헌을 통해 2원정부제나 내각제로 가는 길이 있는데 헌법개정 발의권을 국회 아니면 대통령이 쥐고 있으니까, 국회에서 적극적으로 하든지, 아니면 대통령이 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헌이 쉽지 않으니까, 행정 수반의 권한을 대통령이 총리에게 위임해서 맡겨두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책임총리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책임총리제는 정확한 용어가 아니죠. 법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실질총리’예요. 왜냐면 대통령이 총리한테 권한을 위임해도 결국 실패하면 누가 책임지느냐, 총리가 아니라 대통령이 법적 책임을 지니까요. 그러니까 책임총리라는 말은 맞지 않고 실질총리라는 말이 더 정확한 용어여서 저는 실질총리라고 썼어요. 다만 국민에게 임팩트가 있으려면 총리가 책임진다고 해서 책임총리제라고 부른 것이죠. 어쨌든 그 설계를 제가 한 것입니다.
 
  제 헌법책에 그 틀을 적어놓고 그림도 그려놓았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실패하는 과정을 전부 반복하고 있어요.”
 
  정 의원에 따르면, 한국 대통령의 실패 과정은 역대 정권마다 판박이다. 집권 후 1년 내지 1년 반 동안 개혁이란 이름으로 드라이브를 걸다가 현실과 잘 맞지 않아 부작용이 생기고, 공무원은 마이동풍(馬耳東風),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 사이 권력의 이너서클이 완벽하게 구성이 되고, 내각은 무력화되며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만지려고 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집권 1년 내지 1년 반은 행동하는 사이클, 그다음엔 무너지는 사이클이 이어지고… 무너지는 국면에선 어떤 방식으로 통치하느냐 하면, 결국엔 통일 문제를 끄집어내서 임기 말까지 끌고 가는 식이죠. 이산가족을 만나고 남북 평화가 되든, 핵 문제가 되든, 계속 북한 문제를 가지고 국민에게 호소하면서 임기를 마치는…. 모두가 그런 식으로 갔죠. 지금 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르다면 문재인 정부는 출범 때부터 남북 문제를 화두로 꺼냈으니까.”
 
 
  “국회폭력 때문에 중대선거구제 소신 접어”
 
《조선일보》 1999년 4월 14일 19면에 실린 정종섭 교수의 인터뷰 기사. 당시 《헌법판례연구1》을 출간했다.
  ― 20대 국회에 들어와 무슨 일을 하고 싶었습니까.
 
  “하나는 개헌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개혁이었어요. 정치자금 개혁은 일명 ‘오세훈법’을 통해 상당 부분 실현이 됐고 선거제도 개혁은 제가 YS 때부터 중대선거구제를 주장해왔어요. 과거 1(선거)구 2인제는 여야가 서로 나눠 먹기 식으로 정치권이 다 해 먹으니 폐지됐던 것이라 1구 3~5인제를 주장했어요. 그런데 ‘국회폭력’ 문제가 불거진 뒤 생각을 바꾸었어요.
 
  제가 타이완도 가보고, 일본도 가봤는데 국회폭력이 선거구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더군요. 그러니까 중선거구제를 하면 유권자의 15~20%만 지지를 받아도 당선됩니다. 자기 서포터스만 관리하면 당선되니까 국회에서 상대를 공격하고 인신 모독을 일삼죠. 국회 윤리위원회에 회부해도 효율적으로 작동을 못 해요. 결국엔 중대선거구제로 가면 국회폭력이 굉장히 심해지기에 이후 그런(중대선거구제) 주장은 안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국회를 개혁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저는 비례대표제가 대안이라 생각했어요. 유럽처럼 비례대표제로 가면 국회의원 수를 200명으로 줄일 수 있고 선거비용도 훨씬 줄어든다고 봤습니다. 지역구 관리비용도 안 들고 보좌관들도 많이 뽑을 필요가 없죠.”
 
  ― 이상적(理想的)이긴 한데 한국 정치에서 지역구를 없앤다? 너무 비현실적인걸요.
 
