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또 추첨 조작, 현장에서 지켜보니 근거 없어
⊙ 좌파의 2대 음모론 ‘천안함’ ‘세월호’
⊙ 일부 우파가 음모론 믿는 이유는 박근혜 탄핵 이후 마음 둘 곳 없어
⊙ 좌파의 2대 음모론 ‘천안함’ ‘세월호’
⊙ 일부 우파가 음모론 믿는 이유는 박근혜 탄핵 이후 마음 둘 곳 없어
- 2024년 12월 31일 전북 무안국제공항에서 발생한 제주항공 7C2216편 사고 현장에서 경찰 과학수사대가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지난 12월 29일 오전 제주항공 7C2216편 항공기가 동체 착륙을 시도하던 중 활주로 끝 콘크리트 둔덕과 충돌하면서 181명 탑승객 가운데 179명이 사망했다. 사진=조선DB
“구입한 로또 들고 들어가도 돼요?”
20대로 보이는 남성이 묻는다. 스태프가 답한다. “네, 1등 당첨돼도 소리만 안 지르시면 됩니다.” 지난 1월 4일 오후 6시 좀 넘은 시각, MBC 로비에서 오간 대화다. 로또 추첨 방송인 〈생방송 행복드림 로또 6/45〉를 방청하러 온 참이었다. 방청을 하려면 사전에 신청을 해야 하는데 한 달에 한 번 한 달 치 방청객을 뽑는다. 기자도 신청일을 기다려서 잽싸게 신청했다. 로또 추첨을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인지 20명 자리가 금방 마감됐다.
로또 추첨 현장에서 지켜보니
토요일 저녁 8시35분에 방송되는데, 오후 6시15분까지 가야 했다. 왜 일찍 부르나 했더니 몇 가지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추첨 절차와 사용 기계에 대해 설명하고 추첨 리허설까지 해본다. 숫자가 쓰인 공의 무게도 잰다. 45개를 다 재지는 않고 방청객들이 무작위로 숫자를 불러 5개를 잰다. 마포경찰서에서 온 경찰관이 절차를 참관했다.
리허설까지 끝나고 생방송 시작을 기다리는 중, 옆자리에 앉은 남성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왜 오셨어요?” 잠시 침묵 끝에 답이 돌아왔다. “로또를 자주 사거든요. 어떻게 추첨하는지 보러 왔어요. 지난번 번호가 워낙 이상했잖아요.” “추첨을 조작할 수 있을까요?” 물었더니 남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모르겠다’고 답했다.
2024년 12월 28일에 추첨한 제1152회 로또복권 당첨 번호는 ‘30, 31, 32, 35, 36, 37’이었다. 올해 첫 연금복권(244회)의 1등 당첨번호는 5조 ‘033337’이었다. ‘로또 조작설’이 다시 한 번 인터넷을 들썩였다.
‘로또 조작설’은 말 그대로 로또 추첨과 상금 배분이 조작이라는 주장이다.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는 5년에 1번씩 로또 사업을 운영할 사업자를 선정한다. 동행복권이 2018년부터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동행복권이 맡고 나서 로또 조작설에는 ‘중국’이라는 요소가 더해졌다. ‘동행복권의 최대주주가 제주반도체(44.6%)인데, 제주반도체의 주주 중에 중국계 자본(쉰제캐피털)이 있다’는 주장이다. 사실일까. 일단 2023년 말 기준으로 쉰제캐피털은 주주 명단에 없다. 이전에 주주였던 적은 있다. 2023년 말 기준으로 제주반도체 대표와 특수 관계인이 총 12.14%, 소액주주들이 85.67%를 보유 중이다. 쉰제캐피털은 중국 자본도 아니다. 대만의 반도체 기업 UMC의 계열사다. 로또 조작설의 진위가 의심되는 이유다.
결론적으로 기자는 적어도 로또 추첨을 조작하는 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첨 절차를 끝까지 지켜본 감상이다. 사전 검수 절차가 꽤 복잡하고, 검수에 방청객이 참여하기도 했다. 조작이 끼어들 틈새가 별로 없어 보였다. ‘1, 2, 3, 4, 5, 6’이 나오더라도 조작이 아니겠다 싶었다.
음모론(陰謀論·conspiracy theory)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배후에 거대한 권력 조직이나 비밀스러운 단체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 ‘로또 조작론’은 어떻게 보면 음모론 중에서도 귀여운 축에 속한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다른 시대에도 음모론은 존재했다. 당장 미국에는 ‘9·11 테러 미 정부 개입설’ ‘케네디 암살 음모론’ ‘딥스테이트 존재론’ 등 다양한 음모론이 횡행하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벌어졌던 ‘마녀 사냥 재판’은 마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판타지성 음모론에서 출발했다.
