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인생 2막

교수·강연가·저술가로 활발하게 달리는 신은경 前 앵커

“내 인생은 후반전이 프라임타임”

글 : 이근미  객원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18대 총선 낙선 이후 ‘광야의 시간’… 2010년 극동방송 ‘하프타임 세미나’ 수강 후 ‘인생사명선언서’ 쓰고 용기 얻어
⊙ “전반전의 인생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하프타임 작전 여하에 따라 후반전에서 승패가 판가름 난다”(밥 버포드)
⊙ “준비 없이 은퇴를 맞아 우왕좌왕하지 말고 신호가 왔을 때, 기회가 있을 때, 잠시 멈추고 전략적 하프타임 가져야”

申恩卿
1958년 출생. 성신여자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영국 웨일스대학교 대학원(언론학 박사) / 1981~1992년 KBS 〈9시 뉴스〉 진행,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 역임. 現 차의과학대학교 의료홍보미디어학과 교수 / 저서 《9시 뉴스를 기다리며》 《홀리 스피치》 《신은경의 차차차》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
  경기의 전반과 후반 사이의 하프타임은 선수가 휴식을 취하면서 후반전을 대비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100세 시대의 하프타임은 50세일까? KBS 〈9시 뉴스〉 앵커를 지낸 신은경(申恩卿·61) 교수(차의과학대학교 의료홍보미디어학과)는 최근 발간한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에서 “늙어가는 일은 매뉴얼대로 가는 것이 아니다. 가장 나답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했다.
 
  2010년 우연히 하프타임 세미나에 참석하여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는 신은경 교수는 후반기 인생과 관련된 글을 쓰고 강연하는 일에 열심이다. 2010년은 그녀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50대에 진입하여 한창 열심히 달려야 할 때인데 아무 곳에서도 불러주지 않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어요. 돈을 한 푼도 못 벌어 가진 돈을 조금씩 헐어서 쓰고 있었으니 마음이 불안했죠.”
 
  2008년 4월, 18대 총선(總選)에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서울 중구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후 그 어떤 활동도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17대 국회의원(한나라당)이었던 남편 박성범(朴成範) 전 의원이 공천을 받지 못해 자신이 대신 나섰던 연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음해사건에 휘말렸어요. 남편이 시당(市黨)위원장을 맡고 있어 공천에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매일 집에 찾아왔어요. 그중에 당직자 친척이라는 여자분이 돈을 주려 하고 남대문시장에서 산 물건도 놓고 가고 그랬어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선거 브로커였더라고요. 돈을 받지 않았고 물건도 다 돌려보냈는데 앙심을 품은 그 여자가 한나라당 클린센터에 고발을 했어요. 그 여자가 돈을 돌려받았다고 번복했지만 이미 당에서 검찰에 고발을 한 상태여서 문제가 커졌지요.” 박성범 전 의원은 재판 끝에 대법원에서 무죄(無罪)판결을 받았고 음해했던 여자는 구속되어 1년 넘게 형을 살았다.
 
 
  ‘광야의 시간’
 
신은경 교수는 남편 박성범 전 의원의 명예회복을 위해 2008년 총선에 출마했다.
  “사건이 시작될 때는 1면에 크게 보도되었는데 1년이 지나 재판이 무죄로 끝났을 때는 사회면에 아주 작게 나왔어요. 그 문제가 깨끗이 마무리되고 남편이 대선(大選)을 위해 열심히 뛰었지만 공천을 받지 못해 충격이 컸죠.”
 
  10년 넘게 지역을 위해 일한 현역 의원인 남편 대신 중구와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이 전략공천을 받자 그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나선 것이라고 한다.
 
  “출마하면 안 될 거라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던 거 같아요. 정들었던 주민들이 저를 찍어주지 않자 세상이 나를 거절했다, 사람들이 나를 거부했다는 생각에 휩싸이게 되었어요. 내 인생의 바닥을 친 광야의 시간이었지요.”
 
  그야말로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하면서 사람도 안 만나고 외부활동도 없이 죽은 듯 지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다른 가족들이 위로하게 되는데 우리는 둘 다 괴로우니까 서로 그럴 처지가 아니었어요. 남편은 제3자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정치를 그만둔 거니까 더 괴로웠을 거예요. 혼란스럽고 명예도 되찾고 싶고 심경이 복잡했겠죠. 그냥 컴퓨터나 들여다보며 지내더라고요. 당시 우리는 정치적인 화제는 피하고 일상적인 대화만 하고 지냈어요.”
 
  그 기간에 유일하게 위로가 된 사람은 현재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동아시아 지역학을 전공하는 딸이었다.
 
