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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어제오늘내일

朴枝香 서울대 명예교수

“아일랜드인들, 경제발전하면서 영국에 대한 콤플렉스 벗어나”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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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은 일본의 아일랜드’… 감성적 국민성, 이웃한 강국에 의한 식민지배 경험 등 비슷
⊙ 영국인은 아일랜드인을 ‘하얀 검둥이’, 일본인은 한국인을 ‘꼬까옷 입은 아이누’라고 멸시
⊙ 아일랜드, ‘부활절 봉기’ 등 ‘피의 희생’ 거쳤지만, 1922년 ‘에이레자유국’ 수립으로 영국과 타협… 자유국파와 강경독립파 사이에 內戰 겪어
⊙ 독립 후 ‘神政主義’라고 할 만한 극단적 민족주의 득세… 1970년대 이후 수정주의 역사학 대두, EU 가입 등 겪으면서 민족주의 희석
⊙ “아일랜드인들, 더 많은 일자리와 富가 ‘영광스런 가난’보다 훨씬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인정”

朴枝香
1953년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미국 뉴욕주립대 철학박사 / 미국 뉴욕 프랫대 조교수, 인하대 조교수, 서울대 교수, 同 중앙도서관장, 한국영국사학회장, 국사편찬위원 역임 / 저서 《클래식 영국사》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대처 스타일》 《정당의 생명력: 영국 보수당》 《근대로의 길》 《제국의 품격》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일그러진 근대》 《슬픈 아일랜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편저) 등
사진=서경리
  “조선은 우리의 아일랜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도쿄(東京)대 총장을 지낸 일본의 자유주의 학자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가 1920년대에 한 말이다. 야나이하라가 아니더라도, 일제(日帝)시대 이후 ‘조선은 동양의 아일랜드’라는 말은 널리 회자(膾炙)됐다.
 
  그의 말처럼 한국과 아일랜드는 참 닮은 구석이 많다. 감성적인 국민성도 그렇거니와, 이웃한 제국(帝國)의 식민지배라는 질곡(桎梏)을 민족적 자존심 하나로 버텨냈다는 점도 비슷하다. 해방 후에도 옛 식민 모국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는 점도 흡사하다. 1950년대에 한 아일랜드 작가는 “내가 연애를 못 하는 것도 영국 놈들 탓”이라고 투덜댔다고 한다. 에이레자유국 수립으로 사실상 독립을 쟁취한 지 한 세대가 지난 후였지만, 700여 년간 속박과 지배를 받은 원념(怨念)은 그렇게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2005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아일랜드 국민의 60%가 영국을 ‘가장 잘 통하는 나라’로 여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과 여당이 앞장서서 ‘오늘의 대한민국은 다릅니다. 다시는 지지 않습니다’라며 반일독전(反日督戰)을 하고, ‘독립운동은 못 했지만 불매운동은 합니다’라며 죽창을 든 동학농민군이라도 된 양 반일전선으로 달려 나가는 오늘의 대한민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다. 도대체 그동안 아일랜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한일관계에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 박지향(朴枝香·66) 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를 만났다. 박지향 교수는 영국사 연구의 권위자로 2002년에는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 아일랜드 태생 작가들을 통해 영국과 아일랜드 관계를 들여다본 책 《슬픈 아일랜드》를 펴낸 바 있다.
 
  지난 8월 5일 서울대 인문대학에 있는 박지향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책장이 거의 비어 있는 것이 이사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박 교수는 “작년에 정년(停年)을 했고, 후임자도 뽑았기 때문에 오는 8월 20일까지 방을 비워줘야 한다”며 웃었다.
 
 
  혈통보다 종교
 
  ― 아일랜드 역사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습니까.
 
  “영국사를 하다 보면, 영국사의 가장 중요한 장면인 영제국(英帝國)을 안 다룰 수 없지요. 그러다 보니 일본 통치를 경험한 입장에서 제국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가 일본과 한국 관계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1920년대에 야나이하라가 ‘조선은 우리의 아일랜드’라고 했다는데,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어요.”
 
  ― 야나이하라는 무슨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요.
 
  “바로 옆에 있는 강대국에 의해 정복당하고, 멸시당하고, 그러면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의미에서였겠죠.”
 
  ― 《슬픈 아일랜드》의 서문을 보니 ‘아일랜드의 역사에서 우리의 역사를 읽었다’는 말이 나오더군요. 한국과 아일랜드의 역사가 어떤 점에서 그렇게 닮았던가요.
 
  “역시 지리적으로 이웃해 있는 강한 나라의 식민지가 됐다는 점이겠지요. 다른 하나는 한(恨)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한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모르지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한을 우리 정서의 핵심으로 꼽았잖아요. 그 한과 비슷한 정서가 아일랜드 사람들에게도 있어요. ‘우리는 대단히 순수하고 순결한 민족인데, 악랄하고 포악한 이웃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고 산다’는 식의 정서….”
 
