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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대암 영월곤충박물관장

네 개의 ‘국내 최초’ 타이틀 가진, 한국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하는 별과 장수하늘소, 그리고 나비 이야기

글 : 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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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충박물관에서 별을 발견한 자신을 ‘또라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는?
⊙ 《My dad as my enemy(나의 敵으로서의 아버지)》라는 책을 쓰는 사연
⊙ “日 천문학자 덕에 혜성 발견… 우리나라와 같은 환경에서 노벨과학상 나올지 의문”
⊙ 10년 매달린 끝에 국내 최초로 장수하늘소 인공증식 성공… “장수하늘소 연구는 ‘과학’ 아닌 ‘인문학’”
⊙ “모든 美의 기본은 나비… 완벽한 美의 심벌”
⊙ “나머지 인생은 별 보다가 죽으려고 해요. 멋있잖아요”

이대암
1955년생. 아주대 산업공학 학사, 홍익대 건축학 석사, 시드니대 건축학 박사. 미국 하버드대 건축역사 및 미술사학과 객원연구원 / 세경대학 건축디자인과 교수, 영월곤충박물관장, (사)곤충자연생태연구센터 이사장
  이대암(李大岩·63) 영월곤충박물관장은 인터뷰 중 자신을 ‘또라이’라고 종종 표현했다. 자신을 낮추기 위해 쓴 말이지만 그렇게 단정하기엔 그가 남긴 족적은 너무나 많다. 이 관장에게는 ‘한국인 최초’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이 어림잡아 네 개나 된다. 한국인 최초의 혜성(彗星)과 신성(新星) 발견자, 국내 최초의 장수하늘소 인공증식(人工增殖) 성공과 곤충박물관 관장까지…. 보통사람이라면 한 개의 타이틀만 쟁취하기에도 벅차다. 그럼에도 그는 서로 연관성이 없는 여러 분야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따냈다.
 
  지난 6월 1일 이대암 관장을 만나기 위해 강원도 영월의 곤충박물관을 찾았다. 영월곤충박물관이 위치한 삼옥리란 곳은 산과 강,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고 있었다. 박물관 뒤편 곤충연구소 소장실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명함을 받은 뒤 “한자 이름에서부터 센 기운이 느껴진다”고 농담을 하자 “주변 사람들도 다 그런다”며 웃었다. ‘큰 대(大)’ ‘바위 암(岩)’, ‘큰 바위’란 뜻을 가진 이대암 관장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별 못 보는 인생은 ‘시궁창에 있는 쥐’랑 같아
 
  —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이 제가 확인한 것만으로도 네 개입니다.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요.
 
  “저는 잡념이 많아요.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의 뇌구조하고는 다르다고 할 수 있죠. 어렸을 때부터 잡념이 많았어요. 공부하다가도 뭔가 ‘바스락’거리면 거기에 신경이 가는 겁니다. ‘뭐가 바스락거리나’ 그러니까 공부의 효율은 떨어지는 거죠. 우직하게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죠.”
 
  — 호기심이 많으셨나 봅니다.
 
  “그렇죠.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 중 하나는 바로 호기심이 있다는 겁니다. 호기심이 없었다면 달(月)에 갈 수 있었겠습니까? (인류가) 달에 가게 된 근본적인 동기 부여는 뭐냐? 호기심이거든요. 사실 안 가도 되잖아요. ‘달은 어떻게 생겼느냐’ ‘왜 도느냐’ ‘왜 한쪽만 보이느냐’ 이런 것들이 호기심을 발동시킨 거죠.”
 
