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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의 어제오늘내일

朴維徹 전 광복회장

“우리 민주주의에 害를 끼친 사람에 대한 敍勳은 안 된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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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祖父는 역사학자이자 臨政 대통령 朴殷植 선생, 아버지는 광복군 출신 朴始昌 장군, 妻할아버지는 梁起鐸 선생
⊙ 박시창 장군, 흥남철수작전 지원… 朴正熙 대통령이 7사단장 시절 피복창고 화재 발생했을 때 잘 처리해줘
⊙ 아버지를 존경한 金載圭가 건설부로 불러… 김영삼 정권 시절 독립기념관장, 노무현 정권 시절 국가보훈처장 지내
⊙ “1948년에 대한민국이 시작됐다고 하면, 독립운동하신 분들은 어디에 속했을까? 그래도 나라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희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 “광복회는 정치에 휘말리거나 사회 현안에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朴維徹
1938년생. 연세대 영문학과 2년 수료, 美 조지아공과대학 화공과 졸업, MIT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英 옥스퍼드대학 경제학 석사, 헐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 美 벡텔·포드자동차 근무.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위원, 건설부 감사관·건설공무원교육원장, 독립기념관장, 광복회 부회장, 평택대 경영학과 교수, 백범기념관건립위원장, 국가보훈처장, 안중근의사기념관건립위원장, 학교법인 단국대학 이사장, 광복회장 역임 / 상훈 국민훈장 모란장, 청조근정훈장
  8월은 망국(亡國)과 해방(解放), 건국(建國)의 달이다. 그 의미를 되새겨보기 위해 박유철(朴維徹·81) 전 광복회장을 만났다. 박 전 회장의 집안은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조부는 구한말(舊韓末)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 활약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백암 박은식(白岩 朴殷植·1859~1925) 선생이다. 아버지는 중국군 및 광복군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예비역 육군 소장(少將)을 지낸 박시창(朴始昌·1903~1986) 전 광복회장이다.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최중호(崔重鎬·1891~1934) 선생, 처(妻)할아버지는 구한말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대통령)을 지낸 양기탁(梁起鐸·1871~1938) 선생이다.
 
박은식 선생.
  ― 1938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나신 걸로 되어 있더군요.
 
  “호적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데, 실은 1937년 1월 뤄양(洛陽)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친(先親)은 황푸(黃埔)군관학교 교관으로 계셨지요.”
 
  ― 선친으로부터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이 있는지요.
 
  “밤낮 없이 글을 쓰던 학자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국통사(韓國痛史)》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같은 책을 쓰셨겠지요. 제자들이 찾아오면 식사보다는 술을 같이하길 좋아했는데, 술만으로 기력을 유지하는 걸 보고 모두들 신기해했다고 합니다. 끼니를 거를 때도 많았는데, 한번은 제자들이 돈을 모아서 두루마기 안에 넣어두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와서 보니 그 돈이 두루마기 안에 그대로 있더래요. 그냥 글만 쓰신 거죠.”
 
  ― 선친께서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그냥 선친이 알아서 크신 것이죠. 신발이 없어서 밤에 시장에 나가 헌 신발 버린 것을 주어다가 신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최윤신)도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인성학교(상하이에 있던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위한 학교) 졸업식 전날, 어머니가 울고 있는 것을 백범(白凡・김구) 선생이 보셨답니다. 어머니의 아버지 최중호 선생은 백범 선생의 애제자(愛弟子)로 105인 사건으로 옥고(獄苦)를 치른 분이죠. 백범 선생이 ‘윤신이가 왜 우냐?’고 묻자, 외할머니가 ‘애가 주책이 없어서 그런다’고 했대요. 어머니는 졸업식 때 새 옷을 입고 싶어서 그랬어요. 백범 선생은 ‘윤신아, 오늘 밤 꿈을 잘 꾸면 내일 아침에 백발노인이 와서 옷을 줄 거다’라고 달래주고 돌아갔답니다. 다음 날 백범 선생은 인편에 1원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그분이 무슨 돈이 있었겠어요? 아마 전당포에 물건을 잡히고 돈을 마련한 거겠지요. 어머니는 나중에 가톨릭계 소피아학교로 진학했는데, 그때도 끼니를 자주 걸렀다고 합니다.”
 
