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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홋카이도 하코다테

일본 역사상 유일의 공화국 ‘에조공화국’의 자취를 찾아서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ironhe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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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부의 해군 제독 에노모토 다케아키, 군함 8척과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메이지 정부에 맞서 하코다테에 ‘에조공화국’ 건설
⊙ 에노모토군의 중심지였던 서양식 요새 고료카쿠(五稜郭)… 신센구미의 히지카타 도시조가 최후를 마친 와카마쓰초
⊙ 근대화의 창(窓)이었던 모토마치 거리와 하코다테 항구의 가네모리 아카렌카 창고군
⊙ ‘역적의 수괴’ 에노모토는 사면 후 주러시아공사·외무대신 등으로 중용돼
⊙ 구막부군 추모비인 벽혈비 인근에 있던 야치가시라의 가쓰다온천은 김옥균이 묵어간 곳
하코다테 고료카쿠타워에서 내려다본 고료카쿠.
  일본의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들은 “일본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天皇)’이 다스려온 아주 특별한 나라”라고 주장한다. ‘만세일계’란 태양신(太陽神)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후예인 초대(初代) 진무천황(神武天皇·기원전 660년 즉위)으로부터 제126대인 레이와(令和) 현 천황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같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인한 왕조 교체 없이 천황의 혈통이 대대로 이어져 왔다는 의미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입증된 주장은 아니다.
 
  이런 일본에서 ‘공화국’이 존재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름하여 에조(蝦夷)공화국이다.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공화국(Commonwealth of England·1649~1659년)처럼 비교적 장기간 존재했던 전국 단위의 정권은 아니었고, 일본의 변방이었던 홋카이도(北海道) 남부의 한 조각 땅을 점거하고 7개월 정도 존재했던 정권이니 그 존재가 잊힌 것도 당연한 일이겠다. 5월 말 에조공화국의 흔적을 찾아서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函館)를 다녀왔다.
 
  에조공화국의 ‘에조’란 ‘에조인(蝦夷人)’에서 따온 말이다. 에조인들은 원래 홋카이도는 물론 일본 동북부에 살던 원주민이다. 에도(江戶)막부 시대에 홋카이도 남단에 마쓰마에번(松前藩)이 설치되기는 했으나 일본 본토의 중앙정부(도쿠가와 막부)나 인근 지방 번의 통치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는 주인 없는 땅이나 다름없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와 개항(開港)을 압박한 결과 이듬해 맺어진 미일화친조약의 결과 하코다테는 에도 남쪽의 시모다(下田)항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먼저 서양 열강에 문을 연 항구가 된다. 미국이 하코다테의 개항을 요구한 이유는 당시 왕성하던 포경업(捕鯨業)의 전진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일본이 서양 열강과 잇따라 조약을 맺으면서 서양 각국은 하코다테에 영사관과 상관(商館), 그리고 이곳에 거류하는 자국민들을 위한 교회당을 지었다. 고료카쿠(五稜郭), 모토마치(元町), 가네모리 아카렌가 창고(金森赤レンガ倉庫) 등 흔히 꼽는 하코다테의 관광명소들은 바로 이 시기의 유적들이다.
 
 
  고료카쿠
 
  이 중에서도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고료카쿠였다. 고료카쿠타워(1964년 건축, 2006년 재건축)에 오르면 25만1000㎡(도쿄돔의 약 5배)에 달하는 ‘국가특별사적’인 요새와 주변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서와 남북의 길이 약 500m, 해자(垓字) 둘레 약 1.8km, 사적 지정지 전체 둘레는 약 3km에 이른다.
 
