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총독부 農商과장을 지낸 崔夏永이 1945년 12월 申翼熙 선생의 지시로 행정연구회 만들어
두 차례 헌법초안 작성
⊙ “행정연구회가 만든 헌법초안이 ‘일제 관료가 만든 헌법’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위해 유진오 선생을
통해 세상에 모습 드러내”
⊙ 행정연구회, 국회법ㆍ정부조직법ㆍ토지개혁법 초안도 만들어
두 차례 헌법초안 작성
⊙ “행정연구회가 만든 헌법초안이 ‘일제 관료가 만든 헌법’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위해 유진오 선생을
통해 세상에 모습 드러내”
⊙ 행정연구회, 국회법ㆍ정부조직법ㆍ토지개혁법 초안도 만들어
-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제1과제는 헌법 제정이었다.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최고령자인 이승만 박사가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건국(建國) 60주년(2008년)과 6ㆍ25전쟁 60주년에 즈음하여 우리 사회에 ‘대한민국 현대사의 재(再)인식’ 바람이 불고 있다. 대한민국의 탄생과 시련, 성장과 미래를 발전적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출발은 제헌헌법에서 시작됐다. 제헌헌법은 왕조체제와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민주공화국으로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시발점이었다. 1948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우리 사회의 헌법적 지식ㆍ경험에 비춰볼 때, 제헌헌법의 탄생은 기적(奇蹟)에 가까웠다. ‘역사는 쟁취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처럼 당시 우리는 제헌헌법을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선생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헌법학계에 제헌헌법의 탄생을 두고 색다른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8월 출간된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이라는 책에서 강경근(姜京根) 숭실대 법대 교수는 이렇게 썼다.
<일본법 교육을 받은 유진오 선생이 1948년 헌법제정 때 전문위원으로 헌법제정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분을 헌법제정의 아버지로 하는 것은 적절치 아니하다. 제헌헌법은 세칭 ‘유진오 안(또는 행정연구회ㆍ유진오 합의안)’에 기초한 것이고, ‘유진오 안’은 실제로는 한민당(韓民黨)을 중심으로 하는 의회 장악파의 헌법안이었다.>
유진오 선생이 헌법 초안자가 아니라는 뜻인지, 또 글에서 언급된 ‘행정연구회’는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기자는 제헌헌법의 초안(草案)은 누가 만들었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당시 상황을 추적해 봤다.
국가기록원, ‘유진오의 헌법초안’이 제헌헌법 原案
1945년 8월 15일 광복한 조선은 혼돈된 공간과 한정된 시간만 주어졌을 뿐 독립국가는 되지 못했다. 헌법을 만들어 국가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혼란의 시기를 거듭하던 중 1948년 5월 UN 관리하에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5ㆍ10 총선거가 실시됐다. 유권자 95.5%가 투표해 임기 2년의 국회의원 198명이 선출됐다. 1948년 5월 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 부의장 신익희(申翼熙)ㆍ김동원(金東元)을 선출하고 곧바로 헌법제정에 들어갔다. 6월 1일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기초위원 30인ㆍ전문위원 10인)가 구성돼 헌법초안을 만든 후 6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내각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초안은 대통령 중심제로 변경돼 7월 12일 국회를 통과했다(공포 7월 17일). 그렇다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헌법초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대한민국의 공식 기록기관인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제헌헌법’ 항목을 찾아봤다.
<제헌국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조직하여 곧바로 헌법제정 작업에 착수하였다. 1948년 6월 3일부터 ‘유진오의 헌법초안’을 원안(原案)으로, 권승렬의 초안을 참고안으로 하여 토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헌법초안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미군정당국이 대통령제를 주장함에 따라 대통령제(임기 4년, 1회 중임 가능)와 단원제국회 및 국무총리제를 채택한 제헌헌법이 완성되어 7월 17일 공포되었다.>
우리 정부는 ‘유진오의 헌법초안’이 제헌헌법의 원안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유진오 선생을 제헌헌법의 결정적 공로자, ‘헌법의 아버지’로 부를 만하다. 국가기록원의 ‘제헌헌법’ 항목에는 기자가 궁금해하는 ‘행정연구회’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기자는 취재과정에서 1958년 국회사무처가 발행한 ‘국회보 20호’에 헌법제정에 직접 관여한 인사의 ‘회고담’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회보는 1958년 제헌(制憲) 10주년을 맞아 ‘헌법 기초 당시의 회고담’이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유진오 선생을 비롯해 장경근(張暻根) 자유당 국회의원, 최하영(崔夏永) 심계원장(오늘날의 감사원장), 강명옥(康明玉) 법제실장과의 대화록을 실은 것이다. 이들은 1945년 8월 광복 직후부터 1948년 7월 17일 건국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헌법초안 작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이들은 실제로 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누구인지, 헌법초안이 시기별로 어떻게 변경됐는지 등을 소상히 증언했다. 그런데 유진오 선생의 주장과 최하영ㆍ장경근의 주장이 서로 달랐다. 유진오 선생은 자신이 초안을 작성했다고 증언했지만, 최하영ㆍ장경근은 그 초안은 실제로 일제 관료를 지낸 자신들(행정연구회)이 만든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하영ㆍ장경근은 유진오 선생이 ‘제헌헌법 초안자’로 알려지게 된 속사정까지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제헌헌법의 실제 초안을 만든 행정연구회의 구체적 활동상을 증언했다.
“내가 낸 안 90% 이상이 채택됐다”
먼저 유진오 선생의 증언 내용을 살펴보자.
“선거(1948년 5ㆍ10 총선거)가 있기 전에 김성수(金性洙) 한민당 당수가 찾아와서 나더러 ‘초안을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순전히 혼자 앉아서 초안을 했어요. 그 무렵에 입법의원 법무사로 있던 윤길중(尹吉重)씨와 황동준(黃東駿)씨가 내가 초안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오곤 했어요(윤길중은 1946년 행정연구회 1단계 헌법초안에 참여했기 때문에 행정연구회 초안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었음-편집자注). 청량리 우리 집에서 그 두 분의 협조를 얻어 검토를 하고 더러 고치기도, 빼기도, 넣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그때(1948년 5월경-편집자注)에 해공(海公ㆍ신익희) 선생이 날더러 만나자고 사람을 보냈어요. 낙원동 어디로 가니까 거기에 최하영씨도 있고 또 누가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해공 선생 말씀이 ‘사실은 그전부터 동지들과 헌법초안을 준비하던 것이 있는데 당신이 초안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암만해도 당신한테 부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라고 했어요.”
해공은 유진오 선생에게 헌법초안 하나를 줬다. 이 초안은 최하영이 결성한 행정연구회가 1946년 1월 10일부터 3월 1일까지 작업해 완성한 ‘행정연구회 1단계 헌법초안’이었다. 최하영은 동경(東京)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다가 광복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당시 서울 명륜동에 있는 장인 조인섭(趙寅燮ㆍ당시 서울 종로에서 ‘됴고약’으로 유명하던 천일제약 설립자)의 저택에 기거하고 있었다.
유진오 선생은 1948년 5월 최하영이 사는 명륜동 저택을 찾았다. 당시 명륜동 저택에는 2년 전인 1946년, 1단계 헌법초안을 만들었던 행정연구회 위원들이 2단계 헌법초안을 심의하고 있었다. 유진오 선생의 증언이다.
“그 후로는 최하영씨 댁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기초한 헌법초안을 다시 여러 사람이 처음부터 토의하기 시작했는데 (중략) 그때 그곳에는 해공 선생이 가끔 들렀어요. 최하영씨 댁에서 토의에 참가한 분은 윤길중, 황동준, 차윤홍(車潤弘), 김용근(金龍根), 노용호(盧龍鎬), 장경근 등이었습니다. (중략) 1948년 6월 초에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전문위원 10명을 임명했는데 대부분 (명륜동) 토의에 참가하던 사람입니다.”
유진오 선생은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내가 낸 안이 거의 90% 이상 그대로 채택됐다”고 증언했다.
“헌법 전문 초안 내가 썼다”
당시 제헌국회는 본회의로 넘어온 헌법안을 두고 이승만, 신익희, 김성수, 서상일(徐相日) 그리고 임시정부 세력 등이 국가 권력구조를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유진오 선생의 <헌법기초회고록>에 의하면, 이승만과 신익희가 주도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승만계 55석), 김성수(한민당 당수)와 서상일(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장)이 이끈 한민당 80석, 임시정부 관련 무소속 인사와 구 대동청년단 인사(임정계 57석) 등이 헌법제정에 참여해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다수당인 한민당은 ‘유진오 안’을 통해 의원내각제 형태의 권력구조를 강력히 주장했다. 한민당 소속이었던 헌법기초위원장 등은 ‘유진오 안’을 원안으로 삼아 6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유진오 선생은 국회 본회의에 계류 중인 ‘헌법안’을 일부 수정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유진오 선생은 국회보 20호 회고담 말미에 “헌법 전문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직접 유 선생님께서 담당하셔서 초안을 하셨는가요”라는 질문을 받고 “예, 내가 쓴 것이지요. 조금 어구를 고친 것과 한두 마디 첨가된 것이 있고 그렇지요”라고 답했다.
