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都와 詩 사이의 적자생존, 詩人은 이 진화가 지루해지지 않도록 하는 戰士
⊙ 마음을 다치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면서 우리는 세월을 입고 산다
尹聖學
⊙ 44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 《쌍칼이라 불러다오》.
⊙ 마음을 다치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면서 우리는 세월을 입고 산다
尹聖學
⊙ 44세.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 《쌍칼이라 불러다오》.
몇 주 전 출장길 기차 안에서 책을 읽다가 까맣게 잊었던 기억 하나가 문득 떠올랐어요. 스물 몇 살 시절, 혼자 멀리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었지요. 전에 한 번 얘기한 적이 있었던가요. 고속버스를 타고 가며 책을 읽고 있었지요. 강석경의 소설 《숲 속의 방》이었을 거예요. 책을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옆자리 수녀님이 내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재미있어 보여서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돌려주기에, “괜찮아요, 더 읽으세요”라고 말하고는 다시 자는 척했던 그 장면.
K, 오랜만에 안부를 전합니다. 내가 왜 시를 쓰게 됐는지, 왜 쓰고 있는지를 생각하다가 우리가 오래전에 나누었던 이야기 몇 조각을 집어 올려 봅니다. 난 그때 호기심이라고 말했죠. 호기심이 나를 문학으로 향하게 한다고.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 나조차 잘 모르고 뱉은 말이었는데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나에게 시란, 조물주가 내주는 퀴즈를 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는 일상의 곳곳에 퀴즈를 숨겨놓았고 난 그걸 발견하고 문제를 풀지요. 그렇게 문제 풀이 과정을 보여주고 점수를 받는 것이 나의 시 쓰기라고 말해도 될 것 같군요. 예를 들면 ‘사랑이 밥통과 같다는 걸/ 누가 알았겠는가// 나의 부엌에서/ 가장 어리석고 아둔한 음운을 가진 부속/ 사랑이 그렇게 둔탁한 발성과/ 모서리 없는 몸을 가졌다는 걸/ 일찍이 알지 못했네// 오래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속이 비쩍 다 마르도록/ 전원을 끄지 않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너의 이름을 부른다’(시 ‘이 밥통아’ 전문)처럼 밥통 안에서 ‘사랑’이라고 적힌 보물찾기 쪽지를 발견하는 일이지요.
K,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기업에서 일하면서 시를 쓰고 있고 몇몇 사람은 이런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가사 노동을 하며 시를 쓰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거나, 시와 소설을 같이 쓰거나,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에 비해 내가 더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꾸준히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게 마땅하지요.
그래요, 나의 환경은 기업이고 도시입니다. 내가 나에게 도시인(都詩人)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이유이지요. 도시에는 조물주가 숨겨놓은 보물찾기 쪽지가 참 많아요. 강변북로, 굴뚝, 전봇대, 전철, 포클레인 등.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쪽지가 많아서 다행입니다. 첫 시집의 표제작인 ‘당랑권 전성시대’가 태어난 배경도 바로 회사에서의 일상이었습니다.
당랑권 전성시대
권법 없이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권법이 있다
익히더라도 강한 것을 익혀야 산다
나는 당랑권을 택했다
매미를 잡아먹는 사마귀의 전술이다
상대와 마주섰을 땐 늘 중심을 뒤에 두고
정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 혈을 지킨다
사각(死角)으로 돌다가!
연속적인 단타로 급소를 파고든다
그의 반격을 받아 흘리며
쉼없는 상하 연타를 구사해
승부를 몰아간다
나는 여기서 당랑권을 익혔다
강하게 파고들었다가
빠르게 빠져나오는
고수들을 보며 익힌 권법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랑권이다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 중에서
2004년이었으니까 대리 시절, 회사 생활 8년 차 때였군요. 직장생활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눈을 떠 나가는 그 당시 어느 날, 선배사원들이 저마다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지요. 나는 내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 좋을 땐 좋고 안 좋을 땐 한없이 추락하는 타입이었는데 선배들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빠르게 국면을 전환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 거예요. 자기에 매몰되지 않고 목표를 향해 툭툭 치고 나가는 모습, 불현듯 그것이 권법이라는 생각이 찾아온 거죠. 우연히 당랑권에 관한 기사를 읽었고 영상을 찾아보다가 ‘권법 없이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권법이 있다’라는 문장이 내게 들어왔던 거였습니다. 사랑도 힘들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도 쉬운 게 아니지요. 어쩌면 그게 당랑권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K, 첫 시집을 낸 이후 두 번째 시집까지의 시간은 촛불처럼 짧고 한숨처럼 긴 시간이었습니다. 대리 시절에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과장을 달면서 2006년에 첫 시집을 낸 후에 차장 초임인 2013년 두 번째 시집을 내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네요. 7년 동안의 시간에 K, 당신도 변했고 나도 변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지요. 마음을 다치기도 했고 몸이 아프기도 하면서 우리는 세월을 입었습니다. 수많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교차되고 ‘시의적절함’과 ‘詩의 적절함’이 중첩되며 스쳐 지나갔습니다. 인간(人間)이라는 말은 사람 자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間)’를 의미하는 말이라고도 하지요. 사회라는 것은 ‘사이 간(間)’을 인식하는 것이어서 ‘사이 詩옷’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당신도 짐작했겠지요.
