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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발굴

‘군인 朴正熙’를 두 번 살린 李根陽 장군

“張都暎에게 말해 朴正熙를 2군 부사령관으로 가게 했다”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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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正熙 준장이 白仁燁 6군단장과 싸우고 “군복 벗겠다”고 할 때, 張都暎에게 말해 7사단장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
⊙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方應謨 조선일보 사장 도움으로 陸士 3기 입교
⊙ 李龍文·朴正熙, 부산정치파동 당시 反이승만 병력 동원 궁리… ‘군인이 무슨 정치를 한단 말이냐?’고 반대
⊙ 金鍾泌이 평안도 軍脈 숙청 리스트에 이름 올렸지만, 朴正熙가 직접 지워

李根陽
1925년 출생. 육군사관학교 졸업 / 육군본부 작전처장·정보처장, 제1군 작전처장, 제12사단장, 국방부 기획국장, 제2군 부사령관, 육군제3사관학교 교장, 한국특수강공사 사장, 석탄공사 사장, 민주평통 자문위원 역임
사진=조현호
  2년 전쯤 경기도 용인에서 병원을 하고 있는 지인(知人)으로부터 자기 병원 고객 중에 이근양(李根陽·94) 장군이라는 분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이근양 장군?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조갑제(趙甲濟) 전 《월간조선》 대표가 쓴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그 이름을 본 기억이 있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용문(李龍文)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과 박정희 차장 밑에서 근무했던 편제과장 이근양 중령. 그때 그분 연세가 서른 살 전후였다고 해도 90세가 훨씬 넘었을 텐데, 그분이 아직도 살아 계신단 말인가? 얼마 전 지인에게 “‘찾아뵙고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이근양 장군께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근양 장군은 흔쾌히 응낙해 주었다.
 
  신년 벽두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의 한 아파트에 사는 이근양 장군을 찾아갔다. 94세의 노(老)장군은 정정했다. 얼굴은 많아야 80대 초반으로 보였고,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 고향이 평북 정주더군요.
 
  “그래요. 조선일보 방응모(方應謨) 선생과 같은 고향이지요. 실제로 태어난 곳은 만주 철령현 낭석산 사타자촌(沙垞子村)이라는 곳이었소.”
 
  ― 부친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독립군이었소.”
 
  한 세기 가까운 이근양 장군의 일대기, 아니 윗대부터 시작하면 한 세기가 넘는 이야기는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부터 시작된다.
 
 
  祖父, 한일합방 후 네 아들과 중국 망명
 
이근양 장군의 부친(이은순)은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독립운동을 했다.
  이근양 장군의 할아버지(이진건)는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아들 네 명을 데리고 고향 평북 정주를 떠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조부는 ‘아들 하나는 나라에 바치겠다’는 생각에서 아들 이은순(李殷淳)을 이시영(李始榮) 선생 등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 입교시켰다. 이은순은 일제(日帝)가 만주를 침략한 후에는 한국독립당 계열에서 군자금을 모집,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했다. 이를 위해 도회지인 봉천(奉天·지금의 선양[瀋陽]) 서탑으로 이주, 신흥상회라는 잡화점을 열었다. 그 이름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따온 것이었다. 신흥상회는 봉천을 찾는 독립운동가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가끔씩 낯선 청년들이 우리 집을 찾아왔소. 그러면 아버지는 내가 자던 다락방에 그들을 함께 재웠소. 자려는데 보니까, 몸 여기저기에 감추어 두었던 쇳덩어리를 세 개 꺼내더니, 철컥철컥하면서 조립을 하는 거라. 모젤 권총이었소. 모젤 권총이 되게 커요. 그는 그걸 언제라도 손에 쥘 수 있게 옆에 두고 잠을 잡디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소.”
 
  부친은 여러 날 동안 집을 비우기도 했다.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다.
 
  ― 부친은 독립운동 수훈(受勳)을 했습니까.
 
  “일찍 돌아가셔서 수훈을 하지는 못했어요. 부산 피란 시절에 45세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일제에 붙잡혀 가서 얼굴에 천을 깔고 고춧가루물을 들이붓는 물고문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늘 콜록콜록하다가 돌아가셨어요.”
 
  독립운동가의 아들이었지만, 소년 이근양은 평범하게 자라났다. 봉천 서탑학교에서 초등(6년) 과정과 고등과(2년) 과정을 마쳤다. 그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독일에서 열린 3국동맹(독일·일본·이탈리아가 1940년 체결한 동맹조약) 체결 기념 학생미술대회에 출품, 히틀러의 얼굴이 새겨진 동메달을 받기도 했다.
 
  서탑학교를 졸업한 후, 소년 이근양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우리가 독립을 하려면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이근양은 시모노세키고등경리학교(2년제 전문대학에 해당)로 진학했다. 1944년 이근양은 도쿄(東京)에 있는 일본대학 미술과로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대학 입학 수속을 밟기 위해 도쿄를 찾던 날, 미국의 B-29폭격기들이 도쿄를 공습(空襲)했다. ‘일본에 있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이 든 이근양은 그길로 만주로 돌아왔다.
 