음모론은 기본적으로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 너무 심할 때,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동원된다. 〈음모론의 시대〉를 쓴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간극으로부터 기인하는 고통은 양자 모두 사회의 외부나 개인의 외부에서 찾고 그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심리적 구조를 갖게 만든다. 감정적이며 도덕적 곤경에서 (비록 상상적일망정) 빠져나올 수 있도록 음모론을 믿게 된다”고 말했다.
세상 이해하는 방식
《음모론》을 쓴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얀-빌헬름 반 프로이엔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소외감, 사회의 급변하는 권력 구조, 공권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등이 음모론을 가져온다고 분석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사태를 이해하려는 열망으로 이어지는데, 이때 사람들은 최악을 가정하며 권력을 가졌거나 자신과 다르거나 신뢰할 수 없는 외집단에 대해서 의심을 증폭시킨다’고 말이다.
음모론이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얘기다. 특수한 사람들의 병적인 증상도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다.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혹은 이해하기 힘든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사건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강력한 권력을 지닌 자들이 배후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게 마음 편해서다. 문제는 음모론이 사회 분열과 극단화를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스 더댓은 칼럼에서 “2020년대 미국의 우파는 19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횡행하던 좌파의 덕목을 다 갖추고 있다”고 썼다. 그가 말하는 덕목은 바로 ‘음모론’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 중 일부가 지나치게 음모론을 신봉하는 행태를 비판하는 의도지만, 동시에 음모론이 어느 한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천안함·세월호 음모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좌파의 2대 음모론은 ‘천안함 의혹’과 ‘세월호 사고 의혹’이다. 구체적으로는 ‘천안함 북한 소행 부정설’ ‘미군 기뢰 오폭설’ ‘천안함 자폭설’ 등으로 나뉜다. 아직도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믿는 자들이 있냐고?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을 부정하는 망언자 조한기·노종면·박선원·권칠승·장경태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 천안함 유가족과 국민 앞에 진심 어린 사과를 하길 바랍니다.” 이성우 천안함46용사 유족회장(고 이상희 하사 부친)이 총선을 앞둔 지난해 3월 ‘제14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에서 민주당의 천안함 음모론자들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게 북한의 소행인지, 누구의 소행인지 말씀 좀 해달라.”
윤청자 여사가 오죽하면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던졌겠는가. 윤 여사는 천안함 폭침으로 사망한 고(故) 민평기 상사의 모친이다. 2020년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가가 물었다.
‘세월호 음모론’은 더 가관이다. ‘고의 침몰설’ ‘의도적인 구조 지연설’, 청해진해운의 뒤에 국정원이 있다는 ‘국정원 개입설’도 있었다. 심지어 ‘세월호 인신공양설’도 돌았다. ‘사교에 빠진 최순실(최서원) 일당이 박근혜 대통령과 공모해 교주 최태민의 부활을 위해 304명을 의도적으로 진도 앞바다에 수장(水葬)시켰다’는 주장이다. 다시 봐도 엄청난 상상력이다.
광주 5·18 북한군 개입설
우파의 2대 음모론은 ‘광주 5·18 북한군 개입설’과 ‘부정선거 의혹’이다. 광주 사태 북한군 개입설은 군사평론가인 지만원씨가 주장해 왔다. 지씨는 2020년 낸 책 《무등산의 진달래 475송이》에서 ‘5·18은 북한군 특수부대원 600명이 침투해 일으킨 폭동’ ‘5·18 당시 북한군 475명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하다 우리 쪽 공수부대의 반격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충북 청주에 묻혀 있던 북한군 유골 430구를 우리 정부의 협조로 2014년 북한으로 반환했다’고 주장했다. 5·18 당시 사진에 찍힌 광주시민을 북한 특수군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5·18 단체와 북한군으로 지목된 유공자들은 ‘출판 및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고,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4월 재판부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지씨는 각 단체와 유공자에게 각각 1000만원씩 모두 9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덧붙여 해당 서적을 추가로 배포하거나 인터넷에 내용을 게시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굳이 법적 판단이 아니더라도 지씨의 주장에 찬성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는 5·18 당시 광주에 들어가 현장을 취재했다. 이후에도 관련자들을 만나며 취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조 대표는 북한군 수백 명이 잠입해 광주에서 활약했다는 주장을 단호히 부정한다.
물론 좌파도 5·18을 배경으로 한 음모론을 퍼트렸다. 헬기 사격이 대표적이다. 명령이 있었지만 헬기 조종사들이 현장에서 명령을 거부해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사격이 마치 있었던 일처럼 되어 있다. 700만 명이 본 영화 〈화려한 휴가〉(2007)에서는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을 향해 공수부대가 무릎 쏴 자세로 총탄을 발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역시 엄청난 음모론적 왜곡이다. 5·18이 지금까지도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좌우파 일부 세력의 음모론 합작 덕이다.
