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만난 사람] 뉴욕의 황 브러더스 황성철·황준철 변호사 : 월간조선

일주일 동안 비가 내렸던 뉴욕 맨해튼의 하늘이 모처럼 밝았다. 뉴욕의 ‘공기청정기’ 역할을 하는 센트럴파크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한 건물에 ‘웨스트사이드 태권도’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시간이 되자 하얀 태권도복을 입은 수십 명이 왼쪽 가슴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달고 ‘태권’을 외치며 굵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수련생 대부분이 韓人(한인)일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월스트리트와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는 미국 직장인을 비롯, 어머니의 손에 끌려온 파란 눈의 어린이들이 도장을 꽉 채웠다. 무술이 아니라 하나의 禮法(예법)을 배우는 듯한 진지한 자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주인공은 일란성 쌍둥이인 황성철·준철(45) 형제였다. 각각 태권도 公認(공인) 5단인 이들은 ‘뉴욕의 황 브러더스’로 알려져 있다. 1992년 道場(도장)을 연 이들은 올해로 도장 운영 17년째를 맞았다. 이들이 그동안 가르친 수련생만 수천 명. 도장에 소속된 15명의 사범이 200여 명의 수련생을 지도하고 있다.

‘웨스트사이드 태권도’는 단순한 태권도장이 아니라 미국 태권도 대표팀과 챔피언을 직접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곳이다. 미국인으로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대부분 이곳 출신이라고 한다.

황성철·준철 형제가 태권도를 배우게 된 데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의 ‘애국심’이 크게 작용했다. 두 형제의 아버지는 육사 9기 출신인 故(고) 황원형씨다. 형 성철씨의 말이다.

“외국에서 생활을 계속 하신 先親(선친)은 어릴 때부터 저희에게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어요. 태권도는 반드시 배워야 할 필수과목이었죠. 필리핀 마닐라에 있을 때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여섯 살 때였죠. 한국인 사범이 운영하던 도장에 나가 배우기도 했고, 아버지로부터 직접 배우기도 했어요. 그때부터 태권도는 우리 형제에게 ‘뿌리’이자 ‘혼’이었습니다.”

명문대 법대 나와 뉴욕 법조계에서 인정받아

쌍둥이 형제는 1964년 부친이 일본 도쿄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현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필리핀,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아버지의 근무처가 바뀔 때마다 이국 생활을 해야 했다. 한국에서 머문 것은 두 살 때부터 네 살 때까지 2년에 불과했다.

형제는 1979년부터 미국에서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두 형제는 나란히 다트머스대학에 진학했다.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인 다트머스大(대)는 최근 한인 출신 김용 박사가 총장으로 임명된 명문대다.

성철·준철 형제는 대학 졸업 후 코넬대 로스쿨에도 같이 들어가 변호사가 됐다. 이후 성철은 뉴욕대 로스쿨에서 국제법 석사(LLM)를, 준철은 조지타운대 로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들 형제의 ‘태권도 사랑’은 대학시절에도 계속됐다. 형제는 다트머스대와 코넬대에서 태권도 클럽을 만들었다. 코넬대 로스쿨에 다닐 때는 태권도를 가르치며 학비를 벌었다. 이들은 태권도가 코넬대의 정식 체육과목으로 채택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성철·준철 형제는 대학대항리그(Eastern Collegiate Taekwondo Conference)도 창설했다. 이 리그는 아이비리그 대학(하버드·프린스턴·예일·다트머스·브라운·유펜·코넬·컬럼비아)과 미국 동북부의 20여 개 대학의 태권도 선수들이 해마다 실력을 겨루는 유명한 태권도 대회다.