  스무 살 청년이 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본군의 징집영장이었다. 고민하던 아버지는 “일단 징집에 응한 후 돌아가는 추이를 보자”고 했다. 지린성에 있는 막석훈련소에서 석 달 가까이 훈련을 받다가 해방을 맞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한 김홍일(金弘壹) 장군이 민사처장으로 와서 재만(在滿)동포들의 귀국사업을 도왔다. 이 무렵 청년 이근양은 소련군에게 붙잡혀 소련군 묘지에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해방과 월남
 
  1945년 11월, 이근양 일가는 아버지의 고향인 평북 정주로 돌아왔다. 아버지 이은순으로서는 35년 만의 귀향(歸鄕)이었다. 하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된 고향에도 자유는 없었다.
 
  “공산당에서 미술동맹에 들어와라, 청년동맹에 들어와라 하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소. 아버지도 같은 생각이셨고…. 그래서 고향에 돌아온 지 한 달 만인 1945년 서탑학교 친구인 김용혁과 함께 38선을 넘었지.”
 
  하지만 속칭 ‘38따라지’들이 인연도 없는 남한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남한 땅은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곳이다’ 싶었다. 결국 이듬해 1월 말 다시 38선을 넘어 정주로 돌아갔다. 아버지께 남한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다시 내려가서 공부를 하라”고 했다. 다시 38선을 넘는 게 쉽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는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는 만주에서 남한으로 가려는 피란민들을 수용하는 수용소가 있었다. 그는 중국인 옷을 입고 갓 만주에서 넘어온 사람 행색을 하고 수용소로 들어갔다. 수용소의 피란민들은 몇 달째 기약 없이 남한으로 보내 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청년 이근양의 수완이 발휘됐다. 나이 든 한 분을 명목상 회장으로 세우고 자신은 부회장을 맡았다. 피란민들을 10명씩 10개 반으로 나누고 회비로 10원씩 내라고 했다. 그 돈으로 종이를 사서 ‘신막방면통과원서’라는 청원서를 썼다. 피란민들의 이름, 나이, 고향, 행선지를 적었다. 그걸 가지고 평양보안서 부서장을 찾아갔다.
 
  “‘피란민들이 한 달 넘게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 이들이 남으로 내려가야 남에서도 혁명운동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우선 신막까지만 내려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지. 다음 날 오라고 하더군. 다음 날 찾아갔더니, 신막으로 내려가는 걸 허가한다면서 커다란 사각도장을 찍어 주더군.”
 
  이근양은 “기왕이면 차량도 제공해 달라”고 했다. 그 요구도 받아들여졌다. 그는 100여 명의 피란민들과 함께 차체에 분필로 커다랗게 ‘남쪽 피란민 열차’라고 쓴 남행(南行)열차에 올랐다.
 
  신막에서 그는 소련군으로부터 38선 접경의 남천까지 가는 화물열차를 얻어 냈다. 만주에서 소련군에게 붙들려 며칠 노역하는 동안 주워들은 몇 마디 러시아어가 밑천이 됐다. 남천보안서에서 알려주는 대로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니 의정부였다. 의정부에는 ‘남조선 경찰’과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나와 있었다.
 
 
  서북청년회 창설 참여
 
이근양 장군에게 육사 입교 추천장을 써 준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
  이근양 장군은 ‘서북청년회’라고는 했지만, 이때는 아직 서북청년회가 정식으로 발족되기 전이었다. 이 무렵 북한에서 월남(越南)한 청년들은 일제가 남기고 간 공장 기숙사·창고·사찰·신사(神社) 등에 만들어진 합숙소에 기식하면서 하나둘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1946년 4월 평북 정주 출신 독립운동가 선우기성(鮮于基聖)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 출신 청년들이 평안청년회를 결성했다. 평안청년회는 그해 11월 평안도·함경도·황해도·강원도(38선 이북 지역) 출신 청년단체들을 망라한 서북청년회로 발전했다. 흔히 ‘서북청년단’이라고 하는, 해방 이후 대표적인 전투적 우익단체가 출현한 것이다. 혜화전문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에 다니던 청년 이근양도 여기에 참여, 중앙위원이 됐다.
 
  하지만 그의 길은 따로 있었다. 바로 ‘군인의 길’이었다.
 
  “사촌형이 경찰학교에 진학하는 걸 보면서, 사관학교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지. 그런데 사관학교에 들어가려면 ‘사회유지(有志) 추천장’이 있어야 한다는 거라. 이북서 내려온 내가 사회유지를 어찌 알겠소? 그때 《조선일보》 방응모 사장님이 평북 정주 출신이라는 게 생각나더군. 무턱대고 조선일보사로 찾아갔지. 첫날은 비서에게 그냥 쫓겨났어. 다음 날 다시 찾아가서 ‘방응모 사장님 친척’이라고 했지. ‘너는 이가(李哥)인데 어떻게 사장님 친척이냐’고 하기에, ‘어머니쪽으로 먼 친척’이라고 했소. 비서가 들어가서 ‘정주에서 왔다는 청년이 친척이라면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면회를 왔다’고 하더군. 방 사장님이 들어오라고 하시기에 들어가서 큰절을 두 번 올렸지.”
 
  청년 이근양은 고향 선배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방응모 사장은 고향 후배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이근양이 이근택이라는 고향 친척 이름을 댔더니, 방 사장은 반색을 했다.
 
  “아! 이 참판, 내가 알지!”
 
  방응모 사장은 이근양이 가져온 추천장에 붓으로 서명을 한 후, 두루마기에서 사각 상아도장을 꺼내 찍어 주었다. 이근양은 큰절을 하고 물러나왔다.
 
