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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포커스

일본 保守의 두 축, 아베와 財界

글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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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 財界, 戰前 日 기업의 강제노동 책임 등 묻는 한국 법원 판결에 반발, 對韓투자 철수로 이어질 수도
⊙ 日 財界,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 → 軍部 → GHQ → 자민당으로 파트너 바꿔가면서 발전
⊙ 아베 정권, 무기 수출 3원칙 해제 등을 통해 財界와 유착

劉敏鎬
⊙ 54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마쓰시타 정경숙 15기.
⊙ SBS 보도국 기자,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 역임.
    現 워싱턴 ‘Pacific, Inc’ 프로그램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소장.
⊙ 저서: 《일본내면풍경》 《미슐랭을 탐하다》 등.
2014년 12월 1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회관 콘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제24회 한일재계회의’에 참석한 사카키바라 사다유키 경단련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축사를 하고 있다.
  2014년 12월 1일, 흥미로운 행사가 서울 청와대에서 있었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과 일본 경단련(經團連·경제단체연합회) 대표단과의 접견이다. 한일(韓日) 재계(財界)회의 참석차 사카키바라 사다유키(原定征) 회장을 비롯한 18명의 대표단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하루 전날에는 전경련(全經聯) 대표단 주최로 양국 재계회의가 열렸다. 이 행사는 1964년 1회 이래 지금까지 전부 23회 개최된 연례(年例)행사지만, 정치 관계가 불편하던 지난 7년간은 열리지 못했다.
 
  경단련 대표단의 청와대 방문뉴스를 한국에서는 단신(短信) 정도로 처리했다. 일본에서는 경제 문제와 관련해, 비교적 비중 있는 뉴스로 취급했다. 도쿄(東京)의 분위기를 보면,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로 나아가자면서 경제인을 상대로 한 역사강조’라는 식의 분석이 주류이다.
 
  경단련 대표단에 전한 박근혜 대통령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특히 내년은 한일 국교(國交)정상화 5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양국이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함께 출발하는 원년(元年)을 만들 수 있도록 기업인 여러분의 각별한 관심과 노력을 당부합니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일상적인 연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본 언론은 부정적으로 다룬다.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과거사의 치유’라는 말 때문이다.
 
 
  일본이 ‘과거사 치유’라는 말에 민감해 하는 이유
 
2013년 11월 1일 미쓰비시를 상대로 소송을 낸 할머니들과 이를 지원하는 일본인 시민단체 회원들이 전남대에서 시민보고대회를 열었다.
  일본 언론은 한일재계회의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추진한 쪽이 한국 측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원화가 오르고 일본 엔이 내리자 수출전선에 비상이 생기면서 한일공조를 통한 수출개척이란 차원에서 전경련이 한층 더 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청와대 면담도 일본 측보다 한국 전경련 측이 한층 더 강력히 요구해서 막판에 ‘겨우’ 이뤄졌다고 말한다.
 
  적과 우군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 글로벌 경제이다. 산업구조가 비슷한 입장인 한일 양국은 경쟁상대인 동시에 협력 파트너에 해당된다. 경제 관계를 제로섬 게임으로 판단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세계관에 불과하다. 한국이 일본을 필요로 하듯, 일본도 한국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경단련이 서울에 들른 것이다. 한국 재계가 아쉬운 소리를 했다는 일본 측 주장은 아전인수(我田引水)로 들린다. 그렇지만 ‘과거사 치유’라는 말에 대한 일본 측의 민감한 반응에 대해서는 나름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본 측이 ‘과거사 치유’에 민감한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한국에서 잇달아 나온 손해배상 판결이 가장 큰 이유이다. 먼저, 미쓰비시(三菱) 중공업을 상대로 한 강제동원 피해자 가족들의 소송이다. 광주고등법원이 내린, 미쓰비시 직접 피해자 4명에 대한 승소(勝訴) 판결이 핵심이다. 미쓰비시에 대해 피해자 1인당 1억5000만원, 유족에게 8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다.
 