 
  선친 朴始昌, 김원봉의 황푸군관학교 1년 후배
 
황푸군관학교 시절의 박시창 장군.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모자 쓴 사람.
  ― 박시창 장군은 어떻게 군문(軍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동생 안공근(安恭根) 선생이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에게 부탁해, 그분이 한동안 아버지를 돌봐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조마리아 여사마저 돌아가신 후, 먹고살 길을 찾아 황푸군관학교 5기로 입교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대목은 조금 이상하다. 1925년 박은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박시창 장군의 나이는 이미 22세, 남이 돌봐주어야 할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유철 전 회장은 “선친의 실제 나이는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어렸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군관학교 진학, 결혼 등을 거치면서 실제보다 나이를 올렸다는 얘기였다.
 
  쑨원(孫文)이 북벌(北伐)을 위해 세운 황푸군관학교는 중국 현대사를 주름잡은 엘리트들의 산실(産室)이다. 중화민국 총통을 지낸 장제스(蔣介石)가 교장이었고, 후일 중국(중공) 총리가 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정치부 주임이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중국과 대만을 주름잡은 거물들 가운데는 이 학교 출신이 많다.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 9병단 사령관이었던 쑹스룬(宋時輪)이 박시창 장군의 동기(同期)였다. 요즘 서훈(敍勳) 논란을 빚고 있는 김원봉(金元鳳), 한때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로 지명됐던 전 중국 국방부장 린뱌오(林彪)가 1년 선배였다.
 
  ― 선친 박시창 장군은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요.
 
  “젊은 시절 독립운동가들과의 연락을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적도 있지만, 주로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활동했습니다.”
 
  ― 중국군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1932년 상하이사변 때에는 중국 국민혁명군(국부군・國府軍) 87사단 예하 중대장으로 일본군과 격전을 치렀습니다. 이후에도 대대장 등을 거쳐 중국군 대교(大校·대령)까지 올라갔습니다.
 
  사실 조명이 잘 안 되어서 그렇지, 일제(日帝)하에서 일본군과 제대로 전투를 치른 분들은 중국군에서 복무한 김홍일(金弘壹) 장군이나 저의 선친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는 선무(宣撫)공작 등을 했지, 실전(實戰)을 치르지는 않았지요. 김홍일 장군은 독립운동가로, 6・25 때는 한강방어전의 지휘관으로 큰 업적을 쌓은 분인데 기억하는 분이 거의 없어 안타깝습니다.”
 
  ― 선친도 광복군에서 활동하신 걸로 압니다만.
 
  “중국군은 조선인들을 힘든 전투에 제일 먼저 내보냈어요. 큰 전투를 여러 번 치렀지요. 결국 보다 못한 어머니가 김구(金九) 주석을 만나 아버지가 중국 육군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김구 선생이 장제스 총통에게 편지를 써준 덕분에 아버지는 육군대학으로 갔다가, 이후 광복군으로 옮겨 고급 참모를 지냈지요.”
 
 
  김구와 김규식
 
김홍일 장군.
  ― 그 시절의 일로 기억나는 일은 없습니까.
 
  “아마 선친의 육군대학 졸업식 때였던 것 같아요. 궁금해서 창밖으로 내다보았는데, 삐쩍 마른 높은 군인이 의자에 앉아서 아랫사람들을 마구 야단치고 있더군요. 어린 나이인데도 그 사람의 기(氣)가 느껴질 정도였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그가 바로 장제스 총통이었다고 하더군요.”
 
  ― 광복군 시절, 선친께서 가까이 지내던 분들은 어떤 분이 있습니까. 지청천(池靑天) 장군이나 이범석(李範奭) 장군 같은 분들과 교유가 있었나요.
 
  “그분들은 아버지의 상관(上官)이기는 했지만, 가깝지는 않으셨던 걸로 압니다. 아버지는 같은 중국군 출신인 김홍일 장군과 가까웠어요. 저도 왕빠빠[왕아저씨·김홍일 장군은 왕웅(王雄)이라는 이름을 사용]라며 김홍일 장군을 따랐지요.”
 