  1947년 1월 13일 입교한 육군사관학교 3기생들은 그해 4월 19일 졸업했다. 338명이 입교, 298명이 임관했다. 노재현(盧載鉉) 전 국방부 장관, 최세인(崔世寅) 전 1군사령관, 박희동(朴熙東) 전 3군사령관, 양찬우(楊燦宇) 전 내무부 장관, 김현옥(金玄玉) 전 서울시장, 김창룡(金昌龍) 전 특무부대장 등이 동기생이다.
 
 
  전쟁 前夜
 
  해방 후 극심했던 좌우대립은 군대도 피해 가지 않았다. 육사 2기 출신 오일균·조병건 등이 교관으로 있으면서 3기생들을 좌경화(左傾化)시켰다.
 
  ― 오일균 등이 포섭공작을 해 오지는 않았습니까.
 
  “오일균 등은 생도들의 성분을 보고 밤 12시에 은밀히 하나씩 불러 포섭했다고 하는데, 내가 서북청년회 출신이었다는 걸 저들도 아니까 접근해 올 생각을 아예 안 했겠지.”
 
  교육기간은 95일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육사 3기 출신은 ‘일선 소대장에서 출발, 중대장·대대장 등 군의 정통 코스를 제대로 밟아 올라간 첫 기수로 꼽힌다(장창국 전 합참의장의 회고). 육군 소위 이근양의 임관 후 첫 근무지는 부산에 있는 5연대였다. 연대장은 백선엽(白善燁·육군참모총장·교통부 장관 역임) 중령이었다. 5연대 1대대에서 소대장을 하고 있는데, 얼마 후 백선엽 연대장이 그에게 군감대장(軍監隊長·헌병대장)을 맡겼다.
 
  군감대장 시절 그는 부산 부두노동자 2000여 명이 일으킨 소요를 진압하기도 했다. 이때 그와 함께 출동했던 부사관들 중에는 김시진(金詩珍) 중사, 박영수(朴英秀) 하사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나중에 육사에 진학, 장교로 임관했다. 김시진은 박정희 정권 시절 민정수석비서관을, 박영수는 전두환(全斗煥) 정권 시절 서울시장과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당시 제주에서는 9연대가 4·3사태 이후 빨치산들을 진압하고 있었다. 9연대 병력만으로는 부족해지자 5연대 2대대가 제주로 파병되어 9연대에 배속됐다. 빨치산 토벌은 녹록지 않았다. 토벌군이 제주 한림을 점령했지만, 3중대와 6중대가 잇달아 전멸당했다. 이근양의 중대에도 출동명령이 내려왔다.
 
  “전투에서 부하들의 희생을 줄이려면 포위전투를 하는 게 제일이오. 빨치산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트럭 한 대에 1개 분대 병력을 태워 마을을 들락날락하게 했지. 적의 신경을 그쪽에 집중시키기 위해서였소. 그러는 한편 1개 소대는 밤새 산을 돌아가서 적의 배후를 포위한 후, 새벽에 기습공격을 했소. 100여 명을 포로로 잡았지.”
 
 
  朴正熙와의 첫 만남
 
  대위로 승진한 이근양은 옹진전투사령부에 전속(轉屬)됐다. 대위 계급장을 달고 18연대 1대대장으로 두락산전투 등을 치렀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때때로 적진을 향해 “어디에서 만나자”고 소리치기도 했다. 국군은 건빵을, 북한군을 감을 가지고 내려와 서로 바꾸어 먹었다.
 
  “그런 식으로 웃는 낯으로 만나다가, 결국 6·25라는 전면전을 일으키지 않았소? 웃으면서 대화하다가 기습을 하는 게 공산당이오.”
 
  옹진전투를 치른 18연대가 서울 서빙고로 이동해 왔을 때, 장도영(張都暎·육군참모총장 역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 그를 불러 정보국 조사과장을 맡겼다. 정보국에는 키가 작고 얼굴빛이 검은 문관(文官)이 한 명 근무하고 있었다. 여순반란 이후 숙군(肅軍) 과정에서 무기징역(無期懲役)을 선고받은 후 예편된 박정희 전 소령이었다. 장도영 국장과 이근양 과장 등이 식사하는 자리에 박정희 문관도 종종 동석했다.
 
  ― 그 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어땠습니까.
 
  “말수가 적고 침착하다는 생각이 들었소. 내가 후배이고 연하인데도 반말을 하지 않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이 무렵 청년장교 이근양은 평생의 반려자(박효숙·朴孝淑)를 만났다. 결혼 날짜는 1950년 7월 2일로 잡혔다. 장도영 국장은 덕수궁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피로연은 아서원에서 하라고 했다. 결혼식을 1주일 앞두고 전쟁이 터졌다. 두 사람은 제대로 된 결혼식도 못 올리고 그해 10월 결혼했다. 자녀들이 그런 부모를 위해 60년 후인 2010년 회혼식(回婚式)을 크게 치러 주었다.
 
  이근양은 1951년 5월, 28연대 부연대장으로 현리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는 국군 9사단과 3사단이 중공군에 포위되어 궤멸당한 6·25 전쟁 최대의 참패(慘敗)였다. 이근양 중령도 부대의 후퇴를 지휘하다가 팔과 다리에 총상을 입고 후송됐다.
 