  미쓰비시는 그러한 배상이 1965년 이뤄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이미 끝난 문제라며, 사기업(私企業)이 나설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보상에 응할 수 없다는 얘기다. 한국 법원이 피해자와 미쓰비시와의 화해조정을 시도했지만, 미쓰비시는 절대 응할 수 없다는 방침이다. 앞으로 지켜봐야겠지만, 법원이 보상금 지급을 강제하기 위해 한국 내 미쓰비시 재산을 압류(押留)할 수도 있다.
 
 
  후지코시 소송
 
  소송에 관련된 부분은 미쓰비시 중공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거의 보도가 안 됐지만, 2014년 11월 4일 일본 전역에 크게 보도된 ‘후지코시(不二越)’ 소송 사건이다. 1940년대 여자근로정신대로 끌려간 여성 13인과 유족 18인이 제출한 소송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강제노역에 대한 보상금으로 1인당 8000만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총액 15억원을 받아내기 위해 강제집행을 할 수 있다는 판결도 함께 내렸다.
 
  후지코시는 초정밀 선반기계와 산업로봇 분야에서 유명한 회사로, 2013년도 총매출액이 17억 달러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판결에 의하면 후지코시가 한국 내에 재산을 가지고 있을 경우 곧바로 압류에 들어갈 수 있다. 후지코시도 미쓰비시처럼 배상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끝난 문제라면서 불복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앞에서 말한 두 회사 외에도 신니혼세이테쓰(新日本製鐵)의 전신인, 신닛테쓰스미킨(新日鐵住金)을 상대로 한 소송도 진행되고 있다. 구(舊)일본 제국주의 시대 당시 일본 재벌에 대한 전방위(全方位) 소송이 이어질지 모른다는 것이 1600여 기업을 회원으로 하는 경단련의 우려다.
 
 
  중국에서도 일본 기업에 배상 판결 내려
 
  식민지나 전쟁 시기 강제동원 등에 대해 일본 기업의 책임을 묻는 판결은 중국·대만에서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2014년 3월 베이징 인민법원은 미쓰비시 광업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받아들였다. 과거사 관련 소송을 중국 법원이 받아들인 것은 1972년 중일(中日)국교정상화 이후 처음이었다. 원고 측은 미쓰비시에서 일한 중국인 40명에게 1인당 100만 위안(1억8000여만원)을 요구했다. 원고 측은 미쓰비시에서 일한 노동자가 9400명에 이르며, 일본 기업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의 총규모가 3만9000명에 달한다면서 이들에 대한 피해보상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미쓰비시는 1972년 국교정상화 당시 이뤄진 중일 간의 정치협약에 의해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면서 불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경단련이 박근혜 대통령을 찾아간 것은, 이 같은 전전(戰前) 일본 재벌 기업에 대한 소송사태에 대해 한국 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론은 ‘과거사 치유’이다. ‘미래를 향해서’라는 수식어를 쓰기는 했지만, 일본 언론은 ‘과거사 치유’가 박근혜 대통령의 우선순위라는 식으로 해석했다.
 
  현재 추이를 보면, 미쓰비시 중공업 등에 대한 법원의 최종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어떤 식으로 판결을 집행할지 감을 잡기 어렵다. 정부로서는 “삼권분립(三權分立) 민주주의 국가로서 법원의 판단에 따를 뿐”이라는 답을 하겠지만, 국가 간 문제는 법원의 문제를 넘어선다.
 
  분명한 것은 소송 문제에 따른 결과가 일방이 전부 이기고 다른 일방이 전부 책임을 지는 식의 ‘전부전무(全部全無, All or Nothing)’형 결과로 나타날 경우 그 파급효과가 엄청날 것이란 점이다.
 
  한국이 보상금 지급을 위해 강제집행에 들어가는 순간, 일본이 어떻게 대응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일본은 한국 내 재산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법원 판결에 승복하지 않겠다는 자세이다. 일본으로서는 법원 판결에 승복할 경우, 한국도 문제지만 최소 1만~10만명 단위의 중국에서의 보상 문제가 이어진다. 결론은 일본 기업의 철수밖에 없다. 한국에 대한 투자는 사실상 불가능해질 것이다.
 
 
  政經一體
 
사카키바라 일본 경단련 회장.
  “한중(韓中) 간의 FTA 타결을 축하한다. 민간교류 촉진은 경제외교의 기반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를 위한 한일 정상(頂上)회담 실현을 희망한다.”
 
