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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인생 16좌’ 登頂하는 엄홍길 대장

“산에서 내려오니 사람이 보이더라”

글 : 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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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년간 네팔 산간오지에 학교 15곳 건립, 16차 학교는 ‘교육타운’
⊙ “남은 인생 베풀며 살겠다” 히말라야 16좌 완등 후 얻은 깨달음
⊙ “자기 희생 부족한 젊은이들, 패기와 근성 갖고 세상에 도전해야”

嚴弘吉
1960년 출생.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同 대학원 체육교육학과 석사, 경희대 체육대학원 박사 수료 / 前 국민생활체육회 이사, 상명대 석좌교수 / 現 국립등산학교 교장, 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밀레 기술고문, 엄홍길휴먼재단 상임이사 / 저서 《8000미터의 희망과 고독》 《꿈을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라》 《산도 인생도 내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등
사진=조현호
  “제가 현역일 때 네팔 히말라야산맥 16좌 등정(登頂)에 대한 염원, 그 간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다리가 부러지고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는데도 정상만 생각하고 계속 올랐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산 아래가 보이더라고요. 산자락이 보여요. 오가는 사람이 보이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들이 보이는 거예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문명의 혜택도 못 받고, 부모 세대로부터 내려오는 가난에 짓눌린 아이들이 가여웠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빌었어요. 2007년 봄, 마지막 16좌 로체샤르(8400m) 신(神)께 빌었어요. ‘제가 오른 이 산에서 살아서 내려가게 해주십시오. 남은 인생, 산 아래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아가겠습니다.’ 간절하게 빌었죠.”
 
  지난 5월 1일 서울 중구 엄홍길휴먼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엄홍길(嚴弘吉·59) 대장은 두 손을 모았다.
 
  2007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산맥의 해발 8000m 이상 고봉(高峯) 16좌 완등 후 은퇴한 엄 대장은 이듬해 5월 28일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재단을 설립했다. 은퇴 직후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에서 받은 특별공로상 상금 5000만원이 종잣돈이 됐고, 여러 후원단체가 그의 사회공헌 프로젝트에 동참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올해 창립 11주년을 맞은 엄홍길휴먼재단은 그동안 네팔 산간오지(山間奧地)에 현지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학교·병원·기숙사·도서관 등을 짓는 ‘휴먼스쿨’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8년간 학교 15곳을 지었고, 현재 네팔 수도 카트만두 외곽 딸께셜에 16차 휴먼스쿨 건립을 추진 중이다. 16차 프로젝트는 유치원·도서관·초중고교·실내체육관이 한데 모여 있는 일종의 ‘교육타운’ 건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고로 잃은 셰르파 고향에 첫 학교 건립”
 
위에서부터 제4차 비레탄티, 제5차 다딩, 제11차 네팔건지 휴먼스쿨 준공식 모습. 엄홍길 대장은 재단을 통해 8년 만에 네팔 오지에 학교 15곳을 지었다. 사진=엄홍길휴먼재단 제공
  ― 그때 로체샤르 신이 응답해주던가요.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까, 제가 16좌 완등에 성공하고 산을 딱 내려와 있더라고요. 성공에 도취되다 보니 제 기도를 잊었던 거죠. 막 ‘업’이 돼서 한동안 ‘붕’ 떠서 다녔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한 대 딱 얻어맞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히말라야 산신(山神)께 약속을 했는데, 내가 뭔가를 좀 해야지’ 생각했어요. ‘약속을 실천에 옮겨야 되겠다, 네팔에 학교를 지어야겠다’ 마음먹었어요.”
 
  ― 네팔 학생들의 교육 환경이 얼마나 나쁘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요.
 
  “도시에서 가까운 마을은 학생들이 교육 혜택을 받지만 산간마을은 사정이 다르죠. 일단 학교 가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어린아이들이 길게는 2시간씩 험한 산길을 걸어가야 해요. 물자 수송을 하는 야크·당나귀 같은 동물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보통 수십 마리가 열을 지어서 산을 오르내리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집에 있으면 부모들이 공부보다는 농사 같은 일을 시키니까 여러모로 교육받기가 어렵죠.”
 
  ― 학교 부지를 선정하는 기준이 뭔가요.
 
  “인접성이죠. 산에서는 사람들이 큰 군락을 이루고 사는 게 아니라 몇 가구씩 뿔뿔이 흩어져 있거든요. (어느 곳에 살더라도) 1시간 이내로 걸어올 수 있게, 최대한 인접성이 높은 지역을 골라서 학교를 짓습니다.”
 