동생 준철씨는 2004년 트리니다드 토바고(서인도제도 국가)의 올림픽 태권도팀 감독생활을 잠시 했다. 형 성철씨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집에서 TV를 보면서 동생과 우리 수련생들이 트리니다드 토바고 대표단과 함께 개막식에 입장하는 것을 보고 너무 자랑스러워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두 형제는 “태권도는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인생을 바르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고차원의 무예”라고 했다. 동생 준철씨는 “한국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태권도는 외국인에게 우리 민족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며 “태권도를 통해 우리 문화와 역사를 전파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이들 형제는 미국 태권도연맹 대회위원회 부회장(준철)과 법률고문(성철)을 맡기도 했다. 1999년에는 미국의 대형출판사 랜덤하우스의 제의로 <태권도: 첨단 기술>이라는 책까지 발간했다.

명문대 로스쿨을 나온 성철·준철 형제는 미국 주류사회(뉴욕 법조계)에서 주목을 받는 중견 법조인이다. 형 성철씨는 법무법인 필립스 나이저에서 파트너 변호사(로펌 지분을 소유한 변호사)로 지내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私募(사모)펀드 ‘올라얀 그룹(Olayan Group)’에 스카우트돼 현재 社內(사내) 수석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쌍둥이 형제, KACF 창립에 앞장

2008년 10월 맨해튼의 한 호텔에서 열린 KACF 기금 모금 축제에 미국 주류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1000여 명의 한인들이 모였다.

성철씨는 사모펀드 거래, 인수 및 합병, 기업의 증권거래소 상장 등 회사법 관련 소송에 경험이 많다. 동생 준철씨는 뉴욕의 유수 로펌(Cadwalader와 Wickersham & Taft)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92년 JMF(Jacob Medinger & Finnegan) 로펌에 영입돼 현재 파트너 변호사로 있다. 제조물책임 소송 전문 법무법인인 JMF는 기업소송 및 집단소송에 전문성을 갖고 있다. 특히 JMF는 1950년대부터 담배회사의 변호를 맡으면서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펌이다.

동생 준철씨는 제약회사, 산업재 및 소비재 제조업체(자동차 및 전자관련 업체), 주류 제조업체 등 미국 내 유수 기업들의 변호를 맡고 있다. 그는 영국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재판까지 간 담배회사 상대 소송에서 승소한 후 업계에서 이름을 날렸다.

최근 JMF에 영입된 여현동 변호사는 “JMF는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폴란드, 독일,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제조물책임 사건에 참여해 세계 최고임을 입증했다”며 “올해 9월부터 한국의 법률시장이 개방됨에 따라 황준철 변호사는 ‘한국인으로서 조국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성철·준철 형제는 2003년 한인커뮤니티재단(KACF·www.kacfny.org)을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KACF는 미국 內(내) 한인을 비롯한 기타 소수민족을 후원하는 비영리 재단이다. KACF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한 한인 1.5세와 2세가 주축이며, 미국 당국에 법적으로 등록된 최초의 한인 단체다. 형 성철씨는 2003년부터 2007년(1·2·3대)까지 회장으로 일했고, 동생 준철씨는 이사로 참여해 조직 구성을 맡았다.

KACF의 주요 인사들은 의사, 변호사, 금융기업인 등 미국 주류사회에서 경제·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이다. 최근 미국 政街(정가)에서 주목받고 있는 샘 윤 보스턴 시의원과 최준희 에디슨시장, 현재 KACF 회장인 노석준 골드만삭스 총매니저(전무), 한인 출신으로 미국 내 최초의 방송 앵커(폭스뉴스)를 지낸 윤경복(現 KACF 사무총장), 주주 장 ABC 방송 앵커, 리츠 조 WABC 방송 앵커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盧泰愚(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재현씨도 미국에 있을 당시 멤버로 활동했다.

한국계 정치인 후원활동

KACF 행정업무를 맡고 있는 강효정ㆍ최정 팀장과 한인 최초의 미국 폭스뉴스 앵커 출신인 윤경복 사무총장(왼쪽부터).

KACF가 만들어진 데는 2002년 당시 뉴욕총영사관에 근무했던 趙源一(조원일) 총영사의 역할이 컸다. 조원일 총영사는 성철·준철 형제를 포함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불러모아 “개인적인 성공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한인사회와 미국 주류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의미 있는 일을 해 보라”며 단체결성을 권했다.