  부상에서 회복된 후 그가 받은 보직은 국방부 전투상황실장이었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전투상황을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는 자리였다. 당시 국방부 장관은 이기붕(李起鵬)이었다. 후일 자유당 정권 말기의 비정(秕政)과 3·15부정선거의 원흉(元兇)으로 지목되어 비극적 최후를 마친 바로 그 사람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이기붕 국방 장관은 국민방위군 사건 등을 잘 처리해 평가가 좋았었다.
 
  어느 날 육군작전참모부장 이준식(李俊植) 소장이 그를 불러 “결혼했느냐?”고 물어보았다. 결혼했다고 했더니, 이준식 장군은 “정말이냐?”고 몇 번 되풀이해서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이기붕 국방장관이 그를 사위로 삼고 싶어 이준식 장군을 통해 결혼 여부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만일 이미 결혼한 몸이 아니었다면, 그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산정치파동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장교들. 앞줄에 이용문 국장과 박정희 차장. 이용문 뒤가 이근양 중령.
  1951년 12월 이근양 중령은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편제과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육군은 전쟁을 치르면서 급격히 팽창하고 있었다. 편제과장은 육군의 각급 부대들을 편성하고 병력과 무기를 배치하는 자리였다. 그는 편제과장으로 2년간 근무했다.
 
  그가 작전교육국 편제과장으로 있을 때 군(軍)은 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고 있었다.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1952년 7월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야당이 주도하는 국회가 개헌(改憲)문제를 놓고 정면충돌했다. 국회에서의 간선제(間選制)하에서는 재선(再選)이 어렵다고 본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을 ‘국부(國父)’로 숭상하는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기로 결심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제안했다. 반면에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내놓았다. 1952년 5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은 공비(共匪) 출몰을 이유로 부산, 경남, 전남·북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헌병사령부는 야당 의원들을 ‘국제공산당’으로 몰아 구금했다.
 
  하지만 이승만에게는 계엄에 동원할 실병력이 없었다. 이종찬((李鐘贊) 육군참모총장은 육군 병력을 계엄군으로 차출하는 데 반대했다. 육군본부 장교들도 이승만 대통령이 군을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는 데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시 장면(張勉) 전 국무총리와 가까웠던 이용문 작전교육국장 등이 한때 미군의 묵시적 후원 아래 반(反)이승만 거사를 모의했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작전교육국 편제과장
 
이근양 장군은 육군본부 편제과장 시절의 공로를 기려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이 수여한 표창장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사진=배진영
  ― 이용문 장군, 박정희 대령이 당시 반이승만 쿠데타를 논의했다면서요.
 
  “계획적인 쿠데타 모의가 있었던 건 아니오. 술을 마시면서 이용문 장군이나 박정희 대령이 ‘이것들, 확 뒤집어 버려? 2개 경비대대만 부산으로 보내면 된다’고 얘기를 나눈 정도지. 그때 부산을 비롯한 후방에 시설경비 등을 위해 5개 대대가 있었는데, 미군의 지휘권 밖에 있는 한국군 부대는 그게 전부였소. 나는 ‘일선에서 장병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군인이 무슨 정치를 한단 말이냐?’면서 결사반대했지. 두 사람은 ‘농담이야’라고 얼버무리더군.”
 
  부산정치파동은 결국 대통령직선제와 내각책임제를 섞은 발췌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해 7월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물러나고 백선엽 장군이 참모총장이 됐다. 이용문 장군과 박정희 대령을 비롯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군인들은 좌천됐다.
 
  하지만 이근양 중령은 편제과장으로 계속 남았다. 그는 편제과장으로 근무한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가 1954년 11월 편제과장을 그만둘 때 백선엽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준 표창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국내외 정세에 따라 육군의 대폭적인 확장이 요구되자 총병력 65만2000명에 대한 편제병력을 결정함과 동시에 미(美) 고위사령부와 긴밀히 연락 협조하여 금일의 대육군을 건설하는 기반을 조성하였으며 단기 4285년(1952년-기자 주) 7월 5일 보병사단의 개편을 비롯하여 245개 부대의 개편을 단행하여 전투력의 비약적인 증강을 도모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려 339개 부대에 달하는 다수 부대의 편제표를 가장 합리적으로 제정하는 등 육군발전에 기여한 바 지대하므로 자(玆)에 그 현저한 공로를 표창함.”
 
 
  朴正熙 준장 구하기
 
  이근양 대령은 1956년 7월 박정희 준장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진해 육군대학 학생으로서였다. 박정희 준장은 5사단장을, 이 대령은 6사단 2연대장을 마친 후였다. 육군대학을 마친 후 박정희 준장은 6군단 부군단장으로 나갔다. 이근양 대령은 육군본부사령이 됐다. 육군본부사령은 참모총장이 신임하는 장교가 맡는 요직이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백선엽 대장, 참모차장은 장도영 중장이었다.
 
  어느날 이근양 대령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육영수(陸英修) 여사였다. 육 여사는 박정희 준장이 며칠째 부대에도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술만 마시고 있다고 했다. 박 장군의 집으로 달려가 보니, 방안에는 술병이 뒹굴고 있었고, 박 장군은 술에 취해 있었다. 박 장군은 이 대령을 보자 대뜸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군복을 벗겠다”고 했다.
 
