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자서전 준비 중인 洪性宇 전 국회의원 : 월간조선

TBC(동양방송) 출신 탤런트 홍성우(洪性宇)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대체로 40대 후반 이상일 것이다. 그는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출마, 당선된 ‘연예인 출신 1호 국회의원’이다. 10~12대를 거친 3선이었지만, 그는 1988년 수천억 원의 재산을 부정축재했다는 의혹을 받고 스스로 정계를 떠났다.

그는 1992년 국민당 소속으로 14대 선거에서 재기를 노렸지만 낙선했고, 일반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 후 제주도로 가 수퍼마켓을 운영하며 ‘국회의원 출신 수퍼 주인’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가 싶더니, 그뿐이었다.

지난 10월 말, 안국동에서 철학관 ‘통(通)’을 운영하는 이철용(李喆鎔) 전 의원이 “홍성우 의원이 제주에서 자서전(自敍傳)을 쓰고 있다”고 기자에게 귀띔해 주었다. 지난 11월 3일 오후 홍성우 전 의원을 만나기 위해 제주로 날아갔다.

28년 동안 밥 거의 먹지 않아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떴다. ‘오 차장, 홍성우입니다. 공항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 <데릴사위>를 통해 본 젊은 시절의 얼굴만 기억났다.

로비에 홍 전 의원으로 보이는 ‘출영객(出迎客)’은 없었다. “좀 전에 지나친 뿔테 안경에 ‘올백’ 머리를 한 분 아닐까”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그도 “오 기자 아니신가?”라며 손을 덥석 잡았다. 그는 올해 칠순(七旬) 노인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팽팽했고, 몸도 전성기 시절 못지않은 ‘몸짱’ 노신사였다.

그는 ‘렉스턴’ 승용차를 운전해 숙소인 N호텔로 기자를 안내하며, “1996년 제주도로 내려와 22년 동안 묻혀 살다 <월간조선> 덕분에 동면(冬眠)에서 깨어난다”고 했다. 1992년 무렵 정계를 잠시 떠나 MBC라디오 ‘홈런출발’이란 시사칼럼 DJ를 한 경력이 말해주듯, 그의 목소리는 중저음으로 편안했다.

저녁 7시, 홍 전 의원은 기자를 음식점으로 데려갔다. 그는 한두 숟갈만 손대고는 수저를 놓았다.

“지난 28년 동안 밥은 거의 먹지 않았습니다. 끼니마다 양파·생다시마·두부·마늘·부추·생무 등 손수 개발한 ‘장수식단’을 챙겨 먹고 있죠. 조깅과 근력운동 등으로 30대 몸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고 있는 손자(17) 녀석이 100세까지 사는 모습을 꼭 보고 죽으려면 154세까지 살아야 합니다.”

‘황당한’ 이야기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호텔방으로 옮겨 이야기하자”며 일어섰다. 방으로 들어서자, 그는 “편하게 다 벗고 하자”며 양복을 훌훌 벗어 던지더니 가운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았다. 기자도 ‘복장 통일’을 위해 가운으로 갈아입고 마주 앉았다. 호텔방에서 남자 둘이 가운만 입은 채 인터뷰하기는 처음이다.

154세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

당시 17세인 영화배우 장미희(왼쪽)와 함께 드라마에 출연한 홍성우 전 의원.

―아니, 왜 154세까지 살아야 합니까.

“(한숨을 깊게 쉬며) 부모 없이 조부모 밑에서 자란 하나뿐인 손자가 마음고생 하는 것이 눈물겨워 100세까지 잘사는 모습을 꼭 보고 죽어야겠다는 한(恨)이 서려서입니다. 1994년 6월 둘째 아들 내외가 생후 5개월18일 된 핏덩이를 던져두고 자취를 감췄습니다. 며느리의 메모를 보고, 노모(趙鍾大)와 아내(許順玉) 얼굴 볼 낯도 없고…. 집사람이 고교생이 될 때까지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타 먹이고…할머니가 ‘손자’를 ‘아들’처럼 길렀습니다. KBS토크쇼에 출연했을 때, 방송인 엄앵란씨가 ‘저 아인 누구냐’고 물어요. ‘내 아들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할 것이고, 손자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생모(生母)에게 돌려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손자는 생모를 만날 수 없습니다. 며느리는 아들과 이혼(離婚)하고, 처녀로 개가(改嫁)했기 때문에 보고 싶어도 서로 볼 수 없는 운명인 겁니다. 제가 아들 셋을 두고 이혼을 했으니, 자식들이 ‘이혼’을 배웠을 것 아닙니까. 한 하늘 아래 살면서 자식이 어미를 볼 수 없는 고통을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요.”

그는 “올 초 손자와 명문(名門) 제주일고 입학식을 마치고 ‘신비의 도로’를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녀석이 ‘오늘 수업료 면제 신청 냈다’고 하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하나뿐인 손자도 제대로 키우지 못한다는 자괴감(自愧感)에 운전대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 어승생 오름 근처 천왕사(天王寺) 앞에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웠다고 한다.

―한때 제주에서 수퍼마켓을 한다고 했습니다만.

“….”