  ― 선친은 김구 선생의 한국독립당 같은 데서 활동하지는 않았나요.
 
  “선친은 평생 군인이었습니다. 정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충칭(重慶)에서 교외(郊外)의 남한이라는 곳에 살았는데 인근에 김규식(金奎植·1881~1950) 선생도 살았기 때문에 남들은 선친을 김규식계(系)라고 분류하기도 했어요. 김규식 선생은 얼굴이 잘생기고 눈이 번쩍번쩍하는 분이었지요.”
 
  ― 김구 선생도 뵌 적이 있겠네요.
 
  “어머니와 함께 임정 청사에 가면, 그분이 위에서 보고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셨어요. 그분은 살짝 곰보였어요. 저를 꼭 안아주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분이 ‘너는 한국의 남자애다. 너도 커서 나라를 위해 뭔가를 해야지’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 1945년 해방이 될 때의 일이 기억납니까.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난리법석을 피우고, 축제가 벌어지더군요. 일본이 항복했다는 거였습니다.”
 
  해방 후 박시창 장군은 김구 주석의 명령을 받아 상하이로 파견됐다. 상하이 교민들을 보호하고, 일본 군적(軍籍)에 있던 조선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부대를 편성하는 것이 임무였다.
 
  “남한에서 충칭으로 가려면 양쯔강(揚子江)을 건너야 했어요. 나룻배로 강을 건너는데 마침 홍수가 나서 사람과 돼지, 집이 떠내려오는 게 보였어요. 강을 건너는데, 거의 하루가 걸렸던 것 같아요. 무서워도 아무 소리도 못 했지요. 도대체 선친이 왜 그렇게 서둘러 강을 건너려 했을까 싶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평생 남의 나라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이제 해방된 우리나라 군대를 위해 일하게 됐다고 생각하니 그게 기뻐서 그랬던 게 아니었나 싶어요.”
 
 
  朴始昌과 金載圭의 인연
 
중국군 장교 시절의 박시창 장군과 부인 최윤신 여사.
  어린 시절의 일들에 대한 박 전 회장의 기억은 파편적이었다. 미군 LST로 귀국한 것은 기억하지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귀국 후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했다는 것, 서울 회현동에서 살다가 원효로로 이사했던 것, 남산에서 데모가 크게 있었던 것 등을 기억했다.
 
  ― 선친은 어떻게 해서 국군에 들어가게 되었나요.
 
  “독립운동가였던 유동열(柳東說) 통위부장(統衛部長·미 군정 시절 국방부 장관 격)의 권유로 육사[3기 특임(特任·육사 3기와는 별도로 장교 경력자들을 단기 교육시켜 임관)]에 입교했습니다. 한 달간 교육을 받은 후 소위로 임관했다가 한 달 후에 소령으로 진급했습니다.”
 
  ― 당시 군(조선국방경비대)은 일본군·만주군 출신이 주류였습니다. 그 때문에 광복군·중국군 출신 가운데 많은 분이 국군에 들어가는 걸 꺼린 걸로 아는데, 선친은 그런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았습니까.
 
  “왜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나이나 경력에서 한참 아래인 일본군·만주군들이 미군 고문관들에게 아부하면서 출세하는 걸 보면서 불만이 많았겠지요. 하지만 참을성이 많은 분이어서 내색은 안 했지요. 그래도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 선친께서 군에서 가깝게 지낸 분으로는 어떤 분이 있나요.
 
  “김재규(金載圭)와 가까웠지요.”
 
  ― 어떤 인연으로….
 
  “선친이 소령으로 대전에 있는 연대에 부연대장으로 부임했을 때, 연대 정보참모가 김재규 대위였습니다. 당시는 군보다 경찰이 힘이 셀 때였습니다. 군과 경찰 간에 충돌이 벌어졌는데, 연대장과 미군 고문관이 선친과 김재규 대위에게 책임을 전가(轉嫁)하는 바람에 두 분이 나란히 군복을 벗었지요. 어머니가 유동열 통위부장을 찾아가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일이 바로잡혀 복직한 선친이 대구 대륜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있던 김재규에게 ‘너도 군대로 돌아오라’고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김재규가 ‘더러워서 안 돌아가겠다’는 답장을 보내오자, 선친은 다시 편지를 보내 ‘남자가 그런 일 한번 겪었다고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설득했다고 해요. 결국 군으로 복귀한 김재규는 후일 두고두고 선친에게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시해하기는 했지만,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총애를 많이 받았어요. 그 시절 김재규가 자주 박 대통령에게 선친에 대해 좋게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朴始昌, “朴正熙가 날 좋아했다”
 
  ― 박시창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근무한 적은 없나요.
 