  ― 한국과 아일랜드의 다른 점은 어떤 게 있을까요.
 
  “우리는 민족 정체성(正體性)에서 종교가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는데, 아일랜드는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절대적 역할을 했다는 게 다르죠.”
 
  아일랜드에서 민족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혈통보다 종교가 더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아일랜드의 복잡한 민족 구성 때문이다. 아일랜드에는 기원전 5세기 이후 아일랜드에 뿌리내린 게일(켈트)인 말고도 11세기 노르만의 침략 이후 건너와 게일인들과 동화된 구(舊)잉글랜드인(Old English), 17세기 이후 건너와 지배층으로 군림한 신(新)잉글랜드인(New English), 그리고 역시 17세기 이후에 건너와 주로 북아일랜드(얼스터)에 정착한 스코틀랜드계 신교도(얼스터 스코틀랜드인)들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 이후 아일랜드 민족운동의 주체가 되고,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을 이끄는 것은 ‘영국(잉글랜드)계 아일랜드인’이라고 통칭되는 신잉글랜드인이었다.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조너선 스위프트, ‘보수주의의 아버지’ 에드먼드 버크, 워털루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하고 후일 영국 총리를 지낸 웰링턴(아서 웰즐리), 그리고 19세기 말~20세기를 풍미한 작가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도 신잉글랜드인이었다.
 
 
  영국과 일본
 
  ― 제국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영국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는 어떻게 달랐습니까.
 
  “《일그러진 근대》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근대화(近代化)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할 때에는 제국주의가 전(全) 세계적 이념이었어요. 일본 사람들은 근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들도 영국 등 앞서간 선진국들처럼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계획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편 거지요.
 
  반면에 영국은 계획적으로 제국이 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원하지 않았는데 제국이 형성됐어요. ‘방심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제국’이라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 메이지(明治)시대 일본사를 보면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영국을 롤 모델(role model)로 간주했더군요.
 
  “일본은 같은 섬나라인데다가 왕정(王政)국가라는 점에서 영국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면서 ‘아시아의 영국’을 자처했지요.
 
  일본 사람들은 홋카이도·오키나와·타이완 등을 장악하고 나서 ‘식민지에서 과연 어떤 통치가 적합한지’에 대해 많이 연구했습니다. 지금도 서울대 구관(舊館)도서관에 가보면 일본어로 된 영국식민통치법, 독일식민통치법에 대한 책들이 많이 있어요. 일본은 그런 연구와 고심 끝에 조선에서 영국식 간접통치방식 대신 프랑스식 동화(同化)정책을 채택하게 되지요.”
 
 
  예이츠의 고민
 
아일랜드문예부흥운동을 이끈 시인 예이츠.
  전래(傳來)의 전설·언어·문화예술에서부터 민족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는 것은 주권(主權)을 상실한 식민지 민족들이 일반적으로 밟는 경로다. 그런데 아일랜드에서는 19세기 말 아일랜드문예부흥운동의 주체는 ‘영국(잉글랜드)계 아일랜드인(신잉글랜드인)’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박지향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잉글랜드계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 혈통을 갖고 태어났지만 수백 년 동안 아일랜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자기가 태어난 땅에 대한 애정을 함께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죠. 이런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이중적 정체성에서 비롯된 고뇌가 아일랜드문예부흥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평온한 환경 속에서는 훌륭한 예술이 태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굉장히 심각한 갈등 속에서 그런 뛰어난 문학 작가들이 태어나는 것이겠죠.”
 
  아일랜드문예부흥운동의 주도자 중에는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로 유명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도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민족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지만, 점차 ‘민족운동을 위해 복무하는 예술’을 요구하는 가톨릭 게일민족주의와 거리를 두게 됐다. 1922년 에이레자유국 수립 후에도 그는 ‘신정정치(神政政治)’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예술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가톨릭교회와 게일민족주의자들의 전제(專制)에 항거했다. 예이츠가 고민하던 당시 시대 분위기는, 언필칭 민주화시대라면서 일제하 ‘식민지 근대화’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지적(知的) 토론을 떼(다중·多衆)나 관제(官製) 언론, 사법(司法)의 힘으로 억누르려 드는 오늘의 한국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 예이츠의 고민에 공감이 많이 가더군요.
 
  “예이츠는 기본적으로는 귀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에요. 젊었을 때에는 청년다운 혈기와 모드 곤(1866~1953·민족주의 성향의 아일랜드 여배우)에 대한 사랑 같은 게 합쳐져서 아일랜드 대중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인생 후반에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엘리트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으면서 결국 엘리트주의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문에 한때는 파시즘에도 눈길을 돌렸죠.”
 
  ― ‘에이레자유국의 신정정치’라는 말이 있던데, 얼마나 심했기에 그런 말이 다 나왔습니까.
 