홍 전 의원은 목이 멘 듯 답변 대신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하고 나온 그의 얼굴을 보니 눈동자가 벌겠다. 그는 “손자 학교 급식비도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통학용으로 쓰는 차량도 주유소에서 ‘외상기름’을 넣고 있다”고 털어놨다. 제주로 낙향(落鄕)해 행복한 노후를 보낼 것이란 핑크빛 상상을 하고 온 기자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는 12대 국회의원이던 1988년 수천억 원의 재산을 부정축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병원재벌’인 그의 사촌형 홍성국(洪性國) 서울대 교수가 소유한 ‘대한병원’이 사실상 그의 재산이라는 세간의 의혹에 대해 그는 방어할 기회도 갖지 못했다고 한다.

‘왜 적극 해명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그는 “언론이 마녀사냥식으로 달려들면 해명해도 우스워지기 때문에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라면서 “도봉 지역 주민들의 병원비 할인 민원을 처리해 주다 보니 내가 병원의 오너로 인식됐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미련 없이 의원직을 던졌다. 먹고살 방법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견디기 힘든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지하철을 타니 취객(醉客)이 ‘홍성우, 대한병원·중대병원 소유한 병원재벌이 웬 지하철인가’라고 비아냥댔습니다. 도봉의 집을 처분해 강원도 정선에 정착해 염소라도 길러보려고 땅을 보러 다녔습니다. 시가 평당 1만원 하는 땅을 부동산은 ‘홍 의원님 같은 분은 평당 30만원을 내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평생 보리밥을 먹으며 가난한 사람들과 동고동락(同苦同樂)한 이미지가 병원재벌로 바뀌는 순간, 정치생명이 끝장나 버린 겁니다. 그래서 나를 모르는 땅, 제주로 가기로 했던 겁니다.”

‘무지개 수퍼’ 주인으로 변신

아버지 홍백기 선생과 세 살 위의 누이(오른쪽)와 함께한 홍성우 전 의원. 부친 홍백기 선생은 종로경찰서 경찰 출신으로 6·25전쟁 때 빨치산 토벌에 참가하는 등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1988년 가을, 홍성우 전 의원은 육지의 세간을 정리해 빚을 갚고 9000만원을 들고 섬으로 갔다. 북제주군 애월읍 봉성리에 조그마한 땅을 샀다. 그는 제주시 용담동 로터리 ‘무지개 수퍼’ 주인으로 변신한다.

“신문에 수퍼가 매물로 나왔기에, 사흘간 ‘시장조사’를 위해 드나드는 손님을 관찰했습니다. 7평 정도에 하루 700명 정도, 가진 돈 3000만원으로 수퍼를 인수하면 하루 세 끼는 해결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알고 보니 700명이란 숫자는 ‘과자손님’이 아니라 ‘버스표 손님’이었습니다. 11개월 만에 접었습니다.” 그는 허탈한 듯 맥주를 한 잔 죽 들이켰다.

“수퍼 첫 개시를 하던 날, 50대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와 ‘아이고, 의원님이 여기 웬일이십니까’라고 하기에 ‘그런 말 많이 듣는다’고 모른 체하니까, ‘도봉1동에 살 때 의원님이 주관하시던 경로잔치에 수십 번 가서 일을 도왔던 사람’이라며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조금 후 스님 한 분이 들어와 ‘북한산 수덕암(修德庵)이 불탔을 때, 사찰(寺刹)과 정자를 짓도록 힘써 주시지 않았습니까’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목탁을 두드렸습니다.

어느 날 운동을 하고 들어와 보니 동네어른들이 가게 안에서 소주를 들면서 아내에게 ‘아줌마도 한잔 받아!’라고 하고 있었고, 집사람은 민망한 표정으로 서 있었습니다. 가게를 보고 있노라면, 아이들이 100원·500원짜리 동전을 들고 와 과자를 찾습니다. 과자가 100원짜리가 어디 있습니까? ‘옜다, 그냥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한두 번 그랬더니, 아이들이 내가 혼자 있을 때만 와요. 어느 날 꼬마들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게 들통이 났습니다. 태어나서 아내에게 그렇게 야단을 맞아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웃음)

도둑 때문에 ‘은거’ 탄로

신세계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에서 ‘티크옹기’를 팔고 있는 홍성우 전 의원. 매장은 홍성우 전 의원이 국회에 들어가면서 접었다고 한다. 홍성우 전 의원은 미쓰이물산의 해외수출분 수입까지 1회 행사에 9000여만 원이 들어가는 노인잔치에 쏟아부었다.

그의 은거(隱居)는 오래가지 못했다. 수퍼에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결혼기념으로 차고 다니던 ‘롤렉스’ 시계를 눈여겨봤던 손님이 홍 전 의원이 없는 틈을 타 한밤중에 안방을 뒤진 것이다.

“도둑이 돈이나 시계를 훔치지 못하고, 하필 아내의 주민등록증을 가져갈 게 뭡니까. 그땐 주민증에 남편의 이름이 있을 때죠. 도둑이 잡혀 조사를 받다 파출소 순경이 내 이름을 확인하고, 상황실로 보고를 했답니다. 상황실장은 비상을 걸었고, 수퍼 앞에 수십 명의 경찰과 주민들이 웅성거렸습니다. 결국 잃어버린 것이 없어 도둑의 선처를 부탁하고 마무리했지만, 신문은 ‘3선의원 홍성우, 제주도에서 수퍼마켓 운영’이라고 보도한 겁니다.”

KBS, SBS 등 방송사들이 수퍼를 찾았고,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사나흘을 숨었으나, 결국 방송에 공개됐다. 그 보도를 본 제주시민들이 오히려 그의 정착을 도왔다고 한다.