  “직접 같이 근무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이 7사단장 시절 사단 보급창고에서 불이 났는데, 선친이 진상조사단장으로 사건을 조사한 후 책임을 묻지 않는 방향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선친은 ‘박정희가 날 좋아하고 존경했다. 아마 내가 나이가 많지 않았으면, 5·16을 할 때 같이하자고 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선친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광복회장을 지낸 것도 박 대통령의 뜻이었던 걸로 생각합니다. 당시 광복회장은 정부에서 임명하는 자리였으니까요. 행사 같은 데서 만나면 박 대통령이 무척 반가워했다고 합니다.”
 
  ― 박시창 장군은 1950년대 말 육군 소장까지 올라갔지만, 요직을 맡지는 못했더군요.
 
  “선친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할아버지가 불편한 사이였던 게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불만스러운 내색은 하지 않았죠.”
 
  박은식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은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독립운동 방략(方略)을 놓고 의견 차이가 있었다. 박은식 선생은 1925년 3월 이승만이 임정(臨政)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된 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박은식 선생이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적폐(積弊)청산’ 차원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이승만의 활동 기반이자 임정의 주미(駐美)대사관 격이던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폐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박시창 장군으로서는 그런 생각을 할 법했다.
 
  ― 6·25 때 얘기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선친은 그때 충청남·북도 위수(衛戍)사령관이었어요. 전쟁이 나자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데리고 삼청동에 있는 김규식 선생댁(삼청장)을 찾아갔어요. 낮에는 집이 조용했는데, 밤이 되면 웅성웅성하는 거예요. 송호성(宋虎聲·광복군 출신으로 국방경비대 사령관 역임. 6·25 때 납북된 후에는 인민군 소장 계급장을 받고 국군포로로 구성된 노무부대인 해방여단 여단장을 지냄) 장군 등 주로 옛날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모여들어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었던 것이죠. 그러던 어느 날 인민군이 새벽같이 들이닥쳐 김규식 선생, 송호성 장군 등을 끌고 갔어요. 그 일이 있기 전에 송 장군이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주었던 일이 기억나네요. 김규식 선생 등이 잡혀간 후 어머니는 짐을 싸서 삼청장에서 나왔지요.”
 
  경남 거제시에 가면 흥남철수작전기념비가 있다. 거기에는 박시창 장군의 이름도 있다. 박 전 회장의 말이다.
 
  “아버지는 당시 김백일(金白一) 1군단장 밑에서 민사부장으로 있었습니다. 통역장교 현봉학(玄鳳學) 박사와 함께 앨먼드 미 10군단장과 교섭해, 피란민들을 철수시킬 수 있게 노력했습니다. 아버지는 이후에도 그때 내려온 함경남・북도 출신 유지들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선친이 안정적 수입 있었던 덕 봤다”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은 2017년 8월 14일 독립유공자 및 유족들과 오찬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親日)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사라지게 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한 말은 해방 이후 오랫동안 입에 오르내린 말이었다. 하지만 해방이 된 지 70여 년이 지났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가운데서도 장관, 국회의원, 군 장성이 여럿 나왔다. 장관급 국가보훈처장을 지낸 박유철 전 회장도 그중 하나이다. 반면에 일제시대의 거부(巨富)나 친일파 자손 중에 흔적도 없이 몰락해버린 이들도 적지 않다.
 
  ―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제는 독립유공자건 친일파건 간에 그 성공과 실패는 본인의 책임으로 귀속(歸屬)되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 질문에 박 전 회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건 제가 함부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독립유공자 및 그 후손 가운데 어려움을 겪은 분이 많은데, 그래도 부자(父子)가 나라에서 혜택을 많이 받은 입장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읽혔다.
 
