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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家를 찾아서

서양음악 선구자 백우용의 후손들

“지휘봉 들면 호랑이같이 무섭게 변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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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케르트 통역하며 음악 배우고 악기 다뤄”
⊙ “군악대, 이왕직양악대, 경성악대 이끌며 음악으로 민족에 위안과 용기”
⊙ “꽃전차 타고 경성 시내 돌며 ‘이동식 콘서트’”
⊙ 집 팔아 경성악대 운영 … “말년 ‘마음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구한말 대한제국 군악대, 이왕직양악대, 민간 악단인 경성악대를 이끈 백우용 선생.
  한국에 서양음악이 처음 상륙했을 당시 잊을 수 없는 인물이 정산(鼎山) 백우용(白禹鏞·1883~1930)과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1852~1916)다. 혼돈의 구한말, 에케르트가 한국에 서양음악을 가르친 첫 교육자라면 그의 제자 백우용은 양악(洋樂)을 처음 배운 음악인이었다. 악기연주에서 지휘, 교육, 작곡, 채보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역에서 서양음악의 씨앗이 두 인물을 통해 뿌려졌다.
 
  에케르트는 광무 5년인 1901년 2월 군악대의 악기와 악보 등을 가지고 한국에 왔고 그해 3월 군악대원 50명을 선발해 최초의 군악대가 창설됐다. 백우용 연구가인 조윤영(曺允榮)씨는 “1899년 여름 고종과 독일의 하인리히 황태자(Prinz Heinrich·1862~1929) 사이에 군악대 지도자 초청이 거론되면서 에케르트가 추천됐다”며 “앞서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1896년 5월 26일)에 다녀온 민영환이 그곳에서 화려한 군악대를 보고 서양식 군악대 창설 논의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백우용은 1901년 군악대에 입단해 에케르트를 통해 화성학을 비롯 서양음악 이론을 체계적으로 배워 연주자와 지휘자로 성장한다. 클라리넷, 오보에, 플루트를 연주했고 지휘법과 우리나라 음악의 오선 채보법까지 익혔다. 이후 대한제국 유일한 서양음악 단체인 ‘군악대’의 책임자(군악대장)로 양악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고 순종의 순방길에 동행하기도 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는 1907년까지 군악대는 존속했다. 이후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된 왕실 소속의 ‘이왕직양악대’로 개편됐으나 이마저도 1915년 완전 해산됐다. 백우용은 이후 민영 오케스트라에 가까운 ‘경성악대’를 창단, 1930년 사망할 때까지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벌였다.
 
 
  서울 사는 임천(林川) 백씨 … 대대로 무관·역관·의원 많아
 
혼돈의 구한말, 한국에 서양음악을 가르친 첫 교육자가 프란츠 에케르트(1852~1916)다. 그는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했다.
  그는 1930년 마흔여덟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조선일보》는 그해 4월 23일 자 기사에서 그의 죽음을 비중 있게 다루며 ‘씨는 그동안 인후병으로 신음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아내 박옥자(朴玉子·1969년 작고) 사이에 3남4녀를 두었다. 막내 백윤성(90)씨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한 상태다.
 
  기자는 백우용의 손자인 백성빈(白成彬·77)씨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그는 백우용의 장남 백윤상(白潤祥·1967년 작고)의 2남3녀 중 첫째다. 안타깝게도 백우용 후손들은 3대로 이어지고 있으나 음악인으로 대를 잇지 못했다.
 
  백우용의 본적은 ‘서울 종로구 익선동 2번지’다. 생애 전부를 4대문 안 중구와 종로구로 옮겨 다녔다. 군악대장 시절에는 낙원동(173-1번지)의 ‘한양탕’이란 목욕탕 뒷골목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손자 백성빈씨의 말이다.
 
  “키가 165cm 정도로 크지 않았고 얼굴이 희고 얌전하게 생겼는데, 이런 얌전한 사람이 일단 군악대 앞에 서서 지휘봉을 들면 호랑이같이 무섭게 변했다고 합니다. 이는 에케르트에게 엄격하게 음악을 배웠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성격도 강직하고 엄격하셨다고 해요. 선친 말씀이 (할아버지에게서) 조금도 비뚤어진 모습을 못 봤다고 합니다. 슬하의 3남4녀 역시 곧은 성격이어서 주변에 휩쓸리는 경우가 없었대요.”
 