  “가톨릭교회가 압도적으로 사회 모든 면에 침투·간섭했고, 교육도 거의 가톨릭교회가 담당했지요. 신정국가이면서 지독하게 민족주의를 강요했지요. 거의 아무도 안 쓰는 게일어를 국어로 강요하면서,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게일어를 강제로 교육하고, 방송도 게일어로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버나드 쇼, 와일드, 예이츠 등은 모두 영어로 글을 썼습니다. 영어로 글을 쓰면서도 얼마든지 아일랜드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었는데 말이죠. 쇼는 ‘영어로 글을 쓰면 전 세계의 독자를 갖는 것’이라면서 편협한 게일민족주의에 반대했어요.”
 
  ― 지금 아일랜드에서는 어떻습니까.
 
  “게일어와 영어가 공용어예요.”
 
  ― 일상어로는 어느 쪽을 많이 쓰나요.
 
  “당연히 영어를 많이 쓰죠. 공용어니까 도로 표기 같은 건 게일어와 영어로 되어 있지만…. 신문도 영국 신문을 많이 읽어요. 가판대에는 영국 신문들이 쫙 있고 아일랜드 신문들이 그 옆에 있어요.”
 
 
  ‘부활절 봉기’
 
1916년 ‘부활절 봉기’ 후의 더블린 시내. 부활절 봉기 이후 아일랜드인들은 자치에서 독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쯤에서 앞으로 나올 인터뷰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역사를 미리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2세기 말 헨리 2세의 정복 이후 아일랜드는 750여 년간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았다. 특히 1649~1652년 올리버 크롬웰의 정복과 학살, 1845~1851년 아일랜드 대기근, 1789년 울프 톤의 무장봉기는 아일랜드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19세기 중반 이후 다니엘 오코넬, 찰스 파넬 등이 ‘영국 국왕의 왕관 아래’ 독자적인 의회와 정부를 복원하자는 자치(自治)운동을 벌이면서 아일랜드 민족운동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1800년 합병 이래 아일랜드에서는 의원들을 선출, 영국 의회에 보내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파넬이 이끄는 아일랜드자치당은 보수당과 자유당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이 점에서 아일랜드는 일체의 참정권(參政權)을 부정당했던 일제하 한국과는 많이 달랐다. 덕분에 1886~1912년 세 차례에 걸쳐 아일랜드자치법안이 의회에 상정됐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무산됐다. 이 무렵 파넬이 오셰이 부인과의 불륜(不倫) 문제로 실각(失脚)하면서 정치적 자치운동이 위기에 빠졌을 때 예이츠 등은 문화민족주의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일랜드문예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제1차 세계대전 와중인 1916년, 제임스 코널리 등이 이끄는 아일랜드공화국형제단(IRB)은 더블린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아일랜드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이것이 유명한 ‘부활절 봉기’다. 76명의 봉기군을 비롯해 45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봉기세력이 적국인 독일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영국 당국은 봉기 지도자 15명을 총살해버렸다.
 
  이것이 아일랜드인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실시된 총선에서 강경독립파인 신페인당은 아일랜드 의석 중 73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들은 웨스터민스터에 있는 영국 의회에 등원(登院)하는 대신 더블린 시의회 청사에 모여 ‘아일랜드의회’를 자처하면서 1916년 ‘부활절 봉기’ 때 수립을 선포한 아일랜드공화국을 추인(追認)했다.
 
  ‘부활절 봉기’ 지도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에이먼 데 벌레라(1882~1975)는 총리가 되어 미국 여러 도시를 순방하면서 미국과 국제사회를 향해 아일랜드의 독립을 호소했다. ‘현대 도시게릴라전의 원조(元祖)’라고 불리는 마이클 콜린스(1890~1922)는 아일랜드 내 영국 정부 시설 및 군경(軍警)을 공격했다. 영국도 무자비한 보복으로 맞섰다.
 
 
  內戰
 
  1919년부터 2년여에 걸친 독립전쟁 끝에 영국과 아일랜드는 평화협상에 들어갔다. 영국에서는 거물 정치인인 로이드 조지와 윈스턴 처칠이 나섰다. 아일랜드에서는 처음에는 데 벌레라가 나섰지만, 얼마 후 마이클 콜린스로 교체됐다. 양측은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元首)로 하되 내정(內政)에서 독립국에 준하는 자치를 누리는 에이레자유국 수립에 합의했다. 다만 신교도들이 다수(多數)인 북아일랜드(얼스터)는 영국에 잔류하기로 했다.
 
  하지만 데 벌레라 등 강경파들은 완전 독립과 통일을 요구하며 합의에 반대하고 나섰다. 1922~1923년 이들과 마이클 콜린스 등 자유국 지지파 사이에 내전(內戰)이 발발(勃發)했다. 자유국 측 지도자인 마이클 콜린스는 내전 중 암살당했지만, 결국 자유국 지지파가 승리했다. 내전에서 패한 후 1년간 투옥됐던 데 벌레라는 1932년 ‘피아나 페일(아일랜드공화당)’을 이끌고 총선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았다. 이후 데 벌레라가 이끄는 에이레 정부는 영국과의 연계를 하나씩 끊어나가다가 1949년 영연방(英聯邦)에서 탈퇴, 아일랜드공화국으로 완전 독립했다.
 