  “백인엽(白仁燁)이 말이야, 자기도 장군이고, 나도 장군인데, 그럴 수가 있어?”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의 친동생인 6군단장 백인엽 중장은 6·25 당시 용명(勇名)을 떨친 맹장(猛將)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군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괄괄하고 무모한 성격으로 악명(惡名)을 떨치기도 했다. 백인엽 군단장은 자기보다 하급자이지만 나이나 지적(知的) 수준이 높은 박정희 준장을 함부로 대했다. 결국 폭발한 박정희 준장이 군단장을 들이받고 집안에 틀어박혀 버린 것이다.
 
  “잘못하면 ‘근무지 이탈’로 박정희 장군의 군인생명이 끝날 수도 있겠더군. 함께 두꺼비(진로소주)를 마시며 ‘각하(당시는 장군만 되면 ‘각하’라고 호칭했음), 제가 알아보겠으니 좀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린 후, 다음 날 장도영 참모차장을 찾아갔지. 장 장군은 내 말을 듣더니 ‘백인엽이가 형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백 총장을 뵙고 의논해 보겠다’고 하더군.”
 
  백선엽 참모총장을 만나고 나온 장도영 차장은 “마침 7사단장 자리가 비게 됐는데, 박 장군에게 사단장을 한 번 더 할 생각이 있는지 의향을 물어보라”고 했다. 이근양 대령은 박 준장을 찾아가서 이 이야기를 전했다. 박정희 준장도 응낙했다. 1957년 9월 박정희 준장은 강원도 인제에 있는 7사단으로 부임했다.
 
  “박정희 장군이 5사단장을 할 때, 5사단도 강원도 인제군 원통에 있었소. 그 후 부대 배치가 바뀌면서 7사단이 인제로 가게 된 것이지. 박 대통령은 사단장을 두 번 했지만, 두 번 다 같은 곳에서 근무했어. 박근혜(朴槿惠)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유일하게 방문한 전방 사단이 인제에 있는 12사단인데, 그곳이 자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었기 때문일 거요.”
 
 
  “하동관에서 朴正熙 장군과 소주 자주 마셔”
 
현역 시절의 이근양 장군 부부. 사진에 자손들이 이 장군 부부의 건강을 기원하는 글들을 적었다.
  1950년대 후반, 이근양 대령은 빛을 보지 못했다. 대령 계급장을 8년이나 달았다.
 
  ― 죄송한 말씀이지만, 3기로 그때까지 대령이었으면 진급이 늦은 편 아니었나요. 이미 5기 선두 주자들이 별을 달았을 때인데….
 
  “진급하려면 위에 돈도 쓰고 그래야 하던 시절인데, 내게 무슨 돈이 있나….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지. 우동장사, 바늘장사, 안 해 본 게 없어. 다섯 명의 애들을 잘 키우고, 10여 년간 반신불수인 어머니를 모셨어. 그래서 내가 지금도 아내 말에는 절대복종이야. 하하하.”
 
  그는 수도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1960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작전처장을 맡았다. 준장이 맡는 자리였지만, 대령 계급장을 달고서였다. 여기서 그는 육군작전참모부장이 되어 나타난 박정희 소장과 다시 만났다.
 
  ― 박정희 장군과는 술을 자주 마셨습니까.
 
  “하동관에서 자주 마셨지. 둘 다 돈이 없으니까 곰탕 하나 시켜 놓고 두꺼비를 마셨어….”
 
  당시는 4·19의 영향으로 군부(軍部)도 부글거리고 있을 때였다. 육사 8기생들을 비롯한 젊은 장교들은 개인적으로는 인사적체에 대한 불만 때문에, 공적(公的)으로는 낙후된 조국의 현실에 대한 자각(自覺) 때문에 개혁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김종필 중령 등이 중심이 된 16인 하극상(下剋上) 사건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의 소산이었다. 4·19 직후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의 용퇴(勇退)를 촉구했던 박정희 소장은 군부 내 개혁세력의 리더로 간주되고 있었다. 때문에 최경록(崔慶祿·교통부장관·주일대사 역임) 육군참모총장, 김형일(金炯一) 육군참모차장 등 당시 육군 지휘부는 박정희 소장을 경원시하고 있었다.
 
  어느날, 작전참모부장실 행정관이 이근양 작전처장 방으로 뛰어왔다. “각하(박정희 장군)가 다 집어던지고 난리가 났다”는 거였다.
 
  “박 장군 방으로 가서 보니 재떨이도 도망가고, 커피잔도 날아가고…. ‘왜 그러시느냐’고 했더니, 또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해. ‘참모총장 이 ××가 미국 국방부에서 내가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고 왔다면서 날 보고 관두라고 한다’는 거야.”
 
 
  朴正熙, 2군 부사령관으로
 
5·16 후 청와대에 들어간 박정희 장군과 장도영 장군. 장도영 장군은 군에서 어려움에 처한 박정희를 여러 번 도와 주었다.
  박정희 소장이 격분한 것은 당시 미국이 군부 내 정군(整軍)세력의 리더였던 박정희 소장을 예편시키려 획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남로당 경력이 새삼 문제가 됐다.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은 현석호(玄錫虎) 국방부 장관, 최경록 육군참모총장을 만나 박정희 장군의 좌익경력을 거론하면서 예편 압력을 가했다. 미국을 방문했던 김영선(金永善·박정희 정권 시절 통일원 장관·주일대사 역임) 재무부 장관과 만난 미국 국방부 고위 관리도 “한국군의 작전참모부장(박정희)은 공산주의자”라면서 “만약 한국 정부가 박정희 소장을 그 자리에 둔다면 우리는 원조를 재고(再考)하겠다”고 했다. 김영선 장관은 귀국 후 이 이야기를 장면 총리에게 전했다. 장 총리는 최경록 육군참모총장에게 미국측의 뜻을 전달했다. 이 이야기가 박정희 소장의 귀에도 들어간 것이다.
 