유진오 선생의 말을 종합하면, 1948년 5월경 신익희 선생의 부탁으로 일제 관료 출신 최하영 등과 함께 헌법초안을 만들었는데 자신의 것이 대부분이었고 이것이 국회에서 통과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회보 20호에 실린 장경근 의원의 증언은 다르다. 1946년 행정연구회가 만든 1단계 헌법초안을 ‘기본’으로 하고 유진오 선생의 사안(私案)을 ‘참고’로 해서 행정연구회 2단계 헌법초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해방되었을 때 우리는 곧 독립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처럼) 일제시대에 고관을 지낸 사람들은 물러나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헌법학자가 없어 법률공부를 한 우리가 헌법초안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행정연구회를 만들었어요. 최하영씨 장인댁에서 작업했는데 그전에 우리 집에서 한두 차례 했습니다. 1단계 헌법기초안이 1946년 3월 완성되었는데 주로 바이마르 헌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든 것을 세상에서는 유진오 案이라 그러지요”
장경근 의원은 “1948년 5ㆍ10 선거 후 제헌국회가 생기면서 우리는 다시 모였다”고 했다. 그의 증언이다.
“1948년 5월 행정연구회 헌법분과위원들이 다시 최하영씨 댁에서 모였어요. 이전에 만든 것을 끄집어내 다시 만들어 제공하자고 해서 자동적으로 모였어요. 그때에 처음 유진오씨가 합작(合作)한 거 같아요. 1948년 5월 31일 오전 두 시에 헌법초안(행정연구회의 2단계 헌법초안)이 완료됐습니다. 우리는 1단계에서 만든 헌법초안을 ‘한국헌법’이라고 했어요. 대한민국이라고 하지 않고…. 대한민국은 (나중에) 국회에서 쓰게 되었습니다. 1단계에서 만든 것이 기준이 되고 그다음에 유진오씨가 개인 안을 하나 가지고 왔는데 참고로 했어요. 2단계에서 유진오씨는 참가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아홉입니다. 다들 열심히 했지만 중요한 것을 많이 한 사람이 최하영씨하고 나하고 유진오씨입니다.”
계속 되는 장경근의 증언이다. 그는 헌법 전문을 자신이 썼다고 주장했다.
“전문은 내가 했는데 3ㆍ1선언서도 보고 각국 헌법의 전문들을 참고해서 만들었지요(유진오 선생의 증언과 다름. 최하영은 장경근이 전문을 혼자 작성했고 둘도 없는 名文이라 一言一句도 고치지 않았다고 국회보 회고담에서 증언함-편집자注). 이후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거기 위원장이 한민당의 서상일씨입니다. 당시에 헌법기초위원회 소속의 전문위원이 있었는데 유진오씨하고 윤길중씨, 임문환(任文桓)씨 등이 있었지요. (논의할) 원안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든 것을 (원안으로 삼았지요), 세상에서는 유진오씨 안이라고 그러지요. 유진오씨가 우리가 만든 것을 가지고 했지요. 국회 헌법기초위원회는 우리가 ‘한국’이라고 했던 것을 ‘대한민국’이라고 고쳤지요.”
장경근은 유진오 선생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행정연구회가 만든) 1단계 초안에서는 국민의 기본권리의무를 뒤로 밀었는데 (중략) 유진오씨가 자꾸 제2장으로 앞세우자 그래서 우리가 양보했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헌법위원회 문제입니다. 우리가 만든 초안에는 위헌재판권을 대법원에 주기로 했습니다. 유진오씨가 참가한 때부터 헌법위원회를 만들자고 그래요. 그래서 토론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내 의견대로 위헌법률 판단은 대법원에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장경근 의원의 증언을 요약하면, 행정연구회의 1단계 초안에다 유진오 선생의 사안(私案)을 ‘참고’해서 2단계 헌법초안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유진오 안’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유진오 안’은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의 원안이 됐다.
“심의위원들은 徹夜를 강행했지만 유진오씨는 집에 가”
행정연구회를 주도한 최하영 당시 심계원장의 증언은 유진오 선생의 증언과 확연히 다르다. 다음은 국회보 회고담의 일부다.
―국회보 편집자: 헌법 기초 당시 여러 가지 사정은 유진오 선생님이 쓰신 글을 통해 많이 읽었습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귀중한 자료가 될 만한 것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고 또 그냥 그대로 덮어두려고 했는데 요새 와서 불쑥불쑥 단편적으로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더구먼요.”
―순차적으로 심의위원이 되신 분들에게 그때의 감상(感想)을 전부 들을 예정입니다.
“헌법초안의 기초 및 심의는 동지 몇 사람이 자발적으로 한 것입니다. 그 동기부터 이야기를 하지요. 우리가 왜정(倭政) 때 관료를 해서 해방 후로는 근신(謹愼)하고 있었는데 그 과오에 대해 다소라도 속죄나 될까 하는 동기에서 그때 서로 친한 동지들이 모였어요. 독립국가로서 혹은 신생국가로서 필요한 법적 또는 행정적 자료를 모집하고 정비해 국가로부터 요청이 있으면 제공해 보겠다는 목적이었지요. 그것을 위한 한 그룹(행정연구회를 의미)이 있었어요.(중략)
우리가 한 일은 두 단계가 있었는데 제1단계 헌법초안은 1946년 1월 10일부터 3월 1일까지 작업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학식 부족으로 남부끄럽지만 1946년 1월 말까지 기초안을 만들었어요. 이 초안을 가지고 2월 꼬박 한 달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제1단계 최종안을 작성했습니다.”
―상당히 지루했겠습니다.
“최종안이 3ㆍ1절 기념일 오후 8시에 끝났습니다. 그때 종로 보신각종을 정오에 타종했는데 종소리를 라디오를 통해 들으면서 헌법초안을 만든다는 축배를 올리고, 심의에 참가한 분들이 감개무량해했지요. (중략) 제2단계라는 것은 제1단계의 헌법초안 심의를 끝낸 지 2년2개월 후인 1948년 5월 14일부터 5월 31일 오전 2시까지 18일간에 걸쳐 만들어진 것입니다. 1단계에서 작성한 헌법안을 재검토한 것입니다. 그날 5월 31일은 우리나라의 제헌국회 개회일이었습니다. 심의위원들은 18일간 외출도 못하고 속독하여 헌법심의를 철야(徹夜) 강행했습니다. 제헌국회 개회일까지 완성하기 위해 밤참을 먹어가면서 했습니다.”
최하영은 “유진오 선생은 행정연구회의 2단계 작업부터 참여했다”고 말했다.
“제1단계의 헌법초안심의 때는 장경근ㆍ이상기ㆍ강명옥ㆍ윤길중ㆍ박근영ㆍ김용근씨 그리고 최하영 이렇게 있었습니다. 2단계의 헌법기초심의 때에는 장경근ㆍ이상기ㆍ노용호ㆍ차윤홍ㆍ김용근ㆍ윤길중ㆍ황동준ㆍ유진오씨 그리고 최하영 이렇게 있었습니다. 1ㆍ2단계 심의를 한 장소는 명륜동 소생(小生)의 우거(寓居ㆍ임시로 머무는 집)에서 했는데 1단계 심의 때는 장경근씨 댁에서도 철야를 해가면서 심의한 일이 있었죠.”
최하영의 증언에 따르면, 심의하는 동안 유진오 안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 전부가 최하영의 집에서 숙식하며 함께했지만, 유진오 선생만은 청량리 자신의 집에 가서 자고 아침에 나타나곤 했다고 한다. 유진오 선생은 약 일주일 후부터 그날 심의될 만한 분량의 조항을 종이에 써 왔으며 유진오 개인 안의 전문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2단계 헌법초안에 유진오 선생의 의견이 반영된 것은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꾼 것, 국민의 권리의무 조항을 국가 기본권력 구조 앞에 가져다 놓은 것 정도라고 한다.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꾸고 조문 순서 바꾼 게 전부”
유진오 선생이 신익희 선생의 부탁을 받고 행정연구회 헌법초안 작업에 참여하게 된 구체적인 배경에 대해 최하영은 이렇게 증언했다.
“1단계 헌법초안의 기초자들은 잘했든 못했든 왜정 때 관리를 지낸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기초하고 심의한 것이라 떠드는 것은 자숙근신(自肅謹愼)한다는 입장에서 좀 꺼렸거든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혹평(酷評)을 안 받고, 헌법전문가는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법률이라도 강의한 경험을 가진 인물의 이름을 빌려 내보내자고 해서 결국 유진오씨를 초청했고, 이분의 명의로 하자고 해서 제2단계의 헌법심의 멤버에 가입시킨 것입니다. 심의 중간에 가서 유진오씨가 자기 사안(私案)이라고 하는 것을 급히 내보인 일이 있었는데 재심의 단계가 벌써 중간단계를 지났고 그 안이 불충불비(不充不備)한 점이 많아 헌법초안 재심의에는 참고하지 않기로 하였지요.”