  고료카쿠는 글자 그대로 ‘오각 별’ 모양의 서양식 요새다. 16세기 이후 총과 대포가 발달하면서 서양 각국에서는 적의 포탄에 맞아도 성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고 방어군의 입장에서 사각(死角)을 줄일 수 있는 축성법(築城法)들이 고안되었다. 이런 축성술은 특히 소수(少數)의 인원으로 효과적으로 방어해야 하는 해외 식민지로 확산되었다. 타워에 올라 고료카쿠를 내려다보는 순간, ‘얼마 전 읽었던 로저 크롤리의 《바다의 제국들》에 나오는 키프로스의 파마구스타 요새나 몰타섬의 요새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양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고료카쿠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으로 하코다테가 개항장(開港場)이 된 지 3년 후인 1857년 착공, 1864년 완공되었다. 서양 세력의 압박 속에서 막부가 인력 양성을 위해 설립한 하코다테제술조소(諸術調所) 교수였던 다케다 아야사부로(武田斐三郞)가 설계했다. 일본인들은 “서양 기술을 처음으로 접한 막부 말기의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의 상징으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한 ‘화혼양재(和魂洋才·일본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의 상징”이라고 자랑한다.
 
  당초 고료카쿠는 서양 세력으로부터 하코다테를 방위하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지만, 완공된 1864년에 이르러서는 이미 일본이 서양 열강과 수교한 뒤라 군사적 중요성은 크게 떨어졌다. 이에 고료카쿠에는 오늘날로 치면 하코다테시청이라고 할 수 있는 하코다테부교쇼(函館奉行所)가 들어서 하코다테, 더 나아가 홋카이도 전체의 행정중심지 역할을 했다.
 
 
  에노모토 함대의 탈주
 
에조공화국 총재 시절의 에노모토 다케아키.
  이렇게 역사의 뒷전으로 잊힐 뻔했던 고료카쿠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든 것은 1868년 10월 26일,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1836~1908년)가 이끄는 구(舊)막부군이 입성(入城)하면서부터였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도쿠가와 막부의 해군 부총재였다. 지금으로 치면 해군참모차장쯤 된다고 할까. 메이지(明治) 신정부에 항거해 도쿠가와 막부의 잔당을 이끌고 하코다테까지 밀려온 사람이지만, 그는 결코 ‘수구꼴통’이 아니었다. 오히려 1861~1867년 네덜란드에 유학하면서 항해술, 화학, 지질학, 국제법 등을 공부한 개명(開明)한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년)마저 ‘공순(恭順)’을 내걸고 에도(지금의 도쿄)를 들어 바치는 마당에 왜 고단한 저항의 길을 택한 것일까? 그는 1868년 8월 20일 휘하 군함 8척을 이끌고 에도항을 출항하기 전 조정에 격문을 보냈는데 “왕병(王兵)이 정벌에 나섰고, 우리 주군(主君·도쿠가와 요시노부)을 모함하면서 조적(朝敵·조정에 반역하는 적)의 오명을 씌웠다”면서 “그 처분은 이미 정도를 넘어섰고, 결국 영지를 몰수하고 창고를 빼앗고 조상의 분묘를 폐기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되었다. 구막신(舊幕臣)의 영지는 갑자기 관유물(官有物)이 되었고, 따라서 우리 번사(藩士)는 겨우 집만 갖는 사태가 빈발하였고, 이제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는 강성한 번(藩)들의 사심에서 나온 것으로, 진정한 왕정이라 볼 수 없다”고 비난했다. 한마디로 조슈(長州·지금의 야마구치현)와 사쓰마(薩摩·지금의 가고시마현) 두 번이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명분으로 ‘유신(維新)’을 단행했다지만, 그 실질은 자기들이 정권을 잡기 위한 쿠데타에 불과했고, 그 때문에 도쿠가와 막부의 가신들의 생존권이 위협받게 되었다는 얘기다.
 
