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뚝심’ 뒤에 감춘 섬세함, 손자들 위해 가구 모서리에 천 두르는 할아버지
⊙ “鄭夢九 리더십의 핵심은 품질·기술 중심의 경영전략과 공격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
(경제전문지 <포천>)
⊙ ‘내려갈 줄만 아는 대형 썰매’라는 미국인의 코웃음에 심기일전
⊙ 연구개발에 아낌없이 투자, 숨진 독일인 기술고문 가족 극진히 접대
⊙ 떠난 중역들을 다시 쓰는 역발상의 용인술
정몽구
⊙ 1938년 출생. 한양대 공업경영학과 졸업.
⊙ 현대건설 자재부장, 현대정공 대표이사 사장, 한국도시개발 대표이사, 현대차량 사장, 인천제철
회장,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회장, 현대자동차서비스 회장, 현대그룹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국표준협회 회장, 현대모비스 대표이사 회장 역임.
⊙ “鄭夢九 리더십의 핵심은 품질·기술 중심의 경영전략과 공격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
(경제전문지 <포천>)
⊙ ‘내려갈 줄만 아는 대형 썰매’라는 미국인의 코웃음에 심기일전
⊙ 연구개발에 아낌없이 투자, 숨진 독일인 기술고문 가족 극진히 접대
⊙ 떠난 중역들을 다시 쓰는 역발상의 용인술
정몽구
⊙ 1938년 출생. 한양대 공업경영학과 졸업.
⊙ 현대건설 자재부장, 현대정공 대표이사 사장, 한국도시개발 대표이사, 현대차량 사장, 인천제철
회장,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회장, 현대자동차서비스 회장, 현대그룹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국표준협회 회장, 현대모비스 대표이사 회장 역임.
- 당진제철소 현장을 둘러보는 정몽구 회장.
“해 보기는 했어?”
고(故)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생전에 어려운 일을 앞두고 망설이는 직원들에게 어김없이 하던 말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현대의 기업정신을 만들어낸 모태어(母胎語)다. 이런 창업자의 경영철학 때문에 현대그룹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임무라 할지라도 ‘NO’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이 없는 현대는 사분오열(四分五裂)되면서 기업정신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정주영 회장의 형제인 방계(傍系)와 정몽구 회장을 비롯한 자식들인 직계(直系)로 분가(分家)하면서 소그룹으로 잘게 쪼개져 과거의 영화(榮華)를 잃어 갔다. 이로 인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창업주의 도전정신은 빛이 바랬고, 삼성과 함께 대한민국을 이끌던 현대라는 대기업의 위상은 한껏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2010년 현재, 아버지 정주영 회장과 가장 닮았다는 얘기를 듣는 정몽구(鄭夢九) 회장이 경영하는 현대기아차그룹이 재계 서열 2위까지 치고 올라가면서 현대의 기업정신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장자(長子) 계승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의 정서로 본다면 1980년 작고한 장형(長兄) 몽필씨 다음인 정몽구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을 잇는 적통(嫡統)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分家 10年 만에 재계 서열 2위로 성장
2000년 현대그룹 후계 자리를 놓고 벌어진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몽구 회장은 한때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기도 하지만 정주영 회장 사후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차서비스 등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분리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현대그룹의 자동차 부문은 IMF 직후 적자경영 상태였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이 경영을 맡으면서 1년 만에 4000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왕자의 난이 벌어진 2000년에도 현대자동차의 순이익은 6700억원이었다. 정몽구 회장의 1인 경영 체제로 분가한 2001년에는 순이익 1조1650억원을 올리며 순이익 1조원 시대를 연다.
현대기아차그룹이 발표한 2010년 1분기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함께 올린 매출은 13조2600억원에 순이익은 1조6000억원을 상회하고 있다. 이를 단순계산하면 2010년 순이익 추정치는 6조4000억원에 이른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그룹에서 자동차전문 그룹으로 분가하기 전에 비해 순이익이 10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현대기아차그룹 전체의 매출을 비교하면 자동차 기업으로 분리하기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외형적으로도 독립 당시 10개의 계열사가 현대차와 기아차를 비롯해 31개의 계열사로 불어나 재계 서열 두 번째 그룹으로 성장했다.
현대기아차그룹 10년의 성장은 괄목할 만하다. 성장의 배경에는 정몽구 회장이 있다. 부친(父親)인 정주영 회장을 닮아 뚝심의 경영인으로 알려진 정몽구 회장은 지난 10년 어떤 마술로 현대기아차그룹을 이토록 탄탄한 반석 위에 세워 놓았을까.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정몽구 회장의 경영비밀을 추적해 봤다.
오피러스 소음 발견하고 “이렇게는 못 팔아” 화내
현대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을 흔히 ‘불도저 대통령’이라 부른다. 사실 원조는 정주영 회장이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의 불도저 성능도 앞의 두 사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정몽구 회장을 잘 모르는 이들은 당연히 그의 가장 큰 장점을 강한 추진력으로 알고 있다.
물론 그 강한 추진력은 분명 정몽구 회장의 큰 자산이다. 흔히 뚝심으로 표현되는 경영 스타일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을 이렇게만 평가하는 것은 한참 잘못됐다. 삼국지(三國志)의 애독자이기도 한 정몽구 회장의 외모는 장비형 스타일이다. 그래서 경영철학조차 투박해 보인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것조차 지극히 전략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3년 8월 정 회장은 남양연구소를 방문했다. 신차종을 개발할 때마다 항상 그랬듯이 주행성능 검사를 직접 참관했다. 이번에는 오피러스였다. 그런데 정몽구 회장의 귀에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관련 임원들은 문제될 것이 없고, 만약 그 결함 아닌 결함을 잡자면 시일이 오래 걸려 약속된 선적 날짜를 맞출 수 없다고 했다. 정몽구 회장은 “이렇게는 못 팔아”라며 품질개선 지시를 내렸다. 이 때문에 오피러스의 미세소음 제거를 위한 프로젝트팀이 꾸려졌다. 수출일정은 40여 일이나 늦어졌다.
정몽구 회장이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는 것은 가정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정몽구 회장은 주말이면 손자들 보는 재미에 빠질 때가 많다. 하루는 그가 천 뭉치와 망치를 들고 나타났다. 손자들이 집에서 놀 때 가구의 모서리에 부딪칠까 봐 모서리마다 천을 두르기 위해서다.
해외에서도 MK 리더십에 관심
정몽구 회장에 대한 평가가 후하지 못했던 이유는 정몽구 회장이 평생의 벤치마킹 대상이자 뛰어넘고자 했던 라이벌인 아버지 고 정주영 회장의 역(逆)후광효과 때문이다. 한국 경제사의 획을 그은 정주영 회장의 그늘에 가려 아들인 정몽구 회장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기회가 없었다. 부지런하고 근검함으로 대표되는 현대가의 전통이 몸에 배었지만, 이는 새로울 것이 없는 얘기다. 추진력과 뚝심 역시 아버지의 대표상품으로 정몽구 회장만의 리더십으로 온전히 평가받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현대가의 전통 안에서 자란 정몽구 회장이 한국 경제계의 큰 별인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뛰어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전형을 만들어 가고 있다. 재계 서열 1위에서 10위권까지 밀렸던 현대기아차그룹을 다시 부동의 2위로까지 부상시킨 그의 경영능력과 리더십이 주목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2009년 12월 말 미국의 권위 있는 자동차 전문지 모터트렌드는 ‘2010년 파워리스트’에서 정몽구 회장을 자동차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위로 선정했다. 2008년 6위에서 3계단을 뛰어오른 성과였다. 2009년 현대기아차는 미국 시장에서 가장 각광받는 브랜드였고,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극에 달했다.
2009년 6월에는 코리아소사이어티가 주는 밴 플리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코리아소사이어티의 도널드 그레그 이사장은 “정몽구 회장은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십과 혁신적인 정신, 글로벌 마인드를 바탕으로 현대·기아차를 세계 5위의 자동차 메이커로 키워냈다. 오늘날 많은 미국인이 현대·기아차의 미국 내 생산·판매·연구개발 활동에 고용돼 있는 등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이 한국과 미국의 경제적 연대관계 강화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수상자 선정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정몽구 회장은 2001년에는 ‘미국 자동차산업 공헌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고, 2006년에는 ‘우드로 윌슨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에서도 경제발전에 공헌한 점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언론들도 정몽구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미국의 대표적인 경제지인 <포천>은 그 리더십의 요체를 “과감한 결단력과 승부근성, 무모하리만큼 강한 추진력을 가진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 핵심은 품질, 기술 중심의 경영전략과 공격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이다”고 적고 있다.
해외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과 성공신화는 새로운 시각에서 많은 연구가 거듭되고 있다. 지난 4월 8일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종합준공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도 축사에서 이례적으로 정몽구 회장 개인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남들이 멈칫할 때도 미래를 내다보며 계속 과감한 투자를 해 오늘을 만들어낸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을 이 자리에서 높이 평가한다. 그러한 기업가 정신이야말로 잿더미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한국 경제의 진정한 힘이었다.”