  청와대 방문 시 사카키바라 경단련 회장은 답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답사 중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한일정상회담에 관한 부분이다. 보기에 따라, 경제인의 월권(越權)행위에 해당한다. 정상회담 요청은 경제인이 나서서 말하기가 뭣한, 정치외교상의 문제이다.
 
  한국 경제인이 중국에 가서 한중 간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상회담을 시진핑(習近平) 대통령에게 제안한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 외교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왜 자신의 일은 안 하고, 경제인들이 감히 국사(國事)를?”이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정부와 경제계가 미리 조율을 한 뒤 제의한다 하더라도, 정부가 주도하고 경제계가 이끌려가는 식이 될 것이다.
 
  ‘정치경제’라는 말에서 보듯 한국에서는 정치가 경제를 우선한다. 정치가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본은 다르다. 경제가 정치 위에 군림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정치가 경제를 쥐락펴락 하는 상황은 아니다. 내각제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치가 경제를 통제할 만한 합법적이고도 효율적인 수단이 거의 없다.
 
  따라서 ‘감히’ 경단련 회장이 한일정상회담을 요청,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이건 월권이 아니다. 한국 스타일의 정경 관계에 익숙한 사람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경단련에 은밀히 요구를 한 탓에 일본 정부를 대신해 얘기했을 것이라 짐작할지 모르겠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경단련이란 조직은 정부의 일까지 대신할 정도로 한가로운 곳이 아니다. 교감은 있을 수 있겠지만, 정부와의 관계는 수직이 아닌 수평적 상황을 전제로 한다.
 
  일본 경제의 역사를 보면 경제 주체, 즉 재계와 정부 간의 관계가 엄청나게 긴밀하다. 나쁘게 얘기하면 정경유착(政經癒着), 좋게 보면 정경일체(政經一體)인 나라가 일본이다. 수평적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면서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극단적으로 보면 재계가 정부이고, 정부가 재계이다.
 
  한국에서 진행되는 일본에 대한 진단을 보면, 한국식 상황에 준해서 재계와 정부와의 관계를 분석한다. 이 같은 시각은 우향우(右向右)로 방향을 굳힌 현재의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중일 관계의 경우, 중국에 대한 일본의 반발은 섬(센카쿠열도)이나 역사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중국에서 일본 자동차가 불타고, 일본 기업이 수난을 받는다는 것이 일본을 우향우로 나아가게 만드는 큰 이유 중 하나이다. 중국의 군사력 팽창보다도 중국 대두에 따라 일본 기업의 처지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일본 전체를 우향우로 몰아세우는 더 큰 원인이다.
 
  재계의 입장에서는 종군위안부 문제보다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한 소송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하다. 구 일본 재벌에 대한 한국 내 소송과 관련해 아베 총리에게 뭔가를 당장 만들어내라는 것이 경단련의 주장이다.
 
 
  ‘天皇財閥’의 탄생
 
  일본 재계는 정부에 대해 어떻게 그토록 강력한 발언권을 갖게 됐을까? 어떻게 해서 민간 경제단체 수장에 불과한 경단련 회장이 ‘감히’ 한일정상회담 개최를 아베에게 요구할 수 있을까? 그 같은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근현대사 속에 나타난, 재계와 정부와의 상호 관계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전국 규모의 경제 주체로서의 기업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다. 이후 21세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재계와 정부와의 관계는 크게 네 단계에 걸쳐 발전했다. 재계를 지켜주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준 공적(公的)인 파트너, 나아가 재계가 인정한 최고권력기관으로서의 정부 내 핵심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가, 라는 점이 구분의 근거다.
 
  첫 번째 시기는 메이지 유신 이후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약 40년간이다. 이 시대 재계의 정부 내 파트너는 천황이다. ‘천황=정부’라는 말이다. 재계는 천황을 염두에 두면서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해 나갔다.
 
  메이지 유신 이래 천황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소유한 엄청난 재산과 막부를 지지한 반군(反軍) 지방영주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했다. 현재 도쿄에서 볼 수 있는 큰 공원의 원래 소유자는 도쿠가와 막부나 막부 지지 영주들이었다. 천황에게 몰수되었던 땅이 이후 시민용 공원으로 전환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은 단순히 정치적 대변혁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보면, 메이지 유신은 메이지 천황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천황가(家)가 하루아침에 일본 최고의 부자로 올라선 사건이었다. 이른바 ‘천황재벌’이다.
 