“우근민, 신구범 전 제주지사(현 플러스생활복지이사장), 신철주 북제주군수 등이 장전에 민박집을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습니다. 제주농협본부와 하귀농협 광령지점도 어려운 처지를 잘 이해해 주었습니다.”

그는 한라산 해발 600m 중턱에 ‘태양을 먹고사는 남자’라는 별난 이름의 민박집을 운영하고 있다. 대지 321평, 건평 110평의 민박, 편의점, 살림집을 갖춘 집이다. 그러나 민박집은 홍 전 의원이 기대한 것만큼 ‘매상’이 오르지 않았고, 6개월에 30만원 정도가 매상의 전부였다.

그때부터 그는 그의 표현대로 ‘돈 꿈질’을 시작했다. 8억원의 빚이 쌓이면서 민박집도 경매 위기에 처했다. 그는 “조만간 노숙자로 전락할 신세”라며 “2005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비행기표 값이 없어 가지 못했을 정도”라고 했다.

마사지 하는 3選 국회의원

―이 정도라면 친척이나 주변에 도움이라도 청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일가친척이나 지인(知人)들도 어려운 처지를 알면 피하더라고요. 오히려 어려운 분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디다. 신비의 도로에서 ‘캐나다삼촌’이란 매점을 운영하는 분이 언젠가는 적금 통장을 만들어 제게 슬며시 내밀었습니다. 민박집 근처 1200평 움막집에 사는 김할머니는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집 앞마당에 컨테이너를 놓고 살라고 하시더군요. 고사리를 끊어다 판 돈 10만원을 아내에게 쥐여준 분도 있습니다.”

홍 전 의원은 “민박을 해보니 ‘한철’ 장사일 뿐이었다”고 했다. 그는 일정한 수입이 없자 ‘노인요양원’ ‘제주흑돼지목장’ 등도 생각했다. 그러던 중 그는 요가를 지도하면서 단식원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고향 후배인 장익수(張益洙) ‘진아단식원장’을 알게 됐다. 홍 전 의원은 진아단식원 제주지원을 냈다.

“혈압체크, 장(腸)의 배설물량 측정법, 지압, 마사지, 팩, 요가 등 단식원 설립을 위한 사전교육을 받았습니다. 전원주(全元珠), 강부자(姜富子) 선배를 만나 언론홍보도 부탁했습니다. 사람이 들끓었죠. 오랜만에 활기찬 생활로 돌아가 신이 났습니다. 어느 날, 장 원장이 가르쳐준 대로 단식원 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진맥을 보고, 장을 눌러보고, 혈압을 재고…한참을 정성껏 환자를 보고 있었죠. 이 모습을 우연히 본 아내가 나가버렸습니다. 아무리 먹을 것이 없다고 해도 3선 의원씩이나 한 양반이 하고 있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단식으로 살빼기가 시류에 맞지 않아 이마저도 문을 닫았습니다.”

‘정치스승’ 孫道心 의원과의 만남

홍성우는 1941년 경기 안성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찰 출신이었던 부친(洪百基)은 “음식과 잠자리와 여자는 최고를 선택하라”며 “늘 정장을 입되 넥타이와 양말의 색깔을 일치시켜라”고 엄하게 교육했다고 한다.

그는 안성중을 거쳐 서울공고를 포기하고 부친의 권유에 따라 안성농고 임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정치기질’을 이때부터 발휘한다. 안성농고 학생위원장에 직선(直選)으로 당선되더니, 전국중고학도대장으로 뽑혔다. 안성초교 시절 ‘말더듬이’였던 그는 피나는 노력으로 대중연설을 익혀 선거에서 타후보를 압도했다는 것이었다.

“전국 시도별 학생위원장 14명 등 129명과 함께 경희대에서 열흘간 학도호국단 교육을 받았습니다. 여당인 공화당의 고 손도심(孫道心) 원내총무, 경희대 조영식(趙永植) 총장(현 경희학원 이사장), 고 성균관대 이선근(李瑄根) 총장(문교부장관 역임) 등 유력인사들이 참석했습니다. 나는 안성농고 학생회장 자격으로 70% 이상 득표로 전국 중고교 학도대장에 당선됐습니다. 이때 정치적 후견인 손도심 의원과 만났습니다.”

손도심 의원은 이후 홍성우의 ‘롤모델’이 됐다. 경기 화성 출신인 손도심(1920∼79) 의원은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시절인 1947년 고려대 이철승(李哲承) 등과 함께 전국학생연맹위원장으로서 신탁통치반대운동과 학교 내의 좌익세력제거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4·19의거 당시 현역의원으로서 <서울신문> 사장으로 있다가 신문사가 불타는 등 수난을 겪었고, 그해 5월 국회에서 제명당했다.

“손 의원은 다른 여당의원들이 정계에 복귀하거나 사업 등으로 활로를 개척한 것과는 달리, 외롭고 곤궁하게 말년을 보낸 이색적인 분입니다. 가령, 1966년 여름 한때는 고향인 화성에서 1000리나 떨어진 전남 화순의 탄광지대에 이르기까지 누더기 옷에 밀짚모자를 쓰고 샅샅이 누비며 5000권의 성경책을 팔았던 분입니다. 국회의원 시절, 이분의 행적을 연구하며 본받으려 했습니다.”