  “박정희 장군에게 ‘그거 이상합니다. 미국 국방부에서 특정한 장교를 지명해서 빨갱이니까 내보내라는 얘기를 할 리가 없습니다. 박 장군도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라고 했지.”
 
  이근양 대령은 친분이 있던 송원영(宋元英·국회의원·신민당 원내총무 역임) 장면 총리 비서관, 김재순(金在淳·국회의장 역임) 외무부 차관에게, 박정희 장군과 관련해서 미국에서 말이 있었는지 물어보았다. 두 사람 다 평안도 후배여서 이 대령이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다음 날 두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소. 송원영 비서관은 ‘장면 총리에게 물었더니 그런 적이 없다고 했다. 자기들이 와서 얘기를 하니까 알아서 하라고 한 적은 있지만, 장 총리가 그런 애기를 한 적은 없다’고 하더군. 김재순 차관도 ‘미국 국방부에서 김영선 장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얘기를 전해 왔소.”
 
  이 말을 들은 박정희 소장은 최경록 참모총장에게 항의하러 갔다가 최 총장이 자리에 없자 김형일 참모차장과 대판 싸웠다. 김형일 참모차장은 평소 군부의 안정을 위해서는 급격한 정군논의는 자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정군 문제로 내내 박정희 소장과 대립했던 김형일 참모차장은 5·16 후 군복을 벗었다. 이후 그는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영입되어 박정희 정권에 대해 날선 비판을 했다.
 
  김형일 참모차장과 싸우고 나온 박정희 소장은 또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했다. 이근양 대령은 L-19 연락기를 타고 대구 2군사령부로 내려갔다. 2군사령관은 장도영 중장이었다. 박정희 장군의 처지를 들은 장도영 사령관은 “부사령관 자리를 하나 더 만들 테니, 박 장군에게 2군에 와 있으라고 하라”고 했다.
 
 
  5·16
 
1970년 일요화가회 행사에서.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근양 당시 회장, 왼쪽 끝이 김종필 전 국무총리.
  결국 박정희 소장은 2군 부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곳에서 군사혁명을 조직, 실행했다.
 
  ― 그 정도 사이면 박정희 장군으로부터 혁명에 동참하자는 제안이 왔을 법도 한데요.
 
  “박정희 장군이 ‘몇 번 대구에 한번 다녀가라’고 했는데 바쁘다 보니 못 내려갔지. JP(김종필)도 몇 번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왔는데, ‘야, 이놈아, 내가 3기고 너희는 8기인데, 만나고 싶으면 너희가 찾아와야지 누굴 나오라고 하나. 군인정신이 없다’고 야단을 치고 안 만났어요.”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났을 때, 이근양 대령은 육군작전참모부 정보처장이었다. 소식을 듣고 육군본부로 달려갔더니 혁명군이 가로막았다. “내가 육본 정보처장인데, 육본에 못 들어가는 게 말이 되느냐?”고 호통을 치고 육군본부로 들어갔다. 원주의 1군(야전군) 정보처장 이소동(李召東·1군사령관 역임) 준장과 서울과 전방의 상황에 대해 통화를 하고 나오니, 박정희 장군이 제1해병여단장 김윤근(金潤根) 준장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각하, 축하드립니다”라며 거수경례를 했다. 박정희 소장은 반가워하면서 그를 참모총장 비서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박정희 소장은 이 대령만 남겨두고 다른 사람들을 내보냈다.
 
  “박정희 장군이 ‘내가 했다’라고 하더군. 나는 ‘각하, 하더라도 대의명분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했소. 박 장군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장도영 총장에게 군사혁명위원회(나중에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 의장을 맡으라고 하고 있는데, 장 총장이 안 하겠다고 하고 있다’고 해. ‘알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피를 흘리면 안 됩니다’라고 하고 총장실로 갔지. 장도영 총장에게 ‘각하, 피를 내면 안 되니까, 의장을 맡으시라’고 권했소. 장 총장은 ‘저들이 혁명위원회 의장,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 계엄사령관, 내각수반을 다 맡으라고 한다’고 하더군. 나는 ‘다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적이 생깁니다. 의장하고 참모총장만 하십시오’라고 했소. 하지만 장 총장은 다섯 개 자리를 맡았다가 결국 밀려나고 말았소. ‘텍사스 토벌작전’이라고 알아요?”
 
 
  “나는 정치 안 한다”
 
  ‘텍사스 토벌작전’은 1961년 7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해 육군 내 평안도 군맥(軍脈)을 제거한 사건을 말한다. 1963년에는 함경도 군맥을 제거하는 ‘알래스카 토벌작전’이 벌어졌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제1공화국 시절 각각 백선엽(평안도)·정일권(丁一權·함경도) 장군을 필두로 해서 육군 내 양대 산맥을 형성했던 평안도·함경도 인맥이 밀려났다. 그 자리는 영남 출신들이 메워 나갔다.
 