어떤 대학 캠퍼스에서 우연히 윤희상 시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그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나네요. 시를 쓰는 것과 바둑이 비슷하다, 젊을 때 좋은 성적을 내던 기사(棋士)가 나이가 들수록 승률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더라, 따라서 젊었을 때 좋은 시 많이 써야 한다, 라는 말이었죠(그래 놓고 본인은 갈수록 더 좋은 시를 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쓴 시는 가장 늙은 때에 쓴 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젊은 나이에 쓴 시가 되기도 하지요. 오늘보다 더 젊은 날에 쓴 시는 절대로 태어날 수 없을 테니까요.
쌍칼이라 불러다오
쌍칼,
그의 결투는 잔혹하다
어지간히 무거운 상대라도
높이 들어올리면
전혀 맥을 추지 못한다
지게차의 작업은 그렇게 냉정하다
일말의 동요도 없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상대의 중심 깊숙이
두 개의 칼날을 밀어넣는다
아무 표정 없이 들어올린다
그의 무게중심을 흩뜨리지 않는다
그를 자신보다 높이 추켜올린다
쌍칼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완벽한 전술이다
그를 오래 보고 있으면
결투의 원리를 알 것 같다
-시집 《쌍칼이라 불러다오》 중에서
도시의 사물, 사람, 사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 그들이 일으키는 현상들 사이에서 나는 더 잘 적응하도록 진화해 온 거 같습니다. 기업에서의 내 페르소나 역시 그러할 것이고요. 그러므로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 ‘쌍칼이라 불러다오’는 18년 동안 기업이라는 공간에서 살아온 내 진화의 기록일지도 모릅니다.
회사 물류창고에서 제품을 트럭에 싣는 지게차의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죠. 지게차에 보물찾기 쪽지가 숨겨져 있었고 종이를 펼쳐보니 ‘쌍칼’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이기는 것인가, 결투의 승부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먼길을 무던히 걸어온 자의 신발, 한자리에 쪼그려앉아 오래 풀무를 돌린 불쟁이의 무릎뼈. 누가 이기는지 보는 눈이 생긴 것이 내 진화의 현재 모습이겠지요.
K,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말합니다. 시집 제목이 《당랑권 전성시대》 《쌍칼이라 불러다오》인 걸로 미루어 무예에 능하신 분인가 봐요. 혹자는, 맨손 권법으로 싸우다가 질 거 같으니까 두 번째 시집에선 무기를 들었네요, 라고. 어쩌다 보니 시집 제목이 그렇긴 하군요. 아무래도 세 번째 시집 제목은 좀 순한 걸로 골라야겠네요.
시는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퀴즈는 너무 어려워서 내가 답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르겠어요. 어쩜 죽을 때까지 답을 구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지금 내가 아는 것은 ‘재미의 재구성’입니다. 재미는 내용일 수도, 형식일 수도 있고 내용과 형식 모두일 수도 있지요. 정치일 수도 있고 경제일 수도 있고 저항일 수도 있고요. 어떻든 재미는 재미, 내가 잠든 사이에 누군가 살짝 가져다 읽고 싶게 하는 것이 재미, 신의 퀴즈에 신조차 생각지 못했던 답을 적는 것이 재미.
삶의 한 조각(a piece of life)에 재미를 부여해서 재구성하는 일인 것 같아요, 결국. 이 반복되는 일상에 돌연변이가 생기고 거기서 좀 더 매력적인 개체가 태어나고 그것이 유전되어 이어지는 진화론, 나는 시를 가지고 이 진화가 지루해지지 않도록 복무하고 있는 거니까요, K.⊙
詩人이 만난 詩人
“삶의 모든 것은 어쩌면 정치적인 것”
⊙ 시의적절함과 詩의 적절함 사이에서 깊은 思惟 모색
⊙ 100명의 시인이 있다는 것은 100개의 우주가 있다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것
⊙ 시에도 황금비율이 있다
두 가지 영상.
펄펄 끓어 넘칠 것 같은 양은냄비 속으로 한 봉지 라면을 던져 넣는 순간 솟구쳐 오르는 면발과 붉은 수프 속으로 다시 한 다발 국수를 돌려 넣는 어머니의 흰 오른손.
