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하려면 학문에 미쳐야 합니다. 정치에 기웃대는 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학교에 있다가 정부에 들어가려 생각하면 학문을 못합니다”
⊙ 카이스트 개혁의 전도사에서 6년7개월 만에 사퇴
⊙ “학내 반발과 역풍, 예상했다. 역풍 없었다면 더 이해가 안 됐을 것”
⊙ “우체국·철도 관리하듯 규격화·평준화된 대학으로 세계와 경쟁할 수 없어”
⊙ “대학은 잘못 결정하면 망할 수도 있어. 대신 좋은 결정하면 좋은 대학이 된다”
徐南杓
⊙ 77세.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기계공학과 학사·석사, 미국 카네기멜론대 박사(기계공학).
스웨덴 왕립기술원 명예박사, 호주 퀸즐랜드대 명예박사.
⊙ 미 MIT 기계공학과 교수·학과장·석좌교수, 미 과학재단(NSF) 부총재, 미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교수 역임.
⊙ 카이스트 개혁의 전도사에서 6년7개월 만에 사퇴
⊙ “학내 반발과 역풍, 예상했다. 역풍 없었다면 더 이해가 안 됐을 것”
⊙ “우체국·철도 관리하듯 규격화·평준화된 대학으로 세계와 경쟁할 수 없어”
⊙ “대학은 잘못 결정하면 망할 수도 있어. 대신 좋은 결정하면 좋은 대학이 된다”
徐南杓
⊙ 77세.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기계공학과 학사·석사, 미국 카네기멜론대 박사(기계공학).
스웨덴 왕립기술원 명예박사, 호주 퀸즐랜드대 명예박사.
⊙ 미 MIT 기계공학과 교수·학과장·석좌교수, 미 과학재단(NSF) 부총재, 미 사우스 캐롤라이나대
교수 역임.
카이스트 서남표(徐南杓) 총장이 미국으로 돌아간다. 얼마 전(2월 5일) 과학 담당 기자들과 만나 “한국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어쩌면 그를 한국 땅에선 영영 못 보게 될지 모른다.
2006년 9월 중도사퇴한 전임(前任) 러플린(R.Laughlin) 총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그 역시 임기(1년5개월)를 남겨두고 하차(下車)한 것이다. 총 재임기간은 6년7개월. 카이스트 호(號)는 서남표 선장의 항로를 따라 순항(順航)하는 줄만 알았다. ‘대학 개혁의 전도사’로 “미국 MIT를 벤치마킹해 카이스트를 리모델링했다”는 찬사가 가득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그의 개혁은 ‘소통 부재’라는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연이어 학생과 교수가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학 내 교수집단인 교수협의회와 수년간의 핑퐁 공방이 지루해질 무렵 대학 임시이사회(이사장 吳明)는 사퇴안을 의결했다.
날 선 다툼은 누구 말이 진실인지 헷갈리게 하였다. 국민은 시끄러운 카이스트에 귀를 닫았다. 2013학년도 카이스트 등록률은 역대 최저인 84.3%를 기록했다. 신입생 850명 중 130여 명이 등록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졸업식 다음 날인 2월 23일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52년 만에 금의환향(錦衣還鄕)했으나 6년7개월 만에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기자는 이삿짐을 꾸리는 서 총장을 2월 12일 만났다.
—한국에 올 때 이런 어려움도 예상했었나요.
뜻밖에도 얼굴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몰랐다면 몰랐고요, 그런 역풍이 있으리라 예상은 했습니다. 역풍이 없었다면 더 이해가 안 갔을지 모르죠. 한국에 올 때 결코 일이 쉽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겪고 보니 생각보다 어려운 점도 있었고, 쉬운 점도 있었어요. 나 자신을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 카이스트를 위해, 조국을 위한 일이었어요. 그런 면에서 마음이 편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학에서, 국회에서 얻어맞고… 기분 좋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제가 버텼던 것은 저의 꿈, 한국을 위한 꿈이 컸기에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꿈이 없었다면 어려웠겠죠.”
러플린과 서남표
—모양새가 앞서 학내 반발로 그만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러플린 총장과 비슷합니다.
러플린 총장은 부임 당시 카이스트의 사립화, 종합대학화, 탈(脫)이공계화, 학부중심화를 외쳤지만, 처음부터 교육관료와 대학의 벽에 부딪혔다.
“러플린 총장이 카이스트에 공헌이 크다고 봅니다. 세상을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카이스트에 집어넣었어요. 그동안 총장 자리는 학생을 받아 졸업시키고, 정부에 구걸해 (대학을) 먹여 살리는 역할이 전부라고 생각했어요. 러플린 총장의 성과를 두고 이렇다저렇다 말해도 카이스트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끔 했다는 것이 중요한 공헌이죠.”
—러플린과 다른 점은요.
“저는 카이스트를 조직적으로 기획하고 개혁했어요. 제가 처음 부임할 당시 5개년 계획을 세웠는데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 안 했어요. 블루 프린트… 한국말로 뭐라 합니까. 청사진이라고 하나요? 앞뒤를 딱 보여주는… 전 처음부터 다 보여줬습니다. 부분적으로 다를 수 있지만, 카이스트의 오늘은 5개년 계획과 일치합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007년 5월 1일자 기사에서 ‘한국 정부는 카이스트 개혁에 착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새 총장으로 받아들였지만, 그의 급진적인 개혁 노력은 낙제점을 받아 좌절됐다’고 보도했다.
