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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의 시각

우크라이나 전쟁 1년, 어떻게 볼 것인가

우크라이나, 국가수호 의지와 正體性의 중요성 보여줘

글 : 임명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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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기독교 문명과 전통 가치의 수호자라는 메시지 전파
⊙ 푸틴의 전쟁은 서방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체제와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
⊙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에 대한 내구성 보여줘
⊙ 우크라이나, “2014년의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 서방, 내부 결속에는 성공했으나 사우디·인도 등 끌어들이는 데는 실패

임명묵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졸업, 現 서울대 대학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재학 중.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 저서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 《K를 생각한다》
지난 1월 11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리비우에 있는 전몰자 추모비를 참배했다. 사진=AP/뉴시스
  2019년 8월 나는 일행과 함께 캅카스 산맥의 남쪽을 여행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둘러본 캅카스 여행의 종착지는 흑해(黑海)에 면한 조지아의 바투미였다. 그러나 바투미는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흑해를 48시간 동안 가로질러 우크라이나의 오데사를 향해 열흘에 걸친 우크라이나 여행을 시작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쉽지 않았다. 흑해의 험악한 파도가 전날 보드카를 잔뜩 마셔 숙취가 남은 내 머리를 더욱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인터넷도 할 수 없는 바다 위에서 이틀을 꼬박 보내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에 저 멀리 지평선이 보였다. 오데사 근교의 또 다른 항구도시 초르노모르스크였다. 이것이 나와 우크라이나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오데사, 드니프로, 자포리자, 하르키우를 거치며 우크라이나가 어떤 곳인지를 겉핥기로나마 더 체감(體感)해보고 싶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몇 달 가지도 않아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를 강타할 줄은 상상을 못 했고, 2년에 걸친 팬데믹이 마무리되어갈 무렵에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향한 전쟁, ‘특수군사작전’을 시행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여행의 기억은 감정의 거리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도시에 미사일이 떨어지고,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동상이 ‘러시아 압제의 상징’이라며 끌어내려지는 것을 보며, ‘저 도시는 내가 스쳐 지나갔던 곳이고, 저 동상은 내가 사진을 찍었던 곳’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아직도 전쟁 소식을 들을 때면 드니프로의 숙소에서 내가 안주로 사 온 소시지를 호탕하게 빼앗아 먹고 자기 것을 나누어주며 “우정을 위하여!”라고 외치던 젊은 경찰관 올레흐를 잠시나마 떠올리고는 한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크라이나에 대한 어두운 기억
 
오데사의 한 트램(노면전차) 정류장. 정류장인지 알 수 있는 표시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진=임명묵
  물론 이 나라가 나에게 ‘좋은 인상’으로만 다가왔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유라시아 역사를 전공하는 입장에서, 우크라이나는 역사의 현장과 집단 기억의 표지들로 가득한, 정말 볼 것이 많은 나라였다.
 
  하지만 국가로서 우크라이나는 분명 많은 문제가 느껴졌다. 나름 흑해의 중요 항구라는 오데사 인근의 도로는 정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서, 차를 탈 때마다 움푹 팬 구덩이에 걸려 몸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동행과 내가 탑승해야 할 노면전차 정류장에는 표지판도 하나 없었는데, 짐을 잔뜩 짊어진 할머니가 우두커니 기다리는 것을 보고 정류장임을 짐작했다. 그 노면전차는 중간중간 계속 정차하고, 그때마다 ‘깡!’ 하는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앞자리에 앉았던 일행에게 물어보니 선로를 쇠막대로 쳐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에서 흔히 서부가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동부와 남부는 부유한 편이라고 알고 있었던 나에게 이런 경험들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이곳이 소련 시절 연방 전체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받은 산업 중심지인 우크라이나가 맞나?’
 
  개인적인 인상으로는 그간 다녔던 구(舊)소련 공화국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르메니아, 조지아 중에서 우크라이나야말로 탈(脫)공산주의의 혼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우크라이나가 보여준 反轉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 같은 짧은 경험은, 전쟁 전만 하더라도 많은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이 나라를 실감 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내 사고(思考)에도 일종의 편향(偏向)을 만들어내었다.
 