  박지향 교수는 “아일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 에이레자유국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발생한 1922~1923년의 내전”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이 싸웠는데, 아일랜드에서는 민족문제를 둘러싸고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현실적으로 ‘이제 영국과 화해할 때다’라는 사람들과 끝까지 가서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람들 간의 갈등이었지요.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일랜드가 그렇게 오랫동안 영국으로부터 고통을 받았고, 민족운동을 벌였음에도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그 시점에서 영국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마이클 콜린스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입니다.”
 
 
  로이드 조지의 푸념
 
  ― 아일랜드 사람들이 그런 현실적인 판단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활절 봉기’와 영국과의 무력(武力)투쟁 등을 겪으면서 사람들이 지쳤던 거지요. 영국에 대해서만 지친 것이 아니고, 민족운동 내에서 소수(少數)의 극단주의자가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지친 것이지요. 그래서 ‘이 정도면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었다. 이제 그만하자’고 한 것이죠.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요. 요즘에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어느 한쪽이 100% 얻고 어느 한쪽이 100% 잃고 이러는 것은 협상이 아니에요. 적절히 타협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 아일랜드 사람만 못해요.”
 
  박지향 교수의 《슬픈 아일랜드》를 보면, 데 벌레라와 협상을 벌인 로이드 조지의 푸념이 나온다.
 
  “나는 잉글랜드가 아일랜드에 저지른 사악한 일들, 특히 크롬웰이 저지른 죄악에 대해 긴 강의를 듣고 왔소. 당면한 현안을 거론하려 할 때마다 그는 크롬웰에게로 돌아갔다오.”
 
  이 이야기를 상기시키자, 박 교수는 깔깔대고 웃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하고 아일랜드 사람들이 똑같아요. 그래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좀 나은 것 같아요.”
 
  ― 한국인과 아일랜드인 모두 이성(理性)보다 감성이 앞선다고 말하는데, 어느 쪽이 더 감성적인 것 같습니까.
 
  “거의 비슷해요, 거의 비슷해. 야나이하라가 ‘조선은 우리의 아일랜드’라고 한 게 진짜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일본이 영국을 통해 많이 배워서인지, 그들이 우리에게 쓴 표현도 비슷합니다.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인들을 ‘하얀 검둥이’라고 했는데,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꼬까옷 입은 아이누’ ‘두 발로 서서 걷는 원숭이’라고 했어요. 이런 표현들은 아마 영국인들이 아일랜드인을 지칭하는 표현을 차용(借用)한 것 같아요.”
 
 
  데 벌레라와 마이클 콜린스
 

  ― 아일랜드의 민족주의는 역시 데 벌레라 집권 이후 심해진 건가요.
 
  “그렇죠. 자유국 초기부터 민족주의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때는 신정국가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자유국 정부 인사들은 그렇게 과격하지 않았어요. 데 벌레라 집권 후 철저한 신정국가 체제로 이행한 것이죠.”
 
  ― 마이클 콜린스와 데 벌레라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데 벌레라가 40여 년간 장기(長期)집권했으니 대중적 인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존경하는 건 콜린스입니다.”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대중화한 찰스 파넬. 영국계 아일랜드인이었다.
  ― 아, 그렇습니까.
 
  “데 벌레라는 대단히 포퓰리스트적인 사람이었어요. 진정으로 아일랜드 국익(國益)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콜린스죠. 콜린스는 비전과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이었어요. 그 당시 영국과 협상하고 그걸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콜린스는 영국과의 협상을 마친 후 ‘내가 이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해야 한다’고 했어요. 아일랜드 입장에서 보면 영국이 얼마나 미웠겠어요. 정말 대단한 거죠.”
 
  마이클 콜린스가 협상 타결 후 한 말은 유명하다.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오늘 아침 나는 나의 사형선고장에 서명하였음을. … 그러나 이 서명은 아일랜드를 위한 첫 번째 참다운 걸음이다.”
 
  ― 아일랜드에서는 자유국 시절이나 데 벌레라 시절에 친영파(親英派) 청산 문제가 제기되지는 않았습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우리하고는 다른 게 아일랜드 민족운동에서는 가톨릭계하고 영국계 아일랜드인(신잉글랜드인)이 섞여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처음으로 대중운동으로 만든 사람이 찰스 파넬인데, 그 역시 영국계 아일랜드인이었습니다. 아일랜드 민족운동에서 영국계 아일랜드인의 존재를 결코 지울 수 없어요. 우리가 ‘친일파(親日派)’라고 규정하는 것처럼 이분법적으로 ‘친영파’라고 구분할 수 없는 것이죠.”
 