  “어쨌든 그게 제 소신(지역구를 줄이고 비례대표제를 늘리는)인데 우리 당이 제 생각과 달리 당론으로 가버리니, 제가 주장할 계제가 전혀 없었죠. 중앙당이 공천권 휘두르는 것을 최소한 막으려면 권역별 비례대표제도 합리적이고 석패율 제도도 좋다고 봤는데, 선거법 합의가 안 되고 저 사람들이 독특한 연동형으로 가버려서 이 역시나 기형화가 돼버렸어요.
 
  그래서 정치개혁을 못 했고, 국회 개헌특위에 들어가 대통령제를 손대려고 했어요. 처음에는 민주당 국회의원도 제 생각과 뜻을 같이했어요. 이 정부도 처음엔 4년 중임 대통령제를 하자고 했는데 청와대에서 아예 못 하게 막아서 누구도 입도 뻥긋 못 하고 결국 개헌특위를 무산시키고 말았어요.”
 
  ― 4년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네요.
 
  “평생 제 관심이 국가 정상화인데, 요즘 개헌 이야기가 나오지만 사가 개입돼 있어요. 개헌을 국회도 안 하고, 대통령도 안 하니 국민이 발안해 개헌하자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국회의장 하던 양반이 무슨 개헌을 꺼내고, 황(교안) 대표도 개헌을 꺼내는데 총선 때 개헌을 이슈화한다는 것은, 여야 간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개헌논의의 진정성도 없어요. 저는 평생 개헌이 소신이지만 굉장히 불순하다고 보는 것이죠, 동기가….”
 
  ― 불출마하면 이제 대학으로 돌아가시나요.
 
  “못 돌아가지. 다 그만뒀는데. 장관 할 때 사표를 냈어요. 2015년 가을인가 그렇죠.”
 
  ― 불출마하니 뭐가 제일 아쉽습니까.
 
  “우리 당이 하는 통합은 통합이 아닙니다. 지난 정치세력을 다 끌어들이는 식이니까요. 저는 이 시대 과제는 ‘세력교체’라고 봅니다. 보수정치판에 있는 주류적인 사람들이, 탄핵을 (주도)했든 안 했든 간에, 그 사람들이 다시 정치하겠다고 모이는 것은, 필요하면 탄핵 같은 짓을 또 할 수 있는 거죠. 저는 전혀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을 완전히 청산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의 새로운 판이 안 열린다고 봅니다. 이런 판에 이뤄지고 있는 (미래통합당) 공천은 계파정치의 연속이라 보는 것이고요. 자기네들끼리 뿌리 깊은 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혁신이 되겠습니까.”
 
  ― 세력교체를 주장하면서 불출마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아닌가요? 계속 현실정치에 참여하며 투쟁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투쟁은… 안 되는 것이… 세력교체가 정말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정말 이 당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내 역할이 없는데 굳이 이 정치판에…”
 
  ― 기득권을 쥔 소수의 주류를 제외하면 세력교체를 다 원하겠지요.
 
  “누구든지 공천만 시켜주면 뭐든 좋다는 것 아닙니까. 문제의식이 있어야죠. 보수정치가 왜 실패했는지 국민 앞에 사과하고 책임져야지, 자기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안 하는 것이죠.”
 
  ― 본인은 스스로 평가를 하고 불출마하신 건가요.
 
  “그렇죠. 나도 거기에 끼워져 있었으니까. 기간이 짧든 길든 간에.”
 
  ― 세력교체를 위해 불출마 이후 정치를 하겠다?(최근 정 의원이 전원책 변호사 등과 함께 이른바 ‘한국경제당’을 창당해 탄핵에 반대하는 의원들과 미래통합당 낙천 의원들을 규합하려 한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별로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내 역할이 있으면, 어느 정도 할지 몰라도 내 역할이 없는데 굳이 이 정치판에….”
 
  ―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분들이 없습니까.
 
  “네?”
 
  ― 다 주류 쪽에 붙어서 줄 대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나는 우리 정치판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많이 가졌으면 하는 바람인 거죠, 허허허.”
 
  인터뷰를 마친 뒤 정 의원에게 한국경제당 창당을 재차 물어보려 했으나 휴대폰이 꺼진 상태였다. 의원 보좌관에게 물어보니 펄쩍 뛰면서 이렇게 답했다.
 
  “전혀 근거 없는 소리다. 누군가 ‘정종섭’이란 이름을 가지고 언론 플레이를 한 것 같다. 각 정파의 입장에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 꼼짝 못 하게 묶으려는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경제당’이란 당명도 왜 나왔는지 의원님은 모르고 계신다. 누구에게도 (당을) 같이하자고 한 적이 없다.”
 
