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범도, 자유시 참변 당시 휘하 병력 300여 명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고 소련군 대위가 됐지만 더 이상의 항일독립운동은 하지 못해
⊙ 공산주의를 선택한 민족운동은 과정상에서도 결과적으로도 결국은 모스크바에 종속되는 것
⊙ 자유시 참변 때부터의 홍범도의 선택은 대한민국의 公的 가치의 차원에선 양해돼선 안 돼
⊙ 공산당과 손잡은 사람들에 대해선 한없이 너그러운 이들이 공산당 거부하고 결국 한국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이승만에 대해선 끝없이 비난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 공산주의를 선택한 민족운동은 과정상에서도 결과적으로도 결국은 모스크바에 종속되는 것
⊙ 자유시 참변 때부터의 홍범도의 선택은 대한민국의 公的 가치의 차원에선 양해돼선 안 돼
⊙ 공산당과 손잡은 사람들에 대해선 한없이 너그러운 이들이 공산당 거부하고 결국 한국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이승만에 대해선 끝없이 비난
이강호
1963년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 前 대통령비서실 공보행정관, 《미래한국》 편집위원 역임 / 現 한국자유회의 간사,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
-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에 참가한 홍범도(왼쪽)와 최진동. 이 회의는 코민테른의 지휘에 따라 열렸다.
일제(日帝) 시대 많은 항일(抗日)독립투사들이 있었다. 무장 항일투쟁을 한 분들은 생명을 걸고 싸웠다. 홍범도(洪範圖)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그 헌신은 가볍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과 공적(公的) 모범으로 삼아 기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항일투쟁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은 내용을 잊고 행위에만 몰두하는 것과도 같다. 독립투쟁은 내용이 중요하다. 어떤 나라를 세우고자 했는지의 내용이다.
많은 한국인은 독립(獨立)과 항일(抗日)을 마치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인 양 여기곤 한다. 그러나 이 둘은 본뜻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근현대사의 실제 과정상에서도 범주가 다른 문제다. 결국 연결되어왔지만 본질적 의미의 차원에선 구분되어야 한다. 독립문(獨立門)의 경우를 다시 상기해보자.
독립문
독립문은 1896년 11월에 착공되어 1897년 11월 20일 완공되었다. 일제 시대가 아니었다. 독립문은 청일(淸日)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한 결과로 그 책봉(冊封)체제에서 조선이 독립한 기념으로 사대(事大)의 상징이었던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낸 자리에 세운 것이었다. 건립을 주도한 주체는 독립협회였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결성되었는데, 개화파(開化派) 출신 인사들이 주축이었다. 그런데 개화파는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당이라고 불렸다. 개화를 반대한 수구파 유림(儒林)들이 그렇게 불렀다. 그들은 개화파를 “감히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 독립은 말하자면 반중(反中)독립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민족주의 차원은 아니다. 그때는 아직 그런 개념이 없었다. 핵심은 근대화였다. 개화는 곧 근대화였다. 개화파는 그 첫걸음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 보았다. 반중독립이 ‘개화=근대화’의 첫걸음으로 간주된 것은 중국이 바로 조선의 근대화를 막는 가장 큰 족쇄였기 때문이다.
한일합병 이후 독립운동은 당연히 일제를 겨냥한 것이었다. 하지만 독립의 본질적 의의는 그저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전근대(前近代)로부터 벗어나 근대화를 이룩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일제하 독립운동이 우선 일제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 수는 없다.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하는 내용도 마땅히 함께해야 한다. 지향해야 할 문명적 노선의 문제다.
전제군주국 러시아에 혹한 고종
한반도가 결국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됐었지만, 당시 한반도에 대한 지배 야욕을 가졌던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제정(帝政)러시아도 그랬으며 이후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러시아와 소련의 경우는 그 야욕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에 지배당할 경우 안게 될 문명적 내용은 더 큰 문제였다. 항일이라는 관점에만 몰두하다 보면 그 문제의 중요성을 놓치게 된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다. 아관파천은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여간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은 조선에 대해 각종 이권(利權)을 요구하고 받아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격히 강화되었다. 이 같은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면 한반도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을 것이다.
반일에만 몰두하는 이들은 아관파천이 을미사변(乙未事變)과 같은 일본의 만행과 압박 때문이었다는 점만 강조한다. 그 점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종의 아관파천은 다른 한편으로는 개화·근대화에 대한 수구·반동적 반발이었다. 고종이 러시아에 혹한 가장 큰 이유는 러시아가 전제군주국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아관파천 뒤 김홍집(金弘集) 등 개화파 내각 인사들을 모두 죽였다. 고종이 무슨 민중적 존재였던 것도 아니다. 백성을 수탈하는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정점에 있는 게 고종이었다.
1897년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선포했다. 대한제국 선포를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적 주권국가 선포이며 대한제국 국제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라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이 있다. 기괴한 왜곡이다.