 
  ‘피의 희생’이라는 신화
 
  박지향 교수는 “아일랜드 역사를 보면서 가슴 아팠던 것 중 하나가 ‘피의 희생’이라는 신화(神話)”라고 말했다.
 
  “1798년 봉기나 1916년 부활절 봉기에 나선 아일랜드인들은 자기들이 패배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모습이, 그 속에 내포된 희생이라는 것이, 참 어리석으면서도 애절해요.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일제시대에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 반역자라고 보는 것 같아요.”
 
  ― 솔직히 일제시대에 살던 조선인의 90%는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친일을 했을 것 같은데, 요즘 우리 국민의 90% 이상은 자기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치호(尹致昊)는 그런 식의 ‘피의 희생’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에요. 그는 ‘피의 희생’을 하려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생각했지만, 막지는 않았습니다. 윤치호는 ‘그 사람은 그 방식으로 애국을 해라, 나는 내 방식으로 애국을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 윤치호의 애국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계몽이었지요. 결국은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지식을 얻고, 근대화해야 일본이라는 나라를 대적(對敵)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나는 오래 걸리더라도 계몽으로 가겠다. 교육이 우선이다. 모든 방법이 다 애국의 길이다, 어느 길이 더 낫다고 강요하지 말라’는 게 윤치호의 입장이었어요.
 
  아일랜드의 신페인 같은 사람들도 ‘우리 길만 옳다’고 주장했죠. 요즘 일제시대를 바라보는 시각도 ‘일단 무력투쟁한 사람들만이 옳다’는 거예요. 무력투쟁 아닌 다른 방법으로 애국한 것은 애국이 아니었다고 하니….”
 
  ― 아일랜드 민족운동 과정에서 농촌을 민족공동체의 원형(原型)으로 이상화(理想化)한 것이, 독립 후 자립(自立)경제를 과도하게 추구하면서 경제적 낙후를 불러온 원인 아니었을까요.
 
  “그렇지요. 결국 농촌에 대한 신화 때문에 그런 낙후된 농촌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아일랜드의 극작가 존 M. 싱(1871~1909)이 〈서쪽 지방의 한량〉에서 그런 신화를 깨고 농민들의 간교함과 어리석음,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냈다가 난리가 났었죠. 우리도 그런 식의 신화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걸 깨야 합니다.”
 
  ― 어떤 신화를 말하는 건가요.
 
  “예를 들면 조선시대 말의 가장 큰 신화 가운데 하나는 민비에 대한 신화라고 할 수 있겠죠. 내용은 하나도 없는데, 그걸 명성황후니 뭐니 하면서….”
 
 
  수정주의 역사학
 
  박지향 교수의 《슬픈 아일랜드》에서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아일랜드에서는 일찍이 1930년대부터 희생자 중심적·민족주의적·영웅주의적 역사인식에 맞서는 수정주의(修正主義) 역사학이 대두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영국이 아일랜드인들의 토지를 빼앗고 아일랜드 농민들을 수탈했다거나, 영국의 지배는 악(惡)이고 그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은 선(善)이라는 식의 역사인식에 도전했다. 1970년대의 수정주의 역사학자 코너 크루즈 오브라이언은 ‘영국과 신교도가 아니라 아일랜드 가톨릭 민족주의야말로 북아일랜드 폭력사태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면 ‘친일파’로 낙인찍히는 오늘날 한국과는 천양지차다.
 
  ― 아일랜드에서는 자유국 시절인 1930년대에 이미 민족주의 역사학에 도전하는 수정주의 역사학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가 주장했던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던 거죠. 하지만 그때는 시대 분위기 때문에 상당히 미미했어요.
 
  당시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아일랜드에 대해 ‘자기 자식을 집어삼키는 암퇘지와 같다’고 비판했어요. 그는 아일랜드를 무척 사랑했지만, 신정주의 체제 아래서 숨 막히는 분위기가 싫었던 것이죠. 그는 결국 아일랜드를 떠났습니다. 민족과 국가가 모든 것을 관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수정주의 역사관이 설 땅은 좁았던 것이죠.”
 
  ― 그래도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그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런 목소리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일랜드에서 수정주의 역사학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은 1970년대 이후였습니다. 이는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북아일랜드 사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폭력사태로 사람들이 막 죽어 나가는 상황 속에서 일단의 사학자들이 ‘피의 희생’이라는 신화를 깨뜨려서 어리석은 ‘피의 희생’을 멈추게 하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가지고 수정주의 운동을 시작하게 된 거죠. 마침 1970년대에 아일랜드가 EC[유럽공동체·이후 EU(유럽연합)로 발전]에 가입한 것이 수정주의 확산에 무척 도움이 됐습니다.”
 
