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 시애틀부터 글레이셔 국립공원까지… 美 3개 주 로드 트립 : 월간조선

“난 몬태나를 떠나지 않아!”

‘리즈 시절’ 브래드 피트를 볼 수 있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1992)에서 폴(브래드 피트 분)은 함께 시카고로 떠나 일하자는 형 노먼(크레이그 셰퍼 분)의 제안에 이렇게 답한다. 그러면서 거칠게 굽이치는 빅블랙풋강으로 낚싯줄을 던진다. 이내 거대한 송어 한 마리가 미끼를 물었고, 폴은 함박미소를 머금고 송어의 아가미를 쥔 채 기념사진을 남긴다. 폴이 몬태나를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단번에 보여준 장면이 아닐까 한다.

브래드 피트는 몬태나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영화 〈가을의 전설〉(1994)에도 출연한다. 영화 음악계의 거장 제임스 호너가 음악 감독을 맡아 작품 완성도를 높였다. 여기서도 등장한 피트의 미소는 몬태나 풍경과 그야말로 찰떡이었고, 그때부터 몬태나는 언젠가 꼭 가야 할 내 마음속 샹그릴라로 자리 잡았다. 다만 실제 촬영은 캐나다 보우강 일대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미국 신혼여행

6월 16일(현지시각) 치러진 시애틀 매리너스와 텍사스 레인저스의 경기. 모든 표가 매진된 이날 경기에서 매리너스는 5-0으로 승리했다. 사진=월간조선

6월 초 결혼을 앞두고 신혼여행지를 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결혼식 입장곡으로 〈가을의 전설〉 OST ‘The Ludlows’를 고를 만큼 아내 역시 두 영화를 감명 깊게 봤을 정도였으니. 이 여행만 바라보며 힘겨운(?) 결혼식 준비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여행 계획은 이랬다. 시애틀로 들어가 매리너스와 레인저스의 메이저리그 야구(MLB) 경기를 관람한다. 이어 시애틀 근교 도시 올림피아에 사는 고모 부부를 만나 주말을 함께 보낸다. 그러곤 올림피아 내 렌터카 업체에서 차를 빌려 워싱턴-아이다호-몬태나를 거치는 로드 트립을 시작한다.

올림피아에서 몬태나주의 글레이셔 국립공원까지는 구글맵상으로 약 1000km 떨어져 있었다. 거대한 땅덩이를 자랑하는 미국에서 ‘고작’ 1000km 가는 것은 체감상 서울에서 부산 가는 것보다 짧은 길이다. 문제는 내 운전 경험이었다. 서울에서 부산은커녕, 동네 운전 이상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은 사람들의 운전 매너도 좋고, 고속도로만 타면 큰 어려움은 없을 거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한국에서 일하는 사촌형 역시 “미국에서의 운전은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와의 싸움이야. 졸음만 쫓아내면 문제없어”라며 용기를 북돋았다.

‘사상 최고 6월 기온’이라는 헤드라인이 날씨 면을 넘어 톱뉴스로 올라오던 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1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시애틀은 초여름이 무색할 만큼 쌀쌀한 날씨였다. 미국 북서부 워싱턴주에 위치한 시애틀은 쾌적한 날씨로 유명하지만, 비 오는 날 역시 잦은 도시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들이마신 쾌적한 공기가 비행 피로를 잊게 해줬다.

아마존, 보잉, 스타벅스 등 글로벌 기업을 비롯해 전설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 록밴드 너바나 등이 이곳 시애틀에서 잉태됐다. 여기에 야구 인생 전성기를 매리너스에서 보낸 켄 그리피 주니어와 스즈키 이치로, 이곳에서 대학을 다니며 청년 시절을 보낸 브루스 리(이소룡)를 보태면 이 도시는 그야말로 스타의 요람이다.

너바나가 공연한 펍

미국 서부 명문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 전경. 워싱턴대학교는 흔히 UW(유덥)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사진=월간조선

시애틀에 도착한 저녁, 시내에 있는 ‘센트럴 설룬(Central Saloon)’을 찾았다. 평범한 라이브 펍 같아 보이는 이곳은, 시애틀 출신 밴드에겐 등용문 같은 곳이다. 무명 시절 너바나를 비롯해 엘리스 인 체인, 사운드 가든 등 시애틀을 대표하는 록밴드들이 이곳에서 공연했다. 큰 기대를 안고 찾아갔다.