1960년 2월, 홍성우는 조영식 경희대총장을 찾아갔다. 그는 “단돈 670원을 갖고 상경할 정도로 어려우니 4년 장학금을 달라”고 떼를 썼다. 조 총장은 “학칙에는 없는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그에게 문리대 화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을 허가했다. 그의 대학생활은 ‘무모’했다. 그는 인왕산 자락에, 제비집 같은 무허가 단칸방을 얻어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판잣집이 단속반에 철거당하자, 그는 편평한 바위를 찾아 이부자리를 폈다고 한다.

“학교는 장학금으로, 잠자리는 인왕산에서 노숙으로, 식사는 생애 처음 구걸로 해결했습니다. 며칠간 굶었다가 식사를 얻어먹었는데, 그만 급하게 먹어선지 속이 울렁거려 모두 게워내고 말았습니다. 빈속에 식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때 배웠습니다.”

드라마 <데릴사위> 주연으로 시청률 78% 기록

탤런트 시절 동료들과 함께한 홍성우 전 의원. 오른쪽부터 남성훈, 이순재, 고은아, 홍성우, 허진.

대다수 연기자가 연기를 목표로 탤런트의 길을 택하지만, 홍성우는 달랐다. 그는 엉뚱하게도 탤런트를 ‘정치의 도구’로 택했다고 한다. 대학 1학년 때, 그는 60년대 최고의 배우 김진규(金振奎)를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만났다.

“이 세상에 나를 가장 빨리 알리는 길은 배우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진규, 김보애 내외분은 나를 집안으로 불러 4시간 동안 인생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나는 ‘앞으로 15년쯤 후엔 배우가 정치를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고, 김 선생은 ‘가능할 것이다, 앞으로 적극 후원하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언제 탤런트로 데뷔를 한 겁니까.

“1961년 무렵 김진규 선생 부부가 서울예술대학 자리 ‘드라마센터’의 유치진(柳致眞) 교장을 소개했습니다. 그곳에서 여석기(呂石基)·김성원(金聖源)·이순재(李順載)·오현경(吳鉉京)·김동훈(金東勳)·김혜자(金惠子)·여운계(呂運計) 등을 만났고, 그들이 주연을 할 때 저는 ‘단역배우’를 했습니다. 홍두표(洪斗杓) TBC편성국장 추천으로 탤런트 특채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한동안 특별한 배역을 맡지 못했습니다. 1973년 어느 날, 비원 앞 운현궁에 있는 TBC 3층 탤런트실에서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유호(兪湖) 선생님 오신다’고 외쳤습니다.

유호 선생은 방송작가로 천하통일을 한 분으로 김진규 선생과도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난 뛰어내려 가 유호 선생의 팔을 잡으며, ‘저를 잘 모르시겠지만, 곧 세상이 알게 될 홍성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유호 선생은 김재형(金在衡) 제작부장(용의 눈물 PD)을 불러, ‘저 깡패 누구야!’라며,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들 셋 딸린 ‘이혼남’

양택식 서울시장을 찾아 도자기 판 돈 22만원을 전달하는 홍성우 전 의원(왼쪽). 당시 서울시는 도봉구에 덕성여대 부지 19만 평 가운데 일부를 소유하고 있었고, 홍성우 전 의원은 이 땅을 노인공원으로 만들자고 제안했었다.

홍성우는 유호 선생의 배려로 일일연속극 <딸>, <세자매> 등에 출연하면서 스타로 커갔다. 홍성우는 1974년 주말극 <데릴사위>를 통해 탤런트로서 ‘천하통일’을 이뤘다. 가난한 집 출신으로 뱃심 좋고 화끈한 남자(홍성우)가 재벌집 데릴사위로 들어가 말괄량이 외동딸(안인숙·<별들의 고향> 주연·朴泳逸 전 미도파 회장 부인)의 버릇을 고치는 스토리였다.

“당시 유신독재에 신물이 나 있는 시대적 흐름과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무지막지한(?) 내 인상에 대중 선동연설을 하는 듯한 연기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시청률 78%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홍성우는 그때까지도 ‘가난’을 탈출하지 못했다. 1970년 정월 그는 이화여고를 나온 첫 부인과 이혼해 여섯 살짜리부터 두 살 터울 아들 셋을 올망졸망 거느린 ‘이혼남’이었다. 당시 탤런트가 받는 출연료는 아무리 ‘스타’라고 하더라도 생활이 제대로 안될 정도라고 했다. 그는 미아리고개를 넘어 싼 방을 찾아나섰다가 ‘순흥여인숙’에 하룻밤 250원을 주고 묵었다. 당시 라면 1개 값이 13원이었다고 한다.

“라면 6개를 사놓고, 주인집 냄비를 빌려 라면 한 개를 연탄불에 오랫동안 끓였습니다. 이른바 ‘라면 풀죽’을 막내에게 떠먹였는데 토하더라고요. 한 번은 2월 초순 밤 10시가 넘어 <세자매> 녹화를 마치고 신당동 광희국민학교로 달려가 떨고 있는 큰아이를 데리고 12시경 집에 돌아와 보니 라면냄비는 쏟아져 뒹굴었고, 소변 깡통은 뒤집혀 방 안에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신세계백화점서 옹기 판 돈으로 ‘노인잔치’ 시작

경로잔치 행사 때마다 2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렸다. 국수 국물 120드럼(1드럼당 1000그릇), 막걸리가 3t트럭으로 3대 분량이 소비됐다.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공연하는 모습.