  ― 가만히 생각해보니 박은식 선생, 이시영(李始榮) 선생(초대 부통령), 김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 집단 내에서 수뇌부에 있었던 분들의 후손이 그래도 잘되었네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독립운동가 및 그 후손 내에서도 ‘양극화(兩極化)’가 있었던 것 아닌가요.
 
  “할아버지의 덕을 보았다기보다는, 선친이 직업 군인이어서 안정적 수입이 있었던 덕분에 제가 정상적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1919년 건국”
 
  문재인 정부 들어 특히 논란이 되어온 문제 중 하나가 언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보느냐 하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1948년 건국’을 외면하고, ‘1919년 건국’을 주장하면서 금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그마저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임시정부 대통령의 손자이자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장을 지낸 박 전 회장의 생각은 어떨까? 이에 대한 의견을 묻자 박 전 회장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것 같더니, 약간 젖은 목소리로, 하지만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1948년에 대한민국이 시작됐다고 하면, 독립운동하신 분들은 어디에 속했을까요? 그분들은 그래도 나라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고유명사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가진 대한민국은 1919년에 세워졌습니다.”
 
  ― 국가의 3요소는 영토·주권·국민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갖춘 국제법의 주체(主體)로서의 대한민국이 세워진 것은 1948년 아니겠습니까.
 
  “미국도 국제사회에서 정식으로 국가로 승인받기 전 독립선언을 한 1776년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기념하고 있잖아요?”
 
  ― 당시 미국은 정식으로 국가 승인을 받기 전이기는 했지만, 식민지 13개 주(州)에서 대표를 선출해 대륙회의를 구성했고, 영토와 국민에 대한 통치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임시정부는 영토와 국민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죠. 경우가 다르다고 봅니다.
 
  “글쎄요. 어쨌든 미국은 그때 영국 식민지였잖아요? 임시정부도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헌법을 만들었고, 교통부를 통해 국내의 국민과 연계를 도모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국민이 자신을 일본 국민이라고, 자신이 일본 영토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공표한 〈대한민국건국강령〉에 따르면 일제에 맞서 투쟁하는 복국기(復國期)와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나라를 세워가는 건국기(建國期)를 구분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 스스로가 임시정부는 아직 정식 국가가 아니며, 해방 후 별도의 과정을 거쳐 건국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1948년 8월 15일에도 ‘정부수립’이라고 했지, ‘건국’이라고는 하지 않았어요. 유엔한국위원단도 ‘정부수립’이라는 말은 사용했어도 ‘건국’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대한민국의 재생’이라는 말을 사용했고요.”
 
  역시 박유철 전 회장은 천생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었다. 그의 주장에 대해 반론(反論)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평행선만 그릴 것 같아서 말을 돌렸다.
 
 
  미국 유학
 
  ― 해외로 나가는 것 자체가 어렵던 시절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네요.
 
  “넓은 세상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건너가긴 했지만, 집이 학비나 생활비를 대줄 형편은 못 되어서 접시닦이 등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전쟁 직후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많은 미국인이 동정도 해주고 도움도 주었습니다.”
 
  ― 조지아공대 화공과를 졸업한 후 MIT 경영학 석사, 영국 옥스퍼드대학 경제학 석사, 헐대학 경제학 박사 등 학력이 아주 화려합니다.
 
  “공부를 잘한 건 아닌데, 이름이 좋은 학교를 다닌 거지요. MIT 경영대학원 같은 경우는 내가 입학할 때는 그 분야에서 순위가 25위인가 그랬어요. 이후에 순위가 계속 올라서 지금은 5위가 됐지요. 학교 순위가 올라가는 덕분에 제가 공부를 아주 잘해서 거기에 간 것처럼 여겨지게 됐는데, 무임(無賃)승차를 한 셈이죠. 나중에 단국대에서 강의를 할 때 교수・학생들에게 ‘좋은 학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 학교가 올라가면 구성원들에 대한 평가도 따라서 올라간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영국에서 학업을 계속한 건가요.
 