  재계가 상대한 정부는 막 탄생한 근대식 내각수반이나 경제관료가 아니었다. 초대(初代)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비롯한 정치가와 휘하의 전문 관료 모두가 천황을 우러러보면서 정치를 행했다.
 
  당시 일본 경제는 아직 자본축적기에 불과했다. 250여 년 동안의 에도(江戶)시대를 통해 일본 재계가 어느 정도 부를 축적했다고는 하지만, 영국·미국과 같은 서방국가의 대기업에 비하면 말 그대로 ‘새발의 피’였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막 등장한 재계 지도자들은 천황재벌을 통해 국내외 진출과 확장에 진력했다. 19세기 말은 ‘중공업’이란 말을 처음으로 창조해 낸 미쓰비시와 군수(軍需) 산업에 뛰어든 미쓰이(三井), 오사카를 기반으로 한 스미토모(住友), 도쿄대학을 상징하는 야스다 강당을 기증한 야스다(安田) 같은 재벌들이 탄생, 성장한 시기이다. 이들의 권위와 파워는 1945년 8월 15일까지 이어진다.
 
  이들 4대 재벌들은 천황재벌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재벌들은 천황이 가진 막대한 자본을 활용하고, 천황의 권위를 자신들의 비즈니스에 연결시켜 활용했다. 내각의 총리나 경제부처 장관이 아니라, 천황의 한마디가 더 중요하던 시대였다. 천황재벌의 자본은 재벌들의 사업 확장을 돕고, 미래를 보장하는 최고의 무기이자 보험이었다.
 
 
  금융에도 손을 댄 ‘天皇財閥’
 
  천황은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취득한 많은 토지를 일반인에게 매각했다. 토지를 둘러싼 분쟁은 19세기 말 일본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졌던 사건이다. 천황이 이런 문제에 말려들어 갈 경우 보기가 좋지 않다는 내각의 조언에 따라 조기(早期) 매각한 것이다.
 
  토지판매 대금으로 부를 늘린 천황은 은행을 통해 대출(貸出) 대부(貸付) 사업에 진출했다. 물론, 천황이 직접 이런 금융기관들을 경영한 것은 아니다. 천황을 대신한 금고지기들이 각종 금융기관을 창설, 운영했다. 1902년 탄생한 일본흥업은행(日本興業銀行)과 이후의 일본권업은행(日本勸業銀行)은 사실상 천황의 자산을 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천황 직속 금융기관이었다. 19세기 말 시작된 홋카이도(北海道) 개척 개발 당시에는 현지 지원용 특수은행을 만들어 대출 대부 나아가 투자 사업에 손을 댔다. 개척지 홋카이도에 천황의 토지가 많은 것은 당시의 투자 덕분이라 볼 수 있다.
 
  재벌들은 천황재벌이 관련된 금융기관들을 통해 기업 확장에 따른 이익을 나눠 가졌다. 국내의 경우, 철도·항만 관련 대규모 인프라 건설을 위한 주식 상장(上場)이나 증자(增資)를 통해 천황재벌의 재력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과 조선에서 벌어진 각종 이권(利權) 사업에도 천황재벌의 돈이 직간접으로 끼어들었다.
 
  필자는 이 같은 과정이 반드시 천황재벌의 요구와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천황에 대한 과잉 충성경쟁으로 인해 벌어진 ‘유착’이 더 큰 이유였다. 정부의 고관(高官)들이 투자성공률이 높은 곳에 관한 정보를 흘리면, 재벌들은 천황을 앞세워 보험을 든 뒤, 앞을 다투어 수익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실 투자성공률이 낮다 하더라도 일단 천황의 자금이 들어갈 경우 억지로라도 어느 정도의 결실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당시 분위기였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일본 경제는 재벌을 통해 ‘성숙한’ 독점자본주의 체제로 진입했다. 영국·미국보다는 한 수 아래지만, 중국과 러시아를 넘어서는 아시아의 경제 실력자로 부상(浮上)한 것이다. 개국(開國)한 지 반(半)세기도 안 돼 세계 열강(列强)의 하나가 된 것이다.
 
