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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家를 찾아서

명창 김소희의 후손들

“백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한 하늘이 내린 소리”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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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 김소희 “다시 여자로 태어난다면 평범한 주부로 살고 싶다”
⊙ 김소희의 예술혼에 영향을 미친 박석기
⊙ 만정 목의 정점은 ‘심청가’를 완판 녹음할 당시인 50~60대
⊙ 슬하에 2남 1녀… 딸 박윤초도 예술가의 길 걸어
명창 김소희의 생전 모습. ‘하늘이 내린 소리’라는 찬사를 받았다.
  판소리 300년 역사를 상징하는 수많은 명창, 그중에서도 여류 명창 중에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1917~1995)는 ‘마지막 전설’의 명창일지 모른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폐막식 하이라이트에서 선생이 부른 ‘떠나가는 배’는 오래도록 회자한다.
 
  만정의 목소리는 ‘가을 달밤의 기러기 울음소리’에 비견될 정도로 맑고 청아하며 미려했다. 애원성(哀怨聲) 깃든 음색은 듣는 이의 마음을 한껏 뒤흔들었다. 당대 명창인 송만갑·정정렬·정응민에게 소리를 배우되 각각의 장점을 가져와 자신만의 길을 열었다. 군산대 최동현 교수는 “김소희는 여자 판소리를 말할 때 언제나 첫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21일 ‘만정 탄생 100주년 헌정공연’이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렸다. 내로라하는 국악계 예인들과 제자들이 모두 모여 만정을 회고했다. 국립국악원 한명희 전 원장(예술원 회원)은 “김소희야말로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예인이란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군계일학의 명창”이라 했다.
 
  6월 3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정의 고명딸인 서울예대 박윤초(朴倫初·74) 교수와 양원석(梁元錫·71) 전 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 상임고문을 만났다. 양 고문은 박 교수의 남편이자 만정의 사위다. 만정은 슬하에 2남 1녀를 낳았으나 두 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박 교수는 김소희의 발자취와 치열한 예술혼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다. 어머니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이자 만정제소리보존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명창 송만갑·명고수 한성준과의 만남
 
1935년 판소리 춘향가 음반(빅터 레코드, 서울)을 취입한 후의 모습. 왼쪽부터 한성준, 임방울, 이화중선, 정정렬, 박녹주, 김소희(18세).
  ― 만정 선생은 어떻게 예인의 길로 들어섰나요.
 
  “(박윤초) 어머니는 1917년 전북 고창(흥덕)에서 태어나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나오셨는데 13세 때 천막극장 ‘이화중선과 그 일행’을 보게 됐는데 그 소리에 흠뻑 빠지셨나 봅니다. 그때 외할머니가 수양딸로 삼으신 분의 남편이 경찰 계통에서 일해서 송만갑 선생을 소개할 수 있었나 봐요. 그때 어머니가 송만갑 선생 앞에서 ‘심청가’에 나오는 추월만정(秋月晩汀)의 한 대목을 불렀어요.
 
  ‘추월은 만정하어 산호 주렴으 비치여 들고, 청천의 외기러기 난 월하에 높이 떠 뚜루루…로 시작하는 가락을 듣더니 송만갑 선생이 무릎을 쳤다고 해요.”
 
  그녀는 소리의 길로 가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송만갑 문하에 들어갔다. 소리 배운 지 6개월 만에 송만갑 제자 발표회에 ‘이도령 역’으로 무대에 선 뒤 ‘이화중선과 그 일행’의 공연에 합류해 부산, 목포 등지에서 몇 달씩 공연했다.
 