  백우용의 성씨인 임천(林川) 백씨 집안은 대대로 무관과 역관, 의원이 많다고 한다. 백우용의 아버지 백근배(白根培·1843~1905)도 대한제국 당시 우정국에 근무했다. 사촌 백두용(白斗鏞·1872~1935)은 관훈동에서 규모가 큰 인쇄소 겸 출판사인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운영,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가 잦았다. 이처럼 백씨 집안은 신문물과 교육, 서구 문명의 수용에 적극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일어 배워 에케르트의 통역 담당
 
대한제국 군악대(1901~1907) 모습이다. 가운데 에케르트 모습이 보인다. 서울 탑골공원 팔각정에 군악대의 연습실과 병사(兵舍)가 있었다.
  백우용 역시 독일어학교인 ‘한성덕어학교(漢城德語學校)’에 1898년 입학한다. 덕어학교는 당시 설립된 6개 관립 외국어학교 중 한 곳으로 독어를 통해 프러시아 군사체계를 배우기 위해 설립됐다. ‘독일 군제를 모방한 일본군이 동양에서 최강이었다’는 점에서 고종이 덕어학교에 큰 애착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백우용은 2년 반 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그리고 군악대 책임자였던 에케르트의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게 된다. 백우용의 손자 성빈씨는 “(백우용이) 음악교육을 받으러 군악대에 간 것이 아니라 에케르트의 역관으로 처음 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에케르트의 음악교육은 매우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가 한국말을 구사하지 못했기에 독일어로 백우용을 먼저 가르쳤고, 백우용이 다시 대원들을 가르쳐야 했다. 백씨는 “통역을 하며 음악을 가르치고 악기까지 다뤄야 했는데 클라리넷을 잘 부셨다. 이후 할아버지가 지휘까지 맡게 됐고 군악대장에 오르셨다”고 말했다.
 
  에케르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할 당시 백우용과 함께 거의 매일 교방사(敎坊司)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교방사는 대한제국 궁내부의 장례원에 딸린 기관으로 궁중예식에 관한 음악을 담당하던 곳이다. 한일병탄 이후에 교방사는 ‘이왕직아악부’로 바뀐다. 백우용 연구가인 조윤영씨의 말이다.
 
  “당시 대원 수가 20여 명이었는데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던 에케르트와 서양음악이 난해한 대원 사이에서 백우용은 양쪽 입장을 고루 절충하고 군악대 발전을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어요. 또 에케르트의 다혈질적인 성격과 꼼꼼한 교수법은 빠른 시간 내 군악대 실력을 키울 수 있게 했죠.”
 
  〈… 에케르트는 (중략) 한 사람 한 사람씩 차례로 시창시키며 발음과 음정이 틀리면 피치 파이프를 불어 음정을 맞춰 음감 교육과 시창 교육을 겸한 기초교육을 철저히 실시했다. 그 덕분에 대원들의 음감은 전체적으로 향상됐고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특히 대원을 지도함에 있어서 진도가 느리고 성적이 불량한 대원이 있으면 그를 위하여 끝까지 지도해서 낙오자가 되지 않게 끈기 있게 가르쳐 쓸모 있는 대원을 만들어 냈다. …〉 (남궁요열, 《개화기의 한국음악-프란츠 에케르트를 중심으로》, p.63~64)
 
  조 연구가는 “바그너의 서곡을 연주할 만한 실력이었다. 그 정도로 한국의 서양 기악음악 성장에 큰 공헌을 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제국 군악대 vs. 독일 해군군악대의 맞짱 … 승자는?
 
기념일이나 행사 때마다 꽃으로 치장한 전차에 군악대가 타고선 경성(서울) 시내를 돌며 ‘이동식 콘서트’를 열었다. 사진은 대한제국 시대 경성 시내를 오가던 전차.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군악대는 군인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황제를 호위하는 호위 군대인 시위대(侍衛隊)에 속해 있었기에 정식 이름은 ‘시위 군악대’였다. 손자 백씨의 말이다.
 
  “군악대는 황실의 서양음악을 전담하는 역할을 도맡았는데 각국 공사관, 영사관의 순회 파티 때마다 연주를 해야 했어요. 덕수궁 안의 접견소나 정관헌(靜觀軒)에서 외국인 초대나 중요한 행사 때도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군악대원 일부는 연회에서 무곡을 연주했고 나머지 대원들은 남장과 여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스퀘어 댄스나 폴카 등 서양의 사교춤을 추기도 했다. 조윤영 연구가는 “독일과 프랑스, 미국 공사관에서 가장 많이 연주회를 가졌다. 일제 영향력을 반영하듯 일본군의 축하회나 축제일, 일본대사가 도착할 때 연주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했다.
 