미국 언론의 혹평이 藥
현대자동차가 처음 미국에 진출한 것은 1986년이다. 엑셀이 그 첫 차종이다. 저가(低價)의 이 자동차는 시장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하지만 이내 품질에 실망한 미국인들에게서 냉대를 받았다. 언론은 ‘내려갈 줄만 아는 대형 썰매’라는 혹평을 하며 조롱거리로 삼았고, 한 유명 코미디언은 자신의 토크쇼에서 “우주비행사를 깜짝 놀라게 하려면 우주선 계기판에 현대 로고를 붙여주면 된다”는 조크로 현대자동차를 희화화했다. 그리고 현대차는 싸구려라는 인식이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2000년 초 미국을 방문한 정몽구 회장은 한 딜러에게서 “싼 차만 내놓지 말고 팔릴 수 있는 품질을 갖춘 차를 달라”는 말을 듣고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후 정몽구 회장의 경영원칙에서 ‘품질 제일주의’가 최고의 덕목으로 떠올랐다.
품질확보를 위한 정몽구 회장의 채찍질은 준엄했다. 현대차의 과장급 이상 직원에게 품질 이상시 무한책임을 진다는 ‘품질각서’를 받았던 일화는 정몽구 회장이 품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현대기아차그룹 내부에서는 우선 전사적으로 ‘6시그마 제도’를 도입하고 전사품질관리(TQC) 운동을 전개했다. 2002년에는 품질을 제1의 경영방침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별도의 품질총괄본부를 만들어 전사적으로 품질관련 업무를 한곳으로 집중시켰다. 양재동 사옥 1층에 있는 품질상황실, 품질회의실, 품질확보실이 바로 현대기아차그룹의 품질 컨트롤타워다.
기회 있을 때마다 품질경영을 강조하는 정몽구 회장의 2006년 신년사에는 이런 품질경영 철학이 녹아 있다. “품질은 제품의 근본적인 경쟁력인 동시에 고객의 안전과 감성적 만족에 직결되는 요소이며 우리의 자존심이자 기업의 존재이유다”라고 강조한다.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의 최고 가치를 위해서는 품질이 존재의 근간임을 밝힌 것이다. 품질경영의 결과 미국의 대표적 시장 전문기관인 JD파워의 신차품질조사(IQS)에서 2000년 34위에 그쳤던 현대차의 순위는 2004년에는 7위로 수직 상승했고, 2006년에는 벤츠, BMW, 도요타 등을 제치고 3위로 올라섰다.
2009년 현대기아차가 미국 시장에서 약진한 것을 두고 좌승희(左承喜) 경기개발연구원장은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현대기아차그룹의 성공의 저변에는 정 회장이 품질경영을 모토로 해 왔다는 점이 있다. 미국 시장에서의 공격적인 마케팅도 성공의 요인이지만 소형차 중심의 좋은 품질을 지켜낸 정몽구 회장의 경영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정도로 현대기아차의 선전의 밑바탕은 바로 품질경영이다. 임원들 사이에서 정몽구 회장은 ‘품질본부장’으로 불리고 있다.
오전 6시40분이면 출근
정몽구 회장의 좌우명은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이다. ‘근면하게 사는 사람에겐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현대가의 가훈(家訓)이기도 하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에게 써 준 글로 현대의 기업정신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초기 회자되던 ‘얼리 버드(early bird)’와 일맥상통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찾는다는 말처럼 현대기아차그룹의 하루는 일찍 시작한다. 정몽구 회장은 아침 6시40분이면 양재동 사옥에 어김없이 출근한다. 전날 상황을 브리핑하고 하루 스케줄을 보고해야 하는 경영진은 6시면 출근해서 보고준비를 하다 보니 양재동 본사의 출근시간은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절정을 이룬다.
올해 1월 4일 현대기아차그룹은 여느 해와 다름없이 오전 8시에 시무식(始務式)을 했다. 신년 연휴가 끝나고 새해 업무가 시작되는 이날 서울과 수도권은 이른 아침부터 내린 폭설로 교통대란을 겪어야 했다. 서울로 통하는 고속도로와 간선도로는 물론이고 서울 시내 도로는 갑자기 내린 폭설로 차량이 거북이 운행을 하는 바람에 삽시간에 주차장으로 변했다. 출근시각을 한두 시간 넘긴 직장인이 부지기수였고, 출근을 포기하고 귀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기아차 본사에서는 대부분의 직원이 정상출근을 했고, 서울 시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제 시각에 시무식을 치렀다.
이미 폭설이 내리기 전부터 출근을 시작해 눈발이 굵어진 시각에는 거의 대부분의 직원이 출근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대의 근면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이는 정주영 회장을 거쳐 정몽구 회장으로 이어진 부지런한 경영자론이 빚어낸 현대가 문화의 단면이다.
현대자동차서비스 본사 앞 수퍼가 단골집
그 부지런함은 정몽구 회장의 큰 장점으로 꼽히는 현장경영으로 이어졌다. 정몽구 회장은 현장에서 직접 배우고, 현장에서 느끼고,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현장주의자다. 외환위기와 현대그룹이 분리되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짧은 시간에 현대차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고, 부실기업 기아를 역시 빠르게 정상화시켜 현대기아차그룹의 한 축으로 세운 것은 그 현장경영의 성과였다는 게 많은 경제계 인사들의 평가다.
그의 현장경영은 부친으로부터 배운 바도 있지만 사실 바닥에서부터 잔뼈가 굵은 현대맨의 생활 그 자체이기도 하다. 한양대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한 정몽구 회장은 1969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듬해에는 현대차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다. 정 회장은 당시 고 정세영 명예회장이 이끌던 현대차에서 부품과장, 자재과장 등을 거쳐 1973년 이사로 승진했고, 1974년에는 현대자동차서비스 사장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았다.
정 회장의 현장경영은 현대자동차서비스 사장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원활치 않은 부품조달을 위해 직원들과 함께 트럭에 자동차부품을 싣고 전국순회 서비스를 위해 팔도를 누볐다. 정비차량으로 이동하면서 생긴 낭패의 경험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는 현장을 돌며 직접 경험을 얻고 해결책을 찾는 습관을 들였다.
서비스센터 한쪽에는 드럼통을 갖다 놓고 업무가 끝나는 밤 시간 직원들과 어울려 삼겹살 파티를 열며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직접 들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서비스 본사 앞 수퍼는 정 회장과 직원들이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던 단골집으로도 유명했다. 그만큼 격의없이 직원들과 어울렸다. 현대기아차그룹 출범 이후에도 ‘현장경영’을 선호하는 것은 당시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정몽구식 경영철학이다.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에는 직원들과의 소통도 중요한 항목이다. 젊은 시절에는 직원들과 함께 족구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방식이었다면 최근에는 현장에서 직원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소통을 추구한다. 2001년부터 거르지 않고 참석하는 신입사원 연수도 다른 대기업 총수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정몽구 회장만의 독특한 스킨십 소통방식이다. 신입사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그룹의 미래를 부탁하는 모습은 신입사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회사에 대한 충성도를 높인다는 것이 그룹 내의 평가다.
정몽구 회장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CEO다. 책상머리에 앉아 밑에서 올린 보고서를 검토하고 진행보고를 듣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현장파이다. 현장을 중시하는 밀착경영은 전국의 생산공장은 물론이고 미국, 인도, 중국 등 해외 생산거점을 수시로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하고, 현장의 문제점을 직접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임직원과 스킨십을 나누고 팀워크를 하나로 묶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보통의 체력과 관심으로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강행군이다
올해 들어서만도 70이 넘은 고령임에도 매달 그는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1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수행해 인도 첸나이공장을 방문했고, 2월에는 미국 조지아공장 준공식에 참석했으며, 3월에는 러시아와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4월에는 상하이엑스포 개막식 등 행사를 참관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매립지 둘러보다 차가 빠져 걸어 나온 적도
현지 공장 방문이든 계열사 방문이든 그의 현장방문에는 형식적인 방문이 없다. 어느 공장엘 가건 보고와 함께 반드시 현장을 둘러본다. 그것도 대충이란 없다. 꼼꼼하게 현장을 둘러보는데 현장에서 지적사항이 예사롭지 않아 그의 현장방문에는 긴장감이 흐른다고.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면 얼마 전 완공된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과정을 보면 잘 나타난다.
“양재동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당진이 어른거려서 다른 업무를 못 보겠어. 잠자리에서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당진 현장이 보인다니까.”
정몽구 회장은 현대제철 경영층에 이런 속마음을 털어놓았을 정도로 일관제철소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애정은 일주일에 두 차례씩 건설 현장을 찾게 만들었다. 2~3일이 멀다 하고 현장을 찾는 정몽구 회장 때문에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현장은 항시 긴장감이 돌았다. 공기만 달라져도 현장 직원들은 정몽구 회장이 건설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만큼 정 회장의 현장출입은 잦았다.