 
  아일랜드 디아스포라가 역사학에 미친 영향
 
  ―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EC(EU)에 가입하면서 ‘섬나라 근성’이랄까, 그런 게 서서히 엷어지기 시작한 거죠. 유럽이라는 더 큰 구도 안에서 아일랜드를 보게 되면서, ‘알고 보니 폴란드 같은 나라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우린 별거 아니네’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러면서 객관적으로 역사를 보게 된 거죠. ‘영국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아일랜드를 탄압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보니 그 희생자는 얼마 안 되더라’는 식의 자각도 생겨났습니다. 실제로 1919~1921년 독립전쟁 중 가장 극렬하게 투쟁하던 시기에도 아일랜드인 사망자는 40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겹치면서 1970년대의 수정주의 역사학은 크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 인상적인 것은 수정주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 간의 논쟁이 학문적 토론으로 해결됐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조국(曺國) 전 민정수석비서관(법무부 장관 지명자)이 《반일종족주의》의 저자인 이영훈(李榮薰) 전 서울대 교수 등을 ‘친일파’라고 비난한 것과는 대조적이죠.
 
  “조국씨가 그랬나요?”
 
  ― 페이스북에 《반일종족주의》 몇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런 걸 친일파라고 안 하면 누굴 친일파라고 하겠느냐’는 식의 얘기를 했습니다. 학문적으로 토론해야 할 것을 학문 외적인 수단으로 찍어 누르려 드는 거죠.
 
  “맞아요. 우리의 민도(民度)가 아직…. 학문 내에서 먼저 활발하게 토론이 진행되어야 하는데, 국사학계가 그걸 못 하고 있어요. 젊은 국사학자들 가운데서 조금 자각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데, 일자리가 걸려 있다 보니 감히 나서지 못하는 것 같아요.”
 
  ― 사학과가 국사학과, 서양사학과, 동양사학과로 나뉘어 있는 것이 국사학과의 폐쇄성을 더욱 강화하는 것 같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수정주의 역사학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아일랜드 디아스포라[diaspora·해외로 이산(離散)해 거주하는 민족공동체]의 영향이 큽니다. 미국·영국 등지에서 활동하는 아일랜드계 학자들이 객관적으로 역사를 썼고, 그것이 아일랜드로 역수입(逆輸入)되면서 영향을 준 것이죠. 우리는 그런 게 없어요.”
 
  ― 우리에게는 EC(EU) 가입이나 해외 디아스포라처럼 한발 떨어져서 자신의 정체성을 되돌아볼 만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걸 대체할 만한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앞으로 세계화(世界化)가 계속 진행되면서 우리가 세계와 더욱 엮이게 되면, 한반도라고 하는 폐쇄적인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도 시각이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내에 아직도 그런 흐름에 거역하는 세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대세인데 어쩌겠어요?”
 
  ― 저도 해외여행을 하다가 젊은이들을 만나면 거기서 희망을 봅니다만, 이번에 젊은이들마저 반일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걸 보면서 낙담했습니다.
 
  “(깔깔 웃으며), 그래도 20대 젊은이들은 확실히 40대, 50대와는 달라요.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민족감정을 악용(惡用)하는 게 문제죠. 정치하는 사람들이 악용하는 것만 끝나면 다시 그런 프로세스로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나도 일본인 친구들을 만나러 여러 차례 일본에 가보았어요. 제 친구들 말고 동네 사람들 같은 경우는, 처음에는 ‘간고쿠(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본 척도 안 했어요. 그다음에 일본에 갔을 때에는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한국 사람을 보고 싶어서 왔다’며 찾아오더군요. 마지막 갔을 때에는 ‘내가 한국말을 배웠는데, 조금이라도 대화를 하고 싶다’면서 찾아왔어요. 이게 한 20여 년 동안에 일어난 변화인데, 그 차이는 엄청나요. 그걸 이 정부가 너무 모르고 있어요.”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對英 콤플렉스 극복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거리의 모습. 아일랜드인들은 경제성장과 함께 영국에 대한 오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있다. 사진=조선DB
  독립 이후 아일랜드는 다른 많은 신생 독립국처럼 전래의 농촌경제를 바탕으로 자립 경제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 이후 개혁·개방을 단행하고 외자(外資)를 과감하게 도입하면서 경제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켈틱 타이거(Celtic Tiger)’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재정 위기 이후 한때 비틀거리기는 하지만 곧 회복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1인당 GDP(국내총생산)에서 아일랜드가 옛 식민 모국이었던 영국을 추월했다는 점이다. 세계은행의 2018년 추정치에 의하면 아일랜드의 1인당 GDP는 7만6099달러(4위), 영국의 1인당 GDP는 4만2558달러(19위)로 나타났다. 물론 인구가 480만명 남짓한 소국(小國)으로 외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아일랜드 경제의 특성을 감안할 때, 아일랜드의 경제력을 과대평가해서는 곤란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독립한 나라 중에서 1인당 GDP에서 과거의 식민 모국을 추월한 나라는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아일랜드뿐일 것이다.
 
  ― 아일랜드는 어떻게 해서 종전의 자립경제노선에서 벗어나 대외(對外)개방을 단행하게 됐습니까.
 
