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老에게 듣다] 지방자치·도시계획·환경학의 泰斗 노융희 서울대 명예교수 : 월간조선

[편집자 주]

노융희(盧隆熙·88) 서울대 명예교수의 삶은 본인의 표현대로 ‘요철면경(凹凸面鏡)’이다. 세계를 휩쓴 경제공황의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어른들의 어깨너머로 지켜봤고, 태평양전쟁이 터진 상황에서 징병징집을 눈앞에 두고 광복을 맞았다. 1946년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 세력이 그의 고향 평북 정주에서 자행한 행위를 보고 공산당의 속성을 깨달은 후 곧바로 서울로 내려왔다. 이후 4·19와 5·16 등 현대사의 변혁 속에 몸부림치며 그는 대한민국 건설에 일조했다.

노융희 교수는 40년간 강단에 섰다. 그는 상아탑 안과 밖을 넘나들며 ‘각종 제도와 기관의 창시자’ 역할을 했다. 1959년 서울대 행정대학원의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지방자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지역발전’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해 1968년 행정대학원 내에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를 설립했다. 1988년 한국지방자치학회를 설립해 초대회장을 맡았고, 1993년에는 한국환경정책학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을 맡았다.

요컨대 노융희 교수는 지방자치학, 국토 및 지역계획학, 도시환경학의 태두(泰斗)로 학계와 행정 현장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후학들에게 비이장목(飛耳長目·먼 데서 일어나는 일을 듣고 볼 수 있는 귀와 눈을 뜻하는 말로 사물을 명확히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말함)을 평생 강조해 왔다.

우리나라에 지방자치 전파의 선구자 역할을 한 그에게 지방자치 부활 20년의 의미와 대한민국의 미래에 관해 들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많은 얘기를 듣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의 말을 요약, 정리했다.

지방자치에 대한 법적 근거는 1948년 제헌헌법부터에 마련돼 있었다. 이른바 ‘유진오 헌법’은 두 개의 지방자치 조항을 뒀다. 그런데 건국과 동시에 지방자치를 실시하겠다는 차원에서 해당 조항을 둔 것은 아니었다. 구미식(歐美式) 헌법을 만들다 보니 자치 조항이 들어간 것뿐이었다. 오랫동안 지방자치 관련 시행령조차 만들지 않았다. 지방자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1952년 6·25전쟁 때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 한해 민선(民選) 단체장을 뽑기도 했고, 기초의원들도 선출했다. 1960년 4·19 직후 도지사를 포함해 모든 자치단체장을 주민이 직접 뽑았지만 이듬해 5·16쿠데타가 나면서 지방자치제는 전면 중단됐다. 약 9년간에 걸쳐 지방자치를 실시했지만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주민들의 자치의식이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는 중앙정부의 대리기관 역할을 했을 뿐이다. 지방의회가 구성되면서 몇몇 사람이 자치권을 주장했지만,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미국 유학

내가 지방자치를 공부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라를 새로 건설하는 와중에 각 분야 인재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다. 전쟁 직후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행정’은 물론 ‘행정학’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1950년대 당시 법학 과목 중 행정법 각론으로 지방자치가 들어 있었지만 별도 과목으로 강의할 수준은 아니었다. 행정학은 가르칠 교수도 없었다.

국가를 운영하려면 행정학은 필수였다. 1957년 당시 이승만 정부는 중앙부처 공무원의 행정능력 향상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요원 양성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18명의 젊은이를 뽑아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 연수를 보냈다. 교수요원으로 나를 포함해 12명을, 정부 핵심 공무원으로 키울 인력으로 6명을 발탁했다. 나는 그 무렵 서울대를 나와 숭실대에서 조교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같이 연수 간 이들 중에는 김해동 선생과 용산고등학교 교사로 있던 안해균 선생이 있었다. 연수 후에는 이들 모두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강의했다.

미국에서 지방자치학을 공부한 나는 미국 연수 후 곧바로 교수로 발령 받았다. 1959년 당시 서울대 법대 부속기관으로 행정대학원을 만들었는데 창립멤버가 된 것이다. 나와 같이 공부했던 이들은 행정대학원 전임강사가 됐다.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있으면서 행정대학원 강의를 맡은 일부 교수를 제외하면, 당시 행정대학원 내 유일한 정식 교수는 나뿐이었다.

