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詩] 이민하 : 월간조선

의자는 서 있다. 어딘가로 늘 떠날 준비가 돼 있다. 길 위의 의자다. 물결 위의 의자다. 당신과 마주 보는 의자다. 〈앉으면 발목을 휘감아 오르는 의자〉〈몸을 구기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의자〉(‘서 있는 의자’)다. 나는 책상 앞에 정박해 있던 이 의자가 조각배처럼 떠다니는 어둠 속을 감히 사랑한다. 밤의 여행길은 속을 알 수 없는 길이고, 더없이 불친절한 길이며,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매 순간이 첫 경험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기억은 얼마나 질긴 것인가. 더욱이 불안이나 공포와 접착돼 버린 기억은 떼어낼 수조차 없다. 나는 그 기억의 통증으로부터 이 길 위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반복되는 불구의 자화상으로부터. 나인지 당신인지 모를 기형(畸形)의 뒷면으로부터.

앞에서 마주 오던 검은 구름이 말을 걸었다. 마네킹은 쓸모없는 구두와 장갑을 팔러 정육점에 간다고 대답했다. 네겐 구두와 장갑이 보이지 않는걸. 구름이 가던 길을 되돌려 뒤따라 왔다. 마네킹은 아무런 대꾸 없이 또 다른 모퉁이를 돌아간다. 길가 벤치에서 잠을 자던 노파가 마네킹을 보고 알은체를 한다. 노파의 아가미에서 비린내가 났다. 군데군데 살점이 뜯긴 축축한 몸을 소나기가 파먹고 있다. 넝쿨 같은 비가 마네킹을 덮쳤다. 마네킹은 얼굴에 들러붙는 나뭇잎을 뜯어내려고 손을 뻗친다. 이마에서 두 팔이 뻗어 나와 공중에 흩어진다. 마네킹은 연기처럼 찢어지는 두 팔을 보며 서른 번째 모퉁이를 돌아간다. 뼈끝에서 살이 찌는 구두와 장갑이 무거워 횡단보도 앞에 잠시 멈춘다. 문이 닫히기 전에 정육점에 가야 한다. 차도에는 질주하는 바퀴들이 핏물을 튀기고 있다. 마네킹은 목을 꺾어 뒤를 돌아본다. 사람의 앞면을 지닌 마네킹들이 걸음을 재촉한다. 타닥타닥 뼈 부딪는 소리가 바닥을 질질 끌고 모퉁이를 돌아간다.

—‘환상수족’ 부분, 시집 《환상수족》에서

세 권의 시집과 육필 원고.

‘환상수족(phantom limb)’은 사고나 수술 등으로 수족이 절단된 후에도 없어진 부위가 아직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증상이다. 언젠가 의학칼럼을 통해 가슴에 박혔던 이 용어가 등단 직후 시로 꺼내질 수 있었던 것은 그즈음 내 얼굴을 덮고 있던 두꺼운 철면(鐵面) 하나가 포장 랩처럼 뚫렸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에 입이 생겼다.

그 입으로 ‘관계’에 골몰했다. 서로의 형태를 일그러뜨리며 지속시켜 나가는 기이하고 고집스러운 풍경들. 그것은 때로 발랄하게 슬펐다.

〈그는 나를 애인이라 불러요 거미줄 쳐진 내 몸에 집을 짓고 살아요 나는 그를 거미라 불러요 아흔 개의 다리로 옭아매는 그를 무심하게 키워요 (…) 그는 나를 피아노라 불러요 그의 손가락이 닿을 때 이어지고 끊어지는 나의 숨결을 아주 좋아해요 (…) 그는 나를 부르기 위해 종일 쫓아다녀요 나는 그를 버리기 위해 종일 쫓아다녀요 서로의 앞모습은 볼 수 없어요〉(‘哀人—관계에 대한 고집’).

그리고 때로는 가학적인 매혹이었다.

