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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력특집·인도의 모든 것

귀화 인도인 로이 알록 쿠마르

“한국 교육, 10차선 20차선 도로 같은 인도식 교육 필요”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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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한국 교육이 슬로건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인도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흥미로운 게 인도 시골학교에서 10등 하는 아이가 미국 대도시 가서도 10등 안에 들어가요. 이게 인도 교육입니다.”

⊙ “중국이 ‘전 세계의 공장’이라면 인도는 ‘전 세계의 연구실’”
⊙ “인도의 강점은 문제 해결력… 전화선도 없던 시절, 위성 쏘는 능력”
⊙ “30년 후 ‘인도의 시대’ 오겠지만 ‘전 세계가 중국 중심!’ 같은 구호의 중국처럼 되길 원치 않아”
⊙ “인도 철학은 자기 경험. 노래방에 가면 노래는 많은데 ‘나의 노래’가 뭐냐?”
⊙ 1980년 26세 때 한국 유학… 대한민국 10만 번째 귀화인

로이 알록 쿠마르(Roy Alok Kumar)
1955년생. 인도 네루대 물리학부, 델리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네루대 대학원 한국어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 박사 과정 수료 / 부산외대 인도어과 교수, 부산국제교류재단 사무총장 역임. 現 부산외대 명예교수, 부산다문화국제학교 다문화연구원 원장
로이 알록 쿠마르 부산다문화국제학교 원장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도인은 간디 아니면 타고르가 아닐까. 하지만 부산 사람들은 다를 것 같다. 아마 로이 알록 쿠마르(68)라 답할지 모르겠다. 부산다문화국제학교 로이 알록 쿠마르 다문화연구원 원장 말이다. 부산외국어대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26세던 1980년 3월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입국해 서울대 대학원 외교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한국이 민주화 열기로 아주 뜨겁던 시절이었다.
 
  1989년부터 부산외국어대 교수로 인도어를 가르쳤으며 부산시 산하 부산국제교류재단 사무총장으로 재직했다. 2005년에 최인훈의 장편소설 《광장》을 힌디어로 번역해 인도에 소개한 일도 있다. 한국 여성과 결혼한 뒤 2명의 딸을 낳고 키우며 살아오다가 31년 만인 2011년 1월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두부모를 썰 듯 딱 10만 번째 귀화인이었다. 근래에는 MBC 〈대한외국인〉 등의 프로를 통해 ‘한국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내공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자는 지난 7월 3일과 4일 부산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부산다문화국제학교에서 그를 만났다.
 
 
  “힌두교는 종교가 아니라 思考”
 
  ― 종교는 없습니까.
 
  “사실 인도에서 태어났으니까 힌두교라고 할 수 있는데 힌두이즘은 무슨 종교가 아니에요. 그냥 인더스강 이쪽에서 태어났으니까 힌두지요. 마치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 한국인인 것과 같아요. (힌두교는 종교가 아니라) 사고(思考)예요, 사고….”
 
  로이 알록 원장은 기자와 만나자마자 아주 깊이 있는 화두(話頭)를 알려주었다. 한국인인 그가 이제는 힌두교라는 짐을 내려놨는지가 궁금해서 종교를 물어봤을 뿐이었다.
 
  ― 힌두교와 불교는 서로 통하는 거죠?
 
  “그러니까 인도는 다른 종교와 달리 ‘오픈한다’는 얘기죠. 믿음 체계가 아니에요. 누가 힌두고 누가 힌두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게 힌두는 버릴 수 없는 것이니까 개종(改宗)도 없지요.”
 
  대화가 점점 산으로 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 (힌두교는) 불교하고 어떤 관계냐? 시대 문제를 해결하는 스승이 불교의 부처님이었다는 얘기죠. 반대로 병이 고쳐지면 더는 약 먹을 일이 없잖아요. 그러면 신앙이(불교가) 필요 없고, (신앙에) 충성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인도의 기본적인 가르침이 뭐냐? 얼마나(아무리) 훌륭한 철학이든, 얼마나(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든 거기에 노예가 돼버리면 아니다(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도 충분하지 않다. 저것도 충분하지 않다’며 계속 (답을) 풀어가는….”
 
