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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리포트

세계 최대 규모 싼샤댐 현장

쑨원이 구상했고 마오쩌둥이 추진했다가 덩샤오핑이 완수한 국가백년대계

글 : 모종혁  在 중국 경영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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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전 전인대 대표의 33%가 반대한 싼샤댐 건설과 관련한 논란 여전히 지속돼
⊙ 백제성, 우산 등 역사속 유적지 상당 부분 水沒
⊙ 논란 많지만 홍수방지와 수력발전은 확실한 성과

牟鍾赫
⊙ 44세. 중국 정법대 경제법학과 졸업.
⊙ 방송 저널리스트, 취재 코디네이터.
⊙ 현재 충칭에서 기업투자·경영컨설턴트로 활동 중.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싼샤댐.
양쯔강 중간을 가로막아 상류를 거대한 호수로 만들었다.
  1992년 4월 3일 낮 중국 베이징(北京)시의 한복판 인민대회당 안은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7회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5차 회의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안건에 대한 투표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참석한 대표는 2633명. 이 중 25명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투표장에 입장하질 않았다.
 
  오후 3시가 되자 전인대 완리(萬里) 상무위원장이 결과를 발표했다.
 
  “투표 참가자 2608명 중 1767명이 찬성했고 177명이 반대했으며 664명이 기권했습니다. 찬성 수가 반을 넘었으므로, 양쯔강(揚子江·長江) 싼샤(三峽) 프로젝트에 대한 결의안은 통과됐습니다.”
 
  순간 장내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적지 않은 대표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회의장 내에 있던 기자들도 웅성거렸다. 반란표가 무려 33%나 나왔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정권 수립 이래 그 어떤 투표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결과였다.
 
  그 자리에 쓰촨(四川)성 대표로 레이헝순(雷亨順·88) 전 충칭(重慶)대 지속발전연구원 주임교수가 있었다. 레이 전 교수는 2006년 필자에게 “수많은 학자와 전문가들이 싼샤댐을 건설했을 때 일어날 여러 부작용을 우려해 반대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1980년대부터 레이 전 교수는 충칭시정부 고문을 겸임하면서 싼샤 전 지역을 여러 차례 일주했다. 이를 바탕으로 싼샤댐을 건설할 경우 생길 문제점을 정리해 쓰촨성과 중앙정부 지도자들에게 4차례나 서신으로 보냈다. 심지어 전인대 석상에서 대표들을 규합해 적극적인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이 때문에 몇몇 대표로부터 “정말 간땡이가 부었소”라는 경고를 들어야 했다. 레이 전 교수는 “투표 전 언론매체 기자들에게 나눠 준 자료는 끝내 공개되질 않았다”고 말했다.
 
 
  시진핑, 싼샤그룹 이사장·사장 해임
 
  결의안이 통과되자 리펑(李鵬) 총리는 “싼샤댐 건설을 둘러싼 모든 논쟁은 이로써 종식됐다”고 선언했다.
 
  그 뒤 중국정부는 싼샤 프로젝트를 거침없이 벌여 나갔다. 모두 네 단계로 진행했는데, 1기 공정은 1994년 12월 첫삽을 뜨고 1997년까지 기초 다지기에 전념했다. 댐 축조, 갑문과 선박 통행로 건설, 물 채우기 작업 등 2기는 2003년에 끝냈다. 3기로 발전기 장착과 시운전, 수몰민 이주 등을 마친 뒤 2006년 5월 완공식을 가졌다. 하지만 2012년 7월에야 전체 발전기의 가동, 강 수위 높이기, 재해방지 공사 등 4기를 끝내 전체 사업을 마무리했다.
 
  이제는 한물간 일 같은 싼샤댐이 최근 2년간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 시작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주도하는 반(反)부패 전쟁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중국정부는 싼샤댐을 위시해 중국 남부지방의 댐을 운영하는 국영전력기업 싼샤(三峽)그룹의 차오광징(曹廣晶) 이사장과 천페이(陳飛) 사장을 전격 해임했다. 두 사람은 1980년대 중반 싼샤 프로젝트를 기획하던 단계부터 일해 왔던 싼샤댐의 산증인이었다. 또한 싼샤댐 건설을 주도했던 리펑 전 총리의 최측근이다.
 
  다음 달에는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궈여우밍(郭有明) 전 후베이(湖北)성 부성장의 당적을 박탈하고 사법처리에 들어간다. 귀 전 부성장은 오랫동안 싼샤댐 건설의 지원업무를 맡았던 후베이성 수리청(水利廳)에서 일했다. 싼샤댐이 위치한 이창(宜昌)시 시장과 당서기도 역임했다. 그 뒤 차오 전 이사장은 허베이성 부성장으로, 천 전 사장은 싼샤댐건설위원회 판공실 부주임으로 일하게 됐지만 모두 한직이다.
 