  또한 전주의 정성린에게 승무·검무를, 전계문에게 가사와 가곡을, 정읍의 유순석에게 양금을 배웠는데 열흘 만에 ‘영산회상’에서 자잘한 풍류까지 완전히 떼어 스승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녀 나이 14세 때 마침 남원에서 열린 제1회 판소리명창대회에 참여했는데 80여 명 중 1등을 차지, ‘애기명창’으로 알려졌다. 그때 상품으로 받은 은수저 한 벌은 딸 박윤초 교수가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어머니는 본격적인 소리 공부를 위해 1931년 겨울 서울로 올라와 관철동 이모댁에 머물면서 송만갑 선생이 소개한 명(名)고수 한성준(韓成俊) 선생의 테스트를 받았다고 해요. 그리고 정정렬 선생에게 춘향가를 배웠고 방송출연, 공연과 레코드 취입을 병행했죠.”
 
 
  이 무렵부터 그녀는 예명 김소희로 불리게 된다. 본명은 김옥희
 
도제수업 장면. 김소희 선생이 어린 제자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고 있다. 등을 보이는 이가 딸 박윤초.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한성준이 경성방송 음악프로에 한 댕기머리 소녀 하나를 데리고 왔다. 당시 방송국 프로듀서였던 이혜구(1909~2010·서울대 교수, 한국국악회 회장 역임)가 화가 나서 한성준에게 “어떻게 당신 맘대로 방송 출연자를 정하냐”고 따졌다.
 
  그러자 한성준이 말하길 “오기로 했던 출연자가 가버렸다. 그러지 말고 시골서 갓 올라온 어린애지만 소리가 맹랑하다”며 출연을 부탁했다. 이혜구는 할 수 없이 그 댕기 소녀의 창을 들었는데 과연 그 소리가 맹랑했다. 그가 명창 김소희였다. 그때가 그녀 나이 만 열넷, 겨울이었다. 박윤초 교수의 말이다.
 
  “어머니 목소리를 고음과 저음을 힘 안 들이고 낼 수 있는 타고난 목이라 하지만 곁에서 본 어머니는 노력파셨어요. 공부라면 잠도 안 주무세요. 덜 잡수시고 지독하게 공부하는 성격이셨어요. 소리 공부에 입문한 뒤에도 통신강의록을 받아보며 신문학 공부를 꾸준히 하셨어요.”
 
  김소희가 활동할 당시 판소리 ‘큰 선생들’은 대개 글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창법에만 매달렸기에 어려운 한문 투의 가사는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만정은 판소리를 철저하게 하려면 한문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양원석 고문의 말이다.
 
  “판소리 창자의 고충은 가사(歌詞)가 몹시 어려운 한문으로 돼 있어 그 뜻을 모르면 자신이 서지 않지요. 분명 알만한 뜻인데 정확한 의미를 모르니 답답할 수밖에요. 대가들에게 물어도 ‘그저 그러려니 하지 꼬치꼬치 묻느냐’고 하고…. 답답한 만정은 정확한 판소리를 위해 한문과 가사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해요.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어요. 인간문화재인 정권진(鄭權鎭)씨의 가친이 정응민(鄭應珉) 선생(만정의 스승이기도 하다)인데 대원군에게 늘 초대되어 소리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대원군은 가사를 정확하게 정돈해 부르게 했고 또 더러는 고쳐주곤 했대요.”
 
  그러한 연유로 만정은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 선생에게 서예와 한학을 공부해 마흔아홉 나이에 서예신인예술상(문교부)을 탔고 국전에서 3차례나 입선(서예 부문)했다.
 
 
  “잘하면 잘할수록 속에서 삭혀야 해요, 소리를”
 
김소희 선생의 마지막 공연 모습이다.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94년 11월 28일 제1회 방일영 국악상을 수상해 시상식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박 교수는 비밀 한 가지를 털어놨다.
 
  “제가 보기에 어머니는 기가 막히게 소리를 잘하시는데도 공연을 앞두고 꼭 연습을 하셨어요. 자존심 때문인지 고수나 제자를 안 부르시고 저를 불러 중요 대목을 부르셨어요. 제가 고수 역할을 했지요. 속으로 ‘왜 연습을 하시나’ 했는데 지금은 이해할 수 있어요. 잘하면 잘할수록 속에서 삭혀야 해요, 소리를.”
 
  — 삭힌다?
 