  나는 탈공산주의 이후 30년째 우크라이나가 겪고 있는 정치적 분열과 혼란을 보고, 낡은 인프라와 열악한 경제 상황을 체감하며,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우크라이나가 신속히 붕괴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러시아군이 강하건 약하건, 내게는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전쟁을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실제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어 ‘특별군사작전’을 시작하니, 상황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펼쳐졌다. 러시아군은 남부 지역에서 신속하게 점령지를 확보했지만, 키이우와 하르키우 같은 주요 지역에서는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다. 오히려 우크라이나인들은 초기의 충격을 빠르게 수습하고,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를 중심으로 한 국민적 항전 여론을 결집해나갔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어가자, 러시아를 상대로 우유부단한 면모를 보이던 서유럽 국가들이나, 최악의 경우 우크라이나를 버릴 것도 각오하고 있었던 미국도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크라이나는 30년간의 대혼란에 따른 열악한 국가 역량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정체성(正體性)과 주권(主權)을 지키겠다는 국민적 열망을 통해서 국면을 반전(反轉)시킬 수 있음을 성공적으로 입증했다. 이는 나뿐 아니라 많은 관찰자를 놀라게 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반전’이었다.
 
  우크라이나는 국민들이 국가를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그 기반이 되는 민족 정체성과 국민적 서사(敍事)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다.
 
 
  우크라이나의 東西 갈등
 
드니프로시 지하철역 공사 현장. 1995년에 개업한 드니프로 지하철은 2016년을 목표로 공사를 시작했지만 2019년에도 여전히 공사는 진척이 안 되고 있었다. 사진=임명묵
  사실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문제는, 친(親)서방적인 서부와 친러시아적인 동부, 남부의 극심한 정치적 대립으로 안정적 정부가 창출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내가 보았던 30년간 낙후된 인프라도 그 정치적 구심점(求心點)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국가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사회기반시설을 보강하고, 국민들이 예측 가능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제도적 기반은 우크라이나의 오랜 동서 갈등으로 인해 형성되지 못했었다.
 
  대신에 공산주의 시절에 건설된 국가 자원을 헐값에 불하받아 성장한 올리가르히(과두 재벌)들이 국가를 쥐고 흔들었다. 푸틴의 러시아는 ‘실로비키(‘제복을 입은 사내들’이라는 뜻으로 KGB·군부 출신자들을 말함-편집자 주)’라는 정치권력 엘리트를 통해 올리가르히를 통제하고, 적어도 빠르게 국가를 안정시켰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보다는 전반적인 성적이 좋았다(대신 러시아에서는 자유주의 제도와 관행 대신에 푸틴을 중심으로 지역 유력자와 권력 엘리트에게 권력이 재분배되는 과거 제국을 연상시키는 제도와 관행이 부활했다).
 
  우크라이나의 극심한 동서 갈등은, ‘변경’을 뜻하는 우크라이나의 국명(國名)에서도 드러나듯 문명의 경계 지대에 있던 드넓은 우크라이나의 다양한 정체성을 통합할 수 있는 단일 서사의 부재 때문에 발생했다.
 
  러시아 지배의 영향력이 약하고 폴란드와 더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서부는 모스크바공국(公國), 러시아제국, 소련으로 이어지는 러시아적 역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면에 동부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오랜 기간 러시아제국과 소련의 엘리트로 활약했었고, 우크라이나인이었다가 아예 러시아인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게 된 경우도 무척 많았다. 우크라이나를 정의하는 동부와 서부의 완벽히 다른 방법론은 신생 독립 국가의 역사 서술은 물론이고 외교 정책의 방향에서도 충돌했고, 그 결과 극한의 정치적 대립과 권위의 공백이 나타난 것이었다.
 
 
  공동체의 영웅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돈바스 전쟁의 전몰자들을 추모해놓은 공간. 상단에 ‘영웅은 죽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사진=임명묵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나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분리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무척 회의적(懷疑的)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내세우는 위대한 인물의 상당수는 러시아에서 활동했고, 그들 스스로가 대(大)러시아주의자로서 제국에 충성했다. 이들을 다 지우고도 우크라이나가 국민적 서사를 쓸 수 있을까?
 