  “JP가 예편시킬 평안도 출신 군인들 리스트를 갖고 박정희 의장에게 갔는데, 내 이름이 위에서 여섯 번째에 올라 있었대. 박 의장이 내 이름 위에 직접 줄을 긋더라는 얘기를 나중에 JP에게서 들었소. 그리고 그해 8월 나를 준장으로 진급시켜 주었어요. 그걸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인간미가 있는 거야. 내가 자기를 두 번이나 도와주었던 걸 잊지 않은 거지.”
 
  1962년 6월 1일 중앙정보부는 ‘구(舊)민주당계 반혁명음모사건’이란 것을 공표했다. 김상돈(金相敦) 전 서울시장, 조중서 전 민주당 조직국장, 전 백의사대원 이성렬 등 민주당계 인사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근양 준장은 이 사건의 재판장을 맡았다.
 
  “다른 사람들은 만나서 같이 모의를 하고 그런 게 있는데, 아무리 봐도 김상돈 전 서울시장은 같이 만나서 어울리고 한 게 없더라고. 중앙정보부에서는 김 전 시장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요구해 왔어. 나는 ‘죄가 없는데 어떻게 사형선고를 내리느냐’고 맞섰지. 나중에는 ‘그럼 징역 20년이라도 선고해 달라’고 하더군. 나는 ‘못한다. 정 그러면 차라리 재판장을 바꿔라’고 했지. 내가 ‘김상돈, 무죄!’라고 하는 순간, 김 전 시장이 울더군.”
 
  이근양 장군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JP가 체신부나 교통부 장관을 맡으라고 했지만 거절했다”고 말했다.
 
  “JP에게 ‘나는 정치는 안 한다’고 했소. ‘왜 안 하느냐’고 하기에 ‘박정희·장도영 장군을 봐라. 두 분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나? 모두 내가 형님처럼 모시던 분들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장군이 장도영 장군을 잡아넣어? 그게 말이 되나? 그게 다 정치 때문이 아닌가? 나는 그래서 정치는 안 한다. 나는 평생 군인이다’라고 했지.”
 
  중앙정보부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이었다.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는 후배가 ‘선배님에 대해 자꾸 빨간 줄을 긋는 보고가 올라온다’고 해. 그래서 ‘알겠다. 그러면 공부나 하겠다’면서 국방대학원 입교를 자청했지. 내가 국방대학원에 간다니까 박정희 의장이 30만원을 보내줬어. 사단장 봉급이 2만원 하던 시절에 큰돈이었지. 1962년부터 1년여 동안 국방대학원에 가 있었소.”
 
  1962년 이근양 준장은 제1차 월남파병조사단장을 맡아 월남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에 다녀왔다. ‘최고회의 M-20계획’이라고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월남파병을 위한 사전조사였다. 월남에 다녀온 그는 “국군은 월남에서 전투할 수 있다. 다만 밀림에서의 게릴라전과 풍토병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근양 장군에 의하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963년 그에게 사람을 보내 중앙정보부장직을 제안했다고 한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육사 5기 출신으로 혁명주체였던 김재춘(金在春) 장군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은 민정(民政)이양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정국(政局)의 향배를 좌우할 수 있는 자리였다. 때문에 혁명주체들 사이에 중앙정보부장직을 둘러싼 암투(暗鬪)가 심했다.
 
  “국방대학원을 마칠 무렵, 박정희 의장 비서관으로 일하던 오(吳)모 준장이 와서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라’는 박 의장의 뜻을 전했소. 오 준장에게 ‘나는 중앙정보부장 안 한다. 사단장으로 내보내 달라’는 뜻을 박 의장에게 분명하게 전해 달라고 했지. 오 준장은 내 뜻을 전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국방대학원 졸업식장에서 박 의장이 단상에서 내려와서 내 어깨를 툭 치며 ‘어디 간다며?’라고 하더군.”
 
 
  특수부대 보내 적 GP 파괴
 
12사단장 시절인 1966년 131고지에 충혼탑을 세우고 부하 장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근양 장군.
  하지만 중앙정보부장 자리는 결국 육사 8기로 혁명주체인 김형욱(金炯旭)이 차지했다. 아마 격동하던 당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무색무취(無色無臭)한 이근양 장군 같은 이에게 그 자리가 돌아가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이근양 장군은 소망대로 야전군 작전참모로 나갔다가 1965년 인제에 있는 제12사단장이 됐다. 전방에서 북한의 무력(武力)도발이 빈발하던 시기였다. 그가 사단장으로 재직하던 3년 동안 12사단은 북한군과 40차례 가까이 교전(交戰)을 벌였다.
 
  “한번은 적이 아군(我軍) GP를 기습, 세 명이 전사(戰死)했소. 나는 1개 중대 규모의 특수작전병을 모집해 사단 유격훈련장에서 맹훈련을 시킨 후 북으로 침투시켜 적 GP 두 개를 박살냈지. 아마 북한의 도발에 대해 그렇게 보복한 사단장은 나 하나뿐이었을 거요. 그렇게 하니 한동안 들어오지 못하더군. 적 침투로에 병력을 매복시켰다가 때려잡기도 했고….”
 