 
  히지카타 도시조와 줄 브뤼네
 
에조공화국에 합류했던 프랑스군 대위 줄 브뤼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네이든 알그렌(톰 크루즈 분)의 모델이 됐다.
  에노모토는 이런 명분을 내걸고 조슈와 사쓰마가 주도한 신정권 아래서 설 땅을 잃게 된 도쿠가와 막부의 잔당을 널리 모집했다. 이때 가장 먼저 달려와 에노모토군의 주력이 된 이들이 신센구미(新選組·新撰組)였다. 신센구미는 막부 말기에 막부의 명령을 받아 교토(京都)에서 활동하는 반(反)막부 세력을 처단하는 칼잡이들이었다. 신센구미의 2인자였던 부장(副長) 히지카타 도시조(土方歲三·1835~1869년)가 이들을 이끌었다. 에노모토의 함대는 센다이(仙臺) 등을 거치면서 막부의 잔당을 흡수, 하코다테에 이를 때에는 병력이 3000여 명에 이르렀다.
 
  흥미로운 것은 도쿠가와 막부에 고용되었던 프랑스군 군사교관인 줄 브뤼네 대위와 그의 부하 4명이 에노모토 함대에 합류했다는 점이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전(前) 미군 대위 네이든 알그렌(톰 크루즈 분)은 브뤼네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물론 양념을 듬뿍 쳤지만).
 
 
  에조공화국 수립
 
  1868년 10월 20일 하코다테 북쪽 와시노키(鷲ノ木)에 상륙한 에노모토군은 소수의 신정부군을 차례로 격파하고 10월 26일 고료카쿠에 입성했다. 요코하마(橫浜)에 있던 서양 열강의 외교관들은 에노모토 집단을 국제법상의 ‘교전단체(交戰團體)’나 ‘정권’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지만, 하코다테의 서양 외교관들은 현지의 자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에노모토 세력을 ‘사실상의 권력(authorities de facto)’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12월 15일, 에노모토 집단은 ‘에조국(蝦夷國)’을 건립했다. 이를 두고 흔히 ‘에조공화국’이라고 말했지만, 이들이 공식적으로 천황의 통치권을 부인하거나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이 구성원들의 투표를 통해 정부를 구성했다는 것은 특기(特記)할 만하다. 하코다테의 현지 주민들이나 말단 병사들은 제외하고 사관(士官) 이상의 간부들만 투표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한 것은 일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총 투표자는 856명이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대통령 격인 총재로 선출되었다. 신센구미 부장이던 히지카타 도시조는 육군차관 내지 육군부사령관 격인 육군부교위로 선출되었다. 이때 그의 상관으로 육군장관(혹은 육군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육군부교로 선출된 사람이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1833~1911년)다. 청일전쟁, 갑오경장(甲午更張) 당시의 주한일본공사, 바로 그 사람이다.
 
  에노모토 정권은 메이지 정부에 보낸 서신을 통해 자신들은 곤궁에 처한 도쿠가와 막부의 가신(家臣)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며, 홋카이도 개척이 궁극적으로 일본을 위한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런 주장이 먹혀들 리 만무했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던 메이지 정부는 1869년 4월 초 토벌군을 출동시켰고, 그해 4월 9일 그 1진이 하코다테 서북방의 오토베(乙部)에 상륙했다.
 
 
  에노모토의 항복
 
고료카쿠로 가는 길 보도에 있는 군함 간린마루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블록. 이 길에는 에노모토 함대의 군함 그림을 담은 블록이 여러 개 있다.
  당초 에노모토 정권이 의지하고 있던 것은 가이요(開陽)를 비롯한 8척의 서양식 군함이었다. 이들은 신정부군의 해군력을 압도했지만, 그사이 태풍을 만나거나 신정부군과의 해전에 의해 차례로 침몰해버렸다. 고료카쿠로 가는 길 보도(步道)에서 에노모토 함대 군함의 그림을 담은 표지석들을 볼 수 있다.
 