  보좌관은 그러나 “의원님이 ‘미래통합당 외에 탄핵을 반대한 사람들끼리 다 합해라. 합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 적은 있다. 그것과 창당은 별개”라고 덧붙였다.
 
 
  탄핵 혐의에 대한 국회 조사 없어 탄핵
 
2019년 3월 정종섭 의원이 지역구 현안인 대구 동구 파티마삼거리~유통단지 사이 관통도로 추진과 관련해 지역 관계자와 대화하고 있다.
  20대 국회는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대통령 탄핵을 표결로 가결했다. 박근혜 대통령으로선 전인미답의 형극(荊棘)이었을 것이다. 국회 탄핵소추 이후 헌법재판소 결정까지 약 90일이 걸렸다.
 
  헌법학자, 헌재 헌법연구관 출신인 정 의원이 느꼈을 참담함은 짐작하고 남는다. 특검의 파상공세가 이어지면서 특검발 악재가 이어졌고, 청와대 압수수색 이후 여론마저 돌아섰다. 일련의 탄핵 격랑 속에 정 의원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 탄핵에 대한 법리적인 문제는 고민하셨겠죠.
 
  “박근혜 탄핵이 법적으로 가장 잘못된 것은 국회가 증거수집 없이 탄핵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불법입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재판을 하면 안 돼요. 합법적으로 소추가 되었으나 파면시킬 이유가 없을 때 ‘기각(棄却)’이라는 말을 쓰고. 처음부터 국회에 (탄핵소추안이) 잘못 들어왔다고 할 때, 불법이라고 할 때 ‘각하(却下)’라고 하거든요. 탄핵 반대 집회할 때도 탄핵 기각을 외치다가 중간에 각하라고 바꾼 적이 있어요.”
 
  당시 정 의원은 법조인 출신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박근혜 대통령 법률대리인단의 탄핵심판 과정에서의 절차 위반 문제제기에도 헌재가 조기 선고를 강행하려 한다”며 “헌재의 탄핵 결정은 한번 재판으로 끝나서 불복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촉구했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왜 (탄핵) 기각이 아니라 각하해야 하는가 하면 탄핵을 위해서는 국회에서 증거수집을 해야 합니다. 당시 탄핵소추장에 들어 있는 것은 언론 기사뿐이지, 증거수집을 국회가 한 적이 없거든요. 국회법에는 증거를 수집하는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절차에 따라 조사위원회를 통해 탄핵 증거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국회법에 ‘조사위를 구성할 수 있다’로 돼 있다고 해서 당시 국회의장(정세균)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판단해 조사를 안 하고 넘어간 것이죠. 그게 결정적으로 잘못된 겁니다.”
 
  ― 국회의장이 오판한 것이죠.
 
  “오판입니다. ‘조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해야(적혀야) 가능하다는 것인데, 말이 안 되는 것이 탄핵소추를 위한 증거가 소추 이전에도 나올 수 있거든요. 국정조사나 국정감사에서 나온다든지, 상당 부분이 다른 절차를 통해 (증거가) 확보되는 경우가 있어요.
 
  이 경우 소추할 때 조사위원회를 구성할 필요가 없지요. 이미 증거수집이 돼 있으니까. 그런데 소추 증거가 전혀 없을 때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만약 ‘조사위를 구성해야 한다’고 명문화하면, 증거수집이 돼 있어도 또 조사위를 구성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니까 ‘~할 수 있다’고 한 것이죠.
 
  따라서 모든 법에서 ‘~할 수 있다’고 규정된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재량껏 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필요성이 없을 때는 구성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아마… 제 기억이 그런데, 국회의장이 의견을 낸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기에 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 당에서 제대로 대응했다면, 국회 본회의에 들어가면 안 되죠. 그것은 찬성·반대 이전의 문제잖아요. 그런 부적합한 절차로 (탄핵소추안이) 바로 올라왔기 때문에 들어가면 안 됐던 것이죠.”
 
  국회법 130조 1항에 따르면, 탄핵소추가 발의될 때 국회의장은 즉시 본회의에 보고하고, 본회의는 의결로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하여 ‘조사하게 할 수 있다’로 규정돼 있다.
 