대한제국은 근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한국국제는 제2장에서 “만세불변(萬世不變)할 전제(專制)정치”라고 선언하고 있다. 제3장은 “황제는 무한(無限)한 군권(君權)을 향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4장은 “신민(臣民)이 군권을 침손(侵損)하는 행위는 이미 행하였건 아직 행하지 않았건” 용납하지 않겠다고 못 박고 있다. 이런 것을 근대라 하는 것은 학문적 논란 이전에 상식에 어긋난다.
손병희가 러일전쟁 때 일본을 지지한 이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고종은 아관파천에서 환궁(還宮)한 뒤에도 러시아의 알렉세예프를 탁지부의 재정고문으로 임명했다. 1897년 12월에는 러시아 극동함대가 여순항을 점령했다. 러시아는 극동 지역에서 세력 확장을 위한 남진(南進) 정책을 계속했다.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은 러시아가 일본에 대해서도 직접적 침공을 감행해올 수도 있다고 여겼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은 그렇게 잉태되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뒤 한반도는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이겼으면 한반도는 러시아의 종속국으로 전락했을 게 틀림없다. 막연한 상상이 아니다. 동학(東學)의 3대 교주(敎主)이자 나중에 천도교(天道敎)를 수립하고 3·1운동의 선두에 나섰던 손병희(孫秉熙) 선생이 이 점을 우려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戰雲)이 짙어가던 무렵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전쟁 발발을 막기 위해 외교 교섭에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손병희는 러일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병희는 놀랍게도 한국이 일본과 동맹하여 러시아와 싸우자고 주장했다. 1903년 손병희는 국내 동학지도자들에게 “러일전쟁 발발은 필연이며, 국내의 동학도들은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일본군 지원 활동에 적극 나서라”고 지시했다.
만약 일본을 절대악(絶對惡)으로 간주하고 오로지 반일(反日)·항일을 절대선(絶對善)으로 간주한다면 손병희부터 비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손병희의 이 같은 지시는 당연했다.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야심은 당시 국제적 상식이었다.
이 같은 야심은 이후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품었던 이들은 그 점을 헤아릴 수 없었다. 역으로 보자면 그것을 헤아릴 수 없기에 낭만적 기대를 품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착오는 독립이 지향해야 할 이념적 노선과 투쟁을 위한 방편적 선택 모두에서 문제를 야기했다.
러시아 혁명과 이동휘의 선택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레닌은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민족·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지지로 내걸었다. 러시아 혁명에 들뜬 이들은 때맞춰 나온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에도 감동했다. 세계적으로도 그랬으며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이동휘(李東輝)도 그런 인물이었다. 이동휘는 1919년 8월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그런데 이동휘는 그 전에 이미 공산주의를 택하고 있었다. 이동휘는 1918년 5월 러시아 극동의 하바롭스크에서 한인(韓人)사회당을 결성했었다.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직접적 지원 아래 이뤄진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도 전이었다.
이동휘는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뿐만 아니라 상하이 임정(臨政)의 많은 인사와 충돌을 거듭했다. 그러다 1921년 임정을 탈퇴했다. 임정 탈퇴 후 이동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1921년 10월에는 고려공산당 대표로 레닌그라드로 가서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했다. 이후 이동휘는 이르쿠츠크 등 러시아의 극동 지역 등에서 활동을 계속하다 1935년 사망했다.
레닌은 이동휘에 대해 “이 사람은 마르크스주의 이념은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혁명가로서는 훌륭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폄하됐다고 할 것은 아니다. 레닌의 말대로 이동휘는 독립운동가로서 훌륭한 경력의 인물이었다. 대한제국 시절 군인이었던 그는 기독교에 입교하고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한일합병 뒤에는 간도 지역에서 민족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헌신적이었으며 열렬했다.
그러다 1917년 3월 북만주에 숨어 지내던 이동휘는 러시아 혁명 소식을 접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때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기도 했는데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로 일컬어지는 김 알렉산드라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재미(在美) 교포단체 기관지인 《신한민보》 1917년 10월 4일 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투옥 중에도 성경과 기도로 생활을 하며 충실한 기독교인으로의 모습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그는 이듬해 5월 한인사회당이라는 한인 최초 공산당의 창립자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이동휘가 이 같은 길을 가게 된 것은 독립운동을 위한 나름의 선택이었을 수 있겠다. “마르크스주의 이념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고 했으니 더욱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독립운동을 위한 선택이었으니 그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 감상일 수는 있겠지만 독립운동 지도자라는 공인(公人)에 대한 객관적 평가일 수는 없다. 그가 선택한 공산주의가 나중의 역사적 결과로 잘못됐음이 드러났다는 차원만이 아니다. 당시의 독립투쟁을 위한 방편적 선택이라는 차원에서도 이동휘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다.