  “젓갈로 치면 곰삭다는 말이 있잖아요. 김치도 삭혀야 맛있듯이. 공연이 사흘 남았다고 하면 지금부터 워밍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대에서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 수 있어요.”
 
  — 동료 여창(女唱) 중에 맞수가 있었나요.
 
  20세기 초 한국 근대사의 여창은 진채선을 비롯해 창극 무대에서 활약한 허금파·김초향, 원각사의 명창 강소춘 등이 있었다. 이들의 후배로는 이화중선이 널리 알려졌다. 동시대 여창으로 김녹주·배설향·김초향·신금홍·박녹주·김여란·임소향·김추월 등이 있다. 1964년 김소희는 박초월과 함께 여창 판소리자 가운데 최초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글쎄요. 어머니는 워낙 출중한 목을 타고 나셔서…, 우선 어머니는 맞수의식이 없었어요. 같은 국악인들이 화합하는 것을 더 중시하셨죠. 나이가 위인 박녹주씨, 오비취씨 등과는 매우 친하게 지냈고 특히 대구 출신으로 네 살 위인 박귀희씨와는 평생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말년의 김소희.
  김소희는 당대 대가들에게 5가(歌·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를 배웠다. 동편제의 송만갑·정응민, 서편제의 정정렬, 그리고 두 편을 조화시킨 박동실에게 판소리를 익혔다. 또 정형린에게 고전무를, 김용근·이승환에게 거문고, 김종기·정남희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양원석 고문의 말이다.
 
  “이 대목이 좋으면, 이 스토리가 좋으면 따서 당신 것으로 삼으셨어요. 각각의 특징을 소화해서 자기화한 것이죠. 어느 ‘소리제’만을 따르면 어느 대목에선 따라 부르기 어렵지만 만정의 목소리는 둘 다 가능했어요. 그래서 만정의 제자(성창순) 중에는 이런 말을 하는 이가 있어요. ‘만정제’를 하면 동편제, 서편제는 싱거워 못 한다고….”
 
  ― 따님 보시기에 어머니 목소리의 정점은 언제셨나요.
 
  “저는 50~60대로 봐요. 고음과 저음을 힘 안 들이고 낼 수 있으셨고 꺾을 데는 분명히 꺾고 떨 데는 떨어서 소리를 낼 줄 아셨어요. 아무리 어려운 기교도 힘없이 발휘하는데 그 무렵 어머니가 ‘심청가’를 완판 녹음하셨죠.”
 
  ― 어머니의 여러 스승 중에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이는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박동실 선생이 떠오릅니다. 그분의 아내와 자식이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하셨어요. 송만갑, 정정렬 선생은 제가 뵙지 못했으니….”
 
  박동실은 전남・광주 일원을 대표하는 가객으로 6·25 당시 월북해 판소리사에서 기피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소희는 박동실에게 ‘심청가’와 ‘수궁가’ ‘적벽가’를 배웠다고 한다.
 
 
  만정의 제자들…
 
어느 공연에서 김소희 선생이 덧뵈기 춤을 추고 있다.
  김소희가 가르친 무릎제자(도제교육 제자)는 박송희, 성창순, 한농선, 오정숙, 신영희, 이명희, 안숙선, 안향련, 김동애, 박양덕, 한정하, 박소영, 김미숙, 유수정, 김차경, 오정해, 이영태, 정미정, 김유경, 그리고 딸 박윤초 등이다.
 
  김소희는 평소 “소리만 잘하려 허지 마. 우선 사람이, 인간이 돼야 올바른 국악인이여”라는 말을 곧잘 했다고 한다. 박 교수의 말이다.
 
  “저에게나 제자들에게 소리만 까딱까딱하지 말고 사람이 먼저 돼라 하셨어요. 조백(早白)이 있는 삶을 살면 소리도 비슷하게 닮아 가지만 안 되면 입발림밖에 안 된다고 하셨죠.”
 