음모론 키우는 진영 논리
‘부정선거’의 경우 좌파에서 피운 불씨가 우파로 옮아와 타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가 당선되자 김어준씨와 주변 무리는 부정선거였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개표 조작이 있었단 얘기다. 김씨는 〈더플랜〉(2017)이라는 다큐 영화까지 제작했다. 문재인이 당선된 후 좌파에서 슬그머니 내버린 부정선거 주장을, 지금은 일부 우파 세력이 활용 중이다. 역시 개표 조작을 든다. 지난 2020년 실시된 4·15 총선에서 개표 부정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부정선거론은 일단 법원에서는 기각됐다. 대법원은 개표 조작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민경욱 후보, 나동연 후보의 선거 무효 소송을 기각했다. 보수우파 내에서도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의견은 갈린다. 윤석열 대통령도 계엄령 선포 이유 중 하나로 선거 부정 의혹을 들었다.
음모론이 활개를 치는 이유는 뭘까. 일단 진영주의가 극에 달했다. 양 진영 사이에 소통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동창회 단체 대화방이 정치 얘기 때문에 쪼개지고, 부모 자식 사이도 험악해질 정도다. 갈등 상황의 주체들 사이에 소통이 없으면 음모론이 더 퍼진다. 개인들 사이에도 소통이 없으면 오해가 쉽게 생기지 않나.
안타깝지만 문재인 정권을 거치며 진영 논리는 더 격화됐다. 시작부터 ‘세월호 음모론’ 바람을 타고 집권에 성공한 정권이었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말에도 40%대 지지율을 기록한 비결 중 하나로 ‘편 가르기 정치’, 일명 ‘갈라 치기’를 들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국익을 위해 자기 지지자들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다가 지지율 하락 사태를 맞았지만, 문 대통령은 집토끼를 지키느라 그런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갈라 치기의 백미는 코로나19 시국에 일어난 의사-간호사 갈라 치기였다. “의료진이라고 표현되었지만 대부분이 간호사들이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문 대통령이 소셜미디어(SNS)에 쓴 글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엔 일부 지지자의 ‘문자폭탄’ ‘18원 후원’을 “경쟁을 흥미롭게 만들어준 양념”이라고 표현했다. 실질적으로 독려한 셈이다.
그러면서 진실 여부를 검증할 공론장이 무너졌다. 사실과 주장, 신호와 소음, 진실과 거짓이 공론장에서 구분되지 못하고 떠다니고 있다. 두 가지를 구분해 줄 권위 있는 주체도 없어졌다. 잘 생각해 보자. 현재 한국 사회에 국민 과반수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기관, 혹은 인물이 있는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람시의 진지전
예전엔 흔히 ‘4대 일간지’라는 표현을 썼다. 해당 언론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보수-진보 양측이 해당 언론들이 보도한 사실에 기반해 논쟁을 벌였다. 지금은 그 자리를 SNS를 타고 도는 지라시, 유튜브가 차지했다. 우리 편이 보내주는 지라시만 읽고, 알고리즘에 갇혀 내 생각과 같은 유튜브 영상만 본다. 그러니 상대편 주장은 무조건 ‘가짜 뉴스’고, 우리 편 주장은 거짓이라 해도 ‘대안적 진실’이다. 국회는 물론 사법부도 믿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일각에서는 공산주의자 그람시의 ‘진지전(陣地戰·War of Position)’을 지목한다.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 혁명은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되지 않는다고 봤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중간 계층이 형성된 결과, 자본주의의 모순은 관리 가능하게 됐고,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람시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맞는 공산 혁명을 제시했다. 그게 바로 ‘진지전’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같은 정면 대결, 즉 ‘기동전(機動戰·War of Maneuver)’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말 그대로 교육·언론·학계·예술·문화·시민단체 등 사회 전 영역에서 진지를 구축해 우파 헤게모니를 밀어내고 좌파 대항(對抗) 헤게모니를 전파하는 정치·문화적 참호전이 진지전이다. 진지에 터를 잡고 우파 헤게모니를 갉아먹으며 때를 기다린다. 결정적인 때가 오면 진지에서 나와 ‘기동전’, 즉 혁명을 일으키자고 그람시는 제시했다.
좌파 헤게모니의 진지전 결과, 우파 헤게모니에 속하는 기존의 권위들이 모두 너덜너덜해진 건 아닐까. 이승만·박정희 등 나라를 세운 초기 지도자들의 이미지는 오염된 지 오래다. 법치의 기반인 사법부, 사법 제도에 대한 신뢰도 땅에 떨어졌다. 드루킹 사건을 겪으며 인터넷의 댓글 하나도 쉽게 믿지 못하게 됐다.