  신정부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서양식 무기를 앞세워 에노모토군을 차례로 격파하고 고료카쿠에 육박했다. 5월 14일 정부군은 에노모토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에노모토는 이를 거절하면서도 정부군 참모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1840~1900년)에게 《해율전서(海律全書)》를 보냈다. 에노모토가 네덜란드 유학 시절 공부했던 해양법 및 국제법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책이었다. 자신은 죽더라도 신일본(新日本)은 그 내용을 잘 숙지해 국제질서 속에서 뒤처지지 않기를 바라는 충정(衷情)에서였다. 구로다는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 일본 측 수석대표였고, 후일 제2대 일본 총리를 지냈다.
 
  5월 16일, 신정부군은 고료카쿠 외곽 포대인 지요가다이(千代臺) 포대를 점령했다. 지요가다이를 지키던 나카지마 사부로스케(中島三郞助·1821~1869년)는 두 아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戰死)했다. 이것이 하코다테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다. 에노모토 휘하 육군의 핵심 전력(戰力)이던 히지카타 도시조는 이미 5월 11일 전사했다.
 
  고료카쿠를 포위하고 있던 구로다는 《해율전서》를 받은 데 대한 답례로 술과 안주를 에노모토에게 보냈다. 에노모토는 지칠 대로 지쳐 최후를 기다리고 있는 부하들을 보면서 마음을 바꾸었다. 에노모토는 다음 날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하코다테부교쇼
 
고료카쿠타워 1층 중정에 있는 히지카타 도시조의 동상.
  고료카쿠타워 정상(전망 2층) 전시실에는 페리 제독의 하코다테 내항(來航)에서부터 에노모토의 항복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작은 인형들로 묘사해놓은 전시물이 있다. 그보다 더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전망 2층과 1층 중정(中庭)에 있는 히지카타 도시조의 동상이다. 전망 2층의 동상은 생전에 히지카타가 찍어놓은 사진을 바탕으로 한 좌상(坐像)이고, 1층의 동상은 입상(立像)이다. 둘 다 단발에 양복 차림인데, 특히 1층 중정의 동상은 마치 프랑스 청년 귀족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히지카타를 두고 “입실단청풍(入室伹淸風)”, 즉 “방에 들어가면 맑은 바람이 부는 것 같은 그런 상쾌한 인물”이라고 평했다고 하는데, 그런 인물평을 잘 형상화했다는 생각이 든다. 늘 느끼는 바이지만, 일본인들은 동상을 참 잘 만든다.
 
  고료카쿠타워를 나와 바로 옆에 있는 라면 가게에서 시오(鹽)라면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고료카쿠 안으로 들어갔다. 15년 전 여름 패키지여행으로 온 적이 있지만, 그때는 메이지유신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전이었다. 지난 10년 가까이 메이지유신 전후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왔던 터라, 그때와는 울림이 달랐다. 고료카쿠에 입성하던 구막부군의 심정, ‘죽을 자리’를 찾아 마지막으로 성문을 박차고 나서던 히지카타 도시조의 심정, 그리고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터이니, 부하들은 관대히 처분해달라”며 성문을 나섰을 항장(降將) 에노모토의 심정이 교차했다.
 
  거금 500엔(아내까지 합치면 1000엔)을 내고 부교쇼 건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건물이 새 건물이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지은 것이 분명한…. 안내문을 보니 1871년 해체되었다가 2010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15년 전에는 이런 건물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차라리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을 걸….
 
 
  나카지마 사부로스케
 
히지카타 도시조가 전사한 곳임을 알리는 비석. 하코다테 와카마쓰초에 있다.
  고료카쿠 경내를 절반쯤 돌아본 후 1.7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지요가다이공원으로 향했다. 야구장, 육상경기장, 청소년센터 등이 함께 있는 공원이다. 앞에서 말한 하코다테전쟁 당시 지요가다이 포대가 있던 곳이다. 이 공원 외곽 대로변에는 나카지마 사부로스케와 그의 두 아들이 최후를 마친 곳임을 알리는 비석이 서 있다.
 