—비슷한 기사가 나올지 모르겠군요.
“모르죠. 언론에서 어떻게 쓸지. 추측하기 나름이지만, 저는 다르게 봅니다. 외람된 얘기지만, 카이스트만이 아니라 한국 교육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변하니 할 수 없이 변한 데가 많아요. 그것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주목해서 봤어요. 학과장 중심제, 정년보장(Tenure·테뉴어) 심사 강화 등 여러 면에서 학교 운영의 철학을 바꾸었는데 그것은 제가 떠나도 남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카이스트가 좋아졌고, 다른 대학이 압력을 받았을 겁니다.”
서 총장이 부임한 2006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테뉴어 심사에 탈락한 교수가 39명, 재임용에서 탈락한 이가 19명이다. 같은 기간 신규 임용된 교수는 350명에 이른다.
“독일이 재정난으로 교수들을 막 자를 때, 우리는 과감하게 늘렸어요. 미국조차 교수 임용을 주저하던 2009년 우리는 60명을 새로 뽑았어요. 남들이 줄일 때 과감하게 투자해 학교가 발전하게 된 겁니다. 2006년의 카이스트와 2013년 카이스트는 완전히 다른 학교입니다. 교수 중에 불평하는 분도 있지만, 그분 역시 5년 후면 (정년퇴직으로) 나갑니다. 5년 후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서 총장은 덧붙여 이런 말을 했다.
“제가 학과장 중심제를 도입하며 학과장 마음대로 교수를 뽑으라고 했어요. ‘정원은 없다. 당신 과(科)에 몇 사람을 교수로 채용하든 좋은 사람이면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 어떤 과는 젊은 사람 천지고, 어떤 과는 고집을 피워 교수 절반이 예순 살이 넘었습니다. 좋은 교수가 많으면 학생이 몰리게 마련입니다. 숫자(정원)를 제한할 필요가 없어요.”
—무슨 돈으로….
“정부가 지원해 줘서 뽑은 게 아니고, 우리 스스로 벌어서… 대학은 봉급 외에 드는 비용이 꽤 많습니다. 연구실도 있어야 하고, 대학원생도 필요하고, 그런 숫자로 볼 때 교수 수가 50% 가까이 는 것은 카이스트가 세계적으로 경쟁하는 데 시간이 지날수록 중요하다고 봅니다.”
망할 대학은 망하게 해야
—그 과정에서 교과부와의 마찰은 없었나요?
“뭐… 괘씸죄에 걸렸다고 봅니다. 교과부 입장에서는 하라는 것만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면 딱 좋겠는데 그렇게 해서는 대학 발전이 없어요. 전 세계 대학 순위를 보면 제일 좋은 대학 10곳 중 6곳이 미국 사립대입니다. 4곳은 영국에 있는 대학이에요. 톱20 중 미국 주립대가 1곳(미시간주립대) 포함됐을 정도입니다. 무슨 얘기냐, 정부에서 대학을 잡고 흔드는 나라는 좋은 대학이 있을 수 없어요.”
서 총장은 “한국도 톱10 중 8개 대학이 사립대다. 국립대는 서울대와 카이스트뿐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세계적인 대학이 나온다면 사립대 중에서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작심한 듯 “대학이 성공하려면 정부가 손을 떼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카이스트에 필요한 만큼만 지원해 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게 하고,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해야지 정부 입김이 너무 세면 안 돼요. 무슨 사업을 하려 해도 일일이 정부에 가서 목을 매야 합니다. 관료들만 좋을 뿐입니다.”
—정부 간섭이 많은 나라치고 명문대가 없다는 말이군요.
“대학 수가 매우 많지 않습니까. 정부에서 관리하려면 우체국, 철도 관리하듯 평준화하고 규격화시켜야 합니다. 체신과 철도는 정부의 공익사업이니 가능할지 몰라도 대학은 우체국 관리와는 달라요. 저는 유럽의 대학과 일본의 대학에 가서 ‘우체국처럼 하다가는 다 망한다’고 쓴소리를 했어요. 지금 우리나라는 정부가 사립대까지 이래라저래라 간섭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렇게 되면 좋은 대학이 나올 수 없고, 망할 대학도 안 나옵니다. 현상유지밖에 안 됩니다.”
—대학을 규격화시키면 관료들만 좋겠네요.
“그들이 손을 떼야 대학이 잘될 겁니다. 안 뗄 이유가 없어요. 사립대에 몇 푼 주지도 않으면서 왜 흔드나요. 한국대학은 자율성이 있어야 합니다. 망할 대학은 망하게 해야 합니다. 한국 대학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경쟁을 국내 대학 간 경쟁만 생각하는데, 이제는 세계와 경쟁해야 합니다. 그런 세계 경쟁을 할 수 있게 풀어줘야지, 묶어 놓으면 걸작품이 안 나옵니다.”
—일본이 16번째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우리는 아직 소식이 없네요.
“노벨상을 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제일 큰 문제가 뭔지를 빨리 파악하는 일입니다. 남이 쓴 논문을 아무리 흉내 내봐야 안 돼요.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탄 것은 바깥세상에 빨리 문을 열고 문제의식을 가진 결과입니다. 한국도 바깥에 눈을 맞추고 소통해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어요. 한국의 R&D 예산 16조원은 미국 과학재단 예산의 절반 수준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초기술은 도외시되고 당장 산업화에 필요한 응용기술에 집중해요. 이는 정부의 역할이 아닙니다. 당장보다는 미래를 보는 투자를 해야 합니다.”