  1967년 1월 19일 강원도 거진 동쪽 해상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해군 초계호위함 PCE-56 당포함(650톤급)이 북한군 해안포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이 포격으로 11명이 전사하고, 28명이 실종됐다. 우리 해군이 구조작업을 하고 있을 때, 적 어뢰정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12사단은 동해안 지역까지 관할하고 있었다. 이근양 사단장은 직접 대대장에게 “탱크 네 대를 해안으로 보내 적선이 접근해 오면 포격하라”고 지시했다. 탱크 네 대를 이동시키려면 군사령관의 허가가 필요했지만, 이근양 사단장은 “내가 책임진다”며 탱크를 출동시켰다.
 
  북한은 이 일에 대해 휴전협정 위반이라며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항의했다. 정전위원회 유엔군측 대표인 치콜레라 소장이 헬기를 타고 찾아왔다.
 
  “치콜레라 소장이 ‘당신이 탱크를 움직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군. ‘당신도 알다시피 탱크를 가만히 놔두면 차체에 좋지 않다. 적당히 움직여 주고 훈련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잡아뗐지. 결국 그도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더군.”
 
 
  임무완수·同苦同樂
 
육군제3사관학교장 시절 학교를 방문한 김수한 추기경과 인사를 하는 이근양 장군.
  이후 이근양 장군은 국방부 기획국장(후에 기획관리실장)을 지낸 후, 제2군 부사령관을 거쳐 육군제3사관학교 교장으로 나갔다.
 
  “3사관학교 교장을 할 때도 이따금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과 술을 마시곤 했지. ‘부정부패가 심하다’ ‘산림녹화를 하려면 나무 대신 짚을 땔감으로 써야 한다. 그러려면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지붕개량 사업을 해야 한다’는 등의 건의를 하기도 했소. 박 대통령은 내가 올리는 말씀을 메모하면서 ‘이 장군 말이 맞아’라고 공감해 주었고….”
 
  이근양 장군은 육군제3사관학교장을 끝으로 1973년 7월 육군 소장으로 군복을 벗었다. 이후 한국특수강공사 사장·대한석탄공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가 석탄공사 사장으로 재직하던 1976년 1월 6일자 《조선일보》 는 ‘경제칵테일’ 코너에 “李 石公 사장, ‘두더지’ 별명”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사장이 1년 반 동안 재임하면서 석탄공사 산하 광업소 지하채탄 현장인 막장을 거의 다 들어가 보았고, 그해 시무식도 장성광업소 지하 375m 막장에서 시삽을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는 보도였다.
 
  “군 시절부터 내 복무지침은 ‘임무완수’와 ‘동고동락(同苦同樂)’이었소. 중대장·대대장을 할 때에는 감기 걸린 병사들을 난방이 되는 내 방에서 재우고 나는 사병 내무반에 가서 자고, 사병식당에서 같이 식사하곤 했소. 석탄공사 사장에서 물러날 때 노조에서는 사원 복지 확충에 기여했다고 감사패를 해 주었소.”
 
  석탄공사 사장을 그만둔 이후, 그는 제7~14기 민주평통자문위원을 지낸 것을 제외하면 공직을 맡지 않았다. 사업을 하는 친구들이 같이 일하자고 제안해 오기도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이근양 장군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설 무렵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직 제안이 들어왔지만,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때 실세였던 허화평(許和平·정무수석비서관·국회의원 역임) 대령은 내가 12사단장을 할 때 사단 수색중대장이었고, 허삼수(許三守·사정수석비서관·국회의원 역임) 대령은 육군제3사관학교 보안대장을 해서 잘 아는 사이였어요. 두 사람이 찾아왔기에 ‘전두환에게 가서 안 한다고 전하라’고 했지요. 군인은 돈을 알면 안 되는데 전두환은…. 정치를 안 한 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아.”
 
 
  “나는 ‘영원한 군인’”
 
  대신 이근양 장군은 젊은 시절 접었던 화가의 꿈을 펼치기 시작했다. 개인전을 세 차례 열었고, 70살 때는 홍익대 미술대학원을 수료했다. 졸업식 날 총장이 “개교 이래 최고령자”라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이근양 장군의 집 거실에는 이 장군이 직접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서재에는 군복 차림의 자화상(自畵像)과 함께 낡은 태극기가 걸려 있다. 태극기 밑에는 ‘1945년 8월 15일’이라고 적혀 있다. 그 위에는 신문에서 오려낸 천안함 전사 장병 46명의 사진과 연평도 포격 당시 전사한 해병대원 두 명의 사진이 붙어 있다.
 
  “이 태극기는 해방될 때 선친이 가지고 계시던 태극기요. (천안함·연평도 전사자들의 사진을 가리키며) 내가 이 방에서 이분들 삼년상(三年喪)을 치렀소. 매일 아침 이 사진들을 보며 거수경례를 했소. 그런데 국방장관이 북한 사과는 안 받아도 된다는 소릴 했다며? 허 참….”
 
  이근양 장군은 기자와 헤어지기 전에 “기사를 쓰게 되면, 나는 ‘영원한 군인’이라는 말을 꼭 써 달라”고 했다.
 
  “나는 평생 군인이오, 지금도 전쟁이 나면, 방아쇠 당길 힘이 있는 한 나는 총을 들고 싸울 거요!”
 
  그렇게 말하는 노장(老將)의 음성은 100살을 바라보는 노인 같지 않게 기운이 넘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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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인    (2019-02-20)     수정   삭제 찬성 : 0   반대 : 0
영원한 군인 이근양 장군님 감사합니다. 나라를 위한 헌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20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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