  이 대목에서 문득 통일신라 스님 혜초가 구법(求法)을 위해 인도를 향해 갔던 사실이 떠올랐다.
 
  “자연과학은 실험을 통해 언제나 똑같은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인도 철학은 자기 경험이에요. 노래방에 가면 (부를) 노래는 많은데 ‘나의 노래’가 뭐냐? 그 말이에요.
 
  게다가 그걸(경험을) 말로 하지도, 쓰지도 말라고 했어요. 인도의 불교 교리나 부처님 가르침도 석가(釋迦) 사후(死後) 400년 뒤에 나온 겁니다. 그래도 남는다면(남겨야 한다면) 그게 진리란 말이에요.”
 
 
  ‘경계인이 아니라 여전히 인도인’
 
2011년 1월 24일 경기도 과천 법무부 회의실에서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10만 번째 귀화 허가자인 인도 출신 로이 알록 쿠마르씨를 비롯한 귀화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그는 “인도에 있었다면 몰랐겠지만 한국으로 떠나오니 나름대로 인도를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부처는 한 번도 신(神)을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의 깨달음이 중요하다’ ‘열반이 중요하다’고 했죠. 열반이 뭐죠? 집착에서 탈피하는 겁니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는 것이죠. 그림자란 말입니다. 진실이 아니라 그림자란 말입니다.”
 
  로이 원장의 ‘설법(說法)’을 한참 들었다. 뭔가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한 지식인의 고뇌가 느껴졌다. 인도인이자 한국인, 인도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세월의 깊이가 느껴졌다. 원래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이 되었지만 그는 경계인이 아니라 어쩌면 여전히 인도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국(母國)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 한국과 인도의 오랜 인연에 대해 들어봤나요? 가야 김수로왕과 결혼한 허황옥(허황후) 일행이 인도에서 왔다는 설(說), 인도 타밀어와 한국어 유사성 등을 두고 요즘 자주 거론되고 있더군요.
 
  실제로 우리말과 타밀어를 비교하면 비슷한 단어가 많다. 하나-아나, 둘-두, 셋-셋, 아파(아프다)-아파, 꼬마-꾸마르, 비[雨]-뻬이, 쌀-사할, 궁둥이-궁디, 와(오라)-와, 봐(보라)-봐, 가(가라)-가, 엄마·아빠-음마·아빠 등등 유사 단어가 수백 개가 넘는다고 한다. 물론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제가 인도에서 올 땐 전혀 그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이젠 거꾸로 인도 사람들도 관심을 갖고 있어요. 허황옥 일행이 인도 북부 아요디아에서 왔다는 설, 인도 남쪽 첸나이에서 왔다는 설도 이제는 연구 대상이죠.”
 
  인도 남부 해안 지역에 위치한 첸나이는 인도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자 해양도시다. 첸나이 인근에 현대차, 삼성전자 현지 공장이 들어서 있다. 첸나이는 태평양과 이어지는 벵골만을 접하고 있어 고대부터 해상 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 길이 6km, 폭 437m로 아시아에서 가장 긴 백사장과 그 앞에 잔잔한 바다가 펼쳐지는 마리나 비치는 이곳이 지정학적으로 해상 교류의 최적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참조: 《김해뉴스》 2017년 11월 1일 자 〈가야불교 뿌리를 찾아서 (23) 첸나이·깐치푸람〉)
 
 
  使徒 토마스, 그리고 허황옥
 
  “요즘 보니까 인도 첸나이 쪽 연구소들이 그런 조사를 많이 하고 있어요. 또 설득력이 있고요. 그런데 타밀어·한국어 단어가 유사하다는 주장을 독일인 가톨릭 신부님이 처음 하셨는데 그분이 인도에 있다가 한국에 부임하면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됐다지요?”
 