  옛 무사답게 모시던 주군을 위해 최후까지 싸우다가 아들들과 함께 목숨을 바쳤지만, 에노모토처럼 나카지마 사부로스케도 ‘꼴통’은 아니었다.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우라가(浦賀)만에 나타났을 때, 그들을 처음 접견한 막부의 관원이 바로 그였다. 이후 그는 1855년 막부가 설립한 나가사키 해군전습소 1기생으로 입교, 서양의 해군과 해양에 대해 배웠고, 3년 후에는 군함조련소 교수가 되었다. 당시로서는 무척 개명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런 사람이 시류(時流)에 편승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봉사하던 체제와 운명을 같이했다는 점이 상쾌하다.
 
  1931년 지요가다이 인근은 나카지마 사부로스케와 그의 두 아들을 기려 나카지마초(中島町)로 개명(改名),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마도 메이지유신으로 수립된 천황제 국가는 군국주의에 몸 바치는 신민(臣民)을 만들기 위해 메이지유신에 맞섰던 이들까지 영웅으로 주조(鑄造)해낸 것이리라.
 
 
  시바 료타로가 발굴한 영웅들
 
  나카지마 사부로스케 기념비가 있는 곳에서 대로를 따라 20분 정도를 걸으면 와카마쓰초(若松町)에 있는 하코다테시종합복지센터가 나온다. 입구에는 히지카타 도시조의 사진이 붙은 안내판이 있다. 그는 하코다테항 인근 벤텐다이바(弁天臺場) 포대를 지키던 신센구미 부대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출동했다가 이곳에서 전사했다. ‘싸움꾼’이던 그는 아마 ‘죽을 자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냉정하게 보면 히지카타 도시조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몸담았던 신센구미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치깡패’ 비슷한 조직이었다. 정권 말기의 혼란기에 직면한 막부가 자신들에게 도전해 오는 존왕양이파 낭인(浪人) 무사들을 ‘칼에는 칼로’ 제압하기 위해 고용했던 근본 없는 칼잡이들이었다.
 
  이런 그들을 ‘800년 무사 정권의 최후를 장식한 마지막 사무라이’로 포장해낸 것인데, 일본의 ‘국민 소설가’로 불리는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1923~1996년)였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는 히지카타 도시조와 신센구미는 물론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년) 등 자칫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을 인물들을 발굴해 ‘영웅’으로 빚어냈다. 시바 료타로 덕분에 히지카타 도시조나 사카모토 료마 모두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을 꼽을 때면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 되었다.
 
  히지카타 도시조는 지금도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콘텐츠다. 하코다테에는 그의 이름 딴 ‘히지카타의 꿈’이라는 와인이 있는가 하면, 거리 상점 윈도에는 천진한 표정의 어린 왕자 같은 히지카타를 내세운 광고도 붙어 있다.
 
 
  근대화의 창, 모토마치
 
모토마치에 있는 러시아정교회성당인 하리스토스성당과 이를 도안으로 사용한 맨홀 뚜껑(오른쪽).
  다음 날 모토마치 거리를 찾았다. 고료카쿠가 메이지 신정부에 항거한 보신전쟁(戊辰戰爭·1868~1869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하코다테전쟁을 상징한다면, 모토마치 거리는 1854년 이후 일본의 첫 번째 개항지, 즉 서구화·근대화의 창(窓)이었던 하코다테의 모습을 보여준다.
 
  모토마치 초입에는 고토켄(五島軒)이라는 양식점이 있다. 1879년 문을 연 유서 깊은 음식점이다. 고토켄의 초대 요리장인 고토 에이요시(五島英吉)는 하코다테전쟁에 참전했던 막부군이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잔당 소탕 시 이를 피해 러시아 영사관에 숨어 들어가 생활하면서 그곳에서 러시아 요리를 배웠다고 한다. 하코다테의 마트에서는 고토켄에서 만든 카레 등을 살 수 있다.
 