  2013년부터는 싼샤댐이 자연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논문과 보고서가 잇달아 나왔다. 과학원, 지질조사국 등 중국의 권위 있는 연구기관이 오랫동안 쌓은 데이터와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한 연구 성과를 담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싼샤를 유람하는 둥팡즈싱(東方之星)호가 침몰했다. 유람선에 탄 454명 중 12명만 구조하고 442명이 숨진 대형 참사였다. 이 사고 후 싼샤댐 건설로 인해 일어나는 회오리바람 등 이상기후 현상이 사고원인으로 지목됐었다.
 
  지난해 12월에는 충칭–이창 고속도로가 전 구간 개통됐다. 이 고속도로는 총연장 471km로, 험준한 산세와 크고 작은 양쯔강 지류 때문에 공사하기 가장 어려운 구간으로 손꼽혀 왔다. 본래 싼샤댐 건설은 ▲홍수의 피해에서 벗어나고 ▲고질적인 전력난을 해소하며 ▲선박운항 조건을 개선해 황금수로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이 모든 결과를 점검할 수 있기에 필자는 지난 6월 말 다시 싼샤를 방문했다. 1997년부터 필자는 여행으로 두 차례, 취재로 아홉 차례 싼샤를 찾은 바 있다.
 
 
  충칭 도심의 싼샤박물관
 
차오톈먼 크루즈 부두에 정박해 있는 유람선. 출항 1시간 전인데도 승선하는 여행객이 거의 없었다.
  필자가 처음 찾은 곳은 충칭 도심에 있는 차오톈먼(朝天門)과 싼샤박물관이었다. 차오톈먼은 양쯔강과 자링강(嘉陵江)이 만나는 교차점에 있는 항구다. 1980년대까지 충칭과 양쯔강 중·하류 도시를 오가는 모든 사람과 물건은 차오톈먼을 거쳐야 했다. 여기서 신선로(火鍋), 방방쥔(棒棒軍·대나무 짐꾼) 등 충칭의 명물이 탄생하기도 했다. 현재 차오톈먼은 물류항구로서의 지위를 춘탄(寸灘) 컨테이너항에 넘겨준 상태다. 하나 싼샤를 유람하는 크루즈 선박의 모항으로 여전히 활약하고 있다.
 
  여름철은 싼샤 크루즈 여행의 성수기지만, 올해는 탑승객이 크게 줄어들었다. 필자가 찾아간 한 여행사 사장은 “둥팡즈싱 침몰사고 직후에는 안전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단체관광객이 끊기면서 크루즈 탑승객이 예년보다 4분의 1이나 줄었다”며 “7월 들어 사정이 호전되고 있지만 작년의 절반 수준”이라고 밝혔다. 올해 초 21사에 달하는 양쯔강 크루즈업체는 85척의 선박을 운영했다. 지난해 크루즈 이용객은 60만명이었다. 둥팡즈싱처럼 낡았거나 불법개조한 선박 퇴출도 진행하고 있어, 한동안 싼샤 크루즈 관광은 깊은 침체의 늪에 빠질 전망이다.
 
지금은 수몰된 윈양(雲陽)현 다시(大溪)진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다섯 일가족의 합장묘가 싼샤박물관에 옮겨져 왔다.
  중심가에 있는 싼샤박물관은 2005년 6월에 개관했다. 총면적 4만2497m², 높이 5층인 중국 5대 박물관 중 하나다. 싼샤 수몰지에서 발굴한 유물을 중심으로 30만여 점을 보관·전시하고 있다.
 
  본래 충칭에는 1951년 문을 연 시박물관이 있었다. 하지만 규모는 작았고 전시유물은 볼품없었다. 싼샤문물보호 프로젝트는 충칭에 국가대표급 박물관을 안겨 줬다. 싼샤댐 건설안이 통과된 뒤, 1994년 중국역사박물관과 문물연구소의 주도 아래 전문가 300여 명이 수몰지 22개 구·현에서 조사를 벌였다.
 
  이를 토대로 1996년 중국 국가문물국은 3000만m², 1282곳에서 유적·유물의 발굴 및 이전 사업을 추진했다. 이 중 지하 유적만도 1600만m², 723곳에 달했다. 정석대로라면 50년에 걸쳐 진행해야 했지만, 10년 안에 모든 작업을 완수해야 했다. 곧바로 수몰지는 세계 최대의 발굴 현장으로 변했다. 2000년 발굴을 위해 69개 기관과 대학에서 선발된 5000여 명의 발굴단이 싼샤에 모여들었다. 중국 고고역사학계의 인력 3분의 2 이상이 동원되어 물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문물을 구하기 시작했다.
 