  이런 와중 잠깐 여행자로서 스쳐 지나가는 나와 달리 우크라이나 생활 경험이 있는 동행이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2014년의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실제로 그랬다. 내가 여행한 지역은 일반적으로 ‘친러시아’ 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이었는데, 그 도시들의 박물관이나 중앙공원 어디에나 2014년에 돈바스 주민들의 분리 운동과 러시아의 개입으로 시작된 전쟁의 전몰자(戰歿者)들을 기리는 상징물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러시아의 빈자리에서 새로운 국가의 상징이자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2022년이면 이미 8년 동안이나 그런 공동의 기억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2022년 전쟁 초기에 모두를 놀라게 한 우크라이나의 치열한 항전(抗戰) 의지를 보았을 때 나는 박물관에 새롭게 마련된 돈바스 전쟁의 전몰자 추모 공간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끔찍한 비극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전쟁을 통해서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향한 기나긴 방황이 어쩌면 끝날 수도 있을 것이다. 주권의 수호, 국민적 발전 등 공통의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국민들의 강력한 합의와 의지가 필수적이다. 신생 우크라이나의 혼란이 그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라 한다면, 전쟁의 비극 속에서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경험은 극한의 좌우 대립, 미국과 중국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한국에서도 공동체의 영웅을 어떻게 기억하고, 국가 수호의 경험과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도록 촉구한다. 많은 한국인이 최근 체결된 폴란드와의 방산(防産) 계약을 통해 입증된 한국의 우수한 방산업 경쟁력과 국방력에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방산업과 국방력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수호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와 공동체의 영웅을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두 번째 반전은 러시아가 보여준 상당한 내구성(耐久性)이었다.
 
  전쟁 초기에 러시아의 진격이 멈추게 되자, 많은 이가 러시아군의 한심한 실태를 보여준다며 여러 영상을 공유하며 러시아군을 조롱했다. 게다가 무기력해 보였던 서방에서는 경제 제재를 융단폭격처럼 투하하면서, 가스비 상승을 비롯하여 자신들에게 돌아올 각종 타격을 감수하면서까지 러시아를 세계로부터 고립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러시아에서는 맥도날드가 철수한다는 소식에 시민들이 마지막으로 맥도날드를 먹겠다고 길게 줄을 늘어서는 모습이 등장했으며, 물건이 동난 마트의 사진이 인터넷을 장식했다. 사람들은 자원 수출에만 의존하는 러시아가 자신들의 경제적 취약성을 노출하게 될 것이고, 전쟁 동력도 상실하면 푸틴 정권도 위기에 직면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삶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2022년 러시아 여행 당시 카잔의 짝퉁 맥도날드 ‘프쿠스노 이 토치카’ 앞을 메운 손님들. 사진=임명묵
  나는 그런 상황에서 방학을 맞이하여 러시아를 여행해보기로 결심했다. 이번에도 3년 전에 우크라이나를 같이 방문했던 일행과 함께였다. 둘 다 소련 현대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여행의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특수군사작전’ 이후 러시아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다는 의지도 중요한 동기였다.
 
  한국에서 출발하여 러시아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직항이 끊긴 관계로 나는 두바이를 통해서 모스크바 도모데도보 공항으로 들어갔는데, 입국 심사에서 “3년 전에 우크라이나는 왜 갔나?”라는 질문을 들었을 때 순간 몸이 굳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들어간 뒤에 본 모스크바의 모습은 밖에서 얘기되는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도로 중간중간에 ‘러시아의 영웅에 영광을’이라면서 전쟁 영웅들을 홍보하고 있는 것 외에는, 전쟁의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 시기는 7월과 8월이라, 우크라이나의 대반격 이후 떨어진 부분동원령 이전이었음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마트에는 물건이 가득 쌓여 있었고, 물가가 다소 오른 것 외에는 실질적 변화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코로나19 이전에 러시아에 갔을 때는 볼 수 없었던 모바일 뱅킹과 실시간 계좌이체, 카드 결제의 보편화가 눈길을 끌었다. 마스터카드가 정지되었던 관계로 나는 이런 인프라를 전혀 쓸 수 없었지만, 러시아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미르페이를 바탕으로 무현금(無現金) 사회를 향한 혁신에서 꾸준한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수도이자 중심으로서 특별히 관리되는 도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달 가까이 여행을 하면서 모스크바 이외에도 8개 도시를 방문하며 여러 러시아인과 얘기를 했는데, 그들은 일관되게 “삶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라고 증언했다. 실제 도시의 풍경도 모스크바와 다를 것은 없었다.
 