  천황은 전국 곳곳에서 탄생한 재벌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사실상 재벌의 대부(代父)에 해당한다. 천황은 군국주의(軍國主義) 일본의 최고봉(最高峰)이기 이전에 재벌들의 우두머리였다. 러일전쟁 등을 거치면서 군수 산업이 확충되고, 대만, 중국 등지로 팽창하면서 ‘천황재벌’의 힘은 급상승했다.
 
 
  두 번째 파트너, 軍部
 
  제2단계는 러일전쟁 이후 2차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8월 15일까지다. 독점자본주의하의 강력한 리더십을 기반으로, 일본 경제력이 아시아 구석구석에 퍼져나가던 시기이다.
 
  당시 재계의 정부 내 파트너가 된 것은 군부(軍部)다. ‘군부=정부’였다. 군부는 육군과 해군으로 나누어졌다. 제국주의 일본의 야심이 뻗어나가던 시기, 육군과 해군은 같은 나라의 군대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군대였지만, 천황을 자기 입맛에 맞춰 해석하는 과정에서 육군과 해군은 무한경쟁을 벌였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진주만 공격은 바로 육군과 해군 간의 충성경쟁의 산물(産物)이기도 했다. 독점자본주의 재벌들은 육군과 해군 사이의 경쟁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파고들었다. 육군과 해군을 개별적으로 상대하면서 재벌들의 이윤추구가 극대화됐다.
 
  이미 1단계부터 그러했지만, 일본 재벌들은 순수한 기업이라기보다는 반관반민(半官半民) 조직에 가까웠다.
 
  제국주의 유럽의 경우, 식민지 개척은 크게 세 단계를 거쳐 진행됐다. 1차로 선교사를 보내 식민지 후보지에 종교적·문화적 이념을 전파한다. 두 번째는 장사꾼이 나가 경제적 협력을 부르짖으며 유대 관계를 강화한다. 세 번째는 그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식민지를 자기들 뜻대로 좌우하기 위해 무력(武力), 즉 군대를 내보냈다.
 
  일본도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면서 유럽의 사례를 참고했다. 그러나 유럽처럼 선교사 → 장사꾼 → 군대라는 3단계를 거치는 대신, 단칼에 문제를 풀어나갔다. 주역은 반관반민 성격의 재벌들이었다.
 
  외국에 나간 재벌의 조직원들은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이나 반(反)서방주의를 부르짖었다. 더불어 장사를 하면서 경제 관계도 심화시켜 나간다. 이어 현지 상황을 정탐하고 내부정치를 교란시키는 첩자로서의 역할도 했다. 그렇게 진출한 땅을 식민지로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1930년대 초 동남아시아에서 보듯 직접적으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서도 단물을 뽑아낼 수 있는 체제를 구축(構築)했다. 1인 3역, 일본이 창조해 낸 제국주의 진출 양식이다.
 
  일본인들이 제2차세계대전을 표현하는 말은 두 가지가 있다. 대동아전쟁과 태평양전쟁이다. 어떻게 호칭하느냐에 따라 역사를 보는 시각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 ‘대동아전쟁’이란, ‘대동아공영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전쟁’이란 의미, ‘태평양전쟁’은 서방 제국주의에 맞서는 ‘성전(聖戰)’이란 의미다. 범위로는 한국·중국·동남아시아가 대상에 들어간다.
 
 
  태평양전쟁의 원인은 美의 경제제재?
 
  일본의 ‘우향우 인사’들은 ‘대동아전쟁’을 결코 진 싸움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태평양전쟁, 즉 진주만 공격에서 비롯된 미국과 서방연합국과의 전쟁에서 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대동아전쟁에서의 승리는 그대로 유지됐을 것이라 믿고 있다.
 
  대동아전쟁이란 말은 패전 후 미군이 진주(進駐)하면서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금지용어가 됐다. 미국을 적으로 하면서, 아시아를 상대로 한 전쟁을 찬미하고 회상하는 ‘건방진 사고’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동아전쟁’의 무대는, 반관반민 일본 재벌이 군부를 대신해 가장 ‘효과적이고도 아름답게’ 일한 곳이기도 하다. 태평양전쟁은 이들이 구축한 경제권이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간섭에 의해 봉쇄되면서 일어난 것이라고 일본의 ‘우향우 인사’들은 생각한다.
 