그룹 내 다른 계열사의 경우 1년에 한번 방문하기도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 제철소 건설현장에 쏟는 애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실에서 준비한 현장방문 일정이 있었지만, 그 계획은 대부분 무시되었다.
“내게 보여주려고 준비한 현장을 내가 왜 가나. 디테일을 알려면 준비되지 않은 곳으로 가야 문제점도 파악하고 진짜 현장상황도 알게 되는 거지.”
중후장대한 장비와 철골구조물이 많은 제철소 건설현장은 위험천만하다. 그러나 이런 위험한 현장상황도 정몽구 회장의 발길을 묶어 두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아찔한 순간도 많았다. 현장에서는 작업과 별도로 정몽구 회장의 안전에도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는 안전사고를 줄이는 계기가 됐다.
한번은 지상 30m 부근에서 정몽구 회장이 탄 작업용 엘리베이터가 서는 바람에 수행한 임원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철망으로 만들어진 엘리베이터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도 정몽구 회장은 자신의 안전보다는 작업자들의 안전을 먼저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매립지를 둘러보다 차가 빠져 개흙을 걸어 나와야 하는 일도 있었다. 용접불꽃이 튀는 작업장을 무람없이 활보하는 통에 작업자와 수행원들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정 회장의 현장순시는 효과가 매우 컸다.
최고경영자가 현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담당 임원이나 직원들도 현장을 챙기는 것에 소홀할 수 없었다. 고로건설 책임자는 정 회장식 현장경영의 장점을 이렇게 얘기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것처럼 정몽구 회장의 현장방문은 작업자들을 독려하는 힘이 있다. 구체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채근하지 않지만, 현장 책임자들은 없는 힘도 내야 했다. 또한 정몽구 회장은 현장의 문제점을 빨리 간파하는 능력이 있어 현장경영을 통해 현장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분이다. 현장상황을 통해 결단을 내리다 보니 현장에서는 자신이 맡은 분야만 열심히 하면 되는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는 현대기아차그룹 임원들은 물론이고 직원들 사이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정몽구 회장이 가지는 힘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한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현대는 ‘하면 된다’는 정신이 있어요. 정몽구 회장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추진을 지시하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목표를 향해 맹렬히 달려갑니다. 하루 열 번밖에 흙을 퍼 나를 수 없는 트럭을 열다섯 번씩 퍼 나르도록 현장관리를 해서 공기(工期)를 맞추듯이 다른 기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능하게 바꾸는 것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상황을 면밀히 검토하고 지시를 내리는 것이죠. 그러니 회장님의 말에 권위가 서는 것이죠.”
工期단축에 독일 철강그룹 임원도 놀라
현대기아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제철은 고로 1호기를 완공해 연산 400만t의 철강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옛 한보철강을 인수하면서 일관제철소 사업을 준비해 2006년 10월 27일 첫 삽을 뜬 후 2010년 4월 8일 준공식을 거쳐 생산에 들어갔다.
일관제철소 시스템은 현대가의 30년 숙원이었다. 선대 회장인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시작된 일관제철소의 꿈은 IMF 직전 정몽구 회장이 진두지휘하던 하동제철소 건립계획이 백지화되면서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그것을 푼 것이 정몽구 회장이었다. 허가와 기술이전 등 많은 복잡한 과정도 정면돌파를 통해 이겨낸 것은 정몽구 회장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 추진력의 바탕에는 자신의 손으로 일관제철소를 짓겠다는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이었다.
1978년부터 제철소를 짓겠다던 계획이 눈앞에서 번번이 무산되면서 정주영-정몽구 회장 부자에게 일관제철소는 언젠가는 이뤄야 할 꿈이었기에 그 애정은 더욱 깊었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현대제철 고위 임원의 얘기다.
“정몽구 회장은 단순한 비즈니스맨이 아닙니다. 현대의 숙원사업이라는 명분도 있지만, 일관제철소를 운영하는 것이 현대차와 기아차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강사업을 함으로써 자동차 사업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계산을 가지고 있는 거죠. 또 하나는 철강을 함으로 인해 대한민국에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항상 제철소는 ‘국가적인 사업이다’는 말씀을 자주 하는데, 철강산업이 국가를 지탱하는 근간산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애국적 견지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일관제철소 건설과정에서 보여준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은 현대신화를 일군 정주영 회장 못지않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이뤄낸 성과에서도 이는 이미 증명되었지만 세계 철강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건설과정 역시 정몽구 회장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일관제철소를 지을 수 있습니까?”
2010년 1월 현대제철 일관제철소를 방문한 독일 T그룹의 임원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T그룹은 현대제철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아주 중요한 파트너로 일관제철 시스템을 갖추는 데 필요한 기술적 지원을 해 준 유럽 최고의 제철그룹이다. 그런 T그룹의 임원이 놀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현대제철보다 1년 앞서 500만t 규모의 일관제철소를 브라질에 짓기 시작한 T그룹은 2009년 3월 가동을 목표로 했지만, 공기가 지연되면서 2010년 9월 가동으로 완공시기가 무려 1년6개월이나 늦어지고 있었다. 기술을 전수해 준 T그룹 입장에서 현대제철의 2010년 1월 가동은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현대제철은 자신들에게 컨설팅을 받으면서 지은 것이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이제 갓 배운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었으니, 자존심을 구긴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현대제철을 배우기 위해 당진 공장에 건설 책임자들을 보냈다.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과정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공기와 적은 투자비를 가지고 만든 세계 철강사의 새로운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총괄 담당 임원은 “처음 공사현장에 왔는데 암담했다. 공장이 들어서야 하는 자리엔 국도가 자리 잡고 있고, 매립해야 할 갯벌에는 염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미 매입한 땅에서도 사람들이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정말 여기다 제철소를 짓기는 짓겠다는 것인지 걱정이 태산이었다”며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걱정과 한숨 속에서 당진공장의 일관제철소 건설은 출발했다. 어쩌면 두려움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진이 철의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몽구 회장이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다시 총괄 임원의 얘기를 들어 보자.
“이곳에 일관제철소를 세운다는 것에 누구도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적은 투자비와 촉박한 공기, 경험의 부족으로 인한 시행착오는 정말 피를 말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몽구 회장은 공사를 시작하면 계획대로 된다고 믿고 있었어요. 우리도 정몽구 회장의 신념에 전염이 된 것입니다. 실패는 생각지도 않는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른 임원들과 직원들도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정몽구 회장이 안 보이면 불안하고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남양연구소 설계도면은 MK가 그려
“현대자동차가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한 밑바탕에는 품질향상을 위해 현대자동차 연구소가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기술투자야말로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투자방법이다.”
정몽구 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기술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 회장은 2004년 한보철강을 인수하고 일관제철소 사업승인을 받자마자 철강연구소 설립을 지시했다. 제철소 건설을 앞두고 온갖 문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정몽구 회장의 구상에서 가장 우선순위는 연구소였다.
정몽구 회장에게 기술개발은 기업을 살리는 원천 같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2003년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 세운 남양연구소는 현대차 울산연구소와 기아차 소하리연구소를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연구인력을 포함한 엔지니어 80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민간연구소라 할 수 있다. 정몽구 회장은 남양연구소를 세울 당시 인사말을 통해 “남양연구소가 세계적인 연구소로 새롭게 통합 출범됨으로써 연구개발 역량과 효율 극대화를 통해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로의 도약이 가능할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정몽구 회장은 연구소를 품질경영의 첫 출발이자 기업을 키우는 오아시스라고 보기 때문에 연구개발에 아낌없이 투자를 한다.
정몽구 회장은 당진제철소를 자동차용 고급 강판을 생산하는 전문제철소로 특화시킬 구상을 갖고 있다.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인 현대기아차그룹으로서는 안정적인 강판 공급선을 갖는 것이 원가절감은 물론이고 기술향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품질의 자동차용 강판이 필요하고 후발주자인 현대제철로서는 연구개발만이 그 해답이다.
현대제철기술연구소에 대한 정몽구 회장의 애착은 남달랐다. 연구소 착공을 앞두고 설계도면을 보면서 ‘여기는 실험실, 이곳에는 사무실을 두고, 1층 로비는 연구소의 얼굴이니까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고…’ 등등 세세한 지시를 내릴 정도로 연구소 배치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다.
일관제철소가 건설되는 도중이나 지금도 당진을 방문할 때면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곳이 바로 기술연구소다. 남양연구소 역시 정몽구 회장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정몽구 회장처럼 엔지니어를 우대하는 최고경영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당진을 방문하시면 아무리 바빠도 연구소를 찾아 연구진을 격려하고 연구성과를 물으시죠. 연구소와 연구소를 구성하는 엔지니어들에 대한 애정이 아주 많습니다.”
현대제철 우유철(禹惟哲) 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각별한 엔지니어 사랑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 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꾸지람을 자주 들어야 했다.