경신참변과 일본군의 적백 내전 개입
1920년 6월 중국 지린성 펑우둥에서 봉오동 전투가 있었다. 홍범도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 부대가 의미 있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1920년 10월에는 지린성 허룽현에서 청산리 전투가 있었다. 김좌진(金佐鎭)이 이끈 독립군 부대가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그 여파로 경신참변(庚申慘變)이 일어났다.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있은 후 일제는 1920년 10월~1921년 4월까지 대대적으로 간도 지역의 독립군 토벌을 벌였다. 이 와중에 간도 지역 일대의 민간인 한인들도 대거 학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태를 계기로 만주 지역의 항일독립군은 활동 근거지를 다시 모색해야만 했다. 이때 이동휘는 만주·연해주 등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독립군들에게 러시아 극동공화국(현재 러시아의 아무르주)의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집결할 것을 권했다. 볼셰비키 러시아는 한인 독립군들의 통합과 신식 무장을 돕기로 약속한 터였다. 이동휘는 그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내막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적백(赤白) 내전에 돌입해 있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레닌의 볼셰비키는 일단 정권을 거머쥐었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볼셰비키 혁명에 맞서는 백군(白軍) 세력이 강력히 저항하면서 러시아 전역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극동 지역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극동 지역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일본이 개입한 것이다.
1918년 8월, 일본은 영국·프랑스·미국 등의 열강과 함께 시베리아 출병(出兵)을 단행했다. 그중 일본의 출병은 1925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선전포고는 없었지만, 사실상의 전쟁이었다. 일본군은 적백 내전에 개입한 연합국의 군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그 지역을 점령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싼 전쟁이었지 러시아 영토를 직접적으로 노린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러시아를 최대 위협국으로 간주했지만 직접 침공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점령까지 염두에 두고 시베리아로 출병한 것이다.
서로 이해가 맞은 일본과 소련
1920년 9월까지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의 연합군은 차례로 철수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여전히 시베리아에 그대로 남았다. 일본군은 시베리아의 점령지를 직접 합병하지 않았다. 다만 볼셰비키에 저항하는 백군을 노골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그들을 앞세워 괴뢰국을 조직하려 했다. 이 모델이 나중에 만주국(1932~1945) 수립에 적용되었다.
볼셰비키 러시아는 일본군과 전면전쟁을 벌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레닌은 표면적으로는 항일독립운동 지원을 내걸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일본군과의 직접적 전쟁은 피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4월 6일에는 극동공화국이 수립됐다. 극동공화국은 일본군과의 직접적 충돌을 피하는 완충지대였다. 대신 선택한 방도는 시베리아 한인사회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부추겨 일본군의 엄호를 받는 백군과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볼셰비키는 연해주의 한인 등을 상대로 선전선동 활동을 벌였다. 이동휘가 주창한 바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경신참변 이후 새로운 근거지를 모색하던 만주 일대의 항일독립군들도 자유시로 향하게 됐다.
이 지점에서 러시아 적군(赤軍)과 일본은 이해관계가 맞아가고 있었다. 적군의 목표는 일본군을 만주 지역으로 물러서도록 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때마침 일본은 시베리아로부터의 퇴각도 모색하고 있었다. 자유시로 한인 독립군을 모이도록 한 것은 일본군과의 확전(擴戰)을 제약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해관계의 암묵적 교차였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적군은 자유시로 집결한 한인무장부대를 적군에 편입하려 했다. 하지만 원만히 진행되지 않았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사이의 주도권 다툼 등 여러 갈등이 있었다. 홍범도 부대는 적군 편입을 선택했다. 그런데 적군 편입을 거부하는 대한의용군 등이 학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자유시 참변이었다. 1921년 6월 28일이었다.
홍범도의 자유시 참변 책임과 관련해 논란이 적지 않다. 그런데 책임 여부가 어떻든 자유시 참변 이후 그 일대의 한인 독립군은 결국 소멸의 길로 갔다. 적군에 복속되길 거부한 쪽은 무력으로 제압되어 소멸됐다. 그런데 적군 편입을 선택한 쪽도 항일독립군이라는 차원에서는 결국 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자유시 참변 뒤 1921년 7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적군 편입을 택한 고려혁명군을 이르쿠츠크로 이동시키고 8월 말 1개 여단으로 재편하여 러시아 적군 제5군에 예속시켰다. 그런데 러시아 적군에 편입된 한인들은 더 이상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군일 수가 없었다. 러시아 적군이 일본군과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2년 10월 25일 러시아 적군은 백군 최후의 수도인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했다. 그러자 일본군도 바로 그날을 기점으로 시베리아에서 최종적으로 철수했다. 이게 끝이었다.
자유시 참변의 내막과 관련해 러시아 적군과 일본군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물러나는 대신 만주 일대의 한인 무장독립군 세력을 자유시로 집결시켜 일본군과 더 이상 싸우지 않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막이 어떻든 결과적 귀결은 그렇게 돼버렸다.