밥상머리에 앉아 “라면은 라면은 구공탄 라면, 후루루 짭짭 후루루 짭짭 맛있는 라면”을 외치는 다섯 살짜리 어린 입.
다시 두 가지 영상.
광화문 광장, 한국 가톨릭 124위의 순교자를 복자로 모시는 시복식 집전을 위해 100만 군중이 운집한 시가지를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미소 띤 얼굴.
주황색 수의복을 입은 미국 기자 제임스 폴리가 자신의 가족들과 형제들에게 미국의 이라크 공습을 중단시켜 달라는 메시지를 읽는 모습, 직후 검은 복면의 남자가 폴리의 목을 참수하는 장면(은 방송되지 않았지만).
언어유희란 이 세계에 대한 격렬한 응전방식
그는 주말마다 라면을 먹는다고 했다. 라면을 먹는 것과 그것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것 사이의 명확한 인과성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와 그의 삶이 라면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성스러운 기도와 필생의 수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창조적 열정과 시적 충일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재앙과 폭력과 살인을 근절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오직 평화 상생 행복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스스로 가진 재능을 남김없이 바치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윤성학 시인은 《당랑권 전성시대》와 《쌍칼이라 불러다오》 등 두 권의 시집을 상재(上梓)함으로써 당랑권과 쌍칼로 무장한 채 악마적 현세에 대응하는 창조적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그가 당랑권과 쌍칼을 들고 강호(江湖)에 입문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도시의 강퍅함 때문이다.
도시와 도시에 집약된 강호의 질서 속에서 매일매일 ‘미디어’란 강자를 상대로 단타를 날려야 하는 비애 때문에 무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당랑권과 쌍칼은 그 비유적 울타리를 넘어 그의 인식론이자 실천론이 된다. 세계는 강호이며, 강호의 폭력성에는 언어의 힘으로 가까스로 버틴다.
비평가 유종호(柳宗鎬) 선생도 시란 어느 정도 언어유희(pun)의 소산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의 언어는 유달리 발음과 의미의 유사성에 기초한 유희적 착상을 자주 보여준다. 시의 윤리는 언어적 윤리성을 바탕으로 하게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윤성학의 윤리학이 궁금해진다.
“저는 회사원 생활을 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시적 형식을 심도 있게 실험하기에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여건이죠. 그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실험과 전위와 파괴는 형식이 아니라 언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게 ‘언어유희’란 이 세계에 대한 일종의 격렬한 응전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어의 질서를 해체해 보는 실험의 연속, 말해지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서 잠시 멈춰보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때문에 저에게는 언어적 윤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윤리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성돔을 찾아서’라는 뜻밖의 월척
그의 응전 수단이 언어이고 그의 윤리학이 존재론적 차원이라는 점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말을 앞두고 한 해 업무결산과 새해 업무계획을 수립하느라 정신없이 지내고 있을 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고 한다. 부천에 살던 대학 동기였다. 신춘문예에 응모하러 가는데 바쁘면 대신 내주겠다는 내용. 헉~!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단다. 부랴부랴 작품 4편을 챙겼다. 이미 대부분의 신문사가 마감을 하고 난 뒤였다. 남은 곳은 《문화일보》 한 곳뿐.
그로부터 몇 주 후 어느 날 그는 부서 회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 만두전골을 앞에 두고 선후배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문학 담당 배문성 기자가 전화를 했다. ‘영등철’이 무슨 뜻입니까? 음력 2월 무렵이며, 이때 낚은 대형 감성돔을 특히 ‘영등 감성돔’이라고 한다는 둥 답변. 그러곤 만두 하나쯤 더 먹었을까? 다시 전화가 왔다. “축하합니다, 당선되셨습니다.” 환호성(아무도 모르게)~!
“신춘문예 당선이 하나의 운명적 결과이듯 등단 지면(紙面) 역시 제게는 운명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성돔을 찾아서’는 그렇게 운명처럼 제게 시인이란 명찰을 달게 해주었습니다. 감포에 계신 처삼촌께서 ‘친구들이 윤 서방 기다리고 있다, 감생이(감성돔) 낚시 한 수 가르쳐달라고 말이다’고 하시더라고요.”
인터뷰를 앞두고 미리 낚시를 얼마나 즐기는지, 낚시와의 인연이 그의 시세계에 특별한 인상을 주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민물·바다 가릴 것 없이 한두 번밖에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낚시와 관련된 기사를 출력해 읽고 있었고, 곁눈질로 보니 꽤 재미있는 기사였고, 사무실에 들어가 해당 기사를 검색해 보았고, 그 가운데 ‘바닷물에도 강한 물살과 여린 물살이 있으며 물고기들도 선호하는 물 흐름이 있다’는 데 주목했다. 작품에는 ‘바닷물의 출렁거림은 흐름과 갈래를 지녔다/ 가장 강한 놈은 가장 빠른 곳에서만 논다’로 표현돼 있다. 신춘문예 응모와 당선 지면이 운명적 결과이듯 등단작 ‘감성돔을 찾아서’는 뜻밖의 월척이었던 셈이다.