  ― 학교를 지을 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 짓는 건가요.
 
  “지역에 따라 다릅니다. 학교가 위치한 지역의 학생 연령층, 인구수 등을 조사해서 그에 맞게 짓습니다. 어느 지역은 초등학교만 짓고, 인구수가 많은 지역은 초·중·고교를 다 짓기도 하고 그렇죠.”
 
  ― 첫 학교인 제1차 휴먼스쿨을 ‘팡보체’라는 지역에 지었습니다.
 
  “제가 에베레스트를 1988년 완등하기까지 모두 세 번 도전했습니다. 인연이 깊죠. 1986년 두 번째 올라갈 때 사고로 동료 셰르파를 잃었습니다. 크레바스에 빠져서 세상을 떠났죠. 그 친구의 고향이 바로 팡보체예요. 부인을 비롯해서 유가족들이 살고 있었죠. 산에 올라가려면 항상 그곳을 거쳐야 했어요. 생각이 무척 났죠. ‘언젠가 내가 꼭 꿈을 이루고 살아남는다면 너를 위해서 이 지역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죠. 재단을 설립하고 보니 이곳에 학교가 없는 거예요. 그나마 있는 곳도 열악해서,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인데 난방이 전혀 안 됐어요. 그 친구 생각하면서 지었죠.”
 
 
  “학교 유지·보수는 물론 교사·교복까지 지원”
 
2011년 2월 23일 제2차 타르푸 휴먼스쿨 준공식에서 엄홍길 대장이 한 아이의 책가방을 싸주고 있다. 사진=엄홍길휴먼재단 제공
  ― 휴먼스쿨이 학교로서 갖는 강점은 뭡니까.
 
  “일단 콘크리트에 철근 구조물을 써서 튼튼합니다. 네팔 학교는 대부분 빨간 벽돌이나 대나무로 지었어요. 지붕이 안 좋아 비가 새고 천막을 쳐서 공부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어요. 2015년 네팔에 진도 7.8 규모의 강진(强震)이 일어났을 때도 취약했죠. 제가 ‘무조건 튼튼하게 지어야 한다’고 했죠. 원래 학교마다 유리가 귀해서 (강풍에 깨질까 봐) 창문도 작게 만들고 쇠창살까지 달았는데, 저는 ‘창문 크기를 최대한 키워야 한다’고 했어요. 깨지든 말든 계속 갈도록 하게 했어요. 창문이 크면 빛도 많이 들어오고 환기도 잘 돼서 학습 여건이 좋아지죠. 학교에 물탱크를 달고 지하수나 계곡물을 끌어와서 수세식 화장실도 설치했어요. 더운 곳에는 천장에 선풍기를 달고, 추운 곳에는 벽면 전체에 단열재를 썼어요. 우기(雨期)를 대비해서 침수되지 않도록 땅바닥으로부터 70cm 이상 높게 건물을 짓기도 했죠. 지역마다 기후와 지형을 고려해서 짓습니다.”
 
  ― 학교 건립 외에 학생들에 대한 또 다른 지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재단은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지원합니다. 학교 한 곳을 지으면 인근의 열악한 시설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전학까지 옵니다. 그러면 학생수가 늘어나잖아요. 네팔 정부에서는 교사를 충원할 여력이 안 됩니다. 그런 경우, 재단에서 교사를 추가로 채용해 월급을 주고 관리하죠. 기본적으로는 칠판·책걸상 공급에 전교생 교복도 지원합니다. 학생수가 대폭 늘어난 학교는 1층 건물을 2층으로 증축시켜주기도 하고, 도서관·기숙사를 별도로 지어주기도 합니다.”
 
  ― 학교 한 곳을 짓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들어갑니까.
 
  “학교 하나 짓는 데 평균 3억~5억원 소요됩니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자재 수송비가 저렴한데, 못 들어가는 곳은 헬리콥터로 운반하니까 비싸죠. 또 우리는 건물만 짓고 끝나는 게 아니라, 현지 지부를 통해서 계속 모니터링하면서 유지·보수를 해줍니다.”
 