  모토마치에는 일본 개항 초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서양식 건물들이 많다. 특히 러시아정교회 성당인 하리스토스성당이나 구 하코다테공회당은 하코다테의 상징물 가운데 하나다. 하코다테 시내 곳곳에서는 고료카쿠, 하리스토스성당, 구 하코다테공회당 등을 모티브로 한 맨홀 뚜껑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의 도시들을 가 보면 그곳의 역사적 사건이나 명소 등을 담은 맨홀 뚜껑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일본 맨홀 뚜껑 마니아도 있을 정도다.
 
  구 하코다테공회당 인근에는 페리기념공원이 있다. 페리 제독 내항 150년을 맞아 세워진 페리 제독의 동상도 있다. 일본이 포함(砲艦)외교로 개항을 강요했던 페리를 기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강요당한 개항이지만 이후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역량으로 근대화를 성취하고 열강의 하나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일본의 포함외교로 개항을 강요당했던 강화도조약 이후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협객 야나가와 구마키치
 
모토마치 거리의 인력거꾼. 언덕 아래로 하코다테항이 보인다.
  약간 지대가 높은 모토마치 거리를 걷다 보면 바다가 보이는 하치만자카(八幡坂) 같은 이름이 붙은 언덕길들을 만나게 된다. 관광객들이나 사진작가들이 사랑하는 촬영 포인트다. 모토마치 거리의 옛 건물 중에는 지금은 카페나 기념품점으로 이용되는 곳이 많다. 잠시 바닷가로 내려와 옛날 주택을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 경양식집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스마트폰 지도를 보고 찾아왔는데 2층 창밖으로 항구가 잘 보인다. 횡재를 한 느낌이다.
 
  식사를 마친 후 전차역 하코다테도크마에 근처에 있는 어린이공원으로 향했다. 이곳이 벤텐다이바 포대를 수비하던 신센구미의 마지막 부대가 항복한 곳이다. 교토 시절 공포의 대상이던 ‘미부(壬生)의 늑대’들은 이곳에서 종언(終焉)을 고했다.
 
  이곳에서 다시 모토마치로 올라가면 하코다테시립서중학교 인근에 절이 두 곳 있다. 칭명사(稱名寺)와 실행사(實行寺)라는 절이다. 역사에 큰 글자로 기록된 명찰(名刹)은 아니다. 이곳을 굳이 찾은 것은 이곳이 신센구미를 비롯한 구막부군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 안장한 곳이기 때문이다. 에도 출신의 야쿠자 두령으로 고료카쿠 건설 때 부하들과 함께 하코다테로 흘러들어왔던 야나가와 구마키치(柳川雄吉)는 정부군의 금령(禁令)을 무시하고 실행사 주지와 의논, 796구의 구막부군 시신을 수습했다. 야나가와는 이 때문에 정부군에 체포되었지만, 그의 의기(義氣)를 인정받아 풀려났다. 칭명사에는 히지카타 도시조를 기리는 작은 공양탑(供養塔)이 있다.
 
 
  니지마 조의 밀항
 
하코다테항 해변의 가네모리 아카렌가 창고군. 지금은 쇼핑센터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모토마치 거리가 하코다테에 이식(移植)된 서양문명을 보여준다면, 하코다테항 인근 해변은 하코다테, 아니 일본이 밀려오는 서양문물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은 공원이 된 미도리노시마(綠の島) 인근에는 전마선(傳馬船)에 오른 젊은이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윤동주와 정지용의 모교이자 일본의 명문 사립대학인 도시샤(同志社)대학의 창립자인 니지마 조(新島襄·1843~1890년)의 동상이다. 무사의 아들인 그는 1864년 막부의 금령을 깨고 이곳에서 미국으로 밀항(密航)했다. 동상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이의 기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인근의 가네모리 아카렌가 창고군(倉庫群)은 개항 이후 하코다테가 교역항으로 번성했던 시절의 유산이다. 글자 그대로 ‘붉은 벽돌’로 지은 창고들인데, 지금은 이곳의 특산품·기념품들을 파는 쇼핑몰로 활용되고 있다.
 