  탄핵소추란 한마디로 검찰의 공소와 같다. 검찰이 수사도 안 하고 피고인을 기소할 수 없듯 당시 국회는 조사 없이 탄핵소추한 것이다. 당시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위원장 권성동)은 탄핵 혐의에 대한 조사활동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본회의에서조차 여야 간 토의절차 없이 13개의 탄핵사유를 일괄 표결에 부쳤다. 헌법재판소에 보낸 탄핵소추안에 첨부된 자료는 언론 기사 15개와 최서원 등에 대한 3개의 검찰 공소장뿐이었다.
 
 
  “다 알면서 탄핵을 주도한 것은 용서받지 못할 겁니다”
 
정종섭 의원은 한학과 서예에 조예가 깊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마련된 독립선언서 필사 챌린지에 참여했다.
  ― 그때 정 의원께서 국회의장한테 그런 문제를 제기했나요.
 
  “우리 당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게 맞지.”
 
  ― 그럼, 당이 움직이도록….
 
  “제 말이 들렸을까요? 당시에….”
 
  ― 그래도 헌법학자로서 전달했으면 충분히 통하지 않았을까요.
 
  “전혀… 전혀…. 제가 현실 정치를 해보니 초선들은 나서서 말을 안 합니다. 국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 서울대 법대 교수, 헌법학자의 말은 통할 것 같은데.
 
  “그러나 현실 정치는 안 통하더군요. (다선의) 친박 주류들이 다 있는 것이고….”
 
  ― 초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재선에 도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한계를 극복한다고 되겠습니까.”
 
  ― 탄핵의 다른 법리적인 문제는 뭡니까.
 
  “헌재의 탄핵 이유 자체가 설득력이 없습니다.”
 
  ― 헌재가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것이죠.
 
  “상당히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말입니다.”
 
  ― 역사가 어떻게 (탄핵을) 기록할까요.
 
  “그러니까, 저것을 법리적으로 전문가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비전문가들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기보다….”
 
  ― 앞으로 개인적으로 하겠다는 의미죠.
 
  “그렇죠.”
 
  ― 탄핵 법률대리인단에 참여했던 변호인 중에 탄핵 관련 책들을 쓰고 있더군요.
 
  “나오고 있죠.”
 
  ― 일독하셨나요.
 
  “뭐, 보기는 봤습니다.”
 
  ―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설득력 있는 부분도 있고…, 재판에 참여했던 분들이 기록으로 남긴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어요.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죠. 앞으로 그 작업을 저도 해야죠.”
 
  정종섭 의원은 자유한국당 시절, 탄핵사건분석위원회를 구성해 이른바 《탄핵백서》를 출간하자고 제안했었다. 또 탄핵과 대선·지방선거 패배를 책임지는 광범한 인적 쇄신 방안도 내놓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래된 계파투쟁, 비박과 친박이 싸움질하고, 이명박 정부 때는 친박계를 학살했고, 그다음에는 친이계를 학살하며 늘 싸웠잖아요. 그 구조 속에서 탄핵이 발생했다면 양쪽의 책임 있는 사람들도 책임이 있어요.
 
  나중에는 다 밝혀졌지만, 탄핵 과정에서 나왔던 ‘가짜뉴스’로 우왕좌왕했던 사람들, 우왕좌왕하면서 찬성이든 반대든 한 사람까지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야 있겠어요. 그러나 오랫동안 정치했던 사람들은 (탄핵이 잘못된 것임을) 다 알았던 것 아닙니까. 자기네는 다 알면서 탄핵을 주도한 것은 용서받지 못할 겁니다.”
 
 
  탄핵 주역 유승민과 고교 동기
 
  ― 그 탄핵 주역이 고교 동기(유승민)였네요.
 
  “동기든 아니든 자꾸 그런 부분을 관련시키는 것은 전혀 안 맞는 것이고…, 동기라는 부분은 우연성에 의한 것이고….”
 
  ― 그렇죠. 우연이지만 공교롭게도 운명처럼….
 
  “운명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왜 그런 짓을 했냐는 것이죠. 안타깝다는 것이지.
 