  사실, 인도 남부는 가톨릭과도 인연이 깊다. 이곳에 시리아 동방 전례에 속하는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서기 52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토마스(도마) 사도(使徒)가 인도의 최남단 케랄라에 도착해 복음을 전하면서 인도의 가톨릭 역사가 시작됐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토마스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해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와 손을 직접 만졌던 ‘의심 많은’ 인물이었다.
 
  “토마스 사도는 그리스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 무렵, 인도 최남단 케랄라에 그리스인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고향 사람을 찾아) 전도하러 인도에 왔다가 순교를 당했는데 놀랍게도 허황후가 가야로 떠난 시대와 비슷합니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42년 김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한 6~7년 뒤인 48년에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맞이해 황후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계속된 주장이다.
 
  “당시 인도엔 이미 큰 배를 만들 수 있는 건조(建造) 기술이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큰 배를 타고 (가야에) 왔다는 얘기가 가능합니다. 해안 길로 왔으니 근거는 없지만, 배로 운반할 때 큰 불상이나 석탑을 옮길 수 있다는 거예요. 육로보다 현실적이죠.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해안가에서 발견되는 불상들이 굉장히 커요.”
 
  허황옥이 인도에서 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일명 진풍탑(鎭風塔)으로 불리는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고 알려져 있다.
 
  ―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가끔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그 분야의 연구에 대해 도명 스님(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이 쓰신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역사 기록을 어떻게 봐야 할지…. 저의 학문적 한계입니다. 신화(神話)는 역사 기록보다 강하다는 것을 많은 학자들은 말하죠. 또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 사람들의 역사도 존재하니까요.”
 
 
  인도에서 페르시아로, 아랍으로…
 
2018년 7월 부산 강서구 김해공항 유라시아 청년 대장정 출정식에 함께한 (왼쪽부터) 로이 알록 쿠마르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와 배수한 동서대 국제관계학 교수. 사진=조선DB
  로이 원장은 지금까지 논의되지 않았거나 통설로 믿었던 지식들이 깨지거나 새로운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흔히 현재 인도-유럽 계통의 인도인은 그 선조가 유럽에서 건너온 아리안(아리아인)으로 알려져 왔다. 독일 히틀러도 “게르만족이야말로 위대한 아리아 인종의 순수성을 가장 잘 보존한 민족”임을 내세웠고, 영국이 인도를 통치할 때도 인도 상층부 귀족은 원래 순수한 백인 아리안이라며 식민 통치를 정당화했다.
 
  다시 말해 철기문명의 외부 세력인 백인 아리안이 어두운 피부색의 드라비다인을 인도 남부로 몰아내고 현재의 중원을 차지했다는 것이 기존 인도 고고학의 시각이었다.
 
  로이 원장은 “지금 아리안들이 유럽 쪽에서 왔다는 게 다 깨졌다”고 단언했다.
 
  “아리안 문명, 인더스 문명, 하라파 문명이 유럽에서 왔다면 어딘가 조금이라도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도 근거가 없거든요.
 
  반대로 모든 지식의 흐름이 인도에서 페르시아로, 아랍으로 올라갔다는 게 증명되고 있다는 얘기죠.
 
  옛날 혜초도 인도로 왔지만, 아랍 쪽 기록이나 그리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기록을 보면 맞아떨어지는 게 많아요. 재밌는 게 알렉산더가 B.C 327년에 인도를 정복하러 왔어요.”
 
  알렉산더는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 중 한 명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그 가르침 덕분에 알렉산더는 고대와 중세 시대의 다른 정복자들과는 달리 철학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로이 원장은 기자에게 인도 원정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이른바 벌거벗은 철학자들인 짐나소피스트(gymnosophist) 사두(sadhu·고행자)들을 만나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알렉산더와 인도 현자(賢者)의 문답이 일부 실려 있다.
 
  “숲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알렉산더가 ‘기괴하게 생긴 사두’를 발견했다고 해요. 거의 벌거벗은 이 남자는 긴 머리에 헝클어진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습니다. 인도에서는 흔한 광경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인에게는 의아한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며칠 동안 계속 관찰했어요. 사두는 나무 밑에 앉아 줄곧 지평선을 바라보았던 겁니다. 어느 날 호기심을 풀기 위해 현지인 도움을 받아 대화를 시작했다고 해요.”
 