  “혜리가 그때 중학생이었는데 처음으로 딸에게 내 손으로 밥을 해서 먹이며 엄마 노릇을 했어요. 머릿속으로는 별별 생각이 다 왔다 갔다 했죠. 지금 이 시간이 내 인생에 무슨 의미일까, 내게 닥친 고난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고난의 제공자가 가장 기뻐할 일이 뭘까, 그런 생각들이었죠. 가까스로 마음을 붙든 건 우리가 무너지고 좌절하면 우리를 힘들게 한 사람이 기뻐하겠지? 그렇다면 무너져선 안 되지, 그런 생각들이었어요. 그때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내가 당선되었다면 무엇이 가장 아쉬웠을까. 꼽아보니 가족과 신앙생활일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가족에게 충실하면서 성경과 다양한 책을 보면서 지냈어요.”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라
 
  많지 않은 돈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뭔가를 하려 했지만 그 뭔가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영어학원을 낼까, 요리를 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막연하게 지내던 중 2010년 11월 극동방송에서 하프타임 세미나를 한다는 안내가 귀에 들어왔다.
 
  “참가비를 내고 일주일에 한 번씩 5주 동안 강의를 듣는 세미나였어요. 자기생애 주기 그래프를 그려서 언제가 좋았고 언제가 바닥이었는지 살펴보면서 재정상태, 인간관계, 가족관계, 건강, 재능, 이 다섯 가지를 점검하여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 질문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발견하면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를 질문하여 답을 찾는 거죠.”
 
  《하프타임》의 저자 밥 버포드는 ‘운동경기에서 값진 승리를 위해 작전타임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도 승리의 후반전을 위해서 인생의 하프타임 전략이 필요하다. 전반전의 인생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하프타임 작전 여하에 따라 후반전에서 승패가 판가름 난다. 후반전을 멋지게 살기 위한 작전 수립을 위해서는 나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주창했다. 인생의 전반부는 성공을 추구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취업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재산을 늘리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만, 후반부는 자기 안의 창조성과 힘의 씨앗을 잘 가꾸어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시기라는 것이다. 신은경 교수는 하프타임 세미나로 인해 자신의 후반기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했다.
 
  “인생의 목적이 ‘성공’에서 ‘의미’로 옮아가도록 돕는 것이 하프타임 세미나의 목적이에요. 세미나를 통해 나 자신이 ‘꽃병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2년 7개월 동안 사회와 유리되다시피 한 생활을 하여 자존감이 매우 낮아진 상태였는데 되돌아보니 좋은 일이 많았더라고요. 〈9시 뉴스〉를 할 때 국민이 다 봐주시고, 유학도 하고, 남편 뒷바라지하면서 칭찬도 많이 받았잖아요. 그런 시간은 오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고 수많은 고통은 조각칼로 무늬를 새긴 시간이라는 걸 깨달은 거죠. 걸작품을 만들려면 그림도 그리고 홈도 파야 하는 것처럼, 좋은 시간도 있고 고통의 시간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다 이해가 됐어요.”
 
 
  ‘거룩한 뻥’의 힘
 
  하프타임 세미나는 밥 버포드의 이론을 한국으로 들여온 박호근 박사(하프타임코리아 대표)가 진행했다. 신 교수는 강의를 들으며 스스로를 돌아봤다.
 
  “마음이 어두우면 자신을 깨닫지 못해요. 강의를 들으면서 내가 가장 잘하는 게 뭐였나, 그걸 생각했어요. 오랜 기간 아나운서로 일해 온 국민이 저를 알고 있는데 저의 정체성(正體性)을 깨닫지 못하고 영어학원을 해서 돈 벌까, 요리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5주 차 때 ‘인생사명선언서’를 작성하는 시간이 있어요. 예전에는 막연히 무얼하고 싶다, 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 내 인생의 프레임을 짠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사명선언서’는 ‘무슨 일을, 어떤 매체를 통해, 어떤 대상에게, 어떻게 하겠다’라는 공식에 맞춰서 써야 한다. 신은경 교수는 이 공식에 따라 ‘성경을 바탕으로 한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여, 방송과 강연과 저술을 통해, 청소년·청년·여성·직장인·신앙인들의, 삶을 변하게 하고 싶다’라고 작성했다.
 