  어쨌든 (탄핵에)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고, 사과할 사람은 사과하고, 그럼에도 서로 옳다고 우기면, 그야 우야겠나(어쩌겠나)…. 탄핵을 주도한 사람도 자기가 ‘옳다’, 반대한 사람도 ‘옳다’고 하면 서로 싸우지 말고 헤쳐 모이는 게 차라리 답입니다. 그래서 탄핵 반대했던 사람은 그 세력으로 모이고, 찬성했던 사람도 그 세력을 모아 당을 만들면 국민이 나중에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하나는 소멸하고 하나는 지지를 받지 않겠어요?
 
  그리고 ‘박근혜’ 이름 달고 국회의원 된 사람은 다 불출마 선언해라, 국민에게 용서받고 싶으면 그게 진정한 용서 아니냐, 그러면 자기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감옥까지 갔는데 ‘나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리고 계속 국회의원이 되겠습니다’ 그게 인간적으로 말이 되느냐, 그 얘기를 제가 했죠.”
 
  정 의원은 고교 동기인 유승민 의원에 대한 언급을 마뜩잖게 여겼다. 아니, 기자가 보기에 싫어하는 듯 비쳤다.
 
  “동기라 자꾸 엮는 게 참으로 안 맞다(는 겁니다). 왜냐면 내가 그 친구하고 문제의식도 다를 뿐 아니라….”
 
  ― 왜 이런저런 모임이 있지 않습니까. 얼굴 부딪히는….
 
  “뭐, 할 것도(부딪힐 일도) 없지. (그가) 국회에 왜 들어갔는지, 정치를 왜 하는지, 알 바가 없으니까. 아는 바가 없죠.”
 
  ― 20대 국회 때 유승민 의원이 먼저 손을 내밀고 ‘국회에 잘 왔다’…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나요.
 
  “없지. 전혀 없지. 그 친구들은 대학 다닐 때도 문제의식이 저하고 많이 달랐지.”
 
  ― 어릴 때 국회의원이 꿈이었습니까.
 
  “전혀. 나는 학자입니다. 그래서 이론… 유신체제를 극복하는 이론, 카를 슈미트 이론을 완전히 극복하고 정상적 입헌국가를 만드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였어요.
 
  사실, 역대 정권에서 (입각) 제안을 수도 없이 받았어요. 일절 거부하고, 학문적 작업이 워낙 어려우니까, 이걸 평생 하겠다 생각했어요. 누가 대법관을 하든, 장관을 하든, 국회의원을 하든, 누군가 하면 되는 것이고, 문제는 이론이 없어서 문제니까, 학계에 남은 것이죠.”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사법연수원 14기 수료)한 그가 법조계에 남지 않고 학계를 택한 것은 당시로선 아주 이례적인 선택이었다.
 
  “내 동기들이 다들 ‘머리가 돌았냐’ 그랬어요. 그땐 교수 하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변호사를 하지, 거꾸로 공부하겠다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거든요. 그러나 나는… 유신 때 대학을 다니면서 ‘가장 이상적인 헌법을 설계해보겠다’, 그런 꿈이 있었어요. 친구들은 나를 이상주의자라고 했어요. 이상주의자니까 내가 말하면 설득력이 있었어요.”
 
  ― 나름대로 헌법 연구에 실력을 발휘하신 거죠.
 
  “저 나름대로는…. 민주화 이후 활동했던 많은 이 중에 저를 아는 이가 많죠. 지금 민주당 의원도 절반 정도는 (학계 때부터) 알죠. 국내 헌법학자 중에서도 상당히 개혁적이었으니까.”
 
 
  “저도… 후회막급이죠”
 
  ― 막상 국회의원을 해보니 어떻든가요.
 
  “당신은 뭐 했냐고 하면 나도 제대로 한 것이 없으니까. 허허허. 정치판이라는 게… 허허허, 말과 달라서 처음 와보면 1~2년은 배워야지, 이 상황을 알 수가 없죠. 게다가 전대미문의 탄핵까지…. 정당개혁을 말하면, ‘저 사람은 여전히 학자구나’ 생각하는 식이지.”
 
  ― 학자들은 으레 형이상학 이야기만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이 판이 그런 판이니까.”
 
  ― 나름대로, 형이하학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는데 탄핵 탓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현실 정치… 이 정치판 자체가 상당히 비합리적 구조입니다. 참으로 무얼 하기가 굉장히 어렵죠.”
 