불안 느끼는 한국
여기에 유난히 ‘불안함’을 많이 느끼는 한국 사회의 취약성도 더해졌다. 장기간 불안에 시달리면 판단력이 떨어져 가짜 뉴스나 음모론에 더 쉽게 휘둘릴 수 있다. 보건복지부가 2021년 발표한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 4명 중 1명은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했지만 정신장애를 진단받은 사람 중 12%만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2021년 실시한 10대 청소년 정신건강 실태조사를 보면 청소년의 17.4%가 경도 이상의 우울, 13%가 불안 증상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6.4%는 자살 위험성까지 내보였다.
젊은 층 사이에 무언가를 칭찬할 때 쓰는 ‘무해하다’라는 표현도 불안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다. 불안감을 안 느껴도 되는 사람과 장소를 간절히 찾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북한을 접하고 있으며 상시적으로 집단적인 긴장감을 느끼고 있다. 한국은 ‘불안한 섬’인 셈이다.
무안공항 참사 루머
그러니 대형 사건이 일어나면 음모론으로 직결된다. 천안함, 세월호, 코로나19 팬데믹, 이태원 참사, 무안공항 사고 모두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와 관련해서는 백신 루머가 돌았다. 이번 무안공항 참사에 있어서는 ‘《광주일보》에서 사건을 일주일 전에 이미 보도했다’ ‘중국제 새 모양 드론이 의심된다’ ‘MBC 뉴스에 잠깐 나타난 자막 817은 북한의 지령’이라는 등의 루머가 돌았다.
여기에 대해서 《광주일보》 측은 “기사 입력 시스템에 기사를 올리는 과정에서 날짜 오류가 났다”고 설명했다. 안보 전문가들에게 드론설에 대해 물었다. 입을 모아 “드론을 이용한 테러라 보기엔 목표나 타깃이 불분명하다. 사고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MBC 뉴스의 817 자막은 방송 사고라고 판단된다. MBC는 자막 사고가 문제가 아니라 제보자가 제공한 사고 영상을 계속 튼 점을 지적받아야 한다. 분석 결과 충돌 4분 전 상황부터 블랙박스에 저장이 안 되어 있다니 음모론이 더욱 기승을 부리진 않을지 우려된다.
왜 음모론을 부추길까. 행동경제학을 연구한 캐스 선스타인(Cass R. Sunstein)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자신의 저서 《루머(On Rumours)》에서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목적으로 네 가지를 들었다. ▲편협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목적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기 위한 목적 ▲의혹과 불신을 조장하기 위한 목적이다.
힐러리 낙선시킨 피자게이트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퍼진 ‘피자게이트’는 명백히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기 위한 루머였다. 내용은 이렇다. ‘힐러리 클린턴과 빌 클린턴은 워싱턴DC에 있는 코밋핑퐁(Comet Ping Pong)이라는 피자 레스토랑에서 소아성애(pedophilia) 모임을 여는데, 레스토랑의 지하에서 납치한 아이들을 인신매매한다.’ 이 음모론이 진실인 줄 알고 20대 청년이 해당 레스토랑을 찾아가 총기를 난사하기도 했다. 당연히 레스토랑엔 성착취당하는 아동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사건 장소로 지목된 지하실도 없었다. 피자게이트는 힐러리 낙선에 한몫을 했다.
피자게이트의 진원지는 ‘큐어넌(QAnon)’이라는 음모론 집단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도운 정치 컨설턴트 로저 스톤 역시 선거를 앞두고 음모론에 가담했다. “빌 게이츠 등의 인사들이 코로나19 사태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마이크로칩을 심으려고 백신을 맞게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선 역시 김어준 같은 사람들을 들 수 있다. 그는 대형 사건으로 사회가 흔들릴 때마다 천안함 좌초설과 세월호 고의 침몰설, 대선 부정선거 같은 음모론을 배포했다. 강준만 교수는 김어준에 대해 “〈나는 꼼수다〉의 성공 이후 김어준이 우리 앞에 펼쳐놓은 것은 온갖 음모론이 판을 치는 정치 무속의 세계”였다고 평했다. 각종 음모론을 유통하는 일부 극좌, 극우 유튜버들도 문제다.
과학적 지식과 지혜
음모론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일단 음모론의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보수우파가 부정선거 의혹을 비롯한 각종 음모론을 믿는 이유는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다. 이들은 절차적 정당성과 근거가 부족했던 박근혜 탄핵이 그대로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며 심적 충격을 받았다. 일종의 트라우마다. 마음 둘 곳이 없으니 가짜 뉴스와 음모론에 눈길을 준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다. 악마를 악마라고 증명할 수만 있다면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는 주장도 요즘 말로 ‘흐린 눈’을 하고 믿어버린다.
최근 들어 부정선거 주장이 더욱 거세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윤 대통령의 계엄령 해프닝과 뒤이은 탄핵, 구속 시도 등을 보며 느낀 감정적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부정선거론에 더욱 매달린다.