1971년생인 윤성학 시인은 90년대 초 대학에 입학했고 2002년 등단했다. 말하자면 군사독재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 말미에 성년이 되었고 이른바 서정시파의 세찬 흐름이 한창이던 때에 시인이 되었다. 그의 눈에 포착된 대학생활과 등단 무렵의 문단 풍경은 한 시대의 변곡점에 해당된다.
“저의 대학 생활은 당시 많은 학생이 그랬던 것처럼 이념 공부와 시위 현장 에 휩쓸려 다니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지금에사 ‘그때 공부 좀 제대로 해둘 걸’ 하는 생각도 하지만, 90년대 초는 문예창작과 미학(美學) 이념이 강하게 뒤섞이던 시기였습니다. 미학보다는 이념이 우세한 상황이었죠.”
교사가 꿈이었던 그는 문창과가 있다는 사실을 고3이 돼서야 알았다. 대학 동기들 다수가 문예반 생활을 했고, 상당수가 시단과 시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을 하는 수준이었다. ‘내가 제대로 온 게 맞나?’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2학년 때 루카치의 《형상과 전형》을 읽고는 형상화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달았다. ‘휩쓸려 다니던’ 그는 군대엘 갔고 비로소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군대에서 처음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집단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대학보다 오히려 군대가 그에겐 시적 밑거름이 돼주었다.
대학에서 그는 “선배들은 왜 집단을 사랑하는 방법만 알려주려 하지?” “왜 이성이나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려 하지는 않지?”란 생각을 동기들과 나누곤 했다. 그는 당시 대학 분위기를 이념과 정치적 과잉으로 인한 ‘미학적 불균형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저의 대학생활이 창작 면에서 크게 성과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첫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에 등단(2002년) 이전 작품이 ‘사춘기’ 하나밖에 없다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미학적 불균형의 시대
‘미학적 불균형의 시대’는 그에게 작품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회사원 윤성학은 등단 이후 주목받는 신예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05년 ‘젊은시’란 엔솔로지에 참여했는데, 그때 황병승·조동범·문성해·박후기·이현승·송승환·장석원·김중일 등의 시인들과 저녁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 이들의 열정과 패기, 실험과 도전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이들과의 만남은 이전의 윤성학과 이후의 윤성학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되었다.
최근 시단의 경향에 대해 ‘경향’ 자체에 대해서는 이렇다저렇다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한다. 어떤 시든 그것이 시라면 아름답다고 생각한단다. 100명의 시인이 있다는 것은 100개의 세계, 100개의 우주가 있다는 것이고, 분리할 수 없는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한 것이라면 그것은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이 서정시파든 모더니즘 경향이든 옹호도 비판도 하지 않는다.
윤성학 시인은 그의 에세이를 통해 시란 ‘재미의 재구성’이라고 했다. 시인은 신이 내준 퀴즈를 푸는 사람이라고 했다. 결국 신이 내준 퀴즈를 푸는 과정과 형식이 재구성된 게 재미있는 ‘시’라는 말이 된다. 이는 문학론에서 흔히 거론되는 표현주의나 의미론, 효용론과는 궤가 다른 주장이다. 시를 현실적·정치적·이념적 스펙트럼 안에 둬야 하는가, 바깥에 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완전히 범주를 달리하여 답한 셈이다.
“황금비율이란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1대 1.618의 비율. 시에도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이육사 선생의 ‘청포도’ 같은 시에도 내용과 형식, 재미와 감동의 황금비율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비틀스의 음악처럼 진보와 보수, 전통과 실험이 두루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현실적·정치적·이념적 스펙트럼 안이냐 밖이냐가 아니라 시적 감동을 낳는 황금비율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殺佛 殺祖
하지만 미학적 긴장이 없는 시는 좋지 않다고 주장한다. 스펙트럼마저도 그것이 모양인 한 다양할수록 좋은 것처럼 미적 긴장을 유지한다면 어떤 시도 긍정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대한민국 헌법 텍스트도 아름다웠습니다’ ‘삶의 모든 것은 어쩌면 정치적인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그는 전통적·양식적 관점에 의거하고 있는 시인들에 견주어 대단한 혁신가가 아닐 수 없다.
