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 정규재 전 《한국경제신문》 주필 : 월간조선

정규재(鄭奎載·60) 《한국경제신문》 주필이 지난 3월 29일 논설고문으로 물러났다. 1년의 임기가 남은 등기이사직은 유지하기로 했지만,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사실이다. 이와 함께 정 전 주필이 운영해 온 인터넷방송 정규재TV는 신문사 밖으로 독립시키기로 했다.

사실 정 전 주필의 퇴진은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인용(認容)하면서 점쳐져 왔다. 지난 1월 25일 정규재TV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인터뷰한 것을 비롯, 탄핵사태 중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야당과 촛불 세력을 통렬하게 비판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활동을 통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부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나 익숙하던 ‘정규재’라는 이름은 ‘보수(保守) 세력의 아이콘’으로 부상(浮上)했다. 태극기 집회 장소에서는 자유민주주의수호시민연합 등에서 《한국경제신문》 구독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정규재 전 주필의 퇴진을 전후(前後)해서 야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 측이 한국경제신문사의 대주주인 모(某) 대기업을 통해 압력을 가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규재 전 주필도 방송 등을 통해 외압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서울 충정로 한국경제신문사 14층에 있던 정규재TV는 정 전 주필의 퇴임과 함께 서울 내수동에 있는 오피스텔 광화문시대로 사무실을 옮겼다. 정 전 주필이 정규재TV를 통해 광화문시대로 옮긴다는 사실을 밝히자, 난리가 났다. 오피스텔 관리사무실에는 정규재TV가 입주한 사무실을 묻는 전화가 빗발쳤다. 어느 애청자는 오피스텔 맨 꼭대기 층부터 차례로 훑어 내려오다가 사무실 문밖에 인테리어 폐기물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찾아오기도 했다. 모 기업 대표는 정규재 전 주필이 비염(鼻炎)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공기청정기 두 대를 기증했다. 미국 등 해외에서도 정 전 주필을 돕기 위한 성금이 답지하고 있다. 3월 31일 광화문시대에 있는 정규재TV 사무실에서 정규재 전 주필을 만났다.

이념의 소매상

― 독립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회사 안에 있을 때에는 《한국경제신문》이 지향하는 가치나 윤리 범주, 주제의 범주 같은 데 제약을 받았지요. 신문사가 요구하는 형식적 균형감각에 따라야 했고…. 독립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자유롭겠지만, 대신 신문사라는 울타리가 없어져서 어떤 바람이든지 혼자서 맞닥뜨려야 하겠지요. 이념의 소매상이기 때문에 장사도 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저의 이념과 가치와 잘 조화시켜야 한다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 자신 있습니까.

“약간 짜릿해요. 재미도 있고,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 주필을 그만두게 된 소감이 어떻습니까.

“사실 전부터 정규재TV에 더 에너지를 쏟고 싶은데 자리를 맡고 있어 그러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누가 뺨을 안 때려주나 하고 있는데, 뺨을 때려준 거지.”

― 유력 야당 대통령 후보 측에서 대주주인 어느 회사를 통해 《한국경제신문》에 압력을 넣었다는 얘기도 있고, 심지어 중국이 그 대주주에게 압력을 넣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중국이? 왜요?”

― 정규재TV가 사드 배치를 강하게 주장하고 중국체제에 비판적이었다는 거죠.

“에이, 중국은 아니에요.”

― 그럼 모 후보 측이 압력을 넣었다는 건 사실인가요.

이 질문에 정 주필은 대답 대신 ‘다 알면서 뭘 물어보느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얘기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태로 돌렸다.

“87년 체제의 악마적 측면이 드러난 것”

정규재 전 주필은 탄핵 정국의 와중이던 지난 1월 25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인터뷰했다.

―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태를 한마디로 어떻게 정리하겠습니까.