미국의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는 저서 《신호와 소음》에서 소음에서 신호를 분리하려면 갖춰야 하는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 과학적 지식이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정부와 언론은 애초에 가짜 뉴스가 돌기 시작할 때 빠른 대처로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부정선거 주장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불거지는 모든 의혹에 성의 있게 답할 의무가 있다. 선거에 대한 신뢰는 민주주의의 척추와도 같기 때문이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문화도 고쳐야 한다. 의대 증원을 논의하는 정부 공식 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는 게 도대체 말이 되나. 기본부터 안 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 원인으로 ‘반지성주의’를 지목한 정부답지 않다.
같은 맥락에서 박선원 민주당 의원의 ‘보고서 해프닝’은 안타깝다. 박 의원은 김어준이 ‘계엄군의 한동훈 사살 계획을 제보받았다’고 주장한 것을 두고 대체로 사실이 아니라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 등에게 보고했다. 국회가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다. 김어준 지지자들은 “왜 김어준을 음모론자로 매도하느냐”고 박 의원에게 반발했고, 박 의원은 보고서를 수정하고, 김어준의 유튜브 방송에 나가 김어준에게 사과했다.
네이트 실버는 음모론을 다스리기 위해 갖춰야 할 두 번째 요소로 자기 인식을 들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손’과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예측하는 ‘용기’, 이들 사이의 차이를 아는 ‘지혜’다.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함께 공론장에서 만나 겸손한 자세로 용기를 내 지혜를 모을 날이 언제쯤 올까.⊙
20대로 보이는 남성이 묻는다. 스태프가 답한다. “네, 1등 당첨돼도 소리만 안 지르시면 됩니다.” 지난 1월 4일 오후 6시 좀 넘은 시각, MBC 로비에서 오간 대화다. 로또 추첨 방송인 〈생방송 행복드림 로또 6/45〉를 방청하러 온 참이었다. 방청을 하려면 사전에 신청을 해야 하는데 한 달에 한 번 한 달 치 방청객을 뽑는다. 기자도 신청일을 기다려서 잽싸게 신청했다. 로또 추첨을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인지 20명 자리가 금방 마감됐다.
로또 추첨 현장에서 지켜보니
토요일 저녁 8시35분에 방송되는데, 오후 6시15분까지 가야 했다. 왜 일찍 부르나 했더니 몇 가지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추첨 절차와 사용 기계에 대해 설명하고 추첨 리허설까지 해본다. 숫자가 쓰인 공의 무게도 잰다. 45개를 다 재지는 않고 방청객들이 무작위로 숫자를 불러 5개를 잰다. 마포경찰서에서 온 경찰관이 절차를 참관했다.
리허설까지 끝나고 생방송 시작을 기다리는 중, 옆자리에 앉은 남성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왜 오셨어요?” 잠시 침묵 끝에 답이 돌아왔다. “로또를 자주 사거든요. 어떻게 추첨하는지 보러 왔어요. 지난번 번호가 워낙 이상했잖아요.” “추첨을 조작할 수 있을까요?” 물었더니 남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모르겠다’고 답했다.
2024년 12월 28일에 추첨한 제1152회 로또복권 당첨 번호는 ‘30, 31, 32, 35, 36, 37’이었다. 올해 첫 연금복권(244회)의 1등 당첨번호는 5조 ‘033337’이었다. ‘로또 조작설’이 다시 한 번 인터넷을 들썩였다.
‘로또 조작설’은 말 그대로 로또 추첨과 상금 배분이 조작이라는 주장이다.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는 5년에 1번씩 로또 사업을 운영할 사업자를 선정한다. 동행복권이 2018년부터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동행복권이 맡고 나서 로또 조작설에는 ‘중국’이라는 요소가 더해졌다. ‘동행복권의 최대주주가 제주반도체(44.6%)인데, 제주반도체의 주주 중에 중국계 자본(쉰제캐피털)이 있다’는 주장이다. 사실일까. 일단 2023년 말 기준으로 쉰제캐피털은 주주 명단에 없다. 이전에 주주였던 적은 있다. 2023년 말 기준으로 제주반도체 대표와 특수 관계인이 총 12.14%, 소액주주들이 85.67%를 보유 중이다. 쉰제캐피털은 중국 자본도 아니다. 대만의 반도체 기업 UMC의 계열사다. 로또 조작설의 진위가 의심되는 이유다.
결론적으로 기자는 적어도 로또 추첨을 조작하는 건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첨 절차를 끝까지 지켜본 감상이다. 사전 검수 절차가 꽤 복잡하고, 검수에 방청객이 참여하기도 했다. 조작이 끼어들 틈새가 별로 없어 보였다. ‘1, 2, 3, 4, 5, 6’이 나오더라도 조작이 아니겠다 싶었다.