  — 영월엔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예전에 《조선일보》에 남북한 야간 위성촬영 사진을 게재한 적이 있습니다. 보니까 남한에서는 영월 근방이 제일 어두워요. 속으로 ‘여기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어두운 곳이구나. 별 발견하기 좋겠다’고 생각해 영월로 오게 됐습니다. 그 전에 저는 서울 남대문에 있는 대우그룹에서 건축 관련 일을 했어요. 그때 별을 못 보는 내 인생은 ‘시궁창에 있는 쥐’랑 똑같다고 느꼈어요. ‘별이 없는데 어떻게 살란 말이야’ 이러고 무작정 시골로 내려온 거죠. ‘어디 학교 없나’ 했더니 학교가 있더라고요. 세경대요. 영월에 있는 세경대 교수가 돼 부총장까지 했습니다. 시골 학교에 오다 보니까 너무 일찍 부총장이 돼 버린 겁니다. 별 보려고 왔는데, 부총장에 앉혀 놓으니까 바빠서 별을 볼 수가 없었어요. 별 볼일 없게 된 거죠. (웃음)”
 
 
  ‘李 다빈치’
 
  — 곤충, 별, 건축… 뭐부터 관심을 갖게 된 거예요.
 
  “별은 곤충하기 전부터 한 거예요. 제일 먼저 별이고, 그다음이 곤충, 그다음이 건축인 거죠. 내가 책을 한 권 집필해서 출판사에 갖다 줬는데, 제목이 《건축과 교수가 곤충박물관에서 별을 발견한 이야기》예요. 그게 내 인생을 설명하는 한 문장입니다. 혜성을 곤충박물관 옥상에서 발견했거든요. 근데 출판사가 망해서 책이 안 나오네요. (웃음)”
 
  — 고향은 어디세요.
 
  “대전이요. 대전에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주인집이 양옥집이었어요. 주인집에 놀러갔는데, 거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위인전이 있더라고요. 그 전에는 다빈치라는 존재를 잘 몰랐죠. 그걸 보면서 ‘이 친구 내 타입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의사, 화가, 음악가, 과학자인 다빈치가 너무 재밌는 거예요. ‘나도 이렇게 한 번 살아봐야겠다. 다빈치처럼 멋있게 살아봐야겠다. 한국의 다빈치가 한번 돼 보자.’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내 별명을 ‘이(李) 다빈치’라고 지었어요. 혼자 낙서하고 사인도 만들고 그랬어요. 물론 말이 안 되죠. 다빈치라는 것은, ‘다빈치 마을의 레오나르도’라는 뜻이잖아요. 그때 나는 그걸 몰랐어요. 그냥 ‘이 다빈치’로 지은 거죠. 일종의 망상이죠. (웃음)”
 
 
  아버지의 逆說
 
  이대암 관장의 부모는 이 관장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이혼했다고 한다. 이 관장은 부모의 이혼에 대해 언급하며 “굉장히 앞서가는 집안이자 선구자적인 집안이었다”고 농담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미(美) 8군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이혼 후 충남으로 내려갔다. 이 관장은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살던 서울 이태원과 어머니가 살던 충남 대전과 부여 등지에서 번갈아 가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초등학교 6년간 전학을 여섯 번이나 다녔다. 그는 “나는 어머니 편이었다”며 “아버지는 나한테 잘해 준 게 없다”고 말했다. 소년 이대암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부친은 그가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는 데 보이지 않는 역할을 했다.
 
  — 별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뭡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랑 같이 살 때인데, 집에 가면 아무도 없었어요. 어느 날 아버지 책상에 미군 잡지 한 권이 있었어요. 미 공군에서 나오는 《에어포스(Air Force)》라는 잡지였어요. 영어는 당연히 알 수 없고, 그림만 잔뜩 나와 있었어요. 아폴로 13호와 달(月)에 대한 상상도(想像圖)였죠. 미국 나사(NASA)에서 그린 것 같더라고요. 난 미국 우주선이 달에 착륙한 게 가짜라고 주장하는 건 ‘가짜 뉴스’라고 봐요. 이미 달에 가기 3년 전부터 거기에 대한 모든 상상도를 그려 놓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암스트롱이 달에 갔어요. 그때 사람들이 흑백 TV 앞에 앉아 난리가 났죠. 나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이미 본 거니까요. 그림으로 그대로 다 봤으니까요.”
 
  — 불화했던 부친이 결과적으로 도움도 주신 거네요.
 