“어려운 터널… 어쩌면 당연한 일”
2006년 7월 취임한 서남표 총장은 먼저 테뉴어(정년보장) 심사를 강화, 2008년 한 해에만 테뉴어 신청 교수 38명 중 15명(39.5%)을 탈락시켰다. 학비도 이전까지 기성회비를 제외한 학비를 면제했으나 ‘차등적 등록금제’를 도입했고 학부 수업은 100% 영어로 강의토록 했다. 서남표식(式) 개혁에 힘입어 2010년 연임(連任)에 성공했다.
그러나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고 학내에서 ‘소통 부재’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날 불도저가 갑자기 나타나 카이스트를 구획정리해 버렸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작년 7월 ‘학내외 여론이 나빠져 빠른 조처가 불가피하다’며 이사회에 계약해지 안건이 상정됐고, 10월 25일 15명의 이사가 참석한 임시이사회에서 ‘2013년 2월 23일 사퇴안’이 찬성 9표, 반대 5표로 처리됐다.
—왜 이렇게 말들이 많았나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주위에서 꼭 연임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연임)하겠다고 결심하니, 안 된다고 해요. 카이스트 교수뿐만 아니라 정부, 심지어 다른 대학교수들까지 들고 일어났어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연임 역풍이 여기까지 온 겁니다. 여기다 학생들의 자살 같은 불행한 일이 한꺼번에 생겨서….”
서 총장은 “어쩌면 어려운 터널을 지나올 수밖에 없었던 일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카이스트가 세계적 대학이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산을 몇 개 넘었더니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더군요. 저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하도 야단치니까 ‘이럴 때 나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버티고 앉아 있었던 겁니다.”
—연임, 잘한 일이었던가요.
“잘한 일이라 봅니다. 골치 아픈 일이 많았지만 만약 그냥 떠났으면, 아이고… 별말이 많았을 겁니다. ‘저 봐라. 서남표가 해서 안 됐는데, 네가 왜 하느냐’ 하는 문화가 생겼을 겁니다. 저는 다음 사람 일 잘할 수 있게 토대를 닦아놨습니다. 짓밟히더라도, 과감하게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국 대학에 많아야 한다는 게 제 소견입니다.”
한때 대학개혁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그는 3년 동안 일부 교수(교수협), 정치권, 이사회(오명 이사장), 정부(교육과학기술부) 등 주변 세력과 오랜 공방을 벌였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그는 애써 미소 지었다.
“카이스트만 심한 줄 알았더니 큰 회사일수록 더 심하다고 하더군요. 회사 임원은 언제 쫓겨날지 몰라 ‘임시직원’이라면서요? 안 쫓겨나려고 오너에게 별의별 투서를 다 한다고 해요. 모함 안 받는 이는 오너밖에 없다는 겁니다. 무슨무슨 대학 출신 파벌이 있고…(기자에게) 사실입니까.(웃음)”
그러더니 이런 말도 했다.
“후임 총장한테 투서가 들어온답니다. ‘학교재정이 망할 것 같다’고요. 누가 하는지 모르겠는데, 재정적으로 지금처럼 카이스트가 강한 적이 없었어요. 재산도 2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그렇게 잘되는데, 보면 뻔히 알 텐데, 투서를 해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 심리를. 재정이 이렇다는 것을 부총장이 그래프로 그려 별 설명을 다 해도, 그런 투서를 한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오늘 아침에 기분이 좋아진 것은 대학만 그런 게 아니라 기업도 그렇다고 하니, 너무 실망할 것 없다는 위안이 됐어요.”
카이스트의 총 자산은 2006년 5734억원에서 2011년 1조1300억원으로, 같은 기간 대학예산은 3064억원에서 7205억원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기부금도 누적액이 59억원에서 1733억원으로 늘었다고 한다.
“정치에 기웃대는 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1990년대 카이스트 총장 제안을 거부했다가 2006년 받아들인 이유는 뭔가요.
“MIT 학과장 시절, 한국을 바라보니 인적자원이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은데 세계적인 연구대학은 왜 안 나오는지 의아했어요. 저는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귀국을 결심했고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면 안 왔을 겁니다. 그런 긍지로 왔어요. 그러려면 생각을 많이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요.
“제일 많이 변해야 하는 것이 문화입니다. 세계적인 대학은 나름의 문화가 있습니다. 일 잘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윤리가 있어야 하며, 정직하고 무엇보다 학문에 집중해야 합니다. 학문을 하려면 학문에 미쳐야 합니다. 정치에 기웃대는 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학교에 있다가 정부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면 학문을 못합니다. 세계적인 학문을 하려면 밤낮 그 생각만 해야 돼요. 그래야 좋은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학문하는 일이 그냥 학생 시켜 논문 만드는 게 학문이 아닙니다.”
—학문하는 자세는 어때야 합니까.
“학문하는 이는 역사와 경쟁하는 사람입니다.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뉴턴, 아인슈타인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와 경쟁하는 것이 학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문화가 바뀌어야 합니다. 일 잘하는 사람 존경하고 쓸데없는 일로 끌어내리지 않는 문화가 생겨야 합니다.”
—교수는 어떤 자리입니까.
