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작(代作) 서슴지 않고 남이 가져온 가짜 작품에도 서명해 줘
⊙ 돈과 여색 밝히고, 권세가에게 아부
⊙ 학교 감독관 할 때에는 학생들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그게 시험문제라고 우겨
이근명
1961년 생. 서울대 동양사학과(학사), 서울대 동양사학과 대학원(석사, 박사) /
송요금원사연구회 회장, 한국외국어대 교양대학장 역임. 현 한국외국어대 교수 /
저서 ≪남송시대 복건 사회의 변화와 식량 수급≫, ≪아틀라스 중국사≫(공저) 등
⊙ 돈과 여색 밝히고, 권세가에게 아부
⊙ 학교 감독관 할 때에는 학생들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그게 시험문제라고 우겨
이근명
1961년 생. 서울대 동양사학과(학사), 서울대 동양사학과 대학원(석사, 박사) /
송요금원사연구회 회장, 한국외국어대 교양대학장 역임. 현 한국외국어대 교수 /
저서 ≪남송시대 복건 사회의 변화와 식량 수급≫, ≪아틀라스 중국사≫(공저) 등

- 동기창의 자화상.
그는 남중국의 쑹장(松江)에서 살았다. 쑹장은 15세기 이래 면직물업의 중심지로, 인근 쑤저우(蘇州)와 함께 중국 경제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쑹장에 있는 그의 저택에는 그의 작품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정황에 대해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권세가들이 정중히 작품을 청하여도 동기창은 대부분 다른 사람을 시켜 그리게 하였다. 때로는 노비들이 가짜 그림을 갖고 와서 부탁해도 흔쾌히 거기에 자기의 서명을 해 주었다. 집안에는 처첩이 많았는데, 진품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들 여인을 통해 얻는 경우가 많았다.
태연히 대작(代作)을 시키는 예술가, 심지어 남이 가져온 가짜 그림에도 서슴없이 서명을 적어 주는 화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예술 세계를 동경하며 ‘예술가의 양심’을 대단한 가치로 여긴다. 지고의 미와 선을 추구하는 예술가라면, 그에게 특별한 도덕성과 인격이 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아름다운 미의 세계를 이뤄 낸 최고의 화가일수록, 그 예술 세계만큼이나 그의 인격도 고귀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동기창에게는 미술 내지 예술 세계에 대한 헌신이나 경건함이 전연 존재하지 않았다. 미술의 가치를 지킨다는 의식은 고사하고, 저잣거리의 장사치도 지니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상도덕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가짜를 진품이라 속이고 판매하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1억7000만 평의 땅 소유
![]() |
| 명대 강남지방 도시의 번화한 모습. 16세기 남중국에서는 상업 발달과 함께 도시화가 진척되어 쑤저우, 쑹장, 난징 등이 인구 수십만의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
이듬해 그 상인은 동기창이 사는 쑹장에 다시 가게 되었다. 그가 동기창이 사는 동네 인근을 지나고 있을 때 마침 가마 탄 사람이 지나갔다. 그때 누군가, “동기창이다!”라고 외쳤다. 상인은 가마 탄 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글씨를 써 준 노인과는 전연 다른 사람이었다. 상인은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였다. 그것을 보고 동기창이 무슨 일인지 물은 뒤 딱하다 여겨서 서예 작품을 하나 써 주었다. 상인은 진품을 손에 넣었다고 자랑하였지만 사람들은 이전 작품의 품격이 훨씬 낫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동기창이란 인물은,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예술의 가치고 뭐고 돌아보지 않는 파렴치한 사람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보호한다는 인식도 없었다. 밀려 오는 사람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덤터기 씌워 돈을 버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여 그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던 것일까? 쑹장 시내에 있는 그의 화려한 저택은 수백 칸이 넘었으며, 선박 100여 척에 농토 1만 경(頃)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1만 경이라 하면 1억7000만 평에 해당한다. 1억7000만 평이라 하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당시 중국 어디나 동기창 작품의 모사품이 넘쳐 났다. 동기창은 출세하기 전 일찍이 평호(平湖)의 풍씨 집안에서 가정교사로 지낸 적이 있었다. 그가 유명해진 다음 풍씨는 6개의 부채를 갖고 와서, 낙관을 감추고 동기창에게 자기 작품을 골라 보라고 하였다. 동기창은 잠시 후 3개를 지목하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모두 다른 사람의 서예 작품이었다고 한다.
위작도 범람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동기창은 과거에 합격할 때의 시험관이었던 고관에게 감사의 표시로 많은 작품을 그려 주었다. 그 고관이 어느 날 동기창을 불러 작품들에 대한 품평을 부탁하였다. 동기창은 심사숙고한 다음 어느 작품을 골랐다. 그리고 말하였다.
“이것은 제 평생 최고의 작품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도저히 이러한 필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에 그 고관이 한숨을 쉬며 대답하였다.
“이것은 그대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베껴 그리게 한 것이라오.”