정몽구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연구소를 세운 2007년, 연구소 인력확보와 시설투자에 들어간 비용이 무려 800억원에 육박했다. 제철소가 세워지기 전부터 연구소에 엄청난 재원을 쏟아 부은 것이다.
해외 출장길에서도 그의 연구소 사랑은 계속된다. 지난 2009년 인도 방문길에는 현대차 인도기술연구소를 방문해 업무현황을 보고받고 “인도 현지시장에 적합한 디자인과 차량설계로 고객 만족도를 높이고, 품질력을 기반으로 판매망을 확대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연구소 인력도 당시 300명 정도였는데 올해는 연구인력 채용을 크게 늘릴 계획이다.
독일 출신 철강 엔지니어 사망 소식에 유족 서울로 불러 직접 위로
정 회장의 연구소 사랑은 말 그대로 엔지니어를 우대하는 마음을 대변한다. 최근 반도체 분야의 연구인력이나 외국의 우수한 연구원들이 현대기아차그룹의 문을 노크하고 있다. 이는 정몽구 회장의 각별한 엔지니어 우대정책 때문이다. 정 회장은 현대기아차그룹 내의 연구소를 방문할 때마다, 연구소장들에게 우수한 연구인력 확보를 주문할 정도로 엔지니어에 대한 욕심이 많다.
정몽구 회장의 엔지니어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 당시 독일 태생으로 세계적인 제철회사 부사장을 지낸 고로 분야의 세계적인 엔지니어 페터 하인리히(당시 만 64세·Peter Heinrich) 박사가 기술자문을 맡았다. 현대제철 기술자문을 맡아 열정적으로 기술전수를 해 주던 하인리히 박사는 직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아 ‘하 박사’로 불렸으며, 정몽구 회장도 연구소를 방문할 때마다 하인리히 박사의 사무실에 들러 격려와 감사의 말을 빼놓지 않았던 인물이다.
초창기 설계 때부터 참여했던 하인리히 박사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각종 기술자료들을 만들어 큰 도움을 주었다. 정몽구 회장의 관심도 각별해서 처음 계약 때는 없었던 부인을 초청해 한국에서 함께 생활하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다.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살림이 갖춰진 대형 아파트와 운전기사가 딸린 부인용 승용차까지 제공해 주었다.
선진 기술을 가진 외국인 엔지니어를 위해 정몽구 회장은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다. 그런 하인리히 박사가 독일로 돌아간 직후 지병인 심장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자 현대제철 경영진은 예우를 다해 조전(弔電)과 조화(弔花)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다. 물론 정몽구 회장에게는 보고되지 않았다.
그런데 약 보름 후 우연히 하인리히 박사의 소식을 접한 정몽구 회장은 현대제철 경영진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자신에게 비보를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다.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애도의 편지를 작성해 보내고 미망인과 가족을 초청토록 했다.
“1등석 왕복항공권을 보내고 H호텔 스위트룸으로 예약해서 불편이 없도록 모셔.”
정몽구 회장은 유족을 어떻게 모셔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직접 제시하며 세심하게 일을 준비토록 했다. 며칠 후 하인리히 박사의 부인은 아들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정몽구 회장은 유족을 극진하게 대접했고, 하인리히 박사가 생전에 현대제철을 위해 헌신했던 것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더불어 상당한 액수의 위로금을 따로 전달했다.
정몽구 회장의 따뜻한 마음에 큰 위로를 받은 하인리히 박사의 부인은 한국의 아파트를 정리하면서 하인리히 박사가 한국에 올 때 가져온 각종 기술자료와 서류들을 현대제철에 기증하고 떠났다. 진심과 진심이 통하면서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은 것이었다.
이 일은 현대제철에 기술전수를 위해 나온 외국 수퍼바이저들 사이에 한동안 화제가 됐다. 정몽구 회장이 엔지니어를 우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정몽구 회장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엔지니어와 연구인력들에 대한 끝없는 애착과 대우가 오늘의 현대기아차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 또한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이다.
떠난 사람도 다시 부르는 ‘MK식 용인술’
‘MK식 용인술’은 어떤 것일까. 흔히 ‘상시(常時) 인사시스템’이라 불린다. MK식 인사는 외부에서 보면 기준이 모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다.
“상시 인사를 통해 임원진의 긴장감을 높이고 경쟁을 자극해 조직 활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한보 인수에서 일관제철소를 구상하고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MK의 인사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주영 회장이 그룹을 맡고 있을 당시 현대 출입기자들이 가장 전전긍긍한 부분이 바로 인사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인사로 인해 하마평 한번 써 볼 기회도 없이 인사발령 소식을 전해야 했다. 이는 정몽구 회장에게도 그대로 대입된다.
2000년부터 단행된 현대기아차그룹의 인사는 항상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개구리 같았다. 임명한 지 1년도 안된 사장을 경질하는가 하면 연말 인사 후 두 달 연달아 사장단 인사를 하기도 했다. 사장을 거쳐 부회장까지 지낸 사람을 계열사로 옮겨놓고 몇 달 뒤 사표를 받는 일도 있었다. 그룹의 핵심 요직인 전략조정담당 사장을 임명한 지 16개월 만에 다른 곳으로 보내기도 했다. 간혹 이로 인한 잡음이 없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정몽구 회장의 인사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는 것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것은 언제나 결과가 말해 주는 것이었다.
정몽구 회장의 이런 수시 인사의 핵심은 권위의 도전을 거부하는 ‘충성’의 인사다. 또한 수시 혹은 깜짝 인사가 가능한 것은 100명이 넘는 현대차·기아차 임원의 프로필을 거의 외우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임원의 인사파일을 집무실과 자택에 한 부씩 두고 계속 업데이트하고 있어 인사가 기분 내키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머리에서 복잡한 계산을 거쳐 나온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한보철강을 인수하고 다시 일관제철소 건설을 하는 과도기였던 2004년부터 2010년까지 현대제철 최고경영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거의 해마다 CEO 인사를 했다. 시기마다 전문성과 성과를 바탕으로 인사가 단행됐다. 그러한 인사는 비상체제로 돌아가는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사업에 긴장감을 불어넣었고, 그 긴장감은 건설의 추진력으로 나타났다.
고문으로 영입한 임원을 건설총괄 부사장으로 발령하는 파격인사도 망설이지 않았다. 경험 많은 경쟁사 출신들을 고위 임원으로 임명해 건설공정의 전문성과 경험을 더하도록 조치한 것도 정몽구 회장이 아니라면 꺼내 들기 어려운 인사카드였다.
“정몽구 회장의 인사방식을 두고 말들이 많지만, 결과적으로 현대차와 기아차를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 인사에 녹아 있습니다. 정몽구 회장에게 인사는 경영의 일환이죠. 수시 인사의 실패를 지적하려면 경영성과로 말해야 하는데, 계획한 일들이 모두 성공하고 있잖아요. 결국 정몽구 회장의 용인술은 성공한 경영수단입니다.”
현대기아차그룹 계열사의 전직 CEO가 내린 정몽구 회장의 용인술에 대한 평가다. 국내 한 경제전문지에서 분석한 인사철학도 흥미롭다.
“떠난 중역들을 다시 쓰는 것은 정몽구 회장 용인술의 극치이다. 패자부활전에 나서는 중역들은 물론 부정이나 허위보고와 관련되지 않은 인물들이다. 떠난 사람들을 다시 부르는 정 회장의 용인술은 여러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 나간 사람들도 회사를 비난하지 않는다. 밖에서도 충성심이 대단하다는 평이다.”
정 회장이 만드는 ‘웃음의 시추에이션’
정몽구 회장은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최고경영자다. 특히 임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 정 회장도 최근에는 근엄함의 외피를 가끔씩 벗어던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끼는 임원을 만나면 덥석 껴안는 파격도 선보여 해당 임원이 당황하는 일도 더러 발생한다.
한번은 한 계열사의 임원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기분이 좋아진 정 회장이 임원들을 둘러보며 “누가 농담 한자락 해 보지”라는 말을 꺼냈다. 감히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침묵이 감돌았다. 정 회장이 채근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용기를 낸 한 임원이 Y담 한 토막을 꺼내 놓았다. 그 내용을 옮길 수는 없지만, 그 유머 말미에 요즘 말로 ‘빵’ 터졌다. 좌중의 임원들은 정 회장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배꼽을 쥐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정 회장은 “뭐 그딴 얘기를 하고 있어” 하며 얘기를 한 임원에게 핀잔을 주었다. 박수를 치며 웃던 임원들은 멈칫했고,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임원들의 뇌리에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좌중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긴장했다. 그 순간 정 회장이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제야 임원들은 정 회장이 일부러 정색을 한 것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못다한 웃음을 마저 풀어냈다.
평소 농담을 즐기지 않는 정몽구 회장이 의외의 곳에서 ‘웃음의 시추에이션’을 만들어 냄으로써 임원들의 긴장감을 풀어 준다.