“최고 수준의 연구원이나 학자가 되기 위해 수많은 교수가 주당 60시간 이상 연구에 매진하고 있어요. 카이스트 교수의 80% 이상은 5억원 규모가 넘는 연구기금을 매년 외부로부터 가져오고 있습니다. 세계 일류 연구대학은 대개 이런 식으로 운영하죠. 대부분의 카이스트 교수들은 주당 3시간만 수업을 합니다. 강의부담을 줄인 것은 교수들이 연구에 집중해 자신의 전공분야 지식기반에 기여하거나 혹은 중요한 기술혁신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카이스트 교수는 대학원생을 연구에 투입시켜 지도하고 있어요. 교수는 매니저로서 학생을 대하는 게 아니라 배움의 동반자로 학생을 감독해야 합니다.
카이스트 교수의 이상적(理想的) 역할은 과학기술이 어떻게 개발되고 구현되며 혁신돼 가는지 그 과정을 학생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학생들에게 윤리적으로 학구적으로 롤모델이자 삶의 멘토가 돼 주어야 합니다. 좋은 멘토는 결국 멘티들과 친구처럼 지내게 됩니다. 세계 최고 연구대학에서는 교수들이 학생에게 배우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지식의 대부분은 함께 연구를 같이하면서 제가 지도했던 학생들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카이스트에 온 일이 잘한 일이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인지요.
“물론이지요.”
카이스트와 같은 이공계 중심 대학이 여러 곳 생겨났다. 포스텍을 비롯해 UNIST(울산과학기술대),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GIST(광주과학기술원) 등이 카이스트와 맞서고 있다.
“한국은 인적자원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좋은 대학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대학이 카이스트가 될 필요는 없어요. 자기들이 제일 잘하는 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인도에는 공대(工大)가 많아요. 똑똑한 친구들이 학부에 많은데 졸업 후 대개가 미국 대학원에 진학합니다. (인도 공대가) 일종의 필터 역할을 하는 셈인데, 세계적인 연구 중심의 대학원이 인도에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이 성장하는 데 아시아 대학들이 필터 역할을 한 것이죠. 서울대, 카이스트도 마찬가집니다. 한양대 공대 출신은 한국에 남았지만 서울대·카이스트 출신은 미국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연구 중심의 좋은 대학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의 대학사회는 얽힌 학맥과 인맥이 판을 치고, 교수직은 줄만 잘 서면 정년이 보장되는 특권계급이었습니다.
“글쎄요… 고쳐야 한다는 것은 대학마다 당면한 것이 다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대학이 다 연구 중심 대학일 필요가 없고, 어떤 곳은 교육 중심으로 가면 됩니다. 그럼, 대학의 비전을 누가 정하느냐. 학교가 정해야 합니다. 경쟁하다 보면, 자기에게 잘 맞는 것이 있을 겁니다.”
—대학이 사는 길은요.
“학부를 줄이고 대학원을 늘려야 합니다. 특히 공과 계통의 대학이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굉장히 강한 대학이 될 겁니다. 그러지 않고 학생을 더 뽑아, 받은 수업료로 학교재정을 충당하려 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수업료로 연구대학을 운영할 수 없어요. 연구대학은 연구비로 연구해야 합니다.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것도 없이 자기들이 해보면 실패가 보입니다. 그 실패를 통해 개혁하면 됩니다. 대학교수들이 노조 식으로 대학을 움직여선 곤란해요. 미국 법원에서 ‘미국 교수는 경영진에 속한다’고 판결한 일이 있어요. 보스턴대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교수 노조가 하도 강해 총장이 소송을 제기했어요. 결국 노조가 져서 미국 대학에서 교수 노조란 말은 사라졌습니다. 대학은 잘못 결정하면 망할 수도 있어요. 대신 좋은 결정을 하면 좋은 대학이 됩니다.”
“카이스트, 죽기 전에 스스로 판단할 것”
—얼마 전 과학 담당 기자들과 만나 ‘한국에 다시는 안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정말 안 올 겁니까.
그는 “그게 아니다. 오해”라고 했다.
“저는 미국 정부에서 4년간 일했고, MIT에서 10년을 학과장으로 있었어요. 그 시절에는 힘이 막강했어요.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근처에 가지 않았어요. 왜냐? 옛 사무실 근처에 자꾸 얼굴을 비추면 남아 있는 이들이 불편해합니다. 저도 카이스트를 떠나면 카이스트에 대해 말 한마디 안 할 겁니다. 교수님들, 지금은 제게 뭐라 하시지만 제가 떠나면 생각이 많이 바뀔 겁니다. 굳이 설득할 필요도 없고, 결국엔 죽기 전에 스스로 판단할 겁니다. 다시 (한국에) 올지도 모르죠.”
그는 “일단 집사람과 보스턴으로 돌아가 비워뒀던 집을 고치고 구상했던 책을 쓸 계획”이라고 했다.
—카이스트 교수와 졸업생, 재학생에게 어떤 말을 남기고 싶습니까.
“제가 보기에 우리 학생들 무척 똑똑합니다. 교수도 훌륭한 사람이 많아요. 정말이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기왕 꿈을 위해 학문을 시작했으니, 꿈을 위해 마음껏 해보라고요. 너무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저 자리로 가면 오래 할 수 있는데…’라거나, ‘이 자리로 오면 취직이 더 쉬울 텐데…’라고 생각하면 큰 사람이 못 됩니다. 큰일을 하려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고, 자기 뜻대로 하길 기원합니다. 다만 윤리는 지켜주세요. 윤리를 지키지 않는 지도자는 사회에 해(害)만 주기 때문이죠.”⊙
2006년 9월 중도사퇴한 전임(前任) 러플린(R.Laughlin) 총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그 역시 임기(1년5개월)를 남겨두고 하차(下車)한 것이다. 총 재임기간은 6년7개월. 카이스트 호(號)는 서남표 선장의 항로를 따라 순항(順航)하는 줄만 알았다. ‘대학 개혁의 전도사’로 “미국 MIT를 벤치마킹해 카이스트를 리모델링했다”는 찬사가 가득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했던가. 그의 개혁은 ‘소통 부재’라는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연이어 학생과 교수가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학 내 교수집단인 교수협의회와 수년간의 핑퐁 공방이 지루해질 무렵 대학 임시이사회(이사장 吳明)는 사퇴안을 의결했다.