당시 시중에는 동기창 본인조차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수준 높은 위작이 많았다. 또 동기창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의 필치를 모델로 삼아 서화를 그리는 작가들도 대단히 많아졌다. 이러한 현상은 동기창의 생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동기창의 명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졌다. 특히 청대의 강희제는 그의 예술에 대한 신봉자였다. 그리하여 17세기를 거쳐 18세기에 이르도록 동기창 작품의 가격은 높아져만 갔고, 이에 비례하여 위작의 풍조 역시 식을 줄 몰랐다.
위작의 범람에 대해 동기창에게 그 책임을 모두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신 전문 대역 화가를 고용하여 위작을 시키고도 양심의 가책을 전연 느끼지 않았다. 유독 동기창의 작품에만 위작이 많았던 데는 이러한 작가 자신의 부도덕함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동기창의 부도덕성은 비단 위작의 범위에만 그치지 않는다. 예술 세계에서 벗어나 일상 생활에 이르면 그는 실로 인격 파탄자, 흉악한 범죄자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주 곤란한 인물이었다. 그는 쑹장에 거주하며 사소한 시비를 걸어 약자들의 재산을 강탈하였다. 또 주민들이 약간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노비를 풀어 폭행하기를 예사로 하였다. 나아가 추악하게도 나이 들도록 여색의 탐닉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주변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여색 밝히다가 민란 유발
![]() |
| 동기창의 초기 그림 〈구봉초은(九峰招隱)〉, 상하이 박물관 소장. 북송 시대 화풍의 영향을 받아 실경을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
육소방은 화가 나서 쑹장 시내 곳곳에 동기창의 악행을 고발하는 벽보를 붙였다. 이에 놀란 동기창은 사람을 중간에 넣어 육소방과 화해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이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의외의 변수가 발생하여 사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평소 동기창의 소행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사람이 이 사건을 소설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 동기창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몰염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더욱이 소설 내용은 노래로도 만들어져 삽시간에 쑹장 시내에 두루 퍼졌다. 이 소식을 들은 동기창은 불같이 화가 났다. 그는 소설을 쓴 사람이 누굴까 수소문하였다. 그리고 인근에 사는 범창(范昶)이란 서생을 지목하고 그를 데려다 취조하였다. 범창은 한사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정하였지만 동기창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렇게 며칠이 지났을 때 돌연 범창이 급사하고 말았다.
범창의 노모와 미망인은 동기창의 집 앞으로 와서 동기창 때문에 범창이 죽었다며 크게 소란을 피웠다. 이를 본 동기창의 둘째 아들 동조상은 두 여인을 집안으로 끌고 와 무참히 폭행하였다. 후에 동조상은 이 일로 재판을 받았다. 그 고소장에는 ‘도음(搗陰)’, 즉 음부를 짓이겼다는 내용이 있다. 다른 기록에는, ‘머리털이 다 뽑혔으며 양 다리 사이에서는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고 적혀 있다. 실로 여성에게 최고의 모욕을 주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쑹장 시내 전체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격분한 시민들은 동기창의 집 앞으로 몰려들었다. 쑹장 시민들 사이에서는, ‘따뜻하고 배부르게 살기 원하거든 먼저 동기창을 죽여라(欲要柴米强 先殺董其昌)’란 말이 나돌았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동조상은 지붕 위에 올라가 군중들을 항해 기왓장을 던지고 분뇨를 뿌려 댔다.
이러한 동조상의 소행은 불 위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마침내 군중은 폭발하여 동기창의 저택에 불을 질렀다. 호화로운 동기창의 집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동기창이 수십 년간 공을 들여 수집한 골동품과 서화도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동기창은 담장을 넘어 가까스로 화를 피했다. 그는 이후 쑤저우와 진장(鎭江) 등지로 떠돌다 반 년이 지나 사태가 완전히 가라앉은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엉터리 학교 감독관
이러한 무도하고 비열한 위인이 관직 생활이라 하여 곱게 수행하였을 리 만무하다. 그는 49세 되던 해인 1604년, 호광제학부사(湖廣提學副使)에 임명되었다. 학교 및 교육 상황을 감독하고 점검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는 부임 이후 직무는 수행하지 않고 학교와 학생에 대한 감독을 핑계로 유람을 일삼았다. 제학부사의 담당 업무 가운데 하나는 생원, 즉 학교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시험을 치르는 것이었다.
시험이 있던 어느 날, 그가 시험장에 입장하자 학생들이 모두 기립하였다. 이에 그는, ‘여러 학생들은 모두 앉으라’고 말한 다음 그대로 퇴장해 버렸다. 제학부사는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에게 작문의 주제를 제시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대로 나가 버리자 학생들 사이에 소동이 일었다. 제학부사의 휘하 관원들이 화급히 동기창을 찾아가, 작문의 주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말하지 않았더냐?”
결국 ‘여러 학생들은 모두 앉으라(童生坐生員皆坐)’고 했던 말이 작문의 주제였던 것이다.
또 한 번은 시험이 있기 전날, 그는 자기 집무실 앞에 ‘내일은 시험이 없다(明日不考文)’는 내용의 공고문을 내붙였다. 이튿날이 되어 생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험장에 모였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누군가 동기창에게 찾아갔다. 시험은 어떻게 되며, 작문의 주제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동기창은 또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무슨 말이냐? 오늘은 본디 시험이 있는 날이 아니더냐? 작문의 주제는 어제 공고한 그대로이다.”