참다운 시인이라면 선배 세대의 어떤 시적 전통도 과감히 거부할 것이며, 자신의 시적 배경마저도 부정할 줄 안다고 했다. 시의 본래적 전복성에 빗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殺佛殺祖)’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나아가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를 죽이고,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이라’고까지 한다. 시적 창조성과 정치적 진보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디 앨런은 ‘새로움이란 15분 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새로움과 진보란 서로 동일선상에서 언급될 범주가 아닙니다. 시적 새로움이란 황금비율의 영역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성학 시인에게 새롭지 않은 것은 죄악이다. 새롭다고 생각하면 그뿐, 진보성에 집착하지 않는다. 새로움의 시적 윤리에 집착할 뿐이다.
어떠한 창조적 열정과 시적 충일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재앙과 폭력과 살인을 근절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오늘, 한 창조적 영혼은 평화, 상생, 행복의 인간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자신의 재능을 모두 쏟아붓고 있다.⊙
<글 : 金載弘 시인>
“재미있어 보여서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돌려주기에, “괜찮아요, 더 읽으세요”라고 말하고는 다시 자는 척했던 그 장면.
K, 오랜만에 안부를 전합니다. 내가 왜 시를 쓰게 됐는지, 왜 쓰고 있는지를 생각하다가 우리가 오래전에 나누었던 이야기 몇 조각을 집어 올려 봅니다. 난 그때 호기심이라고 말했죠. 호기심이 나를 문학으로 향하게 한다고.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 나조차 잘 모르고 뱉은 말이었는데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나에게 시란, 조물주가 내주는 퀴즈를 푸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는 일상의 곳곳에 퀴즈를 숨겨놓았고 난 그걸 발견하고 문제를 풀지요. 그렇게 문제 풀이 과정을 보여주고 점수를 받는 것이 나의 시 쓰기라고 말해도 될 것 같군요. 예를 들면 ‘사랑이 밥통과 같다는 걸/ 누가 알았겠는가// 나의 부엌에서/ 가장 어리석고 아둔한 음운을 가진 부속/ 사랑이 그렇게 둔탁한 발성과/ 모서리 없는 몸을 가졌다는 걸/ 일찍이 알지 못했네// 오래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속이 비쩍 다 마르도록/ 전원을 끄지 않고/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너의 이름을 부른다’(시 ‘이 밥통아’ 전문)처럼 밥통 안에서 ‘사랑’이라고 적힌 보물찾기 쪽지를 발견하는 일이지요.
K,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기업에서 일하면서 시를 쓰고 있고 몇몇 사람은 이런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가사 노동을 하며 시를 쓰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거나, 시와 소설을 같이 쓰거나,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에 비해 내가 더 나을 게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꾸준히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게 마땅하지요.
그래요, 나의 환경은 기업이고 도시입니다. 내가 나에게 도시인(都詩人)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는 이유이지요. 도시에는 조물주가 숨겨놓은 보물찾기 쪽지가 참 많아요. 강변북로, 굴뚝, 전봇대, 전철, 포클레인 등.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쪽지가 많아서 다행입니다. 첫 시집의 표제작인 ‘당랑권 전성시대’가 태어난 배경도 바로 회사에서의 일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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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노트와 두 권의 시집. |
권법 없이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권법이 있다
익히더라도 강한 것을 익혀야 산다
나는 당랑권을 택했다
매미를 잡아먹는 사마귀의 전술이다
상대와 마주섰을 땐 늘 중심을 뒤에 두고
정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 혈을 지킨다
사각(死角)으로 돌다가!
연속적인 단타로 급소를 파고든다
그의 반격을 받아 흘리며
쉼없는 상하 연타를 구사해
승부를 몰아간다
나는 여기서 당랑권을 익혔다
강하게 파고들었다가
빠르게 빠져나오는
고수들을 보며 익힌 권법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랑권이다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 중에서
2004년이었으니까 대리 시절, 회사 생활 8년 차 때였군요. 직장생활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눈을 떠 나가는 그 당시 어느 날, 선배사원들이 저마다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지요. 나는 내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 좋을 땐 좋고 안 좋을 땐 한없이 추락하는 타입이었는데 선배들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빠르게 국면을 전환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 거예요. 자기에 매몰되지 않고 목표를 향해 툭툭 치고 나가는 모습, 불현듯 그것이 권법이라는 생각이 찾아온 거죠. 우연히 당랑권에 관한 기사를 읽었고 영상을 찾아보다가 ‘권법 없이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권법이 있다’라는 문장이 내게 들어왔던 거였습니다. 사랑도 힘들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도 쉬운 게 아니지요. 어쩌면 그게 당랑권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K, 첫 시집을 낸 이후 두 번째 시집까지의 시간은 촛불처럼 짧고 한숨처럼 긴 시간이었습니다. 대리 시절에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과장을 달면서 2006년에 첫 시집을 낸 후에 차장 초임인 2013년 두 번째 시집을 내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네요. 7년 동안의 시간에 K, 당신도 변했고 나도 변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지요. 마음을 다치기도 했고 몸이 아프기도 하면서 우리는 세월을 입었습니다. 수많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교차되고 ‘시의적절함’과 ‘詩의 적절함’이 중첩되며 스쳐 지나갔습니다. 인간(人間)이라는 말은 사람 자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間)’를 의미하는 말이라고도 하지요. 사회라는 것은 ‘사이 간(間)’을 인식하는 것이어서 ‘사이 詩옷’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당신도 짐작했겠지요.