당시 유진오와 최하영ㆍ장경근 등은 서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서로를 보는 눈이 달랐다고 한다. 유진오는 최하영 등을 ‘일제 관료 그룹’으로 보는 반면, 최하영 등은 유진오를 헌법학자라기보다는 ‘문사(文士ㆍ글쟁이)로 봤다는 것이다.
국회보 회고담에 나타난 최하영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제1단계 초안은 소위 문어체(文語體)로 돼 있었는데 2단계 때 구어체로 뜯어 고쳤고 조문 나열 체제를 전과 달리했습니다. 유진오씨가 조문 순서를 고집하였는데 그게 유진오씨의 특별한 창업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헌법 제2장에 국민의 권리의무를 규정하게 된 것이죠. 그 외에는 1단계 헌법초안과 2단계 헌법초안 사이에 근본적으로 변경된 것은 없습니다. 사실상 헌법을 기초하고 심의하신 여러분은 70일간 고생하였지만 유진오씨 외에는 오늘날까지 자진하여 말하지도 않았고 또 이름 내기를 꺼린 결과, 결국 세칭 ‘유진오 안’으로 변해버린 모양입니다. 결국 우리가 작성한 초안이 원안 그대로 제헌국회 본회의에 상정하게 되었지요.”
최하영은 “국회 헌법기초위원회가 전문위원회를 구성할 때 헌법초안을 사실상 기초한 우리(최하영이 조직한 행정연구회 사람들)는 유진오씨 외에는 전부 오밋(omitㆍ배제하다)당했다”며 “그 당시 전문위원이 된 인사들의 면모를 보면 대개 한민당계의 인사들이었다. 그 당시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인 서상일 의원은 한민당 소속이었다”고 밝혔다.
최하영은 “헌법초안뿐만 아니라 국회법, 정부조직법, 토지개혁법 등도 행정연구회가 초안을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국회보 편집자와 최하영 당시 심계원장의 대화록 마지막 부분이다.
―국회보 편집자: 저희가 책에서 보는 것은 윤길중씨 이름만 나오지 최하영 이름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요.
“전후 1ㆍ2단계에 걸친 헌법초안 심의에 참가한 인사들의 이름을 모두 말했으니 그분들에게 물어보시면 진상이 명확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기초하고 심의, 작성하여 제헌국회에 제공한 것은 헌법초안뿐이 아닙니다.”
―그럼 다른 것도….
“국가로서 출발할 때 최소한도로 필요한 법률은, 즉 헌법, 국회법, 정부조직법인데 이상 3개 법률초안을 한꺼번에 모두 1948년 5월 31일 오전 2시에 작성, 완료했지요. 그래서 국회법 초안은 제헌국회 국회법기초위원회에, 정부조직법 초안은 정부조직법기초위원회에 제공되어 양(兩) 위원회에서는 우리 초안을 거의 원안 그대로 형식적 심의만 하고 제헌국회 본회의에 상정시켰지요.”
―지금 제일 기억에 남는 특별한 추억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로서는 분에 넘치는 일을 했지요. 제1단계의 심의가 끝난 것이 해방 후 최초의 3ㆍ1절 기념일(1946년 3월 1일)이었다는 것과 제2단계의 심의가 제헌국회 개회일인 1948년 5월 31일 오전 2시에 끝났을 때 감개무량했지요. 그리고 왜정 때 관리를 했다는 과거의 과오(過誤)에 대한 속죄(贖罪)의 하나로서 신(神)이 용납하여 주실 수 있을까 하고 눈물을 흘렸지요.”
私費로 행정연구회의 사무비ㆍ유지비 충당
최하영 전 심계원장은 1960년 4ㆍ19 직후 부정선거 연루자로 재판받다가 이듬해 5ㆍ16이 터지면서 풀려난다. 최하영은 1968년 <월간중앙>에 ‘정무총감 한인과장을 호출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 농상(農商)과장을 하면서 광복을 맞았을 당시의 상황을 적었다. 그는 글의 말미에 “행정연구회는 해공 신익희 선생의 지시로 처음 만들었다”고 했다. 글의 한 대목이다.
“1945년 12월 14일 새벽 6시에 별안간 전화가 걸려왔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수화기를 들었다. ‘최하영씨 댁입니까’ ‘예, 어디십니까’ ‘임시정부 비밀연락소요. 오전 10시에 비밀연락소로 와주시오’ 나는 잠이 후다닥 깨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일정 때의 관리는 친일파라고 했고,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이제 당하는구나’하고 느꼈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11살 난 장남과 9살 된 차남과 마지막 아침 겸상을 하고 집을 나섰다. (중략) 10시 정각에 운니동 임시정부 비밀연락소에 갔다. 노인이 나와서 ‘나는 임시정부 내무부차관 강태동(姜太東)이라는 사람이오’라고 소개하더니 ‘임시정부를 위해서 일해 주시오’라고 했다. 나는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친일파이고 이 사회에서 매장된 몸이므로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중략) 이튿날 오전 10시 다시 그곳에 불려갔다. 얼굴이 대춧빛같이 불그스레한 백발 노인이 ‘내가 소위 임시정부 내무부장관 신익희라는 사람이오. 알아두길 바라네’라고 하더니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앞으로 시정(施政)할 수 있도록 입법, 사법, 행정 각 분야에 있어 조사와 시책을, 고등문관 시험을 합격한 자들을 모아 급속히 작성해 주기 바라네. 이건 우리가 급해서 하는 것이지 자네들에게 특별한 친근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사무적인 일일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해공의 부탁을 몇 차례 거절한 최하영은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틀 후 12월 17일, 서울 사직공원 앞의 한 야전피복공장 건물 안에서 ‘행정연구회’의 첫 모임을 소집했다. 약 50여 명의 고등문관 출신이 모였다. 행정연구회는 임시정부 내무부의 임시조직이 됐다. 행정연구회의 목적은 정부가 수립되면 입법ㆍ사법ㆍ행정 분야에서 아무런 차질이 없도록 시책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행정연구회는 1945년 12월 17일 발족돼 1948년 2월까지 존속됐다.
최하영은 사비(私費)를 털어 행정연구회의 사무비, 유지비에 충당했다. 행정연구회의 헌법 기초자들은 1948년 5월 유진오 선생을 참여시켜 2차 헌법초안을 만들었다. 최하영은 당시 신익희 선생에게 “이 초안은 일제시대의 공무원 출신들이 만들었다고 소문이 나면 난관에 부딪힐 것이니 우리 이름으로 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유진오 안’으로 변한 행정연구회의 헌법초안은 마침내 제헌헌법의 모태가 됐다.
헌법초안 탄생의 비밀은 1958년 발간된 국회보 20호에서 일부 확인됐지만, 그 이후 사정은 바뀌지 않았다. 행정연구회 소속 헌법초안 기초자들은 일제 관료 출신이라는 ‘일생 최대의 약점’ 때문에 자신들의 공적(功績)을 적극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1970년대 당시 한 중앙일간지가 ‘비화 제1공화국-헌법제정에서 조각까지’를 기획ㆍ보도했지만 역시 행정연구회의 역할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행정연구회 소속 멤버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느냐는 그대로 묻혔다.⊙
최홍건 전 산업자원부 차관이 말하는 나의 아버지 최하영
“제헌헌법 초안 만들면서 日帝관료 중압감서 벗어나”
정리 :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hanal@chosun.com〉
아버지(崔夏永)는 1907년 경기도 이천지역 부농(富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崔文贊)는 2700석을 생산할 정도로 대(大)지주였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5남3녀를 뒀는데 아버지는 둘째였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이천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경기중학교(당시 경성고보)에 진학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일본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며 추천서를 써주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공부를 잘해 동경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했다. 동경제대 법학과는 일본에서도 최고의 수재(秀才)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1933년 고등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석으로 밀려났다. 같은 해 큰아버지(崔周永)도 동북(東北)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큰아버지는 담양군수로 발령난 후 해남군수, 전남도청 국장 등을 역임했는데 술을 너무 좋아해 1943년 서른일곱 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고시 성적이 뛰어나 일본 내무성으로 발령났다. 조선인은 아무리 똑똑해도 일본 근무를 시키지 않았다. 성적 우수자의 경우 조선총독부에 가끔 발령나는 경우가 있었다. 아버지의 내무성 발령은 파격적이고 이례적이었다. 아버지는 1937년 무렵 조선총독부로 발령받아 귀국했다. 13대(代) 국무총리를 지낸 신현확(申鉉碻) 총리가 1944년 총독부로 발령받아 아버지 밑에서 일을 했다.