몸을 팔아 하얀 꽃바구니를 샀네 골목 어귀 눈에 띄는 담벼락에서 검은 장미를 한 움큼 꺾었네 꺾인 장미는 웃었고 나는 피를 흘렸네 담벼락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끄적이고 걸음을 재촉했네 검은 장미는 하얗게 변해 갔네 나는 꽃바구니를 검은색으로 칠했네 바구니에 꽂자 장미는 깃털을 흩날리며 날아가기 시작했네 상심한 나는 꽃바구니에 신발을 담았네 향이 진한 담배도 담았네 뚱뚱한 당신은 담기가 힘들었네 팔과 머리칼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네 당신을 다시 꺼내 운동을 시켰네 심부름도 시켰네 검은 장미가 피었는지 골목 어귀에 가 보라고 했네 천 일이 지나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네 골목 어귀에 다시 갔을 때 검은 담벼락에 눈이 부셨네 담벼락을 휘감은 당신의 몸에서 아직 검은 꽃잎이 자라는 중이었네 날아갔던 하얀 장미가 담벼락 아래서 구경하고 있었네 나는 재빨리 들고 있던 검은 꽃바구니를 팔아 몸을 샀네 당신을 한 아름 꺾어 내 몸에 꽂았네 꺾인 당신은 웃었고 나는 피를 흘렸네

—‘산책’ 전문, 시집 《환상수족》에서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 나는 쓴다. 2010년 8월 홍콩, 자미아 모스크(JAMIA MOSQUE) 가는 길에.

그런데 가능한가. 일 년 전의 잔인한 봄이 없었다면 지금 이곳의 봄은 백지처럼 가벼울까. 몸에서 피가 흘러도 좋을 아름다운 산책만으로 백지 같은 봄날을 낭비하는 일. 그 ‘불가능함’ 속에서도 시는 악착같이 태어난다. 축하해 줄 사람도 시간도 없는 폐허 속에서도 어제 죽었는데 오늘 또 태어난다. 당신과 나, 미지와 반복, 혼자와 모두, 그 모든 불가능한 ‘사이’에서.

‌우리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장과 허공 사이.
저녁과 아침 사이. 지금은 새벽 두 시입니다.

전쟁과 고요 사이를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소리의 약탈에 눈떴습니다.

(중략)

무기거래상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다듬었지만
우리는 안전핀처럼 비명을 착용합니다.

메트로놈처럼 빠르게 왕복하는
아침마다 저녁마다 한쪽으로 기우는 척추에
비누를 문지르세요.

‌단단함과 거품 사이에서 흔쾌히 태어나겠습니다.
‌우리의 독창은 귓속말을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비만한 음표와 지루한 오선지 사이.

‌—‘합창단’ 부분,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에서

나는 오로지 ‘귓속말을 위해’ 오랫동안 ‘독창’을 연마해 온 것 같다. “너는 어렸을 때도 말이 없었어.” 지난번 가족 모임에서 큰오빠가 했던 말이다. 무심히 흘린 이 말이 귀를 타고 가슴에 닿아 이상하게도 수증기처럼 맺히는 것이었다. 가족이 많았지만 내겐 늘 멀리 있었다. 말 상대는 주로 강아지였다. 녀석은 가끔 노래도 불러 줬다. 목소리는 청아했지만 구슬펐다.

나도 독창이라면 제법 할 줄 안다. 그러나 당신에게만! 어둡고 우울한 음색을 가졌다면 나는 당신에게 기필코 끌린다. 작고 느리게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야릇한 입 모양과 숨소리까지도 놓치지 않게 된다. 시는 그런 쪽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거다. 우리의 사랑법은, 그러므로 끝없는 표절이다.

토마토는 붉고
침이 고인다 깨물지 않아도
어둠이 닳도록 핏발을 모으는 관중과

한 장 한 장 혀를 넘기며
입에서 입으로
時代에서 詩代로
갈라 터지는

입맞춤과 시치미의 논란 속에서
사랑,

그 영원한 표절

—‘베스트셀러’ 전문, 시집 《모조 숲》에서

유홍준, 조말선 시인과 ‘살바도르 달리展’을 관람 후(왼쪽이 필자). 이들 외 김언, 김참 시인 등과 함께 소규모 클럽(동인은 아니다) 모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산에서 가졌던 무렵. 2004년 12월.