  ― 그럴 줄 몰랐습니까.
 
  “나는 진짜 이 정도로, 이 정도로 혼탁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정말로 국회에 들어가서 개혁 입법을 하고, 권력구조도 새롭게 논의하고…, 그다음에 다가올 미래에 국가를 어떤 식으로 운영할 것인지… 그런 큰 논의를 국회에서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이건 완전히… 누구 말마따나 진흙 바닥에….
 
  그러니 뭐, 저 같은 사람이 정치판에 별 필요가 없는 것이죠. 여기서는 인풋(input) 대비 아웃풋(output)의 효과를 봤을 때는 아웃풋이 안 나오는 판이라고 봐야지요.”
 
  “불출마하니 가족 반응이 어땠나” 물으니 “원래 찬성을 안 했으니까요”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답답한 게, 이런 것이죠. 사람들은 말하기 좋아서, 당시 우예 보면(어찌 보면), 탄핵 요건도 제가 제일 잘 알죠. 내가 연구한 분야가 헌법재판인데.
 
  그런데 당시엔 완전히 친박 프레임이 있었잖아요. 무슨 말을 해도 ‘저 사람, 친박이다’, 그래서 전혀 설득력이 없었어요. 속앓이를 오래 했는데, 당시 서울 법대에만 있었어도 국민에게 설득력 있었을 텐데, 정치판에 오니, 완전히 진짜…, 무슨 말을 해도 전혀 먹혀들지 않고…. 그때는 참… 후회도 한계도 많이 느꼈죠. 그렇다고 이쪽에서 친박·비박 싸움을 중재할 입장은 아니고, 그런 선수들(중진 의원)은 따로 있는 거니까. 말만 하면 친박이라 하니까. 만날천날(언제나) 비난 대상밖에 안 되니까. 저도… 후회막급이죠.”
 
  ― ‘정종섭’에 대한 기대가 컸으니까요.
 
  “그런 기대가 있었을 텐데, 얼마나 미안한지…. ‘저 사람이 국회의원 하면서 저런 역할밖에 못 하나’고 누구나 그런 얘기를 할 텐데…. 패거리 정치 싸움이 이런 구조인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전혀 몰랐고…, 그래서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않으면 나 아니면 누구든지, 좋은 생각을 가지고 들어와 봐도 결국엔 그 판에 매몰되지 않겠어요? 이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기자 양반) 한번 들어와 보세요, 허허허.”
 
 
  “YS가 보기에 ‘젊은 친구가 희한하다’ 싶은 거지”
 
정종섭 의원은 2019년 2월 국회에서 열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기’ 세미나에 토론자로 참석해 “국회가 책임지고 새 정치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종섭 의원은 20대 국회를 ‘참회’하기 앞서 자신의 30대 시절을 되돌아봤다.
 
  당선자 시절의 YS를 만나 국가개혁을 설명했고, 또 개혁설계를 도맡았다. 지금의 청와대 국정상황실도 그가 고안했다고 한다.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하려 했으면 30대 때 했을 것”이라고 했다. “헌법재판관을 역대 정부에서 세 차례 제안받았다”는 말도 했다.
 
  “30대 중반에 국가 설계를 하다가 YS에게 특별검사제 도입을 제안했어요. 사실은 노태우 정권 말기에 처음 특검 이야기를 했죠. YS 정부 때 안 받아들여졌다가 DJ 정부 와서 시행됐는데 ‘옷로비 사건’ 때 처음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돼버렸어요. 단일 사건 중심으로 특검법을 만든 거지. 세상에 그런 특검법은 없어요.”
 
  ― 상시 특검이 아닌….
 
  “그렇죠. 원래 그런 법인데, 한 사건을 위해 하나의 법을 만든다는 게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거지.”
 
  ― ‘제2 건국’이란 용어도 만들었다면서요.
 
  “YS에게 ‘혁명에 준하는 개혁’ ‘중단 없는 개혁’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제2 건국을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제2 건국’이란 용어도 제가 만들었죠. YS 말기에 본격적으로 그 용어를 쓰고, DJ가 받아서 다시 쓴 것이죠.
 