행정연구회 헌법기초 위원들 뒷바라지한 어머니
아버지는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뒀는데 평소 우리에게 “일제하에서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에게 멸시를 받지 않는 길은 그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길밖에 없다”며 “공부를 잘하는 것이 극일(克日)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했다. 독립운동을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공부를 통해 일본을 이기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총독부 조사과(통계청)에서 국세조사업무도 하고, 농상과장, 관방과장을 지냈다. 아버지의 이력을 볼 때 통상적인 관료였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민족을 탄압한 분이 아니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아버지는 혹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가족을 데리고 관사를 나와 명륜동에 있는 처가, 즉 나의 외가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의 장인이자 나의 외할아버지(趙寅燮)는 요즘으로 치면 재벌 기업가였다. 외할아버지는 천일제약이라는 제약회사를 운영했다. 그곳에서 만든 대표적인 상품이 ‘됴고약(됴는 趙의 옛발음)’인데, 이 고약으로 외할아버지는 큰 돈을 벌었다. 외할아버지는 고약을 중국과 동남아까지 수출했다. 됴고약은 1960년대 이명래 고약이 나오기까지 우리나라 고약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외가는 우리나라 제헌헌법의 초안이 탄생한 곳이다. 신익희 선생의 지시를 받은 아버지는 1945년 12월 행정연구회를 만들었다.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고시에 합격해 관료생활을 한 행정 전문가이자 테크노크라트였다. 인재풀이 많지 않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셈이다.
행정연구회 위원들은 사무실이 없어 외가댁을 사무실로 쓰게 된 것이다. 임시과도정부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자료수집 비용과 활동비는 모두 외할아버지가 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남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무척 싫어했는데 외할아버지께 “돈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아주 곤혹스러웠다”고 훗날 말했다.
30~40대의 행정연구회 위원들은 밤낮없이 일했다고 한다. 수집한 자료를 놓고 밤을 새며 토론했는데 아버지는 밤새 토론한 내용을 연필로 직접 정리했다. 어머니(趙英子)는 그분들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고 생전에 말했다. 어머니는 “한겨울이라 집 안에 있는 비싼 모직담요를 모두 거둬 그분들에게 드렸는데 얼마 안 가 담뱃불에 구멍이 숭숭 나 버린 게 절반 이상이었다”고 했다. 모직담요는 일반 서민들 집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고급이불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당시 위원들은 일본에서 공부를 한 분들이라 대륙법에 익숙해 있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독일 바이마르헌법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다.
제헌헌법 기초자료 6ㆍ25 때 소실
행정연구회 위원들은 두 차례 명륜동 집에 와서 일했는데 그때 제헌헌법 초안자료와 기타 건국을 위해 준비했던 각종 행정적인 업무자료는 작업이 끝난 후 이천의 할아버지 집 사랑채 캐비닛에 보관해 뒀었는데 6ㆍ25전쟁 때 피란 가다가 대전 부근에서 폭격을 받아 소실됐다고 한다. 당시 이천 할아버지는 ‘골동품은 다 버리더라도 이 자료는 꼭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만약 그 문서가 지금 남아 있다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한 자료가 됐을 것이다.
1946년 미군정청이 들어서면서 임시정부의 기능이 멈췄다고 한다. 아버지는 행정연구회 출신 중에 유일하게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으로 발탁됐다. 당시 같이 고문으로 발탁된 분이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이었다. 아버지는 피폐한 농업과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헌신을 다해 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토지개혁법을 만들어 토지개혁에 성공한 것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토지개혁을 하면 할아버지 같은 지주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데 아버지는 대지주의 아들이면서도 할아버지에게 “토지개혁법이 실시된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광복 후 일제 때 관료생활을 했다는 사실에 심한 중압감을 가졌다. 일제 때는 공부 잘해서 일본인보다 앞서는 것이 조선인의 자존심을 세우는 최선의 길인 줄 알고 살았는데, 광복을 맞아 그런 경력이 비난을 받는 세상이 되자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제헌헌법 기초작업에도 참여하고, 미군정청의 고문으로 일하면서 국가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중압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미군정청 고문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관료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시작한 것은 비누공장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생필품이 비누와 고무신이었다. 당시 아버지와 사업을 같이 한 분이 한희석(韓熙錫)씨라고 자유당 시절 국회부의장을 지낸 분이다. 이분은 일제 때 아버지 후배로 관직에 있었다. 이분과 합작해서 비누공장을 차렸는데, 얼마 안 가서 아버지는 한희석씨에게 사업체를 모두 넘겼다. 한씨는 비누공장으로 거부가 됐고, 그렇게 모은 재력으로 나중에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6ㆍ25가 터지던 1950년 아버지는 이천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전쟁이 나자 인민군들은 이천 할아버지 집을 접수해 인민군 본부로 사용했다. 당시 할아버지의 집이 이천 읍내에서는 가장 컸기 때문이다. 800평이 넘는 큰 집이었다. 아버지는 인민군이 당신을 체포하려 하자 서울의 한 공장 지하실에서 한동안 숨어 지냈다.
鄭周永 회장과의 인연
1951년 1ㆍ4 후퇴 때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그런데 아버지는 부산에서 또다시 관료생활을 하게 됐다. 당시 장면(張勉) 총리가 사람을 보내 아버지에게 기획처 장관을 맡아 줄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관직생활이 싫다고 거절했다. 그러다가 당시 독립운동가 출신의 함태영(咸台永) 선생이 아버지를 다시 불렀다. 함 선생의 간곡한 부탁으로 아버지는 1951년 심계원 심계관으로 들어갔다. 함태영 선생이 부통령으로 자리를 옮기자 아버지는 1956년 심계원장에 올랐다.
아버지의 청렴에 관해서는 일화가 있다. 명절이 되면 고위 공직자에게 생선이나 사과 같은 현물이 많이 들어왔다. 하루는 누군가 찾아와 선물 꾸러미를 두고 갔는데 어머니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가 퇴근 후 그것을 보고 화를 내며 당장 되돌려 주라고 했다. 그것을 되돌려 주었는데, 선물을 한 사람이 다음 날 다시 그것을 우리 집에 갖다 놓고 가버렸다. 어머니 대신에 내가 선물한 사람의 집에 물건을 가지고 가는 도중 냄새가 나서 뜯어 보니 생선이었다. 이틀 동안 왔다갔다하는 사이 생선이 썩어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도 정부에서 평생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그때 아버지와 같이 일했던 분들이나 아버지의 후배 관료들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강직하고 청렴했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였다. 이 때문에 심계원장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버지가 심계원장을 그만둔 후의 일이다. 1970년대 중반 정주영(鄭周永) 현대 회장이 아버지를 초청해 1박2일 동안 울산 현대조선소를 직접 안내하며 구경을 시켜줬다. 정주영 회장은 울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버지에게 “내가 사실은 원장님(심계원 원장)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줬다고 한다.
6ㆍ25전쟁 후 끊어진 한강철교 복구공사를 하는 것이 당시 최대의 국책사업이었는데 부도 직전이었던 현대건설은 한강철교 공사 수주에 회사의 사운을 걸고 도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국내최대 건설업체인 모 회사가 1환에 응찰하는 바람에 현대건설은 수주에 실패했다. 실망한 정주영 회장은 투신자살을 하려고 한강다리 근처를 배회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고 ‘이왕 죽는 것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고 죽자’며 심계원에 낙찰이 잘못됐다며 재심을 청구했다고 한다.
이때 당시 심계원장으로 있던 아버지는 관련 내용을 꼼꼼하게 검토해 ‘1환에 공사가 낙찰된다는 것은 분명 말이 안된다’고 판단해 재입찰을 하라고 관계기관에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적절한 가격에 응찰한 현대건설이 공사를 수주할 수 있게 됐고, 이를 계기로 현대건설이 반석 위에 올라섰다는 것이다.
4·19 때 구속됐다 5·16 때 풀려나
1960년 4ㆍ19혁명이 나면서 세상이 달라졌다. 허정(許政) 과도내각은 이승만 정권의 각료와 자유당 간부들을 구속했다. 3ㆍ15 부정선거와 부정축재 등의 죄목이었다. 아버지도 구속됐다. 그런데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아버지는 이천지역에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해 당선됐다. 그런데 당시 한국 헌정사에 유일무이한 소급입법이 만들어졌다. 아버지는 공민권 제한으로 국회의원 당선을 박탈당했다.
1961년 5월, 새로운 국회가 열리기도 전에 5ㆍ16군사혁명이 발생했다. 동시에 혁명검찰부가 설치되면서 혁명재판소가 세워졌다. 당시 민주당과 자유당 고위인사, 기업인들은 죄다 감옥에 끌려갔다.
희한한 일은 혁명검찰이 들어서자 아버지는 석방대상 1호로 풀려났다. 혁명검찰이 아버지의 죄상을 검토해 보고 혐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아버지는 당시 감옥에서 군사혁명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다. 심계원장으로 있으면서 군(軍)에 대해 깐깐하게 감사를 했으니 군인들이 좋게 볼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혁명검찰부장이 아버지를 불러놓고는 “오늘부터 자유의 몸이 되셨습니다”라고 하는데,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혁명을 일으킨 박정희(朴正熙) 장군이 심계원장 때 아버지의 청렴한 행적을 알고 풀어주라고 한 것이었다.