〈골격만으로 표정을 짓는 사람을 만나면 연애를〉 하고 싶었다. 〈아이스크림처럼 살 살 녹는 너의 살. 살을 모두 발라내고〉〈골격만으로 울음을 우는 사람을 만나면 연애를〉 하고 싶었다. 〈뼈와 뼈가 다리를 포개고 뼈와 뼈가 잔을 들고〉(‘거식증’), 그렇게 마주 앉아 시(時)를 쓰고 싶었다. 지금 막 태어나는 시. 사라지는 시. 예측할 수 없는 시. 텅 빈 시. 어디로든 향하는 시.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 시. 뒤죽박죽인 시간 속에서. 나는 불안과 함께 쓴다. 공포와 함께 쓴다. 지금은 고양이와 함께 쓴다. 모르는 채로 쓴다. 모르기 위해 쓴다. 끝내는 침묵하기 위해.

그런데 가능한가. 고독과 침묵을 방해하는 ‘시대(詩代)’인 것이다. 그리고 시는 침묵의 종이 위에서 고독의 펜으로 쓰는 것이다. 그것은 흔적이다. 내가 발생한 흔적이 아니라, 매 순간 내가 소모된 흔적이다. 그 흔적 속에 우리의 ‘비밀’이 있다.

내 귀를 타고 밀입국한 사람들은
어떻게 빠져나온 것일까 반대편 귀를 향하여
얼굴을 뒤집고

‌지하철 남자의 의족이 지상의 물결 위로 떠오를 때
인어공주가 되는 이야기
아름다운 두 다리의 침묵에 대하여

진위 논란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대하여
‌칼의 입맞춤 대신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 녹아 버린
성전환자의 슬픈 동화 속에서
목소리를 가로챈 마녀의 기술처럼

목사의 안수기도에 섞이는 어떤 성분들
‌이를테면, 앞 못 보는 어둠의 눈을 번쩍 후려치는
어떤 선언들

늙은 소녀들은 아직 사랑이 넘치고
구걸하는 남자들은 눈물이 넘쳐서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
어떤 세계에서

‌흩어진 나의 비밀들은 어느 귀를 타고 흘러가는가
내가 같은 남자와 백 번째 헤어진 날에 대해
당신은 지금 내 비밀 하나를 보관 중이다
‌혀처럼 얇게 저며진 물결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귀를 기울이는 쪽에서
당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세상의 모든 비밀’ 부분

당신의 비밀과 나의 비밀이 교차하는 그 지점을 나는 ‘소통’이라고 믿는다. 갈 곳을 잃고 헤매던 어느 새벽, 공원을 지나다 잠시 쉬어 가는 벤치 같은 것. 나뭇결에 스민 누군가의 체취를 가만히 두 손으로 쓸어 보는 것. 가령, 간밤엔 거듭되는 실패로 손목에 붕대를 감은 사람이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그보다 몇 시간 전에는 주머니에 사직서를 넣고 다니던 사람이 저만치 불 켜진 집을 빤히 보며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의자가 우리의 만남을 주선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누군가의 발소리가 자꾸 들린다. 새벽의 정적 속에서 발소리는 섬세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친근한 슬리퍼 소리와 다급한 운동화 소리와 나른한 구둣발 소리가 지나갈 때마다 나는 움찔 일어섰다가 낡은 의자로 돌아온다. 조각배처럼 흔들리며 의자는 다시 길을 간다. 그 길 위에서 의자는 꿈도 꾸고 다리도 주무른다. 〈당신을 다른 의자에게 대물림〉하며 〈볕 좋은 창가에서 죽었던 의자〉〈새파랗게 죽어서 영원히 사는 의자〉(‘서 있는 의자’)에 앉아 나는 침묵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침묵으로 시작(詩作)한다.⊙

詩人이 만난 詩人

“讀者가 없다면 시인은 언어의 獨房에 갇힌 사람일 뿐”

⊙ ‌대가족이었지만 책·음악·산책로·전주천 물결을 친구 삼아 성장
⊙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 내 탓인 듯 죄책감 느껴
⊙ “우리나라 시엔 아름다움도, 유희나 유머도, 실험도 필요해”

그녀의 곧게 뻗은 콧날과 굳게 다문 입, 뚫어져라 응시하는 얼굴이 무언가를 예감하는 듯 신비롭다. 이민하 시인, 그녀는 완벽한 야행성이다. 저녁에 일어나 아침에 잔다. 그녀는 밤에 커피를 마시고, 밤에 책을 보고, 밤에 산책하며, 밤에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낮에 하는 많은 일상을 그녀는 밤에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낮에 하지 않는 일 하나를 그녀는 밤에 한다. 세상과의 시적 소통, 근본적으로 그녀의 야간 일상은 세상과의 시적 소통을 통해 단 하나의 존재로서의 시인 이민하를 낳는다.