 
  인도 賢者와 알렉산더 대왕의 대화
 
알렉산더 대왕의 동상. 사진=조선DB
  로이 알록 원장의 말을 대화체로 풀어 설명하면 이렇다. 알렉산더가 이렇게 질문했다.
 
  “매일 나무 아래 앉아 몇 시간 동안 특정한 자세로 지평선을 바라보는 당신을 본다. 정말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건가?”
 
  현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알렉산더는 인내심을 잃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다시 물었다.
 
  “우리가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당신은 여기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넌, 뭐 하고 있느냐?”
 
  현자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알렉산더는 힘겹게 분노를 억누르며 사두에게 가까이 다가가 다시 물었다.
 
  “당신은 매일 몇 시간씩 여기 앉아서 시간을 허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주시오.”
 
  이번에는 사두가 고개를 들어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알렉산더 대왕에게 반문했다.
 
  “나는 알렉산더이며 지구를 지배하기 위해 나섰다.”
 
  “그 후엔 무엇을 할 계획입니까?”
 
  사두가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정복한 땅의 모든 부와 말과 코끼리를 그리스로 가져갈 것이다.”
 
  “대왕님, 목표를 달성하셨다고 가정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비참한 나라들의 남자들은 모두 내 노예로 삼고 여자들은 모두 그리스로 보내 우리를 즐겁게 하게 할 것이다.”
 
  “대단한 동기부여군요! 남자들은 모두 노예로, 여자들은 모두 노리개로!”
 
  사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마저도 다 이룬다면 다음엔 무엇을 하실 건가요?”라고 물었다. 외향적이고 활기찬 성격과는 달리 알렉산더는 한동안 조용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 후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왕좌에 앉아 휴식을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게 제가 하고 있는 일”이라 말하며 ‘특이한’ 인도 사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힌두교에 속하는 어떤 브라만 수행자들은 숲속에서 살면서 머리를 깎고 벌거벗은 채로 과일과 우유만을 먹으며 명상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로이 원장의 말이다.
 
  “나중에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했을 때 이런 일화가 있어요. 관 밖으로 알렉산더의 손이 나와 있었다고 해요. ‘내가 죽으면 들어갈 관의 양쪽 옆에 구멍을 내라, 그러고 내 양손을 관 바깥쪽으로 내놓아라’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겁니다.
 
  천하를 손에 쥐었던 자도 죽을 때는 결국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인데, 인도 현자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요?”
 
 
  “惡을 없애면, 神도 필요 없어”
 
인도의 갠지스강이 바다와 만나는 ‘강가사가르’에서 사람들이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의식을 치르고 있다. 사진=조선DB
  인도의 위대한 문명 얘기에 로이 원장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한국어 구사 능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부산 사투리를 쓰지 않는 게 좀 섭섭했다.
 
  “옛날 ‘로마 여성들 때문에 로마가 망할 것이다’는 말이 있었어요. 로마 문헌에 나오는 말입니다. 왜냐? 로마 여성들 사이에 인도에서 수입한 옷이 아주 인기가 있었어요. 인도는 일찌감치 직물 제조술이 뛰어났던 겁니다. 얼마나 얇게 만들었는지 ‘바람으로 짠 옷’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로마의 돈이, 황금이 다 인도로 간다는 겁니다.
 
  콜럼버스가 인도에 가려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합니다. 유럽과 인도의 중개인 역할을 튀르키예(터키)가 하면서 부자 나라가 되니까 그걸 막으려 스페인 등이 인도와 직(直)무역을 서둘렀고, 그러다 아메리카를 발견했던 겁니다.”
 
  ― 인도인들은 자기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가 봅니다.
 
  “인도 사람들이 그게 좀 부족해요. 현재 모디 정권이 들어선 뒤에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데 그 전에는 국수주의(國粹主義)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냥 조용히 ‘알 사람은 알겠지. 때가 되면 알겠지’ 그런 식이었어요.”
 