날 선 다툼은 누구 말이 진실인지 헷갈리게 하였다. 국민은 시끄러운 카이스트에 귀를 닫았다. 2013학년도 카이스트 등록률은 역대 최저인 84.3%를 기록했다. 신입생 850명 중 130여 명이 등록을 포기한 것이다.
그는 졸업식 다음 날인 2월 23일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52년 만에 금의환향(錦衣還鄕)했으나 6년7개월 만에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기자는 이삿짐을 꾸리는 서 총장을 2월 12일 만났다.
—한국에 올 때 이런 어려움도 예상했었나요.
뜻밖에도 얼굴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몰랐다면 몰랐고요, 그런 역풍이 있으리라 예상은 했습니다. 역풍이 없었다면 더 이해가 안 갔을지 모르죠. 한국에 올 때 결코 일이 쉽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어요. 겪고 보니 생각보다 어려운 점도 있었고, 쉬운 점도 있었어요. 나 자신을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 카이스트를 위해, 조국을 위한 일이었어요. 그런 면에서 마음이 편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학에서, 국회에서 얻어맞고… 기분 좋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제가 버텼던 것은 저의 꿈, 한국을 위한 꿈이 컸기에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꿈이 없었다면 어려웠겠죠.”
러플린과 서남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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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남표 총장과 러플린(오른쪽) 전 총장. 2006년 7월 13일 카이스트에서 열린 총장 이・취임식에서 러플린 전 총장이 서남표 신임 총장에게 교기를 전달하고 있다. |
러플린 총장은 부임 당시 카이스트의 사립화, 종합대학화, 탈(脫)이공계화, 학부중심화를 외쳤지만, 처음부터 교육관료와 대학의 벽에 부딪혔다.
“러플린 총장이 카이스트에 공헌이 크다고 봅니다. 세상을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카이스트에 집어넣었어요. 그동안 총장 자리는 학생을 받아 졸업시키고, 정부에 구걸해 (대학을) 먹여 살리는 역할이 전부라고 생각했어요. 러플린 총장의 성과를 두고 이렇다저렇다 말해도 카이스트가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끔 했다는 것이 중요한 공헌이죠.”
—러플린과 다른 점은요.
“저는 카이스트를 조직적으로 기획하고 개혁했어요. 제가 처음 부임할 당시 5개년 계획을 세웠는데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 안 했어요. 블루 프린트… 한국말로 뭐라 합니까. 청사진이라고 하나요? 앞뒤를 딱 보여주는… 전 처음부터 다 보여줬습니다. 부분적으로 다를 수 있지만, 카이스트의 오늘은 5개년 계획과 일치합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007년 5월 1일자 기사에서 ‘한국 정부는 카이스트 개혁에 착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새 총장으로 받아들였지만, 그의 급진적인 개혁 노력은 낙제점을 받아 좌절됐다’고 보도했다.
—비슷한 기사가 나올지 모르겠군요.
“모르죠. 언론에서 어떻게 쓸지. 추측하기 나름이지만, 저는 다르게 봅니다. 외람된 얘기지만, 카이스트만이 아니라 한국 교육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변하니 할 수 없이 변한 데가 많아요. 그것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주목해서 봤어요. 학과장 중심제, 정년보장(Tenure·테뉴어) 심사 강화 등 여러 면에서 학교 운영의 철학을 바꾸었는데 그것은 제가 떠나도 남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카이스트가 좋아졌고, 다른 대학이 압력을 받았을 겁니다.”
서 총장이 부임한 2006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테뉴어 심사에 탈락한 교수가 39명, 재임용에서 탈락한 이가 19명이다. 같은 기간 신규 임용된 교수는 350명에 이른다.
“독일이 재정난으로 교수들을 막 자를 때, 우리는 과감하게 늘렸어요. 미국조차 교수 임용을 주저하던 2009년 우리는 60명을 새로 뽑았어요. 남들이 줄일 때 과감하게 투자해 학교가 발전하게 된 겁니다. 2006년의 카이스트와 2013년 카이스트는 완전히 다른 학교입니다. 교수 중에 불평하는 분도 있지만, 그분 역시 5년 후면 (정년퇴직으로) 나갑니다. 5년 후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서 총장은 덧붙여 이런 말을 했다.
“제가 학과장 중심제를 도입하며 학과장 마음대로 교수를 뽑으라고 했어요. ‘정원은 없다. 당신 과(科)에 몇 사람을 교수로 채용하든 좋은 사람이면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 어떤 과는 젊은 사람 천지고, 어떤 과는 고집을 피워 교수 절반이 예순 살이 넘었습니다. 좋은 교수가 많으면 학생이 몰리게 마련입니다. 숫자(정원)를 제한할 필요가 없어요.”
—무슨 돈으로….