  ― ‘무리한 일’이라는 등 주변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우리는 ‘짓는다’ 하면 그대로 짓거든요. ‘거기에 어떻게 학교를 짓느냐’ 우려해도 말이죠. 네팔에 수많은 NGO(비정부기구) 단체들이 있어요. 일부 단체들은 건물 하나를 세워도 도시와 가까운 곳에 짓습니다. 후원자가 생색을 내기 좋아 보이는 곳, 자기들이 홍보를 잘할 수 있는 곳에다 짓는 거죠. 우리는 한번 가려면 1박2일에서 3박4일까지 걸리는 ‘벽지(僻地)’에다 짓습니다. 재단을 홍보하는 데 돈을 쓰기보다는 후원금의 100% 가까이를 학생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同志 박무택의 죽음
 
엄홍길 대장은 에베레스트(위), 칸첸중가 등 세계 최초로 네팔 히말라야산맥의 해발 8000m 이상 高峯 16좌를 등반했다. 사진=엄홍길휴먼재단 제공
  ― 휴먼스쿨 건립 외에 네팔 관련 프로젝트를 추가로 추진한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현재로서는 16차 휴먼스쿨 조성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추가적으로는 ‘인재 양성’ 프로젝트를 기획 중입니다. 네팔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학생 중, 출중한 학업 능력을 가졌음에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고민하고 있는 학생에게 ‘대학교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셰르파 유족(遺族)에 대한 생활비 지원 사업도 확대해나갈 계획입니다. 현재 셰르파 아버지를 여읜 자녀 중 가정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 매달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 ‘휴먼’이라는 말에 애착이 있는 듯합니다. 재단 명칭에도 ‘휴먼’이 들어가고, 과거 고(故) 박무택 대원 시신 수습을 위해 꾸린 원정대 명칭에도 ‘휴먼’이 쓰였죠.
 
  “무택이가 저랑 해발 8000m급 등정(登頂)을 네 번 같이 했어요. 영화 〈히말라야〉에도 나와요. 우리가 칸첸중가(8586m) 정상을 100여m 남겨놓고 절벽에서 비박을 했거든요. 10시간을 넘게 절벽에 매달려서 살았어요…. 그랬던 친구가 2004년 초모랑마(에베레스트, 8850m) 정상에서 내려오다 설맹(雪盲)에 걸려서 사고가 난 거예요. 8750m에서 줄에 매달린 채로 숨을 거두게 되죠. 시신이 실종된 것도, 바닥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등반 주요 길목에 있었거든요. 국내외 등반대가 오르내리면서 그 시신을 볼 거 아닙니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너무 안타깝고 괴로워서 ‘휴먼원정대’라는 이름으로 제가 나선 것입니다.”
 
  후배 박무택 대원이 숨진 지 1년이 지났을 무렵인 2005년 3월 14일. 엄 대장은 시신 수습을 위해 셰르파 8~9명과 함께 네팔 히말라야산맥의 8000m 이상 주봉(主峯) 중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로 향했다. 당시 그의 컨디션은 난조(亂調)였다. 찬바람을 많이 마셔서 목이 상하고 혀가 자꾸만 목구멍으로 말려 들어가 4일간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8400m 위치에 설치된 마지막 캠프로 향하던 중 말려 들어간 혀가 기도(氣道)를 막기도 했다. 앞서가던 한 셰르파가 우연히 뒤를 돌아보고는 그의 혀를 강제로 잡아당겨 겨우 위기를 넘겼다. 엄 대장은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눈 속에 묻혀 있는 박 대원의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은 이미 얼음덩어리가 돼 있었다. 무게만 100kg이 넘었다. 시신을 수습해 내려온 지 4시간 정도가 지나자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눈보라와 함께 일진광풍(一陣狂風)이 휘몰아쳤다.
 
 
  “무택아, 이제 간다… 내려간다”
 
엄홍길 대장이 네팔 히말라야산맥에서 한 소녀와 머리를 맞대고 인사하고 있다. 엄 대장은 “16좌 登頂할 때는 산 정상만 보고 살았다. 산에서 내려오니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사진=엄홍길휴먼재단 제공
  “히말라야 산은 일반 등산로 개념이 아니에요. 도처가 낭떠러지 암벽이에요. 시신을 묶고 높이가 100여m 되는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데 쾌청했던 날씨가 확 변하더라고요.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바람이 불고 눈보라 치고…. 순간적으로 직감했어요. ‘여기서 더 무리했다가는 우리도 대형 인명참사 나겠다. 포기하자. 더 이상 안 된다. 여기까지만 에베레스트 신이 허락해주시는 것 같다.’
 
  무택이도 ‘대장님, 여기까지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제 선배와 후배를 여기서 잃어버렸는데 저만 어떻게 내려갑니까’ 하고 마음을 전하는 것 같더라고요. 양지 바른 능선에 돌무덤으로 무택이를 안장하고 기도했어요. ‘무택아, 언제 또 올지 모르겠지만 모든 한을 풀고 편히 잠들기 바란다. 이제 간다. 내려간다, 무택아.’”
 