 
  도굴꾼들, 발굴단으로 위장해 활동
 
수몰지 발굴사업 덕분에 대량의 파국(巴國) 유물이 발굴되어 파국의 실체가 밝혀졌다.
  중국정부가 싼샤문물보호 프로젝트에 쏟은 예산은 10억 위안(약 1850억원)이었다. 전투적인 작업 덕분에 2005년까지 땅속에서 유물 17만 점을 찾아냈다. 그중 보물급의 유물만도 9000점이나 됐다. 국가문물국은 2006년 “싼샤 유적·유물의 발굴 및 이전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2007년 1월 《남방주말(南方周末)》은 ‘조사한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물은 20%에 불과했다’며 ‘그저 응급처치식 발굴사업일 뿐이었다’고 보도했다.
 
  중국 내 모든 역량을 동원했지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오궈성(郝國勝) 국가문물국 연구원은 주간지 《랴오왕(瞭望)》과의 인터뷰에서 “문물보호 프로젝트의 방향이 챙길 수 있는 것은 챙겨서 손실을 최소화하자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마침 양쯔강의 물을 황허(黃河)로 돌리는 남수북조(南水北調) 프로젝트도 시작되어, 싼샤 수몰지 발굴사업을 조속히 끝내야만 했다. 작업진행 중 예기치 않은 문제도 불거졌다. 발굴단으로 위장한 도굴업자들이 곳곳에서 횡행했던 것이다.
 
  그들은 유적지를 파헤쳐 꺼낸 유물을 중국 각지에 내다팔고 해외로 유출시켰다. 도굴업자의 수법은 교묘했다. 가짜 발굴단을 구성해 유격전식 도굴을 감행했다. 여기에는 적지 않은 원주민도 참여했다. 현지 지형에 익숙한 주민이 길잡이가 되어 국가가 지정한 유적지를 미리 파헤쳤다. 한동안 수몰지에서는 ‘유물을 팔면 3일 만에 벼락부자가 되니, 부자가 되고 싶으면 분묘를 파헤쳐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돌았다. 지방정부가 단속에 나섰지만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인력은 적고 단속지역은 너무 광범위했다.
 
  마침 싼샤 수몰지는 구도시의 해체와 신도시의 건설, 원주민의 대거 이주, 수몰 유적지의 이전 등으로 지역 전체가 공사판이었다. 유동인구가 너무 많다 보니 도굴한 유물을 내다팔기 손쉬웠다.
 
  2005년 8월 충칭시 세관은 보고서를 통해, “1995~2005년 사이 192건에 달하는 싼샤 유물의 도굴 및 매매 사건을 적발했다”며 “그중 보물급 유물이 관련된 사건만도 43건에 달했다”고 밝혔다. 그나마 적발된 유물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劉備託孤의 현장 白帝城도 물에 잠겨
 
청대에 백제성 한편에는 ‘유비탁고’의 모습을 찰흙상으로 복원했다.
  충칭 도심을 떠나 도착한 곳은 펑제(奉節)현이었다. 싼샤는 여기부터 후베이성 이창에 이르는 192km의 대협곡을 일컫는다. 서에서 동으로 이어지는 취탕샤(瞿唐峽)–우샤(巫峽)–시링샤(西陵峽)가 그것이다.
 
  펑제현청에서 10km 떨어진 지점에 백제성(白帝城)이 있다. 백제성은 오나라 정벌에 실패한 유비가 죽기 전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한 ‘유비탁고(劉備託孤)’의 현장으로 유명하다. 221년 유비는 손권에 의해 죽은 관우의 원수를 갚고 형주(荊州)를 되찾기 위해 출정했다.
 
  이듬해 6월 유비는 이릉(夷陵·지금의 이창)에서 육손과 손환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백제성으로 후퇴해 전열을 재정비하려 했지만, 의형제를 잃은 슬픔과 패전의 자책감으로 223년 초 중병에 걸렸다. 유비는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서둘러 청두(成都)에 있던 아들들, 승상 제갈량, 상서령 이엄(李嚴)을 불렀다. 도착한 제갈량과 이엄에게 뒷일을 부탁하면서 제갈량에게는 따로 하명했다.
 
  “경의 재능은 조비(曹丕)의 10배네. 만약 내 아들이 보필할 만하거든 보필하되, 그 재주가 없으면 경이 황위를 취해 주게.”
 
  이 말을 들은 제갈량은 울면서 “제가 어찌 그리하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고 다짐했다. 당시 태자 유선은 전통에 따라 수도를 지키기 위해 청두에 남아 있었다. 유비는 이같이 탁고한 뒤 아들 유영과 유리에게 “너희들은 승상을 아버지 대하듯 잘 받들고 모셔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유비는 영면에 들어갔다.
 
  원래 백제성은 강변에 솟은 구릉 위에 있었다. 하지만 싼샤댐이 건설되면서 주위가 모두 수몰되어 고도(孤島)로 변해 버렸다.
 