“정부가 지원해 줘서 뽑은 게 아니고, 우리 스스로 벌어서… 대학은 봉급 외에 드는 비용이 꽤 많습니다. 연구실도 있어야 하고, 대학원생도 필요하고, 그런 숫자로 볼 때 교수 수가 50% 가까이 는 것은 카이스트가 세계적으로 경쟁하는 데 시간이 지날수록 중요하다고 봅니다.”
망할 대학은 망하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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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의 자살 사건이 잇따르자 서남표 총장이 지난 2011년 4월 8일 오후 창의관 터만홀에서 학생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학생들은 학교 측의 운영이 독단적이라며 불만을 쏟아냈다. |
“뭐… 괘씸죄에 걸렸다고 봅니다. 교과부 입장에서는 하라는 것만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면 딱 좋겠는데 그렇게 해서는 대학 발전이 없어요. 전 세계 대학 순위를 보면 제일 좋은 대학 10곳 중 6곳이 미국 사립대입니다. 4곳은 영국에 있는 대학이에요. 톱20 중 미국 주립대가 1곳(미시간주립대) 포함됐을 정도입니다. 무슨 얘기냐, 정부에서 대학을 잡고 흔드는 나라는 좋은 대학이 있을 수 없어요.”
서 총장은 “한국도 톱10 중 8개 대학이 사립대다. 국립대는 서울대와 카이스트뿐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세계적인 대학이 나온다면 사립대 중에서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작심한 듯 “대학이 성공하려면 정부가 손을 떼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카이스트에 필요한 만큼만 지원해 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게 하고,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해야지 정부 입김이 너무 세면 안 돼요. 무슨 사업을 하려 해도 일일이 정부에 가서 목을 매야 합니다. 관료들만 좋을 뿐입니다.”
—정부 간섭이 많은 나라치고 명문대가 없다는 말이군요.
“대학 수가 매우 많지 않습니까. 정부에서 관리하려면 우체국, 철도 관리하듯 평준화하고 규격화시켜야 합니다. 체신과 철도는 정부의 공익사업이니 가능할지 몰라도 대학은 우체국 관리와는 달라요. 저는 유럽의 대학과 일본의 대학에 가서 ‘우체국처럼 하다가는 다 망한다’고 쓴소리를 했어요. 지금 우리나라는 정부가 사립대까지 이래라저래라 간섭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렇게 되면 좋은 대학이 나올 수 없고, 망할 대학도 안 나옵니다. 현상유지밖에 안 됩니다.”
—대학을 규격화시키면 관료들만 좋겠네요.
“그들이 손을 떼야 대학이 잘될 겁니다. 안 뗄 이유가 없어요. 사립대에 몇 푼 주지도 않으면서 왜 흔드나요. 한국대학은 자율성이 있어야 합니다. 망할 대학은 망하게 해야 합니다. 한국 대학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경쟁을 국내 대학 간 경쟁만 생각하는데, 이제는 세계와 경쟁해야 합니다. 그런 세계 경쟁을 할 수 있게 풀어줘야지, 묶어 놓으면 걸작품이 안 나옵니다.”
—일본이 16번째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우리는 아직 소식이 없네요.
“노벨상을 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제일 큰 문제가 뭔지를 빨리 파악하는 일입니다. 남이 쓴 논문을 아무리 흉내 내봐야 안 돼요.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탄 것은 바깥세상에 빨리 문을 열고 문제의식을 가진 결과입니다. 한국도 바깥에 눈을 맞추고 소통해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어요. 한국의 R&D 예산 16조원은 미국 과학재단 예산의 절반 수준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초기술은 도외시되고 당장 산업화에 필요한 응용기술에 집중해요. 이는 정부의 역할이 아닙니다. 당장보다는 미래를 보는 투자를 해야 합니다.”
“어려운 터널… 어쩌면 당연한 일”
2006년 7월 취임한 서남표 총장은 먼저 테뉴어(정년보장) 심사를 강화, 2008년 한 해에만 테뉴어 신청 교수 38명 중 15명(39.5%)을 탈락시켰다. 학비도 이전까지 기성회비를 제외한 학비를 면제했으나 ‘차등적 등록금제’를 도입했고 학부 수업은 100% 영어로 강의토록 했다. 서남표식(式) 개혁에 힘입어 2010년 연임(連任)에 성공했다.그러나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고 학내에서 ‘소통 부재’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날 불도저가 갑자기 나타나 카이스트를 구획정리해 버렸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작년 7월 ‘학내외 여론이 나빠져 빠른 조처가 불가피하다’며 이사회에 계약해지 안건이 상정됐고, 10월 25일 15명의 이사가 참석한 임시이사회에서 ‘2013년 2월 23일 사퇴안’이 찬성 9표, 반대 5표로 처리됐다.
—왜 이렇게 말들이 많았나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주위에서 꼭 연임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연임)하겠다고 결심하니, 안 된다고 해요. 카이스트 교수뿐만 아니라 정부, 심지어 다른 대학교수들까지 들고 일어났어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연임 역풍이 여기까지 온 겁니다. 여기다 학생들의 자살 같은 불행한 일이 한꺼번에 생겨서….”
서 총장은 “어쩌면 어려운 터널을 지나올 수밖에 없었던 일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카이스트가 세계적 대학이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산을 몇 개 넘었더니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더군요. 저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하도 야단치니까 ‘이럴 때 나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버티고 앉아 있었던 겁니다.”
—연임, 잘한 일이었던가요.