뚝심과 추진력, 상시 인사 시스템을 통한 긴장감 유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는 인사 시스템…. 항상 찬반이 있고, 논란이 분분하지만 이런 리더십을 통해 현대차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MK 리더십은 충분히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고(故)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생전에 어려운 일을 앞두고 망설이는 직원들에게 어김없이 하던 말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현대의 기업정신을 만들어낸 모태어(母胎語)다. 이런 창업자의 경영철학 때문에 현대그룹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임무라 할지라도 ‘NO’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이 없는 현대는 사분오열(四分五裂)되면서 기업정신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정주영 회장의 형제인 방계(傍系)와 정몽구 회장을 비롯한 자식들인 직계(直系)로 분가(分家)하면서 소그룹으로 잘게 쪼개져 과거의 영화(榮華)를 잃어 갔다. 이로 인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창업주의 도전정신은 빛이 바랬고, 삼성과 함께 대한민국을 이끌던 현대라는 대기업의 위상은 한껏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2010년 현재, 아버지 정주영 회장과 가장 닮았다는 얘기를 듣는 정몽구(鄭夢九) 회장이 경영하는 현대기아차그룹이 재계 서열 2위까지 치고 올라가면서 현대의 기업정신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장자(長子) 계승을 선호하는 우리나라의 정서로 본다면 1980년 작고한 장형(長兄) 몽필씨 다음인 정몽구 회장이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을 잇는 적통(嫡統)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分家 10年 만에 재계 서열 2위로 성장
2000년 현대그룹 후계 자리를 놓고 벌어진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몽구 회장은 한때 경영 일선에서 퇴진하기도 하지만 정주영 회장 사후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차서비스 등 자동차 전문그룹으로 분리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현대그룹의 자동차 부문은 IMF 직후 적자경영 상태였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이 경영을 맡으면서 1년 만에 4000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왕자의 난이 벌어진 2000년에도 현대자동차의 순이익은 6700억원이었다. 정몽구 회장의 1인 경영 체제로 분가한 2001년에는 순이익 1조1650억원을 올리며 순이익 1조원 시대를 연다.
현대기아차그룹이 발표한 2010년 1분기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함께 올린 매출은 13조2600억원에 순이익은 1조6000억원을 상회하고 있다. 이를 단순계산하면 2010년 순이익 추정치는 6조4000억원에 이른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그룹에서 자동차전문 그룹으로 분가하기 전에 비해 순이익이 10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현대기아차그룹 전체의 매출을 비교하면 자동차 기업으로 분리하기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외형적으로도 독립 당시 10개의 계열사가 현대차와 기아차를 비롯해 31개의 계열사로 불어나 재계 서열 두 번째 그룹으로 성장했다.
현대기아차그룹 10년의 성장은 괄목할 만하다. 성장의 배경에는 정몽구 회장이 있다. 부친(父親)인 정주영 회장을 닮아 뚝심의 경영인으로 알려진 정몽구 회장은 지난 10년 어떤 마술로 현대기아차그룹을 이토록 탄탄한 반석 위에 세워 놓았을까.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정몽구 회장의 경영비밀을 추적해 봤다.
오피러스 소음 발견하고 “이렇게는 못 팔아” 화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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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1월 6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앞줄 가운데)이 이른 새벽 아들들과 함께 청운동 자택에서 계동 사옥으로 걸어서 출근하고 있다. 정 회장 왼쪽이 정몽구 회장, 오른쪽이 고 정몽헌 회장. |
현대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을 흔히 ‘불도저 대통령’이라 부른다. 사실 원조는 정주영 회장이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의 불도저 성능도 앞의 두 사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정몽구 회장을 잘 모르는 이들은 당연히 그의 가장 큰 장점을 강한 추진력으로 알고 있다.
물론 그 강한 추진력은 분명 정몽구 회장의 큰 자산이다. 흔히 뚝심으로 표현되는 경영 스타일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정몽구 회장을 이렇게만 평가하는 것은 한참 잘못됐다. 삼국지(三國志)의 애독자이기도 한 정몽구 회장의 외모는 장비형 스타일이다. 그래서 경영철학조차 투박해 보인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것조차 지극히 전략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3년 8월 정 회장은 남양연구소를 방문했다. 신차종을 개발할 때마다 항상 그랬듯이 주행성능 검사를 직접 참관했다. 이번에는 오피러스였다. 그런데 정몽구 회장의 귀에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관련 임원들은 문제될 것이 없고, 만약 그 결함 아닌 결함을 잡자면 시일이 오래 걸려 약속된 선적 날짜를 맞출 수 없다고 했다. 정몽구 회장은 “이렇게는 못 팔아”라며 품질개선 지시를 내렸다. 이 때문에 오피러스의 미세소음 제거를 위한 프로젝트팀이 꾸려졌다. 수출일정은 40여 일이나 늦어졌다.
정몽구 회장이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는 것은 가정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정몽구 회장은 주말이면 손자들 보는 재미에 빠질 때가 많다. 하루는 그가 천 뭉치와 망치를 들고 나타났다. 손자들이 집에서 놀 때 가구의 모서리에 부딪칠까 봐 모서리마다 천을 두르기 위해서다.
해외에서도 MK 리더십에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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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4월 8일 충남 당진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준공식에 참석,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등과 행사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
정몽구 회장에 대한 평가가 후하지 못했던 이유는 정몽구 회장이 평생의 벤치마킹 대상이자 뛰어넘고자 했던 라이벌인 아버지 고 정주영 회장의 역(逆)후광효과 때문이다. 한국 경제사의 획을 그은 정주영 회장의 그늘에 가려 아들인 정몽구 회장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기회가 없었다. 부지런하고 근검함으로 대표되는 현대가의 전통이 몸에 배었지만, 이는 새로울 것이 없는 얘기다. 추진력과 뚝심 역시 아버지의 대표상품으로 정몽구 회장만의 리더십으로 온전히 평가받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현대가의 전통 안에서 자란 정몽구 회장이 한국 경제계의 큰 별인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뛰어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전형을 만들어 가고 있다. 재계 서열 1위에서 10위권까지 밀렸던 현대기아차그룹을 다시 부동의 2위로까지 부상시킨 그의 경영능력과 리더십이 주목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2009년 12월 말 미국의 권위 있는 자동차 전문지 모터트렌드는 ‘2010년 파워리스트’에서 정몽구 회장을 자동차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위로 선정했다. 2008년 6위에서 3계단을 뛰어오른 성과였다. 2009년 현대기아차는 미국 시장에서 가장 각광받는 브랜드였고,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극에 달했다.
2009년 6월에는 코리아소사이어티가 주는 밴 플리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코리아소사이어티의 도널드 그레그 이사장은 “정몽구 회장은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십과 혁신적인 정신, 글로벌 마인드를 바탕으로 현대·기아차를 세계 5위의 자동차 메이커로 키워냈다. 오늘날 많은 미국인이 현대·기아차의 미국 내 생산·판매·연구개발 활동에 고용돼 있는 등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이 한국과 미국의 경제적 연대관계 강화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수상자 선정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정몽구 회장은 2001년에는 ‘미국 자동차산업 공헌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고, 2006년에는 ‘우드로 윌슨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에서도 경제발전에 공헌한 점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언론들도 정몽구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미국의 대표적인 경제지인 <포천>은 그 리더십의 요체를 “과감한 결단력과 승부근성, 무모하리만큼 강한 추진력을 가진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 핵심은 품질, 기술 중심의 경영전략과 공격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이다”고 적고 있다.
해외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과 성공신화는 새로운 시각에서 많은 연구가 거듭되고 있다. 지난 4월 8일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종합준공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도 축사에서 이례적으로 정몽구 회장 개인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남들이 멈칫할 때도 미래를 내다보며 계속 과감한 투자를 해 오늘을 만들어낸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을 이 자리에서 높이 평가한다. 그러한 기업가 정신이야말로 잿더미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낸 한국 경제의 진정한 힘이었다.”
미국 언론의 혹평이 藥
현대자동차가 처음 미국에 진출한 것은 1986년이다. 엑셀이 그 첫 차종이다. 저가(低價)의 이 자동차는 시장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하지만 이내 품질에 실망한 미국인들에게서 냉대를 받았다. 언론은 ‘내려갈 줄만 아는 대형 썰매’라는 혹평을 하며 조롱거리로 삼았고, 한 유명 코미디언은 자신의 토크쇼에서 “우주비행사를 깜짝 놀라게 하려면 우주선 계기판에 현대 로고를 붙여주면 된다”는 조크로 현대자동차를 희화화했다. 그리고 현대차는 싸구려라는 인식이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2000년 초 미국을 방문한 정몽구 회장은 한 딜러에게서 “싼 차만 내놓지 말고 팔릴 수 있는 품질을 갖춘 차를 달라”는 말을 듣고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후 정몽구 회장의 경영원칙에서 ‘품질 제일주의’가 최고의 덕목으로 떠올랐다.