1963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은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면서 공화당을 사전 조직하는데 이 일을 김정렬(金貞烈) 전 국무총리가 앞장섰다. 김정렬 총리는 아버지하고 친했다. 한번은 김 총리가 공화당을 사전 조직하면서 아버지에게 ‘창당 작업을 같이 하자’고 권유했는데 아버지는 한사코 사양했다. 아버지는 이후 공직에서 발을 빼고, 개인사업을 하다가 1978년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의 출발은 제헌헌법에서 시작됐다. 제헌헌법은 왕조체제와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민주공화국으로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시발점이었다. 1948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우리 사회의 헌법적 지식ㆍ경험에 비춰볼 때, 제헌헌법의 탄생은 기적(奇蹟)에 가까웠다. ‘역사는 쟁취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처럼 당시 우리는 제헌헌법을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현민(玄民) 유진오(兪鎭午) 선생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헌법학계에 제헌헌법의 탄생을 두고 색다른 시각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8월 출간된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이라는 책에서 강경근(姜京根) 숭실대 법대 교수는 이렇게 썼다.
<일본법 교육을 받은 유진오 선생이 1948년 헌법제정 때 전문위원으로 헌법제정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분을 헌법제정의 아버지로 하는 것은 적절치 아니하다. 제헌헌법은 세칭 ‘유진오 안(또는 행정연구회ㆍ유진오 합의안)’에 기초한 것이고, ‘유진오 안’은 실제로는 한민당(韓民黨)을 중심으로 하는 의회 장악파의 헌법안이었다.>
유진오 선생이 헌법 초안자가 아니라는 뜻인지, 또 글에서 언급된 ‘행정연구회’는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기자는 제헌헌법의 초안(草案)은 누가 만들었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당시 상황을 추적해 봤다.
국가기록원, ‘유진오의 헌법초안’이 제헌헌법 原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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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는 1948년 6월23일 헌법초안을 완성해 본회의에 상정했다. 내각제 중심제인 헌법초안은 본회의 심의과정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변경돼 7월 12일 국회를 통과했고 7월 17일 공포됐다. 사진은 제헌헌법 전문. |
혼란의 시기를 거듭하던 중 1948년 5월 UN 관리하에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5ㆍ10 총선거가 실시됐다. 유권자 95.5%가 투표해 임기 2년의 국회의원 198명이 선출됐다. 1948년 5월 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 부의장 신익희(申翼熙)ㆍ김동원(金東元)을 선출하고 곧바로 헌법제정에 들어갔다. 6월 1일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기초위원 30인ㆍ전문위원 10인)가 구성돼 헌법초안을 만든 후 6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했다. 내각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초안은 대통령 중심제로 변경돼 7월 12일 국회를 통과했다(공포 7월 17일). 그렇다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헌법초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대한민국의 공식 기록기관인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제헌헌법’ 항목을 찾아봤다.
<제헌국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조직하여 곧바로 헌법제정 작업에 착수하였다. 1948년 6월 3일부터 ‘유진오의 헌법초안’을 원안(原案)으로, 권승렬의 초안을 참고안으로 하여 토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의원내각제와 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헌법초안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미군정당국이 대통령제를 주장함에 따라 대통령제(임기 4년, 1회 중임 가능)와 단원제국회 및 국무총리제를 채택한 제헌헌법이 완성되어 7월 17일 공포되었다.>
우리 정부는 ‘유진오의 헌법초안’이 제헌헌법의 원안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유진오 선생을 제헌헌법의 결정적 공로자, ‘헌법의 아버지’로 부를 만하다. 국가기록원의 ‘제헌헌법’ 항목에는 기자가 궁금해하는 ‘행정연구회’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기자는 취재과정에서 1958년 국회사무처가 발행한 ‘국회보 20호’에 헌법제정에 직접 관여한 인사의 ‘회고담’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회보는 1958년 제헌(制憲) 10주년을 맞아 ‘헌법 기초 당시의 회고담’이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유진오 선생을 비롯해 장경근(張暻根) 자유당 국회의원, 최하영(崔夏永) 심계원장(오늘날의 감사원장), 강명옥(康明玉) 법제실장과의 대화록을 실은 것이다. 이들은 1945년 8월 광복 직후부터 1948년 7월 17일 건국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헌법초안 작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이들은 실제로 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누구인지, 헌법초안이 시기별로 어떻게 변경됐는지 등을 소상히 증언했다. 그런데 유진오 선생의 주장과 최하영ㆍ장경근의 주장이 서로 달랐다. 유진오 선생은 자신이 초안을 작성했다고 증언했지만, 최하영ㆍ장경근은 그 초안은 실제로 일제 관료를 지낸 자신들(행정연구회)이 만든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하영ㆍ장경근은 유진오 선생이 ‘제헌헌법 초안자’로 알려지게 된 속사정까지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제헌헌법의 실제 초안을 만든 행정연구회의 구체적 활동상을 증언했다.
“내가 낸 안 90% 이상이 채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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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이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
“선거(1948년 5ㆍ10 총선거)가 있기 전에 김성수(金性洙) 한민당 당수가 찾아와서 나더러 ‘초안을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순전히 혼자 앉아서 초안을 했어요. 그 무렵에 입법의원 법무사로 있던 윤길중(尹吉重)씨와 황동준(黃東駿)씨가 내가 초안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오곤 했어요(윤길중은 1946년 행정연구회 1단계 헌법초안에 참여했기 때문에 행정연구회 초안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었음-편집자注). 청량리 우리 집에서 그 두 분의 협조를 얻어 검토를 하고 더러 고치기도, 빼기도, 넣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그때(1948년 5월경-편집자注)에 해공(海公ㆍ신익희) 선생이 날더러 만나자고 사람을 보냈어요. 낙원동 어디로 가니까 거기에 최하영씨도 있고 또 누가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해공 선생 말씀이 ‘사실은 그전부터 동지들과 헌법초안을 준비하던 것이 있는데 당신이 초안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암만해도 당신한테 부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라고 했어요.”
해공은 유진오 선생에게 헌법초안 하나를 줬다. 이 초안은 최하영이 결성한 행정연구회가 1946년 1월 10일부터 3월 1일까지 작업해 완성한 ‘행정연구회 1단계 헌법초안’이었다. 최하영은 동경(東京)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다가 광복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당시 서울 명륜동에 있는 장인 조인섭(趙寅燮ㆍ당시 서울 종로에서 ‘됴고약’으로 유명하던 천일제약 설립자)의 저택에 기거하고 있었다.
유진오 선생은 1948년 5월 최하영이 사는 명륜동 저택을 찾았다. 당시 명륜동 저택에는 2년 전인 1946년, 1단계 헌법초안을 만들었던 행정연구회 위원들이 2단계 헌법초안을 심의하고 있었다. 유진오 선생의 증언이다.
“그 후로는 최하영씨 댁으로 자리를 옮겨 내가 기초한 헌법초안을 다시 여러 사람이 처음부터 토의하기 시작했는데 (중략) 그때 그곳에는 해공 선생이 가끔 들렀어요. 최하영씨 댁에서 토의에 참가한 분은 윤길중, 황동준, 차윤홍(車潤弘), 김용근(金龍根), 노용호(盧龍鎬), 장경근 등이었습니다. (중략) 1948년 6월 초에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전문위원 10명을 임명했는데 대부분 (명륜동) 토의에 참가하던 사람입니다.”
유진오 선생은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내가 낸 안이 거의 90% 이상 그대로 채택됐다”고 증언했다.
“헌법 전문 초안 내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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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과도정부 산하 행정연구회를 만든 최하영 전 심계원장. |
유진오 선생은 국회보 20호 회고담 말미에 “헌법 전문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직접 유 선생님께서 담당하셔서 초안을 하셨는가요”라는 질문을 받고 “예, 내가 쓴 것이지요. 조금 어구를 고친 것과 한두 마디 첨가된 것이 있고 그렇지요”라고 답했다.
유진오 선생의 말을 종합하면, 1948년 5월경 신익희 선생의 부탁으로 일제 관료 출신 최하영 등과 함께 헌법초안을 만들었는데 자신의 것이 대부분이었고 이것이 국회에서 통과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회보 20호에 실린 장경근 의원의 증언은 다르다. 1946년 행정연구회가 만든 1단계 헌법초안을 ‘기본’으로 하고 유진오 선생의 사안(私案)을 ‘참고’로 해서 행정연구회 2단계 헌법초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해방되었을 때 우리는 곧 독립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처럼) 일제시대에 고관을 지낸 사람들은 물러나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헌법학자가 없어 법률공부를 한 우리가 헌법초안을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행정연구회를 만들었어요. 최하영씨 장인댁에서 작업했는데 그전에 우리 집에서 한두 차례 했습니다. 1단계 헌법기초안이 1946년 3월 완성되었는데 주로 바이마르 헌법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든 것을 세상에서는 유진오 案이라 그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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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 박물관에 전시된 유진오 선생의 친필 헌법초안. 1948년 4월에 작성한 것으로 돼 있지만, 그해 5월 행정연구회 2단계 헌법초안 작업 당시 그 안(案)의 전문을 보지 못했다고 최하영은 증언했다. 원 안의 사진은 1960년대의 현민(玄民) 유진오 선생. |
“1948년 5월 행정연구회 헌법분과위원들이 다시 최하영씨 댁에서 모였어요. 이전에 만든 것을 끄집어내 다시 만들어 제공하자고 해서 자동적으로 모였어요. 그때에 처음 유진오씨가 합작(合作)한 거 같아요. 1948년 5월 31일 오전 두 시에 헌법초안(행정연구회의 2단계 헌법초안)이 완료됐습니다. 우리는 1단계에서 만든 헌법초안을 ‘한국헌법’이라고 했어요. 대한민국이라고 하지 않고…. 대한민국은 (나중에) 국회에서 쓰게 되었습니다. 1단계에서 만든 것이 기준이 되고 그다음에 유진오씨가 개인 안을 하나 가지고 왔는데 참고로 했어요. 2단계에서 유진오씨는 참가했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아홉입니다. 다들 열심히 했지만 중요한 것을 많이 한 사람이 최하영씨하고 나하고 유진오씨입니다.”