  “자기가 원해서 해 준 건 아니에요. (웃음) 자기가 날 교육시키기 위해서 나사(NASA)에 데려간 것도 아니에요. 본인이 신경도 안 쓴, 굴러 다니던 잡지(《Air Force》) 덕분이죠. 내가 책으로 쓰려는 게 하나 있는데 책 제목이 《My dad as my enemy(나의 敵으로서의 아버지)》예요.
 
  — 네? 그걸 진짜 쓰고 계세요?
 
  “쓰고 있죠. 내 삶의 기준은 ‘우리 아버지처럼 살지 말자’예요. 아버지는 전세계를 호령하다시피 하면서 살았거든요. 외국에 가기도 어려운 시절에 지구를 몇 바퀴 돌던 사람인데 나한테는 해 준 게 거의 없어요. 얼마나 약이 오르겠어요? 내가 제일 화려하게 살았던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예요. 지금으로 따지면 용돈이 5만원짜리로 수십 장 있었으니까요.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썼어요. 그 이후에는 너무 궁핍했어요.”
 
 
  “하늘이 살아 있구나. 죽은 게 아니구나”
 
  — 유년 시절이 참 흥미롭네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아버지가 월남전에 참전했어요. 월남에서 내 생일 때 일제(日製) 쌍안경을 보내 왔어요. 중학교 1학년 때죠. 내가 살던 대전의 주인집 지붕에 올라가서 그 쌍안경으로 여기저기를 바라봤어요. 내가 지금도 그 집에 감사한 게, 양옥집이었으니까 옥상에 올라갈 수 있었던 거예요. 초가집이었으면 (옥상에) 못 올라갔을 거 아니에요. 사진으로만 보던 별이 너무 선명하게 보이니까 놀랐죠. 실제로 봤을 때의 그 충격은 엄청나더라고요. 달만 본 게 아니라 우연히 별똥별 하나가 지나가는 것도 봤어요. 그때 ‘하늘이 살아 있구나. 하늘이 죽은 게 아니구나. 살아 있는 거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때부터 천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 혜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게 그때부터겠네요.
 
  “네. 그러다가 대학 때 일본어로 된 천문학 책을 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혜성을 발견한 일본인 리스트가 나오는데 ‘도대체 우리나라는 뭐하고 있나’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국 사람이 발견한 건 하나도 없어요. 이건 발견하면 그 사람 이름을 붙여 주니까 ‘내가 이걸 한 번 발견해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1975년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예요. 내가 혜성을 발견했을 때 (언론에) ‘그 꿈을 35년 만에 이뤘다’고 했어요. 거기에 내 인생의 모든 걸 바쳤어요. 그게 내 인생의 목표였기에 그거 빼놓고는 날 논할 수가 없어요. 난 죽으면 아마 유명해질 거예요. 역사니까요. 혜성을 발견했을 때 외국에서 조선시대 이후 최초로 발견한 거라고 했어요. 왕조실록에 그렇게(최초 혜성 발견) 기록돼 있거든요.”
 
 
  3000시간의 잠복근무 끝에 발견한 혜성
 
이대암 관장은 2009년 3월 27일 오전 5시 한국인 최초로 혜성을, 2010년 5월 7일 오전 3시 29분 한국인 최초로 신성을 발견했다. 그는 혜성을 발견하는 데 무려 3000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이대암 관장의 인생에 있어 최고의 영예는 아마도 혜성과 신성의 발견이었을 것이다. 2009년 3월 27일 오전 5시 한국인 최초로 혜성을, 2010년 5월 7일 오전 3시 29분 한국인 최초로 신성을 발견해 주목 받은 아마추어 천문가 이대암 관장. 그 과정은 어땠을까.
 
  — 혜성과 신성을 발견한 과정을 설명해 주시죠.
 