음모론(陰謀論·conspiracy theory)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배후에 거대한 권력 조직이나 비밀스러운 단체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 ‘로또 조작론’은 어떻게 보면 음모론 중에서도 귀여운 축에 속한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다른 시대에도 음모론은 존재했다. 당장 미국에는 ‘9·11 테러 미 정부 개입설’ ‘케네디 암살 음모론’ ‘딥스테이트 존재론’ 등 다양한 음모론이 횡행하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벌어졌던 ‘마녀 사냥 재판’은 마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판타지성 음모론에서 출발했다.
음모론은 기본적으로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 너무 심할 때,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동원된다. 〈음모론의 시대〉를 쓴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간극으로부터 기인하는 고통은 양자 모두 사회의 외부나 개인의 외부에서 찾고 그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심리적 구조를 갖게 만든다. 감정적이며 도덕적 곤경에서 (비록 상상적일망정) 빠져나올 수 있도록 음모론을 믿게 된다”고 말했다.
세상 이해하는 방식
《음모론》을 쓴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얀-빌헬름 반 프로이엔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소외감, 사회의 급변하는 권력 구조, 공권력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등이 음모론을 가져온다고 분석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사태를 이해하려는 열망으로 이어지는데, 이때 사람들은 최악을 가정하며 권력을 가졌거나 자신과 다르거나 신뢰할 수 없는 외집단에 대해서 의심을 증폭시킨다’고 말이다.
음모론이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는 얘기다. 특수한 사람들의 병적인 증상도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다. 자신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혹은 이해하기 힘든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사건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강력한 권력을 지닌 자들이 배후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게 마음 편해서다. 문제는 음모론이 사회 분열과 극단화를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스 더댓은 칼럼에서 “2020년대 미국의 우파는 197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횡행하던 좌파의 덕목을 다 갖추고 있다”고 썼다. 그가 말하는 덕목은 바로 ‘음모론’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 중 일부가 지나치게 음모론을 신봉하는 행태를 비판하는 의도지만, 동시에 음모론이 어느 한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천안함·세월호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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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 수호의 날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분향하려는 순간 천안함 용사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 여사가 다가가서 질문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 |
“이게 북한의 소행인지, 누구의 소행인지 말씀 좀 해달라.”
윤청자 여사가 오죽하면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던졌겠는가. 윤 여사는 천안함 폭침으로 사망한 고(故) 민평기 상사의 모친이다. 2020년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가가 물었다.
‘세월호 음모론’은 더 가관이다. ‘고의 침몰설’ ‘의도적인 구조 지연설’, 청해진해운의 뒤에 국정원이 있다는 ‘국정원 개입설’도 있었다. 심지어 ‘세월호 인신공양설’도 돌았다. ‘사교에 빠진 최순실(최서원) 일당이 박근혜 대통령과 공모해 교주 최태민의 부활을 위해 304명을 의도적으로 진도 앞바다에 수장(水葬)시켰다’는 주장이다. 다시 봐도 엄청난 상상력이다.
광주 5·18 북한군 개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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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3일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과 탈북민들이 국회 정론관에서 지만원씨의 탈북광수 지목 관련 집단 고소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지만원씨가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탈북민들을 광주에 파견된 북한 특수부대로 몰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진=조선DB |
5·18 단체와 북한군으로 지목된 유공자들은 ‘출판 및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고,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4월 재판부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지씨는 각 단체와 유공자에게 각각 1000만원씩 모두 9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덧붙여 해당 서적을 추가로 배포하거나 인터넷에 내용을 게시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굳이 법적 판단이 아니더라도 지씨의 주장에 찬성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는 5·18 당시 광주에 들어가 현장을 취재했다. 이후에도 관련자들을 만나며 취재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조 대표는 북한군 수백 명이 잠입해 광주에서 활약했다는 주장을 단호히 부정한다.
물론 좌파도 5·18을 배경으로 한 음모론을 퍼트렸다. 헬기 사격이 대표적이다. 명령이 있었지만 헬기 조종사들이 현장에서 명령을 거부해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사격이 마치 있었던 일처럼 되어 있다. 700만 명이 본 영화 〈화려한 휴가〉(2007)에서는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을 향해 공수부대가 무릎 쏴 자세로 총탄을 발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역시 엄청난 음모론적 왜곡이다. 5·18이 지금까지도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좌우파 일부 세력의 음모론 합작 덕이다.
음모론 키우는 진영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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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3일 서울 삼각지역 인근에서 자유민주주의 수호 애국시민연대가 ‘4·15 부정선거 규탄 삭발식’을 열고 사전투표 폐지와 수개표 실시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부정선거론은 일단 법원에서는 기각됐다. 대법원은 개표 조작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민경욱 후보, 나동연 후보의 선거 무효 소송을 기각했다. 보수우파 내에서도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의견은 갈린다. 윤석열 대통령도 계엄령 선포 이유 중 하나로 선거 부정 의혹을 들었다.