  만정은 소리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이의 재능과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시험하고 나서야 제자로 받아들였다. 철저하게 선별했지만 겉모습만 봐도 소리 할 사람인지 대강 알아차렸다고 한다. 또 한번 제자로 받아들이면 어떤 제자라도 직접 지도했다.
 
  제자인 명창 이명희(李明姬)는 “처음에는 단가나 짧은소리부터 가르치셨다. 제자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본바탕으로 들어갔다. 본바탕을 배우는 순서도 사람마다 달랐다”고 회고했다.
 
  명창 안숙선(安淑善)은 “무척 꼼꼼하게 소리를 가르쳤다. 먼저 공책에다 일일이 가사를 적으신 다음 정확한 음정으로 따라 하게 했다. 북을 손수 잡으시고 한 장단씩 쳐 따라 부르게 하셨는데 제자들의 능력에 따라 소화할 수 있는 데까지 끊어 양을 조절해 가며 완전하게 익힐 때까지 반복했다”고 기억했다.
 
김소희 선생의 유품들. 작고 직후인 1995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박 교수는 “어머니는 제자밖에 없었어요. 오로지 제자가 먼저셨고 국악인이 먼저셨죠. 제가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그 옷을 기어코 제자에게 입혔어요. 우리 집은 학원이나 예술가들의 사랑방 같아 언제나 하우스(house)였지 홈(home)인 적이 없었어요.
 
  저는 걸음마와 함께 춤을 배웠지만 국악에 어머니를 빼앗겨 국악을 싫어했어요. 단란한 친구네가 부러웠죠. 집에 계시는 날보다 안 계시는 날이 많았고 그 빈자리는 외할머니가 채웠고 몰래 양아버지(유치진 선생) 댁을 찾곤 했어요.
 
  어머니는 학교(지금의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만정이 세상을 떠날 당시 학교 이사장이었다)를 세운다며 집이며 패물이며 팔 수 있는 물건은 모두 팔아 한동안 참 어렵게 살았습니다.”
 
  박 교수는 “하지만 당신께서 판소리의 중요 대목을 제게 가르쳐주셨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육자배기’는 ‘이렇게 불러야 맛있다’며 가르쳐주신 기억이 나요. 잊지 않고 지금도 그 곡을 부릅니다. 돌이켜보면 기라성 같은 제자들에게 주지 않은 것을 제게 물려주었다고 생각해요.”
 
  ― 칭찬은 잘하셨나요.
 
  “제자들에겐 칭찬을 자주 하셨지만 제겐 없었어요. 하지만 잘못은 다른 제자가 했어도 다 저한테 퍼부었어요. 보통 섭섭한 게 아니었죠. 제 피란처가 유치진(柳致眞) 선생 댁이었어요. 선생은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다 받아주셨어요.”
 
  유치진과 박윤초의 아버지 박석기는 일본 유학시절 함께 지내며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유치진의 아들 유덕형(柳德馨) 서울예대 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부산 피란시절, 아버지(유치진)가 〈가야금의 유래〉를 집필하실 때 주로 의형인 효남 선생(박석기) 댁에 가셨는데 나중에 초연(初演)을 보니 김소희 선생이 주인공 ‘배꽃아기’로, 당시 일곱 살인 박윤초가 ‘춤추는 학’으로 나왔습니다. 박 교수는 아버지가 그리울 때 우리 집에 와 내 부모님을 뵙고 그리움을 달래곤 했지요.”
 
 
  “니 아버지(박석기)는 큰 산이다”
 
박윤초의 아버지 효남 박석기 선생.
  김소희는 당대 거문고 명인인 효남(曉南) 박석기(朴錫驥·1899~1953)를 만나면서 예술혼이 한층 깊어진다.
 
  박석기는 전남 담양(창평)의 부호집안에서 태어나 동경제대 불문과를 졸업한 인물이다. 재학 중 동경 유학생 야구단의 선수와 단장으로 활동한 기록이 한국 야구사에 남아 있다. 54세인 1953년 사망했다. 딸 박윤초가 만 9세 때다.
 