홍성우는 탤런트 생활을 병행하며 신당동에 옹기노점상을 차려 액세서리 옹기를 판매했다. 옹기 장사 6개월 만에 유약(釉藥)의 납 유해성 논란으로 거래처인 수원의 ‘동아요업’이 부도가 났다. 그는 문제의 ‘까만 유약’을 사용하지 말고 ‘투명유약’으로 바꾸라고 원승제 사장에게 조언했다. 그는 샘플 한 차 제작을 의뢰, 신세계백화점 손영희(孫永禧) 상무(전 신세계 사장)를 찾아갔다.

“손 상무에게 ‘이 티크(teak) 옹기는 국내외에 전무한 아이템’이라며 ‘지하층 코너매장을 하나 주시면 열심히 해보겠다’고 안광(眼光)을 번쩍였습니다. ‘신세계가 직영(直營) 체제인 것을 알고 왔으니, 안 된다는 말씀은 하지 마시라’고 당돌하게 말씀드렸죠. 손 상무가 인터폰으로 김원기 식품담당 과장을 올라오라더니 ‘식품부 안쪽에 수수료 매장으로 드리라’고 하더군요. 공장도가격에 300~500%에도 물건이 없어 못 팔았습니다. ‘스톤웨어’까지 개발해 ‘홍성우 뚝배기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일본 무역회사 미쓰이물산(三井物産)을 통해 해외로 수출까지 했습니다. 돈을 포댓자루로 담아갈 정도로 벌었습니다. 이때 번 돈으로 매년 9000만원 정도 들어가는 경로잔치를 본격적으로 하게 됐습니다.”

홍성우는 양택식(梁鐸植) 서울시장을 찾아가 도자기 판매로 모은 돈을 노인공원 설립기금으로 내놓는다. 손영희 상무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박승규(朴承圭) 민정수석(한보철강 명예회장 역임)을 만나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버스와 전철 등 대중교통을 무료로 승차시켜 달라”고 건의했고, 노인경로잔치를 시작했다.

그의 ‘노인경로잔치’는 홍성우가 효도회 중앙회장이란 직함으로 1971년부터 1988년까지 매년 5월 8일 20만명(총인원 450만명)의 노인을 초청해 국수 국물만 120드럼(한 드럼 1000인분), 막걸리 3t트럭 3대분이 들어가는 규모의 잔치였고, 현재 최장기간 단일행사 부문의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그때 노인잔치에 국수를 공급하던 수원의 ‘곰표국수’는 10시간 정도 불지 않는 노인잔치용 국수를 개발해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1972년 정월 초하룻날 제사를 지낼 때였습니다. 사촌형(洪性仁)이 음복(飮福)하시던 아버지께 ‘(홍)성우가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안방에서 외치기에 세수하다 말고 가보니 화면에서 곧 사라졌더라’고 하자, 그만 그대로 졸도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나름 대단한 아들이 ‘딴따라’로 간 것도 못마땅한데, 단역(端役)이라니까 자존심이 상했던 겁니다. 아버지는 사촌형 홍성국(洪性國) 인턴(서울대병원)의 배려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뇌졸중 치료를 받았습니다. 길음시장 주변 노인들께 막걸리를 따라드리며 병실에 가셔서 아버지께 ‘아들 참 잘 뒀다’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한 게 노인경로잔치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경로잔치를 위해 구봉서(具鳳書) 선생을 비롯해 가수, 국악인, 탤런트, MC 등 많은 분이 무보수로 찬조출연해 주셨다”면서 “완쾌하신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무대 위로 모셔놓고 가수 이용복이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다정한 그림자…’로 시작하는 ‘그 얼굴에 햇살을’을 부르니, 수천 명의 인파(人波)가 환호했다”고 회고했다.

1978년 12월 탤런트 홍성우는 37세의 나이로 도봉구에서 제10대 총선에 출마했다. 그의 연예계 선후배들이 그를 위해 뛰었음은 물론이다.

“후보등록을 하러 갔는데 500만원 등록금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송해(宋海) 선생이 교통방송에서 처음으로 이 사실을 알렸고, 전 매스컴에서 떠들었습니다. 기이한 일이 벌어졌어요. 서울 전역의 남녀노소 막론하고 돼지저금통을 깨서 가져온 8700원을 시작으로 결혼식장 부조하듯 수백 미터 줄을 서 하루종일 후보등록금을 모아주었습니다.

11월 초겨울비가 부슬부슬 거리는데, 등에 애를 업은 젊은 엄마가 네모로 접은 500원짜리 비 묻은 돈을 내놓으며 ‘우리 같은 사람들의 힘이 돼 주세요’라고 카랑카랑하게 말했습니다. 그때 비에 젖은 500원짜리 지폐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의정 활동을 하며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당선 사례금’이라며 돈을 가져오는 동장(洞長)을 야구방망이로 내쫓았고, 군사보호구역 해제의 사례로 지역구민을 취직시키는 대신 제게 돈을 가져오는 L그룹 회장의 면전에 돈다발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젊은 엄마의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朴正熙, “홍 의원은 꼭 내 자식 같아!”

첫 유세는 삼양동 삼양초등학교였다. 홍성우는 5선의 신민당 고흥문(高興門) 의원(국회부의장 역임), 고시 3과 출신의 공화당 신오철(申五澈) 변호사, 박정희 대통령의 사촌동생인 무소속 박경희(朴景熙) 등 기라성 같은 후보들과 맞붙었다.