  “아일랜드는 전통적으로 영국·EU를 상대로 농산물을 수출하면서 먹고사는 나라였어요. 그런데 1970년대부터 세계경제가 나빠진 여파로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경제 사정이 무척 나빠졌어요. 1985년에는 실업률이 17%에 달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건 아니다. 이렇게 굶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과감하게 개혁·개방을 해보자’는 데 전 국민이 동의하게 됐습니다. 야당이라고 해서 반대하고 그런 거 없었어요.”
 
  ―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특히 영국을 1인당 GDP에서 추월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에 대한 오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결정적이었죠. 복수를 하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일본에 사죄하라고 난리 칠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아지면 되는 겁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문화적, 모든 면에서 더 성숙해지면 극일(克日)이 되는 거겠죠. 그게 가능할까요? 모르겠습니다. 일본은 결코 만만한 나라가 아닙니다.”
 
 
  “여기서 꺾이면 反日 감정 더 커질 것”
 
  ― 《슬픈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인의 94%가 북아일랜드에 대한 영토적 권리를 포기, 즉 북아일랜드와의 통일을 포기하는 것에 찬성하고 있다는 얘기를 보고 놀랐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일랜드는 경제가 계속 발전하고 있는 데 비해 북아일랜드는 정체(停滯)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보는 눈과 비슷한 거죠. 북아일랜드를 끌어안으면 짐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 원래는 북아일랜드가 경제적으로 더 발전하지 않았나요.
 
  “북아일랜드가 훨씬 더 산업화되어 있었죠. 아일랜드는 농업국이었고…. 그게 역전된 거예요. 개방경제·세계경제에 합류한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죠.”
 
  ― 북아일랜드가 정체된 이유는 역시 1960년대 후반 이후의 폭력사태 때문인가요.
 
  “그렇죠.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는데, 누가 거기 가서 투자하고, 공장 세우고, 회사 만들고 하겠어요.”
 
  ― 이제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에 대한 콤플렉스를 완전히 극복한 건가요.
 
  “밑바닥에 아직은 남아 있어요. 그래도 옛날같이 주눅 들고, 영국을 ‘천하의 원수(怨讐)’ 대하듯 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 아일랜드와 영국의 사례에서, 지금의 한일관계와 관련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역시 경제발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풍족해지면 마음도 넓어지는 거고…”
 
  ― 지금 한국은 PPP(구매력환산) 기준으로 1인당 소득이 일본과 2200달러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 한일 간 분쟁으로 여기서 우리 경제가 치명상을 입게 되면, 경제발전을 통해 일본을 극복한다는 꿈이 더 멀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네. 일본은 잘나가고, 우리는 여기서 꺾이면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은 더욱 커지겠지요. 참 문제예요.
 
  이번 정부가 너무 어리석어요. 어리석지 않으면 사악한 거고…. 정권 재창출을 위해 반일감정을 조장한다는 민주당 내부 문건이 나왔다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국익이라는 것을 하나도 생각 안 하는 거예요. 나는 그게 제일 싫어요. 일반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모르겠지만, 공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적(私的)·정파적 이익을 먼저 생각하냐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가요.”
 
  ― 기본적으로 ‘혁명’이라고 하는 정치적 논리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사고(思考)가 저변에 깔려 있는 사람들이죠.
 
  “저는 현 집권세력이 나라를 북한에 갖다 바치려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평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봐요. ‘빈부(貧富)의 격차나 양극화(兩極化) 같은 것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라 경제가 좀 후퇴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죠. 그게 장기적 안목에서 과연 우리나라 서민들에게 올바른 길인지….”
 
  ― 서민들이 제일 먼저 코피 터지겠죠.
 
  “글쎄,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잘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게 되더라도, 서민들도 잘살게 되면 되는 것 아닌가요. 파이를 키워야지.”
 
 
  대처를 미워했던 젊은 시절
 
  이렇게 말하는 박지향 교수도 젊은 시절에는 달랐다.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박 교수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전기(傳記)인 《대처 스타일》에서 이렇게 술회(述懷)했다.
 
  〈1984년, 영국의 광부노조가 그 유명한 파업을 시작했을 때 난 런던에서 박사 논문 자료 수집 중에 있었다. 당시 영국 좌파 지식인들의 지대한 영향하에 있던 나는 마거릿 대처 총리를 격렬히 비난하면서 적은 액수지만 광부노조에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고, 1년의 파업 끝에 노조가 철저히 패했을 때 분노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철이 난 후 생각하니 그처럼 어리석은 짓도 없었다. 이 책은 내 젊은 시절의 환상에 대한 되새김이기도 하다.〉
 
  ― 《대처 스타일》을 보니, 1980년대에 영국에서 공부하던 젊은 시절에는 대처를 무척 싫어했더군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논문을 쓰느라 1년간 영국에서 연구를 했죠. 이후에도 대처 시절 내내 거의 매년 영국을 드나들었어요. 그때는 정말 대처를 싫어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뭣도 모르면서, 정말 뭣도 모르면서 싫어했어요.”
 
