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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인간

17세기 중국 최고의 화가 동기창

최고의 예술가, 최악의 인격 파탄자

글 : 이근명  한국외국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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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작(代作) 서슴지 않고 남이 가져온 가짜 작품에도 서명해 줘
⊙ 돈과 여색 밝히고, 권세가에게 아부
⊙ 학교 감독관 할 때에는 학생들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그게 시험문제라고 우겨

이근명
1961년 생. 서울대 동양사학과(학사), 서울대 동양사학과 대학원(석사, 박사) /
송요금원사연구회 회장, 한국외국어대 교양대학장 역임. 현 한국외국어대 교수 /
저서 ≪남송시대 복건 사회의 변화와 식량 수급≫, ≪아틀라스 중국사≫(공저) 등
동기창의 자화상.
  17세기를 통해 대화가 동기창(董其昌·1556~1636)의 명성은 전 중국에 떨쳤다. 생전에는 화단의 영수로, 사후에는 위로 황제로부터 아래로 사대부와 상인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을 소장하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 중국 미술사에 있어 예술가로서, 이론가로서도 그는 불후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
 
  그는 남중국의 쑹장(松江)에서 살았다. 쑹장은 15세기 이래 면직물업의 중심지로, 인근 쑤저우(蘇州)와 함께 중국 경제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쑹장에 있는 그의 저택에는 그의 작품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정황에 대해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권세가들이 정중히 작품을 청하여도 동기창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시켜 그리게 하였다. 때로는 노비들이 가짜 그림을 갖고 와서 부탁해도 흔쾌히 거기에 자기의 서명을 해 주었다. 집안에는 처첩이 많았는데, 진품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들 여인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았다.
 
  태연히 대작(代作)을 시키는 예술가, 심지어 남이 가져온 가짜 그림에도 서슴없이 서명을 적어 주는 화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예술 세계를 동경하며 ‘예술가의 양심’을 대단한 가치로 여긴다. 지고의 미와 선을 추구하는 예술가라면, 그에게 특별한 도덕성과 인격이 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아름다운 미의 세계를 이뤄 낸 최고의 화가일수록, 그 예술 세계만큼이나 그의 인격도 고귀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동기창에게는 미술 내지 예술 세계에 대한 헌신이나 경건함이 전연 존재하지 않았다. 미술의 가치를 지킨다는 의식은 고사하고, 저잣거리의 장사치도 지니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상도덕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가짜를 진품이라 속이고 판매하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1억7000만 평의 땅 소유
 
명대 강남지방 도시의 번화한 모습. 16세기 남중국에서는 상업 발달과 함께 도시화가 진척되어 쑤저우, 쑹장, 난징 등이 인구 수십만의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상인이 동기창의 서예 작품을 사고 싶어했다. 동기창의 작품에 가짜가 많다는 얘기를 너무도 많이 들었던지라, 그 상인은 동기창과 매우 가깝다는 사람에게 다리를 놓아 상담하였다. 그 사람의 소개로 많은 돈을 주고서야 겨우 동기창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동기창은 그 상인의 면전에서 직접 글씨를 써서 건네주었다. 상인은 그 작품을 응접실에 걸어 두고 사람들에게 자랑하였다. 보는 사람마다, “과연 진품은 다르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였다.
 
  이듬해 그 상인은 동기창이 사는 쑹장에 다시 가게 되었다. 그가 동기창이 사는 동네 인근을 지나고 있을 때 마침 가마 탄 사람이 지나갔다. 그때 누군가, “동기창이다!”라고 외쳤다. 상인은 가마 탄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글씨를 써 준 노인과는 전연 다른 사람이었다. 상인은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였다. 그것을 보고 동기창이 무슨 일인지 물은 뒤 딱하다 여겨서 서예 작품을 하나 써 주었다. 상인은 진품을 손에 넣었다고 자랑하였지만 사람들은 이전 작품의 품격이 훨씬 낫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동기창이란 인물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예술의 가치고 뭐고 돌아보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보호한다는 인식도 없었다. 밀려 오는 사람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덤터기 씌워 돈을 버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 그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던 것일까? 쑹장 시내에 있는 그의 화려한 저택은 수백 칸이 넘었으며, 선박 100여 척에 농토 1만 경(頃)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1만 경이라 하면 1억7000만 평에 해당한다. 1억7000만 평이라 하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당시 중국 어디나 동기창 작품의 모사품이 넘쳐 났다. 동기창은 출세하기 전 일찍이 평호(平湖)의 풍씨 집안에서 가정교사로 지낸 적이 있었다. 그가 유명해진 다음 풍씨는 6개의 부채를 갖고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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