  “이 공식에 맞춰서 꼭 써보시길 권해요. 저는 정말 제가 쓴 대로 됐거든요. 하프타임 강의를 듣는 동안 《말의 힘》이라는 책에서 읽은 ‘사람은 자신이 던진 말을 따라간다. 말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문구가 생각났어요. 《말의 힘》 저자는 이런 선언을 ‘거룩한 뻥’이라고 했는데 자신을 위해 거룩한 뻥을 칠 필요가 있어요. 아무도 저를 찾지 않을 때였으니 방송, 강연, 저술은 전혀 가능성이 없었어요. ‘인생사명선언서’를 쓰는데 어쩐지 그대로 될 것 같은 용기가 생기더군요. 말의 힘이 스파크가 나면서 이거로구나, 딱 그게 느껴졌어요.”
 
  얼마 안 되어 선언한 대로 일이 움직여 스스로도 놀랐다고 한다.
 
  “극동방송 PD가 저에게 간증 프로그램에 나와달라는 거예요. 굉장히 오랜만에 방송에 출연했고 그게 인연이 되어 북한에 매일 5분씩 보내는 《조선어성경》 읽기 봉사를 하게 되었어요. 극동방송에서 제 얘기가 나간 뒤 CTS TV의 간증 프로그램 〈내가 매일 기쁘게〉에 출연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세상〉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얼마 후에 CTS의 간판 프로그램인 〈7000 미라클〉의 MC를 맡았어요. 출판사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책 얘기를 꺼냈더니 계약하자고 하여 2012년에 《홀리 스피치》가 나왔어요. 책을 출간하자 기업과 학교, 교회에서 소통 리더십과 동기부여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이어졌어요. 2년이 채 안 되어 제가 ‘인생사명선언서’에 쓴 세 가지 일을 다 하게 돼 정말 놀랐죠.”
 
 
  정치 미련 완전히 버려
 
  열심히 달리고 있을 때 여기저기서 19대 총선에 출마하라는 말들이 들려왔다.
 
  “지역 여론이 좋으니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들 했어요. 망설여졌지만 미련이 남아 있었던지 출마하고 싶더라고요. 2011년 말에 예비후보로 사무실을 내고 준비를 시작했지만, 막상 공천 때가 되니 또 전혀 뜻밖의 분을 낙점하더군요. 여론조사에서 제가 훨씬 앞섰지만 그런 건 소용없었어요. 당시 공천받은 분은 결국 낙선했어요. 그때 마음을 완전히 접었어요. ‘선거는 노력이나 뜻이 있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과 제가 한 번 출마를 했지만 정치인이라기보다 ‘정치인을 돕는 아내의 이미지가 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1995년부터 남편 지역구를 관리하면서 어느 누구보다 지역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했지만 그건 저만의 생각이었던 거죠. 하프타임 세미나 때 작성한 ‘인생사명선언서’에 정치는 없었는데 잠시 마음을 팔았어요.”
 
  신은경 교수는 안 되는 일에 오래 집착하지 않는 것도 지혜라고 했다.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가 쉽지 않아요. 아주 오랫동안 도전했는데도 안 됐다면 스스로를 파악해 봐야죠. 국회의원에 적절하지 않거나 성품 자체가 기질적으로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낚싯대를 여러 개 드리우고 살아야 해요. 꼭 국회의원이 아니어도 자신이 가진 다른 재능과 역할이 있을 거예요. 안 되는 한 가지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때 이후로 자신은 물론 남편도 정치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고 한다.
 
  “남편은 저를 통해 명예회복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제가 너무 오래 자신을 뒷바라지했다며 저를 지원해 주려고 했죠. 국회의원이 되는 건 지역과 사회를 위해 일할 좋은 기회라며 ‘한번 해볼 만한 일이야’라고 했어요. 남편은 정치를 그만둔 이후 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회사의 고문이나 자문 일도 했어요. 얼마 전에 ‘내가 정치를 계속했으면 벌써 죽었을 거야’라고 하더군요. 남편은 술과 담배를 완전히 끊고 편안하게 지내요. 마음이 여유롭고 넉넉하대요. 요즘 저한테 일을 너무 많이 한다며 좀 줄이라고 잔소리를 해요.”
 
 
  ‘흙 묻은 금수저’의 도전
 
신은경 교수는 전국을 누비며 인기 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신은경 교수는 2003년 한세대학교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2년 만에 사임했다. 당시만 해도 남편이 활발하게 정치를 할 때여서 지역구 관리가 더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후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내며 외부 강의를 간간이 했다.
 
  18대 때 낙선한 뒤 외부의 요청이 완전히 끊겼다가 하프타임 세미나 참가 3년 만인 2013년에 차의과학대학교 의료홍보미디어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2016년 3월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에 임명되어 2년간 재직하다가 지난해 9월 다시 차의과학대학으로 복귀했다. 하프타임 세미나 이후 세 권의 책을 집필했고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전국을 무대로 강연하느라 매일 바쁘게 달리고 있다.
 