심야의 단독자는 그래서 외롭다. 아니다. 가끔 고립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결코 외로운 것은 아니다. 아니다. 가끔 ‘고요함’ 혹은 ‘멈춰 있는 것’이 주는 생동감과 격렬함을 느끼며 좋아하기도 하지만, 고립감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길고양이와 만난다. 집에는 세 마리의 고양이가 있지만 그 아이들 역시 길에서 만난 사이다.

한밤의 고요 속에서 세상과 소통

〈이 숲의 두 계절을 맛보기도 전에 로드킬로 사라진 참비에게는 프리다 칼로의 입을 빌려 인사를 해야겠다. 행복한 외출이 되길,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시집 《모조 숲》自序에서)

심야의 동반자가 길고양이인 것은 고양이 편에서는 별로 손해 볼 게 없는 동행이겠지만, 그녀 편에서는 깊은 상처를 예비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대개 그렇다. 상처는 대개 사라진 ‘참비’보다 사라지지 않은 ‘그녀’에게 새겨지기 마련이다. 모르긴 해도 야행성의 그녀에게 세상은 ‘흐르는 물결만 남아 있는 듯한’ 편안함과 위로를 주었을 것이지만, 돌연한 이별은 낮의 그것보다 더욱 크게 생채기를 남기기 마련이다.

‘야행성’이라는 말도 정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말은 그녀가 밤에 활동을 많이 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 생동감을 느끼고, 멈춰 있는 것에서 격렬함을 느끼는 이 예민한 시인에게 야행성이란 말은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예민함 혹은 민감성은 주체의 비활동성을 전제로 한다. 활동하는 주체의 ‘활동’ 속에서 대상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아마 야생의 사냥터를 배회하는 맹수(猛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지금 한밤의 고요 속에서 비활동적 응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하고 있다. 또한 거기서 편안함을 느끼며 창조적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창조적 활동성을 염두에 둔다면 비활동성이란 말도 꼭 적실하지만은 않다.

“전주에서 태어나 열두 살까지 살았어요. 가족이 먼저 서울로 이사 온 후 몇 개월을 떨어져 지내다 혼자 서울에 온 걸로 기억돼요, 확실하진 않지만. 내성적이고 독립적이고 평범한 아이였어요. 이사를 자주 다녀서 길이 늘 낯설었고 미아가 된 적도 있어요. 초등학교는 세 군데 다녔기에 오래된 친구가 없었고요.”

이민하 시인의 반주광성(反走光性)과 비활동성의 유력한 연원을 여기서 찾게 된다. 가족이 많아 엄마는 늘 분주했고, 고민을 나눌 여자 형제도 없어 책과 음악과 산책로가 친구였던 그녀에게 전주천 물결은 ‘변함이 없어 보이지만 매 순간 달라지는 물결무늬’가 되어 위로해 주었다.

“학교를 가다 말고 옆길로 빠져서 다가공원으로 이어지는 다리 아래로 내려가 천변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집으로 돌아가곤 했어요. 그렇게 몇 시간씩 거기 앉아 했던 일이라곤 물결을 바라보는 것이었죠.”

‌바다에는 햇살 가루가 떨어져 내리고 거대한 알바트로스 한 마리가 물결을 타고 앉아 있네
(중략)
‌바다에는 달빛 가루가 떨어져 내리고 거대한 알바트로스 한 마리가 물결을 타고 앉아 있네

‌-‘노란 약을 파는 가게’ 부분, 시집 《환상수족》에서

그녀의 첫 시집 《환상수족》(2005, 열림원. 2015, 문학과지성사 복간)에 나오는 위와 같은 이미지는 표면에 드러난 거시성(巨視性) 혹은 거대성의 이면에 불안감과 안정감이 혼재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 시는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연결하는 서술어를 제외하고는 하나의 일관된 서사적 묘사가 거의 없는데, ‘앉아 있다’ ‘물어뜯다’ ‘노래 부르다’ ‘건네다’ ‘돌아오다’와 같은 서술어를 통해 가까스로 행위 주체를 추측해 볼 수 있게 한다. ‘노란 약을 파는 가게’는 그녀의 시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뜻밖에도 전주천을 바라보는 어린 이민하의 심경을 연상하게 한다.