  YS 때 정부개혁, 정치개혁, 권력구조 개혁, 안기부 개혁… 전부 내가 설계한 걸 대통령께 보고한 것이죠. YS가 보기에 ‘젊은 친구가 희한하다’ 싶은 거지. 그때 나온 사법개혁안 중에 ‘컴퓨터 재판’이 있었습니다. 요즘 AI(인공지능)가 훨씬 나오기 전에요. 저게 무슨 소리냐고 다들 반대하지 않았겠어요? 모든 판결을 데이터화하면 저는 된다고 봤어요. 예를 들어 법정 형량이 5~25년까지 있더라도 대한민국 법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선 검사 구형 10년, 1심 10년, 2심 10년을 선고해야 정의로운 사회가 됩니다. 변호사가 뭘 먹고사느냐고 하겠지만, 저는 변호사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전 세계에 형량 깎아 변호사 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어요.”
 
  ― 변호사가 유무죄를 다투는 것은 가능해도….
 
  “당연하죠. 법적 지식을 파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YS 때 그걸 제안하며 ‘(모든 판결을) DB해서 하자’고 했는데 무산됐어요.”
 
  ― 이후 양형(量刑)위원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나요.
 
  “양형위가 대법원에 만들어졌는데 (양형의) 그물코가 너무 커요. 아직 법제화가 안 돼 있어요. 판사들의 권한이 없어진다고 해서. 앞으로 인공지능을 시스템화시키고 그물코를 촘촘하게 하면 결국 형사재판에서 전관예우 변호사에게 돈 쓰는 일도 없어진다고 봐야지요.”
 
  그러더니 기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로스쿨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로스쿨을 국가개혁 과제로 주장하다가 DJ 때까지 계속 무산이 됐잖아요. ‘인간이 된 다음에 판사를 해야지, 고시촌에 앉아 공부하다 판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로스쿨 가기 전에 고시과목이 아닌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했었죠.
 
  YS와 DJ 때 두 번 정도 추진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 현실과 안 맞다 생각해서 (로스쿨 도입 주장을) 철회했습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설 때는 로스쿨 도입을 반대했거든요. 후배들이 그래요. ‘정 선배, 완전히 보수로 돌아섰다’고요. 그때 말했어요. ‘보수가 아니라 부작용이 더 크다. 그래서 자신 없다’고 했는데 노 대통령이 사법개혁이란 이름으로 로스쿨을 만들었어요. 보세요. 벌써 부작용이 생겨나고 있어요.”
 
 
  “평생 이 짓을 한다? 완전히 패가망신하는 거지”
 
  청와대 국정상황실 개념도 정 의원이 구상했다.
 
  “YS 때, 그러니까 제 나이 30대 중반에 설계한 겁니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로 바로 건너왔기에 개혁의 헤드쿼터를 청와대에 둘 수밖에 없었어요. 국가 전체에 이르는, 사실상의 건국 작업이기에 대통령이 그 방(국정상황실)에 들어가 24시간 브리핑을 받아야 했어요.
 
  국정상황실장은 국가 전체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통령이 언제라도 물으면 사법개혁이 얼마 진척되고 있고, 노동개혁은 얼마, 교육개혁은 얼마 진척되는지 상황판을 보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국정상황실이 당초 계획대로 작동이 안 됐잖아요. 이름만 그렇게 해놨지….”
 
  ― 그때 직접 국정에 참여했더라면 YS 정부도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때 (참여)했다면 패가망신했겠죠.”
 
  ― 아니죠. 달라질 수도 있었겠죠.
 
  “나이가 들어 정치판에 와서도 이럴 줄 몰랐는데, 하물며….”
 
  ― 늘 여의도를 관찰하며 정치개혁을 연구하셨을 텐데….
 
  “그래도 이 정도일 줄 전혀 몰랐어요. 왜냐면 국회에 와도 사람들 만나고 세미나 참석하고 그랬지, 이럴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그런데 30대 들어왔다고 생각해보세요. 평생 이짓을 한다? 완전히 패가망신하는 거지.
 
  어쨌든 저는 현실 정치에서 너무 많이 실망하고… 거의 절망적인 수준이니까.”
 
  ― 앞으로 변호사 활동은 하실 거죠.
 
  “우선 못 보던 책을 읽고, 쓰고 싶은 책도 많고…. 탄핵문제도 분석하고 정돈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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