“1987년 체제 속에 숨어 있던 악마적 측면이 이번에 드러난 것이죠. 민주주의에는 대중주의적 쏠림, 천박성, 하극상 같은 악(惡)의 측면과 자유, 다양성, 상호 존중과 같은 밝은 측면이 함께 들어 있어요. 전자(前者)는 민중주의적 측면, 후자(後者)는 서구 선진국의 자유민주주의적 측면이지요. 그중 민중주의적 요소가 점점 커져오다가 드디어 쌍둥이의 다른 측면인 자유민주주의를 쓰러트리는 동족살해가 일어난 것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 과정에서 희생양이 된 것이고요.”

정 전 주필은 “정치게임적으로 보면 87헌법 내에 함께 있던 내각제적·국회중심주의 요소가 대통령제적 요소를 탄핵한 사건”이라고 덧붙였다.

“권력욕구 때문에 늘 흥분 상태에 있던 국회의원들에게 대통령은 좋은 먹잇감이었어요. 지역적 사무에 집착하는 국회의원들은 보편적 국가 이익에 대한 접근을 요구하는 대통령과는 맞지 않거든요. 이번에 대통령을 탄핵하면서 모든 국회의원은 내면적으로 동질감을 느꼈을 것으로 봅니다. 지난 수년 동안 국회에서는 개헌이라는 이름 아래 내각제적 요소를 강화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어 왔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걸 거부해 왔어요. 앞으로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국회에 대해 열등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 국회 말고도 언론, 시민단체, 법조 등 우리 사회의 많은 부문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등을 돌린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노동법 개혁, 전교조의 법외(法外) 노조화, 통진당 해산 등에 불만을 품은 기득권 세력이 개혁주의적 대통령의 약점을 극대화해서 탄핵한 것이죠. 언론은 거짓말을 확대 재생산했고…. 근대 초의 마녀사냥이나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 같은 일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번 탄핵은 어떤 의미로든 두고두고 리뷰되면서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될 것입니다.”

― 드레퓌스 사건은 에밀 졸라 등의 노력으로 결국 진실이 밝혀졌지요.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최순실·안종범씨 등에 대한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질는지부터 걱정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은 그 사유가 굉장히 엉성한데도 법원은 너무도 쉽게 수용했어요. 이는 대통령을 탄핵시킨 우리 사회의 프레임이 계속 작동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프레임이 깨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요.”

“박근혜, 기득권 세력의 이익 침식”

― 박근혜 전 대통령을 ‘개혁 대통령’이라고 했는데,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여러 집단의 입장에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그들의 이익을 끊임없이 침식(侵蝕)해 왔어요. 일례로 지난 수십 년간 방치되어 온 공무원연금이 어느 정도는 개혁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공무원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지요. 법외노조화되면서 전교조 세력도 반감을 갖게 되었어요. 노동조합 개혁은 국회선진화법에 의해 철저히 부결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적대 세력이 늘어났어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되돌릴 수 없는 수준까지 화끈한 개혁을 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런 어중간한 개혁들이 국정의 다방면에서 계속되면서 피로증을 낳았어요. 그것이 대통령을 거부하는 세력들이 탄핵을 하는 에너지로 축적된 것이지요.”

―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잘 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개성공단 폐쇄, 통합진보당 해산 등 자기 결단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잘 했어요.”

―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잘못한 일은 뭐가 있을까요.

“국회의 입법을 거쳐야 하는 문제들은 다 실패했어요. 국회를 설득하고 이용할 줄 알아야 했는데, 그걸 못했어요. 흔히 말하는 소통을 잘못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좋은 정치가는 아니었지요. 인사에도 잘못이 많았고, 2015년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한 것도 잘못이지요. 하지만 이런 잘못들이 탄핵이라고 하는 정치사법적 절차에 이를 만한 것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태극기 집회 참석자 중 상당수는 87년 넥타이 부대일 것”

정규재 전 주필은 태극기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1987년 넥타이 부대와 대부분 같은 사람들일 것으로 보았다.