이후 홍범도의 운명 자체가 그것을 보여준다. 자유시 참변 다음 해인 1922년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군복 한 벌 그리고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 받았다. 자신의 휘하 병력 300여 명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고 본인도 소련군 제5군단 민족여단 대위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항일독립투쟁을 하는 모습은 없었다. 적군 편입을 선택한 이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협동농장을 조직해 운영하며 살아갔다. 스탈린 시절인 1927년 소련공산당에도 정식 입당했다. 소련 국적도 취득했다. 그러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됐다. 홍범도는 이에 순순히 따랐다. 조금이라도 민족주의적 성향이 엿보이는 한인 지식인이나 지도자급 인사들은 중앙아시아행 열차에 오르지도 못하고 모조리 총살되던 시절이다. 홍범도는 말년에는 거기서 극장 관리인을 했다. 그는 그렇게 ‘소련인’으로서 살아가다 1943년 76세로 여생을 마감했다.
이동휘나 홍범도가 그런 결말을 예상하고도 ‘공산당과 적군’이라는 선택을 했다고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피해 갈 수 없다. 그들의 선택은 방편에서든 이념에서든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
레닌의 ‘민족테제’의 허구성
레닌의 ‘민족테제’는 미국 대통령 윌슨과는 또 다른 차원의 민족자결론을 담고 있었다. 민족해방운동 적극 지원을 천명하고 있었다. 세계 각지의 민족독립운동가들은 감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했다. 그러나 레닌의 ‘민족테제’에는 단서가 있었다. “민족자결의 요구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의 이익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독립 후의 국가는 결국 공산국가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공산주의의 원칙에 따르면 각 민족별 공산 정권도 개별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국제주의적 단결을 해야 했다. 이것은 결국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의 지휘 아래 들어가야 한다는 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직접적 영향으로 동구권(東歐圈)에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명목상 독립국이다. 하지만 위성국(衛星國)이었다. 북한·중공도 마찬가지였다. 모스크바의 지휘에 따라야 했다. 국제적 사회주의 진영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소련은 그들 사회주의 진영의 국가들을 ‘사회주의 형제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형제라는 이름의 종속국이었다.
러시아의 각 독립공화국들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모스크바의 볼셰비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야 했다. 말이 연방이지 결국 또 다른 러시아 제국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이라는 새로운 제국에 의한 지배체제였다. 공산주의 국제주의는 소련 제국주의로 귀결되었다.
레닌의 민족해방지원론에 독립운동가들이 호의를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손을 잡는 그 순간부터는 운명은 예정된 것이 된다. 공산주의를 선택한 민족운동은 그게 어디의 것이건 과정상에서도 결과적으로도 결국은 모스크바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점차 느끼게 되어도 물들어가면서 수용해버리게 된다.
악마는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공산당과 손잡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김좌진이 그랬고 이승만이 그랬다. 김좌진은 공산주의를 믿지 않았으며 그래서 자유시로 합류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1923년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공산당 당부당(當不當)〉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선을 그었다. 세계적으로도 선구자적인 통찰이었다. 그런데 공산당과 손잡은 사람들에 대해선 한없이 너그러운 정도를 넘어 찬양까지 해대는 이들이 공산당을 거부하는 고독한 선택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한국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이승만에 대해선 끝없이 비난을 해댄다. 그래도 되나?
이동휘와 홍범도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에 대해 “열강들이 외면하는 상황에서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나?”고도 한다. 그렇다. 그 고뇌는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자.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비유하자면 결국 ‘파우스트’ 같은 선택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악마는 결코 머리에 뿔을 단 괴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악마는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어떤 천사보다도 아름답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그리고 감동적으로 등장한다. 공산주의가 바로 그랬다. 거기에 현혹된 것은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게 아니다. 미래를 위해 역사가 증명한 교훈을 헤아리는 것이다. 지난(至難)한 역사의 경험이 말해준다. 우선 공산주의는 등장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등장했어도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만났어도 손잡지는 말았어야 한다.
베트남공산당의 창시자인 호찌민은 1920년 레닌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접하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에 대한 회고담을 남겼다. 그 감동이 자신을 더욱 철저한 공산주의자의 길로 이끌었다고 했다. 호찌민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인정한다. 그러나 호찌민의 선택이 올바르고 현명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념이 운명을 갈랐다
호찌민이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은 긴 역사적 시야에서 보면 베트남의 입장에선 결국은 소모요 낭비였다. 갖은 시시비비를 떠나 베트남이 경제적으로 성장 발전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소련과 공산권이 몰락한 뒤부터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베트남어로 쇄신)라는 이름의 개혁·개방을 시작했지만 경제 발전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공산권이 아예 몰락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다시 조우하면서부터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말해 중국의 경제 성장은 공산주의 정책을 중단하고 미국 등 서방이 중국에 경제적 기회를 주면서 시작된 것이다. 중국의 경제 성장은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것은 공산주의라는 게 역사적으로 거대한 시간낭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만행이 아무리 심했다 한들 공산주의만큼은 아니었다. 한일합병 후 일제 35년 동안 아니 그 이전에 을사보호조약 이후 40년간으로 잡아도 일제로 인한 희생자와 공산주의 세력의 침공에 의한 6·25전쟁 3년의 희생자는 수적 비교가 의미 없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일제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해악(害惡)이 그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과 북한의 운명을 엇갈리게 결정지은 것은 ‘반일투쟁의 정신’이 아니다. 이념이 운명을 갈랐다.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대한민국은 기적의 길로 나아갔지만, 공산주의를 택한 북한은 지옥이 되었다.