음모론이 활개를 치는 이유는 뭘까. 일단 진영주의가 극에 달했다. 양 진영 사이에 소통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동창회 단체 대화방이 정치 얘기 때문에 쪼개지고, 부모 자식 사이도 험악해질 정도다. 갈등 상황의 주체들 사이에 소통이 없으면 음모론이 더 퍼진다. 개인들 사이에도 소통이 없으면 오해가 쉽게 생기지 않나.
안타깝지만 문재인 정권을 거치며 진영 논리는 더 격화됐다. 시작부터 ‘세월호 음모론’ 바람을 타고 집권에 성공한 정권이었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말에도 40%대 지지율을 기록한 비결 중 하나로 ‘편 가르기 정치’, 일명 ‘갈라 치기’를 들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국익을 위해 자기 지지자들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다가 지지율 하락 사태를 맞았지만, 문 대통령은 집토끼를 지키느라 그런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갈라 치기의 백미는 코로나19 시국에 일어난 의사-간호사 갈라 치기였다. “의료진이라고 표현되었지만 대부분이 간호사들이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문 대통령이 소셜미디어(SNS)에 쓴 글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엔 일부 지지자의 ‘문자폭탄’ ‘18원 후원’을 “경쟁을 흥미롭게 만들어준 양념”이라고 표현했다. 실질적으로 독려한 셈이다.
그러면서 진실 여부를 검증할 공론장이 무너졌다. 사실과 주장, 신호와 소음, 진실과 거짓이 공론장에서 구분되지 못하고 떠다니고 있다. 두 가지를 구분해 줄 권위 있는 주체도 없어졌다. 잘 생각해 보자. 현재 한국 사회에 국민 과반수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기관, 혹은 인물이 있는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람시의 진지전
예전엔 흔히 ‘4대 일간지’라는 표현을 썼다. 해당 언론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보수-진보 양측이 해당 언론들이 보도한 사실에 기반해 논쟁을 벌였다. 지금은 그 자리를 SNS를 타고 도는 지라시, 유튜브가 차지했다. 우리 편이 보내주는 지라시만 읽고, 알고리즘에 갇혀 내 생각과 같은 유튜브 영상만 본다. 그러니 상대편 주장은 무조건 ‘가짜 뉴스’고, 우리 편 주장은 거짓이라 해도 ‘대안적 진실’이다. 국회는 물론 사법부도 믿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일각에서는 공산주의자 그람시의 ‘진지전(陣地戰·War of Position)’을 지목한다.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 혁명은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되지 않는다고 봤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중간 계층이 형성된 결과, 자본주의의 모순은 관리 가능하게 됐고,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람시는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맞는 공산 혁명을 제시했다. 그게 바로 ‘진지전’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같은 정면 대결, 즉 ‘기동전(機動戰·War of Maneuver)’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말 그대로 교육·언론·학계·예술·문화·시민단체 등 사회 전 영역에서 진지를 구축해 우파 헤게모니를 밀어내고 좌파 대항(對抗) 헤게모니를 전파하는 정치·문화적 참호전이 진지전이다. 진지에 터를 잡고 우파 헤게모니를 갉아먹으며 때를 기다린다. 결정적인 때가 오면 진지에서 나와 ‘기동전’, 즉 혁명을 일으키자고 그람시는 제시했다.
좌파 헤게모니의 진지전 결과, 우파 헤게모니에 속하는 기존의 권위들이 모두 너덜너덜해진 건 아닐까. 이승만·박정희 등 나라를 세운 초기 지도자들의 이미지는 오염된 지 오래다. 법치의 기반인 사법부, 사법 제도에 대한 신뢰도 땅에 떨어졌다. 드루킹 사건을 겪으며 인터넷의 댓글 하나도 쉽게 믿지 못하게 됐다.
불안 느끼는 한국
여기에 유난히 ‘불안함’을 많이 느끼는 한국 사회의 취약성도 더해졌다. 장기간 불안에 시달리면 판단력이 떨어져 가짜 뉴스나 음모론에 더 쉽게 휘둘릴 수 있다. 보건복지부가 2021년 발표한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 4명 중 1명은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했지만 정신장애를 진단받은 사람 중 12%만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2021년 실시한 10대 청소년 정신건강 실태조사를 보면 청소년의 17.4%가 경도 이상의 우울, 13%가 불안 증상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6.4%는 자살 위험성까지 내보였다.
젊은 층 사이에 무언가를 칭찬할 때 쓰는 ‘무해하다’라는 표현도 불안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다. 불안감을 안 느껴도 되는 사람과 장소를 간절히 찾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북한을 접하고 있으며 상시적으로 집단적인 긴장감을 느끼고 있다. 한국은 ‘불안한 섬’인 셈이다.