  백제성 맞은편에는 쿠이먼(夔門)이 있다. 쿠이먼은 취탕샤의 시작점으로, 위안(元)화에 등장하는 천하제일의 절경이다. 수백m에 달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바로 앞 2000m가 넘는 고산과 어울려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한다. 다만 과거와 달리 절반 가까이 물에 잠겨 웅장했던 장관은 사라졌다. 취탕샤는 길이가 8km에 불과하지만, 강폭이 좁고 수직의 계곡이 줄지어 있다. 200만년 전 아시아와 인도 대륙이 합쳐지면서 지금처럼 험준한 협곡으로 변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신이 양쯔강 물을 하류로 흘려보내기 위해 돌 산맥을 칼로 내리쳐서 싼샤를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李白, ‘싼샤를 오르며’
 
중국 돈 10위안 뒷면에 등장하는 천하절경 쿠이먼. 취탕샤의 시작점이자 협곡으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백제성은 역사현장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예작품을 낳은 무대였다.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그 대표적인 연출가다.
 
  이백은 쓰촨 출신이라 20대부터 여러 차례 싼샤를 유람하면서 주옥같은 시를 여럿 남겼다. 그중 ‘싼샤를 오르며(上三峽)’와 ‘아침에 백제성을 떠나며(早發白帝城)’는 고금을 막론하고 읊는 절창(絶唱)이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이백은 루산(廬山)에 피란 갔다가 마침 동순(東巡) 중인 영왕(永王)을 만났다. 이백은 영왕 휘하의 참모로 들어가 전장을 누볐다.
 
  한데 당시 황실 내에서는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종(玄宗)은 장안(長安)을 떠나 쓰촨으로 피신 갔는데, 닝샤(寧夏)로 간 태자가 독단적으로 황위에 올라 숙종(肅宗)이 됐다. 뒤늦게 졸지에 태상황이 된 사실을 안 현종은 기가 막혔다. 하지만 양귀비(楊貴妃)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반란을 초래한 원죄 때문에 이를 추인해야만 했다.
 
  영왕은 숙종의 즉위에 불복해 거병했다. 757년 영왕의 군대는 당군에 진압당했고, 이백도 사로잡혀 구이저우(貴州)로 유배당했다. 귀양길에 싼샤를 거치면서 처량한 마음에 쓴 시가 ‘싼샤를 오르며’다.
 
  우산은 푸른 하늘을 끼고(巫山夹靑天) / 바강은 이렇듯 세차게 흐르네(巴水流若兹) / 바강이 홀연히 다할 수 있다지만(巴水忽可盡) / 푸른 하늘에는 이를 때가 없네(靑天無到時) / 사흘 아침을 황뉴산으로 오르는데(三朝上黃牛) / 사흘 저녁은 이리도 더디 가는구나(三暮行太遲) / 사흘 아침 또 사흘 저녁 동안(三朝又三暮) / 머리칼이 어느새 실처럼 되어버렸네(不覺鬢成絲)
 
  2년 뒤 이백은 유배에서 사면되어 다시 싼샤를 지나자 ‘아침에 백제성을 떠나며’를 남겼다. ‘싼샤를 오르며’와 정반대로 자유의 몸이 된 기쁨을 경쾌하게 표현했다.
 
  아침에 채색구름 뜬 백제성을 떠나(朝辭白帝彩雲間) / 천리길 장링을 하루 만에 돌아왔네(千里江陵一日還) / 양쪽 강변 원숭이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데(兩岸猿聲啼不住) / 가벼운 조각배는 만겹의 산을 이미 지났네(輕舟已過萬重山)
 
 
  ‘詩城’ 白帝城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은 당시(唐詩)를 좋아해 공식석상에서 자주 인용했다. 2001년 4월 중남미 6개국 순방길에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 자리에서 ‘아침에 백제성을 떠나며’를 재미있게 패러디해서 읊었다. 중국과 쿠바가 미국의 패권주의에 함께 대항하자는 의미였다.
 
  아침에 꽃구름 가득한 중국을 떠나(朝辭華夏彩雲間) / 만리 머나먼 중남미를 열흘간 찾았네(萬里南美十日還) / 바다 건너 바람소리 미친 듯 비를 머금고(隔岸風聲狂帶雨) / 푸른 소나무처럼 옹골찬 기상은 산처럼 굳건하네(靑松傲骨定如山)
 
  이백과 달리 두보는 본래 싼샤와는 인연이 없었다. 하나 759년 안사의 난을 피해 처자를 둘러업고 쓰촨에 들어왔다. 오랜 벗인 절도사 엄무(嚴武)의 도움 아래 미관말직이나마 관료가 되면서 5년여간 청두(成都)에서 머물렀다.
 