  ― 그때 이념적 입장이 어땠나요. 리버럴 정도?
 
  “리버럴도 아니었어요.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에 경도(傾倒)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대처를 싫어했던 것이지요. 미국도 그렇지만 영국 지식인들의 분위기도 압도적으로 좌파였어요. 내가 가까이한 역사학자들도 좌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이어서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죠.”
 
  ― 대처가 왜 그렇게 싫었습니까.
 
  “대처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미워했던 것 같아요. 대처가 뭘 하려는지 정도는 알고서 좋아하거나 싫어했어야 하는 건데….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었는지….”
 
  ― 대처는 뭘 하려 했던 건가요.
 
  “국가의 비대화(肥大化)를 막자는 것이었죠. ‘독립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나라를 다시 만들자’ ‘모든 것을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가 구름 위의 존재인 것처럼 군림하면서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막자’는 게 대처의 생각이었어요.”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탈출
 
  ― 언제쯤부터 좌파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고 대처를 이해하게 됐습니까.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한국에 교수로 올 무렵만 해도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것 같아요. 당시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얘기하면서 ‘역사를 움직인 것은 민중’이라고 강조하고 있었어요. 나도 그런 데 푹 빠졌었고….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고 역사를 더 전반적으로 공부하면서 역사를 더 넓게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보니 역사를 움직이는 건 역시 엘리트들이더군요. 그러면서 마르크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경제적인 것이 전부가 아니라 정신적인 힘이 중요하다는 것 등도 깨닫게 됐습니다. 그게 대략 1990년경이었던 것 같아요.”
 
  박지향 교수는 “사실 1978년 미국 유학을 갈 무렵만 해도 우물 안 개구리였다”고 말했다.
 
  “저도 그때는 한국이 세계에서 빈부(貧富)의 격차가 가장 심한, 최악의 나라라고 생각했어요. 정부에서 경제성장률이 십몇 퍼센트라고 발표해도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죠.
 
  미국 유학 시절 경제사(經濟史) 교수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누가 그러느냐. 한국 정부가 말하는 통계가 가짜라는 걸 네가 어떻게 아느냐’고 정색을 하고 따지는 거예요. 그때 굉장히 당황했어요.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으면서 너무나 편견에 싸여서 보고 싶은 것만 보아왔구나’ 싶더군요. 그런 통계라는 게, 나라에서 조작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나라가 월드뱅크, IMF 같은 데서 돈 얻어 오는 나라인데, 그런 기관에서 한국이 통계조작 하는 걸 넘어갈 리가 없잖아요.
 
  나중에 보니 남아메리카 같은 데는 우리보다 훨씬 형편없더라고요. 정말 ‘이게 나라냐’ 싶더군요.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나 잘하고 있는 나라구나’ 하는 깨달음을 조금씩 얻게 된 거죠.”
 
 
  “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한 나라는 英美뿐”
 
  ―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대처가 추구했던 것과 같은 ‘독립적인 개인에게 바탕을 두는 자유’는 결국 앵글로색슨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맞아요. 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한 나라는 영국하고 미국밖에 없어요. 프랑스나 독일 등에도 영국식 자유주의자들은 있었지만, 굉장히 허약했지요. 예컨대 독일의 역사학자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는 원래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자였지만,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이후에는 돌변해서 독일 국가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국가주의자가 되어버렸지요. 결국 ‘자유’의 의미와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들이 사회에 얼마나 많으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국에는 많았고, 프랑스나 독일에는 적었던 것이지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말씀을 하나 해달라”고 청했다. 박지향 교수는 웃으면서 “다 얘기한 것 같은데, 알아서 잘 정리해달라”고 했다. 마침 박지향 교수의 《슬픈 아일랜드》에 이 인터뷰를 정리하는 말에 대신할 만한 대목이 있어 소개한다.
 
  〈한때는 아일랜드에서도 민족주의가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실용주의가 이데올로기를 대체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제 더 많은 일자리와 부(富)가 ‘영광스런 가난’보다 훨씬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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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승두    (2019-08-30) 찬성 : 2   반대 : 1
협상할 줄 모르는 한국민 지적이 옳다. 객관적으로 사건을 보고 과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건 큰 잘못이다. 영광스런 가난은 북한이나 부탄에서나 주장할 법 하지만 남한에서도 주장하는 바보가 있다. 한국은 일본의 아일랜드에서 경제적으로 벗어났는데도 아직도 정신적으로 얽매여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반일을 외치고 있다. 우리는 남의 역사에서도 배워야 한다.
  채공명    (2019-08-30) 찬성 : 13   반대 : 3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온라인 기사를 주로 읽었는데... 우연찮게 월간조선에 들어와서 인터뷰를 읽게 됐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인터뷰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좋은 인터뷰를 통해서 많이 배우고 깨우쳤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인터뷰와 아티클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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