지방자치와의 인연

노융희 교수는 우리나라에 지방자치학을 처음 도입해 수많은 학생과 공무원들에게 가르쳤다. 도시계획ㆍ환경학 등 실천적 학문의 보급에도 앞장섰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얘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지방자치 교육이 행정대학원에서 처음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행정대학원은 지방행정학(지방자치)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학 과목을 두루 가르쳤다. 당시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들의 능력은 대단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초창기 때부터 신입생을 1부와 2부로 나눠 선발했다. 1부는 대졸자를 대상으로 뽑았고, 2부는 현직 중견 공무원을 대상으로 선발했다. 당시 《경향신문》이 보도한 걸로 기억하는데, 이 신문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면 군수 자리를 준다, 사무관 직급을 준다’고 보도했다. 그때 군수의 직급은 사무관이었다.

아무튼 행정대학원은 출범 초기부터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신입생들이 대학원에 들어와 보니 취직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걸 알게 됐다. 고등고시를 합격해야 사무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학원 초창기에 학생들이 시위를 한 적도 있다. 김안제 교수가 행정대학원 3기인 걸로 기억하는데 그 기수가 시위를 했다. 당시 최창호 교수는 행정대학원이 아닌 서울법대 대학원을 다녔다(편집자注-최창호 건국대 명예교수와 정세욱 명지대 명예교수, 김안제 서울대 명예교수는 노융희 교수를 필두로 우리나라 지방자치학계를 이끈 1세대 원로학자들이다).

내가 지방자치를 전공하게 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당시 정부가 선발한 18명이 미국 미네소타 대학에 행정학을 배우러 갈 때, 영어 실력이 부족한 이들은 어학연수차 먼저 미국에 들어갔다. 나는 영어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간단한 의사소통은 했다. 아무튼 내가 가장 늦게 미국에 갔다. 그런데 먼저 온 이들이 지도교수로부터 개별 전공(편집자注-인사행정학, 재정학 등 행정학 세부분야)을 다 배정받았고 남은 것은 ‘지방자치학’밖에 없었다. 나는 지도교수(G. Warp)에게 “이걸 공부해서 뭐하느냐”며 따지듯 물었다. 그런데 그분은 지방자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머지않아 한국에도 민주주의의 꽃이 피는 날이 올 것이다. 민주주의는 지방자치의 발전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국에서도 지방자치학이 굉장히 중요한 분야가 될 것이니까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다. 나와 지방자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미국에서 1년 정도 공부하고 있을 무렵,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이 먼저 귀국했다. 행정대학원 설립이 시급했던 것이다. 나는 한국에 오자마자 대학원 설립 준비와 강의로 정신 없이 보냈다. 마침내 1959년 1월 대통령령으로 법과대학 내에 행정대학원이 설립됐고, 나는 교무과장을 맡았다.

미국에서 배운 ‘행정학’과 ‘지방자치’를 법대와 행정대학원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게 우리나라 지방자치 교육의 출발이었다. 서울대에서 강의가 시작되자 고려대와 성균관대, 연세대 등에서도 지방자치 과목을 개설했다. 나는 서울대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교 강의도 많이 맡았다. 일주일에 20시간 넘게 지방자치를 강의했다.

박정희와 지방자치

그는 “민주주의와 지방자치 경험이 없는 나라에서 이 정도로 지방자치하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건국 때부터 중앙집권형 대통령제였기 때문에 지방자치를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비교지방자치’를 가르쳤다. 미국의 지방자치, 영국의 지방자치, 프랑스의 지방자치 등을 강의한 것이다. 대륙형으로는 프랑스 지방자치가 대표적이고, 영미형으로는 영국 지방자치가 대표적이었다. 이것을 서로 비교하면서 강의했다. 정부가 도지사, 시장, 군수를 직접 임명하는 당시 상황에서 지방자치는 현실적으로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행정대학원 학생들은 지방자치를 열심히 공부했다.