조 총영사의 권유를 받아들인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모임을 시작한 것이 지금의 KACF로 발전했다. 조 총영사는 황성철 변호사에게 “정식 단체로 인정받기 위해 먼저 법적 검토를 해 보라”고 했다가 “이왕 일에 관여했으니 회장직을 맡아 적극 추진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고 한다.

KACF는 이사회(40여 명)와 자원봉사팀(50여 명)으로 구성돼 있다. 뉴욕 맨해튼 35번가에 위치한 KACF 사무실에는 폭스뉴스 앵커 출신인 윤경복 사무총장을 비롯해 강효정, 최정 팀장이 상근으로 활동하고 있다. 윤경복 총장은 “한인 커뮤니티에서 자금을 모아 장애자, 노인, 가정폭력의 피해자, 불량청소년 등 형편이 어려운 한인들과 아시아계 히스패닉 등 소수민족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나아가 미국 주류사회와 유대관계를 강화해 한인들의 입지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했다.

KACF는 비정치적 재단이지만 한인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인 정치인 육성에도 관심이 많다. 노석준 KACF 회장과 빌 황 타이거 아시아펀드(뉴욕 월가에서 높은 실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펀드) 대표, 데이비드 정 쓰리랩 사장 등 20여 명이 KPN(korean political network)을 만들어 한인 정치인과 정치지망생을 후원하고 있다.

형 성철씨는 샘 윤 보스턴 시의원과 최준희 에디슨시장을 전도유망한 한인 정치인으로 꼽았다. 그는 “최 시장과 샘 윤 시의원이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모든 KACF 관계자가 마음으로 후원하고 있다”고 했다.

KACF가 그동안 후원한 기부금액은 100만 달러가 넘는다. 지금까지 2000여 명의 젊은 한인들이 기부금을 냈다. KACF는 2005년 한인 단체로는 최초로 미국 포드재단으로부터 35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이 돈은 뉴욕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라틴 아메리카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 그리고 주류 커뮤니티들 간의 상호관계 증진을 위해 사용됐다.

KACF는 미국 주류기업(시티은행·골드만삭스·JP 모건·엘세비에·렉시스-넥시스·뉴욕라이프 등)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한인과 소수민족을 돕는 데 앞장서고 있다.

“자선사업은 미국 주류사회의 의무”

동생 황준철 변호사의 말이다.

“미국 주류사회는 자선사업을 매우 중요시해요.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까지 도와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갖고 있죠. 이민 1세가 중심이 된 한인회가 그동안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한인사회의 울타리를 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미국 문화에 맞지 않아요. 미국인들이 한인들에게 갖고 있는 부정적 관념을 1.5~2세들이 극복해 내야 합니다.”

KACF의 활동이 점차 늘어나면서 뉴욕시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2007년 ‘KACF 기부금 조성 축제’ 때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이 직접 참여해 축하연설을 했다. 블룸버그 시장은 “뉴욕시의 경제성장의 활력과 풍부한 문화 및 민족의 다양성에 한인들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만찬 때는 潘基文(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귀빈으로 참석했다. 반 총장은 “세계의 평화와 번영은 여러분이 한국인으로서, 미국인으로서, 세계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렸다”며 “미국사회를 움직이는 글로벌 한인이 되어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형 황성철 변호사의 말이다.

“우리 행사에 뉴욕시장이 참석한 것은 뉴욕에서 커져 가고 있는 한인들의 영향력을 입증하는 겁니다. KACF는 짧은 시간에 많은 성과를 냈습니다. KACF는 돈을 모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 그 이상의 포부를 갖고 있어요. 미국은 제2의 모국입니다. 이곳에 사는 타민족들뿐만 아니라 미국을 이끌 지도자를 후원해 미국사회를 주도한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 KACF는 유대인계 미국인이 만든 AIPAC(미국 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가 모델입니다. 이 단체는 미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압력단체 중 하나죠. KACF는 머지않아 AIPAC보다 훨씬 강력한 단체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