유년·타자·연애라는 세 층위 상처

2012년 5월, 친애하는 이수명 시인과 함께. 4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난 나는 문단에 나온 후 “언니! 언니!” 부르는 일이 참 좋다. 서울 사는 수명 언니 빼고 허수경 언니와 조말선 언니는 두어 번 만난 게 고작이지만, 나는 ‘언니 부자’가 된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글짓기상이란 걸 받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막연히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5학년 때부터는 국어사전을 펼쳐 놓고 거실 책장에 있던 세계명작소설이나 국내외 시집들을 읽었다고 한다. 어른들의 어법을 흉내 내어 시라는 걸 처음 써 봤고 시인이라는 구체적인 꿈도 굳히게 되었다고 한다.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며 위안을 받던 그녀는 “어린 시절의 고립감과 두려움과 결핍 같은 게 시인의 길을 다져 왔던 것 같다”고 했다.

어린 이민하는 6학년 1년간 신장질환 치료를 받으며 교실에 남아 아이들이 달리는 운동장을 내려다보거나 혼자 놀고는 했는데, 중학교에 등교한 첫날 뒷자리에 앉았던 아이가 다음날 죽음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인사는커녕 눈조차 마주친 적 없는, 그 애 얼굴이 이상하게 각인돼 버린 거예요.”

그것이 전주에서의 마지막 체험이었다. 그 뒤 서울에 와서도 가까운 사람들이 비명횡사하는 일이 많았고 그때마다 자기 탓인 것 같아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평론가 신형철은 이민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음악처럼 스캔들처럼》(2008, 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서 ‘놀이’가 필요한 이유는 “수동적으로 겪은 상처를 능동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다”라며 그녀에게는 유년, 타자, 연애라는 세 층위의 상처가 있다고 언명했다. 또한 이러한 상처는 ‘어떤 불가피함’의 산물로서 ‘시’를 낳고, 때문에 “아마도 그것은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신형철의 언명을 수긍하든 그러지 않든 이민하 시인에게 ‘상처’는 명백히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으며, 세상 이치와 같이 앞으로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또한 그녀의 예민함과 민감성을 고려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하지만 성장기의 이민하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던 ‘죽음들’은 대학 시절 맞게 된 엄마의 죽음으로 조금씩 벗어나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엄마가 꿈속에 자주 찾아오면서부터 조금 편안해질 수 있었어요. 엄마랑은 친한 사이가 아니었는데 죽음 이후에 오히려 가까워지더라고요.”

그것은 어쩌면 벗어났다기보다 신형철의 말처럼 ‘심층의 심층’으로 내면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 밝은 독자들이 그 비밀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시 속에.

“무디고 더딘 습작기를 보냈어요.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본격적인 시 수업을 받지는 못했어요.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고쳤죠. 하지만 워낙 혼자 하는 일에 익숙해서 느리긴 했어도 답답하거나 초조하진 않았어요. 등단에 대한 조급함이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어려서부터 시인 말고 미래의 제 모습을 상상해 보질 않았기 때문이기도 해요. 확신이라기보다는 자기암시 같은 거였죠.”

‘워낙 혼자 하는 일에 익숙해서’

2013년 5월, 존경하는 박상순 선생님과 함께. 카메라가 그를 향하자 함께 찍자고 하셨다. 마음이 읽혔던 것일까. 나는 그의 팬이다.

많은 시인은 등단 전에 큰 갈증과 열망을 동시에 경험한다. 시인으로 탄생되는 순간까지 때로는 열패감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시인이 되려는 사람에게는 시를 향해 나아가는 자신을 믿는 자긍심이 필요하고, 무디든 더디든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꿋꿋한 의지가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죽음이 종착점’인 시인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도 ‘워낙 혼자 하는 일에 익숙해서’라는 구절에 따옴표를 넣는다. 전주천 앞의 이민하, 교실에 혼자 남은 이민하, 길고양이와 대화하는 이민하를 다시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천히 쓰다 보니 ‘이론과 상상’보다는 ‘삶의 경험’을 가지고 뜯어보고 뒤집고 지워 가면서 출발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힘든 시기에 등단했기에 여분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몰입하기에는 좋았죠. 비로소 제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있는 삶의 호흡을 가지게 되었다는 자각이 생겼고요.”