1961년 3월 행정대학원은 서울대 법대에서 분리돼 독립 단과대학원이 됐다. 그해 5·16이 나면서 의회는 문을 닫았고, 군인들이 국가를 운영했다. 6·25전쟁을 경험한 군인들이 많아서인지 군사정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깨어 있는 군인들도 많았다. 군사정부는 국가개혁을 위해 우선적으로 공무원 교육이 시급하다는 것을 알았다. 묘하게도 5·16 주체세력으로 참여한 육군 대령 한 명이 서울대 행정대학원 출신이었다. 5·16 이후 그는 국가직·지방직 포함해서 모든 공무원에 대한 교육을 총괄했다. 군사정부는 나에게 중앙공무원 교육기관부터 지방공무원 교육원까지 다니면서 지방자치를 가르치도록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의회를 해산하고 지방자치를 중단시킨 쿠데타 세력이 전국의 공무원들에게 지방자치를 가르치게 한 것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내내 행정학과 지방자치학을 가르쳤다. 이상하게도 박정희 정부는 나를 속박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내 강의를 들은 전남공무원교육원 소속 공무원이 있었는데, 나한테 들은 내용 그대로 전남공무원교육원에 가서 지방공무원을 대상으로 강의했다. 이게 문제가 된 것이다. 해당 공무원은 파면됐다. 그는 “노융희 교수한테 배운 내용 그대로 강의했을 뿐인데 왜 파면시키느냐”고 항변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상부에서 “네가 노융희냐”고 했다는 것이다. 나도 언제 잘릴지 모를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지방자치를 왜곡해서 가르칠 수는 없었다.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지방자치를 강의하고 나면 교육을 받던 공무원들이 “에이~ 교수님!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안 됩니다. 청와대 가서 강의하셔야지요”라는 반응을 보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쿠데타를 반대했다. 최고회의에서 나를 불렀는데, 그때마다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았다. 내가 가르친 공무원들이 방패막이가 돼 줬다. 박정희 정부 시절 나는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지방행정연수원 교수도 겸했다. 중간중간에 입각 제의를 받았지만 고사했다.

나는 학교에서 지방자치와 지역개발, 환경정책 등을 가르쳤다. 나중에 서울대 환경대학원도 직접 설립했다. 박정희 정부는 나를 연구기관 책임자인 국토개발연구원장 자리에 앉혔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나는 박 대통령을 두어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공식적인 자리였고, 대화를 나눈 것은 5분도 채 안 된다. 박 대통령의 판단력과 추진력이 대단함을 알아차리기에 5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국가발전에 대한 그의 진정성도 읽을 수 있었다. 김종필 총리는 비교적 편하게 만났다. 국가발전과 지방자치에 대한 나의 견해를 김종필 총리에게 많이 얘기해 줬다.

노융희 수영법이론

시대가 바뀌고 1980년대에 민주화 바람이 불어 1987년 헌법이 개정됐다. 마침내 지방자치 부활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었고, 그 결과 1991년 기초의회 민선이 시작됐다. 1995년에는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있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 조항은 제헌헌법부터 존재했지만 40년 넘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제대로 실시된 것이다.

지방자치제도에 대해 혹자는 초기부터 잘못됐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는 시간과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결과물의 조합이다. 행정이 능률을 따지면 민주성은 희생되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를 하다 보면 비능률이 따를 수도 있다. 그걸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그게 행정의 요체이다.

지방자치는 민주성 측면에서 바람직한 제도이다. 국민이, 지역주민이,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고 지방자치이다. 중앙집권체제하에서 볼 때 지방자치는 귀찮은 존재이다. 집권하기 전에는 “지방자치하겠다”고 했지만 막상 권력을 잡고 나서 지방자치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런 시대를 살면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지방자치를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지방자치 부활 20년을 맞은 지금, 감회가 새롭다. 평생 ‘지방자치’를 떠든 사람으로서 ‘내가 계몽자 역할을 했구나’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시대적 사명을 다한 걸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이다.

나는 지방자치를 얘기하면서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 이른바 ‘노융희 수영법이론’이다. 지방자치라는 것은 민주주의제도하에 주민이 지역문제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주민참여라는 것은 훈련 없이는 안 된다. 훈련을 위해서라도 지방자치를 당장 실시해야 한다. 자치를 통해 주민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지방자치를 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예를 들어, 수영을 전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수영을 못하니까 바다에 들어가면 빠져 죽을 수 있습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이 사람은 평생 바다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수영은 물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지요. 처음에는 허우적대며 물을 먹더라도 바다에 들어가야 수영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방자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치를 하면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대한민국

1995년 이후 지난 20년간 나는 우리나라 지방자치가 이 정도면 정말 많이 발전해 왔다고 생각한다.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룬 나라가 세계에서 얼마나 있을까. 대한민국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지방자치 경험이 없는 나라에서 이 정도로 지방자치하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룩한 데는 먼저 우리 국민의 위대함 덕분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우리 국민은 차근차근 하나씩 쌓아 올렸다. 배고파도 미래를 위해 참았고, 저축했으며, 자식을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그 짧은 시간에 우리는 세계 10위라는 경제대국이 됐다. 정치 분야가 아직까지 낮은 수준에 있지만 누구나 민주주의를 말하고, 누구나 자유를 말할 수 있는 세상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말이다.