  신은경 교수는 청년들에게도 인기 있는 강사인데 강연장에서 자신을 ‘흙 묻은 금수저’라고 소개한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1차에 떨어지고 후기대학으로 들어가 열등감에 싸여 대학생활을 했고, 교사 시험, 기업 입사 시험에 모두 떨어졌어요. 방송국도 세 번 만에 합격했고, 정치하는 남편 뒷바라지로 갖은 고난과 시련을 다 겪었어요. 그러나 부모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녀이니 저는 영원한 금수저지요. 부유하고 가난한 건 문제가 안 돼요. 모든 좌절과 고난이 흙을 묻히는 일이라면 살다가 흙을 좀 묻히는 건 괜찮아요. 털면 되니까. 우리는 영원한 금수저예요. 이렇게 말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여요.”
 
  그녀는 1981년부터 1992년까지 11년간 KBS 〈9시 뉴스〉 앵커를 지낸 전설의 방송인으로 최초의 컬러 TV 앵커, 최초의 여성 단독 앵커 등 다양한 기록을 갖고 있다. 1981년 입사하자마자 바로 〈9시 뉴스〉 앵커 자리에 앉아 승승장구한 그녀에게 갈증이 없었을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저는 늘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영어교육과 학생들은 통번역대학원에 가는 게 로망이었는데 ‘내가 무슨…’, 그런 생각만 하다가 취업을 했어요. 재직 중에 KBS 연수원에 통번역대학원 교수님들이 오셔서 강의를 한 적이 있어요. 제가 통번역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하자 현업에 있는 사람들이 공부를 하면 잘 활용할 수 있다며 도전해 보라고 하셔서 시험을 쳤는데 된 거예요. 그때가 입사 5년 차였는데 휴직을 하겠다고 했다가 야단만 맞고 오전에 4시간, 밤에 4시간 근무하는 걸로 회사에서 편리를 봐줬어요. 〈9시 뉴스〉 앵커라서 좋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 2시에 출근하여 밤 11시까지 근무하고 일요일에도 특별 생방송 때문에 출근할 때가 많았어요. 그러다가 학교에 다니게 되어 정말 좋았어요.”
 
 
  ‘박수 칠 때 떠나자’는 생각에서 유학 결심
 
2004년 총선 당시 남편 박성범 후보 및 지역구민들과 함께 에어로빅을 하는 신은경 교수. 당시 신 교수는 내조를 잘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오전 6시에 출근하여 라디오 뉴스를 진행한 뒤 10시쯤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다시 오후 6시에 회사로 돌아와 일하는 생활을 2년간 계속했다.
 
  “〈9시 뉴스〉 앵커인데 더 도전할 필요가 있냐고들 하셨지만 위성으로 연결하여 영어로 인터뷰하는 일이 많아서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어요. 아침에 방송하고 청계고가도로를 넘어가는데 피곤했지만 사는 것 같았어요. 너무 피곤해서 잠깐 졸다가 앞차와 살짝 부딪친 적도 있지만 공부할 수 있어 행복했죠. 88 서울올림픽 때 공부한 덕을 많이 봤어요.”
 
  통번역대학원 도전 후, 7년 만인 1992년에는 영국 유학을 떠났다.
 
  “단독으로 주말뉴스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어요.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시점이었죠. ‘박수 칠 때 떠나자’는 생각에서 유학을 결심했어요. 2년 휴직을 하고 영국 웨일스 카디프대학에서 언론학 석사 과정을 시작했어요. 웨일스대학교 저널리즘 센터는 전 세계의 중견 언론인들이 찾는 곳이에요. 10년 이상의 경력이 있으면 석사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박사 과정을 밟을 수 있게 해주거든요.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을 좀 하다가 돌아와서 어떻게든 공부를 이어가겠다는 생각으로 2년 휴직계를 냈던 거죠.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에 들어가 보니 본국에 왔다 갔다 하면서 공부하는 게 쉽지 않겠더라고요. 핀란드 헬싱키에서 온 기자는 박사 공부를 7년째 하고 있었어요.”
 