 
  러시아의 내구성
 
  나는 이 여행을 통해서 우크라이나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것만큼이나 러시아도 내구성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의 함의는 생각보다도 더 큰 것이다. 서방은 냉전 이후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제외하면 경제 제재를 통해서 자신들의 외교적 입장을 관철시켜왔다. 그런데 러시아가 융단폭격급 제재로부터 생존에 성공한다면, 서방은 기존에 익숙해 있던 방법론을 크게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게다가 러시아와 서유럽, 나아가 세계경제 사이에 형성된 긴밀한 연결을 생각했을 때,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덜 타격을 받고 서유럽이 훨씬 큰 타격을 받는다면 제재의 장기화는 오히려 서방의 목을 조르게 된다. 푸틴이 노리는 것도 아마 정확히 이것이었을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인의 항전으로 인하여 군사적 성과를 제한적으로 거둬도, 적어도 이제 경제 제재를 통해 러시아를 고사(枯死)시키겠다는 계획을 틀어지게 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꾸준히 소모시키고, 서유럽의 정치적 의지를 고갈시킨다면 장기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푸틴, 대륙주의로 경제 제재 피해
 
  푸틴은 2014년 크림 합병과 돈바스 전쟁을 본 서방이 경제 제재를 가하자 제재에 노출된 러시아가 얼마나 취약해지는지를 실감했다. 지금 러시아가 보여주고 있는 내구성은 푸틴이 서방의 제재를 돌파하고자 8년간 노력을 기울인 끝에 나타난 결과물이다. 푸틴은 제재를 견디기 위해서 크게 두 가지 전략을 추구했다.
 
  첫 번째는 경제적 차원에서 대륙주의(大陸主義)를 추구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과거 제국 시대부터 서구에 자원을 판매하고 받은 돈으로 기술과 자본재(資本財)를 수입하여 경제를 운영하고 근대화를 추진했었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이 관계가 더욱 깊어졌다. 서로 아무리 험악한 말을 주고받아도 서방은 에너지 판매 대금을 지불하고, 러시아가 조달할 수 없는 고부가가치 자본재를 공급하는 핵심 파트너였다. 서방에서 경제 제재를 통해 러시아를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푸틴은 2014년 이래로 서방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자원 판매처는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국가로 대폭 확대했다. 게다가 중국이 시진핑(習近平) 정권 시기에 제조업 독립을 추구하고 서방과 탈동조화(디커플링)에 나서면서, 중국이 반도체와 기계를 비롯한 자본재의 주요 공급처로 부상했다. 중국 입장에서도 러시아의 개방은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제해권(制海權)을 대륙의 연결망을 통해 우회(迂廻)하겠다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과 완벽히 부합했다.
 
  그리하여 서방의 경제 제재가 처음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자금과 상품을 확보하는 경로를 개척할 수 있었고, 전쟁을 계기로 오히려 서방을 통하지 않는 자체적인 공급망을 더욱 확대하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반면에 서유럽은 러시아가 무기화한 자원 공급망을 대체할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하는 일에 아직도 난항을 겪고 있다.
 
 
  러시아의 이념전쟁
 
작년 8월 23일 폭탄 테러로 사망한 딸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는 알렉산드르 두긴. 사진=AP/뉴시스
  러시아의 두 번째 전략은 이념, 사상적인 공격을 전면적으로 전개하는 것이었다. 2010년대 들어 서방에서는 ‘서구 문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심각할 정도로 격화되었다. 계몽주의, 인권, 자유를 서구 문명의 핵심 가치로 삼는 것에는 다들 이견(異見)이 없지만, 문제는 그 해석이었다.
 
  주로 좌파 진영에서는 인권과 자유의 개념을 더욱 급진적으로 해석하여, 모든 사회적 소수자(少數者)가 차별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과거 서구 역사의 위인들을 차별주의자라고 격하하고, 대중문화에서 평등주의 메시지를 삽입하는 문화운동을 전개했고, 차별적 언행을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하는 등 국가 권력까지도 동원하기 시작했다.
 
  우파 진영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접근법은 서구 근대 문명의 기반이 되는 그리스, 로마의 사상과 기독교 정신까지도 형해화하는 것이라 반발했고, 특히 좌파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운동이 문화적 전체주의(全體主義)로 흐르고 있다고 경고했다.
 