지방자치도 마찬가지다. 외국은 지방자치를 근간으로 민주주의를 이뤘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하면서 지방자치를 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우리도 지방자치를 떳떳하게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민족·교육 중시 국가이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자화자찬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지만 세상을 살아 보니 우리나라 사람은 정말 대단한 민족이고 국민이다.

나는 국민의 위대함과 함께 이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킨 지도자의 위대함도 말하고 싶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라며 깎아내린 사람들이 이른바 ‘민주세력’이다. 이승만을 독재자로 만들어 놔야 그들이 민주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광복 후 전쟁을 맞았고 새롭게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위대한 일을 했다. 민주주의 훈련이 전혀 안 된 국민을 이끌며 나라를 키워 나갔다.

박정희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나는 “죽일 놈”이라며 그를 반대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과연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자칭 ‘민주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독재자와 싸우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여겼다.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민주주의가 과연 가능했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성장을 통한 국가발전이라는 확고한 목표를 설정하고 매진한 것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가져온 것이다. 이것은 지방자치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나는 우리 국민이 지도자를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지도자를 잘못 만난 국민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결국 나라까지 사라지는 사례를 역사를 통해 봐 왔다.

지방이 독자적으로 세금 거둬야

우리나라가 광복 이후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해 경제발전을 이룩해 오면서 지방자치제도를 안착시킨 데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지방자치 만능주의자가 아니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 틀 안에서 국가와 지역이 조화롭게 상생하는 제도이다. 지방의 발전은 곧 국가의 발전이다. 지방자치 측면에서 지난 20년 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다. 물론 우리나라 지방자치가 선진 지방자치가 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주민자치 의식 향상과 자주재정(自主財政)이 그것이다.

먼저 자치의식을 높여야 한다. 그렇다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지역 현안에 주민의 참여가 늘면 자치의식은 저절로 올라간다. 정당한 절차를 통해 모두가 참여하면 지방자치는 발전한다. 주민이 어떤 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떤 사안을 들여다보는 것을 의미한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주민에 의한 통제를 말한다. 권력이 주민에 의해 통제를 받으면 함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다. 우리나라 지방자치 현실을 볼 때 이 정도면 잘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광복 70년 만에 이 정도의 지방자치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지방자치의 발전을 위해 지금 당장 고쳐야 하는 것은 자주재정 부분이다. 자주재정 확보는 자치발전의 첫 번째요, 두 번째요, 세 번째이다. 지방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거둘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조세재정권을 갖고 있는 국가가 지방에 권한을 대폭 이양해야 한다. 자주재정은 국가와 지역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

지방자치 현안(懸案)으로 단체장과 기초의원의 공천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역사는 짧다. 아직도 ‘정치꾼’이 국회의원을 하는 경우가 일부 있다. 정치꾼들이 얄팍한 지식을 동원해 지역주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 통제하에 단체장과 기초의원들을 두려 한다. 그런데 이것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분권이 제대로 이뤄지면 주민들이 자기 권한을 통해 지방정부를 통제할 뿐만 아니라, 중앙정치의 행태도 바꿀 것이다.

현실에 적극 참여해야

분권(分權)은 남북통일에 걸림돌이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집권과 분권의 조화 문제라고 본다. 분권한다고 국가의 힘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다. 통일을 위해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강력한 정부란 국민이 지지하는 정부를 말한다. 분권을 통해 지역을 발전시키면 국가는 더 융성해진다.

우리 국민은 온갖 경험을 다 해 봤다. 전쟁도 겪어 보고, 4·19도 겪어 보고, 쿠데타도 겪어 봤다. 그리고 민주화도 이뤘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 비관할 필요가 없다.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한 단계씩 긍정적 방향으로 전진하고 있다.

지방의원의 자질도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 지방의원들의 질이 낮다고 하는데, 물론 국회의원들과 비교하면 낮을 수 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전과 비교할 때 많이 나아졌다. 지방의원들이 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앞으로 더 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방자치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내가 활동할 때만 해도 학자가 현실에 참여하면 ‘사이비 학자’, ‘어용학자’라고 했다. 상아탑 속에서 관념적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만이 최선(最善)이라 생각했다. 시대는 변했다. 이제는 현실에 참여하지 않으면 옳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현실참여를 권력에 빌붙는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권력에 붙어 혜택을 받을 수도 있고, 권력을 멀리해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

요컨대 지방자치는 현실을 얘기하는 학문이다. 현실과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 현실을 바탕으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권력과 상관없이 선(善)한 것이다.⊙

제자가 본 스승 노융희
巨木의 그늘 아래에 서서…

고주(古州) 노융희 선생님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4대(代)가 동거하는 부농(富農)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그러나 소학교 졸업 때까지만 가족과 함께 살았을 뿐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된 이후에는 남쪽에서 타향살이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북쪽의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남쪽에는 월남(越南)해 온 중형과 자신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고향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 정주장학회를 설립해 정주 출신 자손(子孫)들에게 해마다 장학금을 지급하신다.