  태평양전쟁은 일본 육군과 해군이 자신들의 중국 침략에 간섭하는 미국에 분개해 일어났다고도 볼 수 있지만, 진짜 큰 이유는 바로 경제제재(制裁)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제재는 재계에 대한 압력인 동시에, ‘천황재벌’에 대한 도전이었다. 태평양전쟁 음모론에 익숙한 일본인 중 일부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미국의 경제제재를, 그 같은 상황을 전부 인식한 가운데 감행한 ‘계산된 도발’이라는 식으로 분석한다. 미국이 재벌만이 아니라, ‘천황재벌’의 목을 죄기 위해 석유 수출 중단과 철강 수출 금지와 같은 경제제재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가까운 시일 내에 미일(美日)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란 점을 미국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논리다.
 
 
  GHQ의 재벌 해체
 
패전 후 연합군최고사령부(GHQ)로 맥아더 사령관을 예방한 히로히토 일본 천황. GHQ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일본 재벌을 해체했다.
  제3단계는 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15일부터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하기까지의 시기이다.
 
  당시 일본 재벌이 상대한 정부는 GHQ, 연합군최고사령부다. ‘GHQ=정부’였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GHQ가 구일본의 육군·해군을 대신해 새로운 파트너로 등장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GHQ 내의 경제과학국이 재벌들의 상대가 됐다.
 
  GHQ는 반관반민 재벌들을 군부를 도와 전쟁을 일으킨 준전범(準戰犯)으로 취급했다. 재벌 총수와 그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체포되어 군법회의 재판에 회부돼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재벌 경영을 좌지우지하던 극소수의 경영자와 그 가족들이 전부 쫓겨났다.
 
  재벌 기업들이 사실상 해체되면서, 그 주식은 일반인에게 판매됐다. 미쓰비시·미쓰이·스미토모·야스다의 경영진 모두가 경영현장, 아니 경제무대에서 한순간에 사라졌다. 당시 GHQ가 해체한 일본 재벌은 전부 78개에 달한다. 경영 퇴진과 기업 해체에 그치지 않았다. 종래의 재벌 기업명(名)도 불법시되면서 사라졌다. 미쓰비시·미쓰이라는 기업 자체가 GHQ 점령하에서 사라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 쌓아온 100여 년의 독점자본경제의 주역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해체됐던 재벌 기업들은 전쟁이 끝난 지 6년 뒤, 마치 거짓말처럼 부활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소련의 팽창 야욕을 절감하게 됐다.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 나아가 대만도 공산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결론은 일본의 무장화(武裝化)였다. 미국은 일본을 반공(反共)의 방파제(防波堤)로 삼았다. 소련과 공산중국을 막는 임무가 일본에 부여됐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일본을 독립국으로 인정한 바로 다음날, 미일군사동맹이 체결됐다.
 
  종래의 재벌 기업들은 이 시기를 틈타 재(再)등장했다. 미국의 절대적인 지지와 함께 ‘반공 일본’을 지키는 경제보호막으로서 구일본 재벌들이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재벌이란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1910년대부터 《옥스퍼드 사전》에 등록된 ‘자이바쓰(財閥)’란 말을 대신해, ‘그루프(グル一プ·그룹)’란 말이 등장했다. 경영권을 주름잡던 재벌 경영자들의 재등장도 여전히 금지됐다.
 
  그러나 과거의 재벌이던 미쓰비시·미쓰이·스미토모 같은 기업명들의 부활은 허락됐다. 기업명도 같고 사업내용도 비슷하고 실제 일한 조직원도 비슷했다. 달라진 점도 있었다. 군(軍)과 관련된 일을 배제하고, 한 사람의 주인이 지배하지 않는 ‘만인평등’ 조직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 재벌의 역사에서 제4단계에 해당되는 시기다. ‘평화재벌’이 등장한 것이다. 이 시기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21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자이바쓰’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영어가 《옥스퍼드 사전》에 올라간다. ‘JAEBUL’, 즉 한국의 재벌이다. 전쟁 전 일본 자이바쓰 시스템을 그대로 응용한 것이 바로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 체제다. IMF사태 이후 재벌의 힘이 빠지는 듯 보였지만, 아직도 재벌은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 자이바쓰에 버금가는 힘을 행사하고 있다.
 