“박경희·신오철 후보에 이어 연단에 올랐습니다. ‘삼양동 십자촌에서 55원짜리 물지게를 져다 한 바가지 퍼서 막내 세수하고, 그 물로 둘째와 큰아이 세수하고, 그 물 버리지 않고 가라앉혀 걸레 빨아 쓸 때 도와줬던 여러분! 나 홍성우, 단칸방 자는 자리 불안하고, 돈 없고, 백 없는 사람 도우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라고 외치니까 청중이 ‘홍성우’를 연호했습니다.”

홍성우는 1978년 12월 13일 꿈에도 그리던 10대 국회의원 당선증을 받았다. 그는 “당선되던 날 언론매체들이 취재경쟁을 벌였지만, 무엇보다 수락산 자택 512평을 메운 말 없는 군중의 ‘무언의 축하’가 가슴에 남는다”면서 “빈민의 한에 서린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것 같아 전율했다”고 했다.

그가 당선되자 김대중(金大中) 신민당 총재고문은 예춘호(芮春浩) 의원을 보내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하자”는 말을 전했다. 홍성우 의원은 공화당을 선택했다.

그는 1979년 정월 초하루 청와대 영빈관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의 얘기다.

“박근혜(朴槿惠) 영애에게 ‘평소 뵙고 싶었습니다’라고 하자, ‘저도요’라고 답해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럼, 단둘이 만납시다’라고 해 옆에 있는 박 대통령,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 등이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그는 “10·26 총성이 울리고 난 후 박 대통령 자녀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해 신당동 본가를 찾아가 위로했다”고 했다.

“10·26 한 달 후, 신당동 본가를 찾아 ‘무슨 말로 위로를 할까’ 고민했습니다. 무시무시한 일을 당한 지 40여 일 만에 만난 큰 영애는 의외로 밝은 목소리로 시원시원했습니다. 집은 초라해 보였습니다. 권력이 사라진 신당동 본가는 부귀영화를 누리던 무리가 다칠세라 몸조심하는 바람에 개미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침착하게 차를 권하며, ‘찾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우리는 격의 없이 소리 내 웃었고, 나는 그분이 부모를 비극으로 잃은 슬픔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도록 한 시간이 넘도록 ‘푼수’처럼 떠들었죠. 큰 영애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홍 의원님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하더군요. 그 후 (나도) 박 대통령 영정(影幀)을 방에 모셔놓고 삼년상을 치렀습니다. 엄마 없이 세 아들을 키워왔던 나로서는 박 대통령 세 자녀의 아픔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홍 의원은 입당 직후 유혁인(兪赫仁) 청와대수석으로부터 “각하의 말씀이 있으니 외교구락부에서 오찬을 함께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유 수석이 ‘각하께서 홍 의원님 생활이 어렵다는 말씀을 듣고 자세히 파악해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해요. 나는 어렵더라도 ‘젖은 500원짜리 지폐’를 준 그분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게 의정활동을 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 수석은 제게 전화번호와 ‘삐삐(호출기)’ 번호를 적어주며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유 수석에게 들은 이야긴데, 대통령이 무릎을 탁 치며 ‘홍 의원, 그 친구는 꼭 내 자식 같아’라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3차례나 공식석상에서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車智澈 경호실장과의 격돌

1978년 10대 총선에서 격돌한 후보자들이 삼양초등학교에서 합동연설회를 가졌다. 고흥문 신민당 후보가 연설하는 동안 다른 후보들이 경청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사촌동생 박경희씨(무소속), 신오철 변호사(공화당), 홍성우 후보다.

홍 의원의 의정활동은 생긴 것만큼이나 저돌적이었다. 첫 국회 등원 때다. 당시 최규하(崔圭夏) 국무총리의 국회 답변 때, 야당의 황모 의원이 육두문자를 써가며 면박을 주었다. 그때 홍 의원은 분개하며, “후배들 앞에서 그게 할 짓이냐”며 따졌다.

황 의원은 “여기가 방송국 스튜디오인 줄 알아!”라며 쏘아붙였고, 홍 의원은 양팔을 허리에 대고 노려보았다. 이튿날 신문은 ‘탤런트 출신 홍성우 의원, 웃통을 벗다’로 보도했고, <동아일보>의 백인수(白寅洙) 화백은 ‘홍 의원이 선배의원을 야단치는 장면’을 희극적으로 묘사했다.

1979년 6월, 홍 의원은 선친과 의형제처럼 지냈던 서상린(徐相潾) 의원(육사 8기)과 함께 차지철 경호실장을 만난다. 서 의원은 1963년 공화당 소속으로 경기 용인-안성에서 당선돼 국회 건설-법사위원장 등을 지냈다. 그는 “당시 차 실장은 ‘큰 꿈’을 갖고 젊은 의원들을 자기 사람으로 포섭하고 있었다”고 했다.

“청와대에 가니 차 실장이 서 의원에게 ‘서 동지, 홍 의원 모시고 오느라 수고했다’고 해요. ‘이 친구 봐라, 너 오늘 혼 좀 나야겠다’고 별렀습니다. 이때 차지철이 ‘각하께서 홍 의원께 드리는 겁니다’라며 흰 봉투를 꺼내요. 뜯어 보니 100만원짜리 수표 한 장이었습니다. 정권을 잡아 나라를 끌고 가는 방법이 참 유치하다고 느껴지더군요. ‘너 오늘 맛 좀 봐라’는 생각으로 차지철 방에 걸린 5·16혁명 때 시청 앞 사진을 가리키며 ‘차 실장님, 저 사진 참 멋집니다. 저때 실제 몇 명을 갖고 혁명을 하셨습니까’라고 하니 ‘아, 500명입니다’라고 해요. ‘아, 대단하십니다. 저때는 참 멋졌습니다’고 하니, ‘지금은 멋이 없나요’라고 해요.”