선생님의 인간적 면모는 8순 기념으로 출간된 《行雲流水(행운유수)》(작은 것이 아름답다, 2006)라는 책에 자세히 적혀 있다. 각계각층 100여 명이 쓴 기고문이 이 책에 들어 있다. 격식을 넘어선 소탈한 성품, 호주(好酒)와 거구에 걸맞은 자상함과 치밀함, 선생님의 강의를 그대로 녹음해 풀면 그대로 책이 될 만큼 논리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강의, 바리톤 음성으로 부르는 애창곡 보리밭, 평양냉면, 약주 한잔 하실 때면 제자에 대한 선생님 특유의 애정 표시인 ‘귀 잡아 당기기’ 등 선생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최상철, 《行雲流水》 발간사).

선생님은 후학들에게 장학금을 쾌척하는 데 앞장섰으며, 스스로 창설한 지방자치학회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할 때는 적잖은 기금을 내셨다. 한국지방자치학회(이하 학회)는 1988년 12월 3일 서울 마포 공덕동 소재 지방행정회관 회의실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선생님은 초대회장으로 선출됐다.

학회는 1989년 내무부의 사단 설립허가를 받아 각종 연구발표회·세미나·워크숍·콜로키움 등을 열었다. 1991년 지방의회 구성에 즈음해서는 공명선거 국민계몽, 지방의원 당선자 연수·연찬 등을 실시했다. 선생님은 학회운영을 삼원화했다. 학술담당 부회장인 최창호 교수에게는 학술연구발표·세미나·워크숍, 강연·연수·연찬, 국민계몽 등을 맡기셨다. 지방담당 부회장인 김동훈 교수에게는 지회(支會) 결성, 이사회·세미나 지방개최 등을 맡기셨다. 경북지사를 지낸 정채진, 제주지사 출신의 이창수 두 분에게는 총무담당 부회장 직함을 부여해 학회기금 조성과 지방공무원들의 자치의식 제고(提高)에 몰두하도록 했다.

선생님은 지방자치 실시를 앞당긴 최대 공로자이다. 1989년 4월 11일 지방의회의원 선거를 지방자치법 규정대로 기한 내(1989년 5월 1일)에 실시할 것을 당부·건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건의·성명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실시되지 않자 1990년 9월 8일 지방자치 조속실시 촉구를 위한 성명을 다시 발표했다. 그해 9월 26일에는 국회를 피청구인으로 하는 ‘입법부작위 위헌심판청구’를 헌법재판소에 냈다. 그러자 국회와 정부가 움직였다. 국회는 관련 법률을 개정했고 마침내 정부가 지방선거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1991년에 학수고대하던 지방의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선생님은 그해 3월 26일의 기초의회의원 선거, 같은 해 6월 20일의 광역의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명선거를 위한 국민계몽을 위해 전국을 누볐다. 오늘날 전 국민이 지방자치 선거권을 갖게 된 데는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는 것이다. 지방자치의 학문적 발전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성금을 모아 ‘고주 노융희 지방자치상’을 제정해 매년 두 사람을 선발·시상하고 있다.

자치단체장 직선 20주년을 맞이해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의 현주소는 실로 거대한 발전을 이뤘다. 지방자치제도는 날로 정비되어 가고 있으며, 주민의 지위와 관련해 주민소환, 주민투표, 주민소송 등의 제도가 도입됐다. 이 정도의 자치가 정착하게 된 데는 선생님을 비롯한 선배님들의 관심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수영법이론에 따르면, 지방자치 실시에 따른 여러 문제점은 필요악(必要惡)이고 통과의례이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자치(自治)는 경험하면서 배워야 하는 것이라면, 시행착오를 통해 현실에 걸맞은 제도를 구축함으로써 지방자치의 꽃을 피우는 것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제대로 정착시킬 수 있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현재 선생님의 건강이 나빠져 외부 출입이 줄어든 상태이지만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기도한다. 거목(巨木) 노융희 선생님의 그늘 아래에 서서 그의 넓고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다.

〈이주희 레인보우영동연수원장·2015년도 한국지방자치학회 하계학술대회 발표논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