― 이번에 대통령제의 한계가 드러난 만큼 차라리 이번 기회에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제 개헌을 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내각제는 우리나라 대중에게 맞지 않는다고 봐요. 한국의 유권자들은 국회의원을 뽑을 때, 국가지도자가 아니라 지역 일꾼을 뽑고 있어요. 이런 한계를 갖고 있는 국회의원들이 보편적 국가 사무에 대해 객관적·법치주의적 접근을 할 수 있을까요? 구조적으로 예산투쟁이 국회의 일인 것처럼 타락해 있어요.

요즘 5·18 유공자 가산점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국회의원들 중에는 그 법을 통과시켜 주면서 자신의 전리품을 챙긴 사람들이 많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내각제라는 법률적 구조까지 씌워놓으면 그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서 국가적 의사결정 불능 상태로 갈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국회선진화법이 유사(類似)내각제지요.”

― 탄핵사태의 와중에서 태극기 집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태극기 집회의 의미는 어디 있다고 봅니까.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상 보수가 이렇게 대규모 집회를 구성하고 자발적으로 태극기라는 상징물을 들고 집단적 시위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는 87년 6월 민주화운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넥타이 부대 가운데 상당수는 이번에 태극기를 들고나왔다고 생각해요. 50대 후반에서 70대에 이르는 이분들은 진행되는 상황을 보면서 모반적(謀叛的)인 낌새와 함께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거죠.”

― 이 태극기 집회를 정치적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는 없을까요.

“아직은 어려울 거예요. 재야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났던 태극기 집회와 제도권 정치가 연결되는 고리가 아직 없어요. 유일한 고리가 김진태 후보 정도였지만 실패했지요. 홍준표 후보는 태극기 집회와 연결고리가 전혀 없어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얼마나 태극기 시민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가, 태극기 시민들이 홍준표를 보수 후보로 받아들이느냐가 보수 재건의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하루 방문자 100만명 목표”

《한국경제신문》에서 독립해 나온 정규재TV는 심층 교양채널을 지향한다. 사진은 지난 4월 11일 방송된 ‘김태우 박사의 북핵 긴급진단’.

화제를 정규재TV로 돌렸다.

― 2012년 정규재TV는 어떻게 만들게 된 것입니까? ‘나꼼수’ 같은 팟캐스트 방송의 영향을 받았나요.

“그게 자극이 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자유경제는 공부를 해야 알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어요. 경쟁을 모르면 시장을 알 수 없어요. 경쟁을 이해시키려면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은 있어야 해요. 그런데 방송 나간 후 반응을 보니 사람들이 그런 걸 기다리고 있던 것 같더라고요.”

― 정규재TV 홀로서기에 대한 전망이 보입니까.

“정규재TV는 최소비용 구조로 되어 있어서 상당 기간 동안 유지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규재TV의 목표는 현상유지가 아닙니다. 보수적 가치를 전면에 내건, 정말 중용(中庸) 있는 매체로 정규재TV를 발전시키고 싶어요.”

― 중용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중용이라는 것은 단순히 산술적 평균이 아니라 사실로부터 추론되는 정당한 보수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규재TV를 인터넷 베이스로 휴대폰·스마트TV를 장악할 수 있는 매체로 키워나가고 싶어요. 그러자면 하루 방문자 수가 100만명은 되어야겠지요.”

― 현재 하루 방문자 수는 얼마나 됩니까.

“30만명 정도예요.”

― 그럼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겠네요.

“종편 하는 사람들 얘기로는 인터넷TV 방문자 100만명이면 종편 시청률 10%에 해당한다고 해요. 쉬운 일은 아니지요.”

― 조갑제TV, 신의 한수, 배나TV 등 우파 인터넷 방송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정규재TV는 어떻게 차별화할 것입니까.