품질확보를 위한 정몽구 회장의 채찍질은 준엄했다. 현대차의 과장급 이상 직원에게 품질 이상시 무한책임을 진다는 ‘품질각서’를 받았던 일화는 정몽구 회장이 품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현대기아차그룹 내부에서는 우선 전사적으로 ‘6시그마 제도’를 도입하고 전사품질관리(TQC) 운동을 전개했다. 2002년에는 품질을 제1의 경영방침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별도의 품질총괄본부를 만들어 전사적으로 품질관련 업무를 한곳으로 집중시켰다. 양재동 사옥 1층에 있는 품질상황실, 품질회의실, 품질확보실이 바로 현대기아차그룹의 품질 컨트롤타워다.
기회 있을 때마다 품질경영을 강조하는 정몽구 회장의 2006년 신년사에는 이런 품질경영 철학이 녹아 있다. “품질은 제품의 근본적인 경쟁력인 동시에 고객의 안전과 감성적 만족에 직결되는 요소이며 우리의 자존심이자 기업의 존재이유다”라고 강조한다.
이윤을 창출해야 하는 기업의 최고 가치를 위해서는 품질이 존재의 근간임을 밝힌 것이다. 품질경영의 결과 미국의 대표적 시장 전문기관인 JD파워의 신차품질조사(IQS)에서 2000년 34위에 그쳤던 현대차의 순위는 2004년에는 7위로 수직 상승했고, 2006년에는 벤츠, BMW, 도요타 등을 제치고 3위로 올라섰다.
2009년 현대기아차가 미국 시장에서 약진한 것을 두고 좌승희(左承喜) 경기개발연구원장은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현대기아차그룹의 성공의 저변에는 정 회장이 품질경영을 모토로 해 왔다는 점이 있다. 미국 시장에서의 공격적인 마케팅도 성공의 요인이지만 소형차 중심의 좋은 품질을 지켜낸 정몽구 회장의 경영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정도로 현대기아차의 선전의 밑바탕은 바로 품질경영이다. 임원들 사이에서 정몽구 회장은 ‘품질본부장’으로 불리고 있다.
오전 6시40분이면 출근
정몽구 회장의 좌우명은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이다. ‘근면하게 사는 사람에겐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현대가의 가훈(家訓)이기도 하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에게 써 준 글로 현대의 기업정신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초기 회자되던 ‘얼리 버드(early bird)’와 일맥상통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찾는다는 말처럼 현대기아차그룹의 하루는 일찍 시작한다. 정몽구 회장은 아침 6시40분이면 양재동 사옥에 어김없이 출근한다. 전날 상황을 브리핑하고 하루 스케줄을 보고해야 하는 경영진은 6시면 출근해서 보고준비를 하다 보니 양재동 본사의 출근시간은 아침 6시에서 7시 사이에 절정을 이룬다.
올해 1월 4일 현대기아차그룹은 여느 해와 다름없이 오전 8시에 시무식(始務式)을 했다. 신년 연휴가 끝나고 새해 업무가 시작되는 이날 서울과 수도권은 이른 아침부터 내린 폭설로 교통대란을 겪어야 했다. 서울로 통하는 고속도로와 간선도로는 물론이고 서울 시내 도로는 갑자기 내린 폭설로 차량이 거북이 운행을 하는 바람에 삽시간에 주차장으로 변했다. 출근시각을 한두 시간 넘긴 직장인이 부지기수였고, 출근을 포기하고 귀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기아차 본사에서는 대부분의 직원이 정상출근을 했고, 서울 시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제 시각에 시무식을 치렀다.
이미 폭설이 내리기 전부터 출근을 시작해 눈발이 굵어진 시각에는 거의 대부분의 직원이 출근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대의 근면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이는 정주영 회장을 거쳐 정몽구 회장으로 이어진 부지런한 경영자론이 빚어낸 현대가 문화의 단면이다.
현대자동차서비스 본사 앞 수퍼가 단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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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구 회장이 기아자동차 광주 공장을 방문, 시험 생산 차량의 품질과 관련해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
그 부지런함은 정몽구 회장의 큰 장점으로 꼽히는 현장경영으로 이어졌다. 정몽구 회장은 현장에서 직접 배우고, 현장에서 느끼고,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현장주의자다. 외환위기와 현대그룹이 분리되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짧은 시간에 현대차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고, 부실기업 기아를 역시 빠르게 정상화시켜 현대기아차그룹의 한 축으로 세운 것은 그 현장경영의 성과였다는 게 많은 경제계 인사들의 평가다.
그의 현장경영은 부친으로부터 배운 바도 있지만 사실 바닥에서부터 잔뼈가 굵은 현대맨의 생활 그 자체이기도 하다. 한양대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한 정몽구 회장은 1969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듬해에는 현대차로 자리를 옮기면서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다. 정 회장은 당시 고 정세영 명예회장이 이끌던 현대차에서 부품과장, 자재과장 등을 거쳐 1973년 이사로 승진했고, 1974년에는 현대자동차서비스 사장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았다.
정 회장의 현장경영은 현대자동차서비스 사장에 오르면서 시작됐다. 원활치 않은 부품조달을 위해 직원들과 함께 트럭에 자동차부품을 싣고 전국순회 서비스를 위해 팔도를 누볐다. 정비차량으로 이동하면서 생긴 낭패의 경험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는 현장을 돌며 직접 경험을 얻고 해결책을 찾는 습관을 들였다.
서비스센터 한쪽에는 드럼통을 갖다 놓고 업무가 끝나는 밤 시간 직원들과 어울려 삼겹살 파티를 열며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직접 들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서비스 본사 앞 수퍼는 정 회장과 직원들이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던 단골집으로도 유명했다. 그만큼 격의없이 직원들과 어울렸다. 현대기아차그룹 출범 이후에도 ‘현장경영’을 선호하는 것은 당시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정몽구식 경영철학이다.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에는 직원들과의 소통도 중요한 항목이다. 젊은 시절에는 직원들과 함께 족구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방식이었다면 최근에는 현장에서 직원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소통을 추구한다. 2001년부터 거르지 않고 참석하는 신입사원 연수도 다른 대기업 총수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정몽구 회장만의 독특한 스킨십 소통방식이다. 신입사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그룹의 미래를 부탁하는 모습은 신입사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회사에 대한 충성도를 높인다는 것이 그룹 내의 평가다.
정몽구 회장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CEO다. 책상머리에 앉아 밑에서 올린 보고서를 검토하고 진행보고를 듣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현장파이다. 현장을 중시하는 밀착경영은 전국의 생산공장은 물론이고 미국, 인도, 중국 등 해외 생산거점을 수시로 방문해 직원들을 격려하고, 현장의 문제점을 직접 찾아낸다. 그 과정에서 임직원과 스킨십을 나누고 팀워크를 하나로 묶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보통의 체력과 관심으로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강행군이다
올해 들어서만도 70이 넘은 고령임에도 매달 그는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1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을 수행해 인도 첸나이공장을 방문했고, 2월에는 미국 조지아공장 준공식에 참석했으며, 3월에는 러시아와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4월에는 상하이엑스포 개막식 등 행사를 참관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떠났다.
매립지 둘러보다 차가 빠져 걸어 나온 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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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24일 정몽구 회장(왼쪽 두 번째)이 인도 첸나이 현대자동차 공장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을 안내하고 있다. |
현지 공장 방문이든 계열사 방문이든 그의 현장방문에는 형식적인 방문이 없다. 어느 공장엘 가건 보고와 함께 반드시 현장을 둘러본다. 그것도 대충이란 없다. 꼼꼼하게 현장을 둘러보는데 현장에서 지적사항이 예사롭지 않아 그의 현장방문에는 긴장감이 흐른다고.
정몽구 회장의 현장경영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면 얼마 전 완공된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과정을 보면 잘 나타난다.
“양재동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당진이 어른거려서 다른 업무를 못 보겠어. 잠자리에서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당진 현장이 보인다니까.”
정몽구 회장은 현대제철 경영층에 이런 속마음을 털어놓았을 정도로 일관제철소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애정은 일주일에 두 차례씩 건설 현장을 찾게 만들었다. 2~3일이 멀다 하고 현장을 찾는 정몽구 회장 때문에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현장은 항시 긴장감이 돌았다. 공기만 달라져도 현장 직원들은 정몽구 회장이 건설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만큼 정 회장의 현장출입은 잦았다.
그룹 내 다른 계열사의 경우 1년에 한번 방문하기도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 제철소 건설현장에 쏟는 애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실에서 준비한 현장방문 일정이 있었지만, 그 계획은 대부분 무시되었다.
“내게 보여주려고 준비한 현장을 내가 왜 가나. 디테일을 알려면 준비되지 않은 곳으로 가야 문제점도 파악하고 진짜 현장상황도 알게 되는 거지.”
중후장대한 장비와 철골구조물이 많은 제철소 건설현장은 위험천만하다. 그러나 이런 위험한 현장상황도 정몽구 회장의 발길을 묶어 두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아찔한 순간도 많았다. 현장에서는 작업과 별도로 정몽구 회장의 안전에도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는 안전사고를 줄이는 계기가 됐다.