“잘한 일이라 봅니다. 골치 아픈 일이 많았지만 만약 그냥 떠났으면, 아이고… 별말이 많았을 겁니다. ‘저 봐라. 서남표가 해서 안 됐는데, 네가 왜 하느냐’ 하는 문화가 생겼을 겁니다. 저는 다음 사람 일 잘할 수 있게 토대를 닦아놨습니다. 짓밟히더라도, 과감하게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한국 대학에 많아야 한다는 게 제 소견입니다.”
한때 대학개혁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그는 3년 동안 일부 교수(교수협), 정치권, 이사회(오명 이사장), 정부(교육과학기술부) 등 주변 세력과 오랜 공방을 벌였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을 것이다. 그는 애써 미소 지었다.
“카이스트만 심한 줄 알았더니 큰 회사일수록 더 심하다고 하더군요. 회사 임원은 언제 쫓겨날지 몰라 ‘임시직원’이라면서요? 안 쫓겨나려고 오너에게 별의별 투서를 다 한다고 해요. 모함 안 받는 이는 오너밖에 없다는 겁니다. 무슨무슨 대학 출신 파벌이 있고…(기자에게) 사실입니까.(웃음)”
그러더니 이런 말도 했다.
“후임 총장한테 투서가 들어온답니다. ‘학교재정이 망할 것 같다’고요. 누가 하는지 모르겠는데, 재정적으로 지금처럼 카이스트가 강한 적이 없었어요. 재산도 2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그렇게 잘되는데, 보면 뻔히 알 텐데, 투서를 해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 심리를. 재정이 이렇다는 것을 부총장이 그래프로 그려 별 설명을 다 해도, 그런 투서를 한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오늘 아침에 기분이 좋아진 것은 대학만 그런 게 아니라 기업도 그렇다고 하니, 너무 실망할 것 없다는 위안이 됐어요.”
카이스트의 총 자산은 2006년 5734억원에서 2011년 1조1300억원으로, 같은 기간 대학예산은 3064억원에서 7205억원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기부금도 누적액이 59억원에서 1733억원으로 늘었다고 한다.
| 서남표式 등록금제 개혁과 영어 100% 강의 서남표 총장은 취임 직후인 2007년 신입생부터 평점 3.0에 못 미치면 수업료 일부 또는 전부를 부담토록 했다. 기성회비 외에 공짜로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적잖이 부담을 느꼈다. 교수 학생 모두에게 골칫거리였던 100% 영어강의도 논란을 빚었다. 교수와 학생들은 서 총장의 공격 소재로 이를 십분 활용했다. 현재 카이스트의 평가방식은 절대평가다. 학비를 전액(336만4000원) 내는 평점 2.0 미만 학생은 전체 재학생의 3% 정도. 12% 학생은 학비의 절반가량(165만6000원)을 낸다. 나머지 85% 학생은 평점 3.0이 넘어 무상교육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서 총장은 할 말이 많았다. “공짜로 받고도 고맙다는 사람이 없어요. 자기가 노력해서 벌어야 합니다. 노력 안 해도 그저 주면, 그 가치가 얼마인지 알지 못해요. 저는 미국에서 고학(苦學)을 했어요. 청소부, 대학기숙사 전화 교환수, 도서관 사서 등 3가지 아르바이트를 한꺼번에 했어요. 일평생 제일 많이 배운 게 고학 때 배운 겁니다.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공부한 지식은 머릿속에 아직 남아 있지만, 강의실에서 배운 지식은 분명하게 남아 있지 않아요. MIT에서 교수가 되고 나서 학부 때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했어요. 그게 미국 전역으로 퍼졌어요.” 서 총장은 130년 전통의 MIT 기계과를 혁신하고 300여 편의 논문과 50여 개의 국제 특허를 내놓았다. 100% 영어강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랬다. “영어 강의를 강조한 것은 세계의 과학기술 언어가 영어이기 때문입니다. 영어를 못하면 세계에 나가 꼼짝도 못합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비즈니스도 영어를 잘해야 가능하죠. 영어도 못하는 졸업생을 내보내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에 나가 먹고살겠습니까. 확실한 것은, 그 덕에 요즘 학생들 영어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겁니다.” |
“정치에 기웃대는 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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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스트 캠퍼스를 걷고 있는 서남표 총장. 그는 사퇴 논란에 대해 “그런 역풍이 있으리라 예상은 했다. 역풍이 없었다면 더 이해가 안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
“MIT 학과장 시절, 한국을 바라보니 인적자원이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은데 세계적인 연구대학은 왜 안 나오는지 의아했어요. 저는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귀국을 결심했고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면 안 왔을 겁니다. 그런 긍지로 왔어요. 그러려면 생각을 많이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요.
“제일 많이 변해야 하는 것이 문화입니다. 세계적인 대학은 나름의 문화가 있습니다. 일 잘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윤리가 있어야 하며, 정직하고 무엇보다 학문에 집중해야 합니다. 학문을 하려면 학문에 미쳐야 합니다. 정치에 기웃대는 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학교에 있다가 정부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면 학문을 못합니다. 세계적인 학문을 하려면 밤낮 그 생각만 해야 돼요. 그래야 좋은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학문하는 일이 그냥 학생 시켜 논문 만드는 게 학문이 아닙니다.”
—학문하는 자세는 어때야 합니까.
“학문하는 이는 역사와 경쟁하는 사람입니다. 학문의 궁극적 목적은 뉴턴, 아인슈타인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역사와 경쟁하는 것이 학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문화가 바뀌어야 합니다. 일 잘하는 사람 존경하고 쓸데없는 일로 끌어내리지 않는 문화가 생겨야 합니다.”