  “아뇨. 그건 공무원 유학으로 간 거였어요. 전두환(全斗煥) 정권 초기에 정부 조직과 공무원 수를 줄인 적이 있어요. 그때 자리가 모자라게 되니까 공무원 유학 제도를 확대했습니다. 공부를 더 하고 싶던 참이라 자원(自願)해서 나갔지요.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들어왔지만, 학생 신분을 유지하면서 학위 과정을 계속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서 나중에 박사 학위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박유철 전 회장은 1963~1973년 미국 벡텔사와 포드자동차에서 근무했다.
 
  ― 미국에 눌러앉을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미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어요. 물론 당시 한국은 가난하기 짝이 없었고, 미국은 화려했지요. 그래도 미국에서의 생활은 ‘새장 속의 새’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사느니, 강원도 초가삼간에 살아도 좋으니 열린 데서 살고 싶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지요. 마침 박정희 대통령이 해외 인재들을 유치할 때라 좋은 기회다 싶어서 들어왔습니다.”
 
  ―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나야 경영학을 했으니까, 성과분석 일을 했죠.”
 
 
  김재규가 건설부로 불러
 
건설부 장관 시절의 김재규(맨 오른쪽). 1975년 1월 31일 박정희 대통령의 건설부 연두순시 때 사진이다. 차지철 경호실장(왼쪽에서 두 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1977년 그는 3년간 몸담았던 국방과학연구소를 떠나 전직(轉職)을 했다. 건설부 공무원이 된 것이다.
 
  ― 건설부로는 어떻게 옮겨가게 됐나요.
 
  “김재규 건설부 장관이 불렀어요. 해외 건설 붐이 일면서 건설부에서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저를 부른 것이죠. 갔더니 중동(中東)에서 온 손님을 맞는 자리에 통역을 하라고 하는데, 힘들었습니다. 10년 넘게 미국 생활을 했으니 영어회화는 잘하지만, 통역을 하려면 역시 전문지식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나중에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이 되기는 했지만, 건설부 장관으로서 김재규는 해외 건설 진출에 공로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우리 경제가 어려웠는데, 해외 건설 덕분에 위기를 극복하고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지요.”
 
  ― 그럼 김재규 장관 때 건설부에 들어간 건가요.
 
  “아니요, 김재규 장관은 저를 국장급으로 특채(特採)하려 했어요. 아마 선친과의 인연도 생각해서였겠지요. 하지만 외부 사람을 국장급으로 부른다고 하니, 내부 반발이 거셌지요. 차관이 저를 불러 그런 사정을 얘기하면서 사무관으로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했더니 과장, 즉 서기관급으로 들어오라고 해요. 그건 좋다고 했지요. 그런 논의가 진행되는 중에 김재규 장관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옮겼어요. 결국 저는 그 후임인 신형식(申泂植) 장관 때 건설부에 들어갔습니다. 신 장관도 제게 참 잘해주었습니다.”
 
  ― 건설부에서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해외 건설 일이었지요. 해외 건설이라는 게 건설노무자만 나가는 게 아닙니다. 한번 나가게 되면, 이발사・제화공(製靴工) 등 별의별 직업의 사람들이 함께 나가는 게 해외 건설이에요. 그때는 외무부 직원들보다 건설부 직원들이 해외에 더 많이 나갔어요. 중동 사람들에게 술도 많이 먹이고….”
 
  ― 중동 사람들이 이슬람교도인데 술을 마십니까.
 
  “처음에는 안 마신다고 하지만, 자꾸 권하면 마시고, 같이 취하고 그러지요. 하하.”
 
 
  독립기념관장
 
1993년 8월 환국한 박은식 선생의 묘소를 살펴보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 서 있는 사람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박유철 전 광복회장.
  박유철 전 회장은 18년간 건설부에서 근무하면서 국장급인 감사관・건설공무원교육원장 등을 지냈다. 그러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전기(轉機)가 찾아왔다. 김영삼(金泳三) 정권 시절이던 1995년 제4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맡게 된 것이다.
 
  ― 김영삼 대통령과는 인연이 있었습니까.
 