그렇지만 등단 무렵보다는 지금이, 날이 갈수록 시인이라는 게 신기하고 고맙고 두렵고 설렌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면서’ 사는 사람을 나이 먹을수록 더 많이 보게 되므로.

그녀 스스로 밝히는 바와 같이 일상의 현장과 체험의 영역에 굳건히 자리 잡은 그녀의 시에 대해 신형철은 “한때 우리는 이민하의 시의 비밀 중 하나가 ‘주체도 대상도 없는’ 이미지들에 있다고 생각했었다”면서 사실은 “주체도 대상도 없는 세계가 아니라 주체와 대상이 희미하게 숨겨져 있는 세계”라고 정정했다. 또한 “좋은 시는 지시와 암시의 틈, 재현과 구축의 틈, 대상과 비대상의 틈, 위장된 자유와 완전한 자유의 틈에서 씌어진다”고 했다.

‌절벽 끝 날개를 파닥이며 거꾸로 매달린 여자와
‌바다를 밟고 선 세쿼이아처럼 목이 늘어난 남자

-‘램프’ 부분, 《환상수족》에서

‘몇 달에 한 번 나가는 셈이어서 외출할 땐 소풍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그녀도 ‘세월호’ 참사 이후 간간이나마 ‘304낭독회’에 나간다고 한다. 국민 누구나 그랬듯이 세월호 사고는 두문불출의 이민하 시인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이다.

“뻔한 대답이지만 ‘소통’ 아닐까요? 상식도 통하고 책임도 통해야죠. 그러려면 말부터 통해야 하고요. 그런데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과 그것을 경청하는 사람이 결국 동일인이고 다른 편의 사람들은 마치 외국어를 대하듯 자기들만의 언어체계로 해석을 하죠.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진실은 결국 진공 상태 안에서만 맴돌게 되고,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은 귀찮아하거나 아예 무관심해요.”

이민하 시인은 ‘말이 통하려면 결국 한 가지 말만 있어서는 안 되고 이런 말 저런 말도 들을 줄 알아야’ 하는데, 사회에서 그만한 역할을 하기에는 시만 한 게 없다고 한다. ‘할 일’ 많고 ‘할 말’ 많은 시가 상식만을 끊임없이 얘기해야 하는 시대라는 게 정말 슬프다는 시인은, 때문에 그녀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시단(詩壇)에 더욱 확산되어야 할 시적 환경은 ‘다양성’이라고 했다.

“병원에 가면 내과도 있고 정형외과도 있고 소아과나 산부인과, 신경정신과도 있잖아요. 평소에는 몰랐던 낯선 진료과도 얼마든지 있고요.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거죠. 시 또한 아름다움도 필요하고 유희나 유머도 필요하고 실험도 필요해요.”

다양성 요구되는 詩壇

시대 불문, 장르 불문, 가리지 않고 즐기는 그녀의 음악 취향처럼 다채롭고 활달하게 전개되는 한국 시의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요즘 요리가 트렌드이고 그만큼 개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대인데, 시는 아직도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폭이 좁은 것 같아요. 시, 하면 무조건 난해하거나 고리타분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시집을 몇 권이나 읽었을까요. 낯선 것과 어려운 것은 혼동하기 쉬워요. 시는 요리의 맛을 보듯 음미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해요. 경험이 쌓이면 안목이 생기고 안목이 늘면 취향도 생기죠. 그러니까 관심만 있다면 얼마든 시적 취향을 가질 수 있어요.”

이민하 시인은 ‘무언가를 작정하고 쓰려고 한 시들은 미완성’으로 남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세 번째 시집 《모조 숲》을 묶으면서는 심지어 ‘시를 쓰는 나의 의도만큼 시가 자율적으로 향하는 길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다.

“독자가 없다면 시인은 언어라는 독방에 갇힌 사람일 뿐이에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있어 가끔은 삶이 새롭고 설레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이민하 시인의 마지막 말은 ‘한밤의 시인’이자 세상과의 시적 소통을 위해 활발하게 창조적 여정을 펼치고 있는 사람다웠다.⊙

〈글 김재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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