이날은 총 2팀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다. 무대에 오른 이들은 데스메탈 장르를 연주했다. 너바나 같은 소프트(?) 록을 기대한 아내는 첫 무대를 보자마자 울상을 지었다. 노래가 너무 무섭다고 했다. 나 역시 그랬다. 브루털 창법의 보컬과 디스토션 이펙터가 강하게 걸린 기타 소리는 웬만한 메탈 팬이 아닌 이상 듣기 쉽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주문한 맥주를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한 채 펍을 빠져나와야 했다.

다음 날 시애틀 매리너스의 홈구장 T 모바일 파크를 찾았다. 시애틀 매리너스는 창단 이후 월드시리즈에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한 유일한 메이저리그팀이다. 2001년 이치로, 에드가 마르티네스 등의 대활약에 힘입어 정규 시즌 116승(메이저리그 최다승 타이)을 달성하기도 했으나, 그해마저 월드시리즈 진출엔 실패했다. 두 선수가 은퇴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이들의 이름을 유니폼에 새긴 팬들은 여전히 많았다. 일요일 낮에 치러진 이날 경기는 만석이었다. ‘가을 야구’를 향한 팬들의 염원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날은 선발투수 로건 길버트의 8이닝 무실점 활약에 힘입어 매리너스가 텍사스 레인저스를 5-0으로 꺾고 승리했다. 이로써 매리너스는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선두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우리 옆자리에서 경기를 관람하던 한 부자(父子)는 “우리 팀이 승리해 기쁘다”면서도 “올해 역시 월드시리즈 진출은 어려울 것 같다”고 잘라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 그들은 “1위치고 팀 타율이 너무 낮다”며 “같은 리그에 속한 뉴욕 양키스와 비교하면 타선에서 전력 차이가 크다”고 냉철하게 분석했다.

아버지의 날 맞은 야구장

아버지의 날인 이날, 유독 아빠와 어린이 관중이 많았다. 아빠들은 경기 결과보다 아들 혹은 딸과 야구장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보였다. 오늘 아침, 이 아빠들은 아이들을 식탁에 앉혀놓고 “오늘 아빠랑 야구장에 같이 가주지 않겠니?”라며 아버지의 날 소원을 말하지 않았을까? 경기가 끝나고 나가는 길, 한 소녀가 엉엉 소리 내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기 싫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자 아빠는 딸의 손을 꼭 붙잡고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 순 없어”라고 위로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나 역시 어린 시절 야구 글러브를 끼고 아빠와 잠실야구장을 찾았던 기억이 아른거렸다.

원 없이 본 지평선

몬태나주 화이트피시의 풍경. 많은 사람이 수영을 하거나 카약을 타며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사진=월간조선

월요일 아침, 초대형 SUV 차량인 쉐보레 서버번에 짐을 한가득 실었다. 고모가 싸준 김치까지 아이스박스에 넣고 본격적인 여행길에 올랐다. 올림피아와 타코마시(市)를 감싸는 숲을 지날 땐 작달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90번 고속도로에 이르자 거짓말처럼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이내 내비게이션에선 ‘500km 직진 후 우회전’이라는 미국의 스케일을 자랑하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이 90번 고속도로를 타고 쭉 직진하면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 이른다고 한다. 동서로 뻗은 이 고속도로 길이는 무려 5000km. 미국 고속도로 중 가장 긴 걸로 유명하다.

지평선 가운데 난 길을 따라 동쪽으로 달렸다. 한국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은 전북 김제 평야가 유일하다고 하는데, 이 길에선 눈길만 돌리면 감상할 수 있었다. 드넓은 들판엔 나무로 된 커다란 집 한 채와 소들만 풀을 뜯고 있을 뿐이었다. 라디오에선 흥겨운 컨트리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 풍경과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려 마치 대륙 횡단 모험을 떠난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같은 풍경만 계속 보면 졸리기 마련인데, 좀처럼 질리지 않았다. ‘스스로와의 싸움’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었다.

천천히 타들어가는 6월의 노을처럼 느긋한 여행을 하고 싶었다. 하루 만에 몬태나까지 가겠다는 계획을 틀어 아이다호의 작은 마을에서 하루 쉬어가기로 했다. 커다란 호수를 낀 보석 같은 마을이었다. 호수 주변엔 마치 해변처럼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래서 샌드포인트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호숫가 모래사장은 샌드포인트 주민들의 쉼터가 돼주는 듯했다.