  푸틴은 서구의 문화 전쟁에 정면으로 파고들어서, 러시아가 문화 좌파들에 의해 무너지고 있는 ‘기독교 문명의 마지막 수호자’라는 선전을 하기 시작했다. 푸틴의 이데올로그들은 러시아는 여전히 기독교 문명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치, 특히 가족 가치가 국가에 의해 장려되는 국가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특히 서구에서 커다란 논쟁을 야기하고 있는 성(性)소수자 문제를 공격하며, 서구는 전통적인 남성과 여성의 구분 자체를 파괴하고 있는 ‘탈근대의 혼돈’이 지배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비난했다.
 
  알렉산드르 두긴을 비롯한 러시아의 이데올로그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서, 탈근대의 혼돈은 서구 자유주의의 논리적 귀결이고, 러시아는 기독교 문명을 넘어 전 세계 전통 가치의 수호자라는 식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파(傳播)했다.
 
  서구의 이념적 내분과 정체성 논쟁을 날카롭게 파악한 러시아 이데올로그들의 주장은 실제 서구의 보수 우파들, 특히 계몽주의와 근대성의 합의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극우파(極右派)들 사이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기도 했다. 러시아는 이들을 지원하여 자유주의에 근거한 서구 국가 간의 연대(連帶)를 해체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구의 지원 여론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는 다행스럽게, 실제 서구 내부의 문화 전쟁의 전개와는 별개로 서방 국가들의 우크라이나를 향한 지원 의지는 큰 타격이 없었다.
 
  ‘극우파’라는 비난을 받으며 집권한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가 대표적인 예(例)이다. 그는 실제 가족 가치의 강조 등 러시아 이데올로그와도 통할 수 있는 메시지를 여럿 내세웠기에, 그가 러시아에 동조하며 우크라이나 지원을 축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심심찮게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침략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계속 규탄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겠다고 말하며 우려를 불식(拂拭)시켰다.
 
  사실 러시아의 선전이 더 크게 효과를 얻은 곳은 기독교 문명의 바깥인 비서구 세계였다. 이슬람을 믿는 중동 국가들이나, 힌두교를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고자 하는 인도, 시진핑의 독재가 계속 강화되고 있는 중국 등지에서는 최근 서구의 ‘정치적 올바름’이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마저도 위협하고 있다는 반발이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구에 맞서 전통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러시아의 선전은 이들 국가 여론에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양새다.
 
 
  두 가지 반전
 
  2023년 1년을 꼬박 채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생각 외로 장기화되는 추세다. 전쟁의 장기화에는 두 가지 ‘반전’이 작용했다.
 
  첫째 반전은 대표적 취약 국가였던 우크라이나가 8년간의 돈바스 전쟁을 통해 국민 의식을 만들고, 그를 바탕으로 항전 의지를 굳히면서, 러시아의 최초 공세를 격퇴하면서 벌어졌다.
 
  둘째 반전은 러시아가 크림 합병과 돈바스 전쟁 이후 8년간 대륙 국가들 간의 교역망을 구축하고, 서구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상적 경쟁에 나선 결과, 어마어마한 경제 제재를 버틸 수 있는 내구성을 확보했음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니 전쟁 2년 차와 그 이후의 향방은 서로가 이 반전을 어떻게 뒤집느냐에 따라서 갈릴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군사적으로 우크라이나를 계속 소모시키고, 서구에 경제적 부담을 계속 안겨서 서방의 저항 의지를 고갈시켜야만 한다. 서방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내부적 결속을 강화하고,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 길항(拮抗)하는 국가들을 최대한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와 러시아의 대륙주의 연계를 끊어야만 한다.
 
 
  서방의 실책
 
  전쟁 1년 차를 돌아보면 러시아의 침략은 서방 진영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 그 효과는 확실히 제공한 것 같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서방이 비서방 국가들을 러시아 편에서 떼어내어 서방 진영에 협조하도록 만드는 데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미국과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동반자로 삼고자 노력했던 인도는 러시아 석유를 구매하지 말라는 미국의 성급한 요구에 오히려 분개하면서, 서방과의 관계를 재고(再考)하고 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 수 있는 지정학적 중추 국가인 튀르키예는 이제 공공연히 서방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다. 미국의 가장 큰 실책(失策)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벌어졌다. 에너지와 안보에 있어서 미국의 가장 친밀한 협력국이었던 사우디와의 관계는 바이든 정부가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카슈크지 살해 문제를 걸고넘어지면서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사우디는 결정적인 순간에 러시아 제재의 핵심인 에너지 문제에서 미국과의 협조를 거부했다.
 