무안공항 참사 루머
그러니 대형 사건이 일어나면 음모론으로 직결된다. 천안함, 세월호, 코로나19 팬데믹, 이태원 참사, 무안공항 사고 모두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와 관련해서는 백신 루머가 돌았다. 이번 무안공항 참사에 있어서는 ‘《광주일보》에서 사건을 일주일 전에 이미 보도했다’ ‘중국제 새 모양 드론이 의심된다’ ‘MBC 뉴스에 잠깐 나타난 자막 817은 북한의 지령’이라는 등의 루머가 돌았다.
여기에 대해서 《광주일보》 측은 “기사 입력 시스템에 기사를 올리는 과정에서 날짜 오류가 났다”고 설명했다. 안보 전문가들에게 드론설에 대해 물었다. 입을 모아 “드론을 이용한 테러라 보기엔 목표나 타깃이 불분명하다. 사고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MBC 뉴스의 817 자막은 방송 사고라고 판단된다. MBC는 자막 사고가 문제가 아니라 제보자가 제공한 사고 영상을 계속 튼 점을 지적받아야 한다. 분석 결과 충돌 4분 전 상황부터 블랙박스에 저장이 안 되어 있다니 음모론이 더욱 기승을 부리진 않을지 우려된다.
왜 음모론을 부추길까. 행동경제학을 연구한 캐스 선스타인(Cass R. Sunstein)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자신의 저서 《루머(On Rumours)》에서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목적으로 네 가지를 들었다. ▲편협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목적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기 위한 목적 ▲의혹과 불신을 조장하기 위한 목적이다.
힐러리 낙선시킨 피자게이트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퍼진 ‘피자게이트’는 명백히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기 위한 루머였다. 내용은 이렇다. ‘힐러리 클린턴과 빌 클린턴은 워싱턴DC에 있는 코밋핑퐁(Comet Ping Pong)이라는 피자 레스토랑에서 소아성애(pedophilia) 모임을 여는데, 레스토랑의 지하에서 납치한 아이들을 인신매매한다.’ 이 음모론이 진실인 줄 알고 20대 청년이 해당 레스토랑을 찾아가 총기를 난사하기도 했다. 당연히 레스토랑엔 성착취당하는 아동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사건 장소로 지목된 지하실도 없었다. 피자게이트는 힐러리 낙선에 한몫을 했다.
피자게이트의 진원지는 ‘큐어넌(QAnon)’이라는 음모론 집단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을 도운 정치 컨설턴트 로저 스톤 역시 선거를 앞두고 음모론에 가담했다. “빌 게이츠 등의 인사들이 코로나19 사태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마이크로칩을 심으려고 백신을 맞게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선 역시 김어준 같은 사람들을 들 수 있다. 그는 대형 사건으로 사회가 흔들릴 때마다 천안함 좌초설과 세월호 고의 침몰설, 대선 부정선거 같은 음모론을 배포했다. 강준만 교수는 김어준에 대해 “〈나는 꼼수다〉의 성공 이후 김어준이 우리 앞에 펼쳐놓은 것은 온갖 음모론이 판을 치는 정치 무속의 세계”였다고 평했다. 각종 음모론을 유통하는 일부 극좌, 극우 유튜버들도 문제다.
과학적 지식과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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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9일 박선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김어준 유튜브에 출연해 김어준에게 사과를 했다. 사진=유튜브 캡처 |
최근 들어 부정선거 주장이 더욱 거세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윤 대통령의 계엄령 해프닝과 뒤이은 탄핵, 구속 시도 등을 보며 느낀 감정적인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부정선거론에 더욱 매달린다.
미국의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는 저서 《신호와 소음》에서 소음에서 신호를 분리하려면 갖춰야 하는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 과학적 지식이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정부와 언론은 애초에 가짜 뉴스가 돌기 시작할 때 빠른 대처로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 부정선거 주장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불거지는 모든 의혹에 성의 있게 답할 의무가 있다. 선거에 대한 신뢰는 민주주의의 척추와도 같기 때문이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문화도 고쳐야 한다. 의대 증원을 논의하는 정부 공식 회의의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는 게 도대체 말이 되나. 기본부터 안 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 원인으로 ‘반지성주의’를 지목한 정부답지 않다.
같은 맥락에서 박선원 민주당 의원의 ‘보고서 해프닝’은 안타깝다. 박 의원은 김어준이 ‘계엄군의 한동훈 사살 계획을 제보받았다’고 주장한 것을 두고 대체로 사실이 아니라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 등에게 보고했다. 국회가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한 것이다. 김어준 지지자들은 “왜 김어준을 음모론자로 매도하느냐”고 박 의원에게 반발했고, 박 의원은 보고서를 수정하고, 김어준의 유튜브 방송에 나가 김어준에게 사과했다.
네이트 실버는 음모론을 다스리기 위해 갖춰야 할 두 번째 요소로 자기 인식을 들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겸손’과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예측하는 ‘용기’, 이들 사이의 차이를 아는 ‘지혜’다.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함께 공론장에서 만나 겸손한 자세로 용기를 내 지혜를 모을 날이 언제쯤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