  ― 인도인의 국민성을 어떻게 보시나요.
 
  “인도는 생각을 하나로 고정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인도 출신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이 쓴 책이 《논쟁을 좋아하는 인도인》입니다. 논쟁을 중요하게 여기죠. 인도인이 바라나시를 흐르는 갠지스강에서 화장(火葬)을 하는데, 바라나시 같은 곳이 인도에 8군데나 있습니다.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곳이 매년 큰 논쟁터 같은 역할을 하죠.
 
  여러 학파가 모여 뜨겁게 논쟁하고 ‘이번엔 이것으로 하자!’고 했다가 내일 다시 바뀌는 게 인도입니다. 인도가 참 재미있는 게, 축제를 하면 신상(神像)을 만드는데 보통 두 달 이상이 걸립니다. 그런데 축제가 끝나면 다시 갠지스강가에 가서 그 신상을 빠뜨려 버립니다.”
 
  ― 정성 들여 만든 것을 왜 버립니까.
 
  “저도 어릴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재활용하면 되는데 왜 물속에 빠트릴까 하고요.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선악(善惡)의 갈등에서 신이 나옵니다. (축제를 통해) 악을 없애면, 신도 필요 없게 됩니다. 그러니 신상도 이젠 필요 없는 것이죠.
 
  인도 명절의 풍습 중 하나가 한 해 동안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을 가장 먼저 찾아가 인사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백지(白紙)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요. 이게 인도란 말이에요. 내년에 문제가 생기면 다시 신이 등장하는 것이죠.”
 
  ― 그렇게 갈등이 해소되면 인도 사람들은 싸울 일도, 살인 사건도 없겠네요.
 
  “사람이 사는 곳인데 왜 살인이 없겠습니까. 다만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며칠 전 길을 가는데 한 꼬마가 장난 삼아 흙속 지렁이를 발로 밟더군요. 인도에선 있을 수 없어요. 돌을 던져 개구리를 죽인다? 인도에선 상상도 할 수 없어요.”
 
 
  “나는 하고 싶은 걸 해 왔다, 이게 나의 자부심”
 
  로이 알록 쿠마르 원장은 네루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뒤 방향을 틀어 델리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제가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이유가 있어요. 그러니까 1974년에 인도가 첫 핵실험을 했거든요. 인도 총리가 모라르지 데사이(재임 1977~1979년)였는데, 핵에 대해 강연하는 것을 들었는데 시골 교장선생님 같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핵이 정말 무시무시한 무기인데, 각국마다 핵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데, 너무 한가한 말씀이셔서 놀랐습니다. 그때 국제정치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죠.”
 
  ― 국제정치학 중에서도 동북아 정치를 택했고, 그래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인도 학생들은 한·중·일 3국 중에 일본으로 유학을 많이 갔어요. 스즈키라는 일본 자동차 회사가 1960~1970년대 인도에 처음 들어왔는데, 이에 일본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많은 사람이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어요. 최근에는 중국 정치를 전공하는 경우가 많아요.”
 
  ― 한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 당시 주위 반응은 어땠나요.
 
  “우리 가족 중에 외교관이 있었어요. 저도 외교관 시험을 봤고요. 그 무렵 한국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되었죠. 결정하기 쉽지 않았는데 한국에 간다니까 주위 친구들이 정신 나갔다고 하더군요.
 
  요즘 그 친구들을 만나면 한국행 선택 잘했다고 합니다. 자기네들(인도 관료)은 그냥 고급 노예였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그때 한국으로 온 것이 잘 한 건지 못 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고 싶은 걸 해 왔다, 이게 나의 자부심입니다.”
 
 
  “딸은 한국 최초의 빌 게이츠 장학생”
 
  ― 서울대 외교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했지만 졸업논문은 쓰지 못했더군요.
 
  “그 얘기는 안 하고 싶은데… 박사시험도 치고 과정도 모두 마쳤어요. 논문을 준비하는데 지도교수가 정년퇴직을 하셨어요. 시간이 흘렀고 장학금도 나오지 않게 되어 인도로 돌아가게 됐는데, 그땐 내 인생이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죠. 인도에서 잠시 교편도 잡았는데 한국에서 계속 오라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때 어머니가 누군가와 평생을 약속했으면 가서 결혼하고 오라고 하셨어요.
 