 
  구로다의 구명운동
 
에노모토 구명을 위해 삭발한 구로다 기요타카(왼쪽). 어색한 듯 머리를 만져보는 모습이 재미있다.
  ‘에조공화국’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어떤 기준으로 봐도 용납될 수 없는 ‘역적의 수괴(首魁)’였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구했다. 토벌군 참모로 신정부의 실력자였던 구로다 기요타카는 “그를 참(斬)하려면 내 목을 먼저 치고 난 후 참하라”면서 에노모토의 구명(救命)에 앞장섰다. 구로다는 그러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삭발까지 감행했다. 박박 깎은 머리를 손으로 만지고 있는 구로다의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당대의 지식인이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년)도 에노모토의 구명에 일조했다.
 
  에노모토는 1872년 1월 석방되어 홋카이도개척사(北海道開拓使)가 된 구로다 기요타카 밑에서 홋카이도의 석탄 등 자원 개발, 농업, 철도 건설 등을 위한 조사·기획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1874년 에노모토는 주러시아공사로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그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해군 중장(中將) 계급을 받았다. 군인을 존중하는 러시아 문화를 감안한 조치였다. 예전의 반역자가 한 나라를 대표하는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부임했다는 것은 러시아 궁정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하코다테의 에노모토’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자신의 지명도를 십분 활용, 사할린-치시마교환조약 등을 성공적으로 처리했다.
 
  이후 에노모토는 해군경(해군대신·1880~1881년)을 거쳐 주청공사(1882~1885년)를 지냈다. 1885년 일본에 내각제가 도입되면서 제1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발족하자, 에노모토는 초대 체신대신으로 입각(入閣)했다. 1888년 그의 정치적 후원자인 구로다 기요타카가 제2대 총리가 되었다. 구로다 내각에서도 에노모토는 체신대신으로 유임됐다. 일본에서 우체국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사용했던 ‘’ 로고를 정한 사람이 에노모토라고 한다. 이후 에노모토는 문부대신(1889~1890년), 외무대신(1891~1892년), 농상무대신(1894~1895년) 등을 역임했다. 1887년에는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았다.
 
 
  메이지 시대 최고의 테크노크라트
 
  사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삿초(사쓰마와 조슈) 출신들이 정치를 좌우하던 시절에 도쿠가와 막부 출신인 에노모토는 정권의 실세(實勢)는 아니었다. 그는 구로다의 후원을 받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 무색무취한 테크노크라트였기에 조슈와 사쓰마가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정치적 위기 상황이 닥칠 때마다 ‘핀치 히터’로 등용될 수 있었다. 잊힐 만하면 개각 때마다 이름을 올리는 그를 두고 “진퇴(進退)를 중시하지 않는다”느니 ‘반식(伴食)재상’이니 하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외무대신으로 입각했을 때 《요미우리신문》은 “담백하고 도량이 넓으며 편협하지 않고, 일에 대처할 때 일신의 안전과 영달만을 좇지 않는” 인물로 평하면서 그의 건승을 기원했다. 결국 에노모토가 관료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실력과 인품 때문이었다.
 

  에조공화국의 인물로 메이지 정부에서 출세한 것은 에노모토뿐이 아니었다. 에조공화국의 육군장관(혹은 육군사령관) 격이던 육군부교 오토리 게이스케는 주청공사, 주조선공사, 추밀고문관 등을 역임하고 남작 작위를 받았다. 에노모토의 비서이자 처남이었던 하야시 다다스(林董·1850~1913년)는 주청공사, 주영공사, 초대 주영대사, 외무대신, 체신대신 등을 역임했다. 특히 주영공사 재직 시에는 영일동맹을 성사시켜 러일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공로로 백작 작위를 받았다.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 - 벽혈비
 