  “1993년 8월 할아버지를 비롯해 신규식(申圭植・임정 국무총리)・노백린(盧伯麟・임정 국무총리)・김인전(金仁全・임정 임시의정원 의장)・안태국(安泰國)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 다섯 분의 유해를 봉환(奉還)해왔잖아요? 그때 저도 유족이자 광복회 이사로서 관여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제 이력 등을 보고 저를 좋게 보았나 봐요. 한번은 김영삼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온 적도 있었어요. 북한 문제에 대해 묻기에 ‘국력이 강해야 민주주의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생각나는 대로 말씀드렸어요. 아마 저를 써볼까 하는 생각에서 전화를 하셨던 것 같은데, 제가 잘 답변하지는 못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 그럼 독립기념관장은 어떻게 맡게 된 건가요.
 
  “그로부터 한참 후에 이홍구(李洪九) 총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에모리대학(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소재) 출신인 이 총리는 저보다 나이는 많지만, 미국 유학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이였어요. ‘독립기념관장을 맡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 무슨 고민이었습니까.
 
  “독립기념관장을 맡게 되면 공무원을 그만두어야 하는데, 그러면 연금(年金)을 못 받게 되는 게 제일 고민이었지요. 친구인 이수성(李壽成) 당시 서울대 총장과 의논했더니 ‘무슨 소리냐? 당연히 맡아야지’라고 강력히 권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독립기념관장을 맡기를 너무 잘했다 싶습니다.”
 
  ―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사실 독립운동한 집안의 사람들이 다 가난하게 사는 걸 보면서 ‘나는 독립운동은 멀리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독립기념관장을 맡은 후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같은 분의 인간적 매력, 그분 가족들이 말도 못 하게 겪었던 고난 등을 다시 생각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독립기념관장 시절 틈나는 대로 옥외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어록비(語錄碑)들을 읽었는데, 그럴 때마다 눈물이 났습니다. 그분들이 사형되기 전에 하신 말씀들이 많았는데,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에 무슨 꾸밈이 있겠어요? 가슴에 사무친 말씀을 하신 것이겠지요. 그걸 읽을 때마다 느낀 게 많았습니다.”
 
  ― 꽤 오래전에 독립기념관에 가본 적이 있는데, 찾아가기가 어려운데다가 관람객들이 거의 없더군요. 1980년대에 국민들 성금으로 지은 곳인데, 괜히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방에 지어 그런 게 아닌가 싶어 아쉬웠습니다.
 
  “제가 관장을 하면서도 제일 고민한 게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찾아가거나 교장선생님들께 편지를 써서 학생들 수학여행이나 방학 때 독립기념관을 많이 찾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인근에 세종시가 들어서면서 교통이 많이 좋아져서 연간 100만명 이상이 찾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장
 
국가보훈처장 시절의 박유철 전 광복회장.
  박유철 전 회장은 1995년부터 6년간 독립기념관장으로 재직했다. 이후 그의 이력은 독립운동가들을 현창(顯彰)하는 사업들을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광복회 부회장(1999~2002), 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장(2002~2004), 국가보훈처장(2004~2007), 안중근의사기념관건립위원회 위원장(2007~2011), 광복회장(2011~2019) 등….
 
  ― 몇 년 전 새로 지은 안중근의사기념관을 가보았는데, 옛날 기념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알차게 잘 꾸며져 있더군요.
 
  “좋게 봐주어서 고맙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제 선친을 돌봐주었기 때문에 그 은공을 갚는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 국가보훈처장은 어떻게 맡게 되었습니까.
 
  “노무현(盧武鉉)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열린 8・15행사에 참석했습니다. 비교적 헤드 테이블에 가까운 쪽에 앉게 됐는데, 제 주위에 있던 분들이 김우식(金雨植)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저를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소개를 했어요. 나중에 김 실장으로부터 ‘보훈처장을 하겠느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해보겠다고 했지요.”
 
  ― 국가보훈처는 원래 6·25 상이군경(傷痍軍警)이나 전사자 유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김영삼 정권 이후 독립운동가 현창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역대 처장들도 대개는 군 출신들이 맡았었지요. 제가 처장이 되자 군 출신 인사들 사이에서는 보훈처가 군인들은 홀대하고 독립운동가들만 우대하는 것 아닌가 싶어 우려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저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습니다. 다행히 선친이 군 장성이었기 때문에, 군 출신 인사들도 저를 많이 이해해주었어요.”
 