한번은 지상 30m 부근에서 정몽구 회장이 탄 작업용 엘리베이터가 서는 바람에 수행한 임원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철망으로 만들어진 엘리베이터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도 정몽구 회장은 자신의 안전보다는 작업자들의 안전을 먼저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매립지를 둘러보다 차가 빠져 개흙을 걸어 나와야 하는 일도 있었다. 용접불꽃이 튀는 작업장을 무람없이 활보하는 통에 작업자와 수행원들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도 했다. 그러나 그런 정 회장의 현장순시는 효과가 매우 컸다.
최고경영자가 현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담당 임원이나 직원들도 현장을 챙기는 것에 소홀할 수 없었다. 고로건설 책임자는 정 회장식 현장경영의 장점을 이렇게 얘기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것처럼 정몽구 회장의 현장방문은 작업자들을 독려하는 힘이 있다. 구체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채근하지 않지만, 현장 책임자들은 없는 힘도 내야 했다. 또한 정몽구 회장은 현장의 문제점을 빨리 간파하는 능력이 있어 현장경영을 통해 현장의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분이다. 현장상황을 통해 결단을 내리다 보니 현장에서는 자신이 맡은 분야만 열심히 하면 되는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는 현대기아차그룹 임원들은 물론이고 직원들 사이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정몽구 회장이 가지는 힘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한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현대는 ‘하면 된다’는 정신이 있어요. 정몽구 회장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추진을 지시하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목표를 향해 맹렬히 달려갑니다. 하루 열 번밖에 흙을 퍼 나를 수 없는 트럭을 열다섯 번씩 퍼 나르도록 현장관리를 해서 공기(工期)를 맞추듯이 다른 기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능하게 바꾸는 것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상황을 면밀히 검토하고 지시를 내리는 것이죠. 그러니 회장님의 말에 권위가 서는 것이죠.”
工期단축에 독일 철강그룹 임원도 놀라
현대기아차그룹 계열사인 현대제철은 고로 1호기를 완공해 연산 400만t의 철강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옛 한보철강을 인수하면서 일관제철소 사업을 준비해 2006년 10월 27일 첫 삽을 뜬 후 2010년 4월 8일 준공식을 거쳐 생산에 들어갔다.
일관제철소 시스템은 현대가의 30년 숙원이었다. 선대 회장인 정주영 회장으로부터 시작된 일관제철소의 꿈은 IMF 직전 정몽구 회장이 진두지휘하던 하동제철소 건립계획이 백지화되면서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그것을 푼 것이 정몽구 회장이었다. 허가와 기술이전 등 많은 복잡한 과정도 정면돌파를 통해 이겨낸 것은 정몽구 회장의 추진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 추진력의 바탕에는 자신의 손으로 일관제철소를 짓겠다는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이었다.
1978년부터 제철소를 짓겠다던 계획이 눈앞에서 번번이 무산되면서 정주영-정몽구 회장 부자에게 일관제철소는 언젠가는 이뤄야 할 꿈이었기에 그 애정은 더욱 깊었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현대제철 고위 임원의 얘기다.
“정몽구 회장은 단순한 비즈니스맨이 아닙니다. 현대의 숙원사업이라는 명분도 있지만, 일관제철소를 운영하는 것이 현대차와 기아차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강사업을 함으로써 자동차 사업을 더 잘할 수 있다는 계산을 가지고 있는 거죠. 또 하나는 철강을 함으로 인해 대한민국에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항상 제철소는 ‘국가적인 사업이다’는 말씀을 자주 하는데, 철강산업이 국가를 지탱하는 근간산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애국적 견지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일관제철소 건설과정에서 보여준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은 현대신화를 일군 정주영 회장 못지않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이뤄낸 성과에서도 이는 이미 증명되었지만 세계 철강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건설과정 역시 정몽구 회장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일관제철소를 지을 수 있습니까?”
2010년 1월 현대제철 일관제철소를 방문한 독일 T그룹의 임원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T그룹은 현대제철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아주 중요한 파트너로 일관제철 시스템을 갖추는 데 필요한 기술적 지원을 해 준 유럽 최고의 제철그룹이다. 그런 T그룹의 임원이 놀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현대제철보다 1년 앞서 500만t 규모의 일관제철소를 브라질에 짓기 시작한 T그룹은 2009년 3월 가동을 목표로 했지만, 공기가 지연되면서 2010년 9월 가동으로 완공시기가 무려 1년6개월이나 늦어지고 있었다. 기술을 전수해 준 T그룹 입장에서 현대제철의 2010년 1월 가동은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현대제철은 자신들에게 컨설팅을 받으면서 지은 것이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이제 갓 배운 제자가 스승을 뛰어넘었으니, 자존심을 구긴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현대제철을 배우기 위해 당진 공장에 건설 책임자들을 보냈다.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과정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공기와 적은 투자비를 가지고 만든 세계 철강사의 새로운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총괄 담당 임원은 “처음 공사현장에 왔는데 암담했다. 공장이 들어서야 하는 자리엔 국도가 자리 잡고 있고, 매립해야 할 갯벌에는 염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미 매입한 땅에서도 사람들이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정말 여기다 제철소를 짓기는 짓겠다는 것인지 걱정이 태산이었다”며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걱정과 한숨 속에서 당진공장의 일관제철소 건설은 출발했다. 어쩌면 두려움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진이 철의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몽구 회장이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다시 총괄 임원의 얘기를 들어 보자.
“이곳에 일관제철소를 세운다는 것에 누구도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적은 투자비와 촉박한 공기, 경험의 부족으로 인한 시행착오는 정말 피를 말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몽구 회장은 공사를 시작하면 계획대로 된다고 믿고 있었어요. 우리도 정몽구 회장의 신념에 전염이 된 것입니다. 실패는 생각지도 않는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른 임원들과 직원들도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정몽구 회장이 안 보이면 불안하고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남양연구소 설계도면은 MK가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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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기아차 남양연구소의 디자인연구소에서 디자이너들이 콘셉트카의 디자인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
“현대자동차가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로 성장한 밑바탕에는 품질향상을 위해 현대자동차 연구소가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기술투자야말로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투자방법이다.”
정몽구 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기술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 회장은 2004년 한보철강을 인수하고 일관제철소 사업승인을 받자마자 철강연구소 설립을 지시했다. 제철소 건설을 앞두고 온갖 문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정몽구 회장의 구상에서 가장 우선순위는 연구소였다.
정몽구 회장에게 기술개발은 기업을 살리는 원천 같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2003년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 세운 남양연구소는 현대차 울산연구소와 기아차 소하리연구소를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연구인력을 포함한 엔지니어 8000여 명이 근무하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민간연구소라 할 수 있다. 정몽구 회장은 남양연구소를 세울 당시 인사말을 통해 “남양연구소가 세계적인 연구소로 새롭게 통합 출범됨으로써 연구개발 역량과 효율 극대화를 통해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로의 도약이 가능할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정몽구 회장은 연구소를 품질경영의 첫 출발이자 기업을 키우는 오아시스라고 보기 때문에 연구개발에 아낌없이 투자를 한다.
정몽구 회장은 당진제철소를 자동차용 고급 강판을 생산하는 전문제철소로 특화시킬 구상을 갖고 있다.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인 현대기아차그룹으로서는 안정적인 강판 공급선을 갖는 것이 원가절감은 물론이고 기술향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품질의 자동차용 강판이 필요하고 후발주자인 현대제철로서는 연구개발만이 그 해답이다.
현대제철기술연구소에 대한 정몽구 회장의 애착은 남달랐다. 연구소 착공을 앞두고 설계도면을 보면서 ‘여기는 실험실, 이곳에는 사무실을 두고, 1층 로비는 연구소의 얼굴이니까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고…’ 등등 세세한 지시를 내릴 정도로 연구소 배치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다.
일관제철소가 건설되는 도중이나 지금도 당진을 방문할 때면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곳이 바로 기술연구소다. 남양연구소 역시 정몽구 회장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정몽구 회장처럼 엔지니어를 우대하는 최고경영자를 본 적이 없습니다. 당진을 방문하시면 아무리 바빠도 연구소를 찾아 연구진을 격려하고 연구성과를 물으시죠. 연구소와 연구소를 구성하는 엔지니어들에 대한 애정이 아주 많습니다.”
현대제철 우유철(禹惟哲) 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각별한 엔지니어 사랑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 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꾸지람을 자주 들어야 했다.
정몽구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연구소를 세운 2007년, 연구소 인력확보와 시설투자에 들어간 비용이 무려 800억원에 육박했다. 제철소가 세워지기 전부터 연구소에 엄청난 재원을 쏟아 부은 것이다.