“보도보다는 심층의 지식을 가지고 보수를 교육하는 교양채널을 만들고 싶어요. 제 목표가 하루 방문자 100만명이라고 했는데, 이는 어린이나 아주 나이가 많은 분들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인구의 3~4%쯤 될 거예요. 그들이 매일 가치(價値)를 지향하는 프로그램을 본다면,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다고 봐요.”

― 그동안 정규재TV의 성공작들을 꼽는다면 어떤 게 있습니까.

“제일 많이 본 것은 박근혜 대통령 인터뷰(243만 뷰)였죠. 1997년 IMF 사태를 다룬 ‘실록 외환대란’도 100만명 이상이 봤어요. 그 밖에 조국 서울대 교수가 잘못된 통계를 인용하거나 통계를 오독한 것을 지적한 ‘조국, 아 나의 조국’ 시리즈, 2012년 대선 당시 안철수 후보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도 많이 봤죠.”

“안철수가 왜 정치를 하는지 모르겠다”

― 안철수 후보를 어떻게 보세요.

“그는 극좌(極左)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가 왜 정치를 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대통령은 국가를 떠받치는 가치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는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한 생각이나 대한민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비전, 대통령직에 따르는 책임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깊은 고뇌 없이 ‘지금 국회의원 하고 있는 정치인이나 이번에 출마한 아무개보다는 내가 낫다’는 생각만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안철수의 생각》이라는 책을 보면 ‘안철수의 생각은 굉장히 짧다’는 생각이 들어요.”

― 문재인 후보는 어떻게 봅니까.

“‘보수를 불태우겠다’ ‘혁명이 필요하다’고 하고, 광장의 촛불이나 횃불을 민주주의의 본질이라는 식으로 추어올리는 것을 보면, ‘저분들이 아직도 매일 밤 공화국을 몇 개씩 만들었다가 부수었다가 하는 사춘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이번 대선 후보들의 경제정책을 보면, 누가 되든지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추운 계절이 올 것 같습니다.

“우리의 지적(知的) 전통은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죠. 농촌공동체의 아련한 추억, 오순도순 서로 도와가며 사는 협력적 사회 혹은 코포라티즘적 사회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들이 있어요.”

‘완장’의 흥분

― 자유라는 게 결국은 영국이나 미국 같은 앵글로색슨족의 전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저는 대중이 모두 자유주의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정치 엘리트들이 어느 정도 자유라는 것을 이해하고, 자유주의의 기본원리에 걸맞게 사회를 만들어 주느냐 하는 것이죠. 일반 대중은 그렇게 만들어진 틀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유로운 활동을 하면서 사회가 진보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해 왔는데, 점점 더 국가에 의지하는 성향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국가라는 추상명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완장’의 흥분을 안겨주죠. 정치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상대방이 자기와 똑같다는 것을 느끼는 데서 자유민주주의의 원리가 나오는 겁니다. ‘저 사람도 자유롭기 때문에 나와 똑같은 인격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상대방에 대한 관용이 나오는 거죠. 우리는 아직도 우리 편이다 네 편이다 가르면서, 이너서클이기만 하면 용서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해요. 보편적 잣대를 못 갖고 있어요.”

― 언제부터 이렇게 ‘인기 없는’ 자유주의자가 됐습니까.

“다 그렇지만 대학 다닐 때는 저도 《레닌전집》 같은 걸 구해 보고 그랬지요. 군대 가기 전에는 실존주의 철학에 푹 빠져 지냈고, 군대 갔다 온 다음부터 좌익사상에 관심을 가졌지요.”

― 운동권 서클에 가담한 것이었나요.

“호박회라는 독서클럽이 있었어요. 우리 때는 아니었지만 나중에는 상당히 심각한 주사파(主思派) 조직이 됐습니다.”

― 《레닌전집》을 본 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생각에서였습니까.