  이후 나를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다시 오게 됐고 나의 선택인지, 선택 자체가 나를 불렀는지 잘 모르겠으나, 그 시대와 나에 대한 부름이 잘 맞아 이렇게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로이 원장은 얼굴이 밝아지며 딸 이야기를 했다.
 
  “실은 어제 둘째 딸이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어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딸의 전화를 받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내가 못 한 일을 제 딸이 해낸 겁니다. 딸 자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애들이 공부에 소질이 있어요. 뛰어나요.”
 
  ― 아빠를 닮아서일까요?
 
  “그것은 모르겠고, 일단 (공부에) 목마름이 있어요. 목마름이 있으니까 열심히 한 것이죠. 난 한 번도 공부시킨 적이 없거든요.”
 
  두 딸은 부산외국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명문 와세다대학에 진학해 장학금을 받으며 생활을 스스로 해결했다고 한다. 큰딸은 도쿄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고, 둘째 딸은 와세다대를 조기 졸업한 뒤 하버드대를 장학생으로 다녔고 케임브리지대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큰애는 사회 정책과 다문화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곳 부산다문화국제학교에서 2년간 봉사도 했지요. 아주 뛰어난 아이입니다.
 
  작은애는 세계 지성사(知性史)를 전공했어요. 한국인 최초의 빌 게이츠 장학생이죠. 대학원 졸업 전에 후버연구소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하버드대 연구소로 오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조건이 ‘후버’가 2~3배는 더 좋았어요.”
 
  로이 원장의 입이 귀밑에 걸릴 정도로 커졌다. 그러다 이내 진지해졌다.
 
 
  “한국 교육, 지하철과 같아”
 
부산다문화국제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는 로이 알록 쿠마르 원장.
  “나는 ‘다문화가정의 시조(始祖)’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 사회의 초기 다문화가정에서 두 아이를 키웠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죠.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문화학교야말로 오바마(미 대통령)가 나올 수 있는 학교’라고요.”
 
  부산다문화국제학교(부산 동구 중앙대로 303)는 학생이 70명이다. 14개 나라에서 온 아이들과 탈북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중도 입국 학생을 포함해 다문화가정의 자녀 및 다문화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교육과 문화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선생님 수는 거의 30명. 선생님 1명이 학생 둘을 가르치는 셈이다.
 
  3개 학급이 운영되는데 교과수업(한국어, 영어, 이중언어, 수학 등)은 한국어로 진행한다. 수준별 수업, 각종 활동(특별, 진로, 봉사, 동아리)도 병행한다.
 
  “지금 부산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이만큼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있는 학교가 없을 겁니다.”
 
  ― 지금 우리나라 전체를 봤을 때 굉장히 잘 운영되고 있네요. 어떻게 운영을 합니까.
 
  “물론 지원을 받는데 강사 월급 수준입니다. 여기 오는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빨리, 짧은 시간 내에 가르쳐야 하는데 지원이 너무 없어가지고…, 그래서 지금 로비하는 데 바빠요.”
 
  기자는 잠깐 학생들을 만나봤는데 어찌나 인사성이 밝은지 놀랄 정도였다. 표정도 밝고 모두 똘똘해 보였다.
 
  “여기 들어오는 아이들 대부분이 다른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오거든요. 그런데 올해 한 학생이 한양대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어요.”
 
  ― 와!
 
  “아이들 중에 자폐 같은 장애가 있는 아이도 있는데 4년 동안 엎드려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그림을 그리면, 고양이와 개를 그리는데 그림 속에서 고양이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요. 그런 것을 보면 한국 교육이 지하철과 같아요.”
 
 
  “인도에는 객관식 시험 없어”
 
  ― 어두운 터널 속을 달리는….
 