어떤 대학 캠퍼스에서 우연히 윤희상 시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그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나네요. 시를 쓰는 것과 바둑이 비슷하다, 젊을 때 좋은 성적을 내던 기사(棋士)가 나이가 들수록 승률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더라, 따라서 젊었을 때 좋은 시 많이 써야 한다, 라는 말이었죠(그래 놓고 본인은 갈수록 더 좋은 시를 쓴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쓴 시는 가장 늙은 때에 쓴 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젊은 나이에 쓴 시가 되기도 하지요. 오늘보다 더 젊은 날에 쓴 시는 절대로 태어날 수 없을 테니까요.
쌍칼이라 불러다오
쌍칼,
그의 결투는 잔혹하다
어지간히 무거운 상대라도
높이 들어올리면
전혀 맥을 추지 못한다
지게차의 작업은 그렇게 냉정하다
일말의 동요도 없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상대의 중심 깊숙이
두 개의 칼날을 밀어넣는다
아무 표정 없이 들어올린다
그의 무게중심을 흩뜨리지 않는다
그를 자신보다 높이 추켜올린다
쌍칼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완벽한 전술이다
그를 오래 보고 있으면
결투의 원리를 알 것 같다
-시집 《쌍칼이라 불러다오》 중에서
도시의 사물, 사람, 사물과 사람, 사람과 사람, 그들이 일으키는 현상들 사이에서 나는 더 잘 적응하도록 진화해 온 거 같습니다. 기업에서의 내 페르소나 역시 그러할 것이고요. 그러므로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 ‘쌍칼이라 불러다오’는 18년 동안 기업이라는 공간에서 살아온 내 진화의 기록일지도 모릅니다.
회사 물류창고에서 제품을 트럭에 싣는 지게차의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죠. 지게차에 보물찾기 쪽지가 숨겨져 있었고 종이를 펼쳐보니 ‘쌍칼’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이기는 것인가, 결투의 승부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먼길을 무던히 걸어온 자의 신발, 한자리에 쪼그려앉아 오래 풀무를 돌린 불쟁이의 무릎뼈. 누가 이기는지 보는 눈이 생긴 것이 내 진화의 현재 모습이겠지요.
K,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말합니다. 시집 제목이 《당랑권 전성시대》 《쌍칼이라 불러다오》인 걸로 미루어 무예에 능하신 분인가 봐요. 혹자는, 맨손 권법으로 싸우다가 질 거 같으니까 두 번째 시집에선 무기를 들었네요, 라고. 어쩌다 보니 시집 제목이 그렇긴 하군요. 아무래도 세 번째 시집 제목은 좀 순한 걸로 골라야겠네요.
시는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퀴즈는 너무 어려워서 내가 답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모르겠어요. 어쩜 죽을 때까지 답을 구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지금 내가 아는 것은 ‘재미의 재구성’입니다. 재미는 내용일 수도, 형식일 수도 있고 내용과 형식 모두일 수도 있지요. 정치일 수도 있고 경제일 수도 있고 저항일 수도 있고요. 어떻든 재미는 재미, 내가 잠든 사이에 누군가 살짝 가져다 읽고 싶게 하는 것이 재미, 신의 퀴즈에 신조차 생각지 못했던 답을 적는 것이 재미.
삶의 한 조각(a piece of life)에 재미를 부여해서 재구성하는 일인 것 같아요, 결국. 이 반복되는 일상에 돌연변이가 생기고 거기서 좀 더 매력적인 개체가 태어나고 그것이 유전되어 이어지는 진화론, 나는 시를 가지고 이 진화가 지루해지지 않도록 복무하고 있는 거니까요, K.⊙
詩人이 만난 詩人
“삶의 모든 것은 어쩌면 정치적인 것”
⊙ 시의적절함과 詩의 적절함 사이에서 깊은 思惟 모색
⊙ 100명의 시인이 있다는 것은 100개의 우주가 있다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것
⊙ 시에도 황금비율이 있다
두 가지 영상.펄펄 끓어 넘칠 것 같은 양은냄비 속으로 한 봉지 라면을 던져 넣는 순간 솟구쳐 오르는 면발과 붉은 수프 속으로 다시 한 다발 국수를 돌려 넣는 어머니의 흰 오른손.
밥상머리에 앉아 “라면은 라면은 구공탄 라면, 후루루 짭짭 후루루 짭짭 맛있는 라면”을 외치는 다섯 살짜리 어린 입.