“그때는 레닌이 대단한 사람으로 보였으니까…. 그때도 ‘사회주의는 안 된다. 설계주의적 에러가 생긴다.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자유주의 철학의 기본 명제는 알려져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얘기는 귓전으로 흘려들었지요.”

“소련 특파원 하면서 사회주의 벗어나”

― 언제쯤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에서 벗어났습니까.

“완전히 버린 것은 기자를 하면서였어요. 1991~1993년 망해가는 소련에서 설계주의 사회가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는지, 인간 속에는 어떤 비열성이 있는지, 왜 권력은 절제되어야 하는지, 왜 정부는 작아야 하는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는 무엇인지 등을 느끼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지요. 아마 이게 우리나라에서 1970~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사람들의 일반적인 궤도일 거예요.”

― 하이에크나 미제스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언제쯤 접했습니까.

“제가 학교 다니던 1970년대 후반에도 하이에크가 알려져 있기는 했어요. 하지만 하이에크에 대해 물으면 경제학과 교수들은 ‘그런 쓰레기 같은 건 알 거 없어’ 하는 분위기였어요.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린 후, 하이에크에 대해 알게 되면서 하루에 몇백 페이지씩 읽었어요. 그렇게 몇 년 보고 나니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요. 좌익 이데올로기의 뿌리도 이해하게 되었고….”

― 자유주의를 알려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은 어떤 게 있습니까.

“어느 정도 철학적 훈련이 된 사람이라면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권합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플라톤을 다시 읽으면 인류의 지적 편력이 이해가 되지요.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은 대학 2~3학년이면 읽어봐야 할 책이고요. 이 책을 읽다 보면 ‘국회에서 다수결로 두드렸다고 해서 다 법인 것은 아니다. 자유의 입법이 아니면 법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와요. 입법만능주의에 빠져 정말 쓰레기 같은 법을 양산하는 우리 국회를 생각하게 하는 얘기지요.”

― 퇴근 후 카톡 금지법, 칼퇴근법, 5·18 비판금지법 등 별걸 다 법으로 만들고 있지요.

“인생관, 희망도, 자기들의 꿈도 다 법으로 정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지금 만들어지는 그런 법들은 법이 아니에요. 그게 왜 법이 아닌지, 인간은 왜 그런 법을 만들려는 유혹을 느끼는지를 알려면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법·입법 그리고 자유》 같은 책들을 읽어보면 좋지요.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소수의 천재들이 자유를 외쳤습니다. 그분들의 제자인 우리로서는 고마울 뿐이지요.”

― 하이에크가 사회주의의 모순을 깨닫고 자유주의로 생각을 바꾼 때로부터 소련이 무너지는 걸 볼 때까지 70년이 걸렸지요.

“하이에크는 행복한 사람이었지요. 힘들게 시작했지만, 승리의 팡파르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걸 보면서 죽었으니까요.”

“대기업이 적어서 문제”

― 우리나라의 자유주의자들도 그런 행운을 맛볼 수 있을까요.

“볼 수 있을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별나게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그 제멋대로인 성격이 법치주의의 길로만 들어서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의 천하대란(天下大亂)이 지나가면 자유가 복권되는 날이 오겠지요.”

― 이번 대선 결과는 어떻게 봅니까.

“앞으로 누가 되든 3년을 넘기기 어려울 거예요.”

― 주필님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 인식을 깨는 지적 자극을 주는 데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너무 일방적으로 대기업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대기업이 많아서가 아니라 적어서 문제인 나라예요. 대기업이 더 많아져야 해요. 대기업의 일자리라야 좋은 일자리예요. 미국·독일에서는 대기업 취업자가 40~50%지만 우리나라는 10%대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중소기업·임시직·일용직 일자리예요. 골목의 자영업 비중이 35~36%나 됩니다. 골목에서 과당경쟁의 비명이 들리는 것도 대기업이 적어서예요. 대기업을 더 키워야 해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이 10개만 있으면 대학생들이 취업 걱정을 왜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