민족 슬로건의 책략은 반복되고 있다
홍범도 논란이 일자 “철 지난 이념 전쟁” 운운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철없는 소리이거나 아니면 교활한 언사다. 북한을 보면 알 수 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민족’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왔다. “우리 민족끼리”는 그 대표적 상징이다. 그런데 그것은 레닌의 ‘민족테제’가 품고 있는 책략의 또 다른 반복이다. 궁극적으로는 적화(赤化)를 겨냥하면서도 민족이라는 구호로 경계선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문재인(文在寅) 정권이 김원봉(金元鳳)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홍범도의 흉상을 끝끝내 육군사관학교의 교정에 세우게 한 것은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다. 의도적이었다면 불순한 것이고 아니라면 철없는 짓이다.
홍범도에게 분명히 항일무장투쟁의 공적이 있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 때부터의 그의 선택은 대한민국의 공적(公的) 가치의 차원에선 양해돼선 안 된다. 특히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에서 모범적 존재로 기리게 하는 것은 더욱이 안 된다.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는 자유민주주의 나라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우리 육군의 장교를 육성하는 군(軍)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많은 한국인은 독립(獨立)과 항일(抗日)을 마치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인 양 여기곤 한다. 그러나 이 둘은 본뜻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근현대사의 실제 과정상에서도 범주가 다른 문제다. 결국 연결되어왔지만 본질적 의미의 차원에선 구분되어야 한다. 독립문(獨立門)의 경우를 다시 상기해보자.
독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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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에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에는 독립협회가 세운 독립문과 조선 왕실이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 돌기둥이 함께 서 있다. 사진=조선DB |
그 독립은 말하자면 반중(反中)독립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민족주의 차원은 아니다. 그때는 아직 그런 개념이 없었다. 핵심은 근대화였다. 개화는 곧 근대화였다. 개화파는 그 첫걸음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으로 보았다. 반중독립이 ‘개화=근대화’의 첫걸음으로 간주된 것은 중국이 바로 조선의 근대화를 막는 가장 큰 족쇄였기 때문이다.
한일합병 이후 독립운동은 당연히 일제를 겨냥한 것이었다. 하지만 독립의 본질적 의의는 그저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전근대(前近代)로부터 벗어나 근대화를 이룩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일제하 독립운동이 우선 일제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 수는 없다.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 하는 내용도 마땅히 함께해야 한다. 지향해야 할 문명적 노선의 문제다.
전제군주국 러시아에 혹한 고종
한반도가 결국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됐었지만, 당시 한반도에 대한 지배 야욕을 가졌던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제정(帝政)러시아도 그랬으며 이후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러시아와 소련의 경우는 그 야욕만이 문제가 아니다. 그에 지배당할 경우 안게 될 문명적 내용은 더 큰 문제였다. 항일이라는 관점에만 몰두하다 보면 그 문제의 중요성을 놓치게 된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이다. 아관파천은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여간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은 조선에 대해 각종 이권(利權)을 요구하고 받아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격히 강화되었다. 이 같은 상태가 계속 이어졌다면 한반도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을 것이다.
반일에만 몰두하는 이들은 아관파천이 을미사변(乙未事變)과 같은 일본의 만행과 압박 때문이었다는 점만 강조한다. 그 점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종의 아관파천은 다른 한편으로는 개화·근대화에 대한 수구·반동적 반발이었다. 고종이 러시아에 혹한 가장 큰 이유는 러시아가 전제군주국이었기 때문이다. 고종은 아관파천 뒤 김홍집(金弘集) 등 개화파 내각 인사들을 모두 죽였다. 고종이 무슨 민중적 존재였던 것도 아니다. 백성을 수탈하는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정점에 있는 게 고종이었다.
1897년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면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선포했다. 대한제국 선포를 우리 역사 최초의 근대적 주권국가 선포이며 대한제국 국제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라고 주장하는 역사가들이 있다. 기괴한 왜곡이다.
대한제국은 근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대한국국제는 제2장에서 “만세불변(萬世不變)할 전제(專制)정치”라고 선언하고 있다. 제3장은 “황제는 무한(無限)한 군권(君權)을 향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4장은 “신민(臣民)이 군권을 침손(侵損)하는 행위는 이미 행하였건 아직 행하지 않았건” 용납하지 않겠다고 못 박고 있다. 이런 것을 근대라 하는 것은 학문적 논란 이전에 상식에 어긋난다.