다시 두 가지 영상.
광화문 광장, 한국 가톨릭 124위의 순교자를 복자로 모시는 시복식 집전을 위해 100만 군중이 운집한 시가지를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미소 띤 얼굴.
주황색 수의복을 입은 미국 기자 제임스 폴리가 자신의 가족들과 형제들에게 미국의 이라크 공습을 중단시켜 달라는 메시지를 읽는 모습, 직후 검은 복면의 남자가 폴리의 목을 참수하는 장면(은 방송되지 않았지만).
언어유희란 이 세계에 대한 격렬한 응전방식
그는 주말마다 라면을 먹는다고 했다. 라면을 먹는 것과 그것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것 사이의 명확한 인과성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와 그의 삶이 라면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성스러운 기도와 필생의 수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창조적 열정과 시적 충일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재앙과 폭력과 살인을 근절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오직 평화 상생 행복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스스로 가진 재능을 남김없이 바치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윤성학 시인은 《당랑권 전성시대》와 《쌍칼이라 불러다오》 등 두 권의 시집을 상재(上梓)함으로써 당랑권과 쌍칼로 무장한 채 악마적 현세에 대응하는 창조적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그가 당랑권과 쌍칼을 들고 강호(江湖)에 입문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도시의 강퍅함 때문이다.
도시와 도시에 집약된 강호의 질서 속에서 매일매일 ‘미디어’란 강자를 상대로 단타를 날려야 하는 비애 때문에 무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당랑권과 쌍칼은 그 비유적 울타리를 넘어 그의 인식론이자 실천론이 된다. 세계는 강호이며, 강호의 폭력성에는 언어의 힘으로 가까스로 버틴다.
비평가 유종호(柳宗鎬) 선생도 시란 어느 정도 언어유희(pun)의 소산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의 언어는 유달리 발음과 의미의 유사성에 기초한 유희적 착상을 자주 보여준다. 시의 윤리는 언어적 윤리성을 바탕으로 하게 마련인데, 그런 점에서 윤성학의 윤리학이 궁금해진다.
“저는 회사원 생활을 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시적 형식을 심도 있게 실험하기에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여건이죠. 그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실험과 전위와 파괴는 형식이 아니라 언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게 ‘언어유희’란 이 세계에 대한 일종의 격렬한 응전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언어의 질서를 해체해 보는 실험의 연속, 말해지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서 잠시 멈춰보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때문에 저에게는 언어적 윤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윤리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성돔을 찾아서’라는 뜻밖의 월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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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詩作) 환경은 기업이고 도시라고 얘기하는 윤성학 시인. |
그로부터 몇 주 후 어느 날 그는 부서 회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 만두전골을 앞에 두고 선후배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문학 담당 배문성 기자가 전화를 했다. ‘영등철’이 무슨 뜻입니까? 음력 2월 무렵이며, 이때 낚은 대형 감성돔을 특히 ‘영등 감성돔’이라고 한다는 둥 답변. 그러곤 만두 하나쯤 더 먹었을까? 다시 전화가 왔다. “축하합니다, 당선되셨습니다.” 환호성(아무도 모르게)~!
“신춘문예 당선이 하나의 운명적 결과이듯 등단 지면(紙面) 역시 제게는 운명적인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성돔을 찾아서’는 그렇게 운명처럼 제게 시인이란 명찰을 달게 해주었습니다. 감포에 계신 처삼촌께서 ‘친구들이 윤 서방 기다리고 있다, 감생이(감성돔) 낚시 한 수 가르쳐달라고 말이다’고 하시더라고요.”
인터뷰를 앞두고 미리 낚시를 얼마나 즐기는지, 낚시와의 인연이 그의 시세계에 특별한 인상을 주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민물·바다 가릴 것 없이 한두 번밖에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낚시와 관련된 기사를 출력해 읽고 있었고, 곁눈질로 보니 꽤 재미있는 기사였고, 사무실에 들어가 해당 기사를 검색해 보았고, 그 가운데 ‘바닷물에도 강한 물살과 여린 물살이 있으며 물고기들도 선호하는 물 흐름이 있다’는 데 주목했다. 작품에는 ‘바닷물의 출렁거림은 흐름과 갈래를 지녔다/ 가장 강한 놈은 가장 빠른 곳에서만 논다’로 표현돼 있다. 신춘문예 응모와 당선 지면이 운명적 결과이듯 등단작 ‘감성돔을 찾아서’는 뜻밖의 월척이었던 셈이다.
1971년생인 윤성학 시인은 90년대 초 대학에 입학했고 2002년 등단했다. 말하자면 군사독재에 대항한 민주화 운동 말미에 성년이 되었고 이른바 서정시파의 세찬 흐름이 한창이던 때에 시인이 되었다. 그의 눈에 포착된 대학생활과 등단 무렵의 문단 풍경은 한 시대의 변곡점에 해당된다.