홍성우 의원은 이때다 싶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많은 분이 부정부패의 핵은 경호실이라고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차 실장이 벌떡 일어서며 권총을 빼들더니 ‘너 죽고 싶으냐’라고 소리를 질러요. 내가 ‘당신은 500명 갖고 혁명했지만, 나는 4000만명을 갖고 혁명했다’고 맞받았습니다. 이때 서상린 의원이 뛰쳐나갔고, 순간 차지철은 ‘홍 의원, 미안합니다’라고 사과를 하더라고요. ‘이 친구 정치꾼 다 됐구나’라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30대에, 그것도 탤런트 출신이라 정치권에서 여러모로 주목을 받았겠습니다.

“모든 분이 친구처럼 대했습니다. 그걸 무기로 여러 곳에서 특강도 하고 토론도 하곤 했습니다.”

그는 “‘민심이 박정희 정권에 등을 돌렸다. 대한민국이 불행해지지 않는 길은 박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면서 “유혁인 정무수석 자택으로 찾아가 각하께 꼭 전해달라고 했으나,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했다.

“홍 의원도 정치 초년병이죠?”

1980년 2월 4일 이효상 국회의장(가운데)과 함께 바티칸을 방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1시간30분간 알현하는 홍성우 전 의원. 요한 바오로 2세는 “홍 의원은 탤런트도 하시고, 학생대표도 하신 경력이 저와 비슷하다”고 했고, 홍성우 전 의원은 “학창시절 연극도 하시고, 11개국어에 능통하시다고 알고 있다”고 답했다.

인터뷰는 어느덧 새벽 1시를 넘어 2시를 향하고 있었다. 홍 전 의원은 “이왕 이야기를 꺼낸 김에 끝내버립시다!”라고 기자의 반쯤 감긴 눈을 보고 말했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아프리카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1981년 9월 11일, 장세동(張世東) 경호실장 호출로 청와대 앞 안가(安家)로 갔다. 전 대통령은 안가에 먼저 도착해 홍 의원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텔레비전을 끄고 일어서며 “어서 오세요. 옆에 앉으시죠”라고 했다. 전 대통령이 “나나 홍 의원이나 정치는 초년병이죠”라며 “30대 나이에 무일푼으로 무소속 당선됐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홍 전 의원은 “그즈음 여당에선 홍성우가 ‘민정당의 조사국을 폐지하라’ ‘이철희(李哲熙)·장영자(張玲子) 부부 사건 당사자들을 처형하라’ ‘대통령 직선제를 즉각 실시하라’며 직격탄을 날렸다”고 했다.

“홍성우를 ‘공적1호’로 지목하는 보고서가 올라와도 믿지 않고 나를 직접 만나 확인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평소 대통령을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들을 정리한 노트를 펴들고 ‘평소 생각해 두었던 정책들을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라고 하자, 전 대통령은 펜을 들고 메모할 준비를 했어요. ‘아, 이 양반 봐라!’ 나는 그때 그분이 ‘사람을 소홀히 하지 않는 분’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1984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 국방성과 하와이 미군기지를 둘러보는 홍성우 전 의원. 하와이 태평양 7함대 장교들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홍 전 의원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선제로 다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원집정부제로 가는 것이 쿠데타를 막는 길이다, 남극·북극에 자원확보를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라’는 등 11개항을 건의했다”고 했다.

홍성우 의원은 얼마 후 전두환 대통령 내외와 청와대에서 만찬 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왜 그때 세 사람만의 만찬이 마련됐는지 지금도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전 대통령은 “홍 의원, 결혼하셔야겠소?”라고 뜬금없이 말했다. 홍 의원은 직감적으로 ‘의정부 러브스토리’를 보고받은 것으로 판단했다.

“‘공사다망하신 각하께 누가 그런 일까지 보고했습니까. 보안사령관인가요. 내무장관입니까’라고 했습니다. 당시 청와대 금기 품목이었던 ‘롤렉스’ 손목시계를 차고, 양담배 ‘모아’를 권하며 ‘그 국산담배 그만 태우시고 이 담배 좀 태워보시라’고 했습니다. 일종의 반항적인 태도였지요. 전 대통령은 ‘그래, 맞아!’라며 서로 약주를 주고받았습니다. 인간적으로 호쾌한 분이에요. 그때 이순자(李順子) 여사가 내 곁으로 와서 술을 따라주려 했습니다. 그러자 전 대통령은 ‘여보, 홍 의원 가까이 가지 말아요!’라고 말해 폭소가 터졌죠. 영부인은 ‘홍 의원님, 아직 쉰 살이 안되셨죠? 결혼하실 생각 없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친인척 가운데 조카딸 한 사람을 내게 중매하려고 그러신 것 같았습니다.”

홍 전 의원은 “만찬장에서 만난 대통령은 친형(親兄)처럼 소탈했고, 저렇게 인간적인 분이 어떻게 ‘무시무시한 역사’를 만든 사람일까 의아했다”면서 “백담사를 찾아 인사를 했고, 제주 스카이호텔에서 영부인 회갑모임을 할 때, 가족모임이라 화분으로 아쉬움을 달랬다”고 했다.