  김소희는 박석기를 존경했으나 사랑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박 교수의 말이다.
 
  “아버지는 국악인이 아니었어요. 동경제대 선후배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당신은 은둔을 택하셨고 친일에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문필가의 뜻이 좌절되자 낙향, 거문고를 벗 삼아 향리에 은둔했어요.
 
  일제 치하 내내 요시찰 인물이었던 아버지는 우리 전통음악을 살리는 것이 민족혼을 되살리는 길이라 결심하고 향리 근처 지실에 국악학당을 짓고 명창 박동실 등을 초빙해 학생들을 모았습니다.”
 
  그때 ‘국악학당’을 거쳐 간 학생들은 김소희 등 동시대 우리나라 국악계를 이끈 사람들이다. 오늘날 박석기는 조선 말 판소리 여섯마당을 집대성하고 제자들을 길러내어 ‘판소리 중시조’로 일컫는 동리 신재효 선생에 이어 국악 후원자이자 국악 부흥 운동가로 평가된다.
 
전북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35번지 김소희의 생가와 전북 고창읍 화산리에 있는 산소.
  2015년 국립국악원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박석기 선생께 헌정하는 〈박석기를 생각하다〉를 제작해 3일간이나 무대에 올린 바 있다. 박 교수는 어린 시절 일화를 들려주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당신의 예술을 팔지 않기를 원하셨어요. 이 문제로 다투시곤 하셨죠. 어린 저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야 알게 됐어요.
 
  어머니는 친정을 책임지셔야 했어요. 외할아버지는 외동인데다 부양 능력이 없었어요. 슬하에 아들들이 일찍 사망해서 어머니가 맏이 아닌 맏이 역할을 하셨지요.”
 
  박 교수는 “생전에 (어머니는) 아버지 말씀을 안 하셨지만 하실 때면 ‘니 아버지’ 아니면 ‘선생님’이라 칭하셨고 가끔 ‘니 아버지는 큰 산’이라 하셨다. 부부라기보다 사제지간에 가까웠다”고 했다. 평생 만정은 돈에 팔려 이곳저곳 행사장을 떠돌지 않았다. ‘출연료 외에는 받지 않았고 자신의 출연료에 관한 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너는 니 아버지의 딸’이랄 정도로 저는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그해, 단둘이서 전남 구례로 여행을 갔는데 그때 당신은 ‘다시 여자로 태어난다면 평범한 주부로 살고 싶다’ 하셨어요. 화려한 무대 뒤에 단란한 가정을 바라는 여자의 꿈이 어머니에게 있었음을 알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려 니가 내 딸은 딸인갑다”
 
1982년 김소희의 딸 박윤초는 미국 뉴욕에서 오페라 〈알라딘〉의 주연으로 활약했었다.
  박윤초 교수는 어릴 적부터 만정의 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귀 명창’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선생은 딸이 고행의 판소리 광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는지 춤으로 가야금으로 또 연극으로 그림으로 옮겨 다니는 그녀를 한 번도 다잡지 않았다.
 
  박 교수는 인간문화재 한영숙·이매방에게 전통무용, 인간문화재 성금연·함동정월에게 가야금을 사사했다.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선생에게 한국화를 배웠고 어머니와 함께 우전 신호열 선생에게 한학과 서예를 배웠다.
 
  중간중간 판소리를 기웃거려 보았으나 어머니는 매정하게도 “작파해 부러라”고 했다. 이후 그녀는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연극에 국악을 접목시킨 ‘극단 자유’의 〈무엇이 될꼬 하니〉 등에 출연, 주목을 받았다. 유럽 순회공연(1978~81년)을 마치자 뉴욕 브로드웨이의 세계적 극단 ‘라 마마(La Mama)’가 그녀를 〈알라딘〉(The 3 Travelers of Aladin with the Magin Lamp)의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그녀의 말이다.
 