  “별을 발견하는 건 그야말로 잠복근무예요. 혜성을 발견하는 데 어림잡아 3000시간을 통째로 쏟았어요.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요. 영월이 얼마나 추워요? 그때 그렇게 밤새울 때 난들 무슨 생각이 안 들었겠어요? 입이 돌아갈 정도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앞으로 혜성을 우리나라에서 발견할 수 없어요. 지금 발견한 지 9년 됐잖아요. 이젠 인공위성이 다 스캔을 떠 AI(Artficial Intelligent·인공지능)가 분석해서 알려주는 시대예요. 저는 어떻게 보면 얻어걸린 거죠. 죽기 전에 초신성까지 발견해야죠.”
 
  — 혜성, 신성, 초신성 이 세 개는 각각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혜성은 움직이는 천체입니다. 그래서 발견하기가 어렵죠. 신성하고 초신성은 움직이지 않고요. 신성은 우리 태양계 안에 있는 거고, 초신성은 보통 외부 은하계에 있어요. 초신성은 다른 외부 은하계에 있는 별이 폭발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밤이 대낮처럼 밝아지죠. 약 일주일 정도 가려나…. 사실 그런 일은 천 년에 한 번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신성은 태양계 안에 있는 별인데, 하늘에 있는 별이 하나씩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게 아녜요. 물리적으로 쌍성(雙星)이 더 많아요.”
 
  — ‘두 개의 별’이란 건가요.
 
  “네. 우주의 생성 과정에서 두 개의 어떤 물질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아요. 나도 참 희한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두 개 다 별빛이 나는 게 있는가 하면 하나만 빛이 나고, 다른 하나는 빛이 안 나는 게 있어요. 물리적으로만 별인데, 하나는 별이고 다른 하나는 질량만 갖고 있는 물질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게 고리로 엮여 있어서 자기들끼리 에너지를 주고받죠. 마치 부부처럼요. 근데 어느 날 열을 받으면 (질량만 갖고 있는 물질이) 폭발을 해 버려요. 이게 신성입니다. 신성은 없던 게 갑자기 생겨나는 게 아니에요. 원래 있는데 안 보이는 게 빛을 발하는 거죠. 우린 모르고 있던 거죠. 그런데 갑자기 폭발하면서 빛을 내는 거죠. 순간적으로 빛을 내는데, 이걸 변광성(變光性)이라고 합니다.”
 
  — 빛이 변한다는 뜻인가요.
 
  “변하는 건데 주기적으로 변하는 게 많아요. 2년 주기냐, 10년 주기냐 다 달라요. 신성은 에너지가 있는데 갑자기 폭발해 빛을 발하다가 사라진다고 보시면 돼요. 초신성은 폭발하면 성운(星雲)이 됩니다. ‘별구름’이 되는 거죠. 또 다른 별들이 생성되죠. 혜성은 태양계 안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요. 마라톤하듯이 돕니다. 혜성은 얼음과 가스로 구성됩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얼음덩어리는 하얗잖아요. 하얗지 않으면 청색이죠. 우주에 존재하는 얼음덩어리는 아스팔트보다 반사율이 더 작은 검은색입니다. 육안(肉眼)으론 절대 안 보이죠. 그래서 우리가 혜성같이 나타난 존재라고 하잖아요. 우리 근처에 올 때까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태양 가까이 올 때 태양풍에 의해서 기체가 빛을 발하는 게 혜성이에요. 멀리서 오더라도 안 찍히죠. 까만색이니까. 어느 정도 태양에 가까워져 가스가 폭발하면서 보이는 거죠. 신성이나 초신성은 그 모양이 분명한데 혜성은 뿌옇습니다. 그래서 긴가민가하죠.”
 
 
  日 천문학자 덕에 혜성 발견자로 이름 올려
 
이대암 관장이 발견한 혜성 ‘C/2009-F6’(Yi-SWAN)의 궤도.
  — 혜성을 발견한 뒤 어떻게 하셨나요.
 