  연주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1905년 3월 15일 독일 황태자가 당시 세계 최고로 정평이 나 있던 독일 해군군악대와 내한, 우리 군악대와의 교환 연주를 제안했다. 결국 탑골공원에서 고종과 독일 황태자 일행을 비롯해 각국 외교관과 대한제국 고위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맞짱 대결’이 펼쳐졌다. 양국 군악대가 국가와 자유곡 등 모두 8곡을 연주하기로 했다. 조 연구가의 말이다.
 
  “준비된 곡들을 연주하기 직전, 객석의 제안에 따라 연주 순서를 갑자기 바꿨다고 합니다. 진짜 실력을 비교하기 위해서죠.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우리 군악대 실력이 월등했고 이를 기쁘게 본 고종이 현금 1000원을 군악대에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 일은 당시 독일과 영국 일간지에 자세히 보도됐습니다.”
 
군악대가 경성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에케르트 부임 후 군악대는 30~40명 규모의 오케스트라 격이 되었고, 악기의 종류도 대원 수만큼 많았다.
  영국 《타임스》 기자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는 1922년 《동명》에 쓴 〈조선 양악의 몽환적 내력〉 글에서 당시 우리 군악대의 실력을 이렇게 평가했다.
 
  〈… (한국인에게 있어 최고는) 농업 다음에 군악이라 하며 군악대가 설립된 지 불과 몇 해밖에 되지 않아 그 학습한 곡종은 많지 않으나 주법은 영국의 빅토리아 관악대나 미국의 수사 관악대에 비해 손색이 없다. …〉 (《동명》 1922년 12월호, p.12)
 
  미국 출신 헐버트는 1886년(고종 23년) 내한,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외국어를 가르친 지한파 인물이다. 1905년 을사조약 후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여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돌아갔으나 전달에 실패했다. 대한민국 수립 후 1949년 국빈으로 초대를 받고 다시 내한했으나 병사하여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참고 《두산백과》)
 
  군악대 연습실은 당시 어디에 있었을까. 손자 백성빈씨의 말이다.
 
  “당시 탑골공원 경내에 군악대 병사(兵舍)가 있었고 종로도서관이 그 곁에 있었어요. 병사 맞은편 팔각정에서 매년 여름 목요일마다 시민들에게 서양음악을 소개하는 납량음악회가 열리곤 했어요. 기념일이나 행사 때마다 꽃으로 치장한 전차에 군악대가 타고선 경성(서울) 시내를 돌며 ‘이동식 콘서트’를 열곤 했어요. 서양음악을 처음 접한 경성 시민 사이에서 군악대 인기가 대단했어요.
 
  또 순종을 따라 평양, 정주, 신의주나 전주 등 ‘남순행길’(1909년 이왕직양악대 시절)에 동행했는데 금시계와 옥(玉)으로 된 담뱃갑을 선물로 받으셨죠.”
 
  백씨는 이런 말도 했다.
 
  “할아버지는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셨는데 집이 낙원동이었으니 (탑골공원과) 가까운 셈이지요. 동네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군악대장’이라 불렀어요. 낙원동 집에 에케르트가 몇 번 찾아왔는데 한식과 양식을 고루 차린 음식으로 한 상 가득 대접했다고 합니다. 할머니(박옥자)는 직접 고종을 알현하셨는데 가마를 타고 궁궐에 다녀오시면 그렇게나 뿌듯해하셨대요. 6·25 전만 해도 할아버지가 지휘할 때 입으시던 연미복이 있었는데 전쟁통에 불타 없어졌어요.”
 
 
  군악대 해체와 ‘이왕직양악대’와 ‘경성악대’
 
백우용 선생의 손자 백성빈씨.
  1901년 창설된 군악대는 1907년 군대가 해산될 때까지 존속하다 이후 황실이 왕가로 격하된 뒤 ‘이왕직양악대’로 개편된다. 백우용도 ‘군악대장’에서 ‘양악사장(洋樂師長)’으로 직함이 바뀌었다. 이왕직양악대는 1907년 9월부터 1915년까지 이어진다.
 
  명칭이 바뀌었으나 여전히 경성 시민들에게 흥미있는 볼거리였고 연주를 보러 온 많은 이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손자 백씨의 말이다.
 
  “종로 YMCA 회관에서 공연할 때면 백씨 집안이 모두 관람했고 단원들과 뒤풀이 회식도 같이 했다고 해요. 공연 레퍼토리가 굉장히 고급스러운 클래식이었다고 합니다. 식민지 설움과 절망에 싸인 우리 민족에게 음악으로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황실과 왕실의 격차에 따라 악대의 위상이 바뀌게 된다. 궁궐 안팎의 행사가 줄고 연주 횟수 역시 줄어들었다. 《대한제국사 연구》(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저)에 따르면, ‘1906년 서울에 일제에 의한 통감부가 설치되고 용산 주둔 일본 군대 내 일본 육군군악대를 편성, 27명의 일본 군악대가 들어와 주요 행사를 도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 연구가의 말이다.
 