—교수는 어떤 자리입니까.
“최고 수준의 연구원이나 학자가 되기 위해 수많은 교수가 주당 60시간 이상 연구에 매진하고 있어요. 카이스트 교수의 80% 이상은 5억원 규모가 넘는 연구기금을 매년 외부로부터 가져오고 있습니다. 세계 일류 연구대학은 대개 이런 식으로 운영하죠. 대부분의 카이스트 교수들은 주당 3시간만 수업을 합니다. 강의부담을 줄인 것은 교수들이 연구에 집중해 자신의 전공분야 지식기반에 기여하거나 혹은 중요한 기술혁신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카이스트 교수는 대학원생을 연구에 투입시켜 지도하고 있어요. 교수는 매니저로서 학생을 대하는 게 아니라 배움의 동반자로 학생을 감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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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5월 6일 오후 청와대에서 서남표 총장에게 국가과학기술위원 위촉장을 수여하고 있다. |
—카이스트에 온 일이 잘한 일이라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생각할 것인지요.
“물론이지요.”
카이스트와 같은 이공계 중심 대학이 여러 곳 생겨났다. 포스텍을 비롯해 UNIST(울산과학기술대),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 GIST(광주과학기술원) 등이 카이스트와 맞서고 있다.
“한국은 인적자원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좋은 대학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대학이 카이스트가 될 필요는 없어요. 자기들이 제일 잘하는 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인도에는 공대(工大)가 많아요. 똑똑한 친구들이 학부에 많은데 졸업 후 대개가 미국 대학원에 진학합니다. (인도 공대가) 일종의 필터 역할을 하는 셈인데, 세계적인 연구 중심의 대학원이 인도에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이 성장하는 데 아시아 대학들이 필터 역할을 한 것이죠. 서울대, 카이스트도 마찬가집니다. 한양대 공대 출신은 한국에 남았지만 서울대·카이스트 출신은 미국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연구 중심의 좋은 대학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의 대학사회는 얽힌 학맥과 인맥이 판을 치고, 교수직은 줄만 잘 서면 정년이 보장되는 특권계급이었습니다.
“글쎄요… 고쳐야 한다는 것은 대학마다 당면한 것이 다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얘기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대학이 다 연구 중심 대학일 필요가 없고, 어떤 곳은 교육 중심으로 가면 됩니다. 그럼, 대학의 비전을 누가 정하느냐. 학교가 정해야 합니다. 경쟁하다 보면, 자기에게 잘 맞는 것이 있을 겁니다.”
—대학이 사는 길은요.
“학부를 줄이고 대학원을 늘려야 합니다. 특히 공과 계통의 대학이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굉장히 강한 대학이 될 겁니다. 그러지 않고 학생을 더 뽑아, 받은 수업료로 학교재정을 충당하려 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수업료로 연구대학을 운영할 수 없어요. 연구대학은 연구비로 연구해야 합니다.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것도 없이 자기들이 해보면 실패가 보입니다. 그 실패를 통해 개혁하면 됩니다. 대학교수들이 노조 식으로 대학을 움직여선 곤란해요. 미국 법원에서 ‘미국 교수는 경영진에 속한다’고 판결한 일이 있어요. 보스턴대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교수 노조가 하도 강해 총장이 소송을 제기했어요. 결국 노조가 져서 미국 대학에서 교수 노조란 말은 사라졌습니다. 대학은 잘못 결정하면 망할 수도 있어요. 대신 좋은 결정을 하면 좋은 대학이 됩니다.”
“카이스트, 죽기 전에 스스로 판단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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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남표 총장이 2011년 4월 대전시 유성구 카이스트 문지캠퍼스에서 온라인 무선 전기자동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온라인 전기자동차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 최근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세계 10대 혁신기술’로 꼽혔다. |
그는 “그게 아니다. 오해”라고 했다.
“저는 미국 정부에서 4년간 일했고, MIT에서 10년을 학과장으로 있었어요. 그 시절에는 힘이 막강했어요.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근처에 가지 않았어요. 왜냐? 옛 사무실 근처에 자꾸 얼굴을 비추면 남아 있는 이들이 불편해합니다. 저도 카이스트를 떠나면 카이스트에 대해 말 한마디 안 할 겁니다. 교수님들, 지금은 제게 뭐라 하시지만 제가 떠나면 생각이 많이 바뀔 겁니다. 굳이 설득할 필요도 없고, 결국엔 죽기 전에 스스로 판단할 겁니다. 다시 (한국에) 올지도 모르죠.”
그는 “일단 집사람과 보스턴으로 돌아가 비워뒀던 집을 고치고 구상했던 책을 쓸 계획”이라고 했다.
—카이스트 교수와 졸업생, 재학생에게 어떤 말을 남기고 싶습니까.
“제가 보기에 우리 학생들 무척 똑똑합니다. 교수도 훌륭한 사람이 많아요. 정말이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기왕 꿈을 위해 학문을 시작했으니, 꿈을 위해 마음껏 해보라고요. 너무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저 자리로 가면 오래 할 수 있는데…’라거나, ‘이 자리로 오면 취직이 더 쉬울 텐데…’라고 생각하면 큰 사람이 못 됩니다. 큰일을 하려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고, 자기 뜻대로 하길 기원합니다. 다만 윤리는 지켜주세요. 윤리를 지키지 않는 지도자는 사회에 해(害)만 주기 때문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