손병희가 러일전쟁 때 일본을 지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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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3대 교주였던 손병희 선생. |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뒤 한반도는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이겼으면 한반도는 러시아의 종속국으로 전락했을 게 틀림없다. 막연한 상상이 아니다. 동학(東學)의 3대 교주(敎主)이자 나중에 천도교(天道敎)를 수립하고 3·1운동의 선두에 나섰던 손병희(孫秉熙) 선생이 이 점을 우려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운(戰雲)이 짙어가던 무렵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전쟁 발발을 막기 위해 외교 교섭에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망명해 있던 손병희는 러일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병희는 놀랍게도 한국이 일본과 동맹하여 러시아와 싸우자고 주장했다. 1903년 손병희는 국내 동학지도자들에게 “러일전쟁 발발은 필연이며, 국내의 동학도들은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일본군 지원 활동에 적극 나서라”고 지시했다.
만약 일본을 절대악(絶對惡)으로 간주하고 오로지 반일(反日)·항일을 절대선(絶對善)으로 간주한다면 손병희부터 비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손병희의 이 같은 지시는 당연했다.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야심은 당시 국제적 상식이었다.
이 같은 야심은 이후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품었던 이들은 그 점을 헤아릴 수 없었다. 역으로 보자면 그것을 헤아릴 수 없기에 낭만적 기대를 품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착오는 독립이 지향해야 할 이념적 노선과 투쟁을 위한 방편적 선택 모두에서 문제를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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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이동휘. |
그런데 이동휘는 그 전에 이미 공산주의를 택하고 있었다. 이동휘는 1918년 5월 러시아 극동의 하바롭스크에서 한인(韓人)사회당을 결성했었다.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직접적 지원 아래 이뤄진 것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도 전이었다.
이동휘는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뿐만 아니라 상하이 임정(臨政)의 많은 인사와 충돌을 거듭했다. 그러다 1921년 임정을 탈퇴했다. 임정 탈퇴 후 이동휘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1921년 10월에는 고려공산당 대표로 레닌그라드로 가서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했다. 이후 이동휘는 이르쿠츠크 등 러시아의 극동 지역 등에서 활동을 계속하다 1935년 사망했다.
레닌은 이동휘에 대해 “이 사람은 마르크스주의 이념은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혁명가로서는 훌륭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폄하됐다고 할 것은 아니다. 레닌의 말대로 이동휘는 독립운동가로서 훌륭한 경력의 인물이었다. 대한제국 시절 군인이었던 그는 기독교에 입교하고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한일합병 뒤에는 간도 지역에서 민족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헌신적이었으며 열렬했다.
그러다 1917년 3월 북만주에 숨어 지내던 이동휘는 러시아 혁명 소식을 접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때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기도 했는데 한인 최초의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로 일컬어지는 김 알렉산드라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재미(在美) 교포단체 기관지인 《신한민보》 1917년 10월 4일 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투옥 중에도 성경과 기도로 생활을 하며 충실한 기독교인으로의 모습을 견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그는 이듬해 5월 한인사회당이라는 한인 최초 공산당의 창립자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이동휘가 이 같은 길을 가게 된 것은 독립운동을 위한 나름의 선택이었을 수 있겠다. “마르크스주의 이념은 전혀 모르는 것 같다”고 했으니 더욱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독립운동을 위한 선택이었으니 그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 감상일 수는 있겠지만 독립운동 지도자라는 공인(公人)에 대한 객관적 평가일 수는 없다. 그가 선택한 공산주의가 나중의 역사적 결과로 잘못됐음이 드러났다는 차원만이 아니다. 당시의 독립투쟁을 위한 방편적 선택이라는 차원에서도 이동휘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다.
경신참변과 일본군의 적백 내전 개입
1920년 6월 중국 지린성 펑우둥에서 봉오동 전투가 있었다. 홍범도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 부대가 의미 있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1920년 10월에는 지린성 허룽현에서 청산리 전투가 있었다. 김좌진(金佐鎭)이 이끈 독립군 부대가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그 여파로 경신참변(庚申慘變)이 일어났다.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있은 후 일제는 1920년 10월~1921년 4월까지 대대적으로 간도 지역의 독립군 토벌을 벌였다. 이 와중에 간도 지역 일대의 민간인 한인들도 대거 학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사태를 계기로 만주 지역의 항일독립군은 활동 근거지를 다시 모색해야만 했다. 이때 이동휘는 만주·연해주 등 각지에 흩어져 있던 한인 독립군들에게 러시아 극동공화국(현재 러시아의 아무르주)의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집결할 것을 권했다. 볼셰비키 러시아는 한인 독립군들의 통합과 신식 무장을 돕기로 약속한 터였다. 이동휘는 그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내막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적백(赤白) 내전에 돌입해 있었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레닌의 볼셰비키는 일단 정권을 거머쥐었지만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볼셰비키 혁명에 맞서는 백군(白軍) 세력이 강력히 저항하면서 러시아 전역에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극동 지역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극동 지역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일본이 개입한 것이다.