  사실 서방이 자신과 중국·러시아 사이에서 등거리를 구사하는 국가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이유는 약점을 관리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라는 ‘싸움의 정석’을 구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소(美蘇) 냉전 시대에 서방은 경제적으로 공산권을 압도했고, 많은 비서구 국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서방은 경제적으로 상대적 우위에 있긴 하나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상황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 제재를 통해서 상대를 굴복시키겠다는 접근법은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려움이 드러나고 있다. 등거리 국가들은 서방만큼이나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경제적 이득을 얻고 싶어 해, 서방의 요구에도 대륙 국가들과의 협력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시화된 등거리 국가들이 과거에는 서방의 동맹국이나 협력국이었음을 생각하면 서방 입장에서는 더욱 뼈아픈 일이다.
 
 
  ‘양날의 칼’
 
  한편 러시아, 나아가 중국까지 포함했을 때도 서방이 여전히 지니는 강점은 체제의 성격을 비롯한 사상적인 면에 있었다. 자유, 인권과 국가 주권에 대한 보호는 서방이 계속해서 내세우고 있는 도덕적 권위의 원천이다. 비록 미국이 여러 군사 개입과 논란이 있는 전쟁도 치렀지만, 무력(武力)을 통해 국경을 바꾸지는 않았다는 것도 정당성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반면에 러시아의 주변국은 러시아가 비밀공작과 에너지 자원 등을 통해 자국의 선거에 개입하고, 자국 내의 러시아인 인구를 빌미로 주권을 침해한다며 불안해했다. 중국의 주변국도 남중국해와 대만 등을 보면서 마찬가지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 지점에 천착하여, 미국이 보편적 인권을 통해 러시아와 중국을 압박하고 주변국을 서방의 협력국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전략을 설계했다.
 
  문제는 이런 시도가 성급하게 이루어진 결과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는 데 있다. 현재 서구에서는 자신들 체제의 근간인 자유나 인권 같은 가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의 합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갈등이 격화되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주로 좌파적 해석에 바탕을 둔 자유와 인권 해석을 무리하게 강조할 때, 서방과 반서방 진영 사이에서 고민하는 국가들은 중국과 러시아만큼이나 서방에도 반감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중국과 러시아가 자신의 인접국을 향해 제국적인 야심을 바탕으로 내정간섭을 한다면, 서방은 문화적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정체성과 문화 정책에서 내정간섭을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카타르 월드컵 당시에 불거진 성소수자 인권 문제도 자유와 인권이라는 과거 서방 최대의 자산이 이제는 서방에 대한 선망과 반발을 모두 불러일으키는 양날의 칼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푸틴은 바로 이 양날의 칼이 서방을 계속해서 상처 입히기를 원한다.
 
 
  우크라이나가 서방에 주는 교훈
 
  그러니 푸틴의 전쟁은 서방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체제와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1989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자유주의의 최종적 승리인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이래로, 서방은 자신들의 가치가 근본적으로 위협받을 것이라는 걱정 없이 단순히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둘러싼 논쟁을 계속했다.
 
  문제는 서구적 자유와 인권 관념에 동의하지 않는 국가들이 부상(浮上)하고 있었고, 그들이 칼날을 계속 갈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서방이 이제 다시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나서야 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대체 어떤 자유와 인권을 지킬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이 문제가 합의가 되지 않는다면, 서방과 러시아, 중국 사이에서 오가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을 서방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으며, 러시아는 그 논쟁을 이용해 서방 내부의 분열을 계속해서 확대하고자 골몰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중요한 참조가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30년 동안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분열했고, 그 결과 내분(內紛)과 전쟁까지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일단 한 번 완전한 합의를 이루자, 그들은 다시 뭉쳐서 강대국을 향한 처절한 투쟁에 함께하게 되었다.
 
  서방은 러시아, 중국과 맞서기에 앞서 자신들의 내부적 분열을 극복하고, 계몽주의에서 시작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만들고자 하는 사회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선언해야 한다.
 
  물론 현재 서방 내부의 격렬한 문화 전쟁과 정치적 갈등 양상을 생각하였을 때, 이 시도는 단기간에는 오히려 엄청난 갈등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에이브러햄 링컨이 말하였듯이, “분열된 집안은 살아남을 수 없다”. 서방이 다시 자신의 가치를 합의하고 분열을 극복하였을 때야 서방은 더욱 확대될 수 있을 것이고, 서방의 도전자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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