  일본 천문학자한테 보고했죠. 그는 ‘(혜성이) 아닌 것 같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포기하고 있었죠. 근데 혜성은 이틀 연속 보고를 해야 해요. 계속 변하면서 궤도, 즉 포물선이 나오니까요. 각도와 주기도 나오고요. 그 다음 날 안개가 끼는 바람에 관측도 안 됐어요. 할 수 없이 하루 동안 관측된 거라도 보고를 해야 했죠. 이미지도 흐렸는데, 하필 그걸 이미지 파일 그 자체로 안 보내고 한글파일에 입혀서 일본 천문학자에게 보냈습니다. 그러곤 그냥 잊어버렸죠. 그런데 일주일 후에 그 학자에게서 사진을 다시 보내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 일본 천문학자는 왜 그랬던 거죠.
 
  “새로운 혜성이나 천체 등이 발견되면, 전세계 천문대가 나사에 그 소식을 보냅니다. ‘몇시 몇분 몇초에 뭐가 발견됐다’는 식으로요. 태양 가까이 나타난 혜성을 인공위성에 장착된 SWAN이란 태양 관측 카메라가 촬영한 것입니다. 그걸 발표했을 때에는 (발견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 이름을 붙이지 않고 번호만 붙였습니다. 그게 C/2009-F6입니다. 그런데 이걸 일본 천문학자가 가만히 보니까 내가 일주일 전에 보고했던 위치, 궤도와 일치하더라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 같았으면 어땠을까요? 아마 ‘내가 (혜성이) 아니라고 했는데, 아 이거 ×팔리네’ 이러지 않았을까요? 그냥 넘어가도 되는 상황이었어요. 아니면 ‘나랑 같이 발견한 걸로 하자’ 이랬을 수도 있지요. 일본인은 안 그래요. 오히려 중간에서 검증을 도와주는 천문학자들이 따로 있을 정도니까요. 일본 리포트에 대해선 미국이 의심도 안 합니다. 이미 수준이 일정 부분 이상 도달해 있으니까요.”
 
  — 일본 천문학자의 덕이 컸네요.
 
  “IAU(국제천문연맹)에 이런 규정이 있어요. 한 번 발표한 혜성에 대해선 번복을 안 하는 겁니다. 번복하기 시작하면 이 사람 저 사람이 내가 먼저 발견했다면서 민원이 들어옵니다. 아귀(argue·논쟁)가 너무 많아지니까 일단 한 번 발표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이 일본 천문학자가 IAU에 “사실 C/2009-F6를 한국 사람(이대암 관장)으로부터 일주일 전에 보고를 받았었다. 그가 먼저 발견한 거다” 이렇게 보고를 한 거예요. 그래서 IAU가 그걸 바꿨어요. IAU는 혜성을 발견한 내 성(姓)을 앞에 붙여 주고 카메라의 이름을 뒤에 붙여 C/2009-F6를 Yi-SWAN으로 정정한 겁니다. SWAN은 앞서 말한 대로 혜성을 촬영한 카메라고요. 어떻게 보면 내가 발견한 혜성은 일본 천문학자가 준 선물이나 마찬가집니다. 그 사람이 가만히 있었으면 누가 발견했는지 알기나 하겠습니까.”
 
  — 관장님 이름으로 된 소행성도 있다면서요.
 
  “우리 말로 ‘이대암 7602’라는 소행성이 있어요. 영어로는 ‘minor planet 7602-Yidaeam(1994년 12월 31일 보고)’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기 이름으로 된 소행성 갖고 있는 사람이 5명도 안 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는 나일성 교수(현 연세대 천문학과 석좌교수) 등 서너 명밖에 안 됩니다. 돌아가신 분들 중엔 꽤 있죠. 사실 별이란 건 이건희, 정주영 회장도 돈 주고 못 사는 건데, 저는 갖고 있죠. 내가 농담으로 그래요. ‘별 좀 팔려고 부동산에 내놨는데 영 안 팔린다’고요. ‘지금 돈이 궁해 죽겠는데 그거라도 팔아 볼까 한다’고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우주부동산에 내놓지 그러세요’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별은 나한테 있어 종교이자 전쟁”
 
  — 혜성이나 신성 발견에 따른 상금은 없었나요.
 
  “미국에서 1만 달러, 일본에서 100만 엔을 받았어요. 일본 학계에서는 상도 줬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욕을 먹었어요.”
 
  — 왜요.
 