  “군악대 시절보다 연주 횟수가 줄어들어 악대의 위상이 낮아졌어요. 1910년 한일병탄 이후 연주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일제 관리하에 있던 이왕직의 재정지원이 줄고 일본의 군악대까지 경성에 들어오게 되자, 이왕직양악대의 역할이 축소된 것으로 보입니다.”
 
‘백우용 연구가’ 조윤영씨.
  1915년 결국 이왕직 소속 양악대는 경비지출을 줄인다는 이유로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해산 후에도 대원들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며 왕실에서 악기를 빌려 비공식적으로 계속 연주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왕직에서는 3000원의 하사금을 내렸고, 왕실에서도 필요할 때마다 악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손자 백성빈씨의 말이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대원들은 이왕직양악대를 존속시키려 학교 운동회나 조선호텔의 전속 악사, 조선극장이나 우미관 등지에서 활동사진(무성영화)에 맞춰 연주하는 등 생존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이왕직양악대는 완전히 해체됩니다.”
 
  이왕직양악대가 해체되자 백우용은 흩어진 대원 20여 명을 모아 1919년 10월 민간 음악단체인 ‘경성악대’를 조직한다. 어쩌면 국내 최초의 민간 오케스트라인 셈이다. 손자 백씨의 말이다.
 
  “재정적으로 궁했던 경성악대는 입장료를 받는 음악회에 많이 출연했지만, 서민을 위한 무료음악회를 매년 여름 개최해 음악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어요.
 
  백우용의 낙원동(종로구) 집은 규모가 컸지만 경성악대를 지키려 집을 내놓아야 했어요. 악단이 사라지고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져도 할아버지는 이들을 가족처럼 챙겼다고 합니다. 낙원동 집을 팔고 수표동(중구)으로 이사 갔는데 건넛집이 장택상 집이었다고 해요. 돌아가시기 전 다시 수표동 집마저 팔고 충신동(종로구)으로 옮겨야 했어요. 그땐 이미 가세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해요. 대원들을 다 먹여 살려야 했으니 …. 찬조를 받아 꾸려 가다가 ‘마음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백우용 연구가인 조윤영씨는 “당시 신문에 실린 경성악대의 연주모습을 보면 모두 일자(一字)로 서서 연주하고 있고, 서양음악을 주로 연주하지만 하얀 두루마기 차림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연주복장도 준비하기 힘든 형편이라 연미복 대신 두루마기를 걸치고 연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백우용 후손 이야기
 
  경성악대의 후원회(후원회장 박영효)가 꾸려져 재정문제를 해소하려 애를 썼으나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백우용은 단원들을 데리고 종로에 있는 단성사(團成社)에서 총책임자 겸 지휘자로 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무성영화의 반주나 극중 삽입음악을 연주하며 생계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경성악대의 연주는 점차 보기 힘들어졌고 유야무야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후 백우용은 보성, 휘문학교 등 중등학교에 재직하며 음악수업과 취주악대를 맡아 가르쳤다. 고등교육 과정인 연희전문학교와 불교전수학교(지금의 동국대)에 출강, 음악을 가르쳤고 여성계몽을 위한 창가집도 여러 권 발간했다. 손자 백씨의 말이다.
 
  “아버지(백윤상)가 보성을 나오셨는데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부셨다고 해요. 조부가 직접 가르치신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그분 영향을 받은 것만은 틀림없지요. 이런 얘기도 들었어요. 할아버지께서 보성과 휘문·경신·동국대 등지에서 가르치셨는데 연주하거나 지휘하는 모습이 멋있어서 학생들이 그 학교에 진학했다고요.”
 
  백씨는 “다만 후손 중에 백우용 뒤를 잇는 예술가나 음악가를 배출시키지 못해 안타깝다”고 고개를 숙였다. 백우용의 3남4녀 중 세 아들은 대개 기계·섬유·제과업에 종사했다. 손자 백씨도 약품도매업을 하다 자수(刺繡)회사를 차렸다가 IMF로 실패, 현재 경기도 양주에서 조경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의 말이다.
 
  “할아버지는 연주자와 지휘자로 군악대와 이왕직양악대, 경성악대를 거치며 당대 유일한 음악단을 지키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사셨어요. 그가 세운 악단은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용기와 위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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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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