  “〈알라딘〉은 미국, 영국, 프랑스의 유명 연극단체의 합작품인데 저는 노래 대신 창(唱)을 접목시켰어요. 또 승무를 추고, 봉산탈춤을 응용한 어깻짓을 하니 난리가 났어요. 줄리아드를 나온, 저보다 키가 큰 단원들이 제 손짓과 발짓을 그대로 따라 했어요. 그 큰 무대에서 제가 어쩔 수 없는 어머니의 딸이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그동안 어머니의 소리에 질려 ‘나는 해봤자겠구나’ 생각했는데 오히려 물려받은 자질과 안목, 대가들에게 배운 춤과 기예를 응용하면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뉴욕에서 돌아와 집 앞마당에다 토굴을 파서 그때부터 소리 공부를 다시 했죠.
 
  1996년 네덜란드, 벨기에 7개 도시를 순회하는 판소리 단독 공연에서 만난 한국계 입양인의 눈물과 포옹, 하멜 후손과 6·25 참전용사 할아버지와의 아리랑 합창을 잊을 수 없어요. 또 97년 유네스코의 ‘세계 여성의 날’ 초청으로 참석해 세계 여성들에게 사군자를 치고, 서예(한글) 시범을 보인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어머니께선 제자들처럼 저를 다잡아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카네기 홀에 어머니 뒤를 이어 선 일, 파리 ARTA 초청으로 현지에 와 있는 세계 젊은 예술가들에게 한국전통음악 워크숍을 오랫동안 한 일 등을 두고 기뻐하셨어요.”
 
박윤초 서울예대 교수와 남편 양원석 전 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 상임고문.
  박 교수는 이런 일화도 들려주었다.
 
  “언젠가 기자가 찾아와 어머니를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기자가 ‘따님이 명창 소리를 듣는데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니 어머니 왈 ‘아이고, 저것이 얼마나 한다고. 자(저 아이는)는 몸이 약해 잘 못해’라고 하셨어요. 이튿날 신문을 보니 ‘딸 박윤초는 몸이 약해 어머니가 기대를 안 한다’고 쓰여 있더군요. 어머니가 그걸 보시고 ‘이런 빌어먹을 미친놈’이라며 화를 내셨죠. 제가 한마디 거들었죠. ‘엄마 소원대로 약한 년이라 아무것도 못해 좋겠수’라고 하니 상청으로 소리 지르며 ‘내가 진짜로 그릿냐. 저런 무식한 것들. 겸양지덕도 모르는 것들’ 하면서 신문을 발로 팍팍 밟으시더라고요. 다음부터 어머니는 기자 만나길 싫어하셨어요.”
 
  만정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94년. 만정은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사회자가 ‘따님을 훌륭한 예술가로 키워 이 상을 받았는데 딸이 무엇이 되길 바랐나’는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화가가 되길 바랐다”고 했다. 박 교수의 말이다.
 
  “평소 어머니는 제자들에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으나 제게는 그러시는 법이 없었어요. 돌아가시기 전 제 소리를 듣더니만 ‘그려 니가 내 딸은 딸인갑다’ 그 한마디 말씀에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지난 5월 21일 김소희 탄생 100주년 헌정공연에서 그녀는 시창(詩唱) ‘꿈에라도 오소서-사모곡2’를 간절히 불렀다.
 
  “여천지무심(輿天地無心)하여 / 못난 여식 홀로 남아 / 어머님 여의신 지 20여 성상(星霜) / 이리도 바삐 갈까 하오리다. // 그 속에 저도 속절없이 가만가만 / 익어 가는데 / 별리(別離)도 깊어지면 / 다시 만날 날 가까우리 오만 // 날이 갈수록 기리는 정 / 절로 절로 깊어만 가니 / 어찌 하오리이까 / 꿈에라도 오소서 // 일월성신(日月星辰) 가는 뜻을 / 저 모를 리 없건만은 / 머리에 서리 앉고 / 어머니 닮아 가니 // 하늘이 내신 연(緣)이 / 이리도 크온지라 / 절로 절로 그리는 정 / 꿈에라도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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