해외 출장길에서도 그의 연구소 사랑은 계속된다. 지난 2009년 인도 방문길에는 현대차 인도기술연구소를 방문해 업무현황을 보고받고 “인도 현지시장에 적합한 디자인과 차량설계로 고객 만족도를 높이고, 품질력을 기반으로 판매망을 확대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연구소 인력도 당시 300명 정도였는데 올해는 연구인력 채용을 크게 늘릴 계획이다.
독일 출신 철강 엔지니어 사망 소식에 유족 서울로 불러 직접 위로
정 회장의 연구소 사랑은 말 그대로 엔지니어를 우대하는 마음을 대변한다. 최근 반도체 분야의 연구인력이나 외국의 우수한 연구원들이 현대기아차그룹의 문을 노크하고 있다. 이는 정몽구 회장의 각별한 엔지니어 우대정책 때문이다. 정 회장은 현대기아차그룹 내의 연구소를 방문할 때마다, 연구소장들에게 우수한 연구인력 확보를 주문할 정도로 엔지니어에 대한 욕심이 많다.
정몽구 회장의 엔지니어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 당시 독일 태생으로 세계적인 제철회사 부사장을 지낸 고로 분야의 세계적인 엔지니어 페터 하인리히(당시 만 64세·Peter Heinrich) 박사가 기술자문을 맡았다. 현대제철 기술자문을 맡아 열정적으로 기술전수를 해 주던 하인리히 박사는 직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아 ‘하 박사’로 불렸으며, 정몽구 회장도 연구소를 방문할 때마다 하인리히 박사의 사무실에 들러 격려와 감사의 말을 빼놓지 않았던 인물이다.
초창기 설계 때부터 참여했던 하인리히 박사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각종 기술자료들을 만들어 큰 도움을 주었다. 정몽구 회장의 관심도 각별해서 처음 계약 때는 없었던 부인을 초청해 한국에서 함께 생활하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다.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살림이 갖춰진 대형 아파트와 운전기사가 딸린 부인용 승용차까지 제공해 주었다.
선진 기술을 가진 외국인 엔지니어를 위해 정몽구 회장은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었다. 그런 하인리히 박사가 독일로 돌아간 직후 지병인 심장병으로 유명을 달리하자 현대제철 경영진은 예우를 다해 조전(弔電)과 조화(弔花)를 보내 애도의 뜻을 전했다. 물론 정몽구 회장에게는 보고되지 않았다.
그런데 약 보름 후 우연히 하인리히 박사의 소식을 접한 정몽구 회장은 현대제철 경영진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자신에게 비보를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다.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애도의 편지를 작성해 보내고 미망인과 가족을 초청토록 했다.
“1등석 왕복항공권을 보내고 H호텔 스위트룸으로 예약해서 불편이 없도록 모셔.”
정몽구 회장은 유족을 어떻게 모셔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직접 제시하며 세심하게 일을 준비토록 했다. 며칠 후 하인리히 박사의 부인은 아들과 함께 서울을 방문했다. 정몽구 회장은 유족을 극진하게 대접했고, 하인리히 박사가 생전에 현대제철을 위해 헌신했던 것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더불어 상당한 액수의 위로금을 따로 전달했다.
정몽구 회장의 따뜻한 마음에 큰 위로를 받은 하인리히 박사의 부인은 한국의 아파트를 정리하면서 하인리히 박사가 한국에 올 때 가져온 각종 기술자료와 서류들을 현대제철에 기증하고 떠났다. 진심과 진심이 통하면서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은 것이었다.
이 일은 현대제철에 기술전수를 위해 나온 외국 수퍼바이저들 사이에 한동안 화제가 됐다. 정몽구 회장이 엔지니어를 우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정몽구 회장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엔지니어와 연구인력들에 대한 끝없는 애착과 대우가 오늘의 현대기아차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 또한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이다.
떠난 사람도 다시 부르는 ‘MK식 용인술’
‘MK식 용인술’은 어떤 것일까. 흔히 ‘상시(常時) 인사시스템’이라 불린다. MK식 인사는 외부에서 보면 기준이 모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다.
“상시 인사를 통해 임원진의 긴장감을 높이고 경쟁을 자극해 조직 활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한보 인수에서 일관제철소를 구상하고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MK의 인사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주영 회장이 그룹을 맡고 있을 당시 현대 출입기자들이 가장 전전긍긍한 부분이 바로 인사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인사로 인해 하마평 한번 써 볼 기회도 없이 인사발령 소식을 전해야 했다. 이는 정몽구 회장에게도 그대로 대입된다.
2000년부터 단행된 현대기아차그룹의 인사는 항상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개구리 같았다. 임명한 지 1년도 안된 사장을 경질하는가 하면 연말 인사 후 두 달 연달아 사장단 인사를 하기도 했다. 사장을 거쳐 부회장까지 지낸 사람을 계열사로 옮겨놓고 몇 달 뒤 사표를 받는 일도 있었다. 그룹의 핵심 요직인 전략조정담당 사장을 임명한 지 16개월 만에 다른 곳으로 보내기도 했다. 간혹 이로 인한 잡음이 없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정몽구 회장의 인사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는 것으로 귀결되곤 했다. 그것은 언제나 결과가 말해 주는 것이었다.
정몽구 회장의 이런 수시 인사의 핵심은 권위의 도전을 거부하는 ‘충성’의 인사다. 또한 수시 혹은 깜짝 인사가 가능한 것은 100명이 넘는 현대차·기아차 임원의 프로필을 거의 외우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임원의 인사파일을 집무실과 자택에 한 부씩 두고 계속 업데이트하고 있어 인사가 기분 내키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머리에서 복잡한 계산을 거쳐 나온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한보철강을 인수하고 다시 일관제철소 건설을 하는 과도기였던 2004년부터 2010년까지 현대제철 최고경영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거의 해마다 CEO 인사를 했다. 시기마다 전문성과 성과를 바탕으로 인사가 단행됐다. 그러한 인사는 비상체제로 돌아가는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건설사업에 긴장감을 불어넣었고, 그 긴장감은 건설의 추진력으로 나타났다.
고문으로 영입한 임원을 건설총괄 부사장으로 발령하는 파격인사도 망설이지 않았다. 경험 많은 경쟁사 출신들을 고위 임원으로 임명해 건설공정의 전문성과 경험을 더하도록 조치한 것도 정몽구 회장이 아니라면 꺼내 들기 어려운 인사카드였다.
“정몽구 회장의 인사방식을 두고 말들이 많지만, 결과적으로 현대차와 기아차를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 인사에 녹아 있습니다. 정몽구 회장에게 인사는 경영의 일환이죠. 수시 인사의 실패를 지적하려면 경영성과로 말해야 하는데, 계획한 일들이 모두 성공하고 있잖아요. 결국 정몽구 회장의 용인술은 성공한 경영수단입니다.”
현대기아차그룹 계열사의 전직 CEO가 내린 정몽구 회장의 용인술에 대한 평가다. 국내 한 경제전문지에서 분석한 인사철학도 흥미롭다.
“떠난 중역들을 다시 쓰는 것은 정몽구 회장 용인술의 극치이다. 패자부활전에 나서는 중역들은 물론 부정이나 허위보고와 관련되지 않은 인물들이다. 떠난 사람들을 다시 부르는 정 회장의 용인술은 여러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 나간 사람들도 회사를 비난하지 않는다. 밖에서도 충성심이 대단하다는 평이다.”
정 회장이 만드는 ‘웃음의 시추에이션’
정몽구 회장은 권위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최고경영자다. 특히 임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 정 회장도 최근에는 근엄함의 외피를 가끔씩 벗어던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끼는 임원을 만나면 덥석 껴안는 파격도 선보여 해당 임원이 당황하는 일도 더러 발생한다.
한번은 한 계열사의 임원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기분이 좋아진 정 회장이 임원들을 둘러보며 “누가 농담 한자락 해 보지”라는 말을 꺼냈다. 감히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침묵이 감돌았다. 정 회장이 채근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용기를 낸 한 임원이 Y담 한 토막을 꺼내 놓았다. 그 내용을 옮길 수는 없지만, 그 유머 말미에 요즘 말로 ‘빵’ 터졌다. 좌중의 임원들은 정 회장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배꼽을 쥐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정 회장은 “뭐 그딴 얘기를 하고 있어” 하며 얘기를 한 임원에게 핀잔을 주었다. 박수를 치며 웃던 임원들은 멈칫했고,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임원들의 뇌리에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좌중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긴장했다. 그 순간 정 회장이 크게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제야 임원들은 정 회장이 일부러 정색을 한 것을 알고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못다한 웃음을 마저 풀어냈다.
평소 농담을 즐기지 않는 정몽구 회장이 의외의 곳에서 ‘웃음의 시추에이션’을 만들어 냄으로써 임원들의 긴장감을 풀어 준다.
뚝심과 추진력, 상시 인사 시스템을 통한 긴장감 유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는 인사 시스템…. 항상 찬반이 있고, 논란이 분분하지만 이런 리더십을 통해 현대차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MK 리더십은 충분히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