1918년 8월, 일본은 영국·프랑스·미국 등의 열강과 함께 시베리아 출병(出兵)을 단행했다. 그중 일본의 출병은 1925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선전포고는 없었지만, 사실상의 전쟁이었다. 일본군은 적백 내전에 개입한 연합국의 군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그 지역을 점령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싼 전쟁이었지 러시아 영토를 직접적으로 노린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러시아를 최대 위협국으로 간주했지만 직접 침공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점령까지 염두에 두고 시베리아로 출병한 것이다.
1920년 9월까지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의 연합군은 차례로 철수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여전히 시베리아에 그대로 남았다. 일본군은 시베리아의 점령지를 직접 합병하지 않았다. 다만 볼셰비키에 저항하는 백군을 노골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그들을 앞세워 괴뢰국을 조직하려 했다. 이 모델이 나중에 만주국(1932~1945) 수립에 적용되었다.
볼셰비키 러시아는 일본군과 전면전쟁을 벌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레닌은 표면적으로는 항일독립운동 지원을 내걸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일본군과의 직접적 전쟁은 피하기로 결정했다. 1920년 4월 6일에는 극동공화국이 수립됐다. 극동공화국은 일본군과의 직접적 충돌을 피하는 완충지대였다. 대신 선택한 방도는 시베리아 한인사회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부추겨 일본군의 엄호를 받는 백군과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볼셰비키는 연해주의 한인 등을 상대로 선전선동 활동을 벌였다. 이동휘가 주창한 바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경신참변 이후 새로운 근거지를 모색하던 만주 일대의 항일독립군들도 자유시로 향하게 됐다.
이 지점에서 러시아 적군(赤軍)과 일본은 이해관계가 맞아가고 있었다. 적군의 목표는 일본군을 만주 지역으로 물러서도록 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때마침 일본은 시베리아로부터의 퇴각도 모색하고 있었다. 자유시로 한인 독립군을 모이도록 한 것은 일본군과의 확전(擴戰)을 제약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해관계의 암묵적 교차였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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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28일 스보보드니의 이 급수탑 근처에서 우리 독립군을 향한 최초의 총격이 시작되었다. 자유시 참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우리 독립군이 사실상 궤멸되었다. 사진=윤상구 |
홍범도의 자유시 참변 책임과 관련해 논란이 적지 않다. 그런데 책임 여부가 어떻든 자유시 참변 이후 그 일대의 한인 독립군은 결국 소멸의 길로 갔다. 적군에 복속되길 거부한 쪽은 무력으로 제압되어 소멸됐다. 그런데 적군 편입을 선택한 쪽도 항일독립군이라는 차원에서는 결국 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자유시 참변 뒤 1921년 7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적군 편입을 택한 고려혁명군을 이르쿠츠크로 이동시키고 8월 말 1개 여단으로 재편하여 러시아 적군 제5군에 예속시켰다. 그런데 러시아 적군에 편입된 한인들은 더 이상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군일 수가 없었다. 러시아 적군이 일본군과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2년 10월 25일 러시아 적군은 백군 최후의 수도인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했다. 그러자 일본군도 바로 그날을 기점으로 시베리아에서 최종적으로 철수했다. 이게 끝이었다.
자유시 참변의 내막과 관련해 러시아 적군과 일본군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물러나는 대신 만주 일대의 한인 무장독립군 세력을 자유시로 집결시켜 일본군과 더 이상 싸우지 않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막이 어떻든 결과적 귀결은 그렇게 돼버렸다.
이후 홍범도의 운명 자체가 그것을 보여준다. 자유시 참변 다음 해인 1922년 홍범도는 모스크바에서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군복 한 벌 그리고 ‘홍범도’라는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 받았다. 자신의 휘하 병력 300여 명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키고 본인도 소련군 제5군단 민족여단 대위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항일독립투쟁을 하는 모습은 없었다. 적군 편입을 선택한 이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협동농장을 조직해 운영하며 살아갔다. 스탈린 시절인 1927년 소련공산당에도 정식 입당했다. 소련 국적도 취득했다. 그러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게 됐다. 홍범도는 이에 순순히 따랐다. 조금이라도 민족주의적 성향이 엿보이는 한인 지식인이나 지도자급 인사들은 중앙아시아행 열차에 오르지도 못하고 모조리 총살되던 시절이다. 홍범도는 말년에는 거기서 극장 관리인을 했다. 그는 그렇게 ‘소련인’으로서 살아가다 1943년 76세로 여생을 마감했다.
이동휘나 홍범도가 그런 결말을 예상하고도 ‘공산당과 적군’이라는 선택을 했다고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피해 갈 수 없다. 그들의 선택은 방편에서든 이념에서든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
레닌의 ‘민족테제’의 허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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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투쟁의 ‘민족테제’를 주장한 레닌. |
공산주의의 원칙에 따르면 각 민족별 공산 정권도 개별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국제주의적 단결을 해야 했다. 이것은 결국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의 지휘 아래 들어가야 한다는 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직접적 영향으로 동구권(東歐圈)에 사회주의 국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명목상 독립국이다. 하지만 위성국(衛星國)이었다. 북한·중공도 마찬가지였다. 모스크바의 지휘에 따라야 했다. 국제적 사회주의 진영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소련은 그들 사회주의 진영의 국가들을 ‘사회주의 형제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형제라는 이름의 종속국이었다.