  “터널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교육 말이에요. 정해진 시간에 입학하고 졸업하는 식이죠. 한국 교육도 인도처럼 획일적이지 않은 교육이 필요합니다. 10차선, 20차선 도로 같은 인도식 교육이 필요해요. 유턴, 직진, 좌회전, 우회전도 할 수 있는 교육 말입니다.
 
  어떤 때는 한국 교육이 슬로건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인도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흥미로운 게 인도 시골 학교에서 10등 하는 아이가 미국 대도시 가서도 10등 안에 들어가요. 이게 인도 교육입니다.
 
  교육이 미니멈, 맥시멈이 있을 수 있는데 미니멈으로 너무 작게, 너무 낮게 잡으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사실은 엘리트를 만드는 과정이 교육이에요.”
 

  ― 한국은 전체적으로 평준화 교육을 지향하고 있어요.
 
  “평준화 교육을 해서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인도에는 객관식 시험이 없어요. 무조건 주관식 시험을 봅니다. 물론 지금은 객관식 비중이 많이 올라가긴 했어요.
 
  나는 지금도 중학교 시절 시험문제가 떠오릅니다. 뉴턴 법칙의 원리를 묻는 시험이었는데, 두 명의 권투 선수가 링에 올라간 그림을 그려놓고 어떤 법칙이 적용됐는지 써보라는 겁니다.
 
  중·고교 때는 시험시간이 한 과목당 2시간, 대학 때는 3시간입니다. 어떤 과목은 오픈 북이에요. 그러나 정답을 찾아내기가 아주 어려워요. 자기 철학이 없으면 한 줄도 못 씁니다.
 
  몇 해 전 《뉴욕타임스》에 만평 두 컷이 실렸는데 한 컷은 1950년대 미국인 부모가 아이에게 밥을 먹으라면서 이렇게 다그칩니다. ‘어서 먹어. 중국, 인도 이런 데서 굶어 죽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니?’라고요. 다른 컷은 오바마 전 대통령이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이렇게 다그쳐요. ‘너희 숙제 잘해야 해. 이제 인도 학생들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30년 후 인도의 시대 도래할 것”
 
  ― 요즘 인도의 젊은 20대들을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매년 인도에 가서 젊은이들과 이야기해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지금껏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았다’는….”
 
  ― 아니, 인문학적인 이야기를 해도 그런가요?
 
  “인도 젊은이들의 논쟁 주제들이 어마어마하더군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인도 학생들은 IT 기술, 수학만 뛰어나다고 생각하는데 세계적인 톱10 기업을 들여다보면 중역 4~5명은 인도 사람이에요. 금융계나 대학도 마찬가지죠.
 
  중국이 ‘전 세계의 공장’이라면 인도는 ‘전 세계의 연구실’이에요.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의 연구소 대부분이 인도에 들어와 있어요. 인도의 강점은 문제 해결력입니다. 길에 전화선도 깔려 있지 않던 시절, 위성을 쏘는 그런 능력 말이죠.”
 
  ― 인도의 미래를 어떻게 봅니까.
 
  “앞으로 30년 이후 인도의 시대가 도래할 겁니다. 인도가 아주 급성장하는, 경제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모범국가가 될 수 있어요. 좀 걱정되는 측면도 있어요. 인도가 중국처럼 되는 걸 원치 않아요. ‘전 세계가 중국 중심!’ 같은 구호처럼 말이죠.”
 
  ― 한국과 인도의 미래는 어떻게 봅니까.
 
  “서로가 발전 가능성이 많아요. 한국은 짧은 시간 내에 발전하는 속도감, 그 노하우가 엄청난 재산인데 이걸 외국에 던져줘야 된다고 봅니다.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계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과 인도 관계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라지고 있어요. 무기산업 분야까지 교류의 폭이 넓어지고 있죠. 그러나 앞으로 나라보다 도시가 중요해지는 시대가 올 겁니다. 도시가 모든 발전의 책임을 질 거란 말이에요.
 
  국가는 그냥 안보·외교밖에는 다른 거 할 게 없어질 겁니다. 국적이 아니라 시민, 시티즌이란 개념이 중요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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