  765년 엄무가 죽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두보는 방랑길에 나섰다. 처자를 일엽편주에 태우고 양쯔강을 따라 내려갔다. 이곳저곳 도착하는 강변 마을에서 구걸을 해서 먹을 것을 얻으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배를 띄우곤 했다.
 
  폐병이 깊어지고 시력과 청력은 날로 나빠졌지만, 싼샤의 아름다움은 두보에게 새로운 시상을 떠오르게 했다. 그리하여 백제성과 우산을 배경으로 가슴 저미는 시 한편을 남겼으니, 바로 ‘추흥(秋興)’이다.
 
  찬이슬이 내려 숲은 단풍으로 물들고(玉露凋傷楓樹林) / 우산과 우샤는 쓸쓸한 기운이 가득하구나(巫山巫峽氣蕭森) / 강 사이로 이는 파도는 하늘로 솟구치고(江間波浪兼天湧) / 변방의 구름은 천지에 어둠을 드리우네(塞上風雲接地陰) / 국화를 보니 다시 지난날 생각에 눈물이 나고(叢菊兩開他日淚) / 쓸쓸히 배를 저으니 온통 고향 생각만 나는구나(孤舟一繫故園心) / 어느새 다가온 추위에 겨울옷을 마련하는지(寒衣處處催刀尺) / 백제성에는 다듬이 소리가 요란하네(白帝城高急暮砧)
 
  이 시는 시국에 대한 근심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애절하게 표현됐다. 이백과 두보의 뒤를 이어 여러 묵객이 백제성을 찾아 시문을 남겼다. 이 때문에 훗날 백제성은 ‘시성(詩城)’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斷腸과 雲雨之情의 고사를 낳은 싼샤
 
  싼샤는 명시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고사성어의 산실이다. 먼저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슬픈 이별을 표현할 때 쓰는 ‘단장(斷腸)’을 들 수 있다. 이 말은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편(黜免篇)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됐다. 4세기 동진(東晉)의 장군 환온(桓溫)은 촉(蜀) 땅을 정벌하기 위해 군선을 타고 싼샤를 거슬러 올라갔다. 물살이 빨라 배는 천천히 움직였는데,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병사 한 명이 절벽 아래로 늘어진 덩굴줄기에 매달려 있던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낚아챘다.
 
  새끼를 빼앗긴 어미 원숭이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군선을 100여 리나 따라갔다. 배가 다시 강변으로 다가서자, 어미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갑판 위에 뛰어올랐다. 하나 쉬지도 먹지도 못한 채 달려온 탓에 곧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병사들이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환온은 크게 노했다. “어찌 어미와 자식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느냐”며 새끼 원숭이를 잡아왔던 병사를 매질해서 내쫓고 원숭이는 놓아줬다.
 
  다른 하나는 남녀 간의 성(性)관계를 뜻하는 ‘운우지정(雲雨之情)’이다. 이는 전국시대 초나라의 궁정시인이었던 송옥(宋玉)이 지은 ‘고당부(高唐賦)’의 내용에서 비롯됐다. 전설 속의 신 신농(神農)에게는 예쁜 딸들이 많았다. 그중 셋째인 요희(瑤姬)가 불행하게 시집도 가기 전에 요절하고 말았다. 신농은 슬퍼하며 죽은 딸을 싼샤의 높은 산봉우리에 묻어 줬는데, 훗날 신녀봉(神女峰)이라 불렸다. 세월이 흘러 초나라 회왕(懷王)이 싼샤에 놀러 왔다가 한 누대에 잠시 머물렀다.
 
  피곤해서 곧 잠에 빠졌는데 꿈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회왕은 그녀의 자태에 반해 그 자리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정사 뒤 회왕은 “언제 다시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여인은 “저는 이 산에 머무는데, 아침에는 구름으로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양대 아래에서 당신을 그리워할 겁니다(且爲朝雲 暮爲行雨 朝朝暮暮 陽臺之下)”고 대답한 뒤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난 회왕은 여인을 기리며 조운묘(朝雲廟)라는 사당을 세웠다. 여인, 즉 요희의 말에서 운우지정이 조합된 것이다.
 
 
  싼샤댐 건설의 이면들
 
싼샤의 정수만을 모아 놓았다는 샤오싼샤의 절경.
  펑제 다음으로 찾아간 도시는 이백과 두보의 시에 등장했고 ‘운우지정’을 낳은 우산현이었다. 우산은 싼샤 관광의 하이라이트다. 싼샤의 정수만 모아놓은 샤오(小)싼샤와 신녀봉을 위시한 우샤 12봉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주 주민은 46만명에 불과하지만, 그 5배에 달하는 관광객을 해마다 맞이한다. 항구로 끊임없이 들어서는 유람선, 여행객을 태우고 샤오싼샤가 있는 다닝허(大寧河)로 향하는 관광선, 항구와 거리를 바쁘게 거니는 주민들…. 우산은 사시사철 활력이 넘친다.
 