러시아의 각 독립공화국들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모스크바의 볼셰비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야 했다. 말이 연방이지 결국 또 다른 러시아 제국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사회주의 진영은 소련이라는 새로운 제국에 의한 지배체제였다. 공산주의 국제주의는 소련 제국주의로 귀결되었다.
레닌의 민족해방지원론에 독립운동가들이 호의를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손을 잡는 그 순간부터는 운명은 예정된 것이 된다. 공산주의를 선택한 민족운동은 그게 어디의 것이건 과정상에서도 결과적으로도 결국은 모스크바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점차 느끼게 되어도 물들어가면서 수용해버리게 된다.
악마는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공산당과 손잡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김좌진이 그랬고 이승만이 그랬다. 김좌진은 공산주의를 믿지 않았으며 그래서 자유시로 합류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1923년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공산당 당부당(當不當)〉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선을 그었다. 세계적으로도 선구자적인 통찰이었다. 그런데 공산당과 손잡은 사람들에 대해선 한없이 너그러운 정도를 넘어 찬양까지 해대는 이들이 공산당을 거부하는 고독한 선택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한국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이승만에 대해선 끝없이 비난을 해댄다. 그래도 되나?
이동휘와 홍범도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선택에 대해 “열강들이 외면하는 상황에서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나?”고도 한다. 그렇다. 그 고뇌는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자.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비유하자면 결국 ‘파우스트’ 같은 선택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악마는 결코 머리에 뿔을 단 괴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악마는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어떤 천사보다도 아름답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그리고 감동적으로 등장한다. 공산주의가 바로 그랬다. 거기에 현혹된 것은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게 아니다. 미래를 위해 역사가 증명한 교훈을 헤아리는 것이다. 지난(至難)한 역사의 경험이 말해준다. 우선 공산주의는 등장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등장했어도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만났어도 손잡지는 말았어야 한다.
베트남공산당의 창시자인 호찌민은 1920년 레닌의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접하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에 대한 회고담을 남겼다. 그 감동이 자신을 더욱 철저한 공산주의자의 길로 이끌었다고 했다. 호찌민은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인정한다. 그러나 호찌민의 선택이 올바르고 현명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념이 운명을 갈랐다
호찌민이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은 긴 역사적 시야에서 보면 베트남의 입장에선 결국은 소모요 낭비였다. 갖은 시시비비를 떠나 베트남이 경제적으로 성장 발전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소련과 공산권이 몰락한 뒤부터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베트남어로 쇄신)라는 이름의 개혁·개방을 시작했지만 경제 발전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공산권이 아예 몰락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다시 조우하면서부터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말해 중국의 경제 성장은 공산주의 정책을 중단하고 미국 등 서방이 중국에 경제적 기회를 주면서 시작된 것이다. 중국의 경제 성장은 공산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것은 공산주의라는 게 역사적으로 거대한 시간낭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만행이 아무리 심했다 한들 공산주의만큼은 아니었다. 한일합병 후 일제 35년 동안 아니 그 이전에 을사보호조약 이후 40년간으로 잡아도 일제로 인한 희생자와 공산주의 세력의 침공에 의한 6·25전쟁 3년의 희생자는 수적 비교가 의미 없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일제에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해악(害惡)이 그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과 북한의 운명을 엇갈리게 결정지은 것은 ‘반일투쟁의 정신’이 아니다. 이념이 운명을 갈랐다.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대한민국은 기적의 길로 나아갔지만, 공산주의를 택한 북한은 지옥이 되었다.
민족 슬로건의 책략은 반복되고 있다
홍범도 논란이 일자 “철 지난 이념 전쟁” 운운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철없는 소리이거나 아니면 교활한 언사다. 북한을 보면 알 수 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민족’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왔다. “우리 민족끼리”는 그 대표적 상징이다. 그런데 그것은 레닌의 ‘민족테제’가 품고 있는 책략의 또 다른 반복이다. 궁극적으로는 적화(赤化)를 겨냥하면서도 민족이라는 구호로 경계선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문재인(文在寅) 정권이 김원봉(金元鳳)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홍범도의 흉상을 끝끝내 육군사관학교의 교정에 세우게 한 것은 마찬가지의 문제가 있다. 의도적이었다면 불순한 것이고 아니라면 철없는 짓이다.
홍범도에게 분명히 항일무장투쟁의 공적이 있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 때부터의 그의 선택은 대한민국의 공적(公的) 가치의 차원에선 양해돼선 안 된다. 특히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에서 모범적 존재로 기리게 하는 것은 더욱이 안 된다. 대한민국의 육군사관학교는 자유민주주의 나라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우리 육군의 장교를 육성하는 군(軍)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