하코다테전쟁 당시 전사한 구막부군을 기리는 벽혈비.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이었을까? 1875년 하코다테전쟁 7주년에 즈음해 오토리 게이스케 등이 구막부군 전사자 위령비 건립에 나섰다. 하코다테전쟁 종료 후 막부군 전사자 시신을 수습했던 야나가와 구마키치가 오토리의 의뢰를 받아 하코다테산 중턱의 야치가시라(谷地頭) 인근의 땅을 매입했다. 야나가와는 실행사 등에 가매장되어 있던 구막부군의 유해를 화장(火葬), 이곳에 매장했다. 이들을 추모하는 비가 바로 벽혈비(碧血碑)다. ‘벽혈’이라는 말은 “의(義)를 다하고 죽은 무사의 피는 3년이 지나면 푸른색이 된다”는 중국 고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글씨는 오토리 게이스케가 썼다. 당시 주러시아공사로 있던 에노모토는 건립비의 일부를 댔다고 한다.
 
  하코다테 기행의 마지막은 벽혈비를 찾는 것이었다. 하코다테 야경(夜景)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흔히 찾는 하코다테 로프웨이 정거장에서 호국신사(護國神社)와 하코다테공원, 하코다테하치만궁(函館八幡宮)을 지나 30분 정도 걸으면 묘심사(妙心寺)라는 절이 나온다. 이 묘심사 뒷산에 벽혈비와 야나가와 구마키치의 추모비가 있다.
 
  메이지유신 선포 후 벌어진 내전(內戰)인 보신전쟁 중 구막부군 8625명, 신정부군 4947명이 전사했다. 그 일부를 이루는 하코다테전쟁에서는 구막부군 511명, 신정부군 324명이 전사했다. 그 하코다테전쟁의 역적 수괴를 일본은 중용했다.
 
  손일 전 부산대 교수가 지은 《막말(幕末)의 풍운아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메이지유신》에 의하면, 벽혈비에서 도보로 10분쯤 떨어진 야치가시라 전차 종점 인근에는 예전에 가쓰다(勝田)온천이 있었는데 갑신정변 후 망명했던 김옥균(金玉均·1851~1894년)이 일본 정부의 명령으로 1888년 홋카이도로 유배되었을 때 하루 묵어간 곳이라고 한다. 홋카이도를 전전하면서 2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김옥균은 6년 후 청국의 실력자 리훙장과 만나 담판을 짓겠다고 상하이(上海)로 갔다가 그곳에서 고종이 보낸 암살자 홍종우(洪鍾宇·1851~1913년)에게 암살당했다. 청국 군함 편에 조선으로 돌아온 김옥균의 시신은 능지처참(凌遲處斬)되었고 목은 베어져 한강 변에 효수(梟首)되었다.
 
 
  김옥균과 에노모토
 
야치가시라의 거리 풍경. 근처에 김옥균이 묵었던 가쓰다온천이 있었다고 한다.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과학기술 진흥, 멕시코 식민(이민)사업, 천문학 연구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다가 1908년 자택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의 장례식을 보도한 당시 언론들은 그의 장례를 두고 ‘에돗코(江戶っ子)의 장례’라고 했다. 당대 도쿄 사람들은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제독, 공사, 대신, 자작이 아니라 도쿄(에도)에 기반을 둔 도쿠가와 막부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웠던 ‘사나이’로 기억했던 것이다.
 
  야치가시라의 언덕길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데 부러움 때문인지 허망함 때문인지 눈물이 나왔다. 메이지 일본은 ‘역적의 수괴’와 그의 수하들을 살려서 그 재능에 맞게 썼다. 고종의 조선은 ‘역적의 수괴’의 가족들을 몰살하고 해외까지 쫓아가서 기어코 그 목숨을 끊은 후 그 시신을 조각냈다. 인재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120여 년 전 일본과 조선의 운명은 거기서 갈라졌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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