  다른 수몰지와 마찬가지로 우산은 싼샤댐 건설로 인해 도시 전체를 고지대로 옮겼다. 가파른 비탈에 기대어 돌로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을 세웠다. 날림으로 짓고, 토사 유실이 빈번해서 위태롭고 불안해 보였다. 싼샤댐은 수몰지 변 22개 도시와 1700여개 마을을 물로 삼켰다. 과거 50~60m에 불과했던 수위를 175m까지 끌어올리면서 생긴 비극이었다. 이주민은 140만명에 달했는데, 정식 통계에서 빠진 주민까지 합치면 200만명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주민 문제는 중국정부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2006년 필자가 만났던 정쩌건(鄭澤根) 전 충칭대학 교수는 충칭시 정부의 의뢰를 받아 실태를 조사했다. 그는 “수몰지 주민들은 교육수준이 낮고 농업에 종사했기에 정부 정책에 적극 호응해 신도시나 다른 지방으로 이사 갔다”며 “처음에는 새로 지은 연립주택에 살고 2년간 보조금도 받아 좋아했으나 마땅한 일자리를 찾질 못해 대부분 정착에 실패했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정부가 신도시에 산업기반을 갖춰 주고 주민들이 2~3차 산업에 흡수되도록 재교육시켜 자립기반을 닦아 줘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현실은 지금도 다를 바 없다. 지난해 우산현 주민소득은 수몰지 가운데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지만 도시민 2만1351위안(약 394만원), 농민 6935위안(약 128만원)에 불과했다. 충칭시 평균소득이 각각 2만5147위안(약 465만원), 9490위안(약 175만원)인 점에 비춰 볼 때 한참 뒤처진다. 그러나 우산과 펑제의 부동산 거품은 아주 심각했다. 2~3년 전 버블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시공한 아파트 단지가 너무 많았다. 펑제의 신도시는 유령도시(鬼城)가 연상될 정도로 빈 아파트만 줄지어 서 있었다.
 
 
  산사태와 지진
 
지난 6월 24일 산사태가 일어난 우산의 다닝허 입구. 크루즈 부두의 맞은편이다.
  예부터 우산은 안개가 많이 끼어 ‘안개의 도시(霧都)’로 불렸다. 충칭도 1년 평균 안개 끼는 날이 104일에 달하지만, 우산은 무려 200일이나 안개가 낀다. 게다가 싼샤댐이 건설된 이후 안개가 출현하는 날이 더 많아지고 그 강도가 심해졌다. 작은 동력선을 운행하며 관광업을 종사하는 푸뤼윈(42)은 “주민들이 가장 많이 앓는 병이 비염, 축농증, 관절염일 정도로 우산은 안개가 많이 끼고 습도가 아주 높다”며 “싼샤댐 건설 이후 그 상황이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기후 변화보다 우산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것은 잦은 산사태와 지진이다. 지난 6월 24일 우산항 크루즈 부두 맞은편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1명이 죽고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선박도 13척이나 전복됐다. 산사태로 쏟아져 내린 토사 탓에 강물이 5~6m나 출렁이면서 수영하던 주민과 부두에 정박 중이던 선박이 변을 당했던 것이다. 사고 후 우산현 정부는 산사태가 일어난 마을 일대 주민 196명을 긴급 대피시켰고 이틀간 샤오싼샤 관광을 금지했다.
 
  2013년 12월에는 우산에서 103km 떨어진 후베이성 바둥(巴東)현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었다. 싼샤 수몰지에서 규모 5 이상의 지진이 발생한 것은 지난 100년 이래 처음이었다. 다행히 진앙지가 도시에서 한참 떨어진 산속이라 주민 10여 명이 다치고 여러 채의 가옥이 무너지는 피해만 일어났다. 하지만 바둥이 싼샤댐에서 66km밖에 안 떨어진 데다 전례 없는 강진이 일어나 중국정부와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산사태와 지진은 싼샤댐 건설 이전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했던 사안이었다. 레이헝순 전 충칭대 교수는 필자에게 “싼샤 수몰지는 지형 구조가 부서지고 깨지기 쉬워 댐이 저수하는 막대한 강물의 수압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중국 지진국 지진연구소가 낸 보고서는 “바둥 지진은 댐 건설 후 저수된 강물이 지층에 엄청난 압력을 주면서 일어난 새로운 유형의 지진”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정부도 2010년 6월 처음으로 “싼샤댐 건설 후 5386곳이 산사태 위험에 노출됐고 97곳은 이미 붕괴됐다”고 밝혔으나, 그로 인한 피해자 수는 공개하질 않았다.
 