 
  ‘아마쿠다리’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60여 년이 넘어서는 동안, 재계가 상대한 파트너는 자민당이다. 구일본의 군·재계·관료 출신자를 기반으로 발전한 정당이 자민당이다. ‘자민당=정부’라는 말이다.
 
  새로 등장한 민주주의 체제하의 테크노크라트, 즉 관료를 정부라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부를 살펴보면 ‘자민당=관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료 가운데 영향력이 강한 인물은 자민당 공천을 받아 정치로 진입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오르내리는 정부 관련 각종 마피아 구조는 일본이 1960년대부터 시작한 ‘구습(舊習)’의 복사판에 불과하다. ‘아마쿠다리(天下り)’로 표현되는 일본판 정부 마피아는 한국 정부 내 마피아의 수준을 넘어서는, 백전백승(百戰百勝) 철옹성(鐵甕城) 수준의 단결력과 능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들은 그 어떤 ‘시련(?)’이 닥친다 하더라도 자신들만의 이익을 확실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는 조직이다.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소 대재앙 이후 책임자인 경제산업성 출신 아마쿠다리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을 조직이 일본 아마쿠다리다. 구일본 출신자로 구성된 자민당과 관료 아마쿠다리와 연계한 재계는 그들의 비즈니스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시켜 나갔다.
 
 
  민주당 정권과 財界
 
  여기서 한때 집권당이었고, 지금은 제1야당인 민주당은 어떤 존재냐 하는 의문이 나올 수 있다. 2009년 8월 말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총의석 480석 가운데 308석을 획득했다. 야당의 도움이 필요 없는, 절대안정 다수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자민당은 119석에 그쳤다. ‘자민당 해체론’이 나오고 일본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듯 싶었다.
 
  그 같은 상황은 2012년 12월 아베 등장과 함께 끝났다. 민주당의 집권은 국민들이 민주당을 좋아해 나온 결과가 아니었다. 자민당이 지리멸렬하면서 50년 넘게 이어져 온 자민당 체제에 지친 국민들이 민주당에 한번 기회를 준 것이었다.
 
  그렇게 주어진 기회를 민주당은 3·11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대재앙으로 놓쳐버렸다. 재앙 자체도 문제지만, 비상상황이 터진 뒤 보여준 민주당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국민들은 두 손을 들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놓고 미국과의 동맹 관계가 삐걱거린 것이나, 민주당 정권의 친중(親中) 행보도 국민들의 불만을 샀다. 민주당 실권자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자파(自派)의원 140여 명을 거느리고 방중(訪中),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주석에게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된 것이다.
 
  이어서 내리막이던 경제도 엉망이 되고, 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재계는 일찌감치 민주당을 멀리하고 있었다. 집권 여당과 재계와의 대화도 단절됐다. 민주당 집권 시절 민주당과 재계의 관계는, 재계와 자민당의 관계처럼 서로 밀고 당기는 관계가 아닌, 서로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였다.
 
  결국 민주당의 원자력발전소 정책을 두고 재계의 불만이 폭발했다. 민주당은 제2의 후쿠시마 사태를 우려해, 아예 ‘원자력발전소 가동제로’, 즉 ‘원전 폐쇄’를 정책으로 내걸었다. 2012년 아베의 등장과 압승은 이 같은 재계의 위기감에 편승한 결과였다.
 
