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두견새 두와 봉우리 봉이 합쳐져 ‘두견새 우는 봉우리[杜峰]’라는 한국 이름을 즐겨 썼다. 그의 경북 의성집 대문에도 두봉이란 문패를 걸었다.
두봉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의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50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고 3년 뒤 한국으로 왔다.
발령받던 날이 1953년 6월 29일. 6·25 전쟁이 끝나기 전이었다. 사실상 순교하러 떠나야 했다. 두봉 주교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아직 휴전을 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 중인 나라에 사제를 안 보내거든요. 죽으러 간다는 것보다 목숨이라도 다 내놓는다. 그런 것은 다 우리 정신이죠.”
전쟁으로 가장 가난한 한국에서 선교사로 살았다. 1969년 주교품을 받고 유교적 전통의 뿌리가 깊은 안동에서 초대 안동교구장(재임 1969~1990년)을 맡았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한국인의 손에 맡겨야 한다”며 1979년과 84년, 86년, 89년 네 차례에 걸쳐 고집스레 교구장 사임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교회 건물이 아닌 안동문화회관과 농민회관을 건립했고 가톨릭농민회 설립을 도와주었다.
안동교구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예 경북이나 안동 근처엔 가지 않았다. 경기도 행주산성에 있는 자그마한 공소(公所)에서 13년간 머물렀다.
그러나 말년엔 안동 근처 의성에서 살았다. 오가다 방문객들이 그의 집을 찾으면 누구나 환영했다. 늘 대문이 열려 있었다.
그들에게 세상 살아가는 지혜를 들려주었다. 꼭 신앙만이 아니라 삶에서 겪는 어려움을 듣고 토닥여 주었다.
그는 한국에서 71년간 ‘기쁘고 떳떳하게’(안동교구장 모토) 살고 싶었다. 그리고 ‘기쁘고 떳떳하게’ 신(神)의 품으로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