  “뭐, 그런 게 있어요. 이 자리에서 드릴 말씀은 아니네요. 다만 한국은 어떤 성과에 대해 격려하거나 고무해 주는 이런 분위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노벨과학상이 나올지 의문입니다. 사실 일본에 창피하기도 해요. 일본에 우리가 천문학을 전파했는데, 일본이 혜성을 발견하기 시작한 건 1919년입니다. 그동안 ‘우린 뭘 했냐’ 이겁니다. 선진국치고 별을 발견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후진국이나 못하는 거지 선진국이라면 한 명쯤은 ‘또라이’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별은 저한테 있어 종교죠. 또 전쟁이기도 하고요. 어쩌면 난 학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요. 누구도 메우지 못한 학문을 메우는 게 내 임무인 것 같다는 거죠. 설사 전혀 다른 학문일지라도요.”
 
  — 한마디로 ‘이단아’라는 거네요.
 
  “내 삶의 원칙은 99마리의 개미가 다 사탕 있는 곳으로 쫓아갈 때 한 마리 ‘또라이’ 같은 개미가 되는 것, 즉 사탕을 쫓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반대로 가는 개미는 생각이 있는 개미인 거죠. 물론 나한테 본능적인 레지스탕스(resistance·저항) 기질은 있어요.”
 
 
  곤충박물관 건립 비화
 
자신의 삶을 적은 비석에 대해 설명하는 이대암 관장. 비석엔 국내 최초의 곤충박물관 개관부터 장수하늘소 인공증식 성공에 관한 내용이 담담하게 적혀 있다.
  — 곤충박물관 건립 과정은 어땠습니까.
 
  “(세경대) 부총장을 그만둔 뒤에 곤충박물관을 짓기로 한 거죠. 제가 학교를 그만둔다니까 영월군수님이 찾아와 ‘왜 그만두십니까’라고 하더라고요. 시골에서는 교수라면 좋은 학교든 나쁜 학교든 어쨌든 최고잖아요. 사람들도 저한테 ‘언제부터 벌레에 관심이 많았냐’고 묻더라고요. ‘건축하기 전부터였다’고 했죠. 세경대에 있을 때, 어느 폐교에 내가 갖고 있는 곤충 표본들을 보관하고 있었어요. 그즈음 하버드에 1년 동안 연구차 갔죠. 폐교를 누구한테 돈을 주면서 좀 맡아 달라고 했죠. 시골에서는 내가 다시 올 줄 몰랐나 봐요. 미국에 갔다오니까 폐교에서 승려가 목탁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군(郡)에서 이 폐교를 어떻게 사용할지 주민들에게 물어봤더니 그걸 장례식장으로 쓰겠다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50년 된 학교를 장례식장으로 씁니까’라고 했죠. 그동안 제가 모아 둔 곤충 표본을 바탕으로 곤충박물관을 만들자고 했죠. 사실 시골 사람들에겐 벌레는 곧 적(敵)이거든요. 그런데 곤충박물관을 하겠다니까 황당해했죠.”
 
  우여곡절 끝에 2002년 5월 국내 최초의 영월곤충박물관이 폐교(廢校)인 영월군 북면 문곡리 문포초등학교에서 개관됐다. 영월곤충박물관은 13년간 44만2997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등 영월을 대표하는 사립박물관으로 인기를 끌었다. 2015년 4월 첨단시설을 갖춘 곤충산업육성지원센터에 곤충박물관이 둥지를 새롭게 틀었다. 이때 준공된 지금의 영월곤충박물관엔 국내외 곤충 등 총 4000여 점의 표본으로 채워져 있다. 이 밖에 전시실, 체험실, 나비온실, 4D 영상체험실도 갖춰져 있다.
 