  아베는 재계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는 정치가임을 자부하고 있다. 엔저(円低)를 유도해 일본 수출 상품의 경쟁력 강화에 앞장서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경제 체제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문제만 해도, 정부보다는 재계의 입장을 우선 반영하고 있다. 아베는 재계 관계자들과 만나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재계가 원하는 나라로 달려가 정상외교를 통한 비즈니스에 열중한다. 재집권 후 2년 동안 아베가 방문한 나라가 50개국에 달한다. 이러한 외국순방은 경제적 목적을 띤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앞으로 변화가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아베노믹스의 핵심은 재계의 입장을 적극 반영하는 것이다. 아베가 총선거에서 새판을 짠 뒤 구체화되겠지만, 법인세(法人稅) 대폭 인하와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은 재계의 염원이기도 하다. 아베가 총선거의 명분으로 내세운 소비세(消費稅) 인상 유예도 국민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기보다, 숨고르기를 요청하는 재계의 바람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美기업과 共生 꾀하는 日 기업
 
최근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이 만든 제트여객기 MRJ. 2020년까지 1000대 이상 판매할 계획이다.
  아베의 자민당 정권이 재계의 지지를 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무기수출 3원칙’의 해제다. 일본 기업의 무기생산과 무기수출은 GHQ에 의한 재벌 해체 이후 사실상 중단되었다. 무기 생산과 수출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이었다. 일본 기업이 아무리 최고 성능의 값싼 무기를 만든다 해도 미국이 반대할 경우 수출길이 막힌다.
 
  ‘집단적 자위권’은 2014년 일본의 최고 유행어로 꼽힌 말이다. ‘집단적 자위권’은 미쓰비시·미쓰이·히타치(日立)가 구상하는 일본 기업의 무기 생산과 수출을 허용케 하는 미끼다. 자위대가 ‘미군 2중대’로 함께 싸우러 가는 대신, 무기를 만들고 수출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것이다. 미국에 이를 요청한 주체는 바로 아베와 자민당이다.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만든 소형 제트여객기가 날개 돋친 듯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저렴한 일제 고성능 무기는 2015년도부터 일본 경제를 달굴 비장의 무기다. 워싱턴의 일본 기업 사무실은 무기수출은 물론, 원자력발전소의 해외수주에 혈안이 돼 있다.
 
  일본 기업은 세계 각국의 대형 프로젝트에 도전할 경우 미국과 함께 진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미국이 반발할 것을 고려해, 이익을 독식하지 않고 나누겠다는 생각이다. 더불어 미국 내에 일본산 최첨단 기술을 판매하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태평양전쟁과 GHQ를 통해 미국의 힘을 절감한 것은 일본군이나 정부만이 아니다. 계산에 빠른 재계는 미국의 힘을 한층 더 피부로 실감했다.
 
  아베의 총선거를 대하는 한국 언론의 분석을 보면, 지지율 저하를 만회하기 위한 ‘좌충우돌 꼼수’라는 식의 기사가 대부분이다. 한국이 아베를 싫어하는 것은 알지만, 일본 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황당한 해석’이다.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지만, 아베는 ‘정신 나간 우익 정치가’가 아니라, 일본의 전체 분위기를 대변하고 상징하는 정치인이다.
 
  아베를 적극 지지하는 일본 본류(本流) 가운데 핵심이 바로 재계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재계가 적극 반대할 경우 정당은 집권을 꿈꾸기 어렵다. 재계가 거부하는 정치인은 총리가 될 수 없다.
 
 
  經團連, 자민당 전폭 지원 다짐
 
  사카키바라 경단련 회장은 2004년 9월 중순 아베와 만나 자민당에 대한 전면적인 지지를 재확인했다. 경단련 휘하 1600여 기업에 대해 자민당 지원 정치헌금을 모집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아베가 집권하기 직전인 2012년 한 해 동안 13억 엔에 그쳤던 경단련의 정치헌금이 100억 엔으로 급증할 것이란 보도가 흘러나온다.
 
  민주당에 대한 경단련의 지원은 거의 제로 상태다. 경단련의 지원은 재계만이 아니라, 휘하 직원과 관련 하청 기업들까지 이어진다. 재계가 자민당을 전폭 지지하는 한, 민주당이 정권을 잡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태평양전쟁 후의 6년간의 상황을 예외로 할 경우, 일본 역사상 경제단체 수장(首長)들이 지원하는 지도자와 정당이 좌초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아베나 자민당 내 아베의 아바타가 계속 정권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국 내에서 벌어지는 구일본 재벌에 대한 소송 문제는 아베의 등에 탄 일본 재계의 최대 관심사이다. 아베의 자민당이 추진하고 있는 ‘우향우’는 단순히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경제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의 정치와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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