“저의 대학 생활은 당시 많은 학생이 그랬던 것처럼 이념 공부와 시위 현장 에 휩쓸려 다니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지금에사 ‘그때 공부 좀 제대로 해둘 걸’ 하는 생각도 하지만, 90년대 초는 문예창작과 미학(美學) 이념이 강하게 뒤섞이던 시기였습니다. 미학보다는 이념이 우세한 상황이었죠.”
교사가 꿈이었던 그는 문창과가 있다는 사실을 고3이 돼서야 알았다. 대학 동기들 다수가 문예반 생활을 했고, 상당수가 시단과 시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을 하는 수준이었다. ‘내가 제대로 온 게 맞나?’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2학년 때 루카치의 《형상과 전형》을 읽고는 형상화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달았다. ‘휩쓸려 다니던’ 그는 군대엘 갔고 비로소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군대에서 처음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집단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대학보다 오히려 군대가 그에겐 시적 밑거름이 돼주었다.
대학에서 그는 “선배들은 왜 집단을 사랑하는 방법만 알려주려 하지?” “왜 이성이나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려 하지는 않지?”란 생각을 동기들과 나누곤 했다. 그는 당시 대학 분위기를 이념과 정치적 과잉으로 인한 ‘미학적 불균형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저의 대학생활이 창작 면에서 크게 성과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첫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에 등단(2002년) 이전 작품이 ‘사춘기’ 하나밖에 없다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미학적 불균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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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적 창조성과 정치적 진보성에 대한 김재홍 시인의 질문에 윤성학(오른쪽) 시인은 “새로움과 진보는 동일 선상에 있지 않다”고 답했다. |
최근 시단의 경향에 대해 ‘경향’ 자체에 대해서는 이렇다저렇다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한다. 어떤 시든 그것이 시라면 아름답다고 생각한단다. 100명의 시인이 있다는 것은 100개의 세계, 100개의 우주가 있다는 것이고, 분리할 수 없는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한 것이라면 그것은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는, 그것이 서정시파든 모더니즘 경향이든 옹호도 비판도 하지 않는다.
윤성학 시인은 그의 에세이를 통해 시란 ‘재미의 재구성’이라고 했다. 시인은 신이 내준 퀴즈를 푸는 사람이라고 했다. 결국 신이 내준 퀴즈를 푸는 과정과 형식이 재구성된 게 재미있는 ‘시’라는 말이 된다. 이는 문학론에서 흔히 거론되는 표현주의나 의미론, 효용론과는 궤가 다른 주장이다. 시를 현실적·정치적·이념적 스펙트럼 안에 둬야 하는가, 바깥에 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완전히 범주를 달리하여 답한 셈이다.
“황금비율이란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1대 1.618의 비율. 시에도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이육사 선생의 ‘청포도’ 같은 시에도 내용과 형식, 재미와 감동의 황금비율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비틀스의 음악처럼 진보와 보수, 전통과 실험이 두루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현실적·정치적·이념적 스펙트럼 안이냐 밖이냐가 아니라 시적 감동을 낳는 황금비율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殺佛 殺祖
하지만 미학적 긴장이 없는 시는 좋지 않다고 주장한다. 스펙트럼마저도 그것이 모양인 한 다양할수록 좋은 것처럼 미적 긴장을 유지한다면 어떤 시도 긍정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대한민국 헌법 텍스트도 아름다웠습니다’ ‘삶의 모든 것은 어쩌면 정치적인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그는 전통적·양식적 관점에 의거하고 있는 시인들에 견주어 대단한 혁신가가 아닐 수 없다.
참다운 시인이라면 선배 세대의 어떤 시적 전통도 과감히 거부할 것이며, 자신의 시적 배경마저도 부정할 줄 안다고 했다. 시의 본래적 전복성에 빗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殺佛殺祖)’는 말을 자주 인용한다. 나아가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를 죽이고,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이라’고까지 한다. 시적 창조성과 정치적 진보성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디 앨런은 ‘새로움이란 15분 후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새로움과 진보란 서로 동일선상에서 언급될 범주가 아닙니다. 시적 새로움이란 황금비율의 영역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성학 시인에게 새롭지 않은 것은 죄악이다. 새롭다고 생각하면 그뿐, 진보성에 집착하지 않는다. 새로움의 시적 윤리에 집착할 뿐이다.
어떠한 창조적 열정과 시적 충일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재앙과 폭력과 살인을 근절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오늘, 한 창조적 영혼은 평화, 상생, 행복의 인간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자신의 재능을 모두 쏟아붓고 있다.⊙
<글 : 金載弘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