 
  장수하늘소 연구는 ‘과학’ 아닌 ‘인문학’
 
곤충박물관에 전시된 장수하늘소 표본.
  최근 그의 관심사는 장수하늘소(천연기념물 제218호)로 옮겨 왔다. 지난 3월 영월군과 이 관장이 소장을 맡고 있는 천연기념물곤충연구센터가 국내 최초로 장수하늘소의 인공증식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대암 관장은 장수하늘소의 표본을 전수조사해 분포지역을 과학저널 《주탁사(Zootaxa)》 최근호에 보고했다. 《한겨레》(2018년 6월 4일 자) 보도에 의하면 이 관장은 “1899년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처음 발견된 뒤 100여년 동안 러시아에서 확보한 장수하늘소 표본이 100개 남짓할 정도로 드문 곤충”이라고 했다. 그는 “그동안 장수하늘소는 북방계 곤충으로 기후변화로 서식지가 사라진다고 보는 게 통념이었지만 최근 계통지리학 연구로 그것이 깨지고 있다”고 말했다.
 
  — 장수하늘소엔 어떤 매력이 있는 거죠?
 
  “장수하늘소는 취미로 끝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됐죠. 장수하늘소는 성체(成體·보통 15cm)가 되는 데 7년 정도 기다려야 해요. 지금 7개월로 그 기간을 확 줄여 국제특허까지 냈습니다. 장수하늘소는 나무 속에 사니까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요. 장수하늘소는 곤충의 심벌(symbol)이에요. 최정점(最頂點)에 있어요. 희한한 게 귀신 봤다는 사람은 있어도 장수하늘소 봤다는 사람은 없어요. 근데 장수하늘소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긴 알아요. 그럼 이게 도대체 뭐냐는 겁니다. 만약 이러다가 멸종되면 결국 누구 책임이냐 이거죠. 안 없어지게 하려면 빨리 손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만 10년 동안 연구했어요. 내가 확인을 해 보니까 장수하늘소는 옛날 우리 고구려 땅에 많이 분포했습니다. 지금의 북한이죠.”
 
  이대암 관장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장수하늘소는 북방계 곤충으로 여겨졌는데, 유전자 조사를 통해 남방계 곤충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고 한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장수하늘소 멸종이 지구온난화와 관련이 있다고 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걸로 드러났다. 열대지방에서 더 잘 자라는 게 장수하늘소라는 것이다. 장수하늘소의 서식지는 수령(樹齡)이 오래된 나무인데, 그 나무들을 베어 버린 것도 멸종의 한 원인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나무 대부분이 6·25전쟁 이후 심어진 나무들이라 수령이 짧아 장수하늘소 서식지로 적합하지 않다는 게 이 관장의 설명이다. 보통 수령이 200~700년 정도 되는 나무에서 산다는 것이다.
 
  — 장수하늘소 연구에 인고(忍苦)의 세월이 걸렸네요.
 
  “인고라기 보다는… 이건 과학이 아니에요. 인문학이에요.”
 
  — 장수하늘소 때문에 국회 국정감사도 받으셨다면서요.
 
  “5년 전쯤 됐나요. 장수하늘소 종(種)을 합법적으로 들여온 것이냐를 두고 감사를 한 거죠. 만약 약간의 불법이라도 발견됐으면 저는 ‘아웃’이었어요. 외국 가려는 일정 취소하고 자료 제출하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남들이 안 하는 분야를 연구하니까 그랬던 거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장수하늘소 관련해서 논문을 쓴 사람이 없어요. 장수하늘소 연구로 조만간 박사학위를 받을 거예요.”
 
 
  모든 美의 기본은 나비… 완벽한 美의 심벌
 
이대암 관장의 부친이 과거 대만에서 이 관장에게 선물한 나비의 표본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이 관장이 젊었을 때 관심을 가졌던 곤충은 나비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배고픔을 잊기 위해 나비 잡으러 다녔다”고 한다. 대학 다닐 때, 경제적 형편이 너무 곤궁해 점심 시간 때우려고 산에 가서 나비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잡은 나비들은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나비들”이라고 표현했다
 
  — 나비엔 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된 건가요.
 