 
  밧줄로 배를 끄는 첸푸
 
  2011년 필자는 바둥현을 찾아 첸푸(縴夫)를 취재했었다. 첸푸는 밧줄로 배를 끄는 사람을 가리킨다. 옛날 싼샤는 물살이 거칠고 바위가 많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가 무척 어려웠다. 또한 험준한 산세로 인해서 육로를 이용해 가기도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배를 끌고 가는 직업인 첸푸가 생겨났다. 20세기 초 싼샤에서 일했던 첸푸는 수천 명에 달했다. 비록 동력을 단 선박이 운항하면서 그 수가 대폭 줄어들었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여전히 수백 명이 활동했다.
 
  필자가 첸푸를 처음 본 것은 1997년 샤오싼샤에서였다. 당시만 해도 다닝허 상류는 수심이 얕아 일부 구간은 뱃사공이 목선을 끌고 올라가야 했다. 뱃사공들은 노를 젓다가 중간에 관광객들을 내리게 한 뒤 배를 끌고 가길 되풀이했다. 그러나 2003년부터 싼샤댐이 물을 가두기 시작하면서 양쯔강의 지류에서 활동하던 첸푸들은 모두 사라졌다. 지류의 줄기줄기 모두 물이 차면서 어디든 모터가 달린 배로 이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실제 양쯔강은 펑제부터 물의 흐름이 거의 없다. 우산에서는 상류와 하류의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호수나 다름없었다. 현재 첸푸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은 바둥의 선눙시(神農溪) 상류가 유일하다. 그나마 진짜 첸푸라기보다는 ‘관광용’에 불과하다. 전체 구간 중 약 60m에서만 첸푸의 역할을 한다. 동력선을 타고 간 관광객들이 목선으로 갈아타면 한 척당 네 명의 뱃사공이 노를 젓는다. 그들은 목선의 주주이자 노동자로, 관광객들을 40분가량 유람시켜 준다.
 
  필자가 만난 장궈칭(45) 씨는 젊었을 때 정식 첸푸로 일했었다. 장 씨는 “지금은 관광객들을 한번 구경시켜 주고 30위안(약 5550원)을 받는데 성수기에는 하루에 세 번, 비수기에는 한 번 정도 일할 수 있어 벌이가 시원치 않다”고 말했다. 뱃사공들은 때로는 다른 배와 경주하고 때로는 구성진 민요를 불러 주는 등 관광객을 즐겁게 해 주려고 애를 썼다. 그 노고를 치하한 일부 관광객이 팁을 주기 때문이다. 관광용 상품이 되어 악착같이 살아가는 첸푸의 모습이 서글프면서 애처로웠다.
 
 
  物流, 절반의 성공
 
  필자는 쾌속정을 타고 완저우(萬州)에서 펑제와 우산을 거쳐 싼샤댐까지 가려 했다. 하지만 충칭여객선터미널은 모든 쾌속정의 운항을 중지했다고 알려왔다. 지난해 12월 완저우부터 이창에 이르는 고속도로를 개통하면서 싼샤를 오고 가던 모든 여객선과 쾌속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즉, 이동을 위해 운행하던 배는 없어지고 관광을 위한 유람선만 남게 됐다. 이 같은 현실은 싼샤댐 건설의 주목적 중 하나가 선박운항 조건을 개선해 물류혁명을 이룩한다는 점에서 뜻밖이었다.
 
  물론 싼샤댐을 이용한 화물과 사람의 이동은 꾸준히 증가했다. 싼샤댐의 운항로를 통해 오고 간 선박은 2005년 이래 꾸준히 증가해, 2011년에 한 해 처리물량이 1억t을 돌파했다. 지난해 4월에는 월 처리물량이 1000만t을 넘어서는 쾌거도 이뤘다. 지난해의 경우 상행하는 화물이 사람보다 훨씬 많아 62%를 차지했다. 한 척당 적재량은 3241t이었다. 중국정부는 홍수예방 능력을 높이고 황금수로를 만들기 위해 길이 2335m, 높이 185m의 세계 최대 규모로 싼샤댐을 건설했다.
 
  그러나 양쯔강 황금수로는 절반의 성공만 거뒀을 뿐이다. 컨테이너선의 이용이 많지 않은 데다, 양쯔강 상류지역에서 만든 공산품을 싼샤댐을 통해 하류로 옮겨 수출하는 양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필자는 펑제, 우산, 싼샤댐 등지에서 강을 오가는 선박을 여러 시간 동안 관찰했다. 가장 많이 운행하는 배는 유람선이었다. 그 다음이 석탄, 목재, 화공제품 등을 실은 벌크선이었다. 컨테이너선은 가물에 콩 나듯 하루 1~2척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하행하는 물량이 적은 현실은 충격적이다.
 
  이번에 충칭에서 싼샤댐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보니, 새로 개통한 내륙 고속도로답지 않게 화물 유동량이 많았다. 트럭과 컨테이너차가 승용차와 거의 비슷한 비율이었다.
 