  ― 보훈처장 시절의 일로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문화관광부 산하이던 독립기념관과 국방부 산하이던 국립대전현충원과 지방의 호국원(護國園)들을 보훈처 관할로 가져온 것입니다. 장관들은 소관 기관을 다른 부처에 넘겨주면 두고두고 ‘일 잘못한 장관’으로 낙인찍히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그걸 피하려고 합니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경력을 살려 당시 문화부 장관과 총리를 간곡하게 설득해 독립기념관을 보훈처로 가져왔습니다. 국립현충원과 호국원들은 서울현충원만 국방부에 남겨두고 보훈처로 가져왔습니다.”
 
 
  “이념은 日帝와 맞서 싸우기 위한 도구였다”
 
  근래 김원봉 서훈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사실 사회주의자 서훈은 이미 김영삼 정권 시절부터 계속되어왔다. 한인(韓人) 최초의 볼셰비키 알렉산드라 김(김 스탄케비치), 박헌영의 아내이자 공산주의자인 주세죽 등이 이미 대한민국의 건국훈장을 받았다. 다만 그들은 해방 이전에 세상을 떠난 반면, 김원봉은 해방 이후 북한으로 가서 고위직에 올라 대한민국에 항적(抗敵)한 정황이 현저하다는 것이 두드러질 뿐이다. 박 전 회장이 현안에 대해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걸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아, 조금 돌려서 물어보았다.
 
  ―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한민국의 건국훈장을 수여하는 게 옳다고 봅니까.
 
  박 전 회장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듯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중국・만주 등지의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들을 많이 돌아보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선열(先烈)이 말로는 공산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 같은 이념들을 내세웠지만, 그건 결국 일제에 맞서 싸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나’ 하는….”
 
  ― 사회주의자 서훈을 주장하는 이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전까지의 행적만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대한민국에 항적한 자들에게도 대한민국의 건국훈장을 주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제가 보훈처장을 할 때 ‘우리 민주주의에 해(害)를 끼친 사람은 안 된다’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광복회, 정치에 휘말리지 말아야”
 
  ― 직접 일제와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돌아가셨고, 이제 광복회는 그 후손들의 모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광복회가 나아갈 길에 대해 한 말씀해주십시오.
 
  “광복회는 정치에 휘말리면 안 됩니다. 광복회가 국가지원금으로 운영되다 보니 정부의 말을 듣게 되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회 현안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고, 내실(內實)을 기하면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정신을 기리는 단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기자에게는 그 말이 지난 6월 16일 김원웅(金元雄) 광복회장이, 황교안(黃敎安) 자유한국당 대표가 백선엽(白善燁) 예비역 육군대장을 예방한 것을 두고 ‘국가정체성(正體性) 부인’ ‘몰(沒)역사적 행위’ 운운하면서 비난한 것을 에둘러 비판하는 것으로 들렸다. 하지만 박 전 회장에게 그런 생각이 맞느냐고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또 “그건 제가 함부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라며 말을 아낄 것 같아서였다.
 
  인터뷰 내내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박시창 장군이, 백암 박은식 선생이, 그리고 제대로 된 조선 선비가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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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현호    (2019-08-15) 찬성 : 0   반대 : 0
인터뷰기사 잘 보았습니다. 솔직하고 진솔한 인터뷰기사라는 인상입니다. 박유철씨도 일제시대에 국내에 없었으니 당시 국내사정에 대해서는 지식도 경험도 없고 모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은 내기준으로 그리고 나와 내 가족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로 판단하시는 듯 합니다. 독립운동을 한 자손이지만 그래도 조선말기의 한민족 그누구보다 좋은 교육받고 유학까지 잘다녀왔음에도 독립운동을 한 자손은 다 어렵고, 친일 자손은 다 잘된다라는 말이 틀렸다고 하지못한다는 것은 부끄럽군요. 독립운동을 해서 옷도 못입고 신발도 못신었다고 말하려는 듯 하지만 해방이후 한참 지난시간에도 한국인들중 대다수가 옷 못입고 신발도 고무신이었지요. 공부도 하시고 미국에서 오래 생활하신 분이 이 정도로 팔이 안으로 굽는 판단을 하시니 바른 판단을 하기가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20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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