盧泰愚 대통령 후보와 ‘부여사건’

한라산이 바라보이는 해발 600m에 위치한 민박집 안내판에 선 홍성우 전 의원.

1987년 태풍 ‘셀마’는 엄청난 위력으로 한반도를 강타했다. 전국이 물난리를 겪었다. 홍성우 의원은 특별열차편으로 노태우(盧泰愚) 민정당 총재 겸 대통령후보와 함께 부여(扶餘) 수해지구를 방문했다. 홍 의원은 민정당 재해대책위원장으로 맨 앞자리에 앉았다.

노 후보는 “수해 참 큰 걱정입니다. 홍 의원은 걱정이 생길 때 어떻게 해결하십니까”라고 물었다. 홍 의원은 “저는 궁둥이 큰 여자만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자, 노 후보는 박장대소(拍掌大笑)하며, “미국 육사 유학 시절, 전체 생도가 남성 심벌에 젖은 타월 걸기 내기를 했고, 큰 타월 3장을 걸어 우승한 적이 있다”고 했다.

뒷자리의 당 간부들은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 앞자리를 기웃거렸다. 홍 의원은 성난 민심을 어떻게 달랠까 궁리하는 노태우 후보에게 “노 후보 스타일대로 편안하게 하시는 게 개성이 있고 좋다”고 하자, 노 후보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현장에 도착하니 술 취한 이재민 400여 명이 손에 농기구를 들고 노 후보 쪽으로 몰려왔다.

홍 의원은 노 후보에게 “여기서 ‘칼침’이 들어와도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나라가 망한다”면서 “꼼짝 말고 당당하게 계시라”며 노 후보를 학교 운동장 연단으로 올렸다. 그는 곡괭이를 들고 있는 노인 하나를 잡고 “어르신, 앉으셔야 한다. 노 후보는 여러분을 도우러 왔다”면서 현장을 정리했다. 당 간부들은 모두 사라지고 경희대 음대 김봉임(金鳳壬) 교수(성악)와 홍 의원만 남았다.

정문에선 전경 수백 명과 수십 대의 트랙터가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홍 의원은 마이크로 방송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온 홍성우입니다. 어르신들 이쪽 운동장으로 모시겠습니다. 전경과 충돌하던 시위대 약 3000여 명이 모두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노태우 후보의 연설이 시작됐다. ‘서둘러 완전복구와 보상이 이뤄져, 누렇게 익은 벼를 타작해 송편 만들어 차례상에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감동적 연설을 했습니다. 대표자 21명을 뽑아 수습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방문을 마치고 일행은 덕산온천으로 향했다. 지역구 최창규(崔昌圭) 의원이 양주를 들고 나타났다. 노태우 후보가 “자, 기분 좋은 분 받으시라”며 홍 의원에게 한잔을 권했다. 한잔을 단숨에 들이켠 홍 의원은 “야, 개 ××들아, 한잔 처먹어!”라고 소리쳤다. 당 간부들은 머쓱했는지 슬슬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92년 총선에 국민당으로 출마해 정치적 재기를 노렸죠.

“정주영(鄭周永) 회장을 나와 똑같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할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만나고 보니 실망스러웠습니다.”

―왜 국민당으로 갔습니까.

“김종인(金鍾仁) 청와대 경제수석이 알선해 노 대통령과 만날 약속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정주영 회장을 만나는 바람에 김 수석의 정성이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당시 경망스러움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내 생활이 어려운 것을 알고 500만원을 내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주는 분입니다.”

홍 전 의원은 “노재봉(盧在鳳) 비서실장을 임명하기 전 절 비서실장으로 영입하려 한다는 소식을 노 대통령 측근인 남모씨로부터 들었었다”면서 “대한민국이 직선제로 가는 과정에서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을 뿐, 내 임무가 끝났기 때문에 비서실장 거론 사실을 알았지만 고사했다”고 했다.

서재엔 빛바랜 국회의원 신분증이…

다음 날 아침 ‘모이세해장국’에서 속을 풀며,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산 123-1번지의 민박집 ‘태양을 먹고사는 남자(011-9661-5266)’로 갔다. 고개를 들면 한라산 정상이 눈앞에 들어오는 요지였다.

‘탤런트수첩’과 ‘국회수첩’, 잡지 <경제풍월> 등이 서재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가 50대 초반 정계 은퇴 무렵에 찍었다는 대형사진이 그가 한때 ‘톱탤런트’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먼지 앉은 국회의원 당선패, 빛바랜 국회의원 신분증도 오늘의 처지를 생각하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집 안에 컴퓨터가 보이질 않아 물었더니 “전화설치를 하려면 2000만원이 들어 포기했다”면서 “손자가 인터넷으로 공부를 못해 PC방을 전전한다”고 했다. 그의 마지막 꿈은 조그마한 자선재단을 하나 만들어 못다한 ‘노인잔치’의 꿈을 이어가는 것이다.

기자가 “처량한 자서전을 보면 독자들이 ‘자신의 먹을거리도 해결 못하면서 오지랖 넓게 무슨 남 걱정이냐’고 할지 모른다”고 하자, “조금 있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외칠 힘조차 사라질지 모른다는 초조감이 든다”며 웃었다.⊙

<취재지원=咸承玟月刊朝鮮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