  충칭에 진출한 한 한국계 물류회사 책임자는 “중국인들의 온라인쇼핑 구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택배산업이 급성장하고 물류처리도 다품종·소량 방식으로 바뀌었다”면서 “이창에서 충칭까지 차량으로 반나절이면 화물 이송이 가능하지만 배로는 사흘 넘게 걸린다”고 지적했다.
 
 
  홍수방지 성과
 
  홍수방지는 어느 정도 입증됐다. 2010년 7월 12년 만에 닥친 홍수위기를 싼샤댐 덕분에 극복했기 때문이다. 당시 양쯔강 상류지역인 쓰촨성 광안(廣安)과 산시(陝西)성 안캉(安康)에서는 이틀에 걸쳐 집중폭우가 쏟아졌다. 특히 광안에선 양쯔강의 지류인 취강(渠江) 수위가 경계수위인 9.16m보다 훨씬 높은 25.66m에 달했다. 지난 1847년 이후 163년 만에 닥친 물난리였다. 안캉에서는 초당 2만5000m³의 물이 밀어닥쳐 또 다른 지류인 한강(漢江)이 범람했다.
 
  이로 인해 상당수 마을이 물에 잠기고 산사태가 일어나 110여 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11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경제적 손실은 50억 위안(9250억원)에 달했다. 엄청난 폭우로 싼샤댐에는 초당 7만m³의 유량이 밀어닥쳤다. 하지만 싼샤댐은 그 물을 상당수 저수했고 초당 4만m³의 물을 방류해서 하류에 위치한 이창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여름철에는 홍수를 대비해 수위를 최고인 175m보다 30m 낮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싼샤댐의 총 저수능력은 393억m³에 달한다. 소양강댐의 15배나 되는 규모다. 1998년 양쯔강에서 대홍수가 발생했을 때는 중류에 초당 5만m³의 유량이 밀어닥쳤다. 그런 자연의 역습을 견디질 못해 곳곳에서 둑이 무너지는 최악의 물난리를 겪으면서 4000여 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 당시 중국정부는 양쯔강 지류의 제방을 폭파해 물줄기를 분산시켜 하류 도시를 보호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썼었다.
 
 
  發電 10년 만에 본전 뽑아
 
  수력발전은 싼샤댐이 거둔 가장 확실한 성과다. 싼샤댐은 최대 초당 10만2500m³의 물을 100m의 낙차로 떨어뜨려 32개의 수력발전기를 돌린다. 많게는 하루 2250만kW, 연간 1000억kW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2013년 12월 싼샤그룹은 “전달까지 누적 발전량이 7045억kW, 전력판매 수입은 1831억 위안(약 33조8735억원)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중국정부가 싼샤댐 건설을 결정하면서 투입하기로 한 공사비는 900억9000만 위안. 공사과정에서 물가상승과 이자부담 등으로 900억 위안이 추가로 소요됐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발전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본전을 뽑았다. 앞으로도 해마다 1000억kW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어 연간 250억 위안(약 4조6250억원)의 수익을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수몰에 따른 신도시 건설과 수몰민 이주에 소요된 간접비용까지 뽑아내려면 갈 길은 멀다.
 
  뿐만 아니라 끈질기게 떠도는 ‘괴담’은 영원히 싼샤댐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2008년 5월 쓰촨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싼샤댐은 지진의 원흉으로 지목됐었다. 하나 진앙지에서 700km 떨어진 싼샤댐에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은 그야말로 난센스다.
 
  둥팡즈싱호가 침몰했을 때도 일각에서는 유람선을 순식간에 전복시킨 회오리바람이 싼샤댐 건설로 생긴 이상기후 때문으로 책임을 돌렸다. 사고 당시 침몰현장 부근에는 초속 35m(12급)의 회오리바람이 불었고 1시간에 97mm의 폭우가 쏟아졌었다. 매년 우기마다 양쯔강 중하류에 회오리바람이 나타나지만, 이번에는 5년에 한 번 나타날 정도로 셌다. 하지만 사고현장은 싼샤댐에서 100km 이상 떨어졌고, 협곡인 싼샤와는 달리 바람에 쉽게 노출된 평지다.
 
  앞으로도 싼샤댐을 둘러싼 논란은 지속될 전망이다. 또한 댐 건설로 인한 부작용은 갈수록 부각될 것이다.
 
  단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것은 중국이 싼샤댐을 정권 치적을 위해 사업을 추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싼샤댐 건설은 쑨원(孫文)이 처음 구상했고 마오쩌둥(毛澤東)이 추진했다가, 덩샤오핑(鄧小平)과 리펑이 완수한 국가백년대계(國家百年大計)였다. 착공해서 4년 만에 준공한 4대강 사업과는 접근방식과 목적이 전혀 달랐다. 이런 중국 지도자들의 일처리는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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