엘크와 마주치다

몬태나의 끝없는 초원과 여유롭게 풀을 뜯는 소들. 사진=월간조선

몬태나 글레이셔 국립공원에 도착한 다음 날 우리는 아침 일찍 트레킹에 나섰다. 하지만 시작과 동시에 계획을 바꿔야만 했다. 당초 오르려던 길이 곰이 자주 출몰한다는 이유로 입산이 통제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날 우리는 그리즐리 베어 혹은 블랙 베어의 것으로 추정되는 배설물을 볼 수 있었다. 수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근방 어딘가 곰이 있는 듯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숙소에서 받은 곰 스프레이를 꽉 움켜쥐어야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나무 틈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곰이면 어떡하지? 몬태나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곰 대처법을 배운다고 하던데 곰이 달려들기 전에 먼저 스프레이를 뿌려야 하나?’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즈음, 커다란 엘크 한 마리가 숲속에서 걸어 나왔다. 불과 15m쯤 떨어진 거리였다. 엘크는 커다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이내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풀을 몇번 뜯고는 천천히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영물(靈物)을 본 것 같은 신비한 경험이었다. 그와 동시에 곰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3시간 트레킹 끝에 다다른 아발란체 호수는 총천연 옥색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호수다. 우리는 10억 년 로키산맥의 역사가 빚어낸 풍경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여기서 정보 하나. 올해부터 미국 국립공원은 성수기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입장이 제한된다. 아무 때나 예약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4개월 전 티켓이 오픈되는 날 정해진 시각에 맞춰 클릭 경쟁을 벌여야 한다. 여기서 실패할 경우, 입산 전날 취소 표를 구해야 한다. 이때도 역시 클릭 전쟁이 벌어진다. 우리는 티켓 오픈 날 예약에 실패해 전날 취소 표를 기다렸고 어렵사리 예약에 성공했다. 이것마저 실패한다면?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다. 바로 아침 6시 이전이나 오후 3시 이후에 방문하는 것이다. 이 시간엔 별도의 예약 확인 없이 국립공원 입장이 가능하다. 여행 계획을 세우는 데 참고가 되길 바란다.

300km 지나 다시 만나다

300km를 뛰어넘어 다시 만난 사람들. 우리는 워싱턴주에서부터, 이들은 오리건주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해 이곳까지 왔다. 사진=월간조선

“우리 그저께 샌드포인트에서 만나지 않았나요?”

트레킹 다음 날 화이트피시라는 몬태나주의 작은 마을을 찾았다. 점심을 먹고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강아지 2마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린 셰퍼드와 웰시코기였다. 한참을 귀여워해주니 셰퍼드 주인은 “제이든은 아직 4개월밖에 안 됐어요. 교육이 덜 돼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강아지, 어딘가 익숙했다. 그저께 샌드포인트를 떠나기 전 들른 공원에서 이들과 마주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날도 주인은 “4개월밖에 안 됐다”며 갑자기 강아지가 달려들어 미안하다고 했다. 그저께 샌드포인트에서 만나지 않았냐고 물으니 이들도 우릴 알아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이들은 오리건주에서 출발해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우리는 신혼여행차 미국에 왔다고 하니 “진심으로 축하해요. 즐거운 여행, 행복한 결혼 생활 되길 바랄게요”라며 웃었다.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이니 같이 사진 찍자”는 아내의 제안에 우린 기념사진 한 장을 찍고 헤어졌다.

샌드포인트에서 화이트피시는 300km 거리. 두 시골 마을을 지나며 다시 마주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여행의 묘미, 계획을 벗어날 때

브래드 피트의 미소에 반해 찾아간 몬태나. 글레이셔 국립공원과 형제가 송어를 낚던 빅블랙풋강 경관은 기대한 만큼 아름다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조그마한 시골 동네 일상 풍경이었다. 아이다호 작은 마을 호숫가에서 여름휴가를 즐기던 가족들의 웃음, 몬태나 시골 마을 로컬 피자집을 들렀을 때 동양인은 생전 처음 본 듯한 종업원의 표정, 올림피아의 하지(夏至) 음악 축제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국인의 평범한 삶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역시 여행의 진짜 묘미는 계획이 틀어질 때 비로소 시작된다.

밤늦도록 식탁에 둘러앉아 고모 부부의 미국 정착기를 듣던 시간 역시 큰 즐거움이었다. 고모네는 새천년 시작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금이야 경제적 안정을 이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온갖 고초를 겪었다. 그사이 사촌형들은 미국에서 대학원까지 마쳤고, 이제는 귀여운 조카들까지 뒀다. 이 모든 이야기를 맥주 한 잔 나누며 웃어넘겼지만, 고모 부부의 웃음 뒤엔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을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인생은 예술 작품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될 수도 없다.” 〈흐르는 강물처럼〉 속 나이 든 노먼의 독백이다. 하지만 모든 예술엔 우리네 평범한 인생이 담겨 있다.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진짜 ‘예술’을 탐닉할 수 있어서 누구보다 행복한 6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