이때 시험의 작문 주제는 전날 내붙였던 공고문, 즉 ‘내일은 시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기창의 처사를 두고 유머라든가, 혹은 구속을 벗어던지는 자유나 낭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학생과 시험에 대한 조롱이요 모욕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학생들은 이러한 동기창의 우롱에 견디다 못해 집단행동을 일으켰다. 동기창의 집무실은 화가 난 학생들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는 불상사를 야기한 책임을 지고 부임 1년 만에 호광제학부사직에서 불명예 퇴직하였다.
환관 위충현에게 아부
![]() |
| 동기창 장년 시절의 대표작 〈완련초당도(婉戀草堂圖)〉, 개인 소장. 43세 되던 해에 그린 작품으로서, 당대 왕유의 화법을 재해석하는 개성적 화풍이 잘 드러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베이징으로 간 동기창은 환관 위충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다. 위충현은 그 무렵 매일 사람들을 불러 연회를 베푸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동기창은 위충현의 연회석을 빛내기 위해 기둥과 벽면마다 자신이 그린 서화를 걸어 두었다. 이에 위충현은 크게 기뻐하였고, 동기창은 그것에 감복하여 더욱 힘을 내어 연회석 치장에 노력하였다고 한다. 당시 동기창은 65세, 위충현은 53세였다.
조금 세월이 흐른 뒤인 1625년, 이번에는 위충현에 반대하던 동림당(東林黨)이 득세하게 되었다. 이때 동기창은 70세의 고령으로 난징의 예부상서에 임명되었다. 그는 다시 동림당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선사하며 접근하였다고 한다. 관료 동기창은 가위 무절조, 후안무치라 하여 전연 지나침이 없는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여기까지 알고 나면 동기창에 대해, ‘뭐 이런 파렴치하고 야비한 인간이 다 있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못된 사람은 없다. 동기창 역시 처음부터 그처럼 무도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젊은 시절의 그는 진지하고 패기가 넘칠뿐더러 매우 따뜻한 성품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따뜻한 모습 보이기도
![]() |
| 동기창의 서예 작품. 동기창은 특히 행서에 능하였는데, 부드러움 속에 강건함과 준수함, 변화무쌍함이 두루 담겨 있다고 일컬어졌다. |
24세 되던 해인 1579년 그는 남경으로 가서 향시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때 서성(書聖)이라 추앙되는 왕희지(王羲之)의 서예 작품집을 접하고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는 또다시 3년 동안 전력을 기울여 서예를 연마하였다. 이 기간 동안 서예의 경지가 한 단계 도약하고 감식안도 현격히 높아졌다.
아무리 서화에 개안하게 되었다 해도 가정은 여전히 빈한하였다. 30세 무렵 그는 쑹장 인근의 도시 핑후(平湖)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때 어느 부호의 자제가 갑작스레 곤궁해져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옛 서화 작품을 내다 팔고자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동기창은 가정교사의 월급을 털어 모두 주고 나서 빈털터리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부인에게 크게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가난한 시절의 동기창은 따뜻한 인간애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33세 되던 해인 1588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것도 전체 합격자 350명 가운데 4등이라는 대단히 우수한 성적이었다. 동기창에게는 황실의 도서관에 해당하는 한림원의 관직이 주어졌다. 이후에도 한동안 그의 성실한 생활은 이어졌다. 한림원에 근무하면서 그는 서화에 절차탁마하였다. 그리고 그가 지니고 있던 서화에 대한 안목은 주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를 두고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지녔다’는 평판까지 돌았다.
이 무렵 한림원에 같이 근무하던 선배 관료 하나가 병으로 퇴직하였다. 하지만 그 선배 관료는 너무도 청렴하여 고향인 푸젠(福建)까지 갈 노자도 없는 상태였다. 이에 동기창은 휴가를 내고 그를 도와 머나먼 푸젠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나이 들수록 추하게 변해
그와 관련한 미담은 이 시기에서 멎는다. 이후 그는 고관으로 승진을 거듭하고 화단에서의 명망도 급속히 높아졌다. 이와 더불어 평범하였던, 아니 오히려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던 그는 점차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 갔다. 동기창의 인격은 그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면서부터 파탄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빈한한 시절 서화에 매진하고 주변 사람들에 대해 따뜻하게 배려하며 생활하였다. 하지만 고관대작이 되고 화단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며 그는 세상 위에 제멋대로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동기창을 둘러싼 악평과 추문은 곧바로 잊혀졌다. 17세기 중반 중국을 휩쓸고 지나간 명말 청초의 혼란이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 사람들은 동기창의 추악했던 인품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그가 남긴 아름다운 예술 작품에만 눈을 돌렸다. 청대 초기의 위대한 군주 강희제가 그의 작품을 열렬히 좋아했던 것은 이러한 풍조를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18세기 이래 동기창은 중국 회화사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