  2년 만에 귀국해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 그때까지 영국문화원의 후원으로 유학을 했지만 더 이상 지원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두렵고 낭떠러지 같았죠. 왔다 갔다 하다가는 박사 학위를 못 받을 게 뻔해 결단을 했어요. 제가 공부하러 간 걸 온 국민이 아는데 창피하잖아요. 그때 공부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어요. ‘50년 동안 다른 정치 시스템에서 변화된 남북한의 언어 이질화’를 주제로 500페이지짜리 논문을 써서 1995년 7월에 언론학 박사 학위를 받았어요. 돈이 부족하니 빨리 학위를 받기 위해 피 말리는 노력을 했어요. 사람마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저는 공부 많이 한 사람이 늘 부러웠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건 해야 해요. 그때 모험 같은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지금 후회했을 거 같아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사별하고 혼자 지내던 박성범 전 의원과 결혼을 했다.
 
 
  책 쓰는 귀여운 할머니가 꿈
 
신은경 교수의 책들. 신 교수는 “책을 계속 내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신은경 교수는 KBS 재직 중에 두 번의 도전을 한 것이 자신에게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고 말한다. 제아무리 바쁠 때여도 미래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라는 게 그녀의 권고이다.
 
  “100세 시대라고 해서 50세까지 기다릴 일이 아니에요. 서른, 마흔에도 하프타임을 가질 수 있고 일흔을 훌쩍 넘었다고 안타까워할 이유도 없어요. 하고 싶은 불씨를 살려야 해요. 하프타임을 가지면서 동기와 모티브를 생각해 보는 게 중요해요. 준비 없이 은퇴를 맞아 우왕좌왕하지 말고 신호가 왔을 때, 기회가 있을 때 잠시 멈추고 전략적 하프타임을 가져야 해요. 그러면 후반전 휘슬이 울릴 때 분명한 목표를 갖고 달릴 수 있어요. 후반전은 속도도 중요하지만 방향성과 의미가 정말 중요해요.”
 
  《홀리 스피치》에 이어 《신은경의 차차차》를 낸 그녀는 은퇴자들을 위한 강연을 할 때면 ‘차차차!’를 크게 외친다.
 
  “차차차는 챌린지(Challenge·도전), 체인지(Change·변화), 찬스(Chance·기회)의 앞글자를 딴 구호예요. 도전하면 기회가 생기고 삶의 변화가 온다는 뜻이죠. 은퇴는 곧 새로운 시작이니 어디든 도전해 새로운 기회를 맞고 삶의 멋진 변화를 이루어야죠. 우선 재능기부나 봉사활동을 시작해 보는 것도 좋아요. 은퇴한 아나운서 선배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전국의 초·중·고등학교를 순회하며 아름다운 우리말 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계세요. 왕년에 했던 일과 크게 비교되는 허드렛일을 할 수도 있지만 일단 시작하는 게 중요해요.”
 
  그녀가 최근 발간한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는 《백세시대신문》에 5년간 연재했던 칼럼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인생 이모작과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내용, 노인에 대한 다양한 통계와 사례를 담았다.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이 앞으로 할 일을 정했다고 한다.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에서 일할 때 청소년들을 직접 만나보니 순진하고 예뻤어요. 형편이 어려워 힘든 아이들도 많았는데 그 아이들을 직접 도와주는 것 이상으로 전체 청소년을 긴 안목에서 긍정적으로 이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고마워요’ 운동을 펼치면서 언어폭력 줄이기 캠페인을 벌였어요. 고마워요 운동을 학교와 기관, 사회, 나아가 국가적으로 펼치고 싶었는데 2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 아쉬움이 있어요. 진흥원에 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 에든버러 공이 시작한 ‘신체, 자기계발, 봉사, 탐험’ 네 가지 활동을 자기 주도적으로 펼치는 ‘자기도전 포상제’도 실시했는데 그 일도 계속하고 싶어요. 청소년들이 네 가지 활동을 충실히 하면 정말 멋진 인물이 되거든요. 아이들을 잘 키워야 미래가 있어요. 뜻있는 사람들과 청소년을 위한 유튜브 방송을 필두로 청소년 운동을 시작할 마음을 키우는 중이에요.”
 
  정말 자신이 원하는 건 계속 책을 내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일이라고 한다.
 
  “일본의 귀여운 할머니들 활약이 대단해요. 95세 작가 사토 아이코 씨의 책 《90세, 뭐가 경사냐》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72세에 시작하여 사진작가가 된 92세 할머니 니시모토 키미코 씨는 책을 내고 전시회도 열었어요. 시바타 도요 할머니는 99세에 시집 《약해지지 마》를 출간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어요. 은퇴 이후 저도 계속 책을 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어요.”
 
  신은경 교수는 60세부터 화려한 인생의 프라임타임이 시작된다며 ‘인생사명선언서’를 작성한 뒤 과감하게 도전하라고 당부했다.⊙
조회 : 11756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201906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