  ― 박 대원 시신을 안장하고도 하산하는 길이 힘들었나요.
 
  “전혀요.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먹구름이 다 걷히더니 눈이 그쳤어요. 거기가 8000m 고도인데 바람 한 점 없었어요. 갑자기 한겨울에서 봄으로 확 바뀐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저도 내내 몸이 안 좋았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생기더라고요. 뭐에 빨려 들어가는 듯이 발걸음도 빨라지고 몸이 가벼워지더라고요. 그날 밤 9시에 제2전진캠프(중간 보급지, 6800m)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내려갔어요.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떠서 밤인데도 별빛에 길이 훤히 보일 정도였어요. 무택이 생각이 났죠. ‘네가 대장님 편히 내려가라고 힘을 줬구나. 그래 고맙다.’”
 
  엄 대장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세 살 때부터 서울 도봉산 중턱에서 성장했다. 산장(山莊)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캠핑·암벽등반을 하러 오는 등산객들을 볼 기회가 많았다. 도시에 있는 학교를 가기 위해서 매일 1시간 넘게 걸리는 산길을 왕복했다. ‘산의 세계’에 운명적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제가 산에 빠지니까 부모님께서 만류를 많이 하셨죠. 집안 장사는 거들떠도 안 보고 산에 미쳐 돌아다녔으니까요. 돈도 돈이지만 저와 같이 간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등반을 더 완강히 반대하셨죠. 그래도 저는 그때 산밖에 생각이 안 났어요. 불효자식이었죠.”
 
  젊은 시절 솟아오르는 혈기(血氣) 하나로 국내의 험산준령(險山峻嶺)을 섭렵했던 그도 히말라야산맥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듭된 실패 때문이었다. 히말라야 16좌를 완등하기까지 총 38번 등정에 도전해, 이 중 성공은 20번이었고 실패는 18번이었다. 성패(成敗)가 비슷했다. 엄 대장은 ‘16좌 완등’ 경지에 오르면서 비로소 산의 진면목(眞面目)을 깨달았다.
 
 
  “등정 成敗는 날씨가 가른다”
 

  “사람들이 그럽니다. ‘8000m 고봉을 오르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요. 원정대의 팀워크, 대원들의 체력·정신력·기술력 등 다 중요하죠. 그런데 등반의 성패를 좌우하는 게 뭔지 아세요? 날씨입니다. 산은 정복할 수 없고, 자연의 힘은 절대 인간이 이겨낼 수 없어요. 단지 순응하고 적응할 뿐이죠. 그걸 이겨낸다? 그건 죽음을 선택하는 길이죠…. 저는 이제 산이 보여요. 산이 막 움직이는 게 보여요. 저기 보면 곧 떨어질 바위가 불안하고, 눈사태 날 것 같은 설산(雪山)의 기운이 느껴져요. 어마어마한 불안 요소들이 산에 있다는 게 보여요. 그걸 알면서도 헤쳐나가야 하니까 ‘나 자신을 극복하는 게’ 가장 힘들죠. 죽음에 대한 공포, 실패에 대한 두려움. 내면에서는 얼마나 갈등이 심하겠어요. 그래서 등산에서는 ‘빨리 가고 빨리 내려오는 게’ 능사가 아니에요. 자연을 느끼고 관찰하면서 안전하게 천천히 오르내리는 게 좋죠.”
 
  ― ‘자기 극복’을 강조했는데, 요즘은 ‘자기 위로’ ‘자기 위안’ 시대 같습니다. 젊은이들도 단순히 실패에 대한 긍정 수준을 넘어서서, 도전과 희생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현실안주형’ 성격을 띠는 것 같기도 합니다.
 
  “누구나 ‘나는 이것만큼은 꼭 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잖아요? ‘이건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열정적인 에너지와 ‘자기 희생’이 필요해요. 젊은이들이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자기 만족으로만 살아간다는 건 사회 전체적으로도 좋지 않은 일이죠. 미래에 대한 도전을 통해 자기 정신과 마음이 강해지지 않으면 퇴보하기 마련이에요. 청춘의 재산이 뭔가요. 패기, 근성, 자신감이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그게 없는 거 같아요. ‘어휴, 저게 되겠어? 안 돼. 되면 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이런 식의 마인드로 쉽게 포기하고 좌절한다면 부정적인 생각만 계속 드는 거죠. 뭐든지 행동으로 움직이고 도전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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