계속 되는 장경근의 증언이다. 그는 헌법 전문을 자신이 썼다고 주장했다.
“전문은 내가 했는데 3ㆍ1선언서도 보고 각국 헌법의 전문들을 참고해서 만들었지요(유진오 선생의 증언과 다름. 최하영은 장경근이 전문을 혼자 작성했고 둘도 없는 名文이라 一言一句도 고치지 않았다고 국회보 회고담에서 증언함-편집자注). 이후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거기 위원장이 한민당의 서상일씨입니다. 당시에 헌법기초위원회 소속의 전문위원이 있었는데 유진오씨하고 윤길중씨, 임문환(任文桓)씨 등이 있었지요. (논의할) 원안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든 것을 (원안으로 삼았지요), 세상에서는 유진오씨 안이라고 그러지요. 유진오씨가 우리가 만든 것을 가지고 했지요. 국회 헌법기초위원회는 우리가 ‘한국’이라고 했던 것을 ‘대한민국’이라고 고쳤지요.”
장경근은 유진오 선생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행정연구회가 만든) 1단계 초안에서는 국민의 기본권리의무를 뒤로 밀었는데 (중략) 유진오씨가 자꾸 제2장으로 앞세우자 그래서 우리가 양보했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헌법위원회 문제입니다. 우리가 만든 초안에는 위헌재판권을 대법원에 주기로 했습니다. 유진오씨가 참가한 때부터 헌법위원회를 만들자고 그래요. 그래서 토론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내 의견대로 위헌법률 판단은 대법원에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장경근 의원의 증언을 요약하면, 행정연구회의 1단계 초안에다 유진오 선생의 사안(私案)을 ‘참고’해서 2단계 헌법초안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유진오 안’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유진오 안’은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의 원안이 됐다.
“심의위원들은 徹夜를 강행했지만 유진오씨는 집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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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국회보 20호에 실린 유진오, 최하영의 회고담. |
―국회보 편집자: 헌법 기초 당시 여러 가지 사정은 유진오 선생님이 쓰신 글을 통해 많이 읽었습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귀중한 자료가 될 만한 것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고 또 그냥 그대로 덮어두려고 했는데 요새 와서 불쑥불쑥 단편적으로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더구먼요.”
―순차적으로 심의위원이 되신 분들에게 그때의 감상(感想)을 전부 들을 예정입니다.
“헌법초안의 기초 및 심의는 동지 몇 사람이 자발적으로 한 것입니다. 그 동기부터 이야기를 하지요. 우리가 왜정(倭政) 때 관료를 해서 해방 후로는 근신(謹愼)하고 있었는데 그 과오에 대해 다소라도 속죄나 될까 하는 동기에서 그때 서로 친한 동지들이 모였어요. 독립국가로서 혹은 신생국가로서 필요한 법적 또는 행정적 자료를 모집하고 정비해 국가로부터 요청이 있으면 제공해 보겠다는 목적이었지요. 그것을 위한 한 그룹(행정연구회를 의미)이 있었어요.(중략)
우리가 한 일은 두 단계가 있었는데 제1단계 헌법초안은 1946년 1월 10일부터 3월 1일까지 작업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학식 부족으로 남부끄럽지만 1946년 1월 말까지 기초안을 만들었어요. 이 초안을 가지고 2월 꼬박 한 달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제1단계 최종안을 작성했습니다.”
―상당히 지루했겠습니다.
“최종안이 3ㆍ1절 기념일 오후 8시에 끝났습니다. 그때 종로 보신각종을 정오에 타종했는데 종소리를 라디오를 통해 들으면서 헌법초안을 만든다는 축배를 올리고, 심의에 참가한 분들이 감개무량해했지요. (중략) 제2단계라는 것은 제1단계의 헌법초안 심의를 끝낸 지 2년2개월 후인 1948년 5월 14일부터 5월 31일 오전 2시까지 18일간에 걸쳐 만들어진 것입니다. 1단계에서 작성한 헌법안을 재검토한 것입니다. 그날 5월 31일은 우리나라의 제헌국회 개회일이었습니다. 심의위원들은 18일간 외출도 못하고 속독하여 헌법심의를 철야(徹夜) 강행했습니다. 제헌국회 개회일까지 완성하기 위해 밤참을 먹어가면서 했습니다.”
최하영은 “유진오 선생은 행정연구회의 2단계 작업부터 참여했다”고 말했다.
“제1단계의 헌법초안심의 때는 장경근ㆍ이상기ㆍ강명옥ㆍ윤길중ㆍ박근영ㆍ김용근씨 그리고 최하영 이렇게 있었습니다. 2단계의 헌법기초심의 때에는 장경근ㆍ이상기ㆍ노용호ㆍ차윤홍ㆍ김용근ㆍ윤길중ㆍ황동준ㆍ유진오씨 그리고 최하영 이렇게 있었습니다. 1ㆍ2단계 심의를 한 장소는 명륜동 소생(小生)의 우거(寓居ㆍ임시로 머무는 집)에서 했는데 1단계 심의 때는 장경근씨 댁에서도 철야를 해가면서 심의한 일이 있었죠.”
최하영의 증언에 따르면, 심의하는 동안 유진오 안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 전부가 최하영의 집에서 숙식하며 함께했지만, 유진오 선생만은 청량리 자신의 집에 가서 자고 아침에 나타나곤 했다고 한다. 유진오 선생은 약 일주일 후부터 그날 심의될 만한 분량의 조항을 종이에 써 왔으며 유진오 개인 안의 전문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2단계 헌법초안에 유진오 선생의 의견이 반영된 것은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꾼 것, 국민의 권리의무 조항을 국가 기본권력 구조 앞에 가져다 놓은 것 정도라고 한다.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꾸고 조문 순서 바꾼 게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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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8월 이승만 정권 당시 한일회담대표 자격으로 일본으로 출국하고 있는 허정(왼쪽 두 번째), 장경근(가운데), 유진오(오른쪽 두 번째). |
“1단계 헌법초안의 기초자들은 잘했든 못했든 왜정 때 관리를 지낸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기초하고 심의한 것이라 떠드는 것은 자숙근신(自肅謹愼)한다는 입장에서 좀 꺼렸거든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혹평(酷評)을 안 받고, 헌법전문가는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법률이라도 강의한 경험을 가진 인물의 이름을 빌려 내보내자고 해서 결국 유진오씨를 초청했고, 이분의 명의로 하자고 해서 제2단계의 헌법심의 멤버에 가입시킨 것입니다. 심의 중간에 가서 유진오씨가 자기 사안(私案)이라고 하는 것을 급히 내보인 일이 있었는데 재심의 단계가 벌써 중간단계를 지났고 그 안이 불충불비(不充不備)한 점이 많아 헌법초안 재심의에는 참고하지 않기로 하였지요.”
당시 유진오와 최하영ㆍ장경근 등은 서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서로를 보는 눈이 달랐다고 한다. 유진오는 최하영 등을 ‘일제 관료 그룹’으로 보는 반면, 최하영 등은 유진오를 헌법학자라기보다는 ‘문사(文士ㆍ글쟁이)로 봤다는 것이다.
국회보 회고담에 나타난 최하영의 증언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제1단계 초안은 소위 문어체(文語體)로 돼 있었는데 2단계 때 구어체로 뜯어 고쳤고 조문 나열 체제를 전과 달리했습니다. 유진오씨가 조문 순서를 고집하였는데 그게 유진오씨의 특별한 창업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헌법 제2장에 국민의 권리의무를 규정하게 된 것이죠. 그 외에는 1단계 헌법초안과 2단계 헌법초안 사이에 근본적으로 변경된 것은 없습니다. 사실상 헌법을 기초하고 심의하신 여러분은 70일간 고생하였지만 유진오씨 외에는 오늘날까지 자진하여 말하지도 않았고 또 이름 내기를 꺼린 결과, 결국 세칭 ‘유진오 안’으로 변해버린 모양입니다. 결국 우리가 작성한 초안이 원안 그대로 제헌국회 본회의에 상정하게 되었지요.”
최하영은 “국회 헌법기초위원회가 전문위원회를 구성할 때 헌법초안을 사실상 기초한 우리(최하영이 조직한 행정연구회 사람들)는 유진오씨 외에는 전부 오밋(omitㆍ배제하다)당했다”며 “그 당시 전문위원이 된 인사들의 면모를 보면 대개 한민당계의 인사들이었다. 그 당시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인 서상일 의원은 한민당 소속이었다”고 밝혔다.