  “아버지가 대만(臺灣)에 가셨을 때 거기서 나비 표본을 붙여 놓은 기념품을 사 왔어요. 아버지는 아무 생각 없이 사온 거죠. 근데 멋있었어요. 그걸 내 책상 앞에 붙여 놨어요. 계속 쳐다봤어요. 아무 뜻도 모르고 본 거죠. 비록 장식용이었지만 그때 나비가 내 내면세계에 젖어든 거 같아요. 아마 대학 교수 중 나보다 먼저 곤충에 빠진 사람은 없을걸요? 자기들이 먼저 학위를 받았을 뿐이죠. 난 초등학교 때부터 빠졌으니까요.”
 
  — 오랜 세월이 걸렸네요.
 
  “지금 제가 모은 것들의 대부분은 1970년대 나비들입니다. 서양에서 나비 채집이라는 건 과거 부르주아나 귀족들이 정원(庭園)에서 했던 놀이였습니다. 저는 배고픈 시간을 잊기 위해서 산에 가 나비를 잡았으니…. 아마 그렇게 나비 잡은 사람은 없을 거예요.”
 
이대암 관장의 설명에 따르면, 나비는 아름다움의 심벌이라고 한다. 왼쪽은 연왕나비의 날개를, 오른쪽은 끝주홍왕흰나비의 날개를 확대한 것이다. 예술작품과 흡사하다.
  — 채집한 나비들은 어떻게 하셨나요.
 
  “대학 때 채집한 나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신유항 교수(전 곤충학회장·현 경희대 명예교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비를 잡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요. 신유항 교수가 저를 부르더라고요. 갔더니 표본실과 실험실을 보여줬습니다. 그때 정식으로 곤충 연구에 입문한 셈이죠. 오랫동안 나비에서 헤어나질 못했어요. 다른 건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요. 그때 채집한 나비들은 지금 곤충박물관에 전시돼 있어요.”
 
  — 나비의 매력이 뭔가요.
 
  “아름답잖아요. 모든 미(美)의 기본은 나비에 다 있어요. 다른 곤충들은 징그럽고 무서운 것도 있잖아요. 나비는 완벽한 미의 심벌입니다. 미를 추구하는 내 생각에도 맞고요.”
 
 
  ‘왕소똥구리’의 꿈, ‘이대암’의 꿈
 
이대암 관장이 제작한 ‘왕소똥구리의 꿈’.
  이렇게 열정적인 그의 뒤를 이어 나갈 사람이 있는지 궁금했다. 이 관장은 “(후계자는) 없다. 나는 자식도 없다”면서 “이제 후계자 생각할 나이는 됐다”고 말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영월 일대가) 곤충 연구하기 얼마나 좋아요. 잘 데, 먹을 데 다 있잖아요. 근데 안 와요. 문화 혜택이 없다는 이유에서 잘 안 오려고 해요. 결국 내가 해결하고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별이란 게 가르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요.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이대암이라는 사람이 발견했었다’ 이걸로 끝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이 관장은 “알프스 봉우리들을 동시에 두 개 오를 순 없다. 내려와야 또다른 봉우리를 올라갈 수 있는 것처럼 내가 한 봉우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봉우리도 가고 싶으니까 내려와야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그가 가진 열정이 쉬 꺼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머지 인생은 별을 보다가 죽으려고 한다”고 했다. 이유도 단순했다. “멋있잖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곤충박물관과 곤충연구소 이곳저곳을 이 관장과 함께 둘러봤다. 연구소 앞 잔디밭엔 이 관장이 직접 제작한 ‘왕소똥구리의 꿈’이란 조각상이 설치돼 있었다. 브론즈(청동)와 스테인리스로 제작된 이 조각상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왕소똥구리는 우리 곁을 영영 떠나갔습니다. 알을 낳기 위해 경단을 만들어 굴리던 정겨운 모습을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새끼를 기다리는 소똥구리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우리는 후손들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2007년 8월〉
 
  끝내 멸종의 길을 걷게 된 왕소똥구리. 후계자가 없어 자신의 대(代)에서 끊어질 수 있음에도 여전히 별과 곤충 연구에 몰두하는 이대암 관장. 혹시 왕소똥구리가 그의 미래가 아닐지 문득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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