최하영은 “헌법초안뿐만 아니라 국회법, 정부조직법, 토지개혁법 등도 행정연구회가 초안을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국회보 편집자와 최하영 당시 심계원장의 대화록 마지막 부분이다.
―국회보 편집자: 저희가 책에서 보는 것은 윤길중씨 이름만 나오지 최하영 이름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상하게 생각했는데요.
“전후 1ㆍ2단계에 걸친 헌법초안 심의에 참가한 인사들의 이름을 모두 말했으니 그분들에게 물어보시면 진상이 명확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기초하고 심의, 작성하여 제헌국회에 제공한 것은 헌법초안뿐이 아닙니다.”
―그럼 다른 것도….
“국가로서 출발할 때 최소한도로 필요한 법률은, 즉 헌법, 국회법, 정부조직법인데 이상 3개 법률초안을 한꺼번에 모두 1948년 5월 31일 오전 2시에 작성, 완료했지요. 그래서 국회법 초안은 제헌국회 국회법기초위원회에, 정부조직법 초안은 정부조직법기초위원회에 제공되어 양(兩) 위원회에서는 우리 초안을 거의 원안 그대로 형식적 심의만 하고 제헌국회 본회의에 상정시켰지요.”
―지금 제일 기억에 남는 특별한 추억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로서는 분에 넘치는 일을 했지요. 제1단계의 심의가 끝난 것이 해방 후 최초의 3ㆍ1절 기념일(1946년 3월 1일)이었다는 것과 제2단계의 심의가 제헌국회 개회일인 1948년 5월 31일 오전 2시에 끝났을 때 감개무량했지요. 그리고 왜정 때 관리를 했다는 과거의 과오(過誤)에 대한 속죄(贖罪)의 하나로서 신(神)이 용납하여 주실 수 있을까 하고 눈물을 흘렸지요.”
私費로 행정연구회의 사무비ㆍ유지비 충당
최하영 전 심계원장은 1960년 4ㆍ19 직후 부정선거 연루자로 재판받다가 이듬해 5ㆍ16이 터지면서 풀려난다. 최하영은 1968년 <월간중앙>에 ‘정무총감 한인과장을 호출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 농상(農商)과장을 하면서 광복을 맞았을 당시의 상황을 적었다. 그는 글의 말미에 “행정연구회는 해공 신익희 선생의 지시로 처음 만들었다”고 했다. 글의 한 대목이다.
“1945년 12월 14일 새벽 6시에 별안간 전화가 걸려왔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수화기를 들었다. ‘최하영씨 댁입니까’ ‘예, 어디십니까’ ‘임시정부 비밀연락소요. 오전 10시에 비밀연락소로 와주시오’ 나는 잠이 후다닥 깨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일정 때의 관리는 친일파라고 했고,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이제 당하는구나’하고 느꼈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11살 난 장남과 9살 된 차남과 마지막 아침 겸상을 하고 집을 나섰다. (중략) 10시 정각에 운니동 임시정부 비밀연락소에 갔다. 노인이 나와서 ‘나는 임시정부 내무부차관 강태동(姜太東)이라는 사람이오’라고 소개하더니 ‘임시정부를 위해서 일해 주시오’라고 했다. 나는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친일파이고 이 사회에서 매장된 몸이므로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중략) 이튿날 오전 10시 다시 그곳에 불려갔다. 얼굴이 대춧빛같이 불그스레한 백발 노인이 ‘내가 소위 임시정부 내무부장관 신익희라는 사람이오. 알아두길 바라네’라고 하더니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앞으로 시정(施政)할 수 있도록 입법, 사법, 행정 각 분야에 있어 조사와 시책을, 고등문관 시험을 합격한 자들을 모아 급속히 작성해 주기 바라네. 이건 우리가 급해서 하는 것이지 자네들에게 특별한 친근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사무적인 일일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해공의 부탁을 몇 차례 거절한 최하영은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틀 후 12월 17일, 서울 사직공원 앞의 한 야전피복공장 건물 안에서 ‘행정연구회’의 첫 모임을 소집했다. 약 50여 명의 고등문관 출신이 모였다. 행정연구회는 임시정부 내무부의 임시조직이 됐다. 행정연구회의 목적은 정부가 수립되면 입법ㆍ사법ㆍ행정 분야에서 아무런 차질이 없도록 시책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행정연구회는 1945년 12월 17일 발족돼 1948년 2월까지 존속됐다.
최하영은 사비(私費)를 털어 행정연구회의 사무비, 유지비에 충당했다. 행정연구회의 헌법 기초자들은 1948년 5월 유진오 선생을 참여시켜 2차 헌법초안을 만들었다. 최하영은 당시 신익희 선생에게 “이 초안은 일제시대의 공무원 출신들이 만들었다고 소문이 나면 난관에 부딪힐 것이니 우리 이름으로 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유진오 안’으로 변한 행정연구회의 헌법초안은 마침내 제헌헌법의 모태가 됐다.
헌법초안 탄생의 비밀은 1958년 발간된 국회보 20호에서 일부 확인됐지만, 그 이후 사정은 바뀌지 않았다. 행정연구회 소속 헌법초안 기초자들은 일제 관료 출신이라는 ‘일생 최대의 약점’ 때문에 자신들의 공적(功績)을 적극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1970년대 당시 한 중앙일간지가 ‘비화 제1공화국-헌법제정에서 조각까지’를 기획ㆍ보도했지만 역시 행정연구회의 역할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행정연구회 소속 멤버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실제로 그들이 어떤 일을 했느냐는 그대로 묻혔다.⊙
| ▣ 법이 제정되기까지의 제(諸)자료 개요 ● 행정연구회 제1단계 헌법초안: 1946년 3월 1일 행정연구회가 만든 것이다. ‘한국헌법’이라는 법률명을 달았다. 전문(前文)은 없고, 부칙 포함해 88조로 돼 있다. 제1조는 ‘한국은 민주공화국임’, 제2조는 ‘한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발함’으로 규정돼 있다. ● 유진오씨 사안(私案):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유진오 선생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1948년 1월 (개인) 안을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전문(前文)은 없고 보칙(補則) 포함해 115조로 돼 있다. 제1조는 ‘조선은 민주공화국이다’, 2조는 ‘국가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발한다’고 돼 있다. ‘인민의 기본적 권리의무’가 앞쪽에 나온다. 1948년 5월 최하영의 집에서 진행된 ‘행정연구회 2단계 과정’에 참여했던 기초위원들은 유진오 선생의 사안 전문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 행정연구회 제2단계 헌법초안: 1948년 5월 31일 오전 2시에 완료된 것이다. 헌법 초안자 9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유진오ㆍ이상기ㆍ장경근ㆍ노용호ㆍ김용근ㆍ차윤홍ㆍ윤길중ㆍ최하영ㆍ황동준). 행정연구회의 1단계 헌법초안에다 유진오의 ‘사안’을 참고해 만든 것이다. 이른바 ‘유진오 안’으로 알려졌다. 이 안은 헌법기초위원회의 원안이 됐다. 전문(前文)과 부칙 포함 108조로 돼 있다. 제1조는 ‘한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는 ‘한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발한다’고 돼 있다. 국민의 권리의무 부분이 앞쪽에 위치해 있다. |
최홍건 전 산업자원부 차관이 말하는 나의 아버지 최하영
“제헌헌법 초안 만들면서 日帝관료 중압감서 벗어나”
정리 :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hana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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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하영의 4남인 최홍건 전 산업자원부 차관. |
공부를 잘해 동경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했다. 동경제대 법학과는 일본에서도 최고의 수재(秀才)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1933년 고등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석으로 밀려났다. 같은 해 큰아버지(崔周永)도 동북(東北)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큰아버지는 담양군수로 발령난 후 해남군수, 전남도청 국장 등을 역임했는데 술을 너무 좋아해 1943년 서른일곱 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고시 성적이 뛰어나 일본 내무성으로 발령났다. 조선인은 아무리 똑똑해도 일본 근무를 시키지 않았다. 성적 우수자의 경우 조선총독부에 가끔 발령나는 경우가 있었다. 아버지의 내무성 발령은 파격적이고 이례적이었다. 아버지는 1937년 무렵 조선총독부로 발령받아 귀국했다. 13대(代) 국무총리를 지낸 신현확(申鉉碻) 총리가 1944년 총독부로 발령받아 아버지 밑에서 일을 했다.
행정연구회 헌법기초 위원들 뒷바라지한 어머니
아버지는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뒀는데 평소 우리에게 “일제하에서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에게 멸시를 받지 않는 길은 그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는 길밖에 없다”며 “공부를 잘하는 것이 극일(克日)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했다. 독립운동을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공부를 통해 일본을 이기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총독부 조사과(통계청)에서 국세조사업무도 하고, 농상과장, 관방과장을 지냈다. 아버지의 이력을 볼 때 통상적인 관료였다.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민족을 탄압한 분이 아니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아버지는 혹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가족을 데리고 관사를 나와 명륜동에 있는 처가, 즉 나의 외가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의 장인이자 나의 외할아버지(趙寅燮)는 요즘으로 치면 재벌 기업가였다. 외할아버지는 천일제약이라는 제약회사를 운영했다. 그곳에서 만든 대표적인 상품이 ‘됴고약(됴는 趙의 옛발음)’인데, 이 고약으로 외할아버지는 큰 돈을 벌었다. 외할아버지는 고약을 중국과 동남아까지 수출했다. 됴고약은 1960년대 이명래 고약이 나오기까지 우리나라 고약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외가는 우리나라 제헌헌법의 초안이 탄생한 곳이다. 신익희 선생의 지시를 받은 아버지는 1945년 12월 행정연구회를 만들었다.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일제시대에 고시에 합격해 관료생활을 한 행정 전문가이자 테크노크라트였다. 인재풀이 많지 않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셈이다.
행정연구회 위원들은 사무실이 없어 외가댁을 사무실로 쓰게 된 것이다. 임시과도정부가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자료수집 비용과 활동비는 모두 외할아버지가 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남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무척 싫어했는데 외할아버지께 “돈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아주 곤혹스러웠다”고 훗날 말했다.
30~40대의 행정연구회 위원들은 밤낮없이 일했다고 한다. 수집한 자료를 놓고 밤을 새며 토론했는데 아버지는 밤새 토론한 내용을 연필로 직접 정리했다. 어머니(趙英子)는 그분들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고 생전에 말했다. 어머니는 “한겨울이라 집 안에 있는 비싼 모직담요를 모두 거둬 그분들에게 드렸는데 얼마 안 가 담뱃불에 구멍이 숭숭 나 버린 게 절반 이상이었다”고 했다. 모직담요는 일반 서민들 집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고급이불이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당시 위원들은 일본에서 공부를 한 분들이라 대륙법에 익숙해 있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독일 바이마르헌법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다.
제헌헌법 기초자료 6ㆍ25 때 소실
행정연구회 위원들은 두 차례 명륜동 집에 와서 일했는데 그때 제헌헌법 초안자료와 기타 건국을 위해 준비했던 각종 행정적인 업무자료는 작업이 끝난 후 이천의 할아버지 집 사랑채 캐비닛에 보관해 뒀었는데 6ㆍ25전쟁 때 피란 가다가 대전 부근에서 폭격을 받아 소실됐다고 한다. 당시 이천 할아버지는 ‘골동품은 다 버리더라도 이 자료는 꼭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만약 그 문서가 지금 남아 있다면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한 자료가 됐을 것이다.
1946년 미군정청이 들어서면서 임시정부의 기능이 멈췄다고 한다. 아버지는 행정연구회 출신 중에 유일하게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으로 발탁됐다. 당시 같이 고문으로 발탁된 분이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이었다. 아버지는 피폐한 농업과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헌신을 다해 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토지개혁법을 만들어 토지개혁에 성공한 것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토지개혁을 하면 할아버지 같은 지주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데 아버지는 대지주의 아들이면서도 할아버지에게 “토지개혁법이 실시된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광복 후 일제 때 관료생활을 했다는 사실에 심한 중압감을 가졌다. 일제 때는 공부 잘해서 일본인보다 앞서는 것이 조선인의 자존심을 세우는 최선의 길인 줄 알고 살았는데, 광복을 맞아 그런 경력이 비난을 받는 세상이 되자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제헌헌법 기초작업에도 참여하고, 미군정청의 고문으로 일하면서 국가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중압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미군정청 고문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관료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시작한 것은 비누공장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생필품이 비누와 고무신이었다. 당시 아버지와 사업을 같이 한 분이 한희석(韓熙錫)씨라고 자유당 시절 국회부의장을 지낸 분이다. 이분은 일제 때 아버지 후배로 관직에 있었다. 이분과 합작해서 비누공장을 차렸는데, 얼마 안 가서 아버지는 한희석씨에게 사업체를 모두 넘겼다. 한씨는 비누공장으로 거부가 됐고, 그렇게 모은 재력으로 나중에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다.
6ㆍ25가 터지던 1950년 아버지는 이천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전쟁이 나자 인민군들은 이천 할아버지 집을 접수해 인민군 본부로 사용했다. 당시 할아버지의 집이 이천 읍내에서는 가장 컸기 때문이다. 800평이 넘는 큰 집이었다. 아버지는 인민군이 당신을 체포하려 하자 서울의 한 공장 지하실에서 한동안 숨어 지냈다.
鄭周永 회장과의 인연
1951년 1ㆍ4 후퇴 때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그런데 아버지는 부산에서 또다시 관료생활을 하게 됐다. 당시 장면(張勉) 총리가 사람을 보내 아버지에게 기획처 장관을 맡아 줄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관직생활이 싫다고 거절했다. 그러다가 당시 독립운동가 출신의 함태영(咸台永) 선생이 아버지를 다시 불렀다. 함 선생의 간곡한 부탁으로 아버지는 1951년 심계원 심계관으로 들어갔다. 함태영 선생이 부통령으로 자리를 옮기자 아버지는 1956년 심계원장에 올랐다.
아버지의 청렴에 관해서는 일화가 있다. 명절이 되면 고위 공직자에게 생선이나 사과 같은 현물이 많이 들어왔다. 하루는 누군가 찾아와 선물 꾸러미를 두고 갔는데 어머니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가 퇴근 후 그것을 보고 화를 내며 당장 되돌려 주라고 했다. 그것을 되돌려 주었는데, 선물을 한 사람이 다음 날 다시 그것을 우리 집에 갖다 놓고 가버렸다. 어머니 대신에 내가 선물한 사람의 집에 물건을 가지고 가는 도중 냄새가 나서 뜯어 보니 생선이었다. 이틀 동안 왔다갔다하는 사이 생선이 썩어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도 정부에서 평생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그때 아버지와 같이 일했던 분들이나 아버지의 후배 관료들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강직하고 청렴했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였다. 이 때문에 심계원장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버지가 심계원장을 그만둔 후의 일이다. 1970년대 중반 정주영(鄭周永) 현대 회장이 아버지를 초청해 1박2일 동안 울산 현대조선소를 직접 안내하며 구경을 시켜줬다. 정주영 회장은 울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버지에게 “내가 사실은 원장님(심계원 원장)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줬다고 한다.
6ㆍ25전쟁 후 끊어진 한강철교 복구공사를 하는 것이 당시 최대의 국책사업이었는데 부도 직전이었던 현대건설은 한강철교 공사 수주에 회사의 사운을 걸고 도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국내최대 건설업체인 모 회사가 1환에 응찰하는 바람에 현대건설은 수주에 실패했다. 실망한 정주영 회장은 투신자살을 하려고 한강다리 근처를 배회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고 ‘이왕 죽는 것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고 죽자’며 심계원에 낙찰이 잘못됐다며 재심을 청구했다고 한다.
이때 당시 심계원장으로 있던 아버지는 관련 내용을 꼼꼼하게 검토해 ‘1환에 공사가 낙찰된다는 것은 분명 말이 안된다’고 판단해 재입찰을 하라고 관계기관에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적절한 가격에 응찰한 현대건설이 공사를 수주할 수 있게 됐고, 이를 계기로 현대건설이 반석 위에 올라섰다는 것이다.
4·19 때 구속됐다 5·16 때 풀려나
1960년 4ㆍ19혁명이 나면서 세상이 달라졌다. 허정(許政) 과도내각은 이승만 정권의 각료와 자유당 간부들을 구속했다. 3ㆍ15 부정선거와 부정축재 등의 죄목이었다. 아버지도 구속됐다. 그런데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아버지는 이천지역에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해 당선됐다. 그런데 당시 한국 헌정사에 유일무이한 소급입법이 만들어졌다. 아버지는 공민권 제한으로 국회의원 당선을 박탈당했다.
1961년 5월, 새로운 국회가 열리기도 전에 5ㆍ16군사혁명이 발생했다. 동시에 혁명검찰부가 설치되면서 혁명재판소가 세워졌다. 당시 민주당과 자유당 고위인사, 기업인들은 죄다 감옥에 끌려갔다.
희한한 일은 혁명검찰이 들어서자 아버지는 석방대상 1호로 풀려났다. 혁명검찰이 아버지의 죄상을 검토해 보고 혐의가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아버지는 당시 감옥에서 군사혁명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다. 심계원장으로 있으면서 군(軍)에 대해 깐깐하게 감사를 했으니 군인들이 좋게 볼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혁명검찰부장이 아버지를 불러놓고는 “오늘부터 자유의 몸이 되셨습니다”라고 하는데,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혁명을 일으킨 박정희(朴正熙) 장군이 심계원장 때 아버지의 청렴한 행적을 알고 풀어주라고 한 것이었다.
1963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은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면서 공화당을 사전 조직하는데 이 일을 김정렬(金貞烈) 전 국무총리가 앞장섰다. 김정렬 총리는 아버지하고 친했다. 한번은 김 총리가 공화당을 사전 조직하면서 아버지에게 ‘창당 작업을 같이 하자’고 권유했는데 아버지는 한사코 사양했다. 아버지는 이후 공직에